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주요활동
종합자료실
커뮤니티
정회원 가입신청
시민게시판
가입안내
후원안내
협회소개
가입안내
후원안내
ㆍ종합자료실 > 생명윤리자료실
생명윤리자료실
전체보기 (82) 기독교 생명윤리 (21) 생명윤리와 법 (5) 생명(배아)복제 (6) 줄기세포 연구 (5) 유전자 (1)
생명의료윤리 (1) 기타 (43)

ㆍ게시물 : 21 전체 : 82 블로그형   웹진형   앨범형   게시판형  
번호 카테고리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641967869_0.851023.hwp   작성자 : 관리자 2022-01-12 15:11:09
낙태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겠다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통령후보 공약에 반대하는 성명서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성명서>

 

낙태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겠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통령후보의 공약에 반대합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통령후보는 피임과 임신 중지에도 건강보험을 적용하겠다는 공약을 20211227일에 발표했습니다(소확행 공약 제33).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낙태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겠다는 이재명 대통령후보의 공약에 반대합니다.

 

임신 중지란 약물을 사용하든 외과적 수술을 하든 태중의 태아를 죽이는 낙태입니다. 살인입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데 앞장서야 하는 국가가 낙태에 건강보험을 적용하여 태중의 생명을 죽이는 것을 지원하거나 협조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임신 중지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겠다는 공약의 이면에는 태아를 인간 생명으로 보지 않는 반()생명적 인간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인간이며,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태아는 수정되는 순간부터 인간으로서 생명권을 가지며, 태아의 생명권은 그 어떤 권리보다 우선하는 절대적인 권리입니다. 아무도 태아의 생명권을 박탈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엄마조차도 자기 결정권이라는 이름으로 태아의 생명권을 박탈할 수는 없습니다.

 

사문화되었던 낙태죄마저 2019411일에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낙태에 대한 심리적, 법적 부담이 제거되었는데 낙태에 건강보험을 적용하여 경제적인 부담까지 제거한다면 낙태의 문을 활짝 열어주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피임을 소홀히 하게 되고, 더 많은 사람이 낙태할 것입니다. 낙태 시술 비용에 대한 경제적 부담이 조금이라도 있어야만 사전에 철저하게 피임을 하고, 낙태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게 됩니다.

 

낙태 시술을 시도한 사람 중에 96%가 사회경제적인 사유로 낙태를 합니다(2005년 김해중 보고서). 그러기에 정부는 낙태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근시안적인 정책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임산부로 하여금 낙태를 하도록 압박하는 사회경제적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낙태를 차단하는 생명보호정책을 추진해야 합니다. 사회경제적인 사유로 낙태하는 사람에게 느닷없이 낙태를 권하고 지원함으로써 태아의 생명권을 박탈하는 것은 적절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리고 낙태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앞장서서 피임교육과 낙태의 실상과 문제점을 알리는 계몽을 해야 합니다. 흡연의 문제점을 알리는 공익광고를 통해서 흡연율을 단기간에 줄인 것처럼 낙태 문제도 이런 방법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이재명 대통령후보는 소확행 공약 제8을 통해서 영아살해죄와 영아유기죄와 아동학대범죄의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했는데(2021121일 발표), 이 공약과 낙태에 건강보험을 적용하여 지원하겠다는 공약은 상호모순입니다. 영아와 아동의 인권과 생명권을 존중하여 이들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기준과 정신은 태아의 생명을 지키는데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2022. 1. 12.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상임공동대표 이상원

작성자 : 이상원 2015-06-19 13:23:58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은 왜 하는가? (2005. 11. 24.)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은 왜 하는가?


이 상 원(총신대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교수)

발표일: 2005. 11. 24.

제3회 생명윤리선교회 세미나


 2001년 벽두부터 한국사회는 배아복제문제를 둘러싼 생명윤리논쟁에 휩싸였다. 수정란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독립된 인간생명체로 본다는 인간관을 견지한 기독교계는 배아복제가 실현될 경우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지난 3월 기독교생명윤리위원회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범교회적인 대응을 시작했다. 기독교생명윤리위원회의 대응은 배아복제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안락사, 사후피임약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이어졌다.
 기독교생명윤리위원회의 대응이 시작된 후 반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간의 기독교생명윤리위원회의 대응의 결과를 점검해 볼 때 큰 열매를 거두고 있다는 뿌듯한 보람을 느끼기 보다는 한마디로 힘에 겹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생명윤리위원회를 비롯한 기독교생명윤리운동 단체들의 헌신적인 수고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기대하는 만큼 쉽게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마련한 생명윤리기본법 시안은 배아복제를 반대하면서도 잉여배아처리문제에 있어서는 기독교가 동의할 수 없는 조항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명공학계에서는 이 기본법 조차도 생명공학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피임약의 경우에도 사후피임약시판반대를 주장해 온 진영의 설득력있는 논리전개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사후피임약시판을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3대1로 우세하다. 이같은 추세는 뇌사, 안락사, 낙태, 인공수정문제 등에까지 파급되었고 또 파급될 전망이다. 곧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은 도덕적으로 사회전체를 설득하는 일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입법화의 단계에서는 실패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그러나 비록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이 기대했던 것만큼 열매를 거두지 못했고, 또 그 전망이 밝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은 여전히 의미가 있는 운동이며, 또 결과 때문에 지나친 실망에 빠질 필요는 없는데, 그 이유는 두가지다.
 (1)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의로움을 추구하는 운동은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성공적인 결과를 거둘 때 보다는 소수의 입장에서 의도했던 열매를 거두는 일에 실패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이 운동은 반드시 열매를 거두었다. 기독교운동은 아니지만 생명운동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 히포크라테스 서약운동도 소수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이 서약이 등장해던 당시의 희랍사회는 낙태, 기형아유기 등이 편만했고 독약을 먹고 자살할 때 의사가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 널리 인정되던 사회였다. 당대 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플라톤학파, 견유학파, 스토아학파는 태아살해는 이상국가의 제도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했고, 플라톤과는 논적의 관계에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도 공동체의 적정인구유지를 위해서는 낙태가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히포크라테스서약운동은 이같은 상황 속에서 절대적인 소수의 개혁운동으로 시작했는데, 이 개혁운동이 당대에는 보편적인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점차 그 진가를 인정받아 향후 2000년이 넘는 기간동아 의료윤리의 기틀을 잡아주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오늘날 기독교생명윤리운동도 이런 긴 안목을 가지고 당장 눈 앞에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초조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100년 앞을 내다 보면서 그 초석을 놓는다는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진행해 나갈 필요가 있다.
 (2)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은 두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하나는 도덕적인 차원에서 생명을 경시하는 의료관행을 비판하고 생명을 증진시키는 의료관행을 도덕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생명을 경시하는 입법에 대하여 비판하고 생명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관련입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 두 운동은 모두 교회 밖에서 전개되는 운동들이다. 그러면 교회 밖에서 전개되는 윤리적이고 입법적인 운동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그 목적은 악이 크게 발현하여 사회전체를 사람이 살 수 없는 무질서한 복마전으로 전락시키는 것을 제어하는데 있다.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은 어떤 이상을 현실 속에서 완전히 구현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이미 기독교인들 안에 임재해 있고, 기독교인들은 이미 그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며, 이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장차 이 땅위에 완전한 모습으로 임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다만 그 나라가 우리 안에 있음을 증명하고, 그 나라의 빛을 세상을 향하여 비추고, 세상사람들을 그 나라로 초청하는 일을 할 뿐이다. 사실상 기독교인들이 악의 사회적 발현을 억제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면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셈이다.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은 입법의 차원에서까지 바라던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에도 이 운동을 계속하는 것 만으로도 이미 악에 대한 견제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은 악을 견제하는 소극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만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은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적극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는 바, 필자는 그 의의로서 세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1)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의 적극적 의의 가운데 하나는 이 운동이 이 땅위에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사회적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사회정의란 무엇인가? 미국의 사회철학자 존 롤즈(John Rawls)에 의하면, 사회정의는 사회적 최저선(social minimum)을 통하여 사회 안의 소외계층의 인간다운 삶을 우선적으로 보장한 후에 창의력과 경쟁을 허용하여 재화를 획득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롤즈는 사회내의 소외계층의 보호를 정의의 최우선과제로 보았는데, 이와같은 롤즈의 입장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정의의 내용과도 맥이 통한다. 하나님은 힘이 없고 연약한 계층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지신다. 하나님이 아말렉족속을 천하에서 도말시켜 버리라고 명령하신(신25:17-19) 이유는 이스라엘이 행군하는 중 아말렉 족속이 이스라엘의 피곤함을 틈 타 뒤쳐진 약한 자들을 쳤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있는 나그네와 과부를 착취한 전쟁포로들을 선대하도록 명령하고 있는 모세의 율법이나 고아와 과부를 착취한 죄를 일관성있게 지적하고 있는 선지서의 말씀들, 그리고 99마리의 성한 양을 우리에 그대로 두고 한 마리의 길잃은 양을 찾아서 떠나는 하나님의 모습 등은 가장 약하고 비천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오늘날 첨단의학과 생명공학의 거대하고 강력한 기술과 힘 앞에서 가장 힘없이 희생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사회의 소외계층의 가장 밑에 바로 배아들, 태아들, 말기질환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생존권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생명윤리운동은 곧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2) 신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은 인간은 이 세상의 창조주가 아닌 청지기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세계 안에 두신 창조의 질서를 보호관리할 문화적 사명을 맡은 자라는 세계관의 빛 안에서 세계와 사회를 진단하고 해석하는 세계관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오늘날 기독교생명운동의 배경에는 하나님은 창조주요 인간은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이념이 깔려 있고, 이에 대응하는 의료 및 생명공학의 관행들 배후에는 진화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세계관과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이요 창조자가 될 수 있다는 자율적 인간관이라는 이념이 깔려 있다. 생명문제에 관련된 모든 담론과 토론이 언제나 평행선을 달리다가 결과적으로는 의견의 차이를 확인하고 매듭지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배아복제 문제에 대해서 일반생명공학계는 생명체가 진화의 과정에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류(類)의 생명체로 자기발생을 거듭해 왔으며, 진화의 가장 최근단계인 인간이라는 종(homo sapiens)이 진화된 지능을 이용하여 스스로 유전자를 조작하여 더 나은 환경적응력과 생명력을 지닌 새로운 종으로 태어나는 것은 기나긴 진화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과정이라고 해석한다. 이런 해석에 근거하면 배아복제를 포함한 유전자조작이 합리화된다. 진화론적 관점은 태아의 신분에 관한 판단에도 영향을 끼친다. 태아는 원래 인간이 아니고 다만 잠재적인 인간이었는데, 자연적인 발전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인간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간관은 인간의 생명의 창조는 하나님의 고유한 활동의 영역이요, 인간이 자의적으로 간섭해서는 안되는 규범적 창조질서로서 인간은 이 질서의 틀을 깨뜨려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명은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신체를 만드신 후에 하나님 자신의 주체적 결단에 의하여 숨을 불어 넣으시는 그 한 순간에(창2:7) 창조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뿐만 아니라 일반생명공학계나 의료계는 인간의 생명은 인간 자신의 소유이며, 따라서 인간의 생명의 처분권은 인간 자신 이외에 다른 어떤 존재도 행사할 수 없는 인간고유의 권한이라는 관점을 견지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에게 그 절대적인 소유권이 있고, 인간에게는 다만 그 생명을 유지, 보호, 증진시키는 관리자의 사명만이 있음을 인식한다.
 기독교적 인간관과 일반의료윤리 및 생물학의 인간관이 다시 첨예하게 대립하는 영역은 인간의 죽음에 관한 해석의 영역이다. 안락사를 쉽게 허용하고, 자살에 대하여 허용적인 입장을 취할 뿐만 아니라 뇌사를 인간의 죽음의 시점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판단들의 배후에는 유물론적인 인간관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유물론적 인간관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현상은 신체내의 신경세포 특히 뇌신경세포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며, 뇌신경세포의 작용이 중지되면 정신현상은 사라져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원의 스위치를 켜면 전깃불이 들어왔다가 스위치를 끄면 전깃불이 나가 버리는 것과도 같이! 따라서 뇌신경이 죽으면 사실상의 생명의 존재 자체가 소멸되어 버리고, 한번 소멸되어 버린 후에는 어떤 삶의 세계도 있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와같은 유물론적인 인간관의 입장에서는 구태여 안락사나 자살을 허용해서는 안될 이유가 없어진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인간관은 뇌의 기능정지를 포함하여 어떤 신체기능의 정지도 인간의 정신현상을 소멸시키지 못하며, 신체기능이 소멸되고 신체가 해체되어도 영혼은 존재를 계속하며, 사후에는 현세에서의 모든 삶의 궤적에 대하여 정밀한 심판과 평가를 받는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따라서 뇌사가 육체적 죽음의 시점으로 인정될 수 없고, 안락사와 자살이 허용될 수 없다.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을 전개할 때 기독교인들은 이와같은 거대한 시대적 이념의 대결구도 안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3)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은 첨단의료 및 생명공학의 관행들이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범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대하여 경고를 발하고, 가능한 한 입법적 차원에서도 견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이 운동의 의미는 여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은 사회관계의 틀 곧 사회의 관계적인 내부구조(infrastructure)가 붕괴되어 사회가 모래알의 집합과도 같은 군집(aggregate)으로 전락되는 것을 차단하고 사회구조의 유기적 연대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역할에 참여한다. 유전자조작에 의한 인간의 생명의 인위적 조작이 허용될 경우 사회적 관계의 붕괴가 가속화될 수 있다. 인간의 자기복제로 인한 정체성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물론, 유전자조작이 우생학적으로 원용될 경우 우월한 지능과 외모와 힘을 갖춘 신인류(new humanity)와 열등한 자연적인 구인류(old humanity)로 사회가 계층화되어 심각한 사회분열을 겪게 될 것이며, 유전자판독이 남용되어 미래의 질병을 예측하기 시작할 때 취업이나 의료보험체계에서 약자를 차별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낙태가 넓게 허용될 경우 인간의 생명을 죽이는 비인간적인 결과는 차지하고라도 성질서의 문란과 이로 인한 가족관계의 균열, 문란한 성교에 관련된 AIDS, 매독 등의 전염성 질환의 증가는 불을 보듯 뻔하며, 생존능력이 열악한 노인들이나 말기질환자들이 안락사의 대상으로 쉽게 전락함으로써 가족간의 유대관계가 붕괴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을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한 제안을 한가지 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기독교인들은 이중적인 연대성 안에 설 줄 알아야 한다.
첫째로, 기독교인들은 “모든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는 사도행전17장26절 말씀의 빛 안에서 볼 때 온 인류와의 혈통적 연대관계 안에 있다. 혈연적인 의미에서 온 인류가 기독교인들의 형제와 자매요, 따라서 온 인류의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라고 볼 때 사회 전체의 문제는 곧 기독교인들의 문제가 된다. 이때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도 공유하고 있는 마음의 도덕법(롬2:14,15)에 근거하여 대화와 담론과 비평을 전개한다. 이때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이 견지하는 높은 도덕적 표준을 관철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 무리하게 그 표준을 관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믿음을 전제한 자들에게 주어진 표준들을 적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기독교인들은 또 하나의 연대성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지체가 되어 있는 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영적인 연대성 안에 있다. 영적인 연대성 안에 있는 지체들에 대해서는 기독교적 세계관, 인간관, 윤리관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훈련을 실시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입장을 갖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이 직면한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적 세계관, 인간관, 윤리관에 있어서 의식을 같이 하며, 넓고 깊은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의 취지와 운동방향에 대하여 이심전심으로 말이 서로 통할 정도가 되어 있어야 그 바탕에서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이 탄력을 받아서 힘있게 도약할 수 있는데, 교회 안에서 기독교적 세계관, 인간관, 윤리관에 대한 체계적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데다가 많은 교회들이 교회정치적인 문제들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 때문에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이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은 사회적 차원에서 도덕적이고 입법적인 비판과 개혁의 노력을 전개함과 동시에 이 운동의 힘의 원천이 되는 교인들의 교육을 위한 정책마련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작성자 : 박상은 2015-06-12 13:49:12
현대의학의 위기와 생명윤리

 

 

현대의학의 위기와 생명윤리



박상은

(출처 : http://sangeun.co.kr)


목 차

I. 들어가는 말

II. 현대의학의 위기와 21세기 전망

1. 위기에 처한 현대의학

2. 다가올 미래의학 의 문제

3. 성경적 의학 - 전인건강

1) 전인건강이란?

2) 새로운 제3의학과 성경적 의학

3) 성경적 의학의 패러다임

III. 도전받는 생명윤리

1. 생명의 시작과 관련된 윤리적 문제들

2. 생명의 마지막과 관련된 윤리적 문제들

3. 생명기간 중에 야기되는 윤리적 문제들

4. 국내 기독교 생명윤리운동의 현황과 전망

1)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의 역사

2)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의 현황

3)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의 21세기 전망

IV. 맺는 말



I. 들어가는 말

우리는 생명윤리 실종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수년 전 경춘가도에서 유흥비 몇 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일가족을 무참히 죽이고 어린 딸은 살아있는 채로 생매장한 끔찍한 사건이 있은 후로 살인 공장을 차려놓고 닥치는 대로 생명을 살해한 지존파, 이들과 경쟁해 온 온보현파, 40대 여인을 염전 밭에 생매장한 막가파 등이 신문에 오르내리며 이제 웬만한 사건은 뉴스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오늘 우리 역시 점차 생명 경시 풍조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암매장 당하는 소녀의 절규 속에서 우리는 낙태되는 태아의 비명을 들을 수 있으며 토막 살인된 주검을 통해 갈기갈기 찢겨진 어린 생명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한 형법학자는 이런 끔찍한 살해사건은 이미 낙태술로 오랫동안 습득되어지고 반복된 범죄의 행위가 바깥으로 표현된 사회 현상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렇듯 우리가 소홀히 여기는 생명과 관련된 윤리 문제들―인공 유산, 여아살해, 장기매매, 안락사―등이 곧 이어 성문란과 생명경시 풍조를 조장하고 급기야 폭력과 살인을 위시한 각종 사회 문제를 불러일으켜서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종말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한편, 의학의 발전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새로운 기술이 채 정립되기도 전에 다음 기술이 임상에 도입되면서 이를 윤리적으로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시험관 아기를 비롯한 불임치료, 자신의 입맛대로 카탈로그에서 원하는 타입의 정자와 난자를 살 수 있는 세상, 태아 세포 이식술, 동물의 장기를 이식하는 이종이식, 장기수급이 부족해서 그 대책으로 등장한 뇌사문제, 환자의 자살을 도와주는 의사의 안락사 시비, 복제 양으로 야기된 인간 복제논란, 모두가 의료인 한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는 전문적인 윤리문제들이다.

지난 1998년도는 IMF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모든 것을 경제적 논리로만 설명하려는 분위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 마저도 별다른 대안을 내어놓을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 실직을 당한 아버지들은 거리를 방황하며,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집을 나선 주부들은 유흥가의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경제적 이유로 이혼이 급증하며 아이들은 쉽사리 가출하고, 고아원과 양로원에는 버려진 아이와 노인들로 벌써 만원이다. 돈을 위해서라면 어린 자식의 손가락이라도 자를 수 있고, 자신의 발도 도려낼 수 있는 무서운 세상이다. 그 와중에 세계 최초의 인간복제실험이 이 땅의 병원에서 처음으로 자행되었다. 수술실 한 편에서는 신생아를 살리기 위한 수술이 한창이고, 그 옆 방에서는 7개월 된 아기를 낙태시키는 수술이 동시에 진행된다. 실로 정신분열증의 혼돈된 사회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무심코 행하는 행위 뒤에는 반드시 이를 뒷받침하는 사상적 배경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윤리적 기준과 행위를 결정하게된다. 이 세상에는 많은 가치와 세계관이 존재하지만 다 상대적이며 변하는 것들이다. 오직 변하지 않는 절대적 기준은 성경이며 변치 않는 하나님, 성경 말씀만이 우리의 유일한 윤리적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II. 현대의학의 위기와 21세기 전망


1. 위기에 처한 현대의학

이시즘에 우리가 최선의 것이라고 믿고있는 현대의학의 문제점들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째로 현대의학은 수치화할 수 있는 측정가능한 자료만을 치료의 기준으로 사용한다. 보다 중요한 인격적인 부분은 소외되어있는 것이다. 기쁘다거나, 살고 싶다거나 사랑한다는 마음은 치료의 데이터로 이용되지 않고 있다.

둘째로 의학이 너무 세분화되고 미시화되어 전체를 보지 못한다. 수십가지의 전문과목으로 나뉘어지고, 각 전문과목 역시 다양한 특수과목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가령 내과도 10개의 분과로 나뉘어지고, 이 중 소화기내과라면 또 위, 식도, 간, 담도, 대장 등으로 나뉘어지고, 간 중에서도 만성간염 전공 등으로 세분화된다. 진료의 대상이 장기, 조직, 세포, 분자생물학 등으로 깊어짐으로 나무는 보나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현미경적 관점과 아울러 거시적으로 몸 전체를 바라보며, 정신과 영혼, 가정과 사회, 국가, 지구환경, 온 우주까지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진료의 대상이어야 한다.

셋째로, 지나치게 기계중심적이다. 현대의학은 값비싼 의료장비들과 고가의 검사기구들에 의존하고 있다. 과거에는 조그마한 집에서 성심성의껏 환자를 돌보면 명의가 될 수 있었지만 오늘날은 명의가 되기 위해서는 첨단장비들이 구비된 대형병원에 근무하며 매스컴의 각광을 받을 때 가능해진다. 이런 병원에서 수련받은 의사들은 시설이 초라한 무의촌에서는 제대로 진료를 해내지 못한다. 환자와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먼저 검사부터 시행하려는 잘못된 습관에 길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기계화된 현대의학은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보기보다는 물질적인 육체로 환자를 대하게 오도하고 있는 셈이다.

넷째로 이런 고가의 첨단 기계화는 병원의 대형화를 불러왔고, 대부분의 재벌이 대형병원을 설립하여 의료시장에 진출하여 병원은 거대한 마케팅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제는 자그마한 개인의원이나 중소병원들은 서서히 몰락하고 있으며 초대형병원은 최대의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마치 대형 슈퍼마켓이 동네 구멍가게들을 몰아내는 것과 같은 현상인 것이다. 자본시장에 의해서 의료기관도 살아남는 철저한 경제원칙만이 적용되는 현실 앞에 인술은 꼬리를 감추게 된다.

다섯째로, 다양한 치료방법이 있으나 이를 올바르게 환자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이 없다. 제도화된 의료마저 양방과 한방으로 나뉘어 어느 쪽이 환자에게 더 도움이 될지, 함께 사용해도 되는지, 전혀 연구되어 있지 못해 환자들은 갈팡질팡하며, 기타 자연요법들을 비롯한 각종 민간요법, 대체요법들은 검증을 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상품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치유, 신유, 죄사함의 감격, 내적 치유와 평안 등의 영적 상태가 현대의학에서 제대로 다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얼마전 '그것이 알고싶다'에 등장한 신애 아이의 부모처럼 현대의학을 부정하고 무조건적 맹신과 안찰기도 만을 고집하는 극단이 있는가 하면, 신유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 자체를 부인하는 과학지상주의가 의학의 핵심부를 장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종 대체요법의 등장을 틈타 사이비 종교집단들이 '선'이나 '기' 치료를 빙자한 의료행위를 일삼고 있으며 이는 향후 포스트모더니즘과 탈과학화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의료의 무속화를 가속시킬 전망이다.


2. 다가올 미래의학의 문제

미래학자 피셔는 '미래의학'이라는 저서를 통해 21세기에 일어날 의료를 예견한 바 있는데, 2003년에는 인간의 모든 염색체의 DNA염기배열이 규명되어 40억 캐릭터 이상의 유전정보를 한 장의 디스켓에 수록하는 이른바 '유전지도(Genome Project)'가 완성되며, 2006년에는 인공장기가 실용화되어 췌장, 간장, 신장 등이 인공적으로 다량 생산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미 돼지나 송아지 등 다른 동물에 인간의 유전정보를 주입하여 인간의 장기를 생산해내는 기술은 임상에 부분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나, 생명복제기술의 발달로 인간유전자복제를 통한 장기의 동물 생체내의 대량생산은 이제 눈 앞에 다가왔다. 머지않아 식용이 아닌 장기공급용 돼지가 다량 사육되며, 유전자복제술을 도입해 인간장기를 복제생산함으로 매년 30만건 이상의 이종장기이식이 시술될 전망이다.

뿐만 아니라 65세이상의 인구가 2020년에는 12.5%를 넘어서 고령화사회로 진입하게되면서 노인의 의료비용이 증대되고, 이를 감축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안락사 논의가 더욱 활성화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도시화가 가속되어 인구의 90%이상이 도시에서 생활하게 됨으로 각종 환경문제와 정신질환들이 늘어날 것이며, 음란문화와 유흥업의 번창으로 잠시의 성적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매매춘을 비롯한 원조교제, 비아그라문화 등의 성의 상품화가 가속화될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공개는 예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문제들을 야기시키는데, 얼마전 자신의 신장을 인터넷에서 공개적으로 판매하여 최고 입찰가가 570만 달러까지 올라갔던 예가 있을 정도이다. 인간이 TV를 만들고 컴퓨터를 고안해냈으나, 어느새 인간은 그 기계문명 속에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지 않은가? 인터넷 대화방을 통한 청소년과 주부 및 성인들의 탈선은 도를 넘어서고 있으며 각박한 개인주의와 성공지향의 경쟁사회는 자살을 5대 사인의 하나로 격상시켜 놓았다.

21세기에는 지구상에 재난이 가중되면서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격차가 심화되어 더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죽임을 당할 것이다. 또한 AIDS에 비할 수 없는 새로운 신종 바이러스가 창궐하며 어떤 항생제로도 치료될 수 없는 슈퍼박테리아의 등장으로 수많은 환자들이 죽어갈 것이다. 소위 선진국에서는 노화방지와 피부를 젊게 유지하기 위해 수십억 달러를 소비하는 동안 아프리카와 북한에서는 단돈 1달러짜리 수액이 없어 수천만명이 떼죽음을 당하게 될 것으로 에측된다. 과연 의학발달을 어디까지 허용해야할 것인가?


3. 성경적 의학 - 전인건강

1) 전인건강이란?

우리는 막연히 건강을 질병이 없는 상태로 생각하지만, 세계보건기구(WHO)는 건강을 질병이 없는 상태를 넘어서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안녕한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치유 역시, 질병을 치료하는 개념에서 개인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쪽으로 발전되고 있다. 인간이 갖고있는 생리적 필요, 정신적 필요, 사회적 필요, 나아가 영적인 필요까지도 만족시키는 것이 온전한 치유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지 육체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정신적이고도 영적인 존재이며, 이러한 각 부분이 분리되지 않고 긴밀히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한 개체이기 때문이다.

가령 과거에는 위궤양이나 위염은 단순히 위장점막의 질환으로 생각되어져 왔다. 그러나 최근 의학의 발달로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얼마든지 위궤양이 생기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또한 영적인 상태가 정신과 육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남편의 잦은 외박으로 부부관계가 깨어진 아내는 정신적으로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곧이어 육체는 무기력감과 위궤양, 두통 등의 다양한 신경성질환으로 고통받게 된다. 현대의 수많은 질병은 병원균에서 뿐 아니라, 그사람의 습관과 삶의 방식(Life Style)에 기인하는 경우가 흔하다.

2) 새로운 제3의학과 성경적 의학

현대의학을 구성하는 두 개의 큰 줄기는 정통의학(Classical Medicine)과 여기에 새로운 대안으로 시도되는 대체의학(Alternative Medicine)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이 모두 소위 제도권의학으로 분류되고 있다. 서양의학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과학적 실증주의가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반면, 동양의학은 음양오행설을 비롯한 여러 동양철학에 그뿌리를 두고 있으며 서양의학은 분석적 방법으로 검증하는데 반해 동양의학은 경험적 방법으로 검증하게 된다. 이러한 검증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사용되는 제도권 밖의 의학을 대체의학이라고 부르는데, 아로마(향) 치료나 생식요법, 기요법, 명상, 요가 등 다양한 민간요법과 자연요법, 무속요법이 여기에 속한다. 오늘날 이러한 의학을 잘 융합하면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주게 되어 지금의 의학보다 한차원 다른 새로운 의학의 창출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보완의학(Complementary Medicine)'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였으며 이를 총괄하여 '제3의학'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양방과 한방 모두를 제도권의학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다양한 대체의학이 시술되고 있어 제3의학을 창출하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가지고 있어 많은 학자들이 기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제3의학을 성경적 의학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성경적 의학은 기존의 학문의 짜집기가 아닌 성경적 세계관에 근거한 새로운 관점의 의학을 일컫는다.

3) 성경적 의학의 패러다임

ㄱ. 창조와 건강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지,정,의를 갖춘 인격적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상태, 그것이 바로 건강이다. 따라서 건강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육체와 정신과 영혼 사이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조화를 이루는 상태이다. 창조적 건강이란 이 모든 관계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그 기쁘신 뜻에 따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으로 인정될 때를 의미하며, 이런 맥락에서 건강의 판단자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ㄴ. 타락과 질병

질병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왜 인간은 늙고, 결국은 죽어야만 하는가? 질병을 일으키는 다양한 원인들이 오늘날 존재하지만, 최초의 요인은 '인간의 죄'임에 틀림없다. 모든 생명들에게 적용되는 질병과 노화와 죽음은 결국 인간의 죄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진노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깨어지면서 모든 관계의 조화가 뒤틀려지게 되었다. 이것이 타락이다.

ㄷ. 회복과 치유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다다를 수 없으나,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회복의 길로 인도하셨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치유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상에서 이 죄를 친히 담당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치유를 통해서 다시금 창조 당시의 조화로운 모습으로 회복시키기 원하셨다.

ㄹ. 완성과 온전함

궁극적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그리스도 만이 온전한 치유자이시다. 우리의 사역은 온전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완성하신 치유사역을 온 땅에 선포하는 것이다. 치유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는 타락하고 병든 인간과 사회를 회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건설하는데 있다. 즉, 하나님나라 건설이 치유사역의 목표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육체를 어루만지며, 민망히 여기시며, 죄를 용서하심으로 치유를 이루신 것 처럼, 우리도 예수 안에서 육체와 영혼이 온전한 쉼을 누릴 수 있음을 선포하여야 할 것이다. 주님의 재림으로 이 모든 것은 완성될 것이다.



III. 도전받는 생명윤리


1. 생명의 시작과 관련된 윤리적 문제

생명윤리의 문제들은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생명의 시작과 관련된 윤리적 이슈들이고, 둘째는 생명의 마지막과 연관된 윤리적 문제들, 셋째는 삶의 과정 속에 일어나는 생명윤리의 문제들이다. 최근 복제인간이 미래 인류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면서 윤리적 논쟁이 가열되고 있지만 소위 '생명공학'의 선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정부와 학계, 산업계 모두 부분적 인간복제를 허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겉으로는 인간복제를 금하는 법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제 내용은 '생명공학육성법'이라는 이름 그대로 복제연구를 활성화시키는 방안인 것이다. 인간복제 대신에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는 '배아복제'로서 마치 배아는 인간과는 구별된 존재인 듯한 착각을 통해 인간의 시작시점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이는 새로운 사실이 아닌 것이, 그동안 일년에 150만건 이상 자행되어온 낙태도 전배아, 배아, 태아 등 이러한 모호한 생명의 시작시점을 점차 확대해나가면서 인간을 살해하는 죄의식을 피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이런 태아의 발달구분은 정확히 구별되어질 수 없는 것으로 생명은 수정란 때로부터 임종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시점에서 구분될 수 없는 연속선상의 존재라는 것이다.

즉, 수정란을 손쉽게 폐기처분하는 행위는 이어서 배아를 실험할 수 있는 배경을 이루며, 배아를 마음대로 실험하는 연구자에게 하루, 이틀 차이나는 태아의 실험을 막을 길이 없는 것이다. 태아를 마음대로 낙태시킬 수 있다면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태어난 영아를 살해하는 행위를 금지할 논리가 힘을 얻기 어려우며, 기형아나 중증장애아의 경우 얼마든지 없앨 수 있는 과오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생명의 시작을 수정된지 14일 이후로 연기하려는 움직임과 아울러 생명의 마지막을 심장이 멈추기 14일 이전 뇌사상태로 앞당기는 작업이 금세기에 마무리되면서 생명은 앞뒤로 각각 2주씩 줄어들게 되었고, 생명을 지키려는 일부 생명윤리전문가들은 여기에 맞서 "14일과의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낙태와 배아실험 외에도 생식의료와 관련된 여러 윤리적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 정자은행과 난자은행은 애초의 불임치료의 성격을 넘어서서 질 좋은 유전인자를 가진 정자와 난자를 판매하는 회사로 발전하고 있고, 부부관계가 아니더라도 심지어 동성연애자들이 자녀를 가지는 수단으로 변질되어 가정을 이루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아이를 가지고 양육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 가정의 파괴는 그 한계를 이미 넘어서 버린 듯하다.

성감별 역시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가는 징후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작년 IMF경제난과 범띠해가 겹치면서 어느 지방의 경우 남녀 출생성비가 200:100을 넘어섰다는 믿기 어려운 통계가 보고된 바 있으며, 전반적으로 123:100을 넘어서는 불균형으로 유네스코는 인위적인 성감별로 인한 사회적 제문제를 관찰하는 모니터 대상국가로 한국을 선정하고 예의주시하고 있다.


2. 생명의 마지막과 관련된 윤리적 문제들

대표적인 문제로 안락사를 들 수 있다. 미국인 의사 커보키안은 안락사 시술 장비를 고안하여 지금까지 100여명의 환자들을 안락사시킨 바 있으며, 이들 중에는 말기 암환자 뿐 아니라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질환자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존엄한 죽음을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인간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실상의 자살을 조장하는 이러한 안락사는 '의사조력자살(Physician Assisted Suicide)'이라고 불리워진다. 안락사 외에도 장기확보 방안으로 마련된 뇌사입법화, 그로 야기되는 죽음의 불명확한 경계선, 경제적인 이유로 치료를 포기하는 환자들, 인간이 과연 인간을 죽일 권리가 있는지 논쟁이 일고 있는 사형제도 등이 격렬한 논쟁 가운데 있다. 안락사의 대안으로 등장한 호스피스가 최근 많이 확산되면서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죽음의 권리를 찾으려는 안락사의 거대한 물결에 비하면 아직은 작은 움직임일 따름이다.


3. 생명기간 중에 야기되는 윤리적 문제들

유전공학과 생명공학의 발전은 기존의 개념들을 쉽사리 허물어버리게 된다. 과거에는 머리가 좋은 아이나 손재주가 좋은 아이들을 천부적인 것으로 인정해 왔으나, 최근의 보도에 의하면 인위적 유전자조작으로 IQ가 뛰어난 원숭이를 생산해낼 수 있게 되었고, 아이들도 공부시키기보다는 유전자조작으로 뇌를 개조시키는 편이 더 쉬워지게 되어 학습의 근본적 개념이 흔들릴 전망이다.

지난 8월 29일자 영국일간지 The Sunday Times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 오하이오주 케이스웨스턴 리저브대학의 로버트 화이트박사에 의해 침팬지에서 세계최초의 뇌이식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고 한다. 이식할 뇌를 섭씨 10도 이하에서 보존시킨 후 뇌전체를 뇌조직 손상없이 이식하는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얼마전 원숭이 두 마리의 머리 몸통 교환수술 성공에 이어 이러한 뇌이식 성공은 인간의 정체성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그존엄성의 기반이 허물어져 내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뇌에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는지, 아니면 몸통에 '나'의 실체가 존재하는 것인지, 과연 영혼은 어느 곳에 존재하는지 등의 끝없는 질문이 꼬리를 문다.

얼마전 고아원에서 행해진 백신주사제의 안정성 실험은 본인이나 보호자의 동의없이 행해진 점에서 많은 비난을 받은 바 있으며, 지금도 상당수의 임상실험들이 본인의 동의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4. 국내 기독교 생명윤리운동의 형황과 전망


1)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의 역사

1884년, 의사 알렌에 의해 서양의학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이래 의료윤리는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삶과 연관되어 실천윤리가 강조되었다. 더욱이 해방 후 6.25전쟁으로 도처에 부상자와 고아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의료선교사 뿐 아니라, 장기려 박사를 비롯한 기독의료인들이 병원을 설립하고 인술을 베풀었던 것이 국내 생명윤리운동의 시초로 볼 수 있으며, 이렇게 시작된 병원들~ 부산복음(고신 의료원), 구호, 침례, 위생병원, 인천기독, 원주기독 등~에 이어 최초의 의료보험인 청십자보험이 태동하여 가난한 이웃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60년 봄, 장기려 박사를 중심으로 부산에서 기독봉사회가 창립되어 행려 환자들과 극빈 환자를 돌보기 시작하였고, 1965년 5월 4일 서울에서는 이화여대의 이명수 교수를 중심으로 기독의사회가 창립되었으며, 이후로부터 수양회 주제로 의료윤리가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나 생명윤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보다는 기독교인의사가 지녀야 할 실천윤리를 많이 강조하였다. 그 예로 장기려 박사는 다음의 다섯 가지 덕목을 기독의사가 가져야 할 윤리상으로 제시하였다. 첫째, 기독의사는 인격을 소중히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배려한다. 둘째, 사랑의 동기로 의료활동을 해야 한다. 셋째, 환자의 육체적 질병 뿐 아니라 환자의 전 인격과 환경까지 돌보아야 한다. 넷째, 기독의사는 교육, 연구, 분주함 등 어떠한 이유가 있어도 주위사람을 돌보는 긍휼의 책무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기독의사는 환자를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1960년대의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가족계획사업이 국가정책으로 확대되면서, 1972년 유신정권은 낙태를 합법화하는 모자보건법을 통과시켰던 바, 가톨릭에서는 1973년 이를 반대하는 사회적 움직임이 시작된 데 반해 기독의사회에서는 이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고 오히려 개인의견임을 전제로 '그리스도와 의료'지에 낙태를 두둔하는 글들이 게재되었던 사실은 생명윤리에 관한 기독의사회의 오점이라고 생각된다.

1980년 시작된 한국누가회는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들의 영적 성장, 의대생들의 기독학생운동, 의료윤리연구, 국내외 의료봉사를 목표로 창립되어 수련회의 선택식 특강과 '누가들의 세계'지를 통하여 의료윤리문제를 다루어 왔다. 1987년 학술윤리부가 발족되면서 정기적인 학술윤리세미나를 개최하였으며, 1992년부터는 생명윤리 스터리그룹이 시작되어 월1회 기독교의료윤리의 총론과 각론을 연구하고 토의하였다.

이즈음에 가장 뜨겁게 논의된 주제는 인공유산의 문제였던 바, 당시 반낙태활동을 독자적으로 벌이던 새생명사랑회, IVF의 생명을 아끼는 모임, 목산교회, 한국누가회, 기독교실천윤리운동(기윤실)이 함께 모여 1994년 4월 26일 낙태반대운동연합(낙반연: 대표 김일수)을 결성하게 되었으며, 낙태를 합법화하는 개정형법에 반대한 1만명 서명서의 국회제출과 침묵시위 등 본격적인 시민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현재는 34개 기독교단체와 교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연합사역의 배경에는 70~80년대의 인권탄압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시민의식과 기독교계내의 자기반성으로 87년 출발된 기윤실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낙태문제 이외에도 올바른 기독의료인의 윤리상을 정립하기 위하여 기독청년의료인회, 기독간호사회, 한국누가회와 함께 기독의료인 윤리강령을 제정 선포하였다. 기윤실과 낙반연의 연합사역은 초교파적인 기독교 시민운동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생각되며 생명윤리운동의 범시민참여에 앞으로도 지대한 공헌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의 현황

1995년 11월, 기독의사회와 한국누가회가 연합으로 생명의료윤리연구회를 구성하여 월1회 정기모임을 현재까지 갖고 있으며, 서울의대의 박재형 교수외 13인이 공동으로 미국기독의사회의 "의료윤리의 새로운 문제들"이라는 신간을 번역 출판하였다. 이 연구회는 서울대학병원 내 함춘 기독봉사관에 생명윤리연구소를 설립했고 많은 기독의료인들의 참여를 희망하고 있다. 기독의사회가 중심이 되어 한국누가회와 기독간호사회가 함께 참여해온 한, 중, 일 기독의료인 교환대회는 매년 여름 3개국을 순회하면서 20여 년 간 개최되어 왔으며, 의료윤리가 대회 주제로 자주 채택되어 다른 문화와 종교적 배경을 가진 3개국 사이의 열띤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최근 의료윤리에 관한 국제학술대회에 소수가 참여하고 있으며 해외의 생명윤리센타에 장단기로 연수를 다녀오는 의사들도 늘고 있다. 얼마 전 아주의대가 주최한 한, 중, 일 의대생 인성교육 및 의료윤리학술대회는 생명윤리분야의 국제화의 첫 시도라 생각되며 계속적인 발전을 기대해본다.

우리 나라 의과대학에서의 의료윤리교육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이며, 연세대가 1987년 김일순 교수를 중심으로 의료윤리강좌를 개설하였고, 이어서 3권의 자료집을 출간한 바 있으며, 가톨릭대는 의사이며 신부인 김중호 교수가 1989년부터 의료윤리강의를 맡아오고 있다. 서울대와 고려대 등 다른 의대에서는 아직도 의학개론수준에서 의료윤리를 다루고 있으며, 그나마 강의가 개설되지 못한 대학들이 태반인 실정이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97년 11월, 울산의대 홍창기교수와 가톨릭대 맹광호 교수를 중심으로 의료윤리교육학회가 창립되었고, 보건복지부에서도 대학에서의 의료윤리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연구를 시작한 것은 늦은 감이 있으나 무척 반갑고 고무적인 일이라 여겨진다.

신학대학에서의 생명윤리연구 역시 첫걸음을 내딛는 정도지만 장신대의 맹용길 교수가 1987년 생명의료윤리 교과서를 발간함으로 기독교의료윤리의 신학적 기초를 다졌으며, 가톨릭신학대가 1991년 생명윤리강의를 개설하였고, 고신대는 1991년 고신의대와 함께 의료윤리강좌를 개설하기 시작하였고, 합신대는 최근 귀국하신 송인규 교수가 의료윤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총신대는 아직도 독립적인 강좌 없이 학생회 주최의 의료윤리세미나 개최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기독교생명윤리운동 역시 교회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예비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생명윤리강좌는 무척 중요하며, 생명윤리운동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는 측면에서도 더욱 활성화되어야할 영역이라 여겨진다.

일반대학에서의 생명윤리연구는 더더욱 미미한 정도로 철학과 교수 중 의료윤리분야로 국내외에서 학위를 취득하신 몇몇 교수들~ 김영진(인하대), 김형철(연세대), 구영모(서울대), 임종식(성균관대), 김상득(서울교대) 등~에 의해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실정이지만, 최근 젊은 철학도들을 중심으로 생명윤리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바 미래가 밝을 것으로 전망된다. 1997년도에 철학, 생명공학, 환경, 의학 전문가들이 총망라되어 '생명윤리학회'를 창립하게 된 것은 생명윤리의 학문적 첫걸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법학계열에서도 고려대의 김일수교수가 생명윤리운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으며, 고대 법의학교실의 문국진 명예 교수, 이준상 교수를 비롯한 여러 변호사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그 외 유전공학과 관련하여 첨단의학분야의 여러 교수들이 의료윤리에 관심을 가지는 바, 지난 97년 4월 아산재단이 개최한 복제인간 심포지엄이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3)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의 21세기 전망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의학은 더욱 빠르게 발전할 것이며, 우리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여러 괴이한 실험들과 새로운 시술의 개발로 예측 불허한 생명윤리의 문제가 분출될 것이 명백하다. 또한 이러한 유전공학의 발달을 이용해 이익을 추구하려는 기업이 생기기 마련이며, 이에 맞서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피나는 노력이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각 병원마다 의료윤리위원회가 구성될 것이며, 대학마다 의료윤리학교실이나 생명윤리연구소 설립의 붐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각 연구소간의 입장 차이가 두드러질 것이며, 이의 조정을 표방하는 관련학회들이 창립되며, 국제적인 세미나와 정보교류가 급속히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의료계 내에서도 의료일원화를 둘러싼 의사, 한의사 간의 갈등, 한의사, 약사와의 갈등, 의약분업을 둘러싼 의사, 약사의 갈등이 표출될 것이며, 시장경제이론으로 의료를 독점해 나가는 재벌병원과 취약한 중소병원 사이의 갈등이 더욱 깊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수입개방으로 인해 외국병원들이 국내에 들어오게 되고 매스컴과 인터넷을 통한 환자들의 인식의 변화와 권리 주장으로 의료구조의 획기적인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게 되며, 이 급격한 변화 속에서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많은 의료인들의 갈등이 윤리적인 문제로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BC 350년경의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아직도 유용한 것인지? 아니면 오늘날에 걸맞은 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만들어야 할 것인지? 하나의 직업인으로서의 의사일 것인지? 아니면 성직자와도 같이 인술의 사도로 남아야 할 것인지? 극도의 개인주의와 공리주의는 의사들의 직업관과 소명의식에 일대 혼란을 야기할 것이며, 의사와 환자 사이의 기대감의 괴리는 쉽게 극복되지 못하는 숙제로 남을 것이다.

일반시민들의 인식변화와 권리요구증대는 활발한 시민운동으로 표출될 것이며, 생명윤리운동도 보다 전문화되어 각 이슈별로 새로운 연합이 시도될 것으로 기대되며, 지방자치제에 힘입어 각 지역마다 독창적인 생명윤리운동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뿐만 아니라 각 학회 차원에서의 생명윤리운동이 활성화되어 미국에서의 반 낙태산부인과 의사회같은 전문집단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되며 국제적인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연합적인 생명윤리운동이 환경운동처럼 국경을 초월해 가속화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생명윤리의 전문가들이 급격히 증가해서 각 대학이나 대규모 종합병원에는 의료윤리전문가가 반드시 고용되도록 제도화될 것이며, 많은 관련학도들~ 의학, 간호학, 신학, 철학, 법학 등~이 국내외의 대학에서 전문가로서의 교육과정(M.A., Ph.D.)을 밟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런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교회가 올바른 의료윤리의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심각한 혼란에 빠질 여지가 많으며, 젊은 기독지성인들과 기독교학문단체―기독교대학 설립 동역회, 기독교학문연구회, 창조 과학회, 라브리 등―가 앞장서서 이 부문의 성경적, 학문적 기초를 확립하는데 전력할 것이며 연합적인 학술대회가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누가회와 기독의사회의 뜻 있는 회원들은 이 사역에 흔쾌히 뛰어들어 다가올 21세기의 대변혁을 차분히 준비함으로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의 밑거름이 되어야 할 것이다.



IV. 맺는 말

이제 백일이 채 못되어 새로운 밀레니움시대는 도래할 것이다. 새로운 21세기는 과거 그어느 세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급변하는 환경 속에 처할 것이며, 그 어떤 미래학자도 예언하기 힘든 예측불가능의 시대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한가지는 지금까지도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중심주의와 인간 중심주의의 접전이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유신론과 무신론, 창조론과 진화론,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기독교적 관점과 세속적 관점, 성경과 과학주의 사이의 갈등이 더욱 격심해질 것 만큼은 예견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은 세계관의 전쟁이며 신앙의 싸움터가 될 것이다. 인간복제와 유전자조작은 과학의 문제라기보다는 신앙의 문제이며, 윤리적 잇슈라기보다는 영적인 쟁점인 셈이다.

새로운 세기에서의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공중권세 잡은 자들, 사탄의 세력들과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신앙적 재무장을 늦출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사랑하고 새명을 소중히 여기는 모든 교회와 기독교지성인, 단체들은 전열을 가다듬어 인류의 마지막 위대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생명연대를 형성하여야 한다.

육체적 생명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생명의 주인이시며 연약한 태아의 생명으로 친히 이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생명을 끝까지 수호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 모두는 '생명지기'로서의 삶을 살아내야 할 것이다.

작성자 : 이상원 2015-06-12 13:33:47
기독교와 생명윤리 (2001)

 

기독교와 생명윤리


이상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교수)

[신학지남], 2001년 가을호, 통권268호, 298-320에 게재된 글

발표일 : 2001.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구체적인 생명의료윤리문제들에 대한 반성작업을 전개하기 위하여 필요한 지평이 되는 기독교적인 인간관과 기독교적 규범이 무엇인가를 소개하고 이 세계관 및 규범들이 구체적인 생명의료윤리문제들과 어떤 관련성을 가지는가를 설정하고자 함에 있다. 이와같은 글의 목표를 염두에 두면서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순서에 따라서 진행된다. 1.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의료행위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생명의 범주는 어떻게 설정될 수 있는가? 2.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독교생명의료윤리란 무엇인가? 3. 기독교생명의료윤리적 반성작업의 지평이 되는 기독교적 인간관은 무엇인가? 4. 기독교생명의료윤리적 반성작업을 전개할 때 판단기준이 되는 규범은 무엇인가?



2. 기독교적 인간관의 관점에서는 의료의 영역에서 다루는 인간의 생명의 범주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

의료인들이 질병을 치료하고 질병치료가 불가능할 때는 고통의 경감을 위하여 노력하며, 환자를 간호하고, 질병의 예방과 퇴치를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고 보전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생명을 기독교적인 인간관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창세기2장7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 구절을 분석해 보자.


(1) 하나님은 먼저 흙으로 인간의 신체를 지으셨다. 그러나 흙으로 신체를 지으신 것만으로는 아직 인간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2) 하나님은 흙으로 된 신체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여기서 말하는 생기는 니쉬마트라는 히브리어인데, 이 말은 루아흐라는 히브리어와 동의어로서 “영”으로 보통 번역된다. 영은 몸을 통제하는 생명과 행동의 원리로서 작용하는 영적 요소로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선악을 변별하고 도덕을 수련하는 등의 기능을 주도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은 재료가 흙으로 구성되었다는 의미에서 땅에서 기원한 육체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영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육체와 영의 기원이 다르기 때문에,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영도 따라서 죽는 것이 아니다(마10:28).1) 전도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죽으면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지만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12:7).2)

(3) 신체에 영이 들어가자 비로소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생령이란 “네페쉬 하야”라는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데, “하야”는 “살아 있는”이라는 뜻이고 “네페쉬”는 “혼”이라는 뜻이다. 성경에서는 “영”과 “혼”이 교호적으로 사용된다. 혼은 인간 안에 있는 행위의 주체로서, 식욕이나 기억이나 상상등을 발생하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이것은 영과 구분된 실체로서의 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이 지닌 기능의 한 단면을 강조하는 것 뿐이다. “생령”이라는 어귀 곧 “살아 있는 혼”은 전인을 포괄하는 단어다. “생령” 곧 “살아있는 혼”은 신체까지도 포함하며 영까지도 포함하는 전인(全人)을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육체와 영은 그 기원과 내용이 다르다는 의미에서 독립된 두 실체이지만, 영이 일단 육체 안에 들어온 이후에는 생령의 형태로, 곧, 영혼과 육체가 나누어질 수 없을만큼 긴밀한 상호작용과 상관관계를 맺으면서 전인으로, 하나의 통일된 인격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육체의 건강은 어느 정도 영혼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며, 영혼의 건강은 육체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 육체가 병들면 어느 정도 영혼도 영향을 받아 병들게 되고, 영혼이 병들면 육체도 영향을 받아 병들게 된다. 영혼과 육체는 신비로운 연합 안에서 하나의 통일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신비로운 통일체로 존재하던 인간은 육체적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 흙속에 묻혀 버리지만 영혼은 다시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종말의 날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신령한 새 몸으로 다시 신비롭게 연합할 때까지.

그러면 이와같은 영혼과 육체가 신비로운 연합 안에 있는 통일된 인격체로서의 인간에 있어서 의료행위가 치료의 대상으로 다룰 수 있는 부분은 어느 부분인가? (1) 의료행위의 가장 중요한 대상은 전인과의 긴밀한 연관성 안에 있는 육체다. (2) 인간의 육체와 영이 만나는 지점에서 형성되는 인간의 정신기능들도 의료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른바 정신의학이 이 영역을 다룬다. (3)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능력으로 그 존재여부나 건강성 여부를 손댈 수 없는 차원을 가진다. 영혼의 깊은 차원의 문제에까지 의학이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점을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속사람과 겉사람의 구분을 통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바울은 인간을 속사람(롬7:22)과 겉사람(고후4:16)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속사람은 실재하는 인간의 자아의 중심을 이루는 구성요소이면서도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깊은 차원이다. 프로이드가 들여다 보려고 시도했던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의 영역이 여기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겉사람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고 어느 정도 통제도 할 수 있는 세계로서, 이성, 의식, 구체적인 행동과 삶의 영역을 말한다. 프로이드가 말한 의식의 세계가 여기에 상응할른지도 모른다. 의학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은 겉사람의 영역이다. 그러나 의학은 속사람의 영역은 다룰 수 없다. 그것은 의학이나 의술의 한계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것은 속사람의 영역에서다. 속사람을 다룰 수 있는 것은 복음 뿐이다.


3. 기독교생명의료윤리란 무엇인가?

그러면 의료행위와 기독교생명윤리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우선 윤리라는 말의 의미부터 생각해 보자. 윤리라는 말의 의미는 도덕이라는 단어의 의미규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어원상으로만 본다면 윤리와 도덕은 어떤 의미의 차이도 말할 수 없고 일상어법에서는 실제로 동의어 비슷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윤리(ethic)의 어원인 희랍어 ethos 의 라틴어 번역어가 도덕(morality)의 어원인 mos 이기 때문이다. 이 단어들은 “관습”이라는 의미를 갖는다.3) 곧 어떤 사회의 구성원들이 관습적으로 행동하는 어떤 원칙을 말한다. 그러나 윤리학계에서는 이 두 단어가 각기 다른 뜻으로 사용된다. 도덕이라는 말이 어떤 사회에서 관습화된 행동원칙들을 기술적(記述的)으로, 어떤 가치판단없이 서술한 것이라면, 윤리라는 말은 어떤 사회의 관습화된 행동이 과연 옳은가 그른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따지는 작업을 가리킨다. 따라서 윤리는 규범적(規範的) 작업이다. 예를 들어 보자. [허준]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궁중 간호사였던 내의녀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내의녀들은 간호사의 역할 이외에도 관기(官妓)와 여경(女警)의 역할까지도 담당했다. 이때 “내의녀들은 간호사 역할 뿐만 아니라 관기와 여경의 역할까지도 담당했다”고 말한다면 이조시대의 궁중의료도덕의 진술이 된다. 그러나 “내의녀들이 간호사 역할 이외에 관기와 여경의 역할까지도 맡았던 관습이 과연 바른 관습이었는가?”를 묻는다면 이조시대의 궁중의료윤리의 진술이 된다. 결국 윤리란 인간의 행동 또는 행동원리가 옳은가, 그른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이론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의료윤리란 의료행위 또는 행위의 원리들의 옳고 그름 여부를 이론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행위가 옳은가, 그른가의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판단기준이 필요하게 된다. 이 판단기준을 윤리학에서는 규범(norm)이라고 한다. 규범으로 번역된 라틴어 norma 는 원래 목수들이 쓰던 직각자를 뜻했다. 목수들은 제품을 만든 후에 직각자를 대보면서 제품이 제대로 만들어졌는가의 여부를 판단했다. 따라서 윤리학이란 어떤 규범에 근거하여 인간의 행동의 옳고 그름 여부를 따지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생명의료윤리란 무엇인가? 어떤 규범에 근거하여 어떤 의료행위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고 보전하는데 기여하는 행위인가, 아닌가를 따져 보는 이론적 작업이 곧 생명의료윤리다.

그러면 이 작업을 할 때 필요한 규범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이르러서 비로소 기독교생명의료윤리의 특징이 드러난다. 일반적인 의미의 생명의료윤리는 이성적 사유나, 임상적 결과나, 사회적 합의나, 기타 의료인들의 경험 등으로부터 규범을 이끌어낸다. 인간의 행위의 옳고 그름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인간으로부터 끌어내는 자율적(autonomous) 입장을 철저하게 견지한다. 여기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과연 인간의 행동을 인간의 생각을 가지고 판단할 때 정말로 객관적인 안목에서 판단이 가능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타락한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사유하고 판단하는 무의식적인 습성이 있음을 고려할 때 자율적 입장은 결국 자기를 합리화(self-rationalizing)하는 윤리의 입장을 벗어나는 것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면 기독교생명윤리의 입장은 무엇인가? 기독교생명윤리는 규범에 있어서 삼중적 입장을 취한다. (1) 기독교생명윤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인간관을 판단의 지평으로 삼는다. (2) 이 지평 안에서 성경이 제시하는 윤리적인 규범들을 1차적인 판단규범으로 채용한다. (3) 일반의료윤리의 영역에서 제시된 일반적인 판단규범들을 부차적인 판단규범으로 채용한다. 여기서 (1)은 (2)와 (3)에 대하여 우선권(priority)을 가지며, 특히 (2)는 (3)에 대하여 우선권을 가진다. 기독교생명의료윤리는 (1), (2), (3) 에 근거한 인간론과 규범론의 틀 안에서 의료행위의 옳고 그름 여부를 검토하는 작업을 전개한다.



4. 기독교생명의료윤리의 지평(地平)으로서의 인간관

인간의 사유, 판단, 행동의 배후에는 인간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기 마련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인간관의 틀로서 가장 잘 알려진 틀은 어거스틴에게서 확립된 후 개신교 신학전통이 줄곧 견지해 온 “창조-타락-구속”의 틀이다.4)

(1) 창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창조되었다(창세기1:27).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은 서로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두 개의 동의어다. 하나님의 형상성은 두 차원으로 나누어서 이해하는 것이 정설이다. 하나는 좁은 의미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 의로움, 거룩함을 뜻한다(골3:10;엡4:24).5) 좁은 의미의 형상은 인간이 타락했을 때 상실되었다. 다른 하나는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인데, 이 형상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상실되지 않았다. 이 형상은 인간이 영성을 지니고 있고, 이 점에 있어서 영이신 하나님이 투영되어 있다. 영의 특징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다.6)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은 몸과 연합되어 있고 몸에 신축성있게 적응하지만 그 존재가 몸에 의존하지 않는다. 몸이 해체되어 버린 뒤에도 영은 존재한다. 영은 이성, 양심, 의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을 갖는다. 영은 육체를 통하여 자기를 표현한다.7) 육체는 영이 자기를 표현하기에 적합할만큼 하나님의 형상의 광채로 장식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육체도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좌소는 인간의 영혼 속 곧, 정신과 마음, 혹은 영혼과 영혼의 능력들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육체를 포함하여 인간 속의 어느 곳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다.8) 따라서 창세기9장6절은 사람의 몸을 죽이는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로 해석되었다. 이와같은 기준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배아복제, 낙태, 인공수정, 안락사 문제들을 판단할 때 유념해야 한다. 의료인들은 인간은 생물학적인 또는 의학적인 연구를 통하여 다 파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이와같은 연구로서는 손댈 수 없는 영적 생명을 가진 존재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는 인식을 가지고 인간을 대해야 한다. 인간을 단지 의료기술적 조작의 대상으로 보고자 하는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

(2) 타락.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범죄했고, 범죄한 결과로서 인간에게는 고통과 죽음이 찾아 왔다. 남자에게는 노동의 고통이 찾아 왔으며, 여자에게는 출산의 고통이 찾아 왔고, 인류사회 전체에는 갖가지 질병이 찾아 왔으며, 마침내는 고통의 절정인 육체적 죽음9)이 찾아 왔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고통, 질병, 죽음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한편으로 이것들은 극복되어야 할 것들이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범죄한 이후의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이 마련하신 은혜의 질서이기도 하다. 극복되어야 할 경우와 하나님의 은혜의 질서로 받아 들여야 할 경우를 구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정신과 육체를 병들게 할 만큼 노동의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절제해야 하지만, 얼굴에 땀흘리는 수고를 하면서 생계에 필요한 물질을 얻으면서 사는 것이 의학적으로 볼 때 오히려 건강에 유익하다. 아이를 낳을 때 제왕절개로 출산하는 것 보다는 특별한 질병이나 의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상황이 아닌 한 출산의 고통을 다 겪으면서 아이를 낳는 것이 여인에게 있어서나 태아에게 있어서나 건강에 훨씬 더 유익하다. 많은 질병들이 극복되어야 하고 질병에 뒤따르는 고통이 완화되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질병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조심하게 하고 자기 몸을 돌보게 하고 육체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고 더 성숙한 정신을 갖게 한다.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선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열매들 중에서 고통의 과정을 통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의료인들은 가능한 한 죽음으로 귀결되는 질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지만, 죽음은 결코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영역으로의 삶의 이동이며, 현세에서의 삶보다 월등히 더 나은 삶으로 들어가는 복된 관문이라는 사실을 죽어가는 자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3) 구속. 죄로 인하여 찾아온 고통과 죽음은 궁극적으로 부활과 영생의 전망 안에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며, 이 전망 안에서 우리는 현세 안에서의 고통과 죽음의 현실을 받아 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부활과 영생의 전망 안에서 고통과 죽음을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두신 질서 안에서 일반은총의 수단들을 통하여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 수단들을 허락하셨다. 고통을 보내신 하나님이 이제는 고통에 대항하여 싸우게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과 고난과 죽음을 완전히 겪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고통을 경감시키는 수단들을 거부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인간이 죽는 것을 보시고 통분히 여기셨으며(요한복음11:38),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꾸짖으셨다(누가복음4:39).



5. 기독교생명윤리의 규범들 I: 성경으로부터

(1) 동기. 의료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의료행위의 동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의료행위는 병자들이나 신체적으로 결손된 자들을 치료하고 간호함으로써 이들의 생명을 보전하고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그렇다면 이들을 치료하고 간호하도록 동기부여를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기독교윤리학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곧 그 동기가 된다고 답변한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긍휼은 인간을 향한 긍휼의 원천이 된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는 마땅히 인간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 성부 하나님의 뜻이요, 바쁘고 피곤한 사역 일정 중에도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병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모두 치유해 주신 치유자 그리스도(Christus medicus)의 뜻이며,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 주고 계속적인 간호를 부탁했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가르쳐주는 뜻이며(누가복음10:25-37), 병든 자를 돌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돌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뜻이다(마태복음25:31-46).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가 계약관계로 형성되어 있는 오늘날의 의료계의 현실에서 의료행위는 환자의 권리와 의사의 의무라는 외적인 차원에서 인식되고 있는데, 내적인 긍휼이 결여된 상태에서 권리가 행사되고 의무가 이행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의료행위는 기독교의료인의 바른 의료행위가 될 수 없다. 기독교의료인의 의료행위는 반드시 인술(仁術)의 지평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

(2) 성경에서 도출된 규범들. 기독의료인들이 의료행위의 바른 동기를 갖추었다면 이제는 성경이 제시하는 규범들에 주목해야 한다. 사랑의 대계명(마태복음22:37-40), 황금률(마태복음7:12), 그리고 십계명(출애굽기20:1-17)은 기독교윤리 뿐만 아니라 기독교생명의료윤리의 반성작업에서도 보편적인 규범으로서 기능한다.

a. 사랑의 계명은 철학적 의료윤리문헌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 이유는 기독교적인 아가페로서의 사랑은 일반 철학적 윤리학에서는 여분의(supererogatory) 규범으로서 비상(非常)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철학적 윤리학에서는 여분의 비상한 것이 기독교윤리학에서는 평범한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기독교윤리학은 플레처의 상황윤리에서처럼 사랑 이외에는 어떤 타율적인 명령도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배격하고 사랑은 계명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사랑은 계명들을 필요로 한다(로마서13:8이하). 사랑은 누룩이요, 계명들은 반죽이며, 사랑은 콤파스요, 계명들은 도화지다. 사랑 그 자체가 이미 계명이다(요한복음15:10; 요한일서5:3; 요한2서6절).

b. 사랑의 대계명과 더불어 율법의 요약으로 선언되고 있는(마태복음7:12) 황금률은 인간을 이해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입장에 직접 서셨던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현된 규범으로서 타인의 입장에 서보는 훈련을 요구한다. 곧, 의료시술자는 고통을 받는 환자의 입장에 서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c. 십계명 가운데 특별히 의료윤리에 관련되는 계명은 6계명(살인하지 말지니라)이다. 생명을 주시고 거두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의료행위는 치료/고통의 완화/간호를 주업무로 하는 것으로서, 삶을 종결시키는 작업이 의료행위의 업무일 수는 없다.10)

(3) 문자주의의 위험과 성경규례들의 의학적 탁월성. 생명의료문제들에 대한 판단의 규범을 성경으로부터 도출하고자 할 때 앞에서 제시한 보편적인 윤리적 규범들 이외에 다른 본문들을 규범으로 채용하고자 할 때는 문맥과 정황을 무시한 문자주의적 인용을 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예컨대 여호와의 증인들은 레위기7:26,27에 있는 “피를 먹지 말라”는 규정과 사도행전15:20,29에 있는 “피를 멀리하라”는 명령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피를 먹는 행위나 수혈하는 행위는 모두 피를 섭취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한 행위라고 보고 수혈을 거부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이 명령과 현대의료계에서 시행되는 수혈행위의 각기 다른 정황을 무시한 결과다. 현대의료계에서 행하는 수혈행위는 죽음 앞에 직면한 생명을 구하기 위한 의학적 치료행위인 반면에 레위기나 사도행전은 식사관습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며, 피를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은 생명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수혈”행위는 성경기록당시에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했다. 성경은 의료행위의 기술적인 모범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므로, 성경의 어느 한 본문을 문자적으로 인용하여 의료기술시행을 위한 어떤 모범으로 삼는 것은 피해야 한다.11)

그러나 이 말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어떤 규례들이 비의학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어떤 규례들은 당시의 의료기술이나 의료문화의 수준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조차 없을만큼 탁월한 지혜를 담고 있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자.12)

a. 1840년 경 유럽의학계의 중심지였던 비엔나의 Algemeine krankenhaus에서 임산부 6명 가운데 1명이 죽어 나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원인을 조사하던 한 젊은 의사는 의사들이 손을 씻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는 의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당시 의사와 학생들은 죽은 임산부를 검시실로 들어가 검시한 후에 손을 씻지도 않고 또 고무장갑을 끼지도 않고 산과병동의 환자들에게 골반실험을 하기 위하여 들어갔다. 이 젊은 의사는 진료전에 손을 씻는 규칙을 제정하고 시행해 보았더니 규칙이 제정되고 난 이후 곧 임산부 치사율이 1/42로 감소되었고 다음달에는 1/84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 젊은 의사는 이 일 때문에 동료의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정신병원에 들어가 지내다가 죽었다. 그런데 민수기19:7,8 이하 전장을 읽어 보면 “제사장은 제물을 죽여서 불사른 후에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에 들어가라”는 명령이 나온다. 그것도 대야에 손을 씻고 흐르는 물에 손을 씻으며 빨래하여 말린 옷들을 갈아입고 대인관계에 임하도록 했다. 동물을 죽이는 과정에서 많은 균이 제사장의 손과 옷에 묻었다는 점, 그리고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에 씻어야 오물이나 균이 제대로 씻겨 내려간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이 조치는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위생상태를 유지하는데 매우 적절한 의료적 조치였음을 알 수 있다.

b. 19세기의 외과수술은 손씻는 일을 소홀히 했다. 수술대 위에 올라가면 의사들은 코트를 벗고 바로 도구를 꺼내어 수술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균이 우글거리는 학생들의 손으로 균이 없는 복부의 살을 찔러 보게 했다. 그 결과 포도상구균 때문에 외과수술의 치사율이 높았다. 1876년 손과 의료기구를 씻는 방법이 도입되면서 치사율이 극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손씻는 문제는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결되었다.

c.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인체의 배설물을 포장안된 길거리에 내다 버렸다. 이 배설물에 파리들이 들끓어 알을 깜으로 말미암아 콜레라, 이질, 장질부사와 같은 장성 질병을 퍼뜨렸고, 쥐들이 번성하여 흑사병이 돌았다. 그런데 신명기23:12-13을 읽어 보면 “너희 진 밖에 변소를 베풀고 그리로 나가되 너희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통할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이켜 그 배설물을 덮을찌니”라는 말씀이 있다. 변소를 진 밖에 베풀고 배설물을 땅 속에 묻음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위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유럽인들이 이 명령을 읽고 주의했다면 많은 질병의 발병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d. 졸도, 심장마비, 협심증, 괴저병, 신장병 등의 원인이 되는 동맥경화증은 콜레스테롤의 증가에 기인하는 것인데, 콜레스테롤은 동물성 지방질, 체중의 과다한 비대, 끽연(니코틴이 콜레스테롤을 형성한다), 육정적 감정과 긴장 등에서 형성된다. 증가된 콜레스테롤 종기가 혈관벽을 형성하여 동맥의 흐름을 방해하면 동맥경화증이 된다. 이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레위기3:17과 7:22-24에서 하나님이 “기름을 먹지 말라”고 명령을 주신 것은 의학적으로도 탁월한 조치였음을 알 수 있다.

e. 창세기17:10-12에 보면 남자가 태어나면 8일만에 할례를 받으라는 명령이 나온다. 그런데 이 명령은 의학상식적으로 볼 때 아주 탁월한 명령임을 알 수 있다. 뉴욕밸브병원의 조사에 의하면 유대인여자들에게는 자궁경부암이 거의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보스톤의 862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1954년의 조사결과 비유태계 여성은 유태계 여성 보다 8.5배 자궁암 환자가 많았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유태인 남자들이 할례를 받은데 기인한다. 남성성기의 제거되지 않은 표피에는 암을 일으키는 스메그마, 바치루스균을 포함한 유독성 균이 활발히 번식한다. 이로 인하여 성교시에 균들이 자궁경부에 잔존하게 된다.

신생아에게 할례를 행할 때에 생후2-5일 사이에는 출혈에 민감하고, 이때의 출혈은 확대되기 쉬우며, 두뇌에 손상을 주고, 쇼크와 빈혈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피를 응고시키는 비타민 k가 이 기간 동안에는 정상치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응혈소가 생후3일경에는 정상인의 33%였다가 8일째가 되면 정상인의 110%로 높아진다. 그 후에 이 숫치는 다시 감소한다. 그러므로 난지 8일째가 할례를 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기간이 된다.

f. 문둥병은 중세시대 유럽 최대의 재난으로서, 6,7세기, 13-14세기에 무서운 위세를 떨쳤다. 흑사병은 14세기에 네사람 중 한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갈만큼 위력적이었다. 그런데 당시 의사들은 이 병의 전염을 예방하는데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교회가 “병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서 살찌니라”는 레위기13:46 말씀에 따라서 사회에서 격리시켜 이 병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레위기13장은 위생법의 최초의 전형이었다.

g. 이 밖에도 바른 성생활을 강력하게 권고하는 본문들(잠5:1-12; 고전10:8;6:18; 살전4:3-8)에 순종할 때 성병을 근원적으로 예방할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보복심이나 분개심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때 많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 독성탄저, 졸도, 심장마비 등이 복수로 가득차 있는 마음에서 초래될 수 있으며, 결장염은 다른 사람과 싸울 때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며, 근심이나 혐오감이 뇌속의 혈액량을 증가시켜 두통, 구토증을 초래한다.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힌 정서상의 불안이 갑상선의 분비를 촉진시켜 독성갑상선종을 일으키고 난소의 분비작용에 영향을 주어 월경중단, 월경기 통증, 두통등을 초래한다. 부신이 과다하게 분비되면 고혈압, 관절염, 신장병, 동맥경화를 유발한다. 환자의 96%가 분개심 때문에 병이 든 자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는 출애굽기15:26의 말씀의 위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6. 일반 윤리학의 규범들II: 철학적 윤리학으로부터

생명의료윤리의 제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작업을 할 때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동기와 성경이 제시하는 규범들이 보편적이고 우선적인 판단기준의 역할을 하지만,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상황이 등장했고, 과학과 의료기술 등의 획기적인 발달이 이루어짐에 따라서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판단할 때 성경이 제시한 규범들을 새로운 언어로 해석하고 보완해 줄 수 있는 일반적인 규범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규범들은 생명의료윤리문제들을 판단할 때 기여하는 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의 한계와 결함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규범들은 성경이 제시하는 규범들을 해석하고 보완하는 방편으로만 사용되어야 하며, 성경에서 제시된 인간관, 동기, 규범들의 빛 안에서 비판적으로 수용되어야 하며, 후자와 갈등을 일으킬 때는 그 사용이 유보되어야 한다. 생명의료윤리의 영역에서 응용될 수 있는 규범들을 제시하는 일반윤리학의 입장들로는 여덟가지 관점을 말할 수 있다.13)

(1) 공리주의. 공리주의에서는 사회의 구성원들의 최대다수에게 최대의 행복 또는 쾌락을 가져오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바른 행위로 간주된다(결과주의). 이 입장은 예컨대 의료재원(財源)을 배당하는 의료정책에 있어서 많은 재원을 요구하지만 소수의 사람밖에는 혜택을 받을 수 없는 특수한 의료행위에 재원을 배당할 것인가, 아니면 다수의 많은 환자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평범한 의료행위에 재원을 배당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고가의 장비와 의술이 요구되는 질병이 치료가능해지면서 의료정의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오늘날 이 규범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규범의 무차별적인 적용은 다른 차원에서 의료정의에 해를 가할 수 있다. 곧 총량적 결과를 산출하는 행위가 가장 도덕적인 행위로 간주될 경우에, 불치의 질병을 가진 환자에 대한 치료와 간호, 노인에 대한 치료가 소홀히 될 수밖에 없으며, 오랜 세월 간호해도 결과가 신통하게 나타나지 않는 환자의 경우에 안락사가 더 적합한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 곧 공리주의의 원리가 의료정의를 깨뜨리는 방향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그 역으로도 사용될 수가 있으므로 이 원리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 여부를 판단할 수가 없다. 곧 어떤 경우에 이 원리를 적용해야 하고 또 어떤 경우에 적용을 해서는 안 되는가를 결정해줄 상위의 규범이 필요한 것이다.

(2) 의무론. 칸트와 계약사상가들에 의하여 대표되는 이 이론은 공리주의와 반대의 길을 걷는다. 의무론은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1. 윤리적으로 바른 행위는 결과나 내용을 고려하지 않고 다만 어떤 준칙에 따라서 행동하는 행위다. 물론 이 준칙은 일반적인 입법이 되었을 때도 보편적으로 타당한 준칙이어야 한다. “너의 행동을 지배하는 규칙이 일반적인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동하라.” 2.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간주된다. 3. 의무의 내용은 하나님이나 사회와 같은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고 오직 행위자의 이성에 의해서만 주어지며, 여기서 자기이익도 배제되지만 정서나 감정도 배제된다.

기독교윤리는 하나님이 제시하신 규범에 엄격히 순응하는 윤리라는 점에서 강한 의무론적 특징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나의 행동이 일반적인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는 공리는 황금률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기독교윤리학은 두 가지 점에서 의무론과 입장을 달리한다. 1. 의무론에서 인간관계는 법적 관계로 규정된다. 의무에 따라서 어떤 준칙을 준수하는 인간들의 공화국이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여분의 요소로 밀려나고 정서와 감정은 윤리적인 것이 자리잡을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의무론의 틀만을 가지고는 계약관계에 근거한 의료행위의 비인간화를 극복하기 어렵다. 2. 의무론은 인간의 이성이 보편적 가치의 인식주체라는 신념을 가지고 이성으로부터 규범을 끌어내지만, 기독교윤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죄에 손상된 이성은 자기이익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이용될 뿐만 아니라 또한 주관성을 탈피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를 판단하는 보편적인 규범이 인간의 이성에서 도출된다는 자율성의 원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3) 자연법 이론. 이 이론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대표되는 이론으로서, 인간의 삶의 구조 곧,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묘사로부터 책임적 행동을 위한 규준(prescription)을 도출한다. 하나님은 만물 안에 영원한 법(lex aeterna)을 두셨는 바, 이 법은 만물의 목적으로서 하나의 가능태(potentia)로 주어져 있다. 이 가능태로부터 현실태가 발전하게 되는데, 가능태를 현실화하는 행위는 선한 행위로 간주된다. 인간은 자연 또는 본성의 법(lex naturae)안에서 영원한 법에 참여하며, 이때 본성 가운데 있는 이성이 목적 곧 영원한 법을 인식한다. 여기서 인간의 이성은 인간 자신의 자의적인 판단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적에 주목하게 되므로 하나님이 주신 자연스러운 삶의 목적에 배치되는 행위 예컨대, 피임이라든가, 성전환수술, 의료기술의 자의적 남용 등이 견제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지적될 수 있다. 1. 인간의 본성은 다양한 충동과 성향을 가지는데, 그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이성만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곧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이성만을 특별히 선별해낸다는 것은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어떤 신념 내지는 가치체계가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예컨대 자연법 이론의 배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관과 우주론이 깔려 있는 것이다. 2. 이성을 포함한 인간의 본성이 과연 윤리적 규범을 도출해낼 수 있을 만큼 깨끗하고 온전한가? 과연 본성은 그 본성에 따라서 행동하기만 하면 보편적으로 타당한 윤리적 실천을 할 수 있을 만큼 조화롭고 완전한가?

(4)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의무론과 입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의 자율적 이성에 의하여 도출된 규범이 정당성을 부여받으려면 인류보편의 입법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제한을 가함으로써 인류를 위한 윤리를 지향하고 있는데 반하여, 자유주의에서는 각 개인의 자율적 권리를 중요시한다. 여기서는 각 개인이 원하는 내용이 중시된다. 이 이론에서는 각 개인이 원하는 바를 획득할 권리는 천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낙태권이나 폐경 후의 인공수정을 통한 임신도 당당한 개인의 권리로 주장된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의료윤리의 차원에서 후견주의적인 의사의 의료행위에 대한 환자의 요구권(claim right)을 확립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기독교윤리학의 입장에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세 가지 점에서 비평된다. 1. 자기의 권리를 도덕적 행위의 출발점으로 삼는 태도는 기독교윤리학의 출발점이 되기 어렵다. 기독교윤리학에서는 자기가 출발점이 되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관심이 출발점이 되며, 권리보다는 의무가 선행한다. 2. 모든 사회의 구성원이 각각 자기의 권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사회에서 타인은 경쟁자로 인식되는 반면 기독교윤리학에서는 타인은 경쟁자이기에 앞서서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면서 조화로운 유기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존재다. 3. 개인의 권리는 천부적이거나 생득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사회/정부에 의하여 부여되는 것이다.

(5) 공동체주의.14)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것인데, 덕은 사회적 관습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보면서, 공동체적 가치, 사회적 목적, 사회가 규정한 덕을 행하는 것이 바른 윤리적인 행위로 판단된다. 공동체주의적 의료윤리를 전개하는 캘라한(Callahan)은 개인의 건강이라는 것도 사회생활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15) 공동체주의는 전통/역사/관습/사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는 공헌이 있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들은 비평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1. 공동체주의에서 덕의 지평으로 말하고 있는 공동체의 개념이 무엇인지 애매모호하다. 매킨타이어와 같은 공동체주의자의 경우에 공동체는 통일된 가치관이 지배하는 희랍의 도시국가 정도의 규모를 염두에 둔 개념인데, 오늘날 매킨타이어가 상정하는 그와 같은 공동체가 과연 존재하는가가 문제다. 적어도 국가단위로 커진 오늘날의 사회 안에는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공동체들이 다원적으로 존재하는 형태를 띠고 있으므로 덕의 개념도 다원성과 주관성을 벗어날 수 없다. 2. 관습과 전통이 자연스럽게 보편적인 규범을 도출해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만큼 아름답고 선한가가 문제다.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들은 결코 선하지 못하며, 이들이 형성한 관습과 전통은 많은 경우에 외부에 대하여 폐쇄적이고 독단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동시에 공동체내의 관습과 전통은 이미 존재의 구조로 변해있을 경우가 많은데, 이 존재의 구조가 당위의 구조로 바뀌는 작업은 공동체의 자정능력을 통해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외부로부터 규범적 충격이 가해져야 이 존재의 구조는 바뀐다. 한마디로 공동체가 어떻게 선한 공동체가 될 수 있으며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공동체자체로부터 답변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6) 돌봄의 윤리(care ethics, zorg-ethiek). 돌봄의 윤리는 주로 여성의료윤리학자들에 의하여 형성된 이론으로서,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를 칸트적인 법적 계약관계로 보는 입장에 반발하면서, 환자와 의사 사이의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강조하는 입장을 말한다.16) 인간은 연약하고 가사적(可死的)이며, 타인에 의존하여 생존해야 하는 존재라는 점을 고려할 때 도덕이란 법과 규칙의 문제가 아니라 사려 깊은 돌봄과 타인에 대한 책임의 문제로 정의된다. 만스코트(H.A.M. Manschot)에 의하면 계산하지 않고 재지 않는 태도가 인간의 행복과 삶의 기쁨의 원천으로서, 자유로운 마음으로 간호가 주어질 때 간호는 더 포근하고 친밀해진다고 한다. 이때 공동체와 문화가 형성된다. 오늘날의 계약윤리는 베푸는 윤리로 전환되어야 한다.

돌봄의 윤리는 정서적 측면이 윤리학에서 중요시해야 할 요인임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에 공헌이 있다. 윤리학은 철학적 의무론의 전통의 주장과는 달리 정서적 측면을 배제하지 않는다. 불의한 현실을 보고 감정적으로 분노하는 것은 윤리적 반성의 계기가 되며, 정서적인 긍휼의 마음은 모든 도덕행위자들의 마음바탕에 깔려 있어야 하는 중요한 요소다. 뿐만 아니라 돌봄의 윤리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틀 안에서 권리논쟁에 참여하기 어려운 사람들 곧, 장애자들, 기타 의료치료에 의존하는 자들을 변호하기에 적합한 윤리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서적 양상이 돌봄의 전부를 포괄할 수가 없다. 예컨대 의료재원의 배당의 문제에 있어서는 감정보다는 엄격한 정의의 원리가 우선해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규칙과 원리가 뒷받침되지 않은 정서나 감정은 맹목으로 흐를 수가 있다.

(7) 결의론. 결의론은 한가지 사례에서 행해진 결정을 비슷한 다른 사례들에 적용하는 태도를 말한다. 여기서 전통적인 결의론과 현대의 결의론이 입장을 달리한다. 전자는 윤리적 원리를 특별한 사례에 적용하는 입장을 취하고, 후자는 사례로부터 윤리적 원리를 끌어내는 입장을 취한다. 모든 윤리학은 사례에 관계한다는 점에서 윤리학은 결의론을 의미 있게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러나 과연 사례로부터 윤리적 규범의 도출이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사례가 스스로 윤리적 판단을 산출해낸다는 것은 자연주의적 오류 곧, 존재-당위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사례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표준은 사례로부터 올 수 없고 외부로부터 사례를 향하여 주어질 뿐이다. 사례로부터 옳은 규범의 도출도 가능하지만 나쁜 규범의 도출도 가능하다. 예컨대, 안락사가 오늘날처럼 넓어진 이면에는 결의론의 단계적 발전이 중요한 기여를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임종시에 환자의 요구가 있을 때에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신체적 고통이 있는 경우에 안락사가 허용되더니, 다음에는 심리학적 고통의 경우에도 허용되었고, 다음에는 임종시가 아닌 경우에도 허용되었으며, 나중에는 본인의 의사를 묻지 않은 채 정신착란증세를 보이는 환자에게까지 확대적용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미끄러운 경사면의 논증, the slippery slope argument).

(8) 네 원리의 윤리. 이 윤리학은 현대의 철학적 의료윤리학계에서 가장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뷰챔프(T.L. Beauchamp)와 칠드레스(J.F. Childress)에 의하여 주장되고 있는 이론으로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도덕적 원리들이라고 간주되는 자율성, 무해성, 인애, 정의를 규범으로 하여 윤리적 반성을 전개한다.17) 그런데 여기서 이런 규범들은 “반증이 없는 한 인정되는 규범들”(prima facie normen)로 이용된다. 여기서 뷰챔프와 칠드레스는 존 롤즈(John Rawls)가 말한 반성적 균형(reflective equilibrium)의 방법론을 채용한다.18) 반성적 균형이란 규범과 현실 사이의 역학관계를 표현하는 용어다. 먼저 충분히 “숙고된 판단”(considered judgment)을 통하여 어떤 이론(규범)을 구성한다. 그리고 특별한 반증이 제시되지 않는 한 이 규범이 우선적으로 고려되고 이 규범에 따를 의무가 주어진다. 그러나 현실로부터 이 이론을 유지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는 이 규범의 적용은 일단 유보되고 그 규범과 예외적인 현실을 포함하는 “숙고된 판단”과정이 다시 시작되어 새로운 규범의 형성을 도모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는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완전에 가까운 형태의 규범의 도출을 향해 나아간다.

뷰챔프/칠드레스가 말하는 네가지 원리들이 윤리학에서 각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규범들 가운데 이 네가지 원리들을 선정한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뷰챔프/칠드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 원리들이 직관을 통하여 일반적인 원리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왜 3개나 5개가 아닌 4개가 선정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두 사람은 답변하지 못한다. 또한 4개의 원리들 상호간에 충돌이 일어날 때 어떻게 우선순위를 정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답변을 제시하지 못한다.



7. 나가는 말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정리해 보자. 의료행위란 육체와 영혼이 긴밀한 상관성 안에서 유기적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전인적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대상으로 하며,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보전하는 행동을 뜻한다. 의료행위는 인간의 전인적 생명의 보호와 보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복음을 통하여 작용하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한 영혼의 깊은 차원, 곧 속사람의 차원의 생명까지도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료행위의 옳고 그름 여부를 기독교적인 인간관과 규범의 지평 안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반성하는 것이 기독교생명윤리의 과제다. 기독교생명윤리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원한 존재로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타락함으로 인하여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포함한 고통 속에 있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빛 안에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전제한다. 질병과 질병으로 인한 고통의 극복은 의료행위의 임무이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질병과 고통 가운데는 의료행위로서 극복될 수 없는 것들도 있으며, 또한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이 설정하신 질서로서 인간을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들도 있다. 의료행위는 환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 아가페적인 사랑, 환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의료기술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목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의료행위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총량적이고 평균적인 복리의 증진을 고려해야 하지만, 이 목적을 위하여 불치의 질병을 가진 환자나 노인환자에 대한 치료가 희생되어서는 안된다. 의료행위는 법적 차원에서 공정성을 잃어서는 안되지만, 환자에 대한 정서적인 따뜻한 심성이 상실되어서는 안된다.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에서 의사는 항상 강자의 입장에 있고 환자는 자기의 생명을 의사의 손에 맡기는 약자의 입장에 있으므로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항상 법적 계약관계에 머무를 수가 없고, 후견적인 관계에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의사는 환자의 요구권을 존중해야 하지만, 환자의 요구권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규범을 깨뜨리는 요구를 해올 때는 요구권을 거부해야 할 때도 있다.

 

 

 

 

 

=======================================================================

1) 박형룡, “내세론” (성루: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95), 54-55;149-62; 박아론, “기독교종말론: 영생과 내세”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8), 30-33; 123-38.

2) 육체의 죽음이 영혼의 존재여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인간관을 견지할 때 놔사의 시점을 인간의 죽음의 시점으로 판정할 것인가, 아니면 심장사의 시점을 인간의 죽음의 시점으로 판정할 것인가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을 확립할 수 있다. 뇌사를 인간의 죽음의 시점으로 생각하는 견해의 배후에는 인간의 영혼이 뇌의 작용의 산물이며, 따라서 뇌의 작용이 중지되면 인간의 영혼도 사라진다고 보는 유물론적 인간관이 자리잡고 있다. 곧 전기스위치를 넣어서 전류가 흐르면 빛이 존재하다가 전기스위치를 꺼서 전류의 흐름을 차단시키면 빛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리듯이, 뇌의 기능이 정지되면 영혼 그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신체의 어떤 기능에도 그 존재여부를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의 죽음은 영혼의 죽음을 의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혼은 - 신자의 영혼이든 불신자의 영혼이든 - 결코 죽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육체의 죽음을 결정할 때 육체의 전체적인 작동기능이 정지되는 심장사 이외에 어떤 라른 기관의 기능정지도 인간의 최종적인 죽음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자궁의 기능이 정지되었다고 해서 죽은 자로 판단할 수 없듯이 뇌의 기능이 정지되었다고 해서 죽은 자로 판단할 수 없다.

3) J. 다우마, “개혁주의 윤리학” 신원하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9.

4) 이 틀의 기본골격은 J. Douma, Medische ethi다 (Kampen: Kok, 1997), 44-52 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5) John Calvin, Institutues of the Christian Religion (Grand Rapids: Eerdmans, 1989), I.15.4.

6) 박형룡, “인죄론”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8), 97-99.

7) 박형룡, “인죄론”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8), 98.

8) Calvin, ibid, I.15.3.

9) 신학에서는 죄로 말미암아 찾아온 죽음으로서 세가지 죽음을 말한다(박형룡, “내세론”, 51; 박아론, “기독교종말론: 영생과 내세”, 29.) (1) 인간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영적인 죽음. (2) 신체가 해체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적 죽음. (3) 끝까지 주님을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영혼과 육체가 모두 지옥의 형벌에 들어가는 영원한 죽음. 그런데 유의할 것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결코 존재의 소멸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번 창조된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육체적으로 죽을 때 영혼도 같이 소멸되어 없어진다는 생각은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생각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언제나 하나의 존재의 방식 또는 영역으로부터 또 하나의 존재의 방식 또는 영역으로의 이동을 의미할 뿐이다.

10) Douma, ibid., 52-55.

11) Ibid., 38-39

12) 이 내용은 S.I. 맥밀런, “현대의학과 성경”, 문창수 역 (서울: 백합출판사, 1974)의 내용을 발췌정리한 것이다.

13) 여덟가지 유형들에 관한 내용은 Douma, ibid., 60-91에 크게 의존해 있다.

14) 공동체주의의 윤리적 입장에 대하여 알아 보려면, Alasdaire MacIntyre, “덕의 상실”, 이진우 역 (서울: 문예출판사)를 보라.

15) D. Callahan, What Kind of Life?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90), 105ff.

16) Carrol Gilligan, In a Different Voic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28): H.A.M.Manschot, Levenskunst of lijfsbehoud (Utrecht: Universiteit voor Humanistiek, 1992).

17) Tom L. Beauchamp and James F. Childress, Principles of Biomedical Ethics: Fourth Edi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120-394.

18) John Rawls, A Theory of Justic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3), 20f, 48-51,120, 432.

참고문헌

Beauchamp, Tom L. and Childress, James F. 1994. Principles of Biomedical Ethics: Fourth Edition. Oxford University Press.

Callahan, D. 1990. What Kind of Life? New York: Simon and Schuster.

Calvin, John. 1989.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Grand Rapids: Eerdmans, I,15.3.

Douma, J. 1997. Medische ethiek. Kampen: Kok.

Gilligan, Carrol. 1982. In a Different Voic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MacIntyre, Alasdaire. 1997.『덕의 상실』. 서울: 문예출판사.

Manschot, H.A.M. 1992. Levenskunst of lijfsbehoud. Utrecht: Universiteit voor Humanistiek.

Rawls, John. 1973. A Theory of Justic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다우마, J. 1997.『개혁주의 윤리학』. 신원하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맥밀런, S.I. 1974.『현대의학과 성경』. 문창수 역. 서울: 백합출판사.

박아론. 1998.『기독교종말론: 영생과 내세』.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박형룡. 1995.『내세론』.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 1988.『인죄론』.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벌코프, 루이스. 1994. 『조직신학상: 서론, 신론, 인간론』. 권수경·이상원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후크마, 안토니 A. 1999.『개혁주의 인간론』. 류호준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작성자 : 한국기독교생명윤리단체협의회 2015-06-12 13:31:16
생명주일 제정에 즈음한 기독교 생명선언문 (2001. 3. 29.)

 

생명주일 제정에 즈음한 기독교 생명선언문


한국기독교생명윤리단체협의회 2001. 3. 29. 채택

발표일 : 2001. 03. 29.

생명주일 제정에 즈음한 기독교 생명선언문


천하보다 귀하고 존엄한 인간의 생명은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나라에서 연간 150만 건 가량의 낙태가 이루어진다고 하며 이 비극적 현실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 자살사이트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으며 네덜란드의 안락사 합법화 소식을 계기로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 문제가 점차 사회적 이슈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곳곳의 불임클리닉과 생명공학연구소는 인간복제실험을 경쟁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복제 송아지를 만들어낸 수의학자는 3년 전부터 비공개적으로 인간배아복제실험을 해왔다고 공표하고 15개국에 인간배아실험 특허출원을 했다고 발표하였다. 세계각국이 인간배아복제실험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생명공학의 발전, 국가경쟁력을 이유로 실험을 허용하려고 하고 있다.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완성은 비윤리적이고 위험한 유전자 조작과 맞춤아이 생산을 예고하고 있다.


의학의 급속한 발전은 생명을 지키기보다는 오히려 생명을 위협하고 있으며, 생명의 신성함보다 삶의 질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도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인간복제라는 생명의 바벨탑까지 쌓으려는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성경적 생명관을 가지고 이 사회에서 생명의 청지기로 마땅히 해야할 일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고 존엄하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고난을 당하셨다. 생명은 어떠한 이유로든지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생명의 가치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동일하며 인간이 생명의 가치를 결정할 수는 없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며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 질병을 치료하거나 생명을 연장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다. 삶과 죽음의 모든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을 어떻게 지키고 유지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허락하신 생명의 대한 책임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해야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생명의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 하나 세상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음을 회개하며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우리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위기에 처한 생명의 문제에 신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4월 중의 한 주일을 '생명 주일'로 제정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생명, 천하보다 귀한 생명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따라 인간의 생명은 물론 동물과 식물 등 인간이 다스리고 유지하여야 할 모든 생명에 대한 책임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1. 우리는 인간생명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음을 인정하며, 생명은 수정과 동시에 시작되며, 삶과 죽음의 모든 권한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한다.


2. 우리는 나와 우리 가족, 교회, 사회가 부딪치는 삶과 죽음의 다양한 생명윤리의 문제에 대해 성경적인 생명관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결정할 것이며 이 사회에 생명을 존중하는 법과 정책이 시행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3. 우리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7-39)는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주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고귀한 생명을 지키는 선한 청지기의 역할을 하기로 다짐한다.

작성자 : 이상원 2015-06-12 13:28:20
생명윤리논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와 전략 (2001. 12. 1.)

 

생명윤리논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와 전략





이상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교수)

성산생명의료윤리연구소 설립 4주년 기념 심포지엄 "생명은 수정순간부터" 주제발표 자료

발표일 : 2001. 12. 01.

 

들어가는 말

최근의 생명윤리논쟁들을 검토해 보면 몇 가지 재미있는 특징들이 발견된다. (1) 논쟁의 한편은 인간의 생명보호에 절대적인 우선적 가치를 부여하는 반면, 다른 한편은 생명보호는 때에 따라서는 다른 가치들에 자리를 양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 논쟁은 평행선을 달리다가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난다. (3) 생명보호에 절대적 우선권을 부여하는 입장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세에서는 항상 밀린다.

관전자들의 일반적인 정서는 대체로 생명보호에 절대적 우선권을 두는 입장에 대하여 그리 달갑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다. “원리는 좋은데, 그 주장은 현실성이 없다. 대세는 기울었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입장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려고 하는가? 적절한 선에서 양보하는게 낫지 않은가?” 관전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명보호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자들을 도대체 말이 안통하고, 과학의 발전과 성과에 항상 부정적으로 제동을 걸려고 하고,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들로 치부하기 일수이며, 그 중에 상당수는 혐오의 감정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생명보호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입장에 있는 자들은 대체로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면 관전자들이 이런 반감을 갖게 된 것은 기독교인들이 그동안 보여온 윤리적인 타락에 대한 반발의 성격도 없지 않으나 그 뿌리는 이보다 더 깊은데 있다. 비기독교인 들의 반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배타적인 구원관과 절대 윤리적 입장 그 자체를 본능적으로 싫어하는데 기인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배타적 구원관과 절대적인 윤리적 입장은 자신들의 합리성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생명윤리운동가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 불리한 상황 속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사태가 진전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해갈 수 있으려면 운동을 해야 하는 근거가 무엇이며,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이며, 또한 전략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의 근거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은 어떤 근거에서 시작되는가? 우리가 이 운동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이 운동을 정당화시켜 주는 신학적이고 윤리학적인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방대한 신학적 철학적 내용을 가진 이 근거 중에서 본인이 오늘의 주제와 관련하여 기독교적 인간과과 윤리관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한다.


(1) 인간관의 문제.

기독교적 인간관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내용들 가운데 생명윤리문제들에 직접 관련되는 중요한 부분은 두가지다. 하나는, 생명의 시작점에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생명의 종결시점에 관련된 것이다.

성경은 생명의 시작점에 대하여 명시적인 가르침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태아와 관련된 성경의 언명들을 종합하여 현대 의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해 보면, 수정란 형성시점부터 이미 태아는 독립된 인격적 주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다윗은 시편51편5절에서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또 시편138편13절에서도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라고 말한다. 다윗은 태중에 있는 자기를 묘사할 때 “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누가복음1장41,44절에 보면 엘리사벳이 태안에서 태아가 뛰어 노는 것을 보고 “아이”가 뛰어논다고 표현하고 있고, 누가복음1장46,47절을 보면 태중에 있는 예수님을 보고 “구주”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성경에서는 “나”라든지, “아이”라든지, “구주”와 같은 표현들은 모두 독립된 인격적 주체를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곧 성경은 태아에 대하여 잉태된 시점부터 독립된 인격적 주체로 간주한다.

성경적인 전거 이외에도 유전공학은 수정순간을 독립된 인격적 주체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지원한다. 독립된 인격적 주체의 시작점은 그 이전과는 불연속성이 클수록 설득력을 얻는다. 원시선의 출현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요소의 출현이 아니고 이미 존재하던 요소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가시화되는 현상일 뿐이다. 뇌의 인식기능이 발현되는 시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자와 난자가 만들어져서 수정란이 형성되기까지 DNA의 염기배열구조는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를 겪는다. 성세포가 정자나 난자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자연적인 유전자조작이 일어나는데 이 조작이 23개의 염색체 DNA 안에서 모두 일어나므로 정자는 840만 가지의 조합 중에서 하나가 선택된다. 난자도 역시 840만 가지의 조합 가운데 하나가 선택된다. 정자는 적어도 수억마리 가운데 하나가 선택된다. 선택된 정자가 난자와 만나 결합될 때에도 정자의 23개 염색체와 난자의 23개 염색체 사이에서 새로운 조합이 형성되므로 또 다시 840만 가지의 조합 가운데 하나가 선택된다. 그러므로 부모로부터 수정란이 형성되기까지는 840만(정자)X수억(정자의 선택)X840만(난자)X840만(수정시)의 새로운 조합 가운데 하나가 선택되는 셈인데, 이 정도의 조합방식이 우연히 일어날 확률은 사실상 0이다. 이 조합방식을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용어는 “새 창조” 밖에는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단 수정란이 형성된 이후의 DNA는 특별한 외부적인 충격이 없는 한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 곧 수정란 형성시기 이외에 어떤 다른 변환도 수정란시의 변환과 절대적으로 비교될 수 없다. 따라서 수정란시점을 인간이라는 새로운 인격체의 시작점으로 잡는 것은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인간의 생명이 종결되는 시점에 관련하여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이 죽는다는 말은 육체적 생명이 종결된다는 것만을 의미할 뿐이며, 육체적 죽음여부와는 상관없이 영혼은 명료한 의식을 가진 상태로 존재하기를 중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점에 있어서 기독교적 인간관은 현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유물론적 인간관과 예리하게 대조된다. 유물론적 인간관이란 물질세계에 작용하는 인과적 원리를 가지고 인가의 정신 또는 영혼의 현상들을 설명해내려는 시도를 말한다. 유물론적 인간관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현상이란 뇌세포와 뇌신경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므로, 뇌세포나 뇌신경이 그 기능을 다해 버리면 소멸되어 버린다. 그것은 마치 전구에 전원이 들어오면 불이 켜졌다가 전원이 나가면 불도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인간의 신체가 죽으면 영혼도 소멸되어 버린다. 죽음의 시점을 뇌사로 앞당겨서 정하거나 안락사를 자유롭게 시행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와 같은 인간관에서 출발한다. 뇌사를 죽음의 시점으로 삼거나 안락사를 허용하는 자들은 삶의 질을 이야기하면서 정신적인 기능이 살아있는 전기적인 생명만이 살 가치가 있는 생명이요, 정신은 죽어 버리고 육체적 생명만 유지되는 생명은 동물적인 생명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유지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육체의 소멸이 정신적인 생명의 의식적 존재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며 정신적인 생명의 존재가 중단되는 일이 있을 수 없다면 전기적인 생명과 생물학적 생명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지며 따라서 뇌사, 안락사, 자살 등에 대한 판단은 180도 달라진다.

기독교적 인간관은 신체가 소멸되어도 영혼을 결코 소멸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혼은 의식을 잃지 않으며, 의식에 수반되는 고유한 기능들도 상실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없다. 누가복음16장19절에서 31절까지에 있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인간이 죽은 이후에도 지옥에 간 영혼이나 천국에 간 영혼이나 모두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요한계시록6장9절과 10절은 순교자들의 영이 하나님께 큰소리로 부르짖으면서 기도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순교자들의 영이 의식이 없다면 이런 행동이 불가능할 것이다. 욥기14장22절을 보면 육체적 죽음을 당한 영혼이 자기의 살이 땅에 묻혀 썩는 것을 아파하고 슬퍼하기까지 한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상과 같은 표현들은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영혼이 의식을 가지고 존재함을 뜻한다. 성경에서 사용된 죽음이라는 말은 어느 곳에서도 존재의 소멸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일이 없다. 성격에서는 다만 한가지 존재의 방식 또는 존재의 영역에서 다른 존재의 방식 또는 존재의 영역으로 이동했다는 의미에서 죽음이라는 말을 사용할 뿐이다. 한번 창조된 인간의 영혼은 존재가 잠시라도 중단되는 일이 없다. 물론 영혼이 육체와 함께 있을 때는 양자가 긴밀하게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적인 관계 안에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영혼은 육체가 소멸된 후에 육체가 없는 상태에서도 존재와 의식과 기능을 상실하지 않는다. 다만 뇌를 포함한 신체가 노쇠하거나 병이 들어 고장나면 신체를 통하여 영혼의 의식이나 기능을 표현하는 능력이 약화되거나 상실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치매환자나 정신병자나 혼수상태에 있는 환자나 뇌사상태에 있는 환자의 경우에 그의 의식이 상실되었거나 영혼의 존재에 손상이 가해진 것이 아니라 의식의 신체적 표현방식에 문제가 생긴 것일 뿐이다. 인간은 영혼의 존재에는 결코 손댈 수 없고 다만 신체를 죽일 수 있을 뿐이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은 신체를 죽이는 행동을 금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뜻으로 해석될 수 없다. 따라서 신체를 죽이는 모든 행위는 살인행위가 된다.


(2)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이 기독교윤리운동으로서의 특징을 상실하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제시한 규범의 틀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원칙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이 점에 있어서 기독교윤리는 자율성과 결과론으로 요약되는 현대인의 윤리사상과 대조된다.

현대인들은 행위의 규범을 자기 스스로 설정한다. 그것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 있어서처럼 이성일 수도 있고, 칸트에 있어서처럼 실천이성일 수도 있고, 궤변론자, 직각론자, 정서론자들처럼 주관적인 감정이나 정서일 수도 있고, 공동체주의자들에 있어서처럼 사회의 관습이나 전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인간 자신이 규범을 설정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현대인들은 행위의 결과가 어떻게 산출되는가를 보고 행위규범을 자율적으로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결과를 판단하는 기준은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쾌락과 행복을 안겨다 주느냐 하는 것이다. 배아복제가 질병의 치료에 획기적인 유익을 가져다 준다면 허용되어야 한다! 사후피임약이 겉으로 드러난 낙태횟수를 줄일 수 있고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계기만 된다면 허용되어야 한다! 낙태가 임산부의 권익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허용되어야 한다! 안락사가 본인이 원하고 환자의 가족의 경제적이고 정신적인 부담을 덜어주고 의료자원의 절약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면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윤리는 하나님이 제시한 규범에의 순종에 절대적인 우선권을 부여한다. 기독교윤리는 규범의 정당성 여부를 따질 때 그 규범에 따라서 행동해야 하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를 결정적인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만 타당한 행동일 수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면 함정에 빠진다. 궤변도 극히 합리적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 설명은 단기적인 결과를 설명할 수 있어도 장기적인 결과를 설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합리성은 자아의 이익과 관심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로 이용되기 마련이다. 기독교윤리는 행위의 결과도 고려에 넣지만 그것도 역시 결정적인 기준은 아니다. 행위의 극히 단기적인 결과는 예측이나 계산을 가능해도 장기적인 결과는 결코 예측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과거, 마음속에 숨어 있는 동기, 먼 미래에 끼칠 행위의 결과까지도 완전하게 아시는 상태에서 규범을 주셨기 때문에 이 규범은 절대적으로 신뢰할만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규범준수의 결과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워도 이런 신뢰에는 변함이 없다. 인간의 사고력의 한계 때문에 설명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하나님의 규범은 성경에 있는 규범들과 일반은총의 영역에 있는 규범들로 나누어진다. 성경에 있는 규범들 가운데 사랑의 대강령, 황금율, 십계명 기타 윤리훈들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규범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별히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하나님이 성경에 합법적으로 살인을 허용한 경우(예컨대 고의적 살인에 대하여 사형을 부과하고 있는 창세기9장6절과 같은 경우.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하나의 특수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사형제도폐지의 성경적 전거가 될 수 없다)가 아닌 한, 생명윤리문제들을 판단할 때 가장 중시되어야 할 규범이며, 어떤 합리적인 설명이나 결과에 대한 계산으로도 타협될 수 없는 규범이다. 이와 동시에 성경에 명시된 창조질서들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규범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생물들을 각 종류대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각 종간의 혼합교배나 유전자조작을 통한 종간교배, 식물과 동물간 교배, 인간과 다른 동물간 교배가 부당한 질서임을 선언한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여 창조하신 사실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성전환을 금지하며,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잉태의 수고를 거쳐서 자녀를 낳도록 한 질서는 인간복제방식을 통한 후손출산을 금지한다. 그러나 기독교윤리는 일반은총의 영역에 하나님이 두신 규범들 · 일반 철학적 윤리학에서 제시된 준칙들, 의학이 그 고유한 영역 안에서 제시한 의술시행상의 준칙들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제시한 규범들은 일반은총의 영역에 두신 규범들보다 언제나 우선권을 부여받으며, 양자가 충돌을 일으킬 때는 후자에게 양보를 요구한다.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의 목표

그러면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이 목표에 대해서는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1)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간의 생명이 최대한 보호받고 정당한 이유 없이 침해당하지 않는 사회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도덕적인 설득과 교육에서 출발해서 입법적 차원에서 결실을 볼 때 비로소 완결된다.


(2)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은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는 운동이다. 사회정의란 무엇인가? 존 롤즈는 사회적 최저선(social minimum)을 통하여 사회 안의 소외계층의 인간다운 삶을 우선적으로 보장한 후에 창의력과 경쟁을 허용하여 재화를 획득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을 정의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롤즈의 입장은 성경이 말하는 정의와 내용과도 맥이 통한다. 하나님은 힘이 없고 연약한 계층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지신다. 하나님이 아말렉 족속을 천하에서 도말시켜버리라고 명령하신(신25:17-19) 이유는 이스라엘이 행군하는 중 아말렉 족속이 이스라엘의 피곤함을 틈타서 뒤쳐진 약한 자들을 쳤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있는 나그네, 과부, 전쟁포로들을 선대하도록 명령하고 있는 모세의 율법이나 고아와 과부를 착취한 죄를 일관성 있게 지적하는 선지서의 말씀들, 99마리의 성한 양을 우리에게 그대로 두고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서 떠나는 하나님의 모습 등은 가장 약하고 비천한 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기독교인들과 교회에 주어진 과제임을 시사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의 소외계층의 가장 밑바닥에 배아들, 태아들, 장애신생아들, 말기질환자들이 자리하고 있는 바, 이들이 첨단의학과 생명공학 기술의 힘 앞에 일방적으로 희생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생명윤리운동은 곧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는 셈이다.


(3) 그런데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의 전망은 그다지 밝은 것이 아니다. 때로는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실수로 인한 이미지 실추 때문에, 그리고 더 크게는 기독교의 구원관과 윤리관 그 자체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 때문에,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과학자들의 무절제한 호기심충족, 집단이기주의 그리고 첨단의학관련산업체들의 무분별한 상업적 이익추구 등으로 인하여 현실 속에서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이 시민들을 도덕적으로 설득하고 입법의 단계에서 열매를 거두는 작업은 매우 힘겨울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 갈수록 더 악화되어 갈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사회운동은 이 땅위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땅위에 우리의 힘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주지 않고 있으며, 그런 기대를 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사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을 가진 자들로 구성되며, 이미 역사 안에 임하여 있다. 이 나라의 미래적인 완성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사회운동은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가? 우리는 두 가지를 이루고자 한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하여 이미 참여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증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빛과 영향력을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다른 하나는 세상의 악이 크게 발현하는 것을 어느 정도라도 통제하여 세상이 복마전과 같은 곳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을 제어하고 어느 정도라도 사람이 살 수 있고, 부분적으로라도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로 형성시켜 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목표를 위하여 그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의 기대대로 열매를 거두든지 못 거두든지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다.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의 전략

그러면 이런 쉽지 않은 현실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떤 전략을 가지고 기독교생명윤리운동에 임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세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지금까지 강조해 온 것처럼 성도들을 대상으로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을 정당화시켜 주는 이념적 근거로서의 기독교적 인간관과 윤리관, 그리고 나아가서는 기독교세계관을 교육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이유가 뚜렷하고 명확해야 운동이 힘을 얻는다. 어차피 생명윤리논쟁은 반대진영과의 힘겨루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국민의 1/4가량을 점유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모든 채널을 동원하여 철저하게 교육시켜서 저변을 확대시켜야 한다.


(2) 시급한 진단과 대응을 촉구하는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시급한 문제들에 대한 신속한 대응도 필요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토대를 견실하게 다져나가는 일도 필요하다. 운동과 동시에 미래에 이 운동을 담당해나갈 인재양성도 동시에 실시해야 하며, 교인들과 기독청년들의 교육을 위한 연구와 프로그램 마련에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 예컨대 히포크라테스 운동은 생명윤리라는 것 자체가 없었던 열악한 시대에 극소수의 개혁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숫자의 열세와 사회적인 소수집단이라는 불리한 조건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타협하지 않고, 그리고 일관성 있게 운동을 전개해 온 결과 2-3백년 후부터는 누적되어 온 힘이 마침내 드러나기 시작하여 향후 20세기 후반 제네바선언이 있기까지 명실상부한 서구의료의 도덕적 지주역할을 훌륭히 수행해낼 수 있었다. 네덜란드의 사회경제운동 가운데 하나인 사회보장제도운동도 마찬가지다. 네덜란드에서 사회보장제도운동이 시작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이때부터 수많은 세미나와 컨퍼런스와 회의를 거치면서 양차대전이라는 대재난을 겪는 가운데서도 운동은 계속되었고, 축적된 운동의 누적된 힘이 마침내 1960년대에 전국적인 사회보장제도의 완결을 가져오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 결과를 얻기 위하여 네덜란드의 기독교인들은 80년간을 싸웠다. 50년, 또는 100년을 내다보면서 내가 못하면 후손이 이어받아서 한다는 긴 안목을 가지고 오늘 벽돌 한장한장을 견실히 쌓아나가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기도와 땀과 연구가 오랜 시간동안 누적되어 토대가 견실해지면 자연스럽게 힘이 붙고 그때 비로소 열매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3) 기독교인들을 위한 교육과 더불어 비기독교세계를 향해서 우리의 입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하는 과제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발달된 과학에 뒤따르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태도와 더불어 발달된 과학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인류사회를 위하여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도 동시에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주의(scientism)와 과학(science)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들은 과학을 가지고 인간의 삶의 전 영역을 다 설명할 수 있다거나 과학연구를 통하여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환상을 말하는 과학주의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하겠지만, 과학연구 그 자체는 반드시 기독교적 세계관과 충돌되는 것이 아니며, 적절한 규범 안에서 선하게 활용되면 인류사회에 유익을 가져 올 수 있다는 인식 하에 과학적인 대안제시를 위한 노력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작성자 : 이상원 2015-06-12 13:23:18
기독교는 생명공학의 발전을 가로막는가? (2002)

 

기독교는 생명공학의 발전을 가로막는가?




이상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교수)

[기독교사회윤리], 2002년, 제5집, 105-21

발표일 : 2002.

 

  

기독교인들이 21세기의 중심과학인 생명공학이 기독교신앙에 대하여 가해 오는 도전의 위험성과 심각성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생명공학에 대한 평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데에는 몇가지 이유들이 있다고 판단된다. 첫째는, 생명공학연구의 구체적인 내용들이 너무 전문적인 것들이어서 일반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거나 접촉하기가 용이하지 않고, 둘째로, 생명공학연구가 인류에게 가져다 줄 것으로 예상되는 혜택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으며, 셋째로, 생명공학연구에 대한 비판이 자칫하면 과학발전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역류하면서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는 격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가지 이유들 가운데 세 번째 이유가 아마도 비판을 주저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닌가 판단된다. 지금은 반기독교적이라고 해서 반대했는데, 일정한 시점이 지난 후에는 기독교적 관점에서도 받아들여질 만한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일전에 어떤 학자가 비꼰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새롭게 나타나는 과학연구결과에 대해서 처음에는 기독교적인 관점을 제시하면서 반대만 하다가 그 연구결과가 보편적으로 인정되어 혜택을 베풀어 줄 때가 되면 역시 기독교적인 관점을 내세우면서 그것을 합리화시키면서 혜택에 슬그머니 무임승차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 아닐까?


다시 말하자면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가 기독교신앙의 이름으로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정죄할 때 처했던 상황과 비슷한 상황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재판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천동설이 기독교적인 우주론이라는 전제하에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반기독교적인 우주론으로 비판했는데, 후일 이 비판이 오류임이 판명되지 않았는가? 이처럼 생명공학에 대하여 섣부르게 평가를 내렸다가 같은 오류에 빠지게 될 우려가 있는 것이 아닐까? 예컨대, 현 단계에서 인체관련 생명공학의 정당성 여부를 따질 때 결정적인 판단기준 가운데 하나로 제시되고 있는 인간학적 입장 곧, 수정란이 형성된 시점부터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인간론은 과학적 연구가 더 진전이 된다면 오류임이 판명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가 되면 수정란을 인간으로 보고 제시했던 모든 판단들이 일거에 무너져 버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우선 이 두가지 사례들에 대하여 좀더 분석을 진행해 보자. 갈릴레오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기독교신앙과 과학적 연구결과의 대결인 듯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나 실상은 중세신학에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기독교신학의 우주론으로 잘못 해석한 “하나의 해석”과 천동설과 나란히 존재하고 있었다가 코페르니쿠스에 의하여 새롭게 과학적으로 조명된 우주에 대한 “또 하나의 다른 해석”으로서의 지동설간의 대결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우주는 지구가 그 중심에 고정된 점으로서 존재하고 그 주위를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이 돌고 있고, 가장 멀리 떨어진 마지막 궤도에는 위치가 고정된 별들이 자리잡고 있는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성경은 천동설을 제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지동설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갈릴레오 사건은 현상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기독교신앙의 대립이 아닌, 관찰결과를 토대로 한 하나의 사변적 해석과 또 하나의 사변적 해석의 대결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수정란에 대한 견해는 갈릴레오 사건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천동설이라는 우주적 패러다임이 무너졌던 이유는 천체에 대한 관찰의 결과 가운데 인과론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부분을 사색을 통하여 설명하려고 했다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천동설이 과학적 사실로 제시되었으나 실상은 가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수정란을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판단은 일어나는 현상과 과정에 대한 사실적인 관찰결과를 보고 어떤 사색이나 인과의 설명없이 내린 판단이라는 점에서 갈릴레오 사건의 경우와는 성격이 다르다. 수정란을 인간으로 판단하게 된 과학적 사실들은 관찰의 결과에 엄밀하게 근거한 것으로서 시간과 장소가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사과의 성분이 어떤 것인가를 정밀한 관찰을 통하여 밝혀냈을 경우에 이 관찰의 결과가 시간과 장소가 달라진다고 해서 바뀔 수 없는 것과도 같다.


갈릴레오 사건과 수정란에 대한 과학적 발견의 사례들은 기독교와 과학의 관계를 설정하고자 할 때 다루어야 할 두가지 쟁점을 제시한다. 하나의 쟁점은 우주의 기원과 구조 전체에 대한 해명을 시도하는 것은 과학의 고유한 과제인가? 다른 하나의 쟁점은 관찰과 실험의 결과에 대한 사실적 제시는 기독교신앙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특히 과학의 한 분과로서의 생명공학의 특성을 고려할 때, 몇가지 새로운 쟁점들이 추가로 제시될 수 있다. 생명공학은 유전자의 구조와 작용과정, 생명체의 발생과정을 관찰하고 분석하여 그 결과를 제시하는 생명과학과 유전자의 구조와 작용과정, 생명체의 발생과정에 인공적 기술을 가지고 개입하여 자연상태에서 존재하는 유전자나 생명체와는 다른 유전자와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유전자조작기술을 의미하는 생명공학으로 분류될 수 있다. 생명과학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는 생명과학의 연구결과의 활용과 관련된 문제로서, 생명과학의 연구결과가 생명체의 기원을 해명하고 생명체 특히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제반 현상들과 작용들을 해명하는 근거로서 어느 정도까지 활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생명공학기술과 관련해서는 자연상태에 있는 생명체의 기본구조인 유전자구조를 조작을 통하여 변형시키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 정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기독교는 과학적 연구의 발전과 과학기술의 활용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보여 주고 있는가? 우선 우리는 기독교는 과학적 연구와 과학기술의 발전을 지원하고 있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신학적 근거로서 세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칼빈에게서 시작되어 향후 정통적 개혁주의 신학의 세계관과 신학의 골격을 형성해 온 일반은총론이 과학적 연구와 과학기술의 발전을 뒷받침해 준다. 칼빈은 인간의 지성에는 두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하늘의 일들에 관계하는 지성이고, 다른 하나는 지상의 일들에 관계하는 지성이다. 하늘의 일들에 관계하는 지성은 신지식과 이 지식에 부합하게 삶을 형성시키는 방법을 내용으로 한다. 지상의 일들에 관한 지성은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 참된 의, 미래의 복락과 관계하지 않고 현세의 삶 곧 정치, 경제, 예술, 인문학 등에 관계한다. 인간의 마음이 아무리 타락하고 왜곡되었어도 인간에게는 여전히 창조주로부터 부여된 경탄할만한 은사들이 있으며, 세계도처에서 나타나는 진리를 거부하거나 저주해서는 안된다. 이 은사들을 저주하는 것은 이 은사들을 주신 자를 저주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상당히 공평하게 시민적 질서와 규율을 배열하고 있는 고대의 입법가들, 정교한 탐구와 자연에 대한 묘사를 수행한 철학자들, 담화의 규칙들을 제정하고 이성에 부합하게 말하는 법을 가르친 자들, 의사나 수학자들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는, 성경은 인류를 구속하는 성령의 특별한 작용을 말함과 더불어 자연계와 인간세계 안에서 수행되는 인간의 지성적 재능들의 활용을 성령의 일반적 작용의 결과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린다”는 욥기33장4절의 고백,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신다”는 이사야42장5절의 말씀들은 생명의 창조, 유지, 발전에 성령이 참여하고 계심을 명확히 보여주며, 바른 삶에 대한 지혜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도 성령의 작용임을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신다”는 엘리후의 말을 통해 선언되고 있으며(욥32:8), 여호와의 신을 받아 예술적 재능을 갖춘 장인들이 성막을 만드는데 기여한 사실(출28:3; 31:3; 35:30-33)은 예술적 재능의 영역에 성령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70인 장로(민11:17,25,26), 여호수아(민27:18), 사울(삼상10:10), 다윗(삼상16:13,14), 사사들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임무수행을 하게 했다는 반복적인 진술(삿3:10; 6:34; 11:29; 13:25; 14:6,19; 15:14)등은 정치적 임무수행에도 성령이 참여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셋째는, 기독교의 신관은 과학연구의 발전과 과학기술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제1계명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고 명령함으로써 신을 경배하는 관습과 관련하여 극히 배타적인 태도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기독교인들은 이 명령에 순종하여 이 세상에 제시되어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숫자의 신들 가운데 오직 하나의 신만을 섬기도록 명령받는다. 종교혼합주의와 종교다원주의는 원천적으로 신숭배관습들로 간주되어 배척당한다. 그런데 이처럼 철저하게 배타적인 명령이 과학연구와 과학기술의 개발과 활용의 문호를 활짝 열어 놓았다. 어떻게 이처럼 배타적인 명령이 과학연구와 기술의 발달의 문호를 열어 놓을 수가 있을까?


살아 있는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기독교 신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하나님 한 분을 제외한 모든 신들은 실재하는 신들은 아니다. 이 모든 신들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구상해낸 신에 관한 상들의 투영이 형상화된 것들이다. 그런데 모든 형상화된 신들은 세계 안에 실재하는 어떤 강력한 힘들을 상징한다. 이 힘들은 인간의 인생행로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인간의 힘으로 통제가 불가능한 거대한 세력들이다. 항해하는 선원들 앞에 다가오는 거대한 태풍, 넓은 평지에서 맞이하는 번개, 인간의 생존을 좌우하는 태양, 달, 대지 등이 그 예들이다. 신들은 존재하지 않지만 신들이 상징하는 이 거대한 세력들은 실재한다. 한편 “신들을 섬긴다”는 말은 신들의 노예가 된다는 말이고, 이 말은 이 거대한 피조물의 세력들의 노예가 된다는 말이며, 이는 결국 인간이 피조물의 노예가 된다는 뜻이다.


이와같은 시각에서 볼 때 제1계명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 한 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될 것을 명령하는 자유의 대헌장이다. 인간은 하나님 한 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로부터 자유롭다. 피조세계는 인간의 경배를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정복”의 대상이며, “다스림”의 대상이며, “식물을 얻는 원천”이다(창1:28-30). 심지어 천사들까지도 결코 인간의 경배의 대상이 아닌데, 왜냐하면 천사들도 성도들을 섬기도록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심부름꾼(히1:14)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1계명은 하나님 한 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을 비신화화 또는 세속화시킴으로써 인간이 피조물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이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피조물이 신으로 승격되어서 대지가 여신으로 숭배될 때 대지를 탐구하고 대지 속에 들어 있는 원유, 광물, 지하수, 음식물들을 파내어 활용하는 행동은 여신의 배를 더듬고 배를 드릴로 파서 그 속에 있는 내장을 꺼내는 독신적인 행위로 간주될 것이며, 인간이 피뢰침을 만들어 감히 번개를 소멸하는 행동을 해서도 안될 것이다.


과학의 연구는 두 단계로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첫 번째 단계는 현상과 작용에 대한 정직하고 정확한 관찰결과를 제시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현상이나 작용이 일어나게 된 원인 곧 인과관계를 추적해 들어가는 것이다. 인과관계의 추적은 통상적으로 두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실험을 통하여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찰 결과나 실험결과를 사유 안에서 논리적으로 시공간적으로 확대하여 현재의 현상과 작용의 시간적인 먼 과거의 기원을 해명하고 우주 전체를 해명하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인 관찰 결과의 정직한 제시는 기독교신앙과 전혀 대립되지 않는다. 이 작업은 하나님의 일반은총 또는 성령의 일반적 사역의 정당한 표현으로 인정된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경의 서술방식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이 자연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묘사할 때는 언제나 일어나는 형상에 대한 정직한 관찰결과를 제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뜨는 데부터 해지는 데까지”(시113:3)라는 표현은 태양의 움직임이라는 우주의 현상에 대한 관찰 결과를 단순하고 정직하게 서술한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사건에 대해서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1:9)고 기록한 것도 동일한 서술법에 의하여 제시된 것이다. 현상에 대한 정직한 관찰이라는 점에서 성경은 자연적 사건과 초자연적 사건의 구분을 두지 않는다.


현상에 대한 정직한 관찰 결과는 물론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신 구속주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창조후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데는 도움이 되는데, 이 점은 생명과학의 관찰결과의 제시도 마찬가지다. 고배율의 현미경과 컴퓨터를 이용하여 들여다 본 신체의 극미의 세계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바늘끝 보다도 더 작은 공간 안에 있는 더 작은 핵 속에 30억개의 뉴클레오티드들이 동일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수소결합에 의하여 나선형으로 질서정연하게 들어 있으며, 이 안에 수만가지의 단백질을 생성할 수 있는 유전정보가 들어 있다. 작은 세포 하나 안에 수만가지의 단백질을 생성할 수 있는 유전정보가 들어 있다. 작은 세포 하나 안에 수만가지의 유전정보해석하는 연구소 기능과 단백질을 합성하는 공장 역할을 하는 리보좀, 에너지 발전기관인 미토콘드리아, 자원저장기구인 골지체, 청소담당기관인 리소좀, 교통망인 소포체들이 정교하고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유기적인 연관성 안에 배열되어 작동하고 있는데, 이 신비로운 극미의 세포의 세계는 어떤 무한한 인격적 존재가 그의 마음 속에 일정한 설계도를 가지고 제작하신 것이라는 설명 이외에는 어떤 방식으로도 설명될 수가 없다. 이 세계는 인간의 제한된 머릿속에서는 나올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머릿속으로 구상했다 하더라도 그 구상대로 만들 수가 없는 세계이며, 더욱이 이 세계가 우연한 진화에 의하여 저절로 형성되었다는 설명은 합리적인 설명이 될 수 없다. 시계를 보고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인격적인 존재인 인간이 설계도에 따라서 제작했다고 상정하듯이, 세포 안에서 전개된 세계를 보는 인간은 - 그가 건전한 상식의 소유자라면 - 무한한 인격적 존재의 무한한 지혜가 담긴 설계도에 따라서 세계가 창조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같은 관찰은 목적론적 신존재논증의 하나인 정서론의 타당성이 유전공학 연구를 통하여 증명되고 있음을 뜻한다.


세포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작용의 신비로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DNA에 있는 유전정보는 어떤 힘에 의하여 복제를 할 뿐만 아니라 그 정보를 mRNA에 전사시키고, mRNA는 tRNA에 다시 전사되어 해독되고 해독된 정보에 따라서 단백질이 만들어진다. 자기복제를 계속하던 수정란은 일정한 시점이 되면 그 시점에 적합한 유전정보들을 발현시켜서 똑같은 DNA와 구조를 가진 세포로부터 신체의 각각 특수한 기관들을 만들어내는 발생과정이 진행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유전자 안에 들어 있던 정보가 모두 발현되면서 하나의 완전한 생명체로 형성되어 간다. 왜 동일한 세포가 각각 다른 기관들로 발생하는지, 왜 어떤 시점에 어떤 유전자는 발현되고 어떤 유전자는 발현되지 않는지 등에 대해서 생물학은 그것은 아마도 화학물질을 통한 세포들 상호간의 의사소통에 의한 것일 것이며, 세포가 어떤 길을 따라야 하는가는 세포 밖에 존재하는 어떤 신호에 의한 것일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아 안에는 발생청부업자나 힘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세포밖에 있는 어떤 힘을 상정하지 않고는 세포의 발생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는 발생학의 연구결과는 생성 혹은 변동하는 모든 것은 원인이 있으며, 이 원인은 곧 하나님이라는 우주론적 신존재논증이 유전공학과 발생학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현재 나타나고 있는 현상에 대한 인과론적 설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우선 성경은 과학적 인과관계를 추적하는 책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 저자들은 누가 일을 하시며, 그가 이루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일을 어떻게 하시느냐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메커니즘 혹은 과학적 설명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인과론적 설명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인과론적 설명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다. 성경의 이같은 태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과론적 설명능력은 인간의 지성의 대표적인 사유활동이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문제는 이 선물의 정당한 용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철학이 아닌 과학에서 인과론적 설명이 그 정당성을 부여받으려면, 실험을 통해서 증명이 되어야만 한다. 실험을 통하여 증명될 수 없는 영역에까지 인과론적 설명을 사변적으로 확대시키는 것은 과학의 본래의 업무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생명과학의 영역에서 본다면, 유전자에 대한 현상적 관찰결과를 근거로 하여 최초의 인류가 아프리카 여성이었다고 주장한다든가, 최초의 생명체는 35억년전에 존재했던 RNA였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사변으로서, 실험을 통한 입증이 불가능한 이런 내용들이 과연 과학자들이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현존하는 유전자에 대한 비교분석을 토대로 하여 진화의 과정을 해명해내려는 시도는 진화라는 입증될 수 없는 가설에다가 자의적으로 과학적 연구결과를 끼워 맞추는 비과학적 태도다.


그런데 생명과학의 관찰결과의 남용은 유전자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종교와 도덕을 포함하는 모든 인간현상과 사회현상들을 포괄적으로 해명하려는 유물론적 환원주의에 이르러서 극단으로 나아간다. 예컨대, 유전자는 몸과 마음까지도 창조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불멸의 신적 존재인 반면, 인간의 신체는 유전자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생존기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신의 관념, 도덕관념 그리고 기타 생각들도 마치 유전자가 정자와 난자를 운반체로 하여 몸에서 몸으로 날아다니듯이 밈(Meme)이라는 유사유전자를 통하여 뇌에서 뇌로 건너간다고 주장한 리챠드 도킨스(Richard Dawkins)나 인간의 종교와 윤리현상을 포함한 모든 정신현상은 유전물질이 자기자신을 보존해 가는 우회적인 방법 이외에 어떤 기능도 갖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의 주장이 유물론적 환원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다.


다음으로 생각할 문제는 자연상태의 피조물의 구조에 인위적인 변형을 가하는 과학기술에 대해서 기독교는 어떤 입장을 보여주는가?하는 것이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고 한 시편24편1절의 말씀처럼 이 세계의 모든 피조물의 절대적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고려할 때 피조물의 다스림과 정복을 명령하고 있는 창세기1장28절의 문화명령은 피조물의 관리를 위임한 청지기직분(stewardship)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위임하신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런데 청지기직의 수행은 하나님의 소유물을 수동적으로 주어진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피조물의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하는 피조물의 특성에 비추어 볼 때 불가능하다. 마태복음25장14절에서 30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으로부터 한 달란트 위임받은 종은 받은 한 달란트를 그대로 수건에 싸서 땅 속에 묻음으로써 원형 그대로 보관했다가 주인에게 돌려 주었는데, 주인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는다. 그러나 두 달란트와 다섯달란트를 위임받은 종들은 받은 달란트들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각각 네달란트와 열달란트로 변화시켰는데, 이 종들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축성(창4:17), 목축(창4:20), 기계제작(창4:22) 등의 기술들을 허용하신 것은 기술을 통한 피조물의 변형을 허용하셨음을 뜻한다.


그러나 인간이 청지기의 입장에서 피조물의 변형을 허용받았다는 사실은 피조물을 자의적으로 변형시켜서는 안되고 소유주가 원하는 질서와 한계를 존중하면서 그 틀 안에서 변형이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자연물의 변형은 하나님의 창조질서, 성경에 명료하게 계시된 도덕법, 그리고 인간의 마음 속에 심기워진 도덕법(롬2:14,15)의 규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생명공학기술을 통한 자연물의 변형과 조작은 어떤 범주 안에서 허용되고 또 금지되어야 하는가? 우선 원리적인 관점에서 안전하게 허용될 수 있는 유전자의 조작은 왜곡되고 병든 유전자를 건강한 유전자로 치환함으로써 병들고 왜곡된 창조세계의 회복을 도모하는 목적으로 행해지거나, 유전자증폭기술을 이용하여 인터페론과 같은 특정한 약제를 대량생산함으로써 인체질병치료를 도모하는 경우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목적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 진행되는 유전자조작은 모두 윤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그 정당성에 문제가 있다.


(1) 병든 유전자의 회복 또는 신체부위의 치료와 열성 유전자를 우성 유전자로 치환하는 우생학적 시도는 구별되어야 한다. 우생학적 시도는 인종의 다양성의 풀을 획일화시키고 고갈시킴으로써 하나님이 만드신 인류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파괴시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생학적 조작이 실현될 경우 인류사회는 힘, 지능, 미모에 있어서 우월한 인종의 계층과 열등한 자연적인 상태의 인종으로 차등화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인종차별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질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예측 가능한 가상적 사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자가 모두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성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사회이며, 온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신(행17:26) 인류 연대성의 뜻에도 어긋난다.


(2) 유전자조작은 인류의 생명의 증진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어서 인간의 생명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둔갑되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두가지 가치가 대립된다: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가치와 인간의 물질적 복리라는 가치. “천하를 주고도 인간의 목숨과 바꿀 수 없다”는 마태복음16장26절의 말씀에서 천하가 세상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물질적 복리의 총체라고 해석될 때, 이 말씀은 생명의 가치는 물질적 복리에 의하여 대체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이 말씀과 더불어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 그리고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깨뜨리는 죄가 된다는 창세기9장6절의 말씀은 인간의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물질적 복리를 도모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명확히 보여 준다. 수정란을 독립된 인간주체로 파악하는 인간론을 견지할 때 배아의 분할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배아의 복제는 전면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며, 높은 실패율로 인하여 생성된 배아를 폐기하는 과정을 피할 수 없는 체세포복제도 금지되어야만 한다.


(3) 현재 도달해 있는 기술발전수준을 고려할 때 높은 실패율이 예상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치료의 여파가 본인의 전 생애 나아가서는 후손에게까지 대물림될 수도 있는 생식세포치료는 안전성이 충분히 증명되기 전까지는 금지되어야 한다.


(4) 오늘날 세계인구의 폭발적인 증가, 농경지였던 토지가 산업지대로 바뀌고 전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급격한 사막화 등에 기인한 농경지의 급격한 축소, 농업의 고된 작업을 회피하고 힘이 덜 드는 3차 산업으로의 직종의 전환, 무차별한 동물들과 어패류의 남획으로 인한 천연육식자원의 감소와 오염 등으로 인하여 식량의 위기가 예상되는 현실 속에서 이와같은 위기를 유전자조작된 동식물의 대량생산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시도들은 유전자조작된 작물들과 동물들이 장기적으로 인체의 건강에 끼치는 영향이 아직 실험적으로 파악되지 못했고, 또한 생태계에 끼칠 부작용의 가능성도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전자조작된 동식물의 생산을 시도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시도로서 금지되어야 한다.


이런 판단을 하는 이유는 그간 인간이 창조의 질서를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만들어낸 물품이나 음식물들이 생산을 시작하던 당시에는 과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했거나 아니면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았다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심각한 부작용들이 50년 이상이 누적되어 온 결과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지경까지 오게 된 사례들을 우리가 실질적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들을 들어 보자. 과학자들은 20세기 중반까지 자연 상태에 있는 화학적 분자구조를 인위적으로 조작함으로써 어마어마한 종류의 인공적으로 합성된 신소재들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이 신소재들에 인류의 장밋빛 미래가 담보되어 있는 것으로 선전했으며, 이들의 선전을 전세계 인류는 그대로 믿어 왔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오늘날 PCB와 같은 인공합성화학물질로부터 꾸준히 환경호르몬이 흘러 나왔다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었고, 환경호르몬은 인간을 포함한 동식물의 생식과정에 치명적인 혼란을 초래하고, 암을 비롯한 질병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빗물을 타고 바다로 흘러든 친지방성 환경호르몬은 “식물성 플랑크톤 -> 동물성 플랑크톤 -> 어류 -> 조류, 포유류, 인간”으로 이어지는 먹이사슬을 통하여 전달되고 축적되어 왔다. 환경호르몬의 오염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만큼 전세계적인 규모로 진행되었고, 마침내 지구상에서 가장 청정한 지역으로 알려진 북극에 사는 곰까지도 환경호르몬에 오염되기에 이르렀다. 미시간호에 사는 갈매기에서 수컷의 암컷화 현상이 나타나고, 생식기관련 이상과 암에 걸려 죽어가는 동물들이 속출하고 있으며, 코펜하겐과 동경에서는 남성의 정자수가 이미 정상치의 절반으로 줄어 들어 있으며,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우리나라 전 해안에서 서식하는 어패류의 생식기관련 혼란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수만가지가 넘는 인공합성화학물질들 가운데 유출물이 확인된 것은 수십종에 불과하고 나머지로부터는 어떤 유출물이 흘러 나오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오늘날 미국 인구의 1/3이 암질환을 앓고 있고, 1/4이 암으로 사망하는데, 그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인공으로 대량사육하는 쇠고기임이 밝혀지고 있다. 소를 자연상태에서 방목하지 않고 거대하고 불결하기 이를데 없는 집단농장에서 사육하며, 소를 빨리 키우고 부드럽고 입맛에 맞는 육질을 얻기 위하여 지방질이 함유된 사료를 인위적으로 먹이고, 운동을 못하도록 몸을 틀 수 조차 없는 나무상자 우리에 가두고, 철분섭취를 못하게 하며, 다량의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을 투여함으로써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린 고기를 시장에 공급해 왔다. 이 고기를 주식으로 섭취하는 인간들이 암을 비롯한 각종 성인병의 노예로 전락되어 왔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암환자와 각종 성인병환자들의 숫자가 급증하는 현상은 쇠고기와 기름에 튀긴 감자 등을 주식으로 하는 서구형 식단의 보편화와 더불어 30년 이상 화학비료를 섭취하고 자란 작물들을 국민들이 꾸준히 장기적으로 섭취해 온 결과 인체의 구성성분이 달라진 데도 원인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유기농재배방식을 통한 전통적인 작물재배와 천연방목을 통한 육류생산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가고 설득력을 얻고 있는 마당에 천연덕스럽게 창조질서를 조작하여 변형시킨 유전자조작 동식물의 생산에 몰두하고 있는 생명공학자들은 도대체 시대의 흐름과 인류의 미래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결론적으로 요약한다면, 생명과학이 유전자의 구조와 기능을 치밀하고 성실한 관찰, 비교분석 그리고 실험을 진행시킨 후에 그 결과를 정직하게 제시하는 한 기독교의 신학적 토대와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이와같은 결과는 오히려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변증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생명과학이 과학 본연의 과제에서 벗어나서 유전자연구결과를 토대로 인류의 생명의 기원을 해명하려고 한다든지, 가설에 불과한 진화의 과정을 밝히려고 한다든지, 유물론적 환원주의를 시도함으로써 과학주의로 나아간다면 생명과학은 기독교의 예리한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생명공학이 일정한 신학적 윤리적 한계 안에서 병든 유전자의 치료와 질병의 치료라는 목적에 헌신한다면, 기독교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공학이 우생학의 도구로 이용되거나,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질병치료를 시도하거나 인간복제를 시도하거나 현 단계에서 생식세포치료를 시도하거나 유전자조작을 통한 식용 동식물의 생산을 시도한다면 기독교의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작성자 : 이상원 2015-06-12 11:56:45
기독교생명윤리란 무엇인가? (2002. 9. 30.)

 

기독교생명윤리란 무엇인가?


이상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교수)

발표일 : 2002. 09. 30.

 

들어가는 말

윤리학은 인간의 행위의 옳고 그름 또는 정당성 여부에 대하여 반성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생명윤리란 무엇인가? 생명윤리는 생명을 다루는 인간의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반성하는 작업이다. 생명을 다루는 인간의 행위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병들어 있거나 신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인간을 치료하여 회복시키며, 치료가 불가능할 때는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노력하며, 환자들을 간호하며, 더 나아가서는 질병의 예방과 퇴치를 위하여 행해지는 사회적 차원에서의 노력, 예컨대, 위생관리/방역과 면역/환경규칙제정 등이 모두 생명윤리의 반성의 영역에 포함된다. 이 행위들은 대체로 의료인들에 의하여 수행된다. 여기서 두가지 중요한 질문이 제기되는데, 하나는 인간의 생명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생명윤리의 특성이 드러나게 된다.



1. 인간의 생명

생명윤리에서 말하는 인간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독교는 인간의 생명에 대하여 어떤 이해를 제공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창세기2장7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 구절을 분석해 보자.

a. 하나님은 먼저 흙으로 인간의 신체를 지으셨다. 그러나 흙으로 신체를 지으신 것만으로는 아직 인간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b. 하나님은 흙으로 된 신체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여기서 말하는 생기는 니쉬마트라는 히브리어인데, 이 말은 루아흐라는 히브리어와 동의어로서 “영”으로 보통 번역된다. 영은 몸을 통제하는 생명과 행동의 원리로 작용하는 영적 요소로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선악을 변별하고 도덕을 수련하는 등의 기능을 주도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은 재료가 흙으로 구성되었다는 의미에서 땅에서 기원한 육체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영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육체와 영의 기원이 다르기 때문에,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영도 따라서 죽는 것이 아니다(마10:28). 전도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죽으면 육체는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지만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12:7).

c. 신체에 영이 들어가자 비로소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생령이란 “네페쉬 하야”라는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데, “하야”는 “살아 있는”이라는 뜻이고 “네페쉬”는 “혼”이라는 뜻이다. 성경에서는 “영”과 “혼”이 교호적으로 사용된다. 혼은 인간 안에 있는 행위의 주체로서, 식욕이나 기억이나 상상등을 발생하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이것은 영과 구분된 실체로서의 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이 지닌 기능의 한 단면을 강조하는 것 뿐이다. “생령”이라는 어귀 곧 “살아 있는 혼”은 전인을 포괄하는 단어다. “생령” 곧 “살아있는 혼”은 신체까지도 포함하며 영까지도 포함하는 전인(全人)을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육체와 영은 그 기원과 내용이 다르다는 의미에서 독립된 두 실체이지만, 영이 일단 육체 안에 들어온 이후에는 생령의 형태로, 곧, 영혼과 육체가 나누어질 수 없을만큼 긴밀한 상호작용과 상관관계를 맺으면서 전인으로, 하나의 통일된 인격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육체의 건강은 어느 정도 영혼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며, 영혼의 건강은 육체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 육체가 병들면 어느 정도 영혼도 영향을 받아 병들게 되고, 영혼이 병들면 육체도 영향을 받아 병들게 된다. 영혼과 육체는 신비로운 연합 안에서 하나의 통일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신비로운 통일체로 존재하던 인간은 육체적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 흙속에 묻혀 버리지만 영혼은 다시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종말의 날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신령한 새 몸으로 다시 신비롭게 연합할 때까지.



그러면 이처럼 영혼과 육체가 신비로운 연합 안에 있는 통일된 인격체로서의 인간에 있어서 의료행위가 치료의 대상으로 다룰 수 있는 부분은 어느 부분인가?

a. 의료행위의 가장 중요한 대상은 전인과의 긴밀한 연관성 안에 있는 육체다.

b. 인간의 육체와 영이 만나는 지점에서 형성되는 인간의 정신적 기능들도 의료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른바 정신의학이 이 영역을 다룬다.

c.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능력으로 그 존재여부나 건강성 여부를 손대거나 판단할 수 없는 차원을 가진다. 의학은 영혼의 깊은 차원의 문제까지 다룰 수는 없다. 이 점을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속사람과 겉사람의 구분을 통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바울은 인간을 속사람(롬7:22)과 겉사람(고후4:16)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속사람은 실재하는 인간의 자아의 중심을 이루는 구성요소이면서도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깊은 차원이다. 프로이드가 말한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의 영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겉사람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고 어느 정도 통제도 할 수 있는 세계로서, 이성, 의식, 구체적인 행동과 삶의 영역을 말한다. 프로이드가 말한 의식의 세계가 여기에 상응한다. 의학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은 겉사람의 영역이다. 의학은 속사람의 영역은 다룰 수 없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것은 속사람의 영역에서다. 속사람을 다룰 수 있는 것은 복음 뿐이다.



2. 판단기준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인간의 행동의 옳고 그름 여부에 대하여 판단을 하려면 판단의 기준 곧 규범이 필요하다. 그러면 기독교생명윤리에서는 판단기준인 규범을 어디서 얻는가? 기독교생명윤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구원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 있어서도 유일무이하고 정확무오한 지침을 제공한다는 믿음 안에서 성경말씀을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채용한다. 기독교생명윤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세계관의 지평 안에서 모든 문제들을 판단하며,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윤리적 준칙들을 직접적인 판단기준으로 채용하여 문제들을 판단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상황이 등장했고, 과학과 의료기술 등의 획기적인 발달이 이루어짐에 따라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판단할 때 성경이 제시한 규범들을 새로운 언어로 해석하고 보완해 줄 수 있는 일반적인 규범들 곧 기독교세계관 밖에서 등장한 일반생명윤리적 입장들이 제시한 준칙들이 필요하게 된다. 이 준칙들은 이성적 사유나, 임상적 결과나, 사회적 합의나, 기타 의료인들의 경험 등으로부터 도출해낸 것들이다. 그런데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사유하고 판단하는 무의식적인 습성이 있음을 고려할 때 인간이 만들어낸 이 준칙들은 어느 정도 왜곡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준칙들 안에는 자기를 합리화(self-rationalizing)하는 특성이 나타난다. 따라서 기독교생명의료윤리에서는 이 준칙들을 무비판적으로 채용할 수만은 없다. 따라서 기독교생명윤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세계관의 지평과 일반적인 도덕법의 빛 안에서 기독교세계관 밖에서 등장한 일반생명윤리적 입장들이 제시한 준칙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3. 성경이 제시하는 세계관

성경이 제시하는 세계관은 어거스틴에게서 확립된 후 개신교 신학전통이 줄곧 견지해 온 “창조-타락-구속”의 틀로 나타난다. 이 세계관의 중심에는 인간에 대한 해석이 중심을 이룬다.


(1) 창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창조되었다(창세기1:27).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은 서로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두 개의 동의어다. 하나님의 형상성은 두 차원으로 나누어서 이해하는 것이 정설이다. 하나는 좁은 의미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 의로움, 거룩함을 뜻한다(골3:10;엡4:24). 좁은 의미의 형상은 인간이 타락했을 때 상실되었다. 다른 하나는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인데, 이 형상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상실되지 않았다. 이 형상은 인간이 영성을 지니고 있고, 이 점에 있어서 영이신 하나님이 투영되어 있다. 영의 특징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은 몸과 연합되어 있고 몸에 신축성있게 적응하지만 그 존재가 몸에 의존하지 않는다. 몸이 해체되어 버린 뒤에도 영은 존재한다. 영은 이성, 양심, 의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을 갖는다. 영은 육체를 통하여 자기를 표현한다. 육체는 영이 자기를 표현하기에 적합할만큼 하나님의 형상의 광채로 장식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육체도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좌소는 인간의 영혼 속 곧, 정신과 마음, 혹은 영혼과 영혼의 능력들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육체를 포함하여 인간 속의 어느 곳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다. 따라서 창세기9장6절은 사람의 몸을 죽이는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로 해석되었다. 이와같은 기준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배아복제, 낙태, 인공수정, 안락사 문제들을 판단할 때 유념해야 한다. 의료인들은 인간은 생물학적인 또는 의학적인 연구를 통하여 다 파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이와같은 연구로서는 손댈 수 없는 영적 생명을 가진 존재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는 인식을 가지고 인간을 대해야 한다. 인간을 단지 의료기술적 조작의 대상으로 보고자 하는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


(2) 타락.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범죄했고, 범죄한 결과로서 인간에게는 고통과 죽음이 찾아 왔다. 남자에게는 노동의 고통이 찾아 왔으며, 여자에게는 출산의 고통이 찾아 왔고, 인류사회 전체에는 갖가지 질병이 찾아 왔으며, 마침내는 고통의 절정인 육체적 죽음이 찾아 왔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고통, 질병, 죽음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한편으로 이것들은 극복되어야 할 것들이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범죄한 이후의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이 마련하신 은혜의 질서이기도 하다. 극복되어야 할 경우와 하나님의 은혜의 질서로 받아 들여야 할 경우를 구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정신과 육체를 병들게 할 만큼 노동의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절제해야 하지만, 얼굴에 땀흘리는 수고를 하면서 생계에 필요한 물질을 얻으면서 사는 것이 의학적으로 볼 때 오히려 건강에 유익하다. 아이를 낳을 때 제왕절개로 출산하는 것 보다는 특별한 질병이나 의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상황이 아닌 한 출산의 고통을 다 겪으면서 아이를 낳는 것이 여인에게 있어서나 태아에게 있어서나 건강에 훨씬 더 유익하다. 많은 질병들이 극복되어야 하고 질병에 뒤따르는 고통이 완화되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질병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조심하게 하고 자기 몸을 돌보게 하고 육체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고 더 성숙한 정신을 갖게 한다.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선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열매들 중에서 고통의 과정을 통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의료인들은 가능한 한 죽음으로 귀결되는 질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지만, 죽음은 결코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영역으로의 삶의 이동이며, 현세에서의 삶보다 월등히 더 나은 삶으로 들어가는 복된 관문이라는 사실을 죽어가는 자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3) 구속. 죄로 인하여 찾아온 고통과 죽음은 궁극적으로 부활과 영생의 전망 안에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며, 이 전망 안에서 우리는 현세 안에서의 고통과 죽음의 현실을 받아 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부활과 영생의 전망 안에서 고통과 죽음을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두신 질서 안에서 일반은총의 수단들을 통하여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 수단들을 허락하셨다. 고통을 보내신 하나님이 이제는 고통에 대항하여 싸우게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과 고난과 죽음을 완전히 겪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고통을 경감시키는 수단들을 거부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인간이 죽는 것을 보시고 통분히 여기셨으며(요한복음11:38),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꾸짖으셨다(누가복음4:39).



4. 성경이 제시하는 윤리적인 규범들


(1) 동기. 의료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의료행위의 동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의료행위는 병자들이나 신체적으로 결손된 자들을 치료하고 간호함으로써 이들의 생명을 보전하고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그렇다면 이들을 치료하고 간호하도록 동기부여를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기독교윤리학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곧 그 동기가 된다고 답변한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긍휼은 인간을 향한 긍휼의 원천이 된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는 마땅히 인간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 성부 하나님의 뜻이요, 바쁘고 피곤한 사역 일정 중에도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병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모두 치유해 주신 치유자 그리스도(Christus medicus)의 뜻이며,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 주고 계속적인 간호를 부탁했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가르쳐주는 뜻이며(누가복음10:25-37), 병든 자를 돌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돌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뜻이다(마태복음25:31-46).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가 계약관계로 형성되어 있는 오늘날의 의료계의 현실에서 의료행위는 환자의 권리와 의사의 의무라는 외적인 차원에서 인식되고 있는데, 내적인 긍휼이 결여된 상태에서 권리가 행사되고 의무가 이행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의료행위는 기독교의료인의 바른 의료행위가 될 수 없다. 기독교의료인의 의료행위는 반드시 인술(仁術)의 지평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


(2) 성경에서 도출된 규범들. 기독의료인들이 의료행위의 바른 동기를 갖추었다면 이제는 성경이 제시하는 규범들에 주목해야 한다. 사랑의 대계명(마태복음22:37-40), 황금률(마태복음7:12), 그리고 십계명(출애굽기20:1-17)은 기독교윤리 뿐만 아니라 기독교생명의료윤리의 반성작업에서도 보편적인 규범으로서 기능한다.

a. 사랑의 계명은 철학적 의료윤리문헌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 이유는 기독교적인 아가페로서의 사랑은 일반 철학적 윤리학에서는 여분의(supererogatory) 규범으로서 비상(非常)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철학적 윤리학에서는 여분의 비상한 것이 기독교윤리학에서는 평범한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기독교윤리학은 플레처의 상황윤리에서처럼 사랑 이외에는 어떤 타율적인 명령도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배격하고 사랑은 계명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사랑은 계명들을 필요로 한다(로마서13:8이하). 사랑은 누룩이요, 계명들은 반죽이며, 사랑은 콤파스요, 계명들은 도화지다. 사랑 그 자체가 이미 계명이다(요한복음15:10; 요한일서5:3; 요한2서6절).

b. 사랑의 대계명과 더불어 율법의 요약으로 선언되고 있는(마태복음7:12) 황금률은 인간을 이해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입장에 직접 서셨던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현된 규범으로서 타인의 입장에 서보는 훈련을 요구한다. 곧, 의료시술자는 고통을 받는 환자의 입장에 서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c. 십계명 가운데 특별히 의료윤리에 관련되는 계명은 6계명(살인하지 말지니라)이다. 생명을 주시고 거두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의료행위는 치료/고통의 완화/간호를 주업무로 하는 것으로서, 삶을 종결시키는 작업이 의료행위의 업무일 수는 없다.

(3) 문자주의의 위험과 성경규례들의 의학적 탁월성. 생명의료문제들에 대한 판단의 규범을 성경으로부터 도출하고자 할 때 앞에서 제시한 보편적인 윤리적 규범들 이외에 다른 본문들을 규범으로 채용하고자 할 때는 문맥과 정황을 무시한 문자주의적 인용을 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예컨대 여호와의 증인들은 레위기7:26,27에 있는 “피를 먹지 말라”는 규정과 사도행전15:20,29에 있는 “피를 멀리하라”는 명령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피를 먹는 행위나 수혈하는 행위는 모두 피를 섭취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한 행위라고 보고 수혈을 거부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이 명령과 현대의료계에서 시행되는 수혈행위의 각기 다른 정황을 무시한 결과다. 현대의료계에서 행하는 수혈행위는 죽음 앞에 직면한 생명을 구하기 위한 의학적 치료행위인 반면에 레위기나 사도행전은 식사관습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며, 피를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은 생명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수혈”행위는 성경기록당시에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했다. 성경은 의료행위의 기술적인 모범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므로, 성경의 어느 한 본문을 문자적으로 인용하여 의료기술시행을 위한 어떤 모범으로 삼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어떤 규례들이 비의학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어떤 규례들은 당시의 의료기술이나 의료문화의 수준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조차 없을만큼 탁월한 지혜를 담고 있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자.


a. 1840년 경 유럽의학계의 중심지였던 비엔나의 Algemeine krankenhaus에서 임산부 6명 가운데 1명이 죽어 나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원인을 조사하던 한 젊은 의사는 의사들이 손을 씻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는 의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당시 의사와 학생들은 죽은 임산부를 검시실로 들어가 검시한 후에 손을 씻지도 않고 또 고무장갑을 끼지도 않고 산과병동의 환자들에게 골반실험을 하기 위하여 들어갔다. 이 젊은 의사는 진료전에 손을 씻는 규칙을 제정하고 시행해 보았더니 규칙이 제정되고 난 이후 곧 임산부 치사율이 1/42로 감소되었고 다음달에는 1/84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 젊은 의사는 이 일 때문에 동료의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정신병원에 들어가 지내다가 죽었다. 그런데 민수기19:7,8 이하 전장을 읽어 보면 “제사장은 제물을 죽여서 불사른 후에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에 들어가라”는 명령이 나온다. 그것도 대야에 손을 씻고 흐르는 물에 손을 씻으며 빨래하여 말린 옷들을 갈아입고 대인관계에 임하도록 했다. 동물을 죽이는 과정에서 많은 균이 제사장의 손과 옷에 묻었다는 점, 그리고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에 씻어야 오물이나 균이 제대로 씻겨 내려간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이 조치는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위생상태를 유지하는데 매우 적절한 의료적 조치였음을 알 수 있다.

b. 19세기의 외과수술은 손씻는 일을 소홀히 했다. 수술대 위에 올라가면 의사들은 코트를 벗고 바로 도구를 꺼내어 수술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균이 우글거리는 학생들의 손으로 균이 없는 복부의 살을 찔러 보게 했다. 그 결과 포도상구균 때문에 외과수술의 치사율이 높았다. 1876년 손과 의료기구를 씻는 방법이 도입되면서 치사율이 극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손씻는 문제는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결되었다.

c.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인체의 배설물을 포장안된 길거리에 내다 버렸다. 이 배설물에 파리들이 들끓어 알을 깜으로 말미암아 콜레라, 이질, 장질부사와 같은 장성 질병을 퍼뜨렸고, 쥐들이 번성하여 흑사병이 돌았다. 그런데 신명기23:12-13을 읽어 보면 “너희 진 밖에 변소를 베풀고 그리로 나가되 너희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통할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이켜 그 배설물을 덮을찌니”라는 말씀이 있다. 변소를 진 밖에 베풀고 배설물을 땅 속에 묻음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위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유럽인들이 이 명령을 읽고 주의했다면 많은 질병의 발병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d. 졸도, 심장마비, 협심증, 괴저병, 신장병 등의 원인이 되는 동맥경화증은 콜레스테롤의 증가에 기인하는 것인데, 콜레스테롤은 동물성 지방질, 체중의 과다한 비대, 끽연(니코틴이 콜레스테롤을 형성한다), 육정적 감정과 긴장 등에서 형성된다. 증가된 콜레스테롤 종기가 혈관벽을 형성하여 동맥의 흐름을 방해하면 동맥경화증이 된다. 이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레위기3:17과 7:22-24에서 하나님이 “기름을 먹지 말라”고 명령을 주신 것은 의학적으로도 탁월한 조치였음을 알 수 있다.

e. 창세기17장10-12절에 보면 남자가 태어나면 8일만에 할례를 받으라는 명령이 나온다. 그런데 이 명령은 의학상식적으로 볼 때 아주 탁월한 명령임을 알 수 있다. 뉴욕밸브병원의 조사에 의하면 유대인여자들에게는 자궁경부암이 거의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보스톤의 862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1954년의 조사결과 비유태계 여성은 유태계 여성 보다 8.5배 자궁암 환자가 많았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유태인 남자들이 할례를 받은데 기인한다. 남성성기의 제거되지 않은 표피에는 암을 일으키는 스메그마, 바치루스균을 포함한 유독성 균이 활발히 번식한다. 이로 인하여 성교시에 균들이 자궁경부에 잔존하게 된다.

신생아에게 할례를 행할 때에 생후2-5일 사이에는 출혈에 민감하고, 이때의 출혈은 확대되기 쉬우며, 두뇌에 손상을 주고, 쇼크와 빈혈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피를 응고시키는 비타민 k가 이 기간 동안에는 정상치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응혈소가 생후3일경에는 정상인의 33%였다가 8일째가 되면 정상인의 110%로 높아진다. 그 후에 이 숫치는 다시 감소한다. 그러므로 난지 8일째가 할례를 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기간이 된다.

f. 문둥병은 중세시대 유럽 최대의 재난으로서, 6,7세기, 13-14세기에 무서운 위세를 떨쳤다. 흑사병은 14세기에 네사람 중 한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갈만큼 위력적이었다. 그런데 당시 의사들은 이 병의 전염을 예방하는데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교회가 “병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서 살찌니라”는 레위기13:46 말씀에 따라서 사회에서 격리시켜 이 병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레위기13장은 위생법의 최초의 전형이었다.

g. 이 밖에도 바른 성생활을 강력하게 권고하는 본문들(잠5:1-12; 고전10:8;6:18; 살전4:3-8)에 순종할 때 성병을 근원적으로 예방할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보복심이나 분개심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때 많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 독성탄저, 졸도, 심장마비 등이 복수로 가득차 있는 마음에서 초래될 수 있으며, 결장염은 다른 사람과 싸울 때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며, 근심이나 혐오감이 뇌속의 혈액량을 증가시켜 두통, 구토증을 초래한다.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힌 정서상의 불안이 갑상선의 분비를 촉진시켜 독성갑상선종을 일으키고 난소의 분비작용에 영향을 주어 월경중단, 월경기 통증, 두통등을 초래한다. 부신이 과다하게 분비되면 고혈압, 관절염, 신장병, 동맥경화를 유발한다. 환자의 96%가 분개심 때문에 병이 든 자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는 출애굽기15장26절의 말씀의 위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5. 일반 윤리학이 제시하는 규범들

이미 말한 것처럼 기독교생명윤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세계관과 규범들만을 가지고는 작업을 할 수 없다. 성경은 인간이 구원받는 길이 무엇이며,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떤 도덕적 원리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충분한 지식을 제공해 주지만,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와는 다른 시대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기술적인 지침까지도 일일이 제시하는 책은 아니다. 이런 지침들을 얻으려면 기독교세계관 밖에서 등장한 일반생명윤리적 입장들이 제시한 준칙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준칙들은 성경적 세계관과 성경이 제시하는 규범들의 빛 안에서 비판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여덟가지 일반생명윤리의 입장들이 제시하는 윤리적 준칙들을 소개하고, 이 준칙들이 어떤 점에서 기독교생명윤리연구에 기여할 수가 있으며, 또한 어떤 점에서 비판되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1) 공리주의. 공리주의에서는 사회의 구성원들의 최대다수에게 최대의 행복 또는 쾌락을 가져오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바른 행위로 간주된다. 이 입장은 예컨대 의료재원(財源)을 배당하는 의료정책에 있어서 많은 재원을 요구하지만 소수의 사람밖에는 혜택을 받을 수 없는 특수한 의료행위에 재원을 배당할 것인가, 아니면 다수의 많은 환자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평범한 의료행위에 재원을 배당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고가의 장비와 의술이 요구되는 질병이 치료가능해지면서 의료정의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오늘날 이 규범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규범의 무차별적인 적용은 다른 차원에서 의료정의에 해를 가할 수 있다. 곧 총량적 쾌락을 산출하는 행위가 가장 도덕적인 행위로 간주될 경우에, 불치의 질병을 가진 환자에 대한 치료와 간호, 노인에 대한 치료가 소홀히 될 수밖에 없으며, 오랜 세월 간호해도 결과가 신통하게 나타나지 않는 환자의 경우에 안락사가 더 적합한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 곧 공리주의의 원리가 의료정의를 깨뜨리는 방향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그 역으로도 사용될 수가 있으므로 이 원리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 여부를 판단할 수가 없다. 곧 어떤 경우에 이 원리를 적용해야 하고 또 어떤 경우에 적용을 해서는 안 되는가를 결정해줄 상위의 규범이 필요한 것이다.


(2) 의무론. 칸트와 계약사상가들에 의하여 대표되는 이 이론은 공리주의와 반대의 길을 걷는다. 의무론은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1. 윤리적으로 바른 행위는 결과나 내용을 고려하지 않고 다만 어떤 준칙에 따라서 행동하는 행위다. 물론 이 준칙은 일반적인 입법이 되었을 때도 보편적으로 타당한 준칙이어야 한다. “너의 행동을 지배하는 규칙이 일반적인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동하라.” 2.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간주된다. 3. 의무의 내용은 하나님이나 사회와 같은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고 오직 행위자의 이성에 의해서만 주어지며, 여기서 자기이익도 배제되지만 정서나 감정도 배제된다.

칸트의 입법의 원리는 의사로 하여금 의료행위는 도덕적 규범의 지도를 받아야 하며, 의사자신의 진료가 환자의 입장에 섰을 때도 타당한 진료인가를 묻도록 요청한다는 점에서 의료윤리의 규범적 원리로서 타당하다. 그런데 칸트의 계약론에서 인간관계가 법적 관계로 규정된다는 점은 비판적 수용이 필요하다.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가 법적 관계로 환원되면 정서와 감정이 자리잡을 여지가 없어지며, 따라서 의료행위의 비인간화를 극복하기 어렵다. 의료행위는 정치적인 또는 상업적인 계약행위로 환원될 수 없다. 환자는 절대적으로 약한 자로서 법적 관계 이상의 따뜻한 정서적 돌봄을 요청한다.


(3) 자연법 이론. 이 이론은 로마 카톨릭교회가 견지하고 있는 이론으로서, 인간의 삶의 구조 곧,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묘사로부터 책임적 행동을 위한 규준(prescription)을 도출한다. 하나님은 만물 안에 영원한 법(lex aeterna)을 두셨는 바, 이 법은 만물의 목적으로서 하나의 가능태(potentia)로 주어져 있다. 이 가능태로부터 현실태가 발전하게 되는데, 가능태를 현실화하는 행위는 선한 행위로 간주된다. 인간은 자연 또는 본성의 법(lex naturae)안에서 영원한 법에 참여하며, 이때 본성 가운데 있는 이성이 목적 곧 영원한 법을 인식한다. 여기서 인간의 이성은 인간 자신의 자의적인 판단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적에 주목하게 되므로 하나님이 주신 자연스러운 삶의 목적에 배치되는 행위 예컨대, 피임이라든가, 성전환수술, 의료기술의 자의적 남용 등이 견제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입장에 대해서 자연적인 것은 항상 옳은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예컨대 로마 카톨릭에서는 자연적인 주기법을 이용하는 것을 제외한 사실상의 모든 형태의 피임을 반대하는데, 이와같은 입장이 과연 정당한가는 의문이다. 자연적 주기법을 이용할 때, 자연적인 주기에 성행위를 피하는 것은 인위적인 행위가 아닌가? 자연적 주기법이 정확도가 매우 낮다는 점은 어떻게 고려되어야 하는가? 의도적으로 성행위를 피하는 것과 수정란형성이 이루어지기 전에 피임하는 것이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오늘날과 같은 인구과밀의 시대에 한 가족이 경제적 책임도 질 수 없는 상태에서 7-8명씩의 자녀를 키우는 것이 바람직한가? 등등의 문제들이 제기된다.


(4)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의무론과 입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의 자율적 이성에 의하여 도출된 규범이 정당성을 부여받으려면 인류보편의 입법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제한을 가함으로써 인류를 위한 윤리를 지향하고 있는데 반하여, 자유주의에서는 각 개인의 자율적 권리를 중요시한다. 여기서는 각 개인이 원하는 내용이 중시된다. 이 이론에서는 각 개인이 원하는 바를 획득할 권리는 천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낙태권이나 폐경 후의 인공수정을 통한 임신도 당당한 개인의 권리로 주장된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의료윤리의 차원에서 후견주의적인 의사의 의료행위에 대한 환자의 요구권(claim right)을 확립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적어도 두가지 중요한 약점을 드러낸다. 1. 개인의 요구권이 극단적으로 강조될 경우에 개인의 요구권보다 더 상위에 위치한 규범 곧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시키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태아의 생명이 임산부의 생명보다 중시되고, 배아의 생명보다 환자의 치료가 더 중요시될 수 있다. 2. 이 입장은 강자와 건강한 자를 위한 윤리적 입장으로 전락할 수 있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서는 자기의사를 명시적으로 표명할 수 있는 자들을 전제하고 모든 논의를 전개하기 마련인데, 이 과정에서 자기의사를 표명할 수가 없는 의료적 약자들의 입장이 일방적으로 소외될 수 있다.


(5) 공동체주의.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것인데, 덕은 사회적 관습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보면서, 공동체적 가치, 사회적 목적, 사회가 규정한 덕을 행하는 것이 바른 윤리적인 행위로 판단된다. 공동체주의적 의료윤리에서는 개인의 건강이라는 것도 사회생활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사회전체의 공리적 이익이 한 개인의 건강을 희생시켜도 좋을 만큼 중요한 것이며, 건강한 자들의 사회구성을 위하여 건강이 약한 자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6) 돌봄의 윤리(care ethics, zorg-ethiek). 돌봄의 윤리는 주로 여성의료윤리학자들에 의하여 형성된 이론으로서,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를 칸트적인 법적 계약관계로 보는 입장에 반발하면서, 환자와 의사 사이의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강조하는 입장을 말한다. 인간은 연약하고 가사적(可死的)이며, 타인에 의존하여 생존해야 하는 존재라는 점을 고려할 때 도덕이란 법과 규칙의 문제가 아니라 사려 깊은 돌봄과 타인에 대한 책임의 문제로 정의된다. 만스코트(H.A.M. Manschot)에 의하면 계산하지 않고 재지 않는 태도가 인간의 행복과 삶의 기쁨의 원천으로서, 자유로운 마음으로 간호가 주어질 때 간호는 더 포근하고 친밀해진다고 한다. 오늘날의 계약윤리는 베푸는 윤리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된다.

돌봄의 윤리는 정서적 측면이 윤리학에서 중요시해야 할 요인임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에 공헌이 있다. 윤리학은 철학적 의무론의 전통의 주장과는 달리 정서적 측면을 배제하지 않는다. 불의한 현실을 보고 감정적으로 분노하는 것은 윤리적 반성의 계기가 되며, 정서적인 긍휼의 마음은 모든 도덕행위자들의 마음바탕에 깔려 있어야 하는 중요한 요소다. 뿐만 아니라 돌봄의 윤리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틀 안에서 권리논쟁에 참여하기 어려운 사람들 곧, 장애자들, 기타 의료치료에 의존하는 자들을 변호하기에 적합한 윤리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서적 양상이 돌봄의 전부를 포괄할 수가 없다. 예컨대 의료재원의 배당의 문제에 있어서는 감정보다는 엄격한 정의의 원리가 우선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규칙과 원리가 뒷받침되지 않은 정서나 감정은 맹목으로 흐를 수가 있다.


(7) 결의론. 결의론은 한가지 사례에서 행해진 결정을 비슷한 다른 사례들에 적용하는 태도를 말한다. 여기서 전통적인 결의론과 현대의 결의론이 입장을 달리한다. 전자는 윤리적 원리를 특별한 사례에 적용하는 입장을 취하고, 후자는 사례로부터 윤리적 원리를 끌어내는 입장을 취한다. 모든 윤리학은 사례에 관계한다는 점에서 윤리학은 결의론을 의미 있게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러나 과연 사례로부터 윤리적 규범의 도출이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사례가 스스로 윤리적 판단을 산출해낸다는 것은 자연주의적 오류 곧, 존재-당위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사례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표준은 사례로부터 올 수 없고 외부로부터 사례를 향하여 주어질 뿐이다. 사례로부터 옳은 규범의 도출도 가능하지만 나쁜 규범의 도출도 가능하다.

예컨대, 안락사가 오늘날처럼 넓어진 이면에는 결의론의 단계적 발전이 중요한 기여를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임종시에 환자의 요구가 있을 때에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신체적 고통이 있는 경우에 안락사가 허용되더니, 다음에는 심리학적 고통의 경우에도 허용되었고, 다음에는 임종시가 아닌 경우에도 허용되었으며, 나중에는 본인의 의사를 묻지 않은 채 정신착란증세를 보이는 환자에게까지 확대적용되기에 이르렀다(미끄러운 경사면의 논증, the slippery slope argument).


(8) 네 원리의 윤리. 이 윤리학은 현대의 철학적 의료윤리학계에서 가장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뷰챔프(T.L. Beauchamp)와 칠드레스(J.F. Childress)에 의하여 주장되고 있는 이론으로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도덕적 원리들이라고 간주되는 자율성, 무해성, 인애, 정의를 규범으로 하여 윤리적 반성을 전개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규범들은 “반증이 없는 한 인정되는 규범들”(prima facie normen)로 이용된다. 여기서 뷰챔프와 칠드레스는 존 롤즈(John Rawls)가 말한 반성적 균형(reflective equilibrium)의 방법론을 채용한다. 반성적 균형이란 규범과 현실 사이의 역학관계를 표현하는 용어다. 먼저 충분히 “숙고된 판단”(considered judgment)을 통하여 어떤 이론(규범)을 구성한다. 그리고 특별한 반증이 제시되지 않는 한 이 규범이 우선적으로 고려되고 이 규범에 따를 의무가 주어진다. 그러나 현실로부터 이 이론을 유지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는 이 규범의 적용은 일단 유보되고 그 규범과 예외적인 현실을 포함하는 “숙고된 판단”과정이 다시 시작되어 새로운 규범의 형성을 도모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는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완전에 가까운 형태의 규범의 도출을 향해 나아간다.

뷰챔프/칠드레스가 말하는 네가지 원리들이 윤리학에서 각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규범들 가운데 이 네가지 원리들을 선정한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뷰챔프/칠드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 원리들이 직관을 통하여 일반적인 원리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왜 3개나 5개가 아닌 4개가 선정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두 사람은 답변하지 못한다. 또한 4개의 원리들 상호간에 충돌이 일어날 때 어떻게 우선순위를 정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답변을 제시하지 못한다.



나가는 말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행위의 옳고 그름 여부를 성경이 제시한 세계관과 규범들 그리고 일반생명윤리연구에서 제시된 준칙들을 판단기준으로 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반성하는 것이 기독교생명윤리의 과제다. 기독교생명윤리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원한 존재로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타락함으로 인하여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포함한 갖가지 고통 속에 있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빛 안에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전제한다. 질병과 질병으로 인한 고통의 극복은 의료행위의 임무이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질병과 고통 가운데는 의료행위로는 극복될 수 없는 것들도 있으며, 또한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이 설정하신 질서로서 인간을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들도 있다. 의료행위는 환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 아가페적인 사랑, 환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의료기술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목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의료행위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총량적이고 평균적인 복리의 증진을 고려해야 하지만, 이 목적을 위하여 불치의 질병을 가진 환자나 노인환자에 대한 치료가 희생되어서는 안된다. 의료행위는 법적 차원에서 공정성을 잃어서는 안되지만, 환자에 대한 정서적인 따뜻한 심성이 상실되어서는 안된다.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에서 의사는 항상 강자의 입장에 있고 환자는 자기의 생명을 의사의 손에 맡기는 약자의 입장에 있으므로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항상 법적 계약관계에 머무를 수가 없고, 후견적인 관계에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의사는 환자의 요구권을 존중해야 하지만, 환자의 요구권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규범을 깨뜨리는 요구를 해올 때는 요구권을 거부해야 할 때도 있다.

작성자 : 이상원 2015-06-12 11:31:01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생명윤리의 문제 (2005. 4. 1.)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생명윤리의 문제




이상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특별기획 : UN 인간복제 금지선언과 생명윤리

「신앙세계」, 통권 441호(2005년 4월호), 월간신앙세계사, 2005.4.1, 24-27면 게재.

발표일 : 2005. 04. 01.

 


한국사회가 생명윤리의식이 극히 빈약한 나라라는 사실은 그동안 여러 방면에서 입증되어 온 바이지만, 최근 UN이 인간복제금지선언을 했을 때 보여준 한국정부의 태도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한국정부는 UN선언문 채택여부를 묻는 투표를 실시했을 때 찬성 84표, 반대 34표, 기원 37표로 나타난 투표결과에서 34표밖에 안되는 반대에 표를 던지고 당당히 선언문채택반대의견을 주도적으로 개진하는 어이없는 비도덕적인 형태를 보여 주었다. 한국정부가 UN인간복제금지선언문에 반대한 것은 이 선언문이 인간복제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고 있는 배아복제까지 금지시키는 조항을 담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이 더 중요한 가치인가, 아니면 경제적 이익과 국가경쟁력이라는 가치가 더 중요한 가치인가 라는 갈림길에서 한국정부는 후자를 택했다.


한국사회가 생명윤리의식이 빈약하다고 했을 때, 생명윤리의식이란 말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먼저 생명윤리라는 용어부터 검토해 보자. 생명이라는 말은 생명을 다루는 인간의 행위를 뜻한다. 윤리라는 말은 어떤 행동이 옳은 행동인가, 그릇된 행동인가를 비판적으로 따져보는 작업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생명윤리란 생명을 다루는 인간의 행동이 과연 올바르게 행해지고 있는가를 비판적으로 따지는 작업이다. 따라서 생명윤리의식이란 생명을 다룰 때 항상 옳은 방향으로 바르게 생명이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항상 의식하면서 인간의 생명을 다루고, 또한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행위를 예의 주시해 보는 태도를 뜻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생명윤리를 본다는 말은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인간관과 도덕적 규범에 근거하여 생명을 다루는 인간의 행동들의 옳고 그름 여부를 비판적으로 따져본다는 것을 뜻한다. 풍부하고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기독교적 인간관 중에서 생명윤리와 관련하여 고려해 보아야 할 내용은 바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인간관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관련된 여러 곳의 성경본문들 가운데 주목해야 할 중요한 본문은 창세기 1장 26절과 27절 그리고 창세기 9장 6절이다. 먼저 창세기 1장 26절과 27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르시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 본문의 요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인데, 이 말은 “사람=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뜻이다. 사람 가운데 있는 어떤 특정한 한 부분이나 요소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전인으로서의 사람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뜻이다. 영혼만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몸까지도 하나님의 형상이다.


창세기 1장 26,27절의 말씀이 타락 이전의 상태를 말한 것이라면, 이 말씀은 타락 이후의 인간에게도 적용되는가? 이 질문과 관련하여 중요한 본문은 창세기 9장6절 말씀이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세 가지 정보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첫째로, 이 본문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주어진 말씀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명명하신다. 여기에는 어떤 제한 조건이 없다.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에 있어서 차별은 없다. 이 말을 현대 의학적 차원에 적용한다면 건강한 성인이든 아니면, 혼수상태의 환자, 치매에 걸린 노인, 정신질환자, 뱃속에 있는 태안, 시험관 안에 있는 수정란이나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다.


둘째로, 이 본문은 인간의 정신뿐만 아니라 신체도 하나님의 형상임을 분명히 못 박았다.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 곧 사람을 죽이는 자는 사형당해야 마땅한데,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이 본문에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사람의 몸을 죽이는 것을 뜻한다. 곧 사람의 몸도 하나님의 형상이다. 창세기 1장 26,27절에 전인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시사되었는데 창세기 9장 6절에서 보다 명확해진다. 인간의 신체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은 그동안 생물학적인 인체연구를 통하여 인체가 얼마나 신비롭고도 정교한 구조로 되어 있는가가 드러남으로써 뒷받침되어 왔는데, 최근의 유전학연구를 통해서는 한층 더 선명해졌다. 바늘 끝보다도 더 작은 세포 안에서 전개되는 DNA를 중심으로 한 극히 정교하고 신비로운 소우주의 세계는 무한한 지혜의 소유자인 하나님의 작품으로 해석하지 않고는 해석될 길이 없다. 박형룡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몸은 영혼의 자기표현의 기구”이며, 칼빈이 말한 것처럼 육체의 부분에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장식되지 않은 곳이 없으며, 바빙크가 말한 것처럼 육체도 하나님의 경이로운 걸작품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에 속해 있다.


셋째로, 인간의 몸까지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인간관은 이 관점에 부합하는 윤리적 실천을 요청한다. 이 실천의 요구는 창세기 9장 6절에 이미 나타나 있다. 본문에는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사형의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사람의 몸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인간의 몸을 파괴하는 행위는 곧 하나님 자신에게 도전하는 행위라는 뜻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서 어떤 미술가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작품을 화랑에 전시해 놓았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관객 하나가 지나가다가 이 작품을 칼로 찢어서 팽개쳐 버리는 현장에 그 작품을 제작한 미술가가 서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미술가는 관객의 행위를 자신에 대한 심각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몸을 죽이는 행동은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는 독신적 행위가 된다.


창세기 9장 6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모세의 율법 가운데 보편법에 해당하는 십계명 중에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보편적 도덕법으로 규정되었다. 보편법으로서의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은 생명을 다루는 인간의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한 규범으로서 작용한다. 생명을 다루는 인간의 행동의 옳고 그름은 그 행동이 인간의 생명을 부당하게 찾아오는 파괴와 죽음으로부터 보호하고 지키는 일을 충실하게 수행했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인간 자신의 유한성과 한계 대문에 인간은 인간의 생명을 궁극적으로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다. 인간의 신체가 천수를 다 누리고 생애의 종언을 고하는 것을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불치의 질병도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찾아오는 불의의 사고들도 있다. 이런 모든 죽음의 현실로부터 인간 스스로가 인간을 보호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생명을 다루는 자들은 불의의 질병 때문에 인간의 신체가 죽음을 당하거나 파괴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인간은 인간의 생명을 연구하고 다루는 과정에서 생명을 종결시키는 다양한 방법과 길들을 알게 된다. 이때 생명을 다루는 과정에서 가치의 충돌이 나타날 수 있다. 가치의 충돌이 일어나는 이유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가치들과 기독교적 인간관과 윤리규범이 제시하는 가치들이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지배하는 이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시대를 지배하는 이념은 그 이념을 추종할 경우에 뒤따르게 될 막대한 이익을 제시하면서 따라오도록 유혹하는 동시에 그 이념을 추종하지 않을 경우에 많은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며 사회의 다수로부터 소외된다는 사실을 은근히 보여줌으로써 위협한다. 이 유혹과 위협을 이겨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생명윤리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가치의 충돌은 주로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사람의 생명을 죽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인가, 아니면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인가 하는 질문으로 나타난다. 쾌락과 즐거움과 행복을 유일한 존재이유요, 이것들이 없이 다만 가치가 없는 삶이라는 쾌락주의(hedonism)가 강해지면, 죽음을 이용해서라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안락사나 자살이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인간관과 윤리규범은 인간의 생명이라는 가치와 고통의 해방이라는 가치가 충돌을 일으킬 때 인간의 생명에 더 큰 비중을 둔다. 따라서 죽음을 이용하여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시도는 반기독교적인 행위로 비판된다.


또 하나의 가치의 충돌은 현대인을 지배하고 있는 공리주의사상에 의하여 야기된다. 공리주의는 가능한 한 사람들에게 많은 혜택을 가져다주는 행위를 옳은 행위로 판단한다. 공리주의적 사고가 극단화되면 죽음이라는 수단을 이용해서라도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혜택을 추구하고자 하는 태도가 나타난다. 예컨대 사생아를 낳음으로서 임산부의 일생에 찾아올 고난을 피하기 위하여 아이를 낙태시킨다든지, 신생아를 보자기에 사서 쓰레기통 속에 버린다든지, 인간으로 보아야 할 많은 수정란을 파괴시키는 살인행위를 무릅쓰고라도 시험관아기를 가지려고 시도한다든지, 살아있는 사람들의 난치병치료를 목적으로 하여 살아있는 배아를 할구분할하는 살인행위를 자행하면서까지 배아복제를 시도하려는 생명공학자들의 행태가 등장하게 된다.


생명을 다루는 의료인들이 환자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행하는 많은 노력들은 물론 정당한 것이며, 생명공학자들이 유전자연구를 통하여 질병의 원인을 밝혀내고 성체줄기세포 추출방식 등을 이용하여 난치병치료를 위한 연구를 추진하며, 때로는 병든 유전자를 건강한 유전자로 교체함으로써 질병의 근원적인 치료를 위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이 모든 시도들에는 넘어서는 안 될 경계선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몸을 죽이는 살인행위를 방편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작성자 : 조덕제 2015-06-11 16:11:23
현대과학의 발전과 생명윤리 현안들 (2010. 10. 24.)

 

현대과학의 발전과 생명윤리 현안들

 

 

 

사랑의교회 법조선교부 강연

발표일 : 2010. 10. 24.

현대과학의 발전과 생명윤리 현안들



1. 배아 생성 관련


가. 인공 수정: 체외 인공수정, 시험관 아기

* 선별 출산(낙태), 냉동 잔여배아, 배아 입양, 대리모, 배우자 아닌 자의 생식세포 수정 등 문제


나. 이종간 수정

* 잡종인간(반인반수) 가능성 문제

Hybrid(잡종)는, 자연에 있어서는, 근접한 종들 사이에만 일부 가능(말 . 당나귀 → 노새 . 버새, 호랑이 . 사자 → 라이거. 타이온), 실험실에서는, 이종의 정자에 대한 항체를 형성하는 난각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면 이종간 수정도 성공 가능(난자 0.1㎜, 고배율 전자현미경, 주사 바늘)

 

다. 체세포 복제

* 실험(파괴)을 위하여 배아 생성, 난자 다량 확보, 체세포복제배아 → 복제인간 가능성(실제 시도 사례들 있음) 등 문제

 

라. 인간과 동물간 체세포복제

* 이종간 체세포복제배아 → 괴물 가능성, 생태계 혼란 등 문제

 

마. 수정란 할구 분할 복제(인공적 다태아술)

* 배아 손상, 인간 정체성 등 문제



2. 배아 실험

배아 파괴(배아의 내부세포괴 분리) → 배아줄기세포 추출 → 배아줄기세포 주 수립 → 배아줄기세포 분화 연구 → 임상시험

* "배아 연구", "배아 이용(사용)" 용어를 사용하지만, 실제는 배아 살해



3. 배아 융합

세포 융합 방법을 이용하여 두 개의 수정란 세포를 초기 분할 단계에서 분할세포간에 서로 찌그러뜨려 점착시키거나 한쪽 난세포의 일부분을 다른 쪽으로 주입함으로써 두 개의 수정란의 특성을 모두 지닌 세포 또는 개체를 유도(흰쥐 배아 . 검은쥐 배아 → 얼룩쥐): 부모의 유전형질이 2가지가 아니라 4가지 이상

* 인간 배아와 동물 배아 융합 → Chimera(모자이크종) 괴물 가능성 문제

* 역분화줄기세포를 배아나 배아의 최외층 영양막에 주입하여 융합: 역분화줄기세포 융합 배아 → 괴물 가능성 문제



4. 유전자 조작

유전자 조작: 교환, 치환, 이식, 삽입, 제거, 변형, 재조합

 

가. (개개인, 타인간) 유전자 이식 · 제거

* 맞춤인간, 우생학, 선별 임신, 선별 출산(낙태) 등 문제

 

나. 이종간 유전자 이식 . 제거

* 생태계 교란, 면역체계 이상, 괴물 가능성 문제

 

다. 유전자 변형생물(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유전자 재조합식품 등 식량 증산, 기능성 식품 개발, 신약 개발, 바이오장기 추구(형질전환돼지 등) 이점이 있는 반면

* 생태계 교란, 면역체계 이상 등 우려



5. 낙태

* 의학과 의료기기 발전 관련 태아 조기 진단, 시험관아기 시술상 선별 낙태, 입양, 미혼모, 낙태의 신체적 . 정신적 후유증 치료 등 문제



6. 안락사, "존엄사"

* 의학과 의료기기 발전 관련 죽음의 시기(時期) 문제: 말기 환자, 식물상태인간(Vegetable) - PVC(persistent vegetative state)

* 이식용 장기 확보 관련 뇌사 판정 문제

* 사전의료지시서(의향서): Living will 관련 환자 의사의 추정 내지 대리 문제

* 의료적 실태와 환경 문제, 호스피스

*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치료의 중단"과 구별: 중단하는 치료의 내용과 범위 문제



7. 인공생명(Artificial Life)

 

가. 기존 생명체를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새 생명체 창출 문제

o (동종간, 이종간) 인공수정, 체세포복제, 인공적 다태아술, 배아 융합, 유전자 조작 등 관련 사안은 전술

o 그 외 일반 세포로 생명복제(현재도 역분화줄기세포 이용 시 가능) 문제, 인공 자궁 개발 문제

 

나. 인공합성한 DNA를 이용한 완전한 인공생명체 창출 관련 문제

미국 생물에너지대안연구소의 크레이그 벤터 소장 연구팀, 2003. 11. 합성생물학의 기술을 이용하여 원하는 유전형질을 담은 조각들을 이어 붙여 5,386개 염기 규모의 매우 단순한 바이러스 생명체를 창출, 2010. 5. 21. 인공으로 유전자를 합성하여 만든 마이코플라스마 마이코이즈 박테리아를 번식시키는데 성공한 상태

 

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o 유전학을 컴퓨터공학에 도입한 유전 알고리즘(GA: genetic algofithms)을 적용한 결과, 시험용 디지털 프로그램이 생물학적 현상과 유사한 자기복제와 돌연변이를 일으켜 10분 만에 29,000종의 변종을 창출(1900년 미국 델라웨어대학교의 열대 생태학자 토마스 레이)

o 병행분산처리(PDP; Parallel Distributed Processing) 방식(신경망 방식)에 의한 컴퓨터는 종래의 기호주의가 아닌 연결주의 원리에 따라 중앙처리장치(CPU)없이 서로 연결된 처리단위인 노드(node; process unit)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하여 한 방향의 계산이나 추리가 아니라 끊임없는 학습(learning)을 하는 살아 있는 유기적 생명체 기능을 수행, 최근 양자 컴퓨터 개발 중인 상태

 

라. 로봇공학(Robot Technology)에 의한 대체생명

* 기계를 내부에 결합한 인간인 Cyborg(Cybernetic + Organism)와 구별

o Humanoid: 인간의 형태를 갖춘 로봇(인간형 로봇)

1973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가토 이치로 교수팀의 WABOT-1(두 발로 걷는 최초 휴머노이드), 2004년 한국과학기술원 오준호 교수팀의 HUBO(가위 바위 보, 가벼운 춤), 인공신경망, "재구성이 가능한 하드웨어"

o Android: 우수한 전자두뇌(정보집약 칩 부착 등)와 인공피부까지 갖추어 외형상으로는 인간과 똑같아 보이는 로봇. 영화 「터미네이터」의 안드로이드들

o 그 외 유전자조합 인공생명, 인격합체 인공생명 등 가능성 문제

 

마. 인공생명체 원격 조종 - 영화 「아바타」의 나비족 아바타

o 아바타(Avata)는, 본래 인터넷 게임 또는 웹사이트 등 가상공간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그래픽 아이콘(가상인물), 1992년 과학소설가 닐 스티븐스의 SF소설 「스노우 크래시」에서 처음 사용

o 영화 「아바타」(2009. 12. 16.부터 상영)의 나비족 아바타: 우주 행성 판도라의 외계인 나비족(Na´vi)의 배아에 인간의 유전자를 주입하여 시험관에서 생명체를 창출한 후 6년 동안 성숙과정을 거쳐 성인이 된, 외계인과 인간간의 복제생명체, 인간 조종자는 Psi 링크 머신을 통하여 아바타의 의식과 연결되어 아바타를 원격 조종, 현재는 공상과학 단계

* 정신전자학, 유사심리학, 심령과학 발달 및 의학,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전자공학, 물리학 등의 융합 연구에 의한 뇌과학 발달 등에 비추어, 인공생명체 원격 조종 등 문제를 단순한 공상과학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단정해 버리는 것은 단견(短見)임

작성자 : 이승구 2015-06-11 16:08:54
생명의 시작은? 낙태 문제에 대한 함의 (2010. 6. 6.)

 

생명의 시작은?

낙태 문제에 대한 함의


이승구(합동신학대학원 교수)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생명윤리세미나

"인간의 존엄성과 낙태" 발제

다니엘새시대교회

발표일 : 2010. 06. 06.



생명의 기원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생명이 무엇인가?”하는 문제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성경과 신학에 의하면 생명은 그 본래적인 의미에서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은 것은 죽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는 모든 생명에 대해서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나는 일단 이 생명을 인간의 생명에 국한해서 논의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주로 인간의 생명의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져 나갈 때 그 온전한 생명을 누려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함을 받았어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온전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아주 놀랍게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 일정한 기간 생명의 일부를 누려 나간다. 그러나 그렇게 누려 가는 생명은 온전하고 충족한 생명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의도하셔서 인간들이 누려 나갈 수 있는 생명의 아주 제한된 부분을 누리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 개념을 주로 이런 생물학적인 생명, 심리적 생명, 사회학적인 생명 개념을 중심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생명은 그것의 가장 포괄적이고 충족한 의미에 의해서 먼저 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에 염두에 두고 있었던 가장 온전한 의미의 생명 개념에서 출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상태의 인간의 생명과 그들을 향해 요구하신 생명의 상태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I.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

하나님께서는 인류 최초의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땅을 정복하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잘 다스리며 지키는 아주 귀한 사명과 함께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창 1: 26-28).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흙(‘하아다마’)으로부터 고운 흙(먼지, ‘아파르’)을 사용하셔서 남자의 형태를 만드시고, 그의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시어 그로 살게 하신 것이다. 이때부터 아담이 “산 존재”(즉, ‘네페쉬 하야’, 생물, living soul)가 되었다(창 2:7). 여기에 인간 생명의 기원이 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것에서 인간의 생명이 기원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모든 선한 것의 기원이신(약 1:17)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그 생명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여기서 “창조”라는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거나 유출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낳으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기쁘신 뜻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생명이 있게 된 것이다. 인간 생명의 근원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족보적 흐름을 거꾸로 말하면, 그 마지막 말은 항상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족보에 대해서 말하는 대로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눅 3:38)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셋과 아담의 관계성과 아담과 하나님의 관계성의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아담은 셋을 나은 것이지만, 아담은 하나님에 의해서 당신님의 기쁘신 뜻대로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실 때 재료를 사용하실 수도 있으셨고, 사용하지 않으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므로 이때 재료를 사용하셨는지의 여부, 또 어떤 재료를 사용하셨는지 등의 문제는 그 자체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흙이라는 재료를 사용하지 않으시고도 인간을 만드실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을 만드셨을 때에는 흙(‘아다마’)으로부터 인간을 만드시고 그 의미를 살려 그를 ‘아담’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최초의 인간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흙을 사용하셔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로부터 인간의 몸은 흙으로부터 나왔고, 인간의 영혼은 직접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추론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인간 전체가 다 하나님의 직접적 창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그 영혼과 몸이 분리되어 있거나 분리될 수 있는[즉, 죽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영혼과 몸이 함께 있는 ‘영혼과 몸이 단일체로 있는 사람’(psycho-somatic unity)인 것이다.2) 그는 가멸적(可滅的)이거나 가사적(可死的)인 존재가 아니었다. 고귀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의 모양을 따라 지어진 존재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였다.

그의 이 통치 행위를 돕도록 그와 상응하게 돕는 배필로 지어진 여자는 이 남자의 갈비뼈를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창 2:21-22). 이 경우에도 여자의 몸은 남자에게서 왔고, 그 영혼만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몸과 영혼의 단일체’로서의 또 한 사람인 여자를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비뼈를 사용하셔서 직접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관점에서는 여자도 남자와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이고, ‘남자에게 필적하며 그에게 상응하여 그를 돕는 자’로 [‘에제르 케네그도’] 하나님의 고귀한 창조물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남자와 여자의 한 몸 됨의 실행을 통해서 “생육”하도록, 즉 아이들을 낳도록 하셨다. 물론 이 ‘창조함을 받은 지위’, 즉 ‘순전한 상태’(status integritatis)에서 인간은 아직 아이를 낳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과 축복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아이들을 낳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낳아진 아이들은 그 몸을 그 부모에게서 얻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영혼만을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몸의 단일체로서의 인간을 하나님께서 이 생육의 과정을 사용하셔서 이 땅에 계속 창조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creatio continuae)의 과정이 여기 있다. 인간의 생명은 이렇게 모두가 하나님의 직접적 창조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 인간의 생명은 영혼과 몸이 같이 있는 통일체이다. 하나님의 최초의 창조 속에서는 이 영혼과 몸의 통일성이 깨어지지 않도록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창조 속에 있는 생명이었다.



II. 개별적 인간의 생명은 언제 시작되는가?

사람들은 개별적 인간의 생명의 시작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하여 왔다. 여기서 나는 개별적 인간의 생명이 그가 수태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논의를 하고자 한다.

 

(1) 이에 대해 가장 결정적인 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로부터의 논의라고 생각된다. 영원 전부터 신성을 가지고 계신 성자께서 정확히 언제부터 인성을 취하신 것으로 여겨져야 하는가? 성경과 신학의 일치하는 대답은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수태되는 때부터 성자께서 인성을 취하신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 그것은 그저 일상적인 언어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장차 마리아의 몸에서 나실 이가 분명한 인성을 취하셨으니, 그저 마리아가 수태한 아기가 인성을 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성령으로 말미암은 수태”라는 사실은 이런 대답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판단된다. 성자께서 마리아에게 수태되는 그 순간부터 그는 온전한 인성을 가진 분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수태된 지 14일 후, 3개월(12주) 후에야 인간적 생명을 가지신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기괴한 것인가? 그리스도의 경우에 그러하셨다면 다른 사람의 경우도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2) 이런 기독론적 논의를 보충하는 것으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모태로부터 지으셨다고 말하는 성경 구절들에 근거한 논의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다음 같은 시편 기자와 욥의 말을 들어 보라: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함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을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해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3-16).

주의 손으로 나를 만드사 백체를 이루셨거늘 ... 주께서 내 몸을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가죽과 살로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뭉치시고,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욥 10:8-12).

나를 태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배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욥 31:15)

이 구절들에서는 인간의 성행위와 그로 말미암는 수태를 암시하면서 그 수태된 것이 주께서 지으시는 것이며, 생명과 은혜를 주신 것이라고 하고 있다. 모태 속에서 자라나는 태아들의 성장을 하나님이 그 아이를 지으시는 것이라고 보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를 그저 모든 생명의 과정에 하나님이 관여하심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계시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드러내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정되는 과정도 하나님께서 관여하시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위에서 인용한 성경 구절의 관점에서는 이 수태도 명백히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한 측면인 것이다.3)

 

(3) 더구나 이 구절들에서는 다른 많은 성경 말씀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렘 1:5, 엡 1:3ff.) 우리는 이렇게 지음 받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태되어 생물학적 생명을 부여받기 전부터도 이미 하나님의 관념 가운데서는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아시는 것과 시간과 역사 가운데 있는 것을 아시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신다고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부터 작정하시고 아시는 하나님께서 수태시키시는 그 과정에 생명의 시작이 있다고 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4) 이런 논의에서 흔히 임신한 태아의 생명적 가치를 다른 사람의 생명의 가치보다 낮추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오해되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다. 그것은 출애굽기 21:22-25이다. 더구나 우리말 성경의 번역은 이런 해석에 가깝게 번역되어 있어서 우리의 오해를 증진시키기 쉽다.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흔히 이런 번역과 해석을 이 구절에 대한 ‘낙태 해석’(miscarriage interpretation)이라고 부른다.4) 이에 따른 우리말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옮겨져 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좆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 갚을 지니라”(출 21:22-25).

그러나 사실은 이를 이와 같이 낙태를 함의하는 것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이는 태아의 생명을 낮추어 보는 구절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낙태를 고의적이지 않은 우발적인 죽음으로 다루어 그런 우발적인 경우의 살인에 대한 모세 율법의 규정에 따라 이를 논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출 21:13-14, 20-21; 민 35: 10-34; 신 19:1-13). 그러므로 이 경우에 벌금을 물게 한 것이 태아의 생명을 덜 가치롭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다.5)

더구나 이 구절, 특히 22절은 사실 낙태가 유발된 것으로 해석되기보다는 살아 있는 아이를 조산케 한 경우로 해석해야 한다는 강한 논의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6) 프레임은 첫째로 22절에 나오는 ‘옐레드’란 단어가 성경의 그 어떤 곳에서도 인간의 형체를 갖지 않은 아이나 자궁 밖에서 존재할 수 없는 존재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 일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더구나 그런 것을 말하기 원했다면 모세가 사용할 수 있는 다른 단어들이 있다고 한다. 즉, 태아(embryo or fetus)를 의미하는 ‘골렘’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도 있고(시 139:16), 또 사산된 경우를 지칭할 때 성경이 항상 사용하는 ‘네펠’(one untimely born)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욥 3:16; 시 58:8; 전 6:3). 그런데도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아이’를 뜻하는 ‘옐레드’란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여기서 아이가 낙태된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한다.

프레임은 둘째로 역시 22절에 사용된 “야짜”라는 동사는 일반적으로 정상 분만을 사용할 때 사용된 단어이므로(창 25:25, 26; 38:28-30; 욥 3:11; 10:18; 렘 1:5; 20:18), 이로 볼 때도 여기서 낳아진 아이가 죽은 것이라고 볼 이유는 없다고 한다. 민 12:12 외에는 이 단어가 낙태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 일이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더구나 구약에서 자연적인 낙태를 지칭할 때 사용된 동사는 ‘샤콜’이라는 것이다(출 23:26; 호 9:14; 창 31:38; 욥 2:10; cf. 왕하 2:19, 21; 말 3:11). 그러므로 여기서 아이는 낙태된 것이기보다는 조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22절과 23절에 나온 “해”를 뜻하는 ‘아손’(ןוֹסאָ)이라는 단어가 그 산모에게 미친 “해”라고 지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 “해”는 그 아이에게 미친 해나 그 산모에게 미친 해를 모두 뜻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22절은 비록 조산이기는 하나 아이에게도 다른 해가 없고, 산모에게도 다른 해가 없는 상황을 말한 것이고, 23절은 그 둘 중 누구에게든지 해가 있는 경우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클라인은 22절에서는 맞은 그 산모가 죽고 아이는 조산한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이 경우에는 벌금만 내면 되도록 규정된 데 비해서, 23절 이하에서는 아이에게도 해가 가해졌으면 탈리오 법칙에 따라서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7) 이 점에서 해석이 다르지만 클라인의 해석도 결국 22절은 낙태를 함의하고 있지 않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해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태속에 있는 생명에게 높은 가치가 있음을 분명히 하신 것이고, 사실 이는 우발적인 살인에 사형을 요구하신 유일한 경우가 된다는 것이다.8) 이렇게 보면 이 구절은 복중에 있는 태아가 생명임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는 구절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점들을 고려 할 때에 우리는 성경의 관점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수태되는 그 순간에 인간적인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어야만 한다. 이는 태아(embryo)가 생성해 내는 호르몬 작용으로 산모의 정상적 월경이 중지되며 소위 원시선(primitive streak)이 출현하는 14일째로 보는 입장이나, 심장이 형성되고 눈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18일째로 보는 입장이나,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24일째나, 혈관에서 피가 흐르고 산모의 피의 공급으로부터 분리되는 30일째로 보는 입장이나, 뇌파가 관찰될 때인 43일째로 보는 입장이나, 산모가 태동을 느끼기 시작하는 4-5개월째로 보는 입장들9)보다 좀 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겨진다. 다시 말하면 수태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은 시작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적 존재가 수태되는 순간부터 존재한 것이다.”10)

(그러나 이 때 ‘정확히 어느 순간이 수태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의학자들이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정자가 난자에 들어가는 때(insemination)인가?, 아니면 노르만 포드가 주장하듯이 이 insemination 이후 22시간 정도 후인 그 둘의 염색체가 합쳐져서 하나의 세포를 이루고 분열을 할 수 있게 준비되는 소위 syngamy의 시기(zygote)인가?11)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의학자들의 결정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비전문가(layman)로서 나는 그저 수정되는 때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신학자들인 파인버그 형제들은 syngamy 이전에는 아직 인간의 세포가 아니라 해도, “인간의 생명을 위한 모든 잠재력을 가진” “인간의 생명을 형성하는 과정을 이미 시작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12) 이것은 그들이 잘 말하고 있듯이 실제적으로는 수정되는 순간에 생명이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과 별 차이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로버트 벤베르그를 이용하면서 잘 말하고 있듯이 수정 이후에는 그 아버지의 것도 아니고, 그 어머니의 것도 아닌 새로운 세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 수정적 연합 가운데서 독립적 존재(distinct entity)가 생성된 것이다.13) 나도 이에 동의한다.)



III. 이러한 신학적 입장의 함의

우리가 앞장(章)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인간의 생명이 수태되는 그 순간부터라고 하면 그것은 과연 어떤 함의를 가지는 것인가? 그것의 함의는 한마디로 “생명을 옹호하는 입장”(pro-life position)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최대한으로 말한다면 수정(fertilization)된 모든 수정란(zygote)은 다 생명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고, 최소한으로 양보하여 말한다고 하면 수정되어 어머니 태에 착상된(nidation) 수정란은 다 생명으로 여겨져야만 한다는 함의를 지닌다. 물론 이 최대치와 최소치의 차이는 상당히 큰 것이다. 인공 자궁을 만들어 태아를 그 안에서 키울 수 있는 장래의 의학적 발전 가능성을 생각하면14), 또한 수정되었으나 착상되지 않은 수정란들을 찾아 파괴하려는 이들과 그런 기전(mechanism)을 가진 다양한 피임약과 도구들을 생각하면 나는 그 최대치를 주장하는 것이 옳고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결국 인간의 ‘신과 같이 되어 신과 같이 행동하려는’[play God] 모든 시도를 다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 가운데서는15) 최소치의 접근을 해도 어떤 점에서는 최대치의 주장과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으며, 오히려 이렇게 보는 것이 몇 가지 난점들에 대해 좋은 해결을 제시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서, 수정란 중 25% 정도가 월경 시에 자연적으로 자궁에서 배출된다고 하거나16) (자연적으로 수정된 수정란 중 30%만이 아이가 된다고 하는데17)), 이처럼 인공적으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착상하지 못하고 배설된 경우에는 이런 최소치적 접근 방법을 사용하면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본인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니 말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여인이 자신이 의식하지도 못한 채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를 너무 강조하면서 이런 상태의 수정란을 아직 인간적 생명으로 여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이하에서는 이런 입장이 낙태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함의를 가지고 있는지를 논하도록 하겠다.

 

1. 기본적 입장

이런 경우의 예를 사용해서 '일란성 쌍둥이가 되는 일'(twining)과 '두 수정란이 합하여 한 태아를 만드는 일'(mosaic)이 가능한 단계의 수정란은 아직 생명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고 논의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서, 람제이 같은 이들은 이 단계의 수정란은, 즉 포배 상태(blastocyst)가 되기 전의 수정란은 아직 개별적 인격(an individual person)이 아니라고 한다.18) 그러나 이때에는 아직 얼마나 많은 사람이 될 것인지는 몰라도, 이때에도 분명히 인간적 인격이 현존하고 있다고는 해야 한다고 말하는 파인베르그 형제들의 판단이 더 옳다.19)

또한 RU-486과 같은20) 약물들을 사용해서 인위적으로 수정난의 착상을 방해하고 파괴를 유도하는 것은 큰 문제가 있는 논의요, 행위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이 최소치적 접근은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아야 할 접근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글이 취한 신학적 입장에 따르면, 수정란은 이미 생명이 부여된 것이므로 그 태아도 다른 인간과 동등하게, 아니 더 약한 존재이므로 더 신경을 써서 가장 세심한 배려와 보호가운데서 다루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 태아가 계속 있다가는 어머니의 생명과 함께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과 이와 비슷하게 태아와 산모의 생명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극단적인 경우에는 인공 유산을 허용할 수 있지만, 그 외의 경우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허용되는 경우들로 대개 인정되는 것은 자궁 외 임신의 경우와 암 치료나 종양 제거의 경우에 수반되는 유산이다.21)

그런데 초기 단계의 수정란은 아직 생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와는 생각이 아주 달라서, 그들은 대개 낙태는 신중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낙태가 유아 살해가 아니며, 사려 깊은 숙고를 거친 인공 유산은 사악한 행위가 아닐 수 있다고 한다.22)

 

2. 다른 견해를 표명하는 복음주의자들의 견해 고찰과 비판

복음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인공 유산을 허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도 좀 모호한 입장을 나타내는 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서, 달라스 신학교의 노르만 가이슬러(Norman Geisler)는 그의『윤리학』(Ethics: Alternatives and Issues [Grand Rapids: Zondervan, 1971])에서 태아의 생명은 잠재적 생명이라고 보고, 실제적인 생명이 잠재적인 생명보다 우선한다고 하며(p. 118), (기형이나 장애아 정도가 아닌) mongolism 같은 아기가 출생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와 강간과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의 경우에는 정당한 낙태의 근거가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pp. 223, 225). 그를 그대로 옮기고 있는 위거찬 교수도 같은 입장을 표한다(『기독교 윤리』[서울: 형설출판사, 1983], pp. 446, 451f.). 그러나 데이비스가 말하는 바와 같이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은 '잠재적 인간적 생명'이라고 말하기보다는 큰 잠재력을 지닌 실제적 인간적 생명을(actual human life with great potential) 뜻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23)

Smedes는 그의 책 Mere Morality (Grand Rapids: Eerdmans, 1983)에서 가이슬러의 입장에서 더 나아가서 마치 도토리가 아직은 상수리나무가 아닌 것처럼 단지 잠재적이기만 한 것은 아직 인격이 아니라고 단언하고(p. 129), 처음 며칠 동안의 수정란은 인격으로 여기기 어렵다고 할뿐만 아니라(p. 133), 법적으로는 처음 6주 동안에는 허용되어야 하고, 6주부터 12주 사이에는 엄격히 금해져야 하며, 3개월 이후에만 범죄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pp. 143f.). 우리는 그의 이런 입장 표명에 대해서 의아한 마음을 갖게 된다. 일반적으로 개혁 신학적 입장에 충실한 그가 이런 생명 윤리 문제에 있어서는 아주 자유로운 입장에 가까이 서서 논의를 하는 것이 아주 의아스럽다.

3. 낙태 문제에 대해 우리와 같은 입장을 표명하는 신학자들의 견해

그러나 상당히 많은 신학자들은, 다양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필자가 취한 입장에 동의한다. 예를 들자면, 1971년 5월 24일-29일에 열렸던 미국의 정통 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 제39차 총회에 제출되고, 그 이듬해인 1972년에 총회의 재가를 받은 '낙태 문제 연구 위원회의 보고서'(Report of the Committee to Study the Matter of Abortion)에서는 이와 거의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24) 그 보고서의 일부를 인용해 보면, "태어나지 않은 아기도 하나님께 속하며"(p. 89), "성경은 태어나기 전의 인간의 생명(prenatal human life)과 태어난 후의 생명(postnatal human life) 사이의 인격적 연속성이 있음을 가정한다"고 하며(p. 93), "인격적 연속성은 수태되는 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고(p. 94), "성경에서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수태된 때로부터 인간 이하라는 최소한의 시사도 주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p. 95).

또한 이 보고서는 이로부터 (1) 인구 조절을 위한 낙태나 (2) 가족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한 낙태, (3) 산모의 정신적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낙태, (4) 원치 않는 아이의 출생을 막기 위한 낙태, (5) 산모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낙태 (소위 "치유적 낙태", therapeutic abortion), (6)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의해 수태된 태아의 낙태, (7) 기형아를 막기 위한 낙태 모두가 다 허용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pp. 112-17). 단지 산모의 생명에 위협이 있을 경우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일반적으로는 이것이 우리가 기독교적 근거에서도 정죄할 수 없는 낙태의 유일한 정당화의 경우"라고 한다(p. 119. Cf. p. 121). 죤 프레임이 중요한 집필자의 한 사람이었던 이 보고서는 전통적 개혁파의 입장을 잘 대변한다고 여겨진다. 프레임 자신은 자궁의 악성 종양을 제거하여 태아가 죽는 것과 자궁 외 임신(an ectopic pregnancy)의 경우에 인공 유산이 참으로 산모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필수적임을 보일 수만 있다면 허용될 수 있으니, 이는 정당방위를 정당화하는 성경에 근거해서 추론될 수 있다고 한다.25)

같은 개혁파 입장에 서 있는 해롤드 브라운과 고든-콘웰 신학교의 죤 제퍼슨 데이비스의 입장도 이와 상당히 유사하다.26) 예를 들어서, 브라운은 일반적으로 아이를 뜻하는 히브리어 "옐레드"가 출 21:22에서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도 사용되었으며, 바로가 죽인 아이를 '브레포스'(βρέφος)라고 하더니(행 7:19), 그 단어가 태중의 세례 요한에게도 사용된 것에 주목한다(p. 120). 그리고 브라운은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과 인격적인 방법으로 관여하신 예를 들면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이미 하나님의 형성으로 만들어졌으며, 법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인간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고 결론 내린다(p. 127). 또한 데이비스는 "[태아가] 놀기(quickening) 시작하는 순간이 생명이 처음 있게 된 표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살아 있는 인간이 수태되면서부터 있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27) 또한 심지어 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사례 분석에 근거한 조사 연구에 의하면, 강간에 의해 임신할 확률은 1/200에서 1/50된다고 한다)라도 "낙태를 하지 않는 것이 옳으며, 오랜 기간을 고려해서 판단하면 낙태하지 않는 것이 산모에게 더 유익이 된다"고 한다.28) 데이비스는 또한 우생학적 낙태에 대해서도 반대하면서 "성경적 전망은 '찾아 죽이는' 윤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지 않고"(p. 155), "그리스도의 윤리는 '찾아 죽이는'(search and destroy) 것이 아니라, '찾아 구원하는 것'(to seek and to save)이었다"고 한다(p. 156). 이런 입장을 유지하면서 데이비스는 체외 수정(IVF)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위험에 인간을 노출시키는 인간 존재에 대한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실험의 한 형태이다"고 결론짓는다(p. 91).29) 아마 이런 입장이 개혁파 신학적 유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입장일 것이다.

개혁파의 입장과는 다른 세대주의적 입장을 가진 파인베르그 형제도 생명의 기원에 대한 문제와 이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위에서 언급한 이들과 거의 같은 입장을 유지한다. 그들도 수정되면서부터 생명이 시작된다는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30) 이로부터 관련된 윤리적 문제에 대한 평가와 논의를 다양한 반대 논의들에 대한 적절한 논박과 함께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 됨(personhood)이 수태에서 시작되므로" 낙태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pp. 59f.). 우생학적인 낙태에 대해서도 그런 입장을 취하고(p. 77), 심지어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에 경우에서도 말이다(p. 79). 또한 위에서 우리가 언급한 바 있는 아주 엄격한 조건의 시험관 수정에 대해서도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가지고 너무 큰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라고 반대하며(p. 235), 수태시키지 않은 여러 수정란을 냉동시키는 것도 결국 그 생명에 손상을 주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p. 236). 결국 시험관 수정은 "어떤 수정된 수정란들은 결국 아기가 되지 않을 것을 기대하고 의도가 들어 있는 사람에 의해서 조작되는 실험 과정"이라는 것이다(p. 237). 그래서 파인베르그 형제들은 그 모든 것을 알기까지는 더 이상의 시험관 수정에 대해서는 모라토리움을 선언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p. 237).

루터파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Hermut Thielicke)의 신학적 입장도 위에서 제시한 입장에서 멀지 않아 보인다. 그도 인간 생명의 신성함은 수태가 되면서 바로 주어진다고 하면서, "태아는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그 자체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태아는 그 자체의 순환계와 뇌를 가지고 있으며 이 외에도 기본적 생물학적 사실은 그를 한 인간으로 취급하기에 충분할 것이다"고 말한다.31) 오직 산모의 생명이 위험한 한계 상황에서는 허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때에도 우리는 오직 "용서라는 조건에서만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한다.32)

바르트와 바르트의 신학적 경향에 동감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이와 비슷한 입장을 천명하는 일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서,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태아의 생명을 죽이는 사람은 곧 한 인간을 죽이는 것과 같으며, 따라서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과 그에게 속한 동료 인간의 생사를 판결하는 극악무도한 일을 감행한 것이다."33)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인공 유산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the killing of human life)으로 이해되는 것이다.34) 맹용길 교수도 비슷한 입장을 잘 표현한다.:

태아가 인간적이라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태아가 분명히 인격적이기 때문이다. 태아는 적어도 인격이 가지는 질을 함축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 인간을 대하듯 태아를 대하여야 한다.35)

그러나 그들의 논의에는 한계 상황에서의 결단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모호성을 나타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바르트는 태아가 죽지 않으면 산모와 태아가 모두 죽게 되는 어쩔 도리 없는 두 생명 사이의 갈등을 내포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산모의 건강과 태아의 생명 중에 양자택일을 하게 되는 경우에도 최후 수단으로(ultima ratio) "산모의 자궁 내에서 태아를 죽이는 것은 허용되거나 명령될 수 있다"고 한다.36) 그 때에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그 앞에 서서,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책임 가운데서 결단해야 한다고 말한다.36) 이는 아주 의미 있는 말로 들릴 수 있으나, 바르트의 역동적 계시 이해를 고려하면 매우 심각한 상황을 낳을 수도 있는 말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개인의 생명의 시작에 대해서는 우리와 입장을 같이 하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인류 전체의 생명의 시작이 아담과 하와로부터라는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주저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점에서 발생하는 차이가 큼을 인정해야만 한다.


IV. 결론

이제까지 우리는 생명의 개념을 정리하고,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생명이 과연 언제부터 시작된다고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논의하여 보았다. 우리는 이 논의에서 개개인의 생물학적인 생명은 수태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바른 견해라고 결론지었다.

정확히 언제 개개인의 생명이 시작되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고, 우리의 심각한 고찰과 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만 너무 빠지는 것은 온전한 기독교적 인간관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적으로 우리에게는 우리가 <생명 3>이라고 부른 생물학적인 생명 외에 더 중요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생명 3>도 중요하다. 우리는 이 생명을 돌보고 치료하며, 마치 주님을 섬기듯이 우리와 다른 이들의 생명을 돌아보고 증진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 생명이 전체인 것처럼 해서는 안 되고, 우리는 더 고귀하고 높은 생명인 <생명 2>,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에로 사람들을 이끌어 가고, 그것을 제시하며, 그것을 희망하도록 하고, 그것을 누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의료인들도 궁극적으로는 이 영생의 생명을 위해 의료 행위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진정한 생명이 그 영생에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결국 이런 온전한 생명을 진정한 생명으로 여기는 의식과 풍토를 만들어 내는 작업의 일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하면 그저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생명"만을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더 포괄적이고 풍성한 생명을 생각하며, 언어의 사용도 그에 부합하게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진정한 의미는 영적으로 죽은 생명에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산 생명에서 온다는 것을 말과 이론과 학문으로 제시하고, 우리의 의료 행위와 삶으로 증시해 나가야 할 것이다.



========================================================

1) 이하의 내용의 좀 더 구체적인 논의는 필자의 『인간 복제 그 위험한 도전』, 개정판 (서울: 예영, 2006), 특히 1장과 2장을 참조하라.

 

2) 이 점에 대한 좋은 강조로 Anthony A Hoekema, Created in God's Image (Grand Rapids: Eerdmans, 1986), 203-26을 보라.

2) 이 외에도 성경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속의 아이들을 이미 태어나 성장하고 있거나 성장한 사람과 같은 말을 사용해서 언급하고 있는 예로 다음을 보라: 창 25:22, 욥 3:3, 31:15, 사 44:2, 24, 호 12:3, 시 51:5 등.

 

3) 이런 해석의 대표적인 예로 다음을 보라. R.S.V., 한글 개역, Bruce M. Waltke, "Old Testament Texts Bearing on the Issues," Birth Control and the Christian, Walter O. Spitzer and Carlyle L. Saylor, eds. (Wheaton: Tyndale House, 1969), 10-11.

 

4) 이와 같은 논의를 좀 자세히 제시하는 예로 John S. Feinberg and Paul D. Feinberg, Ethics for a Brave New World (Wheaton, Illinois: Crossway Books, 1993), 64를 보라(물론 그들은 다음의 조산의 경우로 보는 것이 더 옳은 해석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5) Cf. KJV, NIV. 이는 또한 프레임이 강하게 주장한 논의이다. Cf. John M. Frame, "Abortion from a Biblical Perspective," in Richard Ganz, ed., Thou Shalt Not Kill (New Rochelle, NY: Arlington House Publishers, 1978), 52-57; John M. Frame, Medical Ethics: Principles, Persons, and Problems (Phillipsburg, New Jersey: Presbyterian and Publishing Co., 1988), 96-102. 그리고 프레임을 따라서 파인베르그 형제들도 이런 해석을 한다(Feinberg and Feinberg, 64-65). 그리고 우리가 후에 논하겠지만 클라인도 이런 이 구절을 좀 다르게 해석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조산의 경우로 보는 해석을 제시한다(Meredith G. Kline, "Lex Talionis and the Human Fetus,"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20, 3 [1977]: 193-201). 이들 외에도 이런 조산으로 해석한 주해적 논의들로 다음을 참조하라: Jack W. Cottrell, "Abortion and the Mosaic Law," Christianity Today (March 16, 1973): 6-9; O. Wayne House, "Miscarriage or Premature Birth: Additional Thoughts on Exodus 21:22-25,"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41 (1978): 108-23; Davis, 150f.

 

6) Kline, 194ff.

 

7) 이점은 다른 점에서는 프레임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파인베르그 형제들이 잘 지적한 점이다(Feinberg and Feinberg, 65).

 

8) 이는 일반적으로 보고된 것들이나 나는 이 정보를 Feinberg and Feinberg, 53-55으로부터 얻어 사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9) John Jefferson Davis, Evangelical Ethics: Issues Facing the Church Today (Phillipsburg, New Jers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85), 137.

 

10) Norman Ford, "When Does Human Life Begin? Science, Government, Church," Pacifica 1 (1988), 304, 316-24, cited in Feinberg and Feinberg, 414, n. 33-35 and 441, n. 109.

 

11) Feinberg and Feinberg, 58.

 

12) Robert Wennberg, Life in the Balance: Exploring the Abortion Controversy (Grand Rapids: Eerdmans, 1985), 54-79, in Feinberg and Feinberg, 60.

 

13) Frame, 86.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런 가능성이 실재화 될 수 있지 않다고 한다. Cf. Davis, 147.

 

14) 이는 아직은 인공 자궁(artificial placenta)을 만들어 여인의 자궁 외에서 온전히 태아를 양육할 가능성이 없다는 현재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Cf. J. Kerby Anderson, Genetic Engineering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2), 53ff.; Feinberg and Feinberg, 229. 또한 자궁 밖에서 태아의 생존 가능성 있는 시점(the commonly accepted point of 'viability')을 대개 28주 이후로 보고 있으나, 1970년대 이후에는 태아가 수정 후 22주 후에는 자궁 밖에서도 살 수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고 한다. Cf. Frame, 85. 그런데 1985년에는 500 그램 이하의 아이가 조산되어도 생존가능 할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Cf. Lewis B. Smedes, Mere Morality [Grand Rapids: Eerdmans, 1983], 130).

 

15) 나는 이 정보를 Harmon L. Smith, Ethics and the New Medicine (Nashville: Abingdon Press, 1970), 김중기 역,『현대의학과 윤리』(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 13에서 얻었다.

 

16) 이는 하바드 의학대학원(Medical School)의 죤 비걸스(Dr. John D. Biggers)의 통계를 반영하면서 David and Renee Sanford, "Test-tube' Babies," Other Side 19 (November 1983), 22에서 인용한 것이다(Feinberg and Feinberg, 227에서 재인용).

 

17) Paul Ramsey, "Sanctity of Life," The Dublin Review (1967): 4, n. 1, cited in H. L. Smith, 38

 

18) Feinberg and Feinberg, 62.

 

19) Cf. Feinberg and Feinberg, 81-84.

 

20) Cf. Frame, 30f.; O. J. Brown, Death Before Birth (Nashville: Thomas Nelson, 1977); Paul B. Fowler, Abortion: Toward an Evangelical Consensus (Portland: Multnomah Press, 1987), 169-70; Feinberg and Feinberg, 74f.; Davis, 149f.

 

21) 이런 주장의 대표적인 예로 Smith, 49; Fletcher, Morals and Medicine (Boston: Beacon Press, 1960), 150, 152를 보라.

 

22) Davis, 153.

 

23) 이는 John M. Frame, Robert L. Malarkey, Joseph Memmelaar가 집필한 것으로 위의 인용한 Frame, 87-122에 그 전문이 실려 있다.

 

24) Frame, 30f.

 

25) Cf. Brown, esp., 119-35; John Jefferson Davis, Evangelical Ethics: Issues Facing the Church Today (Phillipsburg, New Jers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85), Chs 3, 6.

 

26) Davis, 136f.

 

27) Davis, 154f. 그가 언급하고 있는 조사 연구는 Sandra K. Mahkorn and William V. Dolan, "Sexual Assalt and Pregnancy," in Thomas W. Hilgers, Dennis J. Horan, and David Mall, New Perspectives on Human Abortion (Frederick. MD.; University Publications of America, 1981), 187ff.에 나오는 것이다(cited in Davis, 183, notes 85, 86, 87).

 

28) 다른 신학적 입장에 서 있는 폴 람제이도 이 점에서는 데이비스에게 동의한다. Cf. Paul Ramsey, On In Vitro Fertilization (Chicago: Americans United for Life, 1978), 10.

 

29) Feinberg and Feinberg, 71-98, 207-98, esp., 71, 234.

 

30) Helmut Thielicke, The Ethics of Sex, trans. John W. Doberstein (New York: Harper and Row, 1964), 227, 228. See also 237.

 

31) Thielicke, 242.

 

32)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II/4, trans A. T. Mackay et al. (Edinburgh: T. & T. Clark, 1961), 416.

 

33) Barth, 415.

 

34) 맹용길,『생명의료윤리』(서울: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87), 58.

 

36) Barth, Church Dogmatics, III/4, 421.

 

37) Barth, 423.

작성자 : 손봉호 2015-06-11 15:25:50
생명윤리와 인권(2007. 11. 20)

 

생명윤리와 인권


 

손봉호(동덕여대 총장, 서울대 명예교수, 공선협 상임고문, 기윤실 자문위원장)

2007년 11월 20일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초청강연

발표일 : 2007. 11. 20.

 


최근 생명윤리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 그것은 생명이 과거 언 때보다 더 큰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1. 자연과학, 특히 생명공학이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으며, 반면 생명 현상의 조작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If any thing can, it will - Murphy의 법칙"가능성 뿐 아니라 이미 다른 동물에 대한 생명공학적 실험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인간에게 적용 유혹 -질병을 치료한다는 대의명분을 통로로. 부작용 위험- unexpected consequence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주로 사회현상에 많이 일어나지만 자연현상에도 일어나고 있다. 환경오염의 주범가운데 하나가 바로 atomism이란 주장이 있다.

 

2. 생명공학 등 생명과 관계된 과학의 발달로 생명의 신비로움이 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생명만은 사람이 어떻게 할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조작의 대상이 되었다.

 

3. 자연과학과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물리적 힘이 성장하여 생명에 대한 위협이 커졌다. 창과 총, 폭탄, 핵무기 등

 

4. 인간의 욕망과 이기주의가 증대되었다. 모든 생물은 이기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미래의 욕구충족을 준비하기 때문에 더욱 욕망이 크다. 더욱이 현대인은 내세에 대한 소망이 약해졌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모든 욕구를 충족하고자 한다. 명예, 권력, 부, 쾌락, 그리고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은 주로 돈이다. 하급 가치로 zero-sum type의 분배방식이다. 그러므로 과거보다 더 경쟁적이다. 돈을 위하여 생명까지 위협받고 있다.

 

5. 폭력성이 증대되었다. 물론 과거에도 인간은 잔인(Dostoevsky, Karamazov의 형제에 등장하는 잔인성)했다. 그러나, 현대-세속화된 문명이 사람들을 더 비윤리적으로 만들 가능성이 커졌다. 살인이 예사로 인식되게 되었고, 정신병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 거기에 물리적 힘의 성장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폭력 영상물, 소설, 만화 등도 이에 공헌하고 있다.

 

6. 문화의 세속화로 마음 속의 경찰, 내세에 대한 보응을 기대하는 마음, 공동체의 제재가 약화되고 있다. Internet 세대는 더더욱 외톨이가 되어가고 있다.

전반적으로 생명에 대한 위협이 늘어나고, 생명 현상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기 때문에 생명윤리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고 있다. 그 현상 자체는 긍정적이다. 오히려 무관심하면 더 큰 일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그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것은 집단적 자해행위다.

만약 사랑이 뇌세포의 화학작용이란 사실이 알려지면, 남·녀 간의 사랑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사람의 생명에 대한 직접적인 위해는 주로 법률로 막고 있다. 그러나 법류로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사회가 공인하는 규범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제재가 필요하다. 즉 사회적 제재를 받고 그것이 내면화함으로 자제능력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 때문에 생명윤리학회과 같은 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법률도 그 사회의 공론에 의하여 그 제정여부와 내용이 결정된다.

  

그러나 생명을 보전하고 보호하는 것으로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즉 생명현상에 국한한 윤리로는 불충분하다.

1. 가장 큰 문제는 생명이란 인간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생물은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생명을 존종하자는 운동의 결과는 요즘 철학윤리에서 유행하고 있는 animal rights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무흠하지만 결과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상대화시킨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인간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생명 존중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2. 생명이 왜 귀중한 지에 대한 근거는 생명현상 그 자체에서 발견될 수 없다. 단순한 선언이나, 사람들의 동의로만 그 근거를 삼을 수는 없다. 사람들의 동의로만 그 근거를 삼을 수는 업다. 사람들의 동의를 얻으려 해도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생명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취급하는 기독교적 생명윤리 (exclusive of animal rights)는 인권존중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이런 제목을 택하게 되었다. 2005년에 UNESCO는 를 채택했다. 인권존중이 전제되지 않으면 생명윤리, 특히 기독교적 생명윤리는 그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모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기본 권리와 자유로서, 생명권, 자유권, 사상과 표현의 자유, 그리고 법 앞에서 평등을 누릴 권리를 포함"한다.

인간생명의 존중이 보다 한 차원 높고 포괄적인 인간존중 사상에 근거한 것이라면, "인권"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철학에서 그 동안 인권의 근거로 제시된 것들이 몇가지 있다.

그것들을 살펴보면 : 그것은 주로 인간이 다른 짐승과 다른 점을 이용하여 정당화하려 한다.


생물학적 이론들 : 주로 짐승과 다른 점에서 찾으려는 시도들

1. 진화과정의 적자생존 과정에서 이타주의 나 empathy의 능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2. 인간은 모든 생물 가운데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이것은 아무에게도 고통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자명하며, 인권 보호는 그 조건이다.

3.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다. annimal rationale. 1) 이성 .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인간만이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거기서 인권의 근거를 찾으려 했다. Aristoteles: animal rationale. 이성은 온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인 동시에 모든 법칙을 제공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신적인 지위가치가 부여된다. 그 이성이 인간에게 入神 한다. 그러므로 이성은 그 자체로 신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 이성을 가진 것은 인간뿐이기 때문에 인간은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 차지를 보존하기 위하여 존중되어야 할 기본 권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4. 이기주의 이론. Jihn Finnis. 인간의 행복에 필수적인 조건을 형성하는 데 도구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즉 상호 인정과 존중이 자신의 행복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5. 자연법 사상.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정의 감과 도덕적 행위에 대한 직관적 인식과 인간의 양심과 양식이 지적한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는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다른 권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가 충분하지 못하며, 특히 행동으로 그것을 나타낼 동기가 부족하다. 예를 들어 (1) 이성이 무엇인강에 대한 질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고대 철학자들과 시인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 혹은 능력인지, 단순히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계산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인지? 심지어 논리, 수학 같은 것이 단순히 하나의 convention of human community가 아닌지? 그리고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고 셈도 할 수 없는 정신질환자들은 그러면 인권을 상실해야 하는지?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내재적 요인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즉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동기로는 불충분하다. 철학적 시도들이 모두 실패했다. - Walterstorff 교수. 최근에는 선언 1948,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일정의 convention. 그 자체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률 제정처럼 다수의 의견이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윤리적 행동을 정당화하기는 어렵다. 그 보다는 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기준,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과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성경적 근원에 의하지 않고는 그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인권사상이 배태된 배경이 바로 기독교 문화이며, 지금도 기독교적 문화에서 가장 잘 존중되고 있다. 민주주의 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나라들은 거의 대부분 기독교 국가, 특히 개신교 국가들이다.

  

민주주의 가 발달되어 있으면서도 인권이 충분히 존중되지 않는 예외가 있다면 인도와 일본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인도에는 caste제도가 상존하고 untouchables가 있는가 하면, 일본엔 아직도 Burakumin (Eta-Hinin, which can be translated as "polluted or dirty non-persons")이 존재한다. 이들은 결혼, 주거, 경제적 기회에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면서 사회에서도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마치 인도의 untouchables 와 동일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도 자신들의 운명을 그대로 수용한다고 한다.

  

기본인권이 존중되어야 인간 생명의 존엄성도 정당화될 수 있고 보존될 수 있다.

한국기독교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특별한 위치에 대한 인식을 확산해야 하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그것은 아직도 사회의 인정과 지지를 받을 수 있으므로 실추되고 있는 기독교의 Image를 향상시킬 수도 있다. 윤리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한 사회에 일반적인 가치관을 말한다. 서양어로 ethics, morality 등은 모두 그리스, 라틴어로 풍속, 습관을 뜻한다. 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가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도록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앞장 서야 한다.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 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분위기 형성에도 주도적이 되어야 한다. 하루에 수만명이 굶어 죽고 있는데 우리는 잘 먹으면서도 이에 무관심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가 인간의 생명과 인권,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을 위하여 헌신했으면 한다.

작성자 : 박재현 2015-06-11 15:23:55
생명의료윤리, 10년의 전망 (2007. 6. 14.)

 

 

생명의료윤리, 10년의 전망

 

 

박재현(경희의대 교수, 성산생명윤리연구소 총무)

성산생명윤리연구소 창립10주년 기념세미나

"의학과 생명과학 그리고..." 주제발표

(2007. 6. 14. 서울대학교병원 C강당)

발표일 : 2007. 06. 14.



"어떤 다른 영역에서도 의학적 비전에서처럼 희망과 두려움이 밀접하게 붙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이 노화와 질병에 대한 승리를 약속하는 곳에서 다른 사람은 인간의 삶이 지니는 존엄성의 기반이 상처를 입는 모습을 보게 된다. 독립된 개성도 없는 복제된 인간에 대한 끔찍한 상상이 퍼져나가고, 줄기세포연구가 살인의 의혹에 휩싸일 때, 다른 한 쪽에서는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이 우리를 유혹한다"

- 칼 하인츠 슈타인뮐러, 앙겔라 슈타인뮐러 -


1. 들어가는 글

미래를 전망하는 일은 흥미롭고 그럴만한 가치도 있다. 그러나 쉽지 않다. 아니 어렵다. 5분 뒤를 짐작하지 못하는 인간의 입장에서 수십 년, 수백 년 뒤의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후로 미래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식지 않았으며 더 강화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래 예측의 시도는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또 일부 천재적인 작가와 과학자가 과거에 예측했던 미래가 오늘의 현실로 나타나 예측이 놀랍게도 들어맞는 것을 볼 수 있기도 하다.

미래학(未來學, futurology)이라는 학문 분야가 있다. 미래학자라는 사람들이 미래를 다양한 방식으로 전망하고 있다. 소설과 비소설을 가리지 않고, 성인과 아동의 독자를 구분하지 않으며, 학문적인 성격이 강한 책과 교양서적을 불문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다양한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겠지만 현대인들은 왜 이렇게 미래 예측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일까? 과거에는 상상밖에 하지 못했던 일이 현실이 되는 과학 기술의 눈부신 발전을 반기는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 더 좋은 미래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고, 과학기술의 혜택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의 부작용 내지는 역기능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알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예측과 관련된 책의 제목들을 보면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관심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나 파악할 수 있다. 첫 째, 무엇보다 경제 분야의 미래학이 수적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10년 후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2010 대한민국 트랜드', '메가트랜드 2010' 등이다. 두 번째는 과학기술에 대해 무조건적인 희망을 걸고 현재 당면한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해결을 고대하는 책들이 있다. 세 번째, 미래 세대에게 과학기술의 가치를 심어주려는 아동과학문고들로 과학의 발전과 위대한 과학자들에게 초점을 둔 책들이 있다. 예를 들면 '미래과학의 세계로 떠나보자' 등이다. 마지막으로 미래학 본연의 관심사라고 할 수 있는 인간과 사회의 미래에 대한 근원적인 관심을 보이는 책들이 있다.

과학기술 전체의 미래를 조망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학의 융합 시대에 특정 과학 분야만을 전망하는 일은 의미가 덜할 수 있다. 특히 의학과 생명과학은 응용과학, 종합과학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더 미래 예측이 어려울 것이다. 과학기술 자체에 대한 전망이 어렵다면 의학과 생명과학의 윤리 문제의 예측은 더 어렵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지금 같이 과학기술의 변화속도를 윤리, 철학이 따라가기 벅찬 현실에서 생명의료윤리를 전망하는 일은 애당초 현실성이 약한 시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리적 고민과 성찰이 없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얼마나 위험한지 절감하고 있다면 미래를 예측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100년 뒤도 아니고 10년을 전망하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 또 예측이라는 것이 원래 빗나가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면 그저 열심히 예측을 해볼 수 밖에 없다. 미래학에서는 미래를 편의적으로 현미래(現未來 : 10년) · 근미래(近未來 : 10² 년) · 중미래(10³년) · 원미래(10⁴년)와 같이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10년의 전망쯤은 해볼 수 있지도 않을까? 그러나 어떤 미래학자는 미래를 단기적인 미래(1~3년 후), 중기적인 미래(3~10년 후), 장기적인 미래(10~20년 후)로 나누어 전망하고 있어 10년의 전망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말하고 있다.

칼 하인츠 스타인뮐러와 앙겔라 슈타인뮐러가 제시한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 중에 직관, 확장추정, 델파이의 신탁이 있다. 몽상가일 수도 있지만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몇몇 천재들은 직관에 의해 그들이 생존했던 시대의 기술 수준에서는 전망하기 힘든 미래를 예측하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0년경에 환상적인 비행기구를 설계했고 프랜시스 베이컨은 1627년에 잠수함에 대한 글을 썼다고 한다. 미래는 현실의 연장이라는 관점에서 확장추정으로 미래 예측을 할 수도 있다. 통계자료를 가지고 미래를 진단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복잡성을 극복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미래 예측법의 다른 한계는 이 방법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일정한 순서를 따라 진행된다는 아주 단순한 전제에 기초한다는 점이다. 현재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미래도 현재와 유사하리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 특이점이 온다'의 전자 레이 커즈와일은 이런 미래 예측이 오해라고 말하고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선형증가가 아니라 기하급수적 증가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더디게 시작해서 사실상 눈에 뜨이지 않지만 곡선의 무릎을 넘어서면서부터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완전한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기하급수적 경향은 천년 전에도 존재했지만 당시는 초기 단계여서 눈에 잘 뜨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레이 커즈와일은 기하급수적 관점에서 보면 확장 추정은 오해라고 주장한다. 델파이 신탁 방식은 미래연구의 영역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먼저 미래의 기술적 발전에 대한 주제나 아이템을 설정하고 이 아이템들을 모아서 설문지를 구성하고 전문가들에게 발송하여 주제나 아이템의 실현시기, 현재의 연구 수준, 어떤 나라가 앞서 있는가? 등의 다양한 면에서 견해를 제시하도록 한다. 그 다음에 설문지들을 통계로 처리하여 평가 결과를 전문가들에게 피드백하여 그들의 견해를 수정하도록 하여 2, 3차 설문 조사를 반복하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이제 10년의 생명의료 윤리 전망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한계가 있지만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생명의료윤리 변화를 검토 분석하고 확장하여 미래를 추정하는 방법이 그나마 쉬워 보이는 현실적인 발법이다. 그리고 델파이 방법에 의해 예측된 생명과학, 의학의 발전을 윤리 변화의 미래 예측의 자료로 삼으면 조금은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미래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아직까지는 인간의 본성의 근본적인 변화가 진행되지 않았다면 과거와 현재에 사람들이 의학과 생명과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을 예상되는 과학의 미래에 적용하여 예측을 해볼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시중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미래학 서적들에서 의학, 생명과학의 미래 예측 부분을 소개하고 이를 토대로 생명의료윤리에 대한 10년의 전망을 해보기로 한다. 미래학자들의 예측은 두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 과학기술 자체의 변화를 가늠해볼 수 있다. 둘째, 과학기술의 변화는 사회와 동떨어진 연구실에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진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학기술의 변화 예측에 이미 우리 사회의 가치관, 윤리관, 정책 방향이 고려되어 있기 때문에 예측 자체에서 윤리적인 의미를 살펴볼 수 있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2. 미래 학자들의 의학, 생명과학 미래 예측

■ 극단적 미래예측. 제임스 캔턴. 2006.

세계미래연구소(Institute for Global Futures)가 제시한 2030년의 10대 트랜드를 소개

* 2012년경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언제 어떤 질병에 걸리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유전과학을 활용할 것이다.

* 극단적 미래 지수 2030

- 인터넷을 통해 DNA를 사고파는 미국인 비율 : 45%

- 출산 전에 부모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선택할 수 있는 분야 중

자녀의 외모를 선택한 부모 순위 : 1위

자녀의 지능을 선택한 부모 순위 :3위

- 100세 이상의 평균 수명을 누리는 미국인 비율 : 25%

- 특정 향상 약물을 복용하는 미국인 비율 : 75%

- 식비에 이어 성형수술이 가계 지출 비용에서 차지하는 순위 : 2위

* 트랜드 4 : 최강의 생존력을 보장하는 21세기 장수의학

- 개인 DNA 배열 상태를 재조정하고 이것이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지식으로 연결되면 현재의 의학을 원시적인 수준으로 여길 만큼 획기적인 의학 발전이 이룩될 것이다.

- 유전자 백신, 특별히 구상된 DNA 수술, 똑똑한 약, 신경 의료 기기 등을 이용한 치료 덕분에 우리의 육체적·정신적 능력 향상, 지능 향상, 미와 생존 능력의 극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 트랜드 8 : 무시무시한 과학이 온다.

- 현재 시행되고 있는 인위적인 능력 강화 : 콘택트렌즈, 망막 교정기, 생체공학적 팔 다리, 인공 보청기, 심장박동 조절 장치, 인공 관절, 미용성형수술

- 사이보그 인간 : 특수 망막 기능을 지닌 초인간적인 시력, 사이보그 인간의 경쟁 우위

* 트랜드 9 : 인간 대 인간, 그 보이지 않는 전쟁

- 2015년을 개인을 위협할 13가지 요소 :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 두뇌에 심어질 소형 의료기기 임플랜트, 행동을 바꾸기 위한 약물, 개인 DNA 도둑, 망막이나 두뇌 신경에 직접 쏘아 광고하는 뉴로 광고, 원치 않는 행동을 모두 제거하는 유전자 백신


■ 기술의 미래, 상상 그 너머의 세계. 칼 하인츠 슈타인뮐러,

앙겔라 슈타인뮐러. 2006.

① 정보화 : 2010.

10년 후의 에버넷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의료정보는 전자식으로 저장될 것이다. 전자식 건강카드는 위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몇 초 안에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섬의 의사에게 전해질 수 있고, 그 의사는 멀리 유럽의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할 수도 있게 된다.

- 의료보험사가 질병에 걸릴 신체적 가능성이나 유전적인 위험요소에 대한 정보를 파악해서 보험료를 올리려는 시도를 한다면?

- 은행에서 융자를 신청할 때 전자식 건강카드를 보여주어야 한다면?

- 국가가 개인의 간 측정수치를 마음대로 확인할 수 있다면?

② 맞춤형 의학 : 2020.

인간이 지닌 유전적 다양성의 대부분이 파악되고 완벽하게 자료화 될 것이다. 휴먼 게놈프로젝트는 단지 시작일 뿐으로 인간유전자의 표준적인 지도를 작성한 것이었다. 유전자형 99.9퍼센트는 모든 사람에게서 동일하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나머지 0.1퍼센트의 차이다. 2030년대가 되면 전체 유전자 분석을 순식간에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몇 초 안에 질병의 발생이나 특정한 위험 요소를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환자에게 최고로 적합한 약물을 가장 알맞게 계산된 양으로 처방할 수 있다.

- 개인의 유전 정보에 따른 맞춤형 약물의 제조

- 면역시스템의 변조 : 신체에 적합한 면역능력을 목표 지향적으로 활성화시킨다. 말하자면 면역시스템이 암세포를 알아보도록 만드는 것. 다른 한편으로는 거꾸로 면역시스템의 민감성을 원하는 만큼 낮추는 조치가 취해질 것이다.

③ 복제, 줄기세포 그리고 조직 배양 : 2020.

체세포복제 방법으로 신체 기관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줄기세포를 이용한 특정 질병의 치료가 일반적인 의료 행위가 될 것이다.

④ 인간의 재건 : 2050.

유전자 치료는 표준적인 치료 방식에 속하게 될 것이다. WHO는 인간의 유전적 다양성이 감소하는 것에 대해 우려할 것이다.


■ 포스트휴먼과의 만남. 도미니크 바뱅. 2004.

* 포스트데스(Post-Death)

' 오직 지금 세대(Now-generation)'는 즐거움을 뒤로 미룬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고 후일을 믿지 않으며, 결코 사라지지 않을 현재에 자기 자신의 뒤를 잇고 싶어 한다.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에 속하는 이들 세대는 숫자나 영향력에서 막강한 집단을 형성한다. 이들은 공권력에 압력을 가해 각종 연구소들이 노화 방지 연구를 가속화하는 데 필요한 허가를 받아내고, 여기에 필요한 자금을 모을 수 있을 만큼 막강하다. 이들이 추진하는 노화방지 연구는 개가를 올릴 확률이 매우 높다. 우선 첫 단계로는 노화를 소멸하고, 두 번째 단계로는 죽음을 소멸하는 것이 이들의 야심찬 목표다.

*포스트바디(Post-Body)

손가락이 무진장 긴 농구 선수나 발이 오리발처럼 생긴 수영 선수들의 등장은 완전히 환상에 불과할까? 이러한 대단한 변화가 이루어질 확률은, 오늘날 거대한 시장을 형성한 스포츠 산업이 앞으로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될 것이 명백하므로, 이에 비례해서 점점 더 높아질 것이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40퍼센트 이상의 부부가 안전하게 시술받을 수 있는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자녀들의 용모나 지능을 향상하기 위해 유전공학의 도움을 빌리겠다고 응답했다.

"너 그 여자가 뭘 했는지 알아? 그 여자는 말이지. 자기 아버지의 복제된 수정란을 자기 몸에 착상시켰어! 그게 말이 되는 일이야? 그러면서 그녀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말이지, 적어도 자기 아버지만큼은 자기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구! 5년 동안이나 그 비싼 정신 치료를 받느라 우리가 가진 돈의 반쯤은 몽땅 쏟아 붓더니, 결국 자기 아버지를 임신해버린 거라구, 나 원 참…"

* 포스트에고(Post-Ego)

무대에 있는 음악가들은 그들의 반사 신경을 강화시켜주는 약물을 투여받아 청각이 한층 예민해졌고, 무대 공포심은 한 층 덜 느낀다. 관객석의 제일 앞줄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최면에 걸린 듯 서로를 마주 본다. 눈으로는 상대방을 응시하면서 여자는 핸드백을 열어 성기능 강화 호르몬이 들어 있는 껌을 입으로 가져간다.

의식은 컴퓨터에서 다운받고, 신체는 인간-돼지-로봇의 여러 부품들을 섞어 조립하고, 신경계통 임플란트를 장착하고, 성격을 바꿔주는 약품을 먹고… 포스트휴먼 시대에는 '나'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내용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

당신을 '당신'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 아닌 다른 사람이 되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까지 변할 수 있는가? 당신의 정체성은 서로 다른 매체 사이를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는가? 이 새로운 성질은 세대를 거듭해도 무한히 지속될 것인가?


■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 특이점이 온다.

레이커즈와일. 2005.

지금이 2030년대 초반이라고 상상해보자. 심장, 폐, 적혈구와 백혈구, 혈소판, 췌장, 갑상선 및 모든 호르몬 분비 기관들, 신장, 방광, 간, 식도, 위 소장, 대장이 죄다 필요없을 것이다. 남은 것은 골격, 피부, 성기, 감각 기관, 입과 식도 윗부분, 뇌다.


■ 미래, 내일의 과학은 우리의 삶과 정신을 어떻게 바꾸어놓을까?

수전 그린필드. 2003.

태아가 인공 자궁에서 성장하면, 태아 자신에게 의학적인 혜택이 돌아갈 뿐 아니라 여성은 더 활발하게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은 도한 임신에 동반되는 여러 고통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물론 헉슬리의 런던 중앙 부화장에서처럼 인공 양수 속에 다양한 물질을 쉽게 첨가하여 우수하거나 열등한 미래의 시민을 양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경고적인 예측도 있다. 그러나 그런 조작은 인공자궁이든, 대리자궁이든, '자연적인' 자궁이든 어디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음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체외수정 후 8세포기에 배아를 진단하여 원치 않는 특징을 가진 배아를 폐기하는 일과, 병든 형제와 조직이 일치하는 등의 필요한 특징을 가진 배아를 선별하는 일은 이미 기술적으로 동일하다.

3. 현재에도 논쟁이 심한 생명윤리 쟁점들에 대한 미래 예측

우선은 현재에도 심각한 논쟁이 되고 있는 윤리 쟁점의 10년을 전망해보자. 윤리 쟁점마다 다른 특성들이 있겠지만 공통적인 예측을 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거친 형태의 노골적인 반윤리적 행위는 많이 줄어들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상당히 온건해 보이고 세련된 방식의 인간생명에 대한 침해가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많은 윤리 쟁점들이 법의 영역으로 들어가면서 합법적인 방식의 비윤리적 행동이 증가할 것이다.

가. 안락사

안락사,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하는 국가가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안락사의 합법화의 부작용이 드러나면서 일부 국가에서는 더 이상 확산되지 않는 선에 머물게 될 것이다.

나. 대리모

불임 또는 난임의 증가로 대리모는 더 이상 괴이하지 않은 관행으로 자리를 잡게될 것이다. 물론 법의 틀 안에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법의 통제를 벗어난 대리모의 확산을 막을 손쉬운 방법은 없어 보인다. 동성간의 결혼이 허용될 것이고 따라서 동성 커플을 위한 대리모 또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다. 인간복제

기술적인 문제가 많이 발전되어 성공률이 높아지면서 불임의 한 방안으로 용인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식용 장기를 얻기 위한 복제가 허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 집단이 지구 어느 곳에선가 이식용 장기를 얻기 위한 인간복제를 하게 될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라. 배아줄기세포연구

기술적인 발전이 조금은 있겠지만 현재 기대하고 있는 것보다는 발전의 속도가 느려 지금과 같은 각광을 받지 못하고 일부 과학자들만이 연구를 지속하게 될 것 같다. 성체줄기세포를 활용한 치료는 꾸준히 늘어나겠지만 이 또한 21세기 초반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마. 맞춤아기

먼저 낳은 아이의 유전병이 있을 경우는 이 아이의 치료를 위해 착상 전 유전진단을 하여 맞춤아기를 만들어내는 일이 당연하게 여겨질 것이다. 원하는 특성을 가진 아이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바. 사이버네틱스

인공 장기, 인공 조직, 인공 기관 등의 급속한 확산으로 자신의 신체의 영역에 대한 혼란이 시작될 것이다.

4. 현재는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지 않지만 10년 내에 논쟁이 심화될 쟁점들

향후 10년 내에 새롭게 등장할 생명윤리 쟁점들이 많이 있겠지만 이 쟁점들을 열거하기 보다는 과학기술의 추세를 설명하는 것으로도 어느 정도의 미래 예측이 가능할 것이다.


■ NBIC

미하일 로코 박사는 2000년에 과학기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첨단 신기술인 나노기술(Nanotechnology), 생명공학(Biotechnology), 정보통신기술(Information technology),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 이들 4개의 과학기술을 융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로코 박사는 이들의 앞 글자를 딴 NBIC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미국과학재단(NSF)은 미국 상무성(DOC)과 공동으로 2001년 12월에 NBIC를 주제로 각계 과학기술 전문가들이 참석한 융합과학기술 워크샵을 개최하였고 여기에서 논의된 이야기들은 '인간의 수행 능력 향상을 위한 기술의 융합(Converging Technologies for Improving Human Performance)'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로 만들어졌다. 미국과학재단은 미국에서 향후 10~20년 동안에 앞으로 추진되어야할 미래 과학기술의 새로운 틀로 'NBIC 융합기술(NBIC Converging Technologies)'을 제시하고 미래 과학기술은 NBIC의 4개의 핵심축이 초기 단계부터 수렴, 융합되어 가르쳐지고, 연구되고, 응용 개발되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는 또 첨단 과학기술의 융합 목적을 분명하게 짚었다. 그것은 '인간의 수행능력 향상'이었다. 보고서에는 NBIC가 인간의 수행능력 향상이라는 기본 목적 뿐 아니라 과학기술을 포함한 사회, 경제 등에 전반적인 변화를 불러오리라고 기술되어 있다. NBIC는 생명의료윤리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의학과 생명과학의 경계는 점차 희미해질 것이고 융합과학 시대의 윤리적 고민은 복잡성 앞에서 더 깊어질 것이다.


■ GNR(Genetics, Nonotechnology, Robotics)

레이 커즈와일은 21세기 전반부부터 꼬리를 물고 중첩되어 발생하게 될 유전학의 혁명, 나노기술의 혁명, 로봇공학의 혁명을 전망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처한 지점은 'G(Genetics, 유전학)' 혁명의 초기 단계다. 우리는 생명이 간직한 정보 처리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인체의 생물학을 재편하는 법을 익히고 있다. 질병을 근절하고, 인간의 잠재력을 극적으로 넓히고, 수명을 놀랍도록 연장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러나 한스 모라벡의 지적에 따르면 우리가 아무리 DNA에 기반을 둔 생물학을 자유자재 활용하게 된다 해도 인간은 '2류 로봇'으로 남을 것이다. 일단 생물학의 작동 원리를 완벽히 이해한 뒤 손질을 시작하면 그때는 더 이상 생물학의 도구만으로 부족하리라는 뜻이다. 생물학의 한계를 넘게 해줄 것은 'N(Nonotechnology, 나노기술)' 혁명이다. 우리의 몸과 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분자 수준으로 정교하게 재설계하고 재조립하게 해줄 것이다. 가장 강력한 혁신은 다가올 'R(Robotics, 로봇공학)' 혁명이다. 인간의 지능을 본받았지만 그보다 한층 강력하게 재설계될 인간 수준 로봇들이 등장할 것이다. R 혁명은 최고로 의미있는 변화다. 지능이란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지능은 제대로 발달하기만 한다면, 자기 앞에 놓인 어떤 장애물이라도 쉽게 내다보고 극복할 수 잇을 정도로 똑똑한 것이다." GNR의 위험에 대해서는 레이 커즈와일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NBC(핵공학, 생물학, 화학) 기술은 최근까지 끊임없이 전쟁에 사용되어 왔으며 혹은 협박 도구가 되었다. 이제 그보다 강력한 GNR 기술은 새롭고 심대한 지역적, 존재론적 위험으로서 우리를 위협한다. 유전자 변형된 병원체를 물리친 후 나노 기술이 적용죈 자기 복제적 개체들까지 다스리고 나면 다음엔 우리 지능을 뛰어넘는 로봇들을 만날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 큰 도움이 되는 로봇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언제까지고 생물학적 인간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 인간증강(Human Enhancement)

NBIC와 GNR의 일차적인 목표는 증강(enhancement)이 될 것이다. 현재의 증강이 의학적 증강(medical enhancement)에 국한되어 있고 단일 기술에 의해 시도되고 있는 반면에 미래의 증강은 첨단 과학기술의 통합으로 시도될 것이기 때문에 그 발전 속도와 복잡성은 예측하기 힘들 것이다. 미래에는 치료 의학의 수준에서 논란이 되는 생명 윤리 쟁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인간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쟁점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5. 나오는 글

의학과 생명과학의 미래 예측은 희망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우리 사회가 어떤 가치와 규범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또 어떤 정책과 법이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방향과 속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변화는 어쩔 수 없이 다가오기도 하지만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칼 하인츠 슈타인뮐러, 앙겔라 슈타인뮐러의 다음 글에서 성산생명윤리연구소의 역할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넘어서는 안 될 경계는 어디쯤 놓여있을까? … 과학 자체는 이런 문제에 대해 대답을 할 수 없다. … 과학은 사실에 기초한 판단의 근거를 제공할 뿐이다. 과학이 관여할 수 있는 범위는 거기까지이다. 실제 결정은 사회적인 논의 속에서 내려진다. 논의의 출발점은 특정 문화가 지니고 있는 가치와 규범이다. … 어떤 시나리오가 현실에 더 가까울까 하는 것은 세계가 경계선을 좁게 설정하느냐, 넓게 설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미국과학진흥회(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AAAS)는 2004년에 '비전2033: 미래세상을 위한 과학과 정책의 결합(Vision2033: Linking Science and Policy for Tomorrow'sWorld)을 주제로 심포지움을 개최하였다. 이 심포지움의 상당 부분을 부시 대통령의 '생명윤리자문위원회'를 비판하는 데 할애하였다. 부시정부의 생명윤리자문위원회와 위원들을 신보수주의자 즉 네오콘으로 규정하며 강한 비판을 하고 있다. 미국과학진흥회는 과학계와 정책 입안자 및 사용자인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과학의 자유와 책임을 신장시키고 그것의 효율성을 최대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이 단체의 입장에서 보면 연방정부가 배아줄기세포연구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못마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심포지움의 한 발제자는 생명윤리 문제를 문화 전쟁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1960년 이후 개인의 사생활 권리의 강조는 1973년 낙태를 허용하는 연방대법원 판결(Roe v. Wade)로 나타났고, 1992년 이후 동성애자의 권리 확대 운동은 2003년 연방대법원의 텍사스 주의 동성애 처벌법의 위헌판결(Lawrence v. Texas)로 나타났다고 한다. 생명윤리 문제를 진보와 보수 양자의 대결로만 인식하는 데에 동의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생명윤리 쟁점에 문화 전쟁적인 면이 있음을 부정하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의학과 생명과학의 미래를 문화적인 충돌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대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삶의 태도인 것 같다. 의학과 생명과학의 발전 그리고 생명윤리 논쟁을 경험하며 "세상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은 것 아닌가?"하는 의문을 많이 품게 된다.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안의 정도가 심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무너질 것이 분명해 보이는 바벨탑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은 아닐까? 종말론에 대한 고민 없이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부질없는 희망, 쓸데없는 두려움에 그치고 말 것이다.

작성자 : 이상원 2015-06-11 15:21:17
자살과 기독교 (2007. 5. 22.)

 

자살과 기독교


이상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성산생명윤리연구소 부소장,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상임이사)

사랑의교회 생명윤리선교회 제6회 생명윤리 세미나

"자살문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주제발표 (사랑의교회 소망관 319호)

발표일 : 2007. 05. 22.

 


우리나라는 불명예스럽게도 이미 오래전에 OECD 국가들 가운데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이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최근에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연예인들이 잇달아 자살한 사건들이 보도되어 우려를 낳고 있다. 이 연예인들이 자살한 결정적인 이유가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데 따르는 박탈감과 경제적 어려움이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자살이 우리의 마음을 한층 더 무겁게 만들고 있는 이유는 이들이 모두 기독교인들이었으며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모습이 TV를 통하여 전 국민 앞에 방영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보도를 접하는 국민들의 뇌리 속에는 기독교가 성도들의 자살을 막을 수 없는 무력한 종교이며, 자살문제에 있어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인상이 강하게 부각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 같은 인상은 가뜩이나 개신교에 대한 불신 때문에 전도가 되지 않고 많은 개신교인들이 천주교로 대거 개종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전도에 상당한 부담과 장애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문제상황이 제기된다. 하나는 기독교에는 정말로 자살을 예방할 수 있는 가르침이 없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자살한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자살의 정의

자살은 자기 목숨을 자기 손으로 인위적으로 끊는 행위다. 사람의 목숨을 사람의 손으로 끊는 행위는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심겨저 있는 도덕률에 있어서나 성경에 기록된 계시된 율법에 있어서 보편적으로 모두 반도덕적인 행위로 인식되어 왔다. 성경에는 자살이라는 해위에 대하여 별도의 언명이나 평가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자살을 별도로 다루지 않는 이유는 자기의 목숨이든 타인의 목숨이든 사람의 목숨을 끊는 행위는 "살인하지 말라"는 제 6계명을 범하는 행위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살이 항상 보편적 도덕률을 범하는 반윤리적인 행위로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반윤리적 행위로서의 자살문제를 다루기 전에 윤리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자살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a. 윤리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자살은 행위자의 자유로운 결단에 위하여 행해지는 경우를 뜻하는 것으로서, 정신질환 등으로 인하여 자유로운 결단의 능력이 상실된 상태에서 행해지는 경우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예컨대 우울증이나 조울증 등과 같은 정신질환 때문에 자살을 결행하는 경우에 윤리적인 반성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b. 행위자의 자유로운 결단 안에서 행해지는 경우도 두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상황이 요청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선한 동기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손으로 자기 목숨을 끊는 경우가 있고, 다른 하나는 선한 동기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상황이 자기 목숨의 희생을 불가피하게 요구할 때 그 상황을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고 그 상황을 맞이하는 경우다. 전자의 경우는 윤리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지만 후자의 경우는 동기나 목적 여하에 따라서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정당화될 수도 있다.


b-1.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기로 결단하는 경우는 정당화될 수 있다. 주님께로 가고자 하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눅14:26). 빌립보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빌2:30). 그리스도인들은 주를 위하여 죽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롬14:8). 신앙을 부인하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그 길을 포기하고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순교자들의 행동은 정당화된다. 그러나 믿음을 지켜야 하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순교라는 영예를 얻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목숨을 내어 놓는 행동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성도들은 탄압과 핍박이 찾아 올 때 최선을 다하여 피할 길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할 수만 있으면 살아서 신앙을 지켜야 한다. 다시 말해서 순교란 불가피한 상황에서 맞이하는 것이지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데도 자발적으로 맞이하는 행동은 아니다.


b-2.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는 경우에 자살은 정당화될 수 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요15:13).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동역자인 바울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롬16:4). 예수님이 성도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행동은 기독교인들이 형제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리는 행동을 요청하는 모범으로 제시된다(요일3:16). 이 말씀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뚜렷한 동기를 가지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행동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로 일단 해석될 수 있다. 그러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 목숨을 버리는 모든 행동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자살은 생명을 버리는 행동이므로 자살을 결행하는 목적이 생명의 희생을 상쇄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인가를 공리적으로 계산해 보아야 하며, 불가피한 수단이었는가도 따져 봐야 한다.


b-2-1. 타인의 생명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방법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을 경우에는 자기 목숨을 버리는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다. 사병이 실수로 안전핀을 뽑은 상태로 떨어뜨린 수류탄 위에 자기 몸을 덮쳐서 폭사(爆死)하고 수많은 사병들의 생명을 살려낸 강재구 소령의 행동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어느 군목은 전쟁 포로들과 함께 배를 타고 이송되어 가던 중 파선을 맞이했다. 구명보트가 내려졌는데, 이 구명보트의 승선 허용인원이 승선해야 할 사람들 숫자에 비교하여 볼 때 한 사람이 모자랐다. 군목은 다른 전쟁포로들을 다 태우고 자신은 바다에 뛰어내려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이 군목의 행동도 윤리적으로 정당한 행동이다.


b-2-2. 전쟁이 벌어졌을 때 전투를 중단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죽음의 가능성이 충분하게 예산됨에도 불구하고 전우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또는 조국을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총탄이 난무하는 전선에 뛰어드는 행동은 비록 구해야 할 특정한 사람의 생명이 구체화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윤리적으로 정당한 행동이다. 삼손이 다곤신당을 무너뜨린 행동도 이 범주에서 정당한 행동으로 판단할 수 있다(삿16:23 이하). 더욱이 삼손의 행동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난 이후에 한 행동으로서(삿16:28), 히브리서 기자로부터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고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어 이방사람들의 진을 물리친 행동으로 평가받았다(히11:32~34)는 사실은 삼손의 행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준다.


b-2-3. 그러나 우리나라의 운동권에서 열사(烈士)로 추앙되고 있는 전태일의 분신자살이나 월남전쟁 당시에 월남정부의 부패에 항의하는 표시로 승려들이 분신자살한 행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정치적인 이념의 실현을 위하여 자살하는 행동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정치적 이념들이라고는 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대체로 정치적 이념들은 인간과 사회를 증진시키기 보다는 그것들이 지닌 유토피아적 성격 때문에 오히려 인간과 사회에 심각한 해독을 끼치는 경우들이 많았다.


b-2-4. 순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자살하는 행동은 순결이 소중한 가치이긴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잡을 만큼 무거운 가치는 아니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없다.


b-2-5. 경제적 능력이 없는 노인이나 많은 경제적 부담을 가족에게 안겨주고 가족들의 희생적인 간병이 필요한 환자는 가족들에 대한 부담을 덜기 위하여 자살을 결행하고자 하는 당사자가 공동체에 없어서는 안 될 일원임을 인식시켜주고 포용하는 태도가 우선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살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가족들이 담당하는 경제적 부담을 경감시키는 것은 천하보다 귀한 인간의 생명의 가치를 능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b-2-6. 폭력조직과 같은 비윤리적인 조직에서 조직의 보스나 조직 그 자체를 보호하고 조직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성경의 가르침을 "모두 다" 가르치는 길은 자살예방의 첩경

기독인에게서 나타나는 자살행위는 기독교의 교리와 윤리적 교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성경이 제시하는 교리와 윤리적 교훈 안에 자살을 예방하는 자원이 빈약하며, 기독교는 자살을 예방하기에 무력하다는 점을 말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성경 그 자체가 제시하는 교리 및 윤리적 교훈과 현재 한국교회가 가르치는 교리 및 윤리적 교훈을 구별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와 윤리적 교훈을 "모두 다" 통전적으로 가르치는 일에 실패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교리 및 윤리교육의 실패가 곧 성경이 가지고 있는 교리와 윤리적 교훈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많은 숫자의 기독교인들의 자살을 효율적으로 막아내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성경이 제시하는 가르침을 "모두" 그리고 통전적으로 가르치는 일에 실패한 데 기인한다고 진단할 수 있다. 성경대로만 바르게 가르쳐 왔다면 한편으로는 보다 효율적으로 자살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살 예방을 위하여 필요한 성경적 자원을 검토하기 전에 인간학적 자살관의 한계와 문제점을 검토해 보자.


철학적 자살관의 한계와 문제점

먼저 철학적인 자살관을 검토해 보자. 희랍신화에서는 자살이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 묘사된 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헤라클레스는 불로 자살함으로써 불멸의 신들이 사는 올림푸스에 도달할 수 있었다. 피라모스를 잃고 절망한 티스베가 나무딸기 앞에서 자살했을 때 평소에는 작고 하얗고 마른 열매를 맺던 나무딸기가 크고 붉은 열매를 맺었다는 기록이라든가, 두 연인의 자살에 감동한 신들이 두 사람을 두개의 큰 강으로 바꾸어 주었다든가, 일곱 명의 히아데스 자매들의 자살로 일곱 개의 별로 이루어진 히아데스 성단이 탄생했다든가, 자살한 괴물이 스핑크스가 된 예 등은 희랍신화의 시대에 자살이 예찬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희랍신화가 자살을 예찬한 것과는 달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살을 비판했다. 신들이 인간들을 보호하며 인간들은 신들이 소유한 목장에 속한 가축들이라고 본 플라톤은 자살은 신들의 분노를 촉발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신의 명령이 아닌 한 자살은 해서는 안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독배사건에서처럼 형벌의 일환으로 자결을 명령할 때는 자살이 허용되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살은 공동체인 도시국가에 대항하는 행동이라는 이유로 자살을 반대했다.

개인의 판단에 따라서 현인은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봄으로써 자살을 옹호했던 견유학파의 입장은 스토아학파와 에피큐로스학파에게 전승되었다. 모든 형이상학을 부인하고 인간 자신의 내부에 있는 모든 규범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한 스토아학파는 삶과 죽음의 문제도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문제 곧 '아디아포라'의 문제로 보았다. 스토아학파에게는 만일 삶이 정당하지 않다면 자살을 선택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없었다. 에피큐로스는 타인이나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자유와 즐거움을 향유하는 삶을 최고의 가치 있는 삶으로 보았다. 영혼은 육체와 함께 멸망하는 것이므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으며, 따라서 삶이 즐거움을 제공할 수 없다면 자살로써 삶을 끝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었다.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한 계몽주의 시대 이후 자살은 몽테스키외, 루소, 흄, 괴테, 쇼펜하우어, 니이체 등에 의하여 자결권의 차원에서 옹호되었다. 단 칸트는 두 가지 논증에 근거하여 자살을 반대했다. a.네가 원하는 것이 일반적인 자연법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일반적인 자연법은 생명을 증진시키는 것인데, 자살은 일반적인 자연법이 될 수 없지 않은가? b.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 이 원리에 따라서 생각해 본다면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자살한다는 것은 고통을 피한다는 목적을 위하여 인간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철학적 윤리학은 신의 존재를 명시적으로(플라톤) 또는 암시적으로(칸트) 고려의 대상에서 배제하지 않고, 보편적 도덕률을 강조하는 의무론적인 입장이나 공동체의 공동선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자살이 거부되고 있는 반면에 보편적인 규범이나 공동선 보다는 개인의 윤리적 판단이 아닌 자결권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자살이 폭넓게 허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철학적 토론의 마당에서 자살에 대한 어떤 합의점을 도출해내기란 어렵다.


뒤르껭과 프로이드의 자살관의 공헌의 문제점

현대 사회학과 정신분석학은 철학적 자살관 보다는 진일보한 자살에 대한 분석과 처방을 제시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자유로운 결단 안에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간의 결단은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요인들에 의하여 강하게 영향을 받기도 한다. 따라서 자살자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요인들을 분석하는 작업은 자살문제를 다룰 때 매우 중요하다. 자살을 하도록 추동하는 사회적인 요인들에 대한 분석을 전개한 사회학자로 에밀 뒤르껭(Emil Durkheim)이 있고, 심리적인 요인들에 대한 분석을 전개한 정신분석학자로는 시그문드 프로이드(SIgmund Freud)가 있다.

에밀 뒤르껭은 자살의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a. 이기적 자살. 이기적 자살은 사회와의 통합의식이 약화되어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될 때 결행하는 자살의 유형이다. 예컨대 한국과 일본에서 집단으로 따돌림을 당하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소외감을 견디지 못하여 자살하는 경유를 들 수 있다.


b. 이타적 자살. 이타적 자살은 사회에 대한 통합의식이 너무나 견고할 때 결행되는 자살이다. 예컨대 2차대전 당시에 패전에 몰린 일본군이 미국군함과 항공모함을 향하여 감행했던 가미가제 자살특공대라든가, 이슬람의 종교 및 국가 공동체에 대한 집착적인 헌신 때문에 자살테러를 자행하는 알카에다 요원들이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요원들, 짐 존즈가 이끌었던 인민사원 신도들의 집단자살 등이 이 범주에 해당한다.


C. 몰가치적 상황으로 인한 자살. 이 유형의 자살은 종교와의 관련이나 직업 및 결혼 규범이 약화되고 경제공황이나 실업률이 증가되는 상황에서 사회의 규범적 통합력이 약화되어 있을 때 나타나는 자살을 뜻한다.

뒤르껭이 지적한 요인들이 사람들을 자살로 내모는 사회적 이유들로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요인들이 극복할 수 없을 만큼 필연적이고 결정적인 요인들이라고는 볼 수 없다. 뒤르껭의 자살론은 뒤르껭 자신이 자살을 추동시키는 원인으로서 지적한 사회적 상황 안에서 오히려 삶에의 의지를 붙태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살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내지 못한다. 예컨대, 학교 생활에 무리 없이 적응하는 모범생들은 집단에 강하게 귀속되는 것을 싫어한다. 어느 정도의 고독과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훌륭한 학교성적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외와 고독을 오히려 창조적인 자기계발을 위한 계기로 활용하는 학생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집단에의 강한 귀속성도 항상 자살로 연결될 만큼 그렇게 강력하다고 볼 수는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나치게 강한 결속력을 요구하는 집단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규범의 약화가 자살의 원인이 된다는 분석은 의미 있는 분석이다. 그러나 뒤르껭의 분석내용 가운데 경제적 공황상태나 실업상태에 있게 되는 경우에 사람은 규범으로부터 느슨해진다는 내용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항상 찾아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다. 사람들은 이런 위기상황에 처할 때 오히려 규범적으로 느슨했던 생활 태도를 다 잡고 한층 더 도덕적인 태도로 위기를 극복해 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한편 프로이드는 인간의 삶은 두 개의 본능적 충동에 의하여 영위되는 바, 하나는 삶에의 충동이며, 다른 하나는 죽음에의 충동이라고 보았다. 이 중에서 죽음에의 충동이 삶에의 충동을 누르고 힘을 얻고, 이 충동이 내면을 향할 때 자기파괴가 나타난다고 한다. 자기파괴는 협착화된 엄격한 양심의 결과이며, 이때 무거운 자기죄의식이 수반되는 우울증이 나타나며 이 우울증이 자살의 필연적인 전제조건이라고 말한다. 물론 인간은 죽음에의 충동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도 죽음에의 충동에 사로잡혔었다. 로뎀나무 아래 앉았던 엘리야가 그랬고(왕상19:4), 욥이 그랬으며(욥3장, 특히 21절), 요나가 그랬다(욘4:3).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음에의 충동이 삶에의 충동과 동등한 것이냐 하는 점이다. 프로이드는 죽음에의 총동과 삶에의 충동이 동등한 위치에서 대결하는 것으로 보았으나, 이것은 프로이드의 인간학이 가지는 치명적인 실수다. 기독교적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곧 삶을 향한 본능적인 욕구는 주어졌지만(전3:11), 죽음을 향한 본능적인 욕구가 주었다고 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현실이 없었다. 죽음이라는 현실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외부로부터 들어온 낯선 침입자이며 따라서 죽음에의 충동도 외부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죽음에의 충동이 강력한 힘으로 사람을 지배할 수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충동이요, 본원적인 충동은 아니다. 죽음에의 충동은 반드시 그 충동을 유발한 외적인 원인이 있기 마련이며, 이 원인이 제거될 때 이 충동도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통례다. 정신의학은 "잠복해 있던 자살에의 충동 → 내외적인 환경이 가하는 충격에 의하여 깨어남 → 자살결행"으로 자살의 과정을 설명하지만, 경험적 관찰은 "자살충동과는 무관한 외부적인 충격 → 충격을 극복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서의 자살"이라는 도식이 정확한 도식임을 보여준다. 죽음의 충동이 본능적인 충동이 아니라 외부적인 요인에 의하여 잠정적으로, 그러나 강력하게 찾아드는 충동임을 강조함으로써 자살은 얼마든지 상담과 설득을 통하여 극복할 수 있는 일임을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자살예방을 위하여 가르쳐져야 할 성경의 교리적이며 윤리적인 가르침들

철학적인 성찰이나 정신과적 상담 그리고 사회구조의 법적이고 제도적인 장치의 개선등이 자살예방을 위하여 필요하며, 최선을 다하여 이런 노력들을 수행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노력들이 자살예방에 기여하는 공헌에는 중요한 한계가 있다. 자살에 대한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대결하는 상황에서 무게중심이 자살옹호론으로 기울어져 있는 철학적 사유의 전통은 자살을 예방하는 이념적 토대로 활용하기에는 너무 허약하다. 정신과적 상담을 통하여 자살을 유도한 내적인 심리적인 요인들을 완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지만, 자살에의 충동이 의지나 이성으로써 제어할 수 없는 생득적 충동이라고 파악하는 프로이드의 사상이 배경에 깔려 있는 한 정신과적 상담을 통한 심리적 조작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물을 손으로 막르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쓰는 애처로운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자살을 선택하게 만든 사회구조의 법적 개선을 통한 자살예방의 시도는 법적인 장치가 가장 잘 갖추어져 있는 서구의 선진국에서 자살률이 높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시도들은 물론 필요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예방책이 요구된다.

해변 모래톱 위에 정박해 있는 수천 척의 배들을 어떻게 해야 수월하게 바다에 띄울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한 가지 가능한 방법은 바퀴달린 손수레를 끌어와서 배 밑에 대고 배를 수레 위에 올려 바닷물로 끌고 가는 힘들고 고달픈 방법이 있다. 철학적 성찰, 정신과적 상담, 사회구조의 개선 등은 그 효과에 있어서 이 방법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쉽고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밀물이 들어올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밀물이 밀려 들어오면 수천 척의 배들이 수월하게 물위에 둥둥 떠서 쉽게 바다 한가운데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자살을 예방하고자 할 때도 이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강력하게 솟아오르는 자살에의 충동은 이보다 한층 더 강력한 힘을 동원하여 밀어 버려야 한다. 이 방법이 무엇인가? 바로 성경의 교리와 윤리적 교훈을 철저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면 자살을 예방하기 위하여 교회가 철저하게 가르쳐야할 성경의 가르침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교회는 성경의 어떤 가르침을 철저하게 성경대로 가르치는 일에 실패해 왔는가?


a. 성경은 그 크기와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 무한에 가까울 정도의 스케일을 가진 구원의 복음을 제시하고 있으나 교회는 이 복음이 지닌 이런 스케일을 충분히 가르치지 않았다.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말을 들어 보면 구원의 교리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며, 다 알고 있는 구원의 교리를 자꾸만 반복하여 가르치는 것은 구태의연한 태도이며, 이제는 구원의 교리는 전제하고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생각은 문제가 있다. 구원의 복음은 실존적인 윤리적 실천을 넉넉하게 가능하게 하는 동력을 제공한다. 이 동력을 실존적으로 날마다 새롭게 제공받지 못하면 윤리적인 실천은 곧 힘을 잃게 되고 메마른 율법주의로 빠진다. 동력이 빠진 채 반복되는 윤리적 실천의 강조로는 넉넉한 윤리적 실천을 도출해내지 못하며 더욱이 자살에의 충동을 제어하기 힘들다. 실천의 동력을 제공받기 위해서는 구원의 복음이 날마다 새롭게 설교의 중심으로 선포되어야 한다. 현금의 한국교회의 강단에서는 교회성장을 위한 어설픈 예전적 실천은 많이 설교되어도 구원의 복음 그 자체가 지닌 장강대하와도 같은 장엄한 스케일과 감동을 전하는 강단은 매우 희소하다.

마태복음 18장 21절에서 29절에 있는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의 비유는 이 논점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본문이다. 오늘날의 국세청장에 해당하는 빚진 종이 조건없이 탕감받은 빚의 크기는 일만 달란트인데 일 달란트를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3억에 상당하는 액수다. 그렇다면 일만 달란트는 어마어마하게 큰 액수의 돈(3억×10,000=3조)이다. 반면에 이 종이 용서해주지 않은 빚진 동관이 탕감받지 못한 빚의 크기는 백 데나리온, 곧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오백만원에 상당하는 액수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조건없이 면제받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에게 오천달러 빚진 사람의 빚은 어렵지 않게 탕감해 줄 수 있고 마땅히 탕감해 주어야 한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면제받는 것은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건을 뜻하고, 백 데나리온은 구원받은 기쁨과 감동의 힘에 의지하여 밀고 나갈 때 수월하게 이행할 수 있는 것이다. 복음이 주는 기쁨과감동의 힘이 자살의 충동을 넉넉하게 밀어붙여 쫓아낼 수 있는 동력이다.


b. 한국교회는 인간이 죽은 후에 사후세계가 존재하며, 현세 안에서 행한 모든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서 모두 철저하게 실사 받아야 한다는 역사적 기독교의 내세론을 충분히 가르치지 않았다.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내세적이교, 따라서 현실이 문제에 무관심해 왔다는 비판을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한 정설적인 진단인 것처럼 말해 왔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정말로 한국교회가 내세지향적인가? 필자는 생각이 다르다. 필자의 눈에 비친 한국교회는 지독할 정도로 철저하게 현세적이다. 이조 오백년간의 기간 동안 현세적 종교인 유교의 지배를 받아 유교적 세계관에 깊이 젖어 있는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은 대체로 현세적이다. 오늘날 부활과 내세에 관한 설교가 일 년 52주의 강단설교에서 몇 번이나 주제로 선정되어 설교되는가? 아마도 부활절 한번 정도 외에는 없을 것이다. 기독교의 최대의 소망을 담은 부활찬송도 부활절에 딱 한번 부른다. 왜 부활찬송을 부활절에만 불러야 하는가? 기독교의 최대의 소망인 부활찬송을 날마다 불러야 정상이 아닌가? 사후세계가 엄존하며, 사후세계에 들어갈 때 현세의 모든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실사 받고 평가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날마다 묵상하고 믿을 때 자살의 충동은 그 힘에 밀려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c. 한국교회는 지극히 현세적이면서도 현세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성경에 기록된 보편적 윤리훈을 철저하게 가르치는 일에는 실패했다. 한국교회가 현세적이며, 현세에서의 삶에 깊은 관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세에 대하여 가지는 관점에 문제가 있다. 현세에 대한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의 관심은 현세 안에서의 교회의 가시적인 성장과 현세 안에서의 기독교인들의 물질적 번영의 향유 등에 집중되어 있을 뿐, 현세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율례와 법도를 준행하고 이 준행에 수반되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한 마디로 사랑의 대강령, 황금률, 십계명, 그리고 기타 잠언 등에 풍부하게 계시되어 있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윤리훈들을 철저하게 가르치는 일에 실패했다. 자유주의 전통의 교회들은 사랑의 대강령 이외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윤리훈들을 상대화시키고 이 윤리훈들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규범들이라는 점을 강조하지 않았다. 이는 곧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탈규범화를 촉진시켰으며, 탈규범화는 일찍이 에밀 뒤르껭이 지적한 바와 같이 자살에의 충동에 쉽게 굴복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의 절대성과 보편성을 인정하지 않을 때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 명령을 수행해야 할 당위성을 찾기 어렵게 된다.


d. 한국교회는 성경이 강조하는 연대성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에서 31절에는 교회를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유기체로 묘사한다. 유기체 안에서 각 지체들은 어느 한 지체의 아픔이 곧 몸 전체의 아픔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몸 전체는 어떤 작은 하나의 지체라도 아프지 않도록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지속적으로 돌보아야 한다. 약한 지체일수록 몸 전체의 집중적인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99마리의 양들이 모두 문제가 없고 건강해도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었다면 99마리의 양이 가는 길을 멈추고 그 한 마리를 찾아내는 수고를 담당해야 하며 찾아내어 무리에 합류시킨 후에 길을 가야 한다. 자살에의 충동을 느낀다는 말은 정신적으로 외로우며 경제적으로 소외되어 있으며, 따라서 공동체 전체의 관심과 사랑을 간절하게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교회 공동체가 진정으로 공동체에 소속된 작은 지체를 소중하게 여기고 외롭고 고독할 때 대화의 상대가 되어 주고 경제적으로 곤궁할 때 힘이 되어 주는 연대성의 실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면 상당수의 자살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살한 신자의 구원의 문제

앞에서 말한 네 가지 항목이 자살을 악한 행동으로 전제하고 자살을 막는 일의 신학적 자원이 되는 것이었다면, 성경은 또한 이미 자살한 자와 자살한 자의 가족들이 정당하지 않은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을 차단시켜 주기도 한다. 서구의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자살이라는 행동을 기독교인의 구원의 문제와 관련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 하나의 상식으로 확립외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한국교회 안에는 자살한 기독교인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심지어 수십년간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겨오는 삶을 살았다 해도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는 중세적인 속설이 목사들과 평신도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 속설들을 뒷받침하는 논증들과 이 논증들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다.


a. 자살한 기독교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견해는 자살을 성령훼방죄로 해석하는데서 비롯된 생각이다. 자살이 성령을 훼방한 죄라는 견해는 중세시대에 형성된 견해이며, 루터, 푸치우스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과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는 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에 의하여 비성경적인 교리로 거부되었다. 성령훼방죄(마12:31, 막3:28,29)는 히브리서 10장 29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를 거부하고 받아 들이지 않는 불신앙적인 행동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며,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행동에 제한시켜 적용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죄를 죽는 순간까지 고집하다가 죽으면 그 후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 성령훼방죄의 핵심이다. 자살을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관련시키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b. 다른 죄를 범한 사람들은 죽기 전에 자기가 범한 죄를 회개할 시간이 있지만 자살한 사람은 자살이라는 죄에 대하여 회개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죽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 구원은 인간이 지은 죄를 남김없이 회개한 공로를 근거로 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뿐이다. 만일 특정한 죄를 회개했는가에 근거하여 구원이 결정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항공기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미사일을 맞아서 회개할 시간을 갖지도 못한 채 폭사한 신자는 구원받지 못하는가? 치매에 걸려서 자기가 한 행동을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자는 구원받지 못하는가? 많은 신자들은 과거에 지은 죄를 회개하고 싶어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회개하지 못하기도 하고, 심지어 많은 신자들이 회개할 시간을 충분히 주어도 회개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그렇다면 이 신자들은 예수를 믿었어도 다 지옥에 가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 신자의 삶이 값없이 오직 은혜로 중생함으로써 시작되었다면 , 마지막 날에 구원받는 것도 값없이 오직 은혜로 영화됨으로써 구원받을 뿐이다.


c. 구원받은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자살에의 충동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신자의 중생의 상태를 너무 이상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미 우리는 엘리야, 욥, 요나 등과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들로부터 죽고 싶어하는 충동에 사로잡혔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신자들도 자살에의 충동을 느낄 수 있으나, 믿음 안에서 넉넉히 극복할 뿐이다. 자살은 분명히 기독교인이 피해야 할 죄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믿음이 약하여 자살에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신자를 평가할 때 자살을 결행한 그 한 순간의 행동만을 가지고 그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다윗은 우리아를 죽음에 내모는 살인죄를 범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그 하나의 행동을 가지고 다윗을 규정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과 다윗의 삶 전체를 보시고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평가하실 때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하갈을 취한 한 사건만 근거하여 아브라함을 평가하지 않으셨다. 수십 년을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온 신자를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한 그 순간만 가지고 단죄해서는 안 된다.


d. 청소년들에게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교육적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진실이 아닌 가르침에 근거하여 교육적 효과를 거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한다.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청소년들을 설득하여 자살의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데 성적이나 가정불화나 실연 등으로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 더 깊은 배려와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 주면서 자살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죄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선한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자살예방효과를 거둘 수 있다. 선행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가르침은 중세 말기 로마 카톨릭의 복음왜곡과 교회부패의 진원지가 되었다. 그 가르침으로 평신도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해서 악을 행하는 것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 때문에 사람의 영혼의 운명을 결정짓는 복음이 심각하게 왜곡되었고, 공로주의에 사로잡힌 교회는 이를 이용하여 돈을 주고 구원을 사고파는 면죄부 파동까지 일어났다. 교육적 효과는 복음과 진리를 희생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도모되어야 한다.


e. 그러나 교회는 자살한 성도가 자살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루터는 자살자도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말을 평민들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사탄이 이 가르침을 이용하여 더욱 더 많은 살인을 자행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예배 석상에서는 자살은 기독교인이 피해야 할 죄라는 것과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는가에만 근거하여 결정된다는 점을 동시에 강조하는 선까지만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자살한 가족을 가진 성도들이 자살한 가족이 죽은 후에 간 길에 대하여 불안에 사로잡혀 있을 때 개인적인 상담을 통하여 신앙고백을 한 신자라면 사망을 포함한 그 무엇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으로 위로해 주면 될 것이다.

작성자 : 박충구 2015-06-11 13:56:08
생명공학 시대와 기독교 생명윤리(2006. 10. 31.)


생명공학 시대와 기독교 생명윤리


박충구(감신대 기독교윤리학 교수)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주최 "생명공학과 생명윤리" 세미나 주제발표

(2006. 10. 31. 강변교회)

발표일 : 2006. 10. 31.

   

 

I. 생명공학과 생명윤리

20세기 이후 분자생물학의 발전은 현대 생명공학의 발전을 불러와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고유한 존재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어왔던 전통적인 생명질서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왔다. 인간 생명의 수태과정부터 인간 생명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개입을 초래한 것이다. 인공수정 기술은 사랑 없는 생명의 잉태를 가능하게 했고, 대리모 논쟁을 불러왔으며, 인공유산 논쟁은 잉태된 생명을 중절시킬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찬반 논쟁을 불러왔다. 1990년 출발한 Genom Project는 인간 생명의 신비로 여겨졌던 인간 유전자 염기서열 분석을 통하여 인간 유전자가 32, 000여개에 이른다는 사실을 밝혔다. 인간 유전자 정보를 분석한 과학자들은 유전자 정보를 분석하기에 이르고 유전학적인 우생적 연구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개체 인간의 유전자 정보의 유출과 사용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미래와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의 요인이 되고 있다. 현대 생명공학자들이 법적 도덕적 제약에 의하여 멈칫거리고 있지만 많은 이들은 인간생명에 대한 신비, 판도라의 상자는 열려졌다고 생각한다.

인간 생명에 대한 인간의 개입과 조작은 오늘날 인간생명의 초기단계인 배아복제에 집약되어 있다.1) 우생학적으로 열성인자를 가진 선천성 불치병 환자나 후천적으로 발생한 사고로 인하여 재생 불가능한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앞세워 인간 생명을 조작 발생시키고, 생명의 모태인 자궁을 단순한 생명공학적인 인큐베이터와 같은 자원으로 여성의 몸의 일부를 생명공학 연구를 위한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생명공학 실험실은 기존의 윤리와 도덕으로 통제 불가능한 과학자의 영역이 되었다는 사실이 지난 해 황우석 교수의 인간배아복제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검증적 과정에서 밝혀졌다. 연구윤리의 부재도 문제지만, 생명공학자들에 대한 정부관료, 제약회사, 그리고 민족주의적인 언론과 실질적 혜택을 기대하는 난치병 환자들의 기대가 실질적 업적을 과장, 확대, 부풀리거나, 사실을 왜곡하고 허위 날조된 데이터를 공공의 세계에 발표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런 과정에서 심각하게 결여된 문제들은 생명공학자들의 도덕적 판단능력에 대한 과신, 즉 technocrats의 영역에 대한 일반의 무지와 맞물린 과학기술자들의 조작적 행위가 그들의 전문 영역에서 일어나고 이를 검증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그들의 연구실은 생명윤리의 부재, 사회윤리의 부재, 학자로서 학문적 정직성의 부재, 첨단 과학적 업적에 대한 검증적 시스템의 결여, 그리고 그들을 전적으로 믿고 지원했던 기술 관료들의 정치적 판단들 속에 결여되어 있었던 생명윤리의 결핍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이러한 비양심적인 업적주의적 과학자들과 국민적 합의와 환호를 선도한 일부 정치가들, 그리고 전문영역에 대한 검증적 능력이 결여된 언론의 합작품은 사기성이 농후한 한 과학자를 필두로 한 집단의 오류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서 드러난 생명윤리의 정도가 얼마나 초라한 단계에 봉착되어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이런 과정에서 불교도인 한 과학자를 지원하기 위하여 불교계는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인 지지를 보내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NCCK는 매우 타협적인 입장에서 비판적 지지의 입장을 내비쳤다. 기독교 생명윤리의 관점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생명윤리학적인 합의 없이 이루어지는 생명공학의 위험을 지적한 이들은 단순히 반민족적인 단순 보수 종교인으로 매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황우석 교수 연구팀들이 데이터를 조작하고, 사실을 왜곡했으며, 검증적 연구 결과를 제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언론과 정부가 황우석 지지의 입장에서 물러서기 시작했고, 한국 사회는 생명공학 특수를 기대하던 환상에서 깨어났다. 이런 지난 과정은 생명공학 시대의 서막에서 일어난 단순한 해프닝으로 자리를 잡을 것이지만, 어쩌면 인간들이 가진 욕망과 환상, 그리고 그 욕망충족과 환상의 현실화를 향한 요구들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러한 탈생명윤리학적인 생명공학 실험은 그 결정적인 신뢰도가 확인될 때까지 은밀히 반복, 확대될 것이라고 예측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정황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보전과 기독교적인 생명경외의 윤리의 기준을 되새기고, 현대 생명공학이 지향하고 있는 지표들에 대한 기독교 생명윤리학적인 정보 분석과 비판 그리고 감시적의 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를 위하여 현대 생명공학의 동향에 대한 정확한 정보 수집 및 분석과 예측이 요구되고, 현대 생명공학의 동향에 대한 세계 기독교 신앙 공동체들의 공동 실천을 위한 기본적 합의도출이 요구되며, 나아가 생명공학에 대한 국가기관의 입법 및 정책 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기독교 신앙인의 신앙적 양심의 자유와 실천을 담은 기독교 생명윤리와 어긋나는 생명공학적 동향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결연한 비판과 이의를 제기하는 동시에 기독교 생명윤리를 더욱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생명공학에 대해서는 진지한 지지와 후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

 

II. 생명윤리학적 대혼란

현대 생명공학 연구자들은 그들의 연구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부정적인 내용들은 축소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1970년대부터 일어난 인공유산 논쟁은 인공유산 시술 행위의 윤리적 정당성과 부당성에 대한 찬반의 결렬한 논쟁을 불러왔다. 이런 논쟁은 우리나라에도 파급되어 왔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의 산아제안 정책과 맞물려 인공유산이 오히려 조장 촉진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기독교계의 반응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고, 단지 개인적인 단순한 견해들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독일 같은 나라는 법적으로 인공유산이 자유롭지 못하고 특별한 의료적 사유 없이 인공유산 시술을 받을 수 없도록 제한되어 있다. 이런 법적인 합의는 형식적 합의가 아니라 실질적 합의로서 의사나 사회 그리고 법제도 장치를 통하여 실천되고 있다. 이런 합의에 이르기 위해 독일 교회는 1988년 기독교 생명윤리에 대한 원칙을 담은 백서(Das Leben Achten, 1988), 그리고 이어 신학적 생명윤리를 해명하는 백서(Gott ist ein Freund des Lebens: Herausforderungen und Aufgaben beim Schutz des Lebens, 1991)를 발간 배부했고, 이어 1993년 인공유산에 관한 연구 백서(Schuwangerschaftsabbruch)를 작성 독일 교회 신앙 공동체 구성원의 이해와 판단을 위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생명윤리에 관한 백서(Leben im Angebot, Das Angebot des Leben, 1994)2)를 연이어 냄으로써 독일 교회 내 기독교 생명윤리학적 교육과 합의를 도출하여 사회구성원들을 선도했다.

이러한 백서들이 연이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생명의 잉태와 죽임, 즉 인공수정, 대리모 및 인공 유산시술에 대한 사회윤리학적인 논쟁이 일어나 자녀를 가질 자유주의적 권리와 산모의 선택권을 주장하는 찬성입장과 생명창조의 부자연스러움을 불신앙으로 보고 태아의 생명권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교회가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만이 아니라 생명공학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 생명 현상의 조절 및 통제 가능성이 논의되기 시작하여 유전자 검사 그리고 유전병 검사 및 예측에 관한 찬반논의가 일어나 한편에서는 불치의 유전정보를 검사하여 예방의학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장점을 주장하는가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의료적 개입 및 미래와 자유를 박탈한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입장이 일어났다.

이와 더불어 “생명의 연장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논란이 이어져 장기이식 시술의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대체가능한 장기교체를 통한 생명연장을 승인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생명의 통전성을 부정하고 인간 장기의 부품화 및 장기 생산의 비윤리성을 지적하며 반대하는 입장이 대립되었다. 특히 생명의 종식 및 죽음과 관련된 조력자살, 안락사문제에 대해서는 인간의 죽음 선택권과 인도적 조력 정당화하는 입장3)이 있는가하면 조력 자살이라 할 수 있는 안락사는 생명권 부정과 비인도적 조력으로서 생명경외와 돌봄의 윤리에 위배된다는 논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 인간 유전자 분석능력을 확보함과 더불어 생명과학자들은 생명복제 및 줄기세포 연구를 진행시켜 또 다시 불임부부 자녀 산출권과 불치병 환자의 치료 희망을 불러온 데 반하여 윤리학계로부터는 생명질서 교란을 초래할 행위로서 생명복제는 자연적 생명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대 계산의 혼란, 예측 못할 변종의 출현, 우생학적 잡종의 출현, 세포 치료의 불안정 등을 이유로 비판이 제기되는 일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현대 생명공학자들은 또 다시 새로운 생명의 지평에 인위적 노력을 가하고 있다. 현대 생명공학은 특히 세 가지 방향을 주목하고 있는 데 그 첫 번째 방향은 유전 공학적으로 변형된 우생학적 동식물을 연구하는 방향이다. 여기서는 우생학적으로 변형된 식량자원을 증산하는 일과 더불어 유전공학적으로 변형된 인간장기 생산가능성까지 예특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런 생명공학이 불러올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유전자 변형 식품과 동물이 인간 및 종의 생명 안정성을 파괴할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있을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런 실험이 만의 하나라도 잘못될 경우 생명현상에 치명적인 효소의 생산 및 자연증가가 일어날 경우 생명계에 미칠 위해와 혼란은 묵시적인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대 생명공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는 두 번째 방향은 생태계의 오염을 희석시킬 수 있는 생물의 개발이나, 화석연료의 고갈과 원자력 에너지에 의존되어 있는 현대문명의 전환을 불러올 대체에너지의 개발인데 예를 든다면 석유화학물질을 생산해내는 식물의 개발과 같은 연구(bio-fuel, white bio-tech)이다.

하지만 현대 생명기술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연구 분야가 바로 red-bio-tech라 불리는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는 IT가 BT와 결합하면서 엄청난 정보를 분석할 능력을 가지게 된 2000년을 시점으로 경쟁이 촉발되었다. 2002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2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영국 최대의 생명공학 연구소인 Sanger Institute를 방문하여 돌아보았을 때, 그 연구소는 년 1억 파운드를 사용하며 인간 및 동식물의 유전자를 분석하고 그 자료를 정보화하고 있었고, 그 분석된 정보에 따라 무수한 생명공학자들이 유전자의 발현관계를 식별해 내는 개별 실험을 하고 있었다.4) 생명의 발현 과정에 대한 분석과 유전자의 기능에 대한 분석이 완료될 경우 인간의 질병의 원인과 과정이 밝혀지고 노화방지와 수명연장을 위한 의학적 조치가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과연 생명의 신비가 모두 벗겨질지, 이보다 더 깊고 미세한 생명의 깊이가 또다시 드러나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생명의 신비가 벗겨져 인간생명의 형성-성장-노화-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생명과학자들의 손안에 쥐어진다면, 인간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될 것이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III. 기독교 윤리학적 관점의 다양성

생명공학과 현대의료 기술의 병행 발전관계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건들을 불러왔고, 기존의 기독교 윤리학적 판단 범주만으로는 명시적인 이해를 제기하기 어려워졌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현대 생명공학자들의 사고와 경험은 매우 탈기독교적인 가치, 즉 기독교 윤리학적인 생명이해에서 급속히 이탈하는 양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세 가지 방향으로 갈리게 되었다. 급진적인 입장은 현대 생명과학이 생산해 내는 새로운 생명조작방법을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로 보려는 시각이다.5)

이 입장은 인간의 선택권을 확대하여 불임자녀의 자녀 산출권의 한 방법으로서 생명복제 행위를 승인하지만 다만 그 기술적 불안정성 때문에 반대한다. 생명복제 기술의 취양성이 극복되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또한 이 입장은 인간은 자신의 행복이나 살아있음만이 아니라 불행과 죽음까지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개인의 삶과 죽음의 선택권을 긍정하려한다.6) 자율적이고 자기 책임적인 인간을 전제한 판단이지만 생명복제나 인공유산, 안락사 문제의 긍정적인 측면들을 강조하면서 그 비윤리성을 비판하는 입장을 거절한다. 여기서는 전통적인 기독교 윤리학적 생명이해의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인간의 생명 공학적 행위를 피조된 공동 창조자(created cocreator)의 역할로 이해하려 한다.

이 입장이 가지고 있는 갈등은 현대 생명 공학적 행위를 하나의 사실로 인정할 경우 이를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즉 누군가가 하나의 생명을 복제해 냈다면 교회는 그 복제된 생명에 대해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정하고 선언하며 지키고 돌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생명복제를 환영하는 바는 아니지만, 만의 하나라도 이런 일이 일어날 경우 기독교 공동체는 이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생명 공학적 실험의 결과 산출된 생명을 교회는 배타하거나 외면할 수 없다는 목회적 배려의 여지를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둘째 입장은 현대 생명공학의 소산들에 대하여 생명공학자들의 비신앙적 인위성을 근거로 그 결과를 거부하고 비판하는 입장이 있다. 가톨릭 교회는 자연법론적 전통에 따라 생명윤리에 있어서는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 온 바, 인공유산, 인공수정, 생명복제 및 생명조작행위를 불신앙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이를 거부 비판한다.7) 오직 자연스러운 질서를 따라서 태어난 생명만이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앞서 급진적 입장이 과학적 모든 행위를 감싸 안는다면 이는 마치 살인행위도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행위로서 긍정되어야 한다는 입장과 다를 것이 없다고 비판한다.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입장이 개신교 근본주의적인 신학적 입장이다. 현대 생명공학이 분자생물학적인 변이를 과학적으로 불러올 수 있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일종의 미시적인 생명의 진화 양상을 승인하는 것이라 간주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통전성을 해하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하나님의 일회적 창조를 통하여 온 생명이 완성된 것이므로 이의 변형이나 하나님의 창조를 미완의 창조로 여기는 논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낡은 지구론을 주장하는 진화론과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는 창조과학회의 입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가톨릭교회의 자연법론적 생명이해와 더불어 일회적 창조로 완성된 생명의 보전을 위한 노력은 긍정할 수 있지만, 우생학적 진보와 생명의 변형, 그리고 생명의 종식과 중절은 하나님의 생명 주권에 대한 거절이며 배반이라고 간주하여 종교적인 중죄에 해당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거부한다. 가톨릭교회와 유사하게 달리 개신교 주류의 교회들은 자연의 질서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통전성 보전과 생명존엄의 가치를 생명윤리의 근간으로 삼고, 생명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리책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생명질서를 교란하는 생명공학자들의 생명주권 침해를 비판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존재론적 생명가치를 부정하는 생명복제 및 조작적 행위를 비판 거부해 왔다.

보다 에큐메니칼한 세계의 여러 교회들은 생명의료 영역에서 제기되는 “가능한 행위“와 ”해서는 안 되는 행위“ 그리고 ”해도 되는 행위“를 구별하여 하였고, 이를 기독교 생명윤리학적인 유산을 재검토하면서 새로운 정황에서 바람직한 합의를 도출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위의 독일 교회의 노력과 유사하게 미국 루터교회는 인공유산에 관하여 1970년에 백서를 냈고, 1978면에 다시 이 문제를 더욱 심도 있게 규명하려 했으며, 1991년에 낸 백서에서는 인공유산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종합하는 견해를 제시하여 총회의 인준을 받았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에큐메니칼 교회들은 사레와 정황을 구별하고, 원칙과 상황이 부딪히는 현실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입장을 수용하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원칙적 생명권옹호와 이중효과의 이론을 통한 효용적이며 실용적인 가치를 수용하고, 과학적 데이터를 수용하여 종래 가지고 있었던 생명현상에 대한 이해를 수정하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 수용과 긴장이라는 두 축이 형성되는 데, 예를 든다면 동성애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수용하여 목회적 배려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한편 기독교적인 고결한 삶의 원칙에서는 배제하는 입장이다.8)

기독교 안에서 형성되는 생명공학의 발전과 의료적 적용에 대한 이견들은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내부적 결속을 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교회 내 분란의 요인이 되고 있으므로 다양한 견해의 수용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뿐 아니라 생명과학자들이나 의료인들이 기독교인들이 아닌 경우도 많으므로 전문적인 간학문적 연구를 통하여 보다 보편적인 윤리적 지평을 확보하지 않으면 교회의 판단에 대한 공신력을 상실하여 일반의 신뢰를 잃거나 심한경우 비전문적인 영역에 대한 경솔한 언급으로 인하여 기독교 일반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점에서 각국의 교회들은 생명윤리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연구위원회를 상설해 두고 사회윤리 현안들에 대한 연구 과제를 수행한 후 교회 내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다만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권위아래 교도권(teaching authority)을 행사하기 때문에 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합리적 승인과 일치된 동의를 요구하는 형식을 가지지만, 개신교는 평등주의적 신학적 사고, 그리고 자연법론적 도덕 신학적 토대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신앙 이성의 한계 안에서 상황분석과 이에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여 교회 내 토론과 합의를 도출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즉 교회는 상황분석을 통해 현실이해의 자료를 제시하고 전통적인 생명윤리학적 관점에서 가능한 판단 형식을 제안하고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승인과 합의를 도출하려는 노력에 그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사회 윤리학의 제 분야에서 교파와 교단마다 다양한 견해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하지만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의 자유, 그리고 사회의 공공성이라는 범주는 매우 중요한 판단의 범주로서 인간의 권리와 사회성에 대한 기본 합의를 공유하고 있다고 본다.

 

IV. 인간생명조작 시대의 윤리적 문제

 

1. 인간에 의한 인간생명 조작의 비윤리성 문제

인간에 의한 인간조작은 인간간의 평등권이해를 위협하고 조작인과 피조작인 간에 자유의 침해와 박탈이라는 문제를 낳는다. 하나님에 의하여 평등하게 피조되었다는 기독교 인간학의 기초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문제며, 서구 인권사상의 자유와 평등과 유대에 대한 가치체계를 위협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의 시발점은 993년 미국의 죠지 워싱턴 대학의 스틸만과 홀(Stillman and Hall) 교수 연구팀에 의하여 인간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수정된 17개의 수정란을 분할하여 48개의 수정란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는 데에서 출발하였다. 생명의 물리적 분열을 통한 개체의 발생을 조작한 것이다. 이어 1997년 영국의 에딘버러 대학의 로슬린연구소에서 이안 윌멋(Ian Wimut) 박사는 체세포 복제의 방법으로 발생시킨 복제양 돌리의 탄생을 발표하였으나 이 경우 동물실험이었으므로 자유와 평등권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으나 동물의 생명권 문제는 심각하게 도전받은 사건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어 1998년 산부인과 의사인 죤 기어하트, 제임스 톰슨은 사람의 줄기세포를 추출하여 배양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고, 이후 세계는 인간 생명의 기초단위인 배아를 파괴해야만 얻을 수 있는 줄기세포 연구가 지극히 비윤리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 논쟁에 빠졌다. 여기서 배아가 생명인가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생명의 기초단위인 배아의 도덕적 지위를 박탈하려는 과학자들과 윤리학자들간의 논쟁이 일어났다. 이어서 일어난 논쟁은 인공유산과 인공수정 시술을 해온 의료계의 관행의 관점에서 본다면 배아의 도덕적 지위를 재론하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논쟁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반면 배아를 단순한 세포군으로 여기고 실험과 분석과 분해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과학자들의 연구방향에 인간 존엄성과 생명권의 논의가 쐐기를 박는 일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배아줄기세포 연구가들과 체세포줄기세포 연구가들의 차이는 기능적인 연구과제의 특성을 논외로 한다면 생명윤리학적 입장의 차이라 볼 수 있다. 생명존엄과 경외의 윤리 안에서 연구를 할 것인지 아니면 생명존의와 경외의 윤리 밖에서 연구를 수행할 것인지를 결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서구의 각 나라들은 생명윤리법안을 통하여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생명윤리법은 교묘하게 이러한 생명윤리의 핵심적 논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작적으로 법안이 만들어 졌다고 나는 판단한다.9)

 

2. 비윤리적 생명공학을 지원하는 권력 및 여론의 문제

2004년 2월 한국의 황우석 교수는 체세포인간복제배아를 생성하여 줄기세포를 얻는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하였다. 2005년 5월 그는 184개의 난자를 공여 받아 난자핵을 제거한 후 환자들의 체세포 핵을 주입하고 미세한 전기자극을 가함으로써 세포분열이 시작된 배아를 만들었고, 이를 배반포기 단계에 파괴하여 11개의 줄기세포를 얻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는 2살부터 56살에 이르는 환자들의 체세포에서 얻은 핵을 사용하여 그와 동일한 유전인자를 갖춘 줄기세포를 얻었으므로 줄기세포 이식 치료방법에서 가장 커다란 난제였던 면역거부반응을 극복할 수 있는 과학적 개가를 이루었다고 발표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언론들은 생명윤리학적 판단을 유보한 채 연일 황 교수의 연구업적을 대대적인 생명공학의 개가라고 보도하였고, 정부의 책임자나 황 교수 스스로 황 교수의 실험결과가 마치 막대한 생명공학 특수(特需)를 불러올 수 있는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부풀렸다. 얻어먹기만 하던 민족이 이제는 생명공학 기술을 나누어 주는 생명공학의 종주국이나 되는 것같이 보도하였다. 황 교수의 연구실은 국가 기밀 급의 보안조치가 취해졌고, 그는 중요인사로 신변보호를 받는가하면, 대한항공은 10년간 대한항공 일등석을 이용할 수 있는 특전을 황 교수에게 베풀었다. 그러나 황 교수는 2005년 6월 7일 관훈클럽 토론에서 자신의 연구가 난치병 치료를 향한 인류의 여정에서 정확히 어느 지점에 도달했으며, 앞으로 남은 과제가 무엇인지 공개하기를 꺼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상 치료용 복제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종교계 및 생명윤리학계의 비판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미 유럽 등지의 국가에서는 1991년경부터 생명공학시대의 위기를 감지하고 “생명과 배아 보호법“을 발효시켜왔다. 독일의 경우 인공수정을 한다할지라도 잉여 배아의 생산을 법으로 금지하였고,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필요할 경우에는 자국에서 생산하지 못하도록 조치했으며 정 필요한 경우 외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하도록 조처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인간 배아를 치료용 줄기세포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산하고 파괴하는 행위는 독일의 경우 불법적인 행위이다. 미국은 국민이 낸 세금을 가지고 가장 약한 생명의 생명권을 유린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하여 2001년 정부로부터 연구비 수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모두 차단한 바 있었다. 부시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인 레온 카스는 근본주의자가 아니라 유태인이며, 그는 의학자로서 역사 깊은 생명윤리 전문연구 기관인 Hastings Center의 창설자이기도 하고, 시카고 대학과 죠지 워싱턴 대학의 교수이다. 사실상 한국 언론은 배아의 생명권을 인정하고 이를 보호하려는 윤리학자들은 그들의 입장이 진보이거나 보수이거나를 막론하고 거의 동일한 입장을 보여 왔다는 사실에 무지했거나 고의적으로 은폐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여론의 보도태도는 우리사회에 생명윤리학적인 논의 없이 비윤리적인 현실을 수용하게 하는 커다란 혼란을 불러온 책임이 있었다고 본다.

 

3. 연구자의 책임적 생명윤리의식의 결여

만일 실험실에서 과학자들이 생명조작을 통한 실익만을 생각한다면 부담스러운 생명윤리적 논리라든지, 미래사회에 대한 생태적 책임이나 세대 간에 넘겨줄 생명의 안정성을 지키려는 법적 책임의 문제는 매우 쉽게 폐기될 수 있다. 생명조작 행위가 생명의 안정성과 미래사회에 심원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윤리적 숙고가 결여된 단순한 판단과 근시안적인 실익논쟁은 종국에 가서 엄청난 재난과 비용을 치러야 할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세계의 각 나라들은 자율적으로 생명공학 연구의 윤리적 정당성을 갖추기 위하여 일정한 사회적 합의에 근거한 법적 제한 조치들을 마련함으로써 생명윤리가 결여된 생명공학의 무모한 실험주의를 제한해 왔다. 유럽 연합의 경우 배아를 고의적으로 발생시켜 이를 파괴하여 얻을 수 있는 배아복제줄기세포 연구는 지금까지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생명윤리학적 태도는 유럽에 그치지 않고 2005년 3월 8일 유엔 본회의에서도 치료용 복제를 금해야 한다는 결의안이 84대 34로 통과되었던 것이다.

생명의 안정성을 고려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자연적인 방법에서 벗어난 조작기술에 의한 인간생명 산출은 사실상 새로운 인간종의 출현 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이다. 생명공학자들은 그들의 실험이 단지 줄기세포를 얻어서 불치의 환자들을 치료할 목적을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인간복제배아 발생 기술은 인간 복제의 물길을 터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비록 개체 생명을 발생시키는 복제인간의 생성에 대해서는 온 세계가 반대하는 여론에 그들이 찬성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기술의 부분적 적용은 생명공학자의 실험실에서 "벌써"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중의 논리가 내재되어 있다. 개체복제는 반대이지만, 단계적 혹은 부분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연구는 같은 방향을 가진 것이며 그 연장선상에서 인간의 몸과 정신을 조작 지배할 수 있다는 생명공학의 위험을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수행하는 연구 결과가 불러올 위험을 예견하고 비판하고 감시하는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연구자의 사고와 판단, 그리고 그의 연구실은 책임적인 생명윤리의 부재를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4. 연구자들에 의한 생명개념 왜곡

과학자들이 생명을 조작적으로 발생시켜 놓고 생명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들의 생명 개념에 들지 않는 생명을 조작 발생시키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논리를 결과한다. 예컨대 인공 자궁을 만들어서 장기이식용 인간을 발생시키는 행위는 사실상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방식의 확대과정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일 수 있다. 이미 짐승을 이용하여 뇌 없는 몸뚱이만 발생시킨 실험이 있었고, 쥐에다가 사람 귀를 발생시킨 실험도 있었다. 키메라 생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인공수정시술을 승인한 세계는 당시 생각하지 못했던 잉여배아 실험 논쟁으로 이어졌고, 잉여배아 논쟁은 이제 체세포핵치환 배아복제 실험 논쟁으로 이어졌으며, 그 다음에는 이미 생성이 허용되고 죽이기로 작정한 배아를 이용한 실험의 문을 열어주게 되었다. 이제 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못할 것이 없을 것이지만, 인간이 윤리적인 존재라면 법적 규정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무슨 일이든지 해도 된다는 주장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련의 생명공학자들이 주장하는 14일 이내의 배아는 생명이 아니라 세포덩이라는 주장, 수정을 거치지 않았으니 수정란이 아니라는 궤변이 일단 받아들여지면 그 궤변의 확대적용 영역은 매우 광범위해 진다. 이런 기능론에 따른 생명개념 설정 논리들을 허용하면 앞으로 인간에 대한 개념 설정 기준이 자꾸 바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유럽이나 미국의 생명과학자들은 매우 어리석은 사람들로 간주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배아를 생명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과학자들은 14일 설에 그치지 않고, 3개월 설, 혹은 출생 설을 주장할 수도 있으며, 황우석 교수의 주장대로 수정과정을 거치치 않은 생명은 인간이 아니니 짐승이나 물질처럼 사용하거나 응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비인간은 비생명이라는 단순 도식에 빠지는 오류이다. 이런 식으로 생명개념의 가파른 경사면에 발을 일단 디디면 어디까지 미끄러져 내릴는지 아무도 모른다. 당시 황 교수는 줄기세포만을 얻기 위한 생명조작이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사실상 황 교수가 생명의 나무의 열매를 딴 행위를 응용한 일련의 생명공학자들의 시도들이 인류사회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일련의 과학자들은 수정란을 생명으로 보는 생명권 옹호주의자들을 향하며 서구 기독교적 인간론에 매여 생명공학의 발목을 붙잡는 신화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들은 황 교수가 줄기세포를 얻기 위하여 정작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하여 깊이 관심하지 않는다. 인간복제배아를 생성시키면서 이미 그 배아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규정하고 있는 황 교수는 배아의 생명의 존엄함과 권리에 대한 질문 자체를 14일 설에 따라 미연에 봉쇄하려고 한다. 그는 그가 만든 배아를 생명의 우연성과 자율성, 생명의 독립성,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이란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대상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생명이긴 생명인데 권리도 존엄성도 없다. 인류사회가 지켜온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근대적 이해가 황 교수의 연구실에서 태어난 배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권을 지켜온 인권 개념은 우리 안에 있는 거대한 홍수를 막아 인간다움을 지켜온 댐과도 같은 것이다. 황 교수의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기독교 공동체는 “치료용이 아닌 실험용 줄기세포”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인간생명에 대한 신뢰와 인식의 구조를 바꾸라는 요구를 받고 있는 셈이다.

모든 인간 생명에는 상황과 관련 없이 생명권·인권옹호의 개념이 적용되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유럽연합과 국제연합의 배아 보호에 관한 선언문은 한결같이 1948년 합의한 유엔의 인권선언문을 배아 보호의 중요한 생명윤리학적 전거로 삼고 있다. 이 정신을 외면하고 있는 생명공학자들이 실험실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 구조를 바꾸려는 것은 다름 아닌 주·객의 비인간화, 즉 자신만이 아니라 실험 대상이 된 생명에 대한 생명경외의 영역을 벗어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인간”이 인간생명을 발생시키고, 그 존재이유와 목적을 규정하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도 정당화할 수 없는 비윤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공학자들이 실험용으로 생산하고, 관찰하며, 죽여 폐기해온 몰모트와 동질의 존재로 인간생명의 초기단계를 비하하고, 비인간화하며, 수단화하는 행위를 우리는 결코 긍정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하여 서구의 나라들은 치료용 체세포복제배아 산출을 몹시도 꺼려왔던 것이다.

 

5. 수정란의 도덕적 지위 논쟁

이러한 행위의 부도덕성을 감출 수 있는 유일한 주장이 바로 수정란의 도덕적 지위를 박탈하는 것이다. 이것이 14일 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가진 의도이다. 그들은 그들의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14일 설을 주장하고 면책특권을 얻으려 한다. 인간의 초기단계 생명을 비인간화하고, 비생명화함으로써 실험실의 자료로 삼기위해 인간 생명 초기단계를 몰모트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14일 설을 주장하는 목적이다. 이러한 주장은 생명의 통전성을 단계론으로 단절시키고, 생명의 연속성을 부정함으로써 생명의 존재론적 가치와 그리고 유전적 통전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목회현장에서 생명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아직 증명되지 않는 치료방법의 개발을 위하여 생명의 존재론적이며 신적인 존엄성을 부정하는 일은 매우 반기독교적인 것이다.

황 교수는 자신의 실험에서 난자의 외피만을 사용했고, 체세포 복제를 이용한 배아생성이므로 수정란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나는 이런 견해는 황 교수와 같은 전문적인 생명 과학자들이 주장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 방법을 이용하여 돌리라는 양이 엄연한 한 마리의 양으로 태어났고, 돌리는 폴리라는 딸을 낳았기 때문이다. 비록 자연의 방법에서 유리된 조작 과정으로 인하여 생명선에 손상을 받아 조로(早老)했지만 돌리를 양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월멋 박사의 경우 양의 체세포복제배아 생성에서는 277케이스 중에서 29개의 배아를 얻었으므로 배아 생산에 있어서 10%를 상회하는 성공률을 이루어 냈다. 그 배아를 착상시켜 얻은 돌리의 생명은 29개 배아 중 유일하게 생존했으므로 생존율 3%, 전체케이스에 비한다면 생존율 0.36%의 생명이었다. 황 교수의 경우 이런 실험을 인간에게 적용한 것이다. 나는 이런 방법으로 만의 하나 인간이 복제되어 태어난다하여도 그는 엄연한 인간이라고 본다. 다만 생명공학자들의 무책임한 조작과 예단에 의하여 운명적으로 제한된 복제 인간으로서 불행한 존재일 것이라고 예측할 뿐이다. 그는 의료진들로부터 제공받은 난자와 환자의 체세포를 이용하여 배아단계까지 인간을 체세포 복제를 해 낸 것이며, 그 복제된 배아는 파괴될 목적으로 예단되어 있다. 나는 이 점을 비인간적이며 비윤리적인 것이라고 명료하게 지적한다.

그러므로 황 교수가 윌멋 박사가 사용한 방법과 유사한 체세포 복제 방법을 사용하여 배아를 얻었으므로 이 단계에서 인간 배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윌멋 박사의 실험과 유사한 경우를 예측한다면 이 배아들을 착상시켜 복제인간으로 발생시킬 경우 기형과 유산 및 태어난 후 죽은 사례까지 추정한다면 과히 태아집단살해와 방불한 경우가 될 것이므로 황 교수 스스로 감히 배아를 복제인간으로 발생시키는 것이 너무나 야만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황 교수에 설득당해 황 교수가 만든 인간복제배아가 수정란이 아니니 생명이 아니라고 한다면, 만의 하나 이런 실험의 연장에서 복제인간이 탄생한다 해도 그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주장이 된다. 복제인간의 생명의 안정성은 매우 낮으므로, 복제인간 생성을 시도하는 행의는 반인륜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지만, 언젠가 복제인간이 출현한다면 우리는 그도 결국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힘입어야 할 인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비인륜적인 복제 행위의 출발선을 황 교수가 이미 통과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비자연적인 생명산출과 파괴라는 도덕적 비난과 책임을 면탈 받을 수 있는 논리는 복제배아의 파괴를 정당화하면서 동시에 복제인간 출생은 비인간적인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인간복제는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대중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복제인간으로 발생될 가능성이 있는 복제배아의 파괴를 당연시하고 정당화하는 논리를 형성하고, 동시에 복제배아의 생명의 존엄성은 대중의 의식 속에서 당연히 거부되고 증발되어 삭제되는 것이다. 하지만 복제배아의 생성자는 황 교수이며, 그 복제배아는 자연의 생명으로서 타고난 것이 아니라 황 교수의 목적에 이미 존재 이유가 제한되어 있고, 그 복제배아는 황 교수의 손에서 파괴되어 줄기세포의 숙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죽어야 할 생명인 것이다. 황 교수의 연구실에서 이 불행한 배아들은 생명을 얻어 발생된 지 5-6일 만에 필연적인 죽임을 당하도록 지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에 일부 교회가 동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나는 깊이 놀라고 있다.

 

6. 노화와 죽음을 거부하는 인본주의적 문화

황 교수가 도덕적 비난을 감내하면서 산출해 놓은 줄기세포를 이용한 연구는 단순히 불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만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생명공학자들이 꿈꾸는 미래 세계는 가장 보편적인 재생 불가능한 불치병이라 할 수 있는 노화와 죽음을 극복한 세계이다. 이미 과학자들은 줄기세포 연구에 있어서 줄기세포가 특정 세포로의 분화하는 과정을 역으로 되돌리는 실험들을 하고 있다. 세포의 생명선을 연장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아마도 인간의 수명은 최소한 백 오십년을 상회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오늘날의 불치의 병 치료라는 개념은 재생 불가능한 특정한 질병을 가리키는 개념이지만, 이후 장기교체와 노화방지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연구가 진척된다면, 이는 결국 생명 공학적으로 개선된 새로운 인간 종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다. 유전자 조작기술을 사용하여 미시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몸을, 그리고 신경과학적으로 인간의 정신을 개선하고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하여 그것이 놀라운 개가라 예찬하며 생각 없이 찬사를 보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할 수 있는 것이 모두 가능하며 정당하다고 주장한다면 인간은 윤리적 기준 없이 자신의 본성을 변개시킴으로써 자신의 유한성을 망각하게 만들고 자연과의 관계에 이상을 불러오게 되어 결국 자신의 본성과 하나님을 잊게 될 것이다.

건강하게 오래 살려는 인간의 욕구를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세포의 노화를 방지하는 신약이 개발된다면, 이 약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는 반면 자연의 생명간의 균형(equilibrium)을 깨는 결과를 초래하여 더 커다란 생명계의 대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고, 이런 우생학적 생명권을 누리기 위하여 당연히 국가간의 혹은 인종간의 보이지 않는 유전공학적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불균형으로 인하여 지구상에는 평균수명이 40대에 그치는 나라들이 있고, 평균수명 70년을 상회하는 나라들이 있다. 결국 생명공학적 연구가 가져다 줄 혜택은 우선적으로 돈이 많은 사람들이나, 강하고 부유한 나라의 국민과 인종들만 누릴 새로운 특권이 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지구상에 불필요한 인종이라고 생각되는 존재들은 샘플들만 남기고 누군가가 도태시키려 할지도 모른다. 이런 공상과도 같은 사고의 출발점은 황 교수의 실험실에서처럼 윤리를 무시하는 과학주의자들이 인간배아의 생명권을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세계의 과학자들은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치료효과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밝혀왔다. 그러나 배아를 파괴하면서 얻은 줄기세포는 치료용 그 자체가 아직 아니다. 줄기세포는 인간 몸을 구성하고 있는 약 220여 가지의 세포로 분화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떤 특정한 세포로 발생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만능세포의 기능과 발생학적인 과정에 미치는 미세한 과정을 세밀히 파악하고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동물을 이용하여 연구해온 그 결과들을 가지고 임상적 치료의 안정성을 얻기 위하여 만능세포의 분화를 정확히 유도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해야만 한다. 이제는 인간을 실험대위에 올려놓고 실험을 해야 한다. 이런 실험과 기술이 예측한대로 적절하게 이루어질지에 대해서 사실상 세계는 환상적인 기대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동안 실험을 통하여 밝혀진 사실들이 보여주는 지표는 결코 낙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입한 세포들이 의도했던 세포로 성장하기 보다는 다른 유형의 세포로 전이될 확률이 매우 높고, 더구나 오래 노출되었던 줄기세포는 암세포로 전이될 확률이 높다는 연구결과도 최근 발표되었다. 노화와 죽음을 넘어서려는 노력은 노화와 죽음을 통해 새로운 세대와의 생명교체의 법을 부정하는 인본주의적인 망상이다. 여기에는 생명평형에 대한 책임은커녕 기존 세대의 이기성과 생명질서를 부정하고 오로지 생명공학의 특혜를 받은 이들의 낙원을 기대하는 인본주의적 환상이 지배한다.

 
 
7. 생명의 자리 자궁의 도구화

여성의 몸에 배란 촉진제를 놓고서 난자를 채취하는 일은 여성의 몸에 무리를 주어 심한 경우 자칫 잘못하면 임신 불능에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절차이다. 이런 까닭에 서구사회의 연구윤리의 한 항목에는 난자를 제공하는 이는 난자를 제공하는 행위로 인하여 어떠한 이해관계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더구나 이렇게 생성된 수정란이 파기될 것과, 그 수정란을 파기한 후에 채취한 줄기세포는 계속 배양되고 증식되어 연구용으로, 혹은 상업용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도 인지시켜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원칙들은 사실상 무수한 난자를 생명생산 이외의 목적으로 채취하는 행위를 제재하기 위한 조건들이다. 그러나 황 교수의 연구실에서 채취되는 난자들의 사용목적이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수정란이 아니라는 이유로 만일 여성의 난자에 짐승의 핵을 주입한다든지 짐승의 난자에 인간의 체세포 핵을 주입하는 행위는 참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왜곡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장엄한 세월동안 지켜져 온 자연의 질서를 인위적으로 왜곡하는 행위로서 단지 인간의 호기심과 우연적 결과를 얻으려는 실험정신에 촉발되는 것이니 어찌 생명의 존엄함을 지키려는 것이라 할 것인가.


세계의 과학자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공동연구를 하자는 제안이 있다고 한다.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줄기세포은행을 창설하겠다는 프로젝트도 나왔다. 줄기세포 은행이란 인간 초기 생명을 마음껏 조작할 수 있는 나라, 그런 행위가 법적으로 보호받을 뿐 아니라 막대한 정부의 연구비 지원까지 받을 수 있는 나라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법으로 금지된 치료용 복제배아 생산국이 된 우리나라가 정말 좋은 나라라고 보아야 할까. “메이드 인 코리아 줄기세포“가 황우석이라는 표를 달고 세계 시장을 석권한다면 그것이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영광이고 자랑스러운 일일까.


자국에서 윤리문제에 걸려 구할 수 없었던 줄기세포를 공급받은 다른 나라 과학자이 우리를 고마워할까. 아니면 생명윤리를 모르는 야만의 나라라고 우리를 비웃을 것인가. 세계줄기세포은행이 설치되면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줄기세포 숙주가 될 난자들을 제공하고, 황 교수의 연구실에서 생산된 배아들은 줄기세포 추출용으로 전락되어 대량으로 학살을 당하게 될 것이다. 여성의 자궁을 생명창조의 신비의 자리로 보지 않고, 줄기세포를 채취하는 숙주용 난자로 보는 나라, 초기 인간 생명인 배아를 존중하라고 가르치기는커녕 파괴하는 것이 오히려 이타적인 행위일 수 있다고 가르치는 세계는 국민들에게 생명의 존엄한 원리를 부정하고, 생명을 기능주의적으로 이해하게 하여 생명 경시 풍조를 불러오게 할 것이다.

 



V. 생명윤리 없는 생명공학/ 생명윤리와 함께 하는 생명공학


1. 생명윤리 없는 생명공학

생명윤리학적 숙고 없는 생명공학은 몇 가지 비전문적 이해관계 구조의 공모를 통하여 수행될 우려가 있다. 질병치료 방법이 개발될 경우 수혜자가 될 것을 기대하는 이들의 희망, 생명공학자들의 야심 찬 과학주의, 정부 관료들의 국수주의적 자긍심, 그리고 이면에서 작용하는 상업주의,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그리고 대중적 환호를 기대하는 종교 공동체 지도자들의 무책임한 동조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실질적인 현대 생명공학의 촉진자들은 제약회사들이다. 영국의 경우 제약회사들의 컨소시엄이 후원하는 영국 최대의 생명공학 기지인 생어연구소(Sanger Institute)에 투자하는 민간 자본이 연간 5000억원을 상회하고 있다. 1998년 톰슨과 기어하트의 줄기세포 채취 및 배양 연구 자금을 댄 것도 제론(Geron)이라는 제약회사였다. 전대미문의 치료 방법을 개발한다는 명분아래 업적을 이루어 내려는 과학자나 정부 관료들, 야심 찬 제약회사들의 의도들이 배수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오늘의 생명공학은 생명윤리라는 브레이크를 떼어버리고 가속 페달만 밟고 있다. 이렇게 겹쳐진 관심들은 커다란 압력과 연대구조를 형성하여 제국주의적 생명공학의 우위를 득하려는 국가적 전략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논쟁을 제기하는 것은 간혹 권력과 자본의 미움을 받거나 대중의 차가운 시선을 받을 우려가 많다. 희망찬 생명공학적 기대와 환상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로 매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과학주의에 한때 매료되었던 독일이나 일본을 비판했던 인류사회는 생명윤리 없는 생명공학을 그대로 수긍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록 대다수의 합의가 있다할지라도 그 합의를 통해서 제거될 수 없는 것도 있다. 생명권, 인권은 민주적 합의나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으로 제거할 수 없는 불가침의 생명 기본권이다. 우리가 인간다움의 기준을 가지고 전체주의를 비판해 온 역사를 기억하는 존재들이라면 전체의 합의라는 것이 언제나 정의롭고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난 역사에서 충분히 배운 셈이다. 그런데도 여론에 따라 밀리거나 밀고 나가게 된다면, 돈이 되고 건강만 얻으면 무슨 일이라도 해내는 용감한 민족으로 우리 스스로를 낙인찍히는 것을 허용하는 경우가 될 것이다. 우리가 설령 생명공학의 종주국이 된다 해도 우리는 생명윤리 없는 생명공학의 지지자들로 살아간 흔적을 남겨두게 되어 우리 후세대에게 생명간의 평형을 깬 후기인간(posthuman) 시대의 도래를 앞장서서 불러온 오류로 인하여 정신적이며 도덕적인, 참으로 매우 커다란 정신적 부담을 안겨주게 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2005년 황우석교수의 허위논문 조작사건은 날조되고 조작된 생명공학의 미래가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비극으로 종결지어졌다. 기본적인 일반의 신뢰를 조작한 황교수 연구팀의 몰락은 우리사회 전반에 나타난 검증적·반성적 숙고 없는 민족주의, 윤리적 정당성을 고려하지 못하는 실적주의, 전문 지식인의 무책임한 여론선동 행위, 세계 과학계를 기만한 일부 한국 과학자들의 허위의식, 종교집단의 합리적 판단 없는 파당적 편들기, 양심적 판단 없이 대중적 흐름에 편승한 기회주의적 종교인의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이 모든 오류는 생명윤리 없이도 생명공학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망상의 결과였다. 그러나 생명윤리의 안내 없이 수행되는 오늘날의 생명공학은 부도덕한 연구 집단의 자의성과 무책임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했다.

 

2. 교회의 생명윤리학적 설득력 확보가 관건

따라서 생명윤리 없는 생명공학의 폐기와 더불어 “생명윤리와 함께하는 생명공학”이라는 원칙으로 우리가 되돌아 가야한다. 여기서 인문사회학과 종교학 그리고 기독교 생명윤리학은 현대 생명공학이 나아갈 길을 조명해줄 수 있는 생명윤리학적 지표와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제는 생명공학자들에게는 판단의 기준이 될 것이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생명의 파수군의 역할이며, 일반들을 위해서는 생명공학적 현실을 인식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윤리적 판단을 숙고할 수 있는 정보와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다른 인문과학 집단과는 달리 종교, 특히 기독교 신앙은 2000년의 대사회적 관계형성을 위한 노력과 체험의 역사가 있으므로 그 어느 집단보다 이 과제를 바르게 수행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다만 이 과제는 기독교 사회 윤리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존하는 것이지 전적으로 교회내적 가치와 삶의 양식인 기도나 환상이나 은혜체험으로 대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어거스틴 이후 기독교 신앙 공동체들이 운용해온 신앙과 이성의 두 축을 바르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 교권을 둘러싼 기독교 지도자들의 영웅주의가 바른 과학적 지식과 신학적 원칙을 배제하고, 설익은 기독교의 대변인이 될 때 기독교의 지성적/과학적 공신력은 거듭 거듭 추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과 독일의 교회들과는 달리 대사회적인 문제들이 야기할 때 한국교회는 과학적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을 과학과 윤리의 언어로 의사소통하여 하나님의 창조와 사랑의 복음을 증거 하는 데 목적을 두기보다는 일회적인 대중선동적인 집회를 통해 정치적 행위를 하는 데 많은 힘을 쏟고 있다. 그 전문지식의 결여로 인해 상황파악도 못한 채 공공의 세계에 미성숙한 판단을 하나님과 교회이름으로 대변하는 일은 매우 무책임한 일이다. 이런 무책임은 몇몇의 영웅주의적인 교회지도자들이 집단의 힘을 과시하는 시위대의 선봉이 되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차원에 그치고 말뿐 사회과학적이거나 생명공학적 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판단의 결여로 인해 대중적 조롱과 비난을 등 뒤에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점에서 나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정치, 경제, 문화, 생명공학의 제 분야의 전문가인연 하는 태도들은 매우 부적절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독일교회 모델을 따라 전문 학자들의 객관적인 연구결과와 신학자들의 주체적인 판단을 참고하여 교회의 입장을 교육백서로 표명하여, 자신들도 배우고, 교회의 대사회적 입장 표명에 있어 대내외적인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사회 내 지식인과 과학자들과의 토론과 합의를 거쳐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노력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런 방법이 아닌 각개전투식의 분열된 입장들, 소영웅주의적인 비전문적 편견조장, 아무런 실천적 노력이 뒤따르지 않는 기관명의의 성명으로 그치는 문제제기, 대중을 앞세워 선동적 시위방식으로 정치세를 과시하는 행위는 그 성격자체가 몇몇 연사의 소영웅주의를 낳는 데 그치고 마는 전근대적인 의사표현 방식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생명윤리 사상의 실천성을 확보하고, 이를 의식화함으로써 인식공동체를 확대해 나가는 데에서 오늘의 합리적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교회의 과제이다.

 



3. 기독교 생명윤리학의 역할과 과제

생명 공학시대를 맞아 기독교 생명윤리학의 과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창조세계와 생명세계의 통전성을 보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파괴는 생태학적 위기를 불러오고, 생태학적 위기는 생명세계의 위기를 불러온다. 오늘의 무신론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생명공학자들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훼손하더니 급기야는 인간의 자기생명을 분석하고 실험대상으로 삼고 있다. 자식을 잡아먹고 죽이는 아비처럼 생명을 발생시키고 죽이고 파괴하니 정신적으로 가히 착란적이라 할만하다. 이런 세계에서 기독교 생명윤리학은 세 가지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첫째는 예방적인 과제로서 생명의 파수군의 역할이다. 현대 생명공학의 동향을 모니터링하여 생명의 통전성을 해하고 존엄성을 파괴하는 실험행위들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일이다. 둘째는 생명의 변호사 역할이다. 죽임을 당하게 된 생명, 업신여김을 당하는 생명, 파괴되는 생명, 버려지는 생명에 대하여 그 권리를 되찾아 주고 옹호하는 과제이다. 셋째는 생명의 전사의 역할이다. 이는 대량 살상과 생명계에 광범위한 위해를 끼칠 생명 공학적 악에 대하여 영적인 전사로서 싸우는 기독교 생명윤리학적 과제이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미국은 다양한 생명윤리학 연구소를 세우고10) 전문인력을 키워내며, 현대 생명공학의 향방을 예측하며 예방적 작업과 비판적 작업, 그리고 법적 및 제도적 장치를 통한 악의 제거에 힘을 쏟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 생명윤리학의 과제는 상황분석과 과학적 및 신학적인 전문 작업을 통하여 작성된 연구보고서들을 커리큘럼화하여 대학에서 가르쳐져야 하고, 더불어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의식형성을 위한 교육 자료로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 형성된 전통적인 생명윤리학의 관점을 확대하여 현대 이성적 작업의 결과들을 분석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일은 다양한 학문간의 교제적 작업을 필요로 한다. 더불어 간학문적인 연구결과를 신앙 공동체 안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교회는 점차 사회의 중론에서 소외되어 게토화 될 우려도 적지 않다. 보다 효율적으로 기독교 생명윤리학적 논의를 확대하려면 이런 학문적 작업과 연계된 목회적 과제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생명윤리 학자들과 목회자들 사이에 부단한 대화와 토론이 이어져 보편적인 생명가치 인식의 수위를 높이기위한 공동작업으로 이어져야 한다.



 

<주석>

1) 이 논문에서는 2004/5년 황우석 박사의 인간배아복제 줄기세포 연구 사건을 주요한 사레를 삼아 현대 생명윤리학의 논점들을 살펴보려 한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결과 발표는 세계를 두 번 경악시켰다. 한번은 생명공학의 우수국가의 지위를 불러오는 데에서 다른 한번은 도덕성을 결여한 생명 과학자의 조작으로 인하여 세계를 경악시켰다. 이 문제는 다양한 차원에서 한국 생명공학과 생명윤리의 수위를 점검할 수 있는 사례라 생각된다.

2) EKD Dokumentation, 1993.

3) 네델란드는 1952년 의사가 결핵 말기 환자였던 자기 형을 죽도록 조치한 Eindhoven 사건 이후 조력사를 시행한 의사들을 기소하지 않는 방향으로 노력해 왔다. 이어 1982년 조력 자살 가이드 라인을 마련했고, 1984년 네델란드 대법원은 1982년 일어난 최초의 안락사 사건을 심의한 후 의사에게 무죄를 선언하였다. 2000년 네델란드는 존엄사를 의미하는 안락사를 합법화하였다. Jocelyn Downie, "The Contested Lessons of Euthanasia in the Netherland" Heath Law Journal vol. 8 (2000) 119-139. 이 보다 앞서 미국 오레곤(Oregon) 주에서는 1994년 국민투표에서 51: 49로 존엄사를 입법화하였으나 1997년 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며 묻는 국민투표에서는 60: 40으로 존엄사를 합법화시켰다. 반면 오스트랄리아 북주(Northern Territory)는 1996년 존엄사를 합법화시켰다가 4건의 안락사가 시행된 이후 상원에서 이를 폐지했다.

4) Sanger Institute는 향후 10년 동안 일정한 역랑을 유전정보를 분석하는 일에 집중할 것을 밝히고 있다. 참조 http://www.sanger.ac.uk

5) Phillip Hefner, "생명문화적 진화와 창조된 공동 창조자,“ 종교와 과학(서울: 동연, 2002) 305이하.

6) Committee on Medical Ethics: Episcopal Diocese of Washington, D. C. Assisted Suicide and Euthanasia: Christian Moral Perspectives: Washington Report(Washington D. C: Morehouse Publishing, 1997).

7) Pope John Paul II, The Gospel of Life: The Encyclical Letter on Abortion, Euthanasia, and the Death Penalty in Today's World(New York: Random House, 1995).

8)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입장은 2004년 교리장정에 잘 드러나 있다. 연합감리교회 장정 THE BOOK OF DISCIPLINE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2004년) 에는 분명히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가) 동성연애를 행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2004년도 장정 304조 3항) (나) 그러므로 자신이 동성연애를 한다고 공언한 사람은 사역후보자로 허입될 수 없으며, 교역자로 안수 받을 수도 없으며, 연합감리교회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파송 받을 수 없다. (2004년도 장정 304조 3항 - 2000년도 장정과 동일함 ) (다)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결혼을 연합감리교회 사역자들이 집례해서는 안 된다. (2004년 장정 341조 6항 - 2000년도 장정과 동일함). 이와 동시에 연합감리교회는 “사회원칙”( "Social Principle", 1976)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인격적 및 목회적 책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전쟁, 인종, 노동, 평화, 오염, 자원 보호, 성차별, HIV 문제 등등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그 중에 인간의 성문제를 다루면서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목회적 지침도 제시했는데 요지는 그들의 인격도 존중해 주고 목회적 돌봄의 대상으로 여겨야 할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하거나 인권을 침해하는 강압적 행위를 행사하지 말 것과 그들을 사회에서 고립시키는 행위를 금하는 동시에 그들의 인권을 옹호해 줘야하고 우리 사회 일원으로 받아 돌보고 치유해 주어야 할 교회의 성스러운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9) 우리나라의 경우 뒤늦게 2000년대에 들어와서야 생명윤리법안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국가생명윤리위원회에는 특이하게 장관 위원이 7명이나 들어가도록 되어 있고, 심지어 실제적인 이해 당사자들인 과학자들이 삼분의 일이나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2004년 국회를 통과한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은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예견이라도 한 듯 치료용 체세포복제 배아의 생산을 허용하고 있고, 심지어 종간 교잡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10) 예를 들면 죠지워싱턴 대학에 소재하고 있는 Kennedy Institute of Ethics, 그리고 생명윤리학 전문 연구기관인 뉴욕의 Haestings Center를 비롯하여 수백 개의 윤리문제 연구소들이 전 세계에서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들을 진행시키면서 활발한 연구 활동하고 있다.

 

작성자 : 이승구 2015-06-11 13:51:56
생명 과학에 대한 기독교 생명 윤리적 성찰(2006. 2. 3.)

 

생명 과학에 대한 기독교 생명 윤리적 성찰:

2006년 2월 한국 상황 속에서의 생명 윤리적 고려 점들
 


이승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2006. 2. 3. 한국기독의사회 연차 세미나("생명윤리에서 바라 본 줄기세포 연구") 주제발표
발표일 : 2006. 02. 03.   
 
 
 

  황우석 교수팀이 2004년 2월 12일에 낸 논문이 실제로는 인간 체세포 복제에 의한 복제 배아 줄기 세포주 수립이 아니고, 이를 위한 실험을 하다가 우연히 일어난 단성 생식에 의해 이루어진 배아 줄기 세포인데도 이를 마치 체세포 복제에 의한 인간 배아 줄기 세포주 수립으로 발표한 것이며, 2005년 5월 19일에 발표한 환자 맞춤형 배아 줄기 세포주 수립은 처음부터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다는 서울대 조사 위원회의 보고서가 발표되었다(2006년 1월 11일). 이에 근거해서 "사이언스"(Science) 지는 이 두 논문 모두를 취소한다고 발표하였다(2006년 1월 12일).1) 또한 기본적으로 논문 조작 상황을 시인하며 사과하면서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듯하면서도, 근본적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전가시키면서 자신은 억울하다는 인상을 풍기는 황우석 교수의 기자 회견이 있었다(2006년 1월 12일). 이제 황우석 교수가 주장하는 바꿔치기 의혹에 대해서와 관련된 사실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조작된 논문에 대한 연구비와 후원비에 대한 감사원과 검찰의 조사가 남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생명 윤리적 관점에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하며, 어떤 태도를 표명해야 할 것인가? 또한 우리는 배아 줄기 세포 연구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가?
 
 

1. 인간 배아를 존중하는 운동을 해야
 
  무엇보다 먼저, 성경에 충실한 기독교계에서는 처음부터 인간 배아가 인간 생명체임을 강조하면서, 따라서 인간 배아 복제 자체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하여 왔었으므로,2) 이번 기회에도 인간 배아 복제 연구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인간 배아를 존중하는 운동을 전개해 나가야한다. 기독교계는 생명 문제에 대해서 항상 생명을 존중하는 같은 태도(pro-life position)를 유지해 나가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어야 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기독교계 안에서는 물론 일반인들까지도 인간 배아 복제의 근본적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인간 배아를 존중하는 일이 발생했으면 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런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은 현상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 황우석 교수팀의 논문이 조작된 것이기에 문제라는 것에서 더 나아가 더 근본적으로 인간 배아를 복제하고 인간 배아를 가지고 실험하고 우리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 자각되어야만 한다. 전자는 단순히 진실된 연구 태도와 관련된 문제이지만, 후자는 인간 생명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네 한국 사회 일반에서는 이 생명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반성이 전혀 없어 보인다.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가 논문 조작이 없는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했을 때, 우리 사회는 인간 배아 복제에 대해서 과연 어떤 태도를 나타내 보였을까? 황 교수팀의 논문에 조작된 측면이 있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로 드러난 지금도 인간 배아 복제 자체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드문듯하다. 사실은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라고 여겨진다. 황우석 교수 사태와 관련하여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측면에서 윤리 문제를 논의하기는 하지만, 진정한 생명 윤리 의식은 거의 실종되어 있는 것이 황우석 교수가 여러 번 찾아 부르는 “대한민국” 사회의 근본적 문제이다.
  물론 성경적 관점을 가지지 않은 일반인들이 인간 배아부터를 인간으로 여기며 인간 배아를 존중하는 태도와 의식을 가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과 그들의 이익, 그리고 자신의 이익만을 중요시해 나가는 태도를 나타내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과 미국의 많은 주와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는 윤리적 문제를 이유로 배아실험 자체를 법으로 금하였고, 2005년 2월 18일에 유엔 총회 법사위원회는 모든 형태의 인간복제를 금지하는 선언문을 채택했고,3) 2005년 3월 8일에는 (찬성 84개국, 반대 34개국, 기권 37개국의 결의로) 유엔 총회가 치료 목적의 인간 배아 줄기 세포 연구도 금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는 것을4) 우리 사회도 깊이 숙고해야만 한다. 즉, 비록 배아라 할지라도 인류사회는 그 생명의 존엄과 권리에 합의하였고, 세계적으로 이 정신을 지켜줄 것을 권고한 것이므로, 인간 배아를 대상으로 한 줄기세포 연구는 세계의 합의 및 권고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의 온전한 생명 윤리 의식과 그에 근거한 활동과 권면이 요구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생명에 대해 바르게 생각하는 온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진정한 인간 생명 존중 활동에 힘써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 배아를 존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1) 낙태 반대 운동과 수정란을 파괴하는 피임 방법 배제 운동을 해 나가야 한다.
  또한 (2) 우리들은 시험관 아기 시술에 있어서 잔여 배아가 새겨지지 않도록 하는 운동, 즉 시험관 아기 시술을 할 때에 한 번에 하나의 수정난만을 사용하도록 하는 운동을 좀 더 강하게 전개해 나가야만 한다. 단 하나의 배아만을 자궁에 이식하는 방법(single embryo transfer, SET)은 이미 스웨덴에서는 2003년부터 공공 보건 의료에 의해 제공되는 시험관 아기 시술에서는 이런 방법을 사용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래도 임신 성공률의 차이기 없었고, 임신 합병증의 위험성과 확률이 감소하였다는 연구 보고도 있다.5) 그러나 혹시 이제까지 일반적으로 주장된 바와 같이 이와 같은 방법의 사용이 임신 성공률을 낮추고, 또한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라고 해도 그리스도인들은 잔여 배아 생성을 우려하면서 이 방법을 적극 추천하며 이를 이루기 위한 희생적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런 방법을 사용할 때에라도 우리는 인위적 과배란을 유도하기 위해 부작용이 충분히 규명되지 않은 호르몬제의 과다한 복용, 반복되는 마취와 수술 등 여성의 몸을 가혹하게 다루는 것을 할 수 있는 대로 배제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만 (3) 우리는 인간 배아를 가지고 실험하는 일 모두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반대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그런 인간 배아 실험의 하나인 ‘치료적 인간 배아 복제’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이런 노력은 이 세상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며, 다른 이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삶의 태도 위에서만 효과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 배아를 포함해서 모든 인간을 존중하고 그들의 삶을 보존하고 그 삶의 질을 높이는 일에 앞서는 진정한 생명 지킴이로 세상에 있어야만 한다. 그 결과로 이 세상에 이런 의미의 포괄적인 생명 운동이 폭 넓게 전개될 수 있었으면 한다. 황 교수 사건을 계기로 하여 이 세상에 윤리를 참으로 중시(重視)하는 분위기가 나타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생명 윤리를 존중하며 생명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나타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4) 이번 사태 이후로 혹시 잔여 수정란에서 기원한 인간 배아 줄기 세포주를 사용하여 인간 배아 줄기 세포 연구하는 일에 관심이 더해지고, 이제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인간 배아줄기 세포 연구를 하여 난치병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노력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데 모든 국민의 관심과 방지 노력이 요구된다.
  더구나 마리아 생명공학 연구소의 박세필 박사는 이와 같은 방식의 배아 줄기 세포 연구에 대해 미국에서의 특허를 받은 상태이다. 박 세필 박사는 수정 후 4, 5일이 지난 냉동 배반포기 배아를 이용해 인간 배아 줄기 세포주를 만드는 기술에 대해 특허 신청 4년 만인 2005년 7월에 미국 특허를 획득했다고 특허 교부증을 교부받은 2005년 10월 17일에 밝혔다.6) 마리아 생명 공학연구소나 미즈메디 병원 등 우리나라의 불임 클리닉에는 약 5만여 개의 잔여 배아가 있으므로 앞으로 이런 식의 연구가 많이 나타날 위험이 매우 큰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사태를 기회로 해서 잔여 수정란을 사용한 인간 배아줄기 세포 연구에 대해서도 그 위험성을 분명히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강한 반대를 해야만 할 것이다.
 
 

2. 난치병 환자들을 위한 성체줄기 세포 연구 집중과 그 시술의 유의점
 
  둘째로, 그러면 이제까지 배아 줄기 세포 연구 결과에 대해서 잘못된 희망을 가지고 있다가 실망과 절망에 빠진 난치병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에게도 현재 과학 기술의 현황을 있는 그대로 제시해야 할 것이다.
  지금 현재의 생명 과학적 기술로는 (1) 인간 배아 줄기 세포를 사용하여 인간의 난치병을 치료한 사례가 하나도 없으며, (2) 동물 배아 줄기 세포나 인간 배아 줄기 세포를 가지고 동물 치료 실험을 한 결과 난치병을 치료하는 예가 있으나 배아 줄기 세포는 불안정하여 여러 가지 세포가 나타날 가능성이 너무 높고, 암 발생률이 너무 높으며, 염색체 이상이 나타나기 쉽다.
  그러나 성체 줄기 세포를 이용한 치료 실험은 동물 실험에서도 성공한 사례가 많고, 65종 이상의 인간의 질병도 치료한 임상 사례들이 자주 보고 되고 있다.7) 그러므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런 사례들에 대한 계속적인 사후 조사(follow-up study)와 함께, 성체 줄기 세포 연구에 더 많은 관심과 연구를 지속해야 할 것이다. 특히 성체 줄기 세포에 의한 치료에 의해 어떤 치료의 진전이 있은 후에 과연 어떤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지에 대한 계속적인 후속적 연구와 보고가 뒤따라오지 않는다면 오히려 성체줄기 세포 연구에 대한 불신과 비판이 생겨나기 쉽다.
  예를 들어서, 2004년 10월에 성체줄기 세포 치료로 조금씩 걷게 되었다고 11월 25일에 발표되었던 황미순 씨의 사례에 대해서,8) 몇 달 후에 호전 반응은 곧 사라졌고, 2005년 4월의 재시술의 부작용으로 심한 허리 통증 때문에 휠체어에도 제대로 앉지 못해 주로 누워 지내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9) 현재 황미순 씨의 부작용을 치료 중인 의사는 "시술로 인한 감염으로 염증이 생겨 뼈 일부가 녹아내렸고, 주변 근육은 조직검사용 바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조직이 딱딱해졌다"고 했다고 한다.10) 이를 취재한 취재팀은 73건의 성체 줄기세포 응급임상을 추적한 결과 (1) 사망 12건을 포함해 부작용 발생, (2) 호전 증세 없음, (3) 시술 포기 등 치료 효과가 없는 경우가 80% 이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병원 측이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 나머지 사례 중에도 황미순 씨처럼 효과가 금방 사라진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11) 이와 같은 상황을 계속해서 보고해 주지 않으면 일반 대중들은 정확한 사태를 모른 채 잘못된 생각을 확대해 가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성체줄기 세포 치료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주어야 한다.
  그것이 난치병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진정한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사태를 계기로 생명과학계와 우리 국민들 모두가 인간 배아를 파괴하는 윤리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인간 질병 치료에 효과를 나타내 보이고 있는 성체 줄기세포 연구에 더욱 힘을 기울이고, 황미순 씨와 같은 시술 부작용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를 적용하도록 해야 한다.
 
 

3. 인간 난자 사용의 난점을 강조해야
 
  셋째로, 이번 사건 속에서 드러난 수많은 난자 사용에 대해 모든 사람들의 경각심이 나타나도록 하는 일에 그리스도인들이 앞장 서야 한다. 우리들 모두는 황 교수 팀이 2,221개 이상의 난자를 사용하여12) 결국 우연히 일어난 단성 생식으로 이루어진 단 하나의 줄기 세포주를 얻었다는 이 현실의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그 난자를 제공한 분들 가운데서 상당수는 자신들이 제공한 난자가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도 몰랐을 것이고, 난자 공여 이후에 심각한 후유증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의학계에서 보고된 난자 공여 후유증의 대표적 사례로는 빈혈이나 나팔관 염증, 복막 감염, 간 기능 저하, 폐 응고 등을 언급할 수 있다. 심할 경우 난소암 위험이 높아지고 불임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황 교수팀에 난자를 기증한 어떤 미혼 여성은 “복수가 차서 배가 3인치 가량 늘었다가 원상태로 돌아갔지만 지금껏 각종 여성 질환으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고, 체중이 난자 흡입술 이전보다 7kg이나 줄기도 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13)
  인위적 과배란을 유도하기 위해 부작용이 충분히 규명되지 않은 호르몬제의 과다한 복용, 반복되는 마취와 수술 등 여성의 몸을 가혹하게 다루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여성의 인권을 심각하게 모독하는 일의 하나이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이와 같이 난자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나라는 이 세상에 없다는 심각한 문제가 우리 앞에 제시된 것이다. 이런 비윤리적인 분위기가 대한민국의 국가 신인도를 떨어뜨리고 이 나라가 얼마나 비윤리적인 국가인지를 잘 드러내어 보인 것이다. 생명 윤리를 존중하는 국가만이,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국민들만이 세계적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국가와 국민이다. 이제라도 진정으로 생명 윤리를 높이는 나라로 나타나는 일에 그리스도인들이 앞장 서야 한다.
 
 

4. 이종 배아 복제(“이종 교잡”)에 대한 반대 
 
  이와 관련해서 인간 난자를 찾기 어렵게 되면 이제까지 많이 실험된 바와 같이 동물의 난자에 인간의 체세포 핵을 주입하는 이종 교잡의 체세포 복제를 하려는 시도가 더욱 많이 나타날 위험이 있다. 사실 이 일은 벌써 많은 이들이 시도하고 있는 일이다. 가장 최근에는 돌리를 만들었던 윌무트 박사와 런던 킹스 칼리지의 신경학자인 크리스 쇼 박사는 운동신경질환 환자의 체세포에서 얻은 핵을 토끼 난자에 주입해 ‘키메라’(유전자 혼재동물) 배아를 만든 뒤 이를 줄기세포로 배양할 계획이라고 영국의 일간 <더 타임스>(The Times)가 2006년 1월 13일에 보도했다.14) 쇼 박사는 “진보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인간 난자를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기 때문에 동물 난자 사용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단 5개의 줄기 세포주만을 확립해도 운동 신경 질환 연구에 강력한 수단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15) 이는 결국 인간 난자를 찾기 어려운 경우에 동물 난자를 이용한 이종 복제를 시도하려는 것임이 분명하다. 중국에서는 이미 지난 2003년 상하이 대학의 성 후이전 박사팀이 인간의 핵을 토끼 난자에 주입해 100여개의 이종배아를 만들었으며 여기서 다수의 줄기세포를 배양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인간 복제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서 2004년 초에도 복제 인간 실험 주장을 했던 미국의 불임치료 전문의이자 켄터키 대학 생식 생리학 명예교수인 파노스 자보스 박사는 18개월 된 사내아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11세 소녀와 33세 남자의 시신으로부터 채취한 DNA를 살아 있는 암소의 난자에 주입, 시험관에서 복제 배아로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고 호주의 <오스트랠리언> 지가 2004년 8월 30일 보도했다. 자보스 박사는 암소의 난자는 인간의 난자보다 크기 때문에 조작하기가 쉬웠으며 세포 분열이 시작돼 배아 단계에 이르렀으나 배아를 64세포 이상까지는 자라게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16)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이종 교잡은 많이 시도된 것이다. 2002년 3월 8일에 마리아 생명 공학 연구소의 박세필 소장은 “이종간 핵치환 방법으로 30대 여성의 귀 세포에서 핵을 축출한 뒤 탈핵 소의 난자에 이식해서 사람의 유전형질을 99% 이상 가진 배아 세포를 만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17) 그때 박 소장은 당시 2년 전부터, 즉 2000년부터 소의 난자를 이용한 복제 실험을 하여 왔다고 밝힌 바 있다. 박 박사는 또한 인간 배아 줄기 세포를 생쥐의 배반포기 배(수정후 4일째)에 주입한 후 대리모 생쥐의 자궁에 착상시키는 방법으로 모두 11마리의 ‘키메라 쥐’를 태어나게 했다고 2003년 1월 28일에 밝힌 바 있다.18)
  이와 같이 지속적으로 계속 시도되고 있는 이종 교잡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에 우리 모두가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 그런데 2005년 1월 1일부터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생명 윤리 및 안전에 대한 법률>이 이런 이종 교잡을 근본적으로 배제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이를 배제하는 형태로 <생명 윤리 및 안전에 대한 법률>을 고치는 운동이 강하게 일어나야 한다. 지금 현재의 법률은 “이종 간의 착상 등 금지”에 대한 제12조 ①항에서는 “누구든지 인간의 배아를 동물의 자궁에 착상시키거나 동물의 배아를 인간의 자궁에 착상시키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하고, 제②항에서 “누구든지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하면서, “1. 인간의 난자를 동물의 정자로 수정시키거나 동물의 난자를 인간의 정자로 수정시키는 행위, 2. 핵이 제거된 인간의 난자에 동물의 체세포 핵을 이식하는 행위, 3. 인간의 배아와 동물의 배아를 융합하는 행위, 4. 다른 유전정보를 가진 인간의 배아를 융합하는 행위” 등을 금지하고 있지만, 1목에 대해서도 “다만, 의학적으로 인간의 정자의 활동성 시험을 위한 경우를 제외한다.”고 하여 정자의 활동성 시험을 위한 연구는 허용할 뿐만 아니라, 가장 많이 시도되고 있는 동물 난자에 인간의 체세포 핵을 주입하는 경우는 전혀 금지 하지 않고 있으므로, 동물 난자에 인간의 핵을 주입하는 실험은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제2조 4목에 나타난 체세포핵이식에 대한 정의에서 “체세포핵이식행위라 함은 핵이 제거된 인간 또는 동물의 난자에 인간의 체세포 핵을 이식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여, 동물의 난자에 인간의 체세포핵을 이식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이법은 이종 교잡 실험을 장려하는 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문제를 포함하여 이 법률의 다양한 문제점에 대한 헌법 소원에 대한 헌법 재판소의 바른 판단이 나타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적 연구 동향과 실적들을 검토해 생명윤리법 전반을 새롭게 검토할 계획”이라는 국가 생명 윤리 위원회의 의견 모음에19) 대해 감사를 표현하는 바이다.
 
 

5. 연구의 윤리와 지식에 윤리 강조해야
 
  다섯째로, 모든 사람이 느끼고 있겠지만 이제는 연구 윤리를 확립하고, 지식의 윤리를 강조하는 일의 중요성이 더욱 강하게 강조되어야만 한다. 연구 윤리의 확립은 이번 황 교수 사태에서 드러난 바와 같은, 또는 그와 같거나 그에는 미치지 않으나 그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형태의 조작에서 벗어나는 바른 연구의 풍토가 학문 연구와 발표와 검증의 모든 장에서 조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황우석 박사 등의 논문이 발표된 초기부터 학문적 공개 질의와 여러 논의가 있어 왔다. 예를 들어서, 한국 기독교생명 윤리 협회와 천주교회는 배아 복제 실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발표를 하였었고, 한국 생명 윤리 학회는 네이처(Nature) 지가 황우석 교수팀의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 것과 관련, 2004년 5월 23일에 치료용 인간배아복제 연구 윤리 특별 위원회 명의의 공개 질의서를 통해 (1) 연구에 참여한 여성 연구원으로부터 난자를 채취했는지, (2) 난자 기증자들의 동의서를 왜 공개하지 않는지, (3) 한양대병원 윤리위원회(IRB)의 심사 및 승인이 적절했는지, 그리고 (4) 연구비의 출처 등을 해명하라고 질의했었다.20) 그 당시에 황 교수는 당시 네이처의 보도에 대해 "네이처지에 난 기사는 국내 일부 생명윤리학자들의 의도적인 제보로 취재가 이뤄진 것"이라면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우리의 연구 성과를 폄하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후에 옳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 이와 같은 주장을 하지 않고, 진지하게 여러 질문에 대해 성찰하고, 다시 실험하는 태도를 가졌다면, 또한 일반 시민들이 학문적 연구에 대해 학계의 공정한 평가를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관찰하는 태도를 가졌더라면 좀 더 일찍 바른 방향으로의 전개가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식의 윤리(ethics of knowledge)는 우리의 연구가 과연 어떤 목적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결과가 어떤 것인가의 문제까지도 고려하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은 그 어떤 지식이든지 다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식을 추구할 때도 고려해야 할 윤리가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 속에서 모두가 진실과 정직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이루어 질 수 있어야 할 강한 필요를 느낀다. 많은 이들이 황우석 교수의 회견에서, 특히 마지막 회견에서 과학자보다는 정치인의 모습을 본다는 말을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 말이 정치인들에게 대한 모독으로 여겨지는 날이 속히 올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6. 결론: 진리를 위한 분위기를 마련하고, 진정한 생명의 길로 나아가야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 전체와 언론계와 특히 정치계에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선별적으로 이용하고, 그것을 위해 필요하다면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는 그런 분위기가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황 교수팀만이 책임을 지면 다 되는 것이 아니고, 객관적 보도를 하지 못했던 언론계에서도 지금까지의 사과 이상의 사과와 자정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청와대와 정치권의 책임자들이나, 이에 관여된 과학 기술부와 국정원의 은폐 시도와 관련된 이들은 엄정하게 책임을 지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항상 진실을 향해 나아가고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책임을 묻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하고 그 일에 우리 모두가 앞장 서야 한다.
  황우석 교수 사태는 이와 같은 여러 문제를 반성하게 하여 우리 사회를 좀 더 윤리적이며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는 사태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을 다 생각한 우리들은 이제 진정한 생명을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하는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강조한 인간 생명의 지고한 가치는 근본적으로는 그 인간 생명이 수정란과 배아 때부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지 않도록 하는 일에 가장 큰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수정란과 인간 배아와 성숙한 인간들 모두가 진정한 인간성을 드러내도록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 형상으로 존중되는 인간들이 심각하게 손상된(deformed) 형태로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의식해야 한다. 사실 우리를 복잡하게 만든 이 모든 사건은 이 기형적으로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 양상의 하나일 뿐이다. 이 사태를 보면서 화를 내고 분통을 터뜨리는 이들도 실상은 기형적 하나님의 형상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네 그리스도인들의 종국적 사명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진정한 형상이 되게끔 하는 데 있다. 기독교의 근본적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와 연관될 때에만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됨을 실현하고 진정한 자아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진정한 사랑의 실천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 땅 가운데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있는 것이며, 사랑하는 이로 있는 것이며, 이 땅에서 진정한 생명 윤리를 온전히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1)사이언스(Science) 지는 2006년 1월 12일에 도널드 케네디(Donald Kennedy) 편집장 명의의 성명을 통해 “서울대 조사 위원회의 최종 보고서에 근거해 본지에 게재된 두 논문을 무조건 취소한다”고 발표하면서, “두 논문에서 상당량의 데이터가 조작됐음이 최종 보고서에서 시사됐다”면서 “이에 따라 논문을 긴급 취소하며, 과학계는 논문에 보고된 결과들을 근거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길 권고한다”고 발표했다.
Cf.
http://news.media.daum.net/snews/digital/science/200601/13/khan/v11388989.html.
 

2)이에 대해서는 이승구, "인간 복제, 그 위험한 시도" (서울: 예영, 2003), 특히 94-95와 각주에 인용된 여러 저자들의 글을 보라.  또한 박상은 엮음, "인간 배아 복제, 과학의 승리인가?" (서울: 한국누가회출판부, 2004)를 보라. 그 외에 기독교 생명 윤리 협회의 홈페이지(http://www.cbioethics.org/)에 실린 협회의 입장과 기윤실의 성명과 한기총의 성명을 보라.
 

3)http://www.donga.com/fbin/output?sfrm=2&n=200502200154
 

4)http://news.joins.com/internatio/200503/09/200503091857192471400040104011.html
 

5)P. Saldeen and P. Sundstrom, "Would Legislation Imposing Single Embryo Transfer be a Feasible Way to Reduce the Rate of Multiple Pregnancies after IVF Treatment," Human Reproduction 20/1 (2005): 4-8, 박재현, “시험관 아기 시술과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관계”. "통합 연구" 통권 45호 제 18권 2호(2005), 40, n. 12에서 재인용.
 

6)http://www.donga.com/fbin/output?sfrm=2&n=200510180064
Cf. http://www.chosun.com/cp/edaily/200510/17/20051017000149.html
 

7)이 점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위해서는 이승구, “인간 줄기 세포 연구의 현황과 기독교적 반응,” "통합연구" 제 18권 2호 (2005년 8월): 74-96을 보라. 강경선 교수는 2005년 말 미국의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상황을 언급하면서 67종 이상의 병들이 성체 줄기세포를 사용한 치료법으로 치료된 보고가 있다고 하였다.
 

8)2004년 11월 25일에 한국 서울 탯줄 은행의 한 훈 박사팀과 조선대 산부인과 송창훈 교수팀, 서울대 수의대 강경선 교수팀은 20년 가까이 하반신 마비상태로 지낸 황미순(37) 씨에게 2004년 10월 12일에 탯줄 혈액 줄기세포를 주입한 지 40여 일이 지난 당시에 척추가 재생되고 있다고 밝혔다.
Cf.
http://times.hankooki.com/lpage/200411/kt2004112617575710440.htm;
http://www.cordblood.com/cord_blood_news/stem_cell_news/a_paralyzed.asp;
http://www.news24.com/News24/Technology/News/0,,2-13-1443_1627932,00.html;
http://www.connected.telegraph.co.uk/news/main.jhtml?xml=/news/2004/11/30/wcells30.xml;
http://www.seoulcord.co.kr/bin/news_view.asp?branch=2&num=195&part=&searchkey=
 

9)http://news.joins.com/society/200601/16/200601160506152931300030103011.html.
 
10)
http://news.joins.com/society/200601/16/200601160539061431300030103011.html.
 
11)
http://news.joins.com/society/200601/16/200601160506152931300030103011.html.
 
12) 국가 생명 윤리 위원회는 2006년 2월 2일에 ‘황우석 교수 윤리 문제 조사 중간 결과’를 발표하면서 “2002년 11월 28일부터 2005년 12월 24일까지 미즈메디 병원, 한나 산부인과의원, 한양대 병원, 제일 병원 등 총 4개 기관에서 119명의 여성으로부터 138회에 걸쳐 총 2,221개의 난자가 채취돼 서울대 수의과대학 연구실에 제공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Cf.
http://news.media.daum.net/snews/society/affair/200602/03/seoul/v11579134.html.
 
13) 이 사례에 대한 한계례 21의 보도로 다음을 보라:http://h21.hani.co.kr/section-021106000/2005/12/021106000200512270591069.html.
 
14)
http://www.chosun.com/international/news/200601/200601140008.html
 
15) Ibid.
 
16)
http://www.donga.com/fbin/output?search=1&n=200408310073. 영국의 과학전문지 ‘네이처’는 2004년 9월 7일자 온라인 판에서 “자보스 박사의 홈페이지에 관련 연구논문이 생식학계의 저명 학술지 JARG(Journal of Assisted Reproduction and Genetics)에 게재될 예정이라고 적혀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JARG의 노버트 글라이처 편집장은 “원래 게재될 계획이었지만 현재는 취소됐다”고 밝혔다. 이유는 자보스 박사가 학술지 게재 이전에 언론에 먼저 공개해서는 안 되는 ‘보도 제한 시점’을 어겼기 때문이다.
Cf.
http://www.donga.com/fbin/output?sfrm=2&n=200409140418
 
17)
http://www.donga.com/fbin/searchview?n=200203080212.
 
18)
http://www.donga.com/fbin/searchview?n=200301280019.
 
19)
http://news.media.daum.net/snews/society/affair/200602/03/hankooki/v11578946.html.
 
20)
http://service.joins.com/asp/article.asp?aid=2417943

작성자 : 김현철 2015-06-11 13:46:47
예수님은 이미 열달전에 와 계셨습니다 (2005. 12. 23.)

 

 

예수님은 이미 열달전에 와 계셨습니다

- 성육신기념일을 제안하며 -


김현철 목산교회 담임목사(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이사)
국민일보 2005.12.23.(금) 29면, 성탄절 특별기고
 발표일 : 2005. 12. 23.   
 


인간의 몸으로 오시고자

성탄일 10개월전에

46개 염색체를 지닌 배아로

성육신하신 예수 ˙˙˙

잉태되신 3,4월

어느 봄날을 성육신일로

기념함은 어떨까


인간의 죄값을 죽음으로 대신하기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것을 기독교 교리용어로 성육신(聖肉身)이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 기독교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이 성육신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고난과 죽음을 겪으심으로써 우리가 구원 받을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자 하나님은 언제 성육신하셨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던 그 날일까요, 아니면 마리아 자궁에 잉태되던 그 날일까요, 우리는 매년 12월에 들어서면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는 찬송을 부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이미 열 달 전에 왔는데 ˙˙˙."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출생을 기념해야 할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잉태를 기념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고난은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분을 버리고 피조물인 인간의 신분으로 자신을 낯추는 것이 곧 고난이었습니다. 그 고난의 시작은 배아로 잉태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46개 인간 염색체를 가진 배아로 마리아의 자궁에 생성되었습니다.


창조주이신 그분이 현미경으로만 보이는 미물인 배아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분은 인간과 똑같은 삶의 과정을 밟기 위해 그 어떤 부분도 생략하지 않고 처음부터 성실하게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한 살짜리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지 않으셨고, 서른 살짜리 어른으로 갑자기 나타나지도 않으셨습니다. 잉태된 배아로부터 시작해 40주 동안 자궁 속에서 성장하시며 베들레헴에서 출생할 때까지의 과정을 모두 거치셨습니다. 그것이 곧 인간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잉태부터 출생까지, 출생부터 성체로의 성장까지 그 어느 한순간도 인간이 아닌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분의 탄생에는 잉태 후 어느 단계에서 인간으로 돌변하는 '혁명적 기점'이 없습니다. 생명 탄생의 혁명적 기점은 오직 잉태의 순간입니다. 즉, 잉태 이후에는 생명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배아는 곧 인간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생명을 정의해 줍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에서 '언제부터 인간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의학적으로도 눈을 떠서 배아로 오신 예수님을 찬송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육신을 제대로 기념합시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예수님이 출생하신 12월의 성탄절을 기념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보다는 예수님이 잉태되신 어느 봄날을 '성육신 기념일'로 정해 기념하자는 것입니다. 성육신 기념일은 인간 생명을 함부로 다루고 조작하며 파괴하고 있는 오늘의 세태를 회개하는 날도 될 것입니다. 교회마다 3월이나 4월에 배아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작성자 : 신원하 2015-06-11 13:42:38
생명윤리 논쟁과 교회의 과제 (2005. 12. 01.)


생명윤리 논쟁과 교회의 과제 
 


신원하(고신대신대원 기독교 윤리학 교수)
목회와 신학 십이월호 2005. 12. 1. 발행 통권 198호, pp. 74-79
발표일 : 2005. 12. 01.   
 
 
 


생명윤리 논쟁과 교회의 과제

미래 학자요 문명 비평가인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30년 전에 이미 그의 저서를 통해 당시 생소했던 유전 공학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가져올 희망과 불안에 대해 예측한 바 있다. 인간 사회와 삶이 이 기술로 크게 혜택을 얻게 될 것이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유전자 치료, 유전자 이식과 그로 인한 변종, 동이종물 키메라와 복제 동물의 탄생 등 지구 질서와 생태계에 혼란이 야기될 것을 미리 예견한 바 있다.

생명 공학의 강국과 생명 윤리 빈국의 한국 1990년대 이후 우리는 그 예견이 현실로 등장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는 증인인 셈이다. 1997년 복제 양 돌리가 실험실에서 탄생했고, 이어 동물과 인간의 유전자 지도가 완성되었다. 이로 인해 유전자 치료가 가능해졌고, 인간배아 복제가 가능해졌으며, 급기야 올해에 난치병 치료에 도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인간 배아에서 줄기 세포를 추출하고 배양하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가 생명 공학 기술 혁명의 선두 국가이기에, 우리 국민은 생명 공학 기술이 더 가까이 와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올해 이런 느낌이 더욱 각별한 한 해였다. 황우석 박사팀이 인간배아 줄기세포를 추출하고 배양하는 기술을 개발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면서 우리의 생명 공학 기술은 이제 인류 난치병 해결에 획기적인 일익을 담당할 것으로 주시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지구촌의 이런 희망과 기대의 저편에는 불안한 시각과 의식도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생명을 조작하고 탄생시키는 수준에 이르게 된 이런 기술이 이제 생명에 위협을 가하게 될 수도 있음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구촌은 생명 공학 기술을 적절히 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윤리적 기준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과학 기술의 윤리 문제에 대해 조금씩 논의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올해는 생명 윤리에 대해 가장 활발하게 논의하기 시작한 해일 것이다. 줄기세포 연구 건이 미친 엄청난 파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 생명 윤리라는 단어는 우리 사회에 그리 익숙한 게 아니었고, 일부 전문 계층에만 해당하는 단어일 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나라가 정치와 경제에 걸쳐 전반적으로 선진화되고 시민 의식도 변하며, 시민 단체와 종교계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생명 윤리에 대한 인식도 높아져 가고 있다. 비단 생명 공학 기술에 관련된 것뿐 아니라, 사형제도, 낙태, 안락사의 문제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방송과 매체들에서 빈번하게 다루고 있다. 생명 공학 강국인 우리나라가 생명 윤리 분야에서도, 비록 뒤늦은 감은 있지만, 의식이 형성되고 있음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회에 바른 생명윤리가 확립되는데 한 몫을 담당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우선 올해 생명 윤리에 관한 주요 이슈를 간단히 짚어 보고자 한다.



치료제 개발을 위한 복제배아 줄기세포 연구

첫째, 복제배아 줄기세포 추출에 관한 논쟁이다. 황우석 박사팀이 지난 5월에 난치병 치료를 위한 배아줄기세포추출 연구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고 발표했다. 사람 체세포에서 핵을 추출한 뒤 그 핵을 탈핵된 난자에 융합해 미세한 전기 충격으로 수정란을 발생시키고, 수정된 배아가 4~5일 정도 지난 뒤 배반포 단계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해 그것을 시험관에서 배양하는 기술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추출한 줄기세포를 난치병 환자의 구체적인 몸 부위에 주입해 줄기세포가 그 안에서 분화하면서 건강한 조직의 재생을 도와 치료를 도모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술 개발이 인류 난치병 치료를 위해서나 국가의 미래 경쟁력을 위해서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간주하고 우리 사회는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천주교와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는 아무리 목적이 좋다고 하더라도 인간배아를 줄기세포 연구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연구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 연구에 관해 학계, 종교계 내에서도 시각의 차는 크다. 줄기세포 치료제를 만들어 생명을 구하는 일은 인간 생명을 지키고 존엄성을 고양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생명인 인간배아를 수단으로 발생시키고 조작하며 파괴하는 것은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는 비윤리적 행위라고 반대하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사실 이 연구의 성과는 황 박사팀의 연구 경험과 기술로 인한 것이지만, 한편으로 정부와 기업들이 법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4~5년 사이에 정부 주도로 이런 연구가 가능하도록 법률안을 개정했다. 2003년 국회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켰고, 2005년 1월 1일부터 난치병 치료제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배아복제와 줄기세포 치료 연구에 대해 일정 자격을 갖춘 연구소에 한해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연구는 국제 사회의 결의와 흐름에는 동떨어져 있다. 지난 1997년 11월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는 생명 공학과 의료 기술 연구를 위한 중요한 윤리적 지침을 담고 있는 "인간 게놈과 인권에 관한 세계 선언"을 채택한 바 있다. 생명 굥학 연구를 지지하지만 연구 결과가 악용되거나 남용되어 인권과 인간성이 손상되지 않도록 윤리성을 강화하는 보편적인 윤리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유엔은 2004년 11월의 결의를 거쳐 올해 3월에 구체적으로 인간배아를 복제하고 실험하는 연구를 금지하는 결의안을 발표했다. 그런데 국제 사회의 흐름을 무시하고, 우리 정부는 황우석 교수에게 연구의 길을 깔아 주었다. 2005년 1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생명 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은 생명 윤리와 생명의 안전을 보장하기보다 생명과학자들로 하여금 생명을 대상으로 무제한적인 실험을 허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갖고 있는 상당수의 윤리학자, 법학자, 의학자, 시민들은 이 법이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생명권을 침해하는 반생명법이라고 간주하고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 심판을 청구한 상태다. 상당수 기독교인과 천주교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사형제 폐지법안의 상정과 논쟁

올해도 사형 제도 폐지 논쟁이 비교적 뜨거운 편이었다. 지면을 통한 논쟁은 오히려 종교계에서 더 뜨거웠던 것 같다. '사형제 폐지 특별법안'이 17대 국회에 들어와 지난 2월에 이미 발의되었고, 법사위에 상정되었으며,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사형 제도 폐지를 지원하기로 결정한 상태이고 정기 국회에서 통과 여부만 남겨 두고 있는 상태다. 국민의 정서는 아직도 사형 제도 존속에 가깝지만, 시대의 분위기는 점점 사형 제도를 폐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개신교계의 대표적인 두 연합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정기 국회 결의를 앞두고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각기 사형 제도 폐지와 존치라는 상반된 입장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일찌감치 폐지 입장을 밝힌 바 있고, 추기경을 비롯해 많은 사제들이 이 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

사형 제도 폐지론자들이 주장하는 이유로 1)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2)오판의 가능성에 그로 인해 회복이 불가능한 독툭한 특징이 있으며, 3)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고, 4)약자와 소수자들에 대해 불평등하게 적용될 가능성이 있으며, 5)범죄자에게 개선의 여지를 박탈하고, 6)흉악 범죄를 억지하는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존치론자들이 주장하는 근거로 1)응보적 정의를 실현하고, 2)국민 정서에 부합하며, 3)흉악 범죄를 억지하는 효과가 있고, 4)범법자가 재차 흉악한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 가장 핵심적인 논쟁은 역시 인간 생명권과 그 생명의 존엄성에 있다.

사형 제도 폐지의 입장을 옹호하는 교회는 1)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 2)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의 가르침은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생명을 마음대로 살인하는 것은 인간 존엄성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해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아울러 비록 흉악범이라고 해도 그가 다시 회개하고 새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복음의 정신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구현하는 길임을 역설한다. 그 사람이 새로워져서 희생자 가족과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형 제도 존치론자들은 두 가지 면에서 다르게 이해한다. 첫째, 개인적인 살인과 국가 공권력의 처형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십계명에서 금지하는 살인이란 공동체의 삶을 위협하는 불법적인 살해를 의미한다면서, 이 계명은 결코 적법하게 사람을 죽이는 처형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둘째,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한 대상은 개인이지 결코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지닌 존엄한 인간을 죽이는 자에 대해 극형인 사형을 명령한 것은 그 안에 존엄한 생명을 보호하려는 당신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고의적으로 죽이는 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이기에 이런 자들을 중벌로 다스리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고 본다. 나아가 사형 제도를 존치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갱생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한다. 사형 제도를 두되 시행을 최대한 유예한다면, 그 사람에게 회개와 화해의 기회를 부여할 수 있고 어쩌면 이런 제도가 회개를 더욱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교회는 사형 제도에 대해 명확하게 대조되는 시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중심에 두 입장 모두 생명 존중의 사상이 자리하고 있다. 사형 제도 폐지론자들이 자칫 흉악범의 생명의 보호와 존엄성을, 사형 제도 존치론자들이 잠재적 희생자들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더욱 강조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각 입장은 상대의 입장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어떤 입장에 있든지 또 앞으로 사형 제도가 존치되든, 폐지되든 기독교회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하는 책임이 있다.



여성 인권과 낙태법 확대 움직임

지난 5월에 국가인권위원회는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 권고안에 대해 인권 신장의 축을 중심으로 하는 권고안을 마련하면서, 모성권과 관련해 인공 임신 중절 허용 사유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실제로 기혼 여성의 낙태율이 약 40%에 이르는데 우리나라는 모자보건법에 유전학적 장애나 질환, 성폭행이나 근친 상간, 산모의 건강 위협 등 낙태가 가능한 요건을 극히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여성 인권 차원에서 이 법은 재고돼야 한다고 본 것이다. 보건복지부도 지난 9월에 전국 인공 임신 중절 실태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미혼이나 기혼 여성들 대부분이 사회 경제적 이유로 낙태를 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낙태 현실과 법의 괴리를 막기 위해서라도 인공 임신 중절 관련법의 현실화 방안이 필요함을 지적한 바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낙태법 확대 개정 권고안은 산모의 선택권과 인권의 측면을 충분히 고려한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법안은 태아의 인권과 생명 보호권이 아닌 사회적 강자와 힘 있는 자의 입장만을 지나치게 고려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법안은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안을 만들 때 의도한 '인권 신장을 위한 인프라 구축'과 '취약 계층의 인권 보호'의 핵심 원리에 배치된다. 취약 계층의 인권 보호에 장애인이나 비정규직 근로자 등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실제로 가장 힘없고 정작 보호를 받아야 할 약자인 태아도 그 계층에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아의 인권과 권리는 철저히 무시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사회는 모자보건법에서 낙태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모의 건강이 위협을 받을 경우'라는 조항을 아주 폭넓게 해석해 쉽게 낙태를 시행하고 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 모자보건법의 이 조항을 개정하기 위해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낙태 허용 조항을 확대해 명시한다면, 오히려 뱃속의 태아는 더욱 보호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인권 존중과 신장의 트렌드는 바람직하지만, 이것이 생명권보다 앞설 수는 없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인권과 생명권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여성 인권 확대의 측면에서 추진하는 낙태법 개정에 대해 교회는 더욱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생명윤리 논재의 의의 ˙ 성과 ˙ 과제

생명 과학자들과 그들을 후원하는 많은 기업인들과 지지자들은 과학과 기술이 지배하는 무한 경쟁 시대에 새로운 과학 기술에 대해 지나치게 윤리적 규범을 들이대어 기술을 묶어 버린다면, 결국 그 사회는 국가간 경쟁에서 낙오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비전문가들이 지나치게 윤리적 시각으로 발목잡기식 규범들을 만들어 제동을 걸면 결국 국가의 선진 기술은 기대할 수 없고 미래는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탄식 내지 경고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야말로 생명의 가치를 경제 논리와 정치 논리에 종속시켜 이해하는 단선적이고도 편협적인 사고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주장은 자칫 인류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나게 위험을 초래하게 되는 근시안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이런 때 일수록 성숙한 사회는 더욱 철저히 종합적으로 사고해서 새로운 생명 공학 기술과 사용에 윤리적인 선을 그어가는 데 노력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생명 과학 기술의 활용 범위, 사형 제도, 낙태법 확대안과 같은 윤리적 문제들은 점점 더 진보와 보수를 가름하는 정치적 사회적 '아젠다'로 이용되는 경향을 보인다. 정부는 줄기세포 연구를 비롯해 생명 공학 기술에 대해 국가의 미래를 견인할 사업으로 인식하고 집중 후원 육성해 그 성공으로 정부 정책의 신뢰를 확보하려는 정치적 아젠다로 삼고 있다. 기업도 이 연구 작업을 난치병 치료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 연구로 통해 얻게 될 엄청난 기업적 이윤을 노리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로서 윤리적 이슈의 정치적 아젠다로 이용되는 것을 경계하고, 이런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규범적 선을 그으며, 그 대안을 제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윤리적 문제에 대해 보여준 발빠른 대응과 일사 분란한 행동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황우석 박사의 복제배아 줄기세포 추출 건에서 한국 천주교는 속히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고, 성체 줄기세포 연구를 대안으로 제시하며, 그 후에 실제로 연구비 100억 원을 출연해 성체 줄기세포 연구를 현실적으로 후원한 것은 매우 탁월한 귀감이 아닐 수 없다.

개신 교회는 구조적으로 이런 행동이 어렵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올해 교회의 생명 윤리 의식과 활동은 어느 정도 진일보했다. 생명윤리 활동과 유관 단체들의 발전적 해체와 통합을 통해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가 탄생해 법조인, 의사, 신학자 등 의식 있는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동참하고 있다. 이제 기독교도 복음을 우리 사회와 자연계의 총체적인 샬롬을 위한 것으로까지 확대해서 보는 전향적인 시각을 갖고 생명을 진작시켜 나가며 피조계의 화평을 도모하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작성자 : 김현철 2015-06-11 13:37:16
생명윤리와 그리스도인의 사명 실천(2005. 11. 24.)

 

생명윤리와 그리스도인의 사명 실천

 

 

김현철(목산교회 담임목사낙태반대운동연합 공동실무책임)
 


    생명의 창조주가 야웨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교회라고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생명을 정의하고 정의된 생명을 보호하고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더욱이 죽음의 위기에 처한 생명을 지나치지 않고 구조해야 할 사명이 당연히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 비율이 높은 나라 중의 하나인 우리나라가 낙태율이 세계 상위를 차지하고 있고, 배아복제기술의 최첨단국가가 되었으며, 불임클리닉에 보관된 냉동배아가 무수히 많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는 이념집단이 아니라 생활집단이어야 합니다. 옳은 윤리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교회가 아니라 옳은 윤리를 살아내는 사람들이 교회이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 말씀에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이다”라고 했듯이 신앙은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다른 말로 세계관, 또는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가치관은 당연하게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입술에 달려 있는 신앙고백이 그 무엇이더라도 실제 생활을 보면 그의 가치관, 즉 그의 ‘진짜’ 신앙고백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 교갱협(교회갱신을위한목회자협의회)이 목회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한국 교회의 갱신과제 제일번은 신앙과 삶의 불일치입니다. 목회자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문제가 교인들이 교리에는 동의하지만 교리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교는 교회의 일부 프로그램이 아니라 교회의 생리입니다. 선교하면,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를 머리에 떠올리는 고정관념에서 한국 교회는 어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믿는 바(敎)를 삶으로 선전하게(宣) 되는 것이 선교입니다. 세계 최대교단인 미국 남침례회 여선교회 지침서에는 선교활동이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선교활동이란, 지역사회 속의 불신들에게 발생하는 필요를 공급하며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다.”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가 선교적인 집단인가를 냉철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왜 국민들은 더 이상 교회에서 소망을 발견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고귀한 가치관이 실제 생활에서는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04년에 국회를 통과해서 2005년부터 시행된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에서는 이미 완성된 인간생명인 배아를 특수한 연구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배아줄기세포연구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인간생명의 정의가 수정의 순간부터가 아니라 수정 후 14일부터로 바뀌는 크나큰 실수를 범했는데도 이에 저항하는 교회의 목소리는 작기만 합니다. 인간은 수정의 순간 46개의 염색체를 지닌 개별 인격체로 창조됩니다.


인간은 수정 이후 생명의 연속성을 지니게 되는데 그 연속성을 무시하고 생명의 시점을 변개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창조의 질서를 역행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자기의 사명을 등한히 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대형교회 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60%의 교인들이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한 난치병 치료연구를 지지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배아줄기세포연구의 윤리적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 대안이 되는 성체줄기세포연구와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등에 대해서 교회는 가르치고 깨우쳐서 사회가 잘못 가지 않도록 제동장치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이제 교회가 참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올바로 생명에 대해 배우고 생명을 지키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낙태를 예로 들면, 우리나라에서 낙태를 많이 하는 이유는 첫째는 낙태가 어떤 행위인지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며, 둘째는 알더라도 낙태의 실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알려 주고 보여 주는 일이 목회자의 역할과 책임입니다. 한 교회의 예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사명을 실천하는지를 참고하도록 합니다.


■ 목산교회의 소명진술(Vision Statements) 제1번은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죽음으로 끌려가는 자를 살리는 일(잠언 24장 11절)이 우리 교회의 제일소명이다. 구명(求命)이 구원(救援)보다 우선한다.” - 낙태반대, 미혼모 보호, 구타 당하는 아내와 자녀 보호, 탈북자 구호.


■ 기독교윤리 이전에 생명과학에 근거한 의학지식과 의료윤리를 정기적으로 가르칩니다:(1) 「주요 윤리문제들」이라는 제자훈련과목에서 낙태문제를 2주 동안 공부합니다.(2) 매년 4월에 일주일, 또는 한 달 동안 ‘생명주간’을 정하고, 생명에 관한 주제를 다루며 생명 지키는 일에 동참합니다. - 낙태, 입양, 불임과 시험관아기, 마약, 가정폭력, 동물살해, 에이즈, 공해 등.(3) 생명주간에 들어 있는 주일을 ‘성육신 기념일’로 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날을 제대로 기념합니다. 성자 하나님은 마리아의 자궁에 잉태될 때 성육신하신 것인데 기독교인들은 열 달이나 늦게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념해야 할 날은 예수님의 출생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잉태일이어야 합니다.(4) 목회자는 수시로 생명에 관한 설교를 합니다. 이념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의학정보를 제공하여 윤리적 판단을 쉽게 할 수 있도록 교인들을 돕습니다. 생명에 관한 정보가 수시로 제공되고 비디오 자료를 통해서 실상을 눈으로 자주 보게 해줍니다. 이를 위하여 방대한 자료수집을 합니다. TV 방송을 모니터하여 생명에 관련된 내용은 모두 비디오테이프로 구입하여 사용합니다.(5) 낙태반대운동연합에서 4월, 9월, 11월에 실시하는 ‘생명학교’ 초급과정과 중급과정에서 훈련 받게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낙태를 하지 않도록 가르치며 상담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도록 합니다.

(6) 낙태반대운동연합이나 다른 단체에서 열리는 생명윤리와 관련된 세미나에 교인들이 참여하도록 독려합니다. 실제로 이런 세미나에 교인들이 많이 참석합니다.(7) 두 달에 한 번씩 있는 구역모임(다른 교회 구역모임과 성격이 다소 다름)에서 생명에 관한 ‘이야기 주제’를 선정해서 구역원들끼리 자신의 가치관을 나누고 조정하도록 합니다. 최근의 예들은, ‘세계최저출산국, 한국’, ‘배아복제의 실태’, ‘안락사와 존엄사’ 등입니다. 이런 주제와 관련된 전문인이 교인 가운데 있으면 그에게 자료를 준비하도록 합니다.(8) 매년 7월 중에 혼전순결홍보를 하여 미혼자들이 혼전순결서약을 합니다. 서약자들을 중심으로 혼전순결서약예배를 드립니다.(9) 시험관아기의 문제점을 가르쳐서 불임의 경우 입양을 적극 권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임(可妊)가정에서도 둘째, 셋째 아기를 입양하도록 합니다. 생명을 건지는 차원의 입양입니다. 현재 가임가정이 둘째와 셋째를 입양한 경우의 아기가 여섯 명이 있고, 불임가정이 입양한 경우의 아기는 두 명이 있습니다. 입양비용은 교회가 지출합니다. 2년에 한 번 입양가정을 축복하는 ‘입양축제’를 엽니다.(10) 술과 담배가 마약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려 주어서 마약중독에서 벗어나는 차원에서 금주.금연을 하도록 합니다. 미국의 경우, 마리화나는 4급 마약류, 담배 2급 마약류로 분류하고 있습니다.(11) 매년 10월에 유서(유언장)에 관한 설교를 하여 모든 교인이 유서를 미리 쓰게 하고 그 내용 가운데 장기기증.시신기증의 의사를 밝히도록 합니다.


■ 생명윤리와 관련된 선교활동에 실제로 참여합니다:

(1) 수요일 중보기도모임에서 매주 생명에 관한 주제의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2) 매년 5월과 10월 대학로에 나가서 길거리 낙태반대홍보를 합니다.(3) 매년 8월에 헌혈하고 헌혈증서를 모읍니다. 모은 헌혈증서는 장기치료가 필요한 환자 중에 재정이 어려운 분에게 기증합니다.(4) 각 가정마다 낙태반대홍보 후원금용 저금통을 비치하여 동전을 모읍니다.(5) 불임과 위기임신, 낙태에 대해서 개인상담을 교인들이 합니다.(6) 낙태반대운동연합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이나 상담실을 통해서 글로, 직접면담으로 낙태하지 않고 생명을 지키도록 돕습니다.(7) 일시보호가 필요한 미혼모들에게 쉼터를 제공합니다.(8) 미혼모 복지시설인 애란원을 돕습니다: 정기적인 방문, 일시 탁아, 혼전순결교육, 낙태예방교육, 복음전도, 성경공부 등.(9) 육아모들의 자활을 위해서 지속적인 후원, 상담, 탁아봉사를 합니다.(10) 교인이 헌납한 집을 공동육아방으로 사용하여 육아모들이 1년간 지낼 수 있는 중간시설로 사용합니다.(11) 교인들 가운데 헌신한 사람들이 낙태반대운동연합 실행위원으로, 지역 학교 홍보강사로, 상담자로 활동합니다.(12) 형법이나 모자보건법이나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을 비윤리적으로 개정하려는 시도에 적극적으로 대응합니다.(13) 국내 입양기관의 홍보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14) 낙태반대운동연합의 가맹단체로,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의 후원단체로 연합사업에 참여하고 지원합니다.(15) 신문에 생명윤리에 관한 기고문을 게재하고, TV에 출연하여 기독교의 가치관을 변증합니다.   생명윤리 교육과 실행은 한 두 번쯤 해보는 행사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교회의 일상(日常)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교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리를 살아내는 예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전역에 5만 여개의 지역교회가 있습니다. 각 교회마다 지역사회와 연관하여 두 세 가지씩의 선교활동을 한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변모될까를 연상해 봅니다. 그 선교활동들은,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고 비교대상 없이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기독교 생명윤리에 기초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이전에 각 교회 내에서 생명교육이 먼저 된다면 최소한 수백만 명은 생명을 경시하거나 환경을 파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교회를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은 기독교의 실체를 보지 못하다가 이제는 눈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면, 그들의 신앙여부를 떠나서 세상은 좋은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따라 세속화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따라 거룩해지는 역사의 변화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작성자 : 이승구 2015-06-11 13:12:30
생명 윤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그리스도인은 인간 복제 문제와 인간 배아 복제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2005. 11. 24.)

 

 

생명 윤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그리스도인은 인간 복제 문제와

인간 배아 복제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승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발표일 : 2005. 11. 24.  
 
 
 
 

  

인간 배아 복제에 근거한 인간 배아 줄기 세포 추출과 이를 이용하여 난치병 환자들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좀더 강하게 보여 주는 황우석 교수 팀의 연구에 대한 논의로 온 세상과 한국이 떠들썩하다. 특히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정치 지도자들로부터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이런 Bio-technology를 발전시키는 것이 (이기적으로만 보더라도) 우리가 살길이고, (대승적 차원에서 보면) 인류에게 공헌할 수 있는 길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는 듯하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또한 가족 가운데서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을 두고 계신 분들은 그 어떤 수단이라도 다 강구해서 빨리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면서, 아직은 전혀 임상적 실험 단계에 와 있지도 않고 그렇게 되려면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황 박사님 팀의 연구에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상황 앞에서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이런 긴급한 문제 앞에서는 기독교적 관점 같은 것은 방기되어도 좋은 것일까?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다 환영하면 모든 이들이 나아가는 그 방향으로 우리도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이전에 아주 시급한 상황 가운데서는 기독교적 원리도 전혀 돌보지 않으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나서는 사람들과 같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근원부터 살피지 않을 수 없다.


1. 인간 복제란 무엇인가?

요즈음 인간 복제 문제가 논의되면서 항간에는 인간 복제라는 것은 인간 개체 복제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번져 가고 있다. 얼마 전 황우석 교수와 정진석 천주교 대주교와의 만남에서도 그런 식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고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다. 황 교수께서는 자신의 팀이 하는 연구는 자연 상태에서 수정된 수정란을 가지고 실험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것은 인간 생명에 대한 직접적 침해가 아니며, 체세포 복제 방법을 사용한 배아 복제는 윤리적으로 별 문제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며, 천주교 주교도 그랬다면 문제가 적다고 말했다는 식의 보도가 나와서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인간 배아 복제는 정상적인 수정란으로부터 유래한 인간 배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황우석 박사의 설명도 그렇지만, 그렇다면 문제가 적다는 천주교 지도자의 반응이 특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이 보도가 관련된 분들의 말을 얼마나 정확히 제시하고 있는 것인지는 다시 확인해야 하지만, 적어도 이 보도와 같다면 천주교회 주교를 신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보좌하는 분들의 보좌에 대해 큰 의문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인간의 생명이 수정되는 순간부터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성경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사실 “인간 복제”(human cloning)라는 말은 인간 개체 복제만이 아니라, 인간 배아 복제를 포함하여 인간에 대한 모든 복제 작업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복제 배아 연구를 통해 배아 줄기세포를 추출하여 인간의 난치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분들은 그것이 한 인간 생명을 빼앗아 다른 인간 생명 구조에 이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정상적 수정란으로부터 발달한 배아와 체세포 복제 방식으로 복제된 배아의 의학적 위치가 같다는 것을 부인하는 의사들이나 생명 공학자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 둘의 윤리적 지위도 동등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체세포의 핵을 핵이 제거된 난자에 주입하여 전기적 작용을 일으켜 핵치환된 난자가 세포 분열을 하게 하여 복제된 배아를 얻는 것이 배아 복제이고, 이렇게 얻게 된 배아를 자궁 내에 착상시켜 자궁 내에서 자라게 하여 아이로 태어나게 하고 키우는 것을 개체 복제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실 인간 배아 복제는 인간 개체 복제의 전 단계가 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2. 대부분의 생명 공학자들도 반대하는 인간 개체 복제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인간 개체 복제를 공식적으로 시도하려는 사람들은 우주인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주장하며 “인간 복제는 인류 영생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는 사이비 종교 단체인 라엘리안과 이탈리아의 세베리노 안티노리(Severino Antinori) 박사 같은 사람들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시도는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라엘리안들은 2003년도에 3명의 복제 아기가 탄생했다고 주장하였으나 그 사실성이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다. 또한 안티노리 박사는 2002년에 어떤 여인이 복제된 배아의 착상을 받아 복제 아기를 자궁 내에서 키우고 있어서 2002년 11월경에 인류 최초의 복제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2003년이 되기까지 새로운 소식이 아직 없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 안티노리 박사가 수행한 그 개체 복제는 실패한 것 같다. 또한 AFP통신에 따르면 안티노리 박사는 2002년 12월 중순에 세르비아 주간지 닌(Nin)과의 회견에서 2003년 1월에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복제 아기가 출생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우리는 유전학 분야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생각하며, 세르비아는 (복제 인간 출생지로) 역사에 남게될 3개국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이를 확인하는 보고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지금으로서는 라엘리안 만이 인간 개체 복제에 대한 (전혀 확인되지 않은) 성공을 주장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생명 공학자들은 공식적으로는 인간 개체 복제에 대해서는 반대하거나 별 관심을 드러내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세계에서 몇째 안 가는 생명 복제 기술을 가진 우리나라에서도 배아 복제를 희망하거나 시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간 개체 복제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서울대학교 수의과의 황우석 교수, 마리아 생명 공학 연구소의 박세필 박사, 차병원 세포유전자치료연구소의 정형민 소장 같은 분들이 그 대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개체 복제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정상적 과학자들과의 공동의 반대 노력을 기대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이 반대하는 궁극적 이유와 동기는 달라도 그리스도인과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인간 개체 복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같은 반대 논의와 노력을 할 수 있고 또 해야할 것이다.
    우리가 공유하는 공동의 반대 근거는 인간의 존엄성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다르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은 존엄하기에 인간 개체를 복제하는 일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을 보충하는 하위 논거들로서는 이와 연관된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열거할 수 있다:1)


    (1) 현존하는 기술로서는 무수한 배아와 복제아가 실험 도중에 죽거나 사산하게 될 위험성이 있으며, 비록 복제된 존재가 태어난다고 해도 복제된 동물들처럼 거대 체중의 위험, 기형아가 될 위험, 조로의 위험 등에 처할 수 있고, 복제 아기를 낳는 여성은 융모막암에 걸릴 위험이 높다는 생물학적 기술적 문제점들. 또한 그 도중에 나타나게 될 무수한 기형적 인간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도 이런 의학 기술적 문제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2) 복제되어 태어난 이의 지위에 대한 법률적인 문제, 즉, 복제된 이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 여겨져야 하는가? 즉, 그의 부모는 누구로 여겨져야 하는가?, 복제된 개체 인간과 원본 인간과의 정확한 관계는 무엇인가(자녀인가, 시차를 두고 태어난 쌍둥이인가?), 복제된 인간은 과연 어떤 법률상의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 복제된 개체 인간도 상속을 받을 수 있는가, 그럴 경우 그는 어떤 지위에서 상속을 받는 것인가? 등등의 현존하는 법률 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복잡한 법률적인 문제.

    (3) 개체 복제된 이와 그 원형 인간의 관계와 심리적 문제, 복제된 인간이 겪을 심리적 정체성의 문제, 원본 인간이 가지게 될 정체성의 위기와 관련된 심리적 문제.

    (4) 복제된 이의 성장 과정에서 집중될 미디어의 관심으로 말미암은 성장에 미치는 사회 심리적 문제.

    (5) 복제아를 얻기 위해 핵이나 난자, 자궁을 공여하는 이들이나 이런 기술을 제공하는 이들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그 일에 관여하게 될 위험성과 이런 일이 상업적으로 오용될 문제점. 이는 인간 생명 관련된 문제가 상업화하는 문제의 측면이 된다.
    이 외에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무수한 문제를 생각하면서 현존하는 대부분의 과학자들과 그리스도인은 인간은 존엄하기에 개체 복제를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과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의견을 같이 할 수 있다.


3. 인간 개체 복제에 반대하는 기독교적 논거의 기준

그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사유의 근거가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된 존엄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있도록 하는 것 외의 다른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그리스도인은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 개체 복제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인 고귀한 인간을 어떻게 그 끔찍한 기술적 문제에 노출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가장 큰 관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온전한 인간,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그런 취급을 받도록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복제되는 개체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이다. 복제되는 개체는 생물학적으로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므로 그 개체의 하나님 앞에서의 권리와 인격성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런 시도를 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현존하는 인간인 우리 중심으로 사고하기 시작하면 상당히 많은 이들이 개체 복제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그런 존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는 인간 개체 복제를 반대하는 점에서는 옳은 것이지만, 성경 전체와 기독교 사상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 질문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존귀하고 고귀하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자연스러운 방법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사람이 존재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인간 개체 복제에 반대해야 한다. 그래야만 후에 일부 이상한 과학자들의 시도로 복제된 인간이 생기게 되었을 때,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에 근거해서 그들에 대한 모든 보호 장치와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에 후에 이상한 이들이 기형적인 사람을 양산해 내게 되어서 그들을 다 죽여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게 될 때, 진정 그들을 위해 서 있을 수 있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정상적인 과학자들과 함께 인간 개체 복제에 반대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러나 후에 개체 복제된 이들의 인권 문제가 제기될 때에 진정 그들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임인 것이다.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을 때는 그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으로서는 비정상적인 사이비 종교인들과 자기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몰지각한 이들과 비정상적인 과학자들에 반해서 모든 정상적인 과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인간 개체 복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그런 공동의 노력은 귀한 것이다.


4. 일부 과학자들과 이 세상이 요구하는 인간 배아 복제

그러나 바로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과학자들과 그리스도인인 과학자들을 나누는 심각한 문제가 있음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과학자들은 개체 복제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발하면서도, 그러나 현존하는 인간들의 복지를 위해서 배아 복제를 하여 배아 줄기 세포를 추출해서 난치병 치료 등에 쓰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 배아 복제는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현직 정부 관계자들의 기본적인 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은 기본적으로 현존하는 인간이 아닌 배아, 특히 의학계에서 일반화되고 있는 일종의 신화라고 할 수 있는 수정 이후 14일되기 전까지의 배아는 아직 온전한 인간 생명으로 보지 않으려고 하는 사고가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까지의 인간 배아를 가지고 실험 할 수 있음은 물론 그런 인간 배아를 복제해서 인간 배아 줄기 세포를 얻어 현존하는 인간의 복지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황우석 교수님 등은 본인들이 배아 복제로부터 인간 복제로 가지도 않을 것이고, 또한 그것이 현재 기술로서는 어렵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 배아 복제 연구로부터 같은 경사 길의 조금 밑에 있는 지점일 뿐임을 생명 공학에 관심을 지닌 분들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므로 인간 복제를 하지 않을 것이니 배아 복제만 하게 해 달라는 것은 철저한 브레이크 장치를 마련할 것이니 일단 경사 길로 갈 수는 있게 해달라는 요청이 되는 것이다.


5. 인간 배아 복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들의 그리스도인답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일이 나타나야 한다. 사실 인간 개체 복제 문제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인은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과학자들과 함께 개체 복제에 반대하면서도 그 근본적 반대 근거가 기독교적인 것이었듯이, 이 땅의 과학자들이 강하게 주장하는 인간 배아 복제에 대해서 인간의 생명이 과연 무엇이며 언제부터 시작되는 지를 명확히 이해하는 기독교적인 사유를 이 문제에 적용하는 일을 해야만 한다.


5-1. 인간 배아 줄기 세포 연구에 대한 기독교적 반대의 근본적 이유

우리는 왜 인간 배아 줄기 세포 연구에는 반대하면서 인간 성체 줄기 세포 연구에는 찬성하는가?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가장 먼저 우리는 인간 배아 줄기세포 연구는 결국 인간 배아의 파괴와 살해를 함의하고 있다는 점을, 그리고 성체 줄기 세포 연구는 이런 문제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인간의 생명의 시작을 어디로부터 보는가 하는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 관점에 의하면, 전체로서의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는 그 순간부터였다. 우리는 정확히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성경이 아담이 언제 창조되었다고 말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이 창조되는 그 순간부터가 전체로서의 인간 생명의 시작이었다. 아담의 경우에는 그 시점이 자신의 개인적 생명의 시작시점이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으신 존재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그 순간부터 사람은 살아 움직이는 존재("네페쉬 하야", living soul)가 되었고, 그것이 아담의 개인적 시작 시점이고, 인류 전체의 시작 시점이기도 하다. 처음 여자의 경우에는 아담으로부터 산 존재로 그 여인을 만드신 그 시점이 그 개인의 생명의 시점이었다. 그 후에는 개개인이 그 어머니 안에서 수정되는 그 순간부터가 개개인의 생명의 시작이다.
    이를 가장 분명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신 예를 생각해 보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여러 번 말해 왔다. 성자께서는 신성으로서는 영원부터 존재하신다. 그런데 그 영원하신 성자께서 우리의 죄의 구속과 하나님 나라의 수립을 위해 인성을 취하시어 성육신 하신 때, 과연 언제 성자께서 인성을 취하신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출생하실 때? 아니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태동을 느끼기 시작하는 그 시점에? 아니면 예수님이 될 그 배아에 소위 원시선이 생기기 시작하는 수정후 14일 정도 되었을 때? 그렇게 연속적인 발생의 과정의 어느 시점을 잘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직감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분명한 대답은 마리아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인간 남자의 관여 없이 수태하게 되었을 때가 성자께서 인성을 취하신 시점이라고 해야 한다. 바로 마리아의 몸 속에 성령님의 독특한 역사로 말미암아 수정란이 있게 되었을 때인 것이다. 성경 기록 당시 사람들은 몰랐으나 오늘날 우리가 알게 된 산부인과적인 지식을 동원해서 설명한다면, 그 수정란은 일정한 시점에 마리아의 자궁에 착상하게 되었을 것이고(7일 정도 후), 그래서 호르몬 작용을 일으켜 마리아의 월경이 중지되게 하였을 것이고(10일 경), 소위 원시선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것이며(14일경), 심장이 형성되고 눈이 발달하기 시작했을 것이고(약 18일 정도), 심장이 뛰기 시작했을 것이며(약 24일 정도), 독자적인 혈관계에 예수님의 피가 흐르기 시작했을 것이다(약 30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여기서 설명한 예수님의 인성의 발달과 같은 발달 과정을 지니게 된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수태되었으나,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님의 의해 수정되게 된다는 점은 다르지만, 우리 모두가 다 수정되는 순간부터 인간 생명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오늘날 수정되는 그 순간부터 그 수정란이 어머니 자궁에 착상하기까지는 7일 정도의 시간이 걸리고, 상당히 많은 수정란들은 자동적으로 유산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수정란 가운데서 정상적으로 출생에 이르게 되는 것은 25% 정도라는 보고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고, 우리로서는 수정되는 순간부터 연속적으로 발전하는 그 과정 전체를 인간 생명의 발달 과정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수정되는 순간부터가 인간 생명의 시작이다. 수정란은 앞으로 다른 생명체로 될 것이 아닌 인간으로 발달해 갈 것이고, 그것은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복제는 그것이 인간 배아 복제이든지, 소위 말하는 치료적 복제이든지 모두 인간 복제를 존재케 하고 그것을 죽이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복제는 "재생산적"이다. 인간 배아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수정의 결과로 형성된 배아이든지, 체세포 복제의 방법으로 형성된 배아이든지 모두가 인간 생명이라고 여기는 기독교적 신념 때문에 우리는 인간 배아 줄기 세포 연구에 강하게 반대하고 이제부터는 모두 성체 줄기 세포 연구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 배아에서 인간 배아 줄기 세포를 추출해 내는 것은 한 생명을 죽이고서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려는 매우 이기적이며 비윤리적인 행위라고 판단되기에 기독교인들은 인간 배아 줄기 세포 연구에 반대한다.


5-2. 인간 배아 줄기 세포 연구에 대한 기독교적 반대의 부차적인 현실적 이유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난치병 환자들이 많은 이 상황 가운데서 과학의 진보를 가로막기만하고, 모든 일에 반대만 하는 것인가?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든 줄기 세포 연구에 반대하는 반지성주의자인가? 강하게 말하건대, 그렇지 않다.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 전문가들이 이미 여러 번 말하였지만, 기독교회는 결코 그런 입장을 가져 본 일이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윤리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줄기 세포를 이용하여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많이 진전된 방식이 있고, 기독교회는 그런 연구를 적극 장려해 왔다. 그것이 바로 성체줄기세포 연구이다. 이 성체 줄기 세포 연구를 통해 배아 줄기 세포 연구보다 더 빠른 시일에, 보다 많은 분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이다.
    성체 줄기 세포 연구가 현실적으로 배아 줄기 세포 연구보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훨씬 더 유용하다. 이는 위에서 말한 우리의 근본적 주장을 보충하는 현실적인 유익점들로서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2)
    (1) 성체 줄기 세포를 사용하여 인간의 병을 치료할 때는 면역 거부 반응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 대부분의 연구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그런데 배아 줄기 세포는 동물 실험에 경우에는 2004년에도 면역 거부 반응이 있지 않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인간 배아 복제와 관련해서는 최근인 2005년 5월에야 황우석 교수 등에 의한 실험에서 인간에 대한 면역 거부 반응을 분명히 하는 쪽으로 연구를 하여가고 있다. 그전까지는 이론적으로는 배아 줄기 세포를 사용하면 면역 거부 반응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실제로 배아 줄기 세포를 배양하는 배양액에 동물 세포와 동물 세포질이 사용 되었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2003년 11월에만 해도 죤스 홉킨스 대학교(Johns Hopkins University)에 모인 위원들이 그 때까지 미국에서 확보된 인간 배아 줄기 세포들은 모두 쥐의 세포와 접촉하면서 배양된 것이므로 쥐의 바이러스에 인간을 감염시킬 위험이 있다고 결론 내렸었다.3) 이런 상황은 황 교수 등에 의한 2005년 5월 실험 이전까지 계속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황 교수 등의 최근 연구가 새로운 측면을 지녔다고 언급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2) 성체 줄기 세포는 손상된 세포가 있는 곳에서 그 세포에로의 분화와 재생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에 비해서 배아 줄기 세포를 사용할 때 분화 만능성을 지닌 배아 줄기 세포를 우리가 원하는 세포로 분화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확실한 방법이 아직 확보되어 있지 않다. 강경선 교수는 배아 줄기 세포를 사용한 방법의 문제점을 언급하면서 “필요한 분분의 장기나 조직으로 생겨나게 하는 통제할 기술이 아직 없으며(뇌의 신경세포에 문제가 생겨 줄기세포를 이식했는데 거기서 손이나 눈 등 인체의 다른 부분이 생겨날 수 있다), 또 종양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문제를 극복하여 인간 배아 줄기 세포 연구를 인간의 질병 치료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앞으로도 2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2001년도에 예측하기도 하였었다.5) 그러나 성체 줄기 세포는 이미 원하는 세포로 분화시켜 만족할만한 치유를 내고 있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서울 대학교 의과대학의 황상익 선생의 말을 인용하면 좋을 것이다: “배아줄기세포는 미분화세포의 지나친 증식으로 암 발생 문제가 큰 데 반해 성체줄기세포는 그러한 문제점이 거의 없다. 즉, 안전성에서 뛰어나다. 또한 배아줄기세포는 원하는 세포 이외에 다른 세포로 잘못 분화할 가능성이 많지만, 성체줄기세포는 조직 특이적 분화를 하므로 효율 면에서도 훨씬 앞선다”.6)
    그런데 그런 점에서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는 성체 줄기 세포 연구는 그 분화 전능성의 정도에서나 분화 능력에서나 배양 능력에 있어서 배아 줄기 세포 연구보다 효율이 떨어진다는 논의가 상당히 많이 있어 왔다. 그러나 (3) 그 분화 만능성에서나 분화 능력, 그리고 배양 능력에 있어서 성체 줄기 세포는 배아 줄기 세포 보다 못하지 않다는 연구 성과들이 점증하여 보고되고 있다. 특히 2002년 이후에는 수많은 성체 줄기 세포 연구와 그 임상 실험이 그 이전 성체 줄기 세포에 대해서 배아 줄기 세포보다 못하다고 보던 견해를 일소하고 있음은 생명 공학계와 생명 공학을 위한 작업을 하는 이들이 상당히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수정 때부터는 인간 생명으로 보는 것을 상당히 비판하는 종교적 관용을 위한 홈페이지에서도 2002년 이후 성체 줄기 세포의 연구의 성과가 대단하여 이전과 같이 배아 줄기 세포 연구보다 그 잠재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진술하고 있을 정도이다.7)
    더구나 (4) 실제로 병을 치료하는 효능성에 있어서는 성체 줄기 세포를 사용한 치료의 많은 성공 사례들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성체 줄기 세포의 연구 결과가 배아 줄기 세포 연구보다 우월하다고 이전에 말했던 바를 더 명확히 확인시켜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성체 줄기 세포 연구의 우위성을 언급한 예들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캐나다의 <온타리오의 생명을 위한 연대> (Alliance for Life Ontario)의 제키 제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체 줄기 세포 연구는 적법하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대안적 연구를 제공해 준다. 성체 줄기 세포 연구는 이미 사람들의 치료적 유익을 위해 이미 많은 경우에 성공적으로 사용되어 왔다.”8) 또한 2001년도 생명을 위한 캐나다 의사들의 모임은 2001년에 이미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과학적 문헌들은 성체 줄기 세포는 배아 줄기 세포를 가지고 희망만 하고 있을 뿐인 목표들을 이미 이루었으며, 따라서 인간 배아를 파괴하는 것은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다.”9)


6. 마치는 말

다시 말하지만, 기독교인은 무조건 과학 기술의 진보에 반대하는 이들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생명 공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되 그 현장에서 윤리적 판단 때문에 연구 분야를 제한하고 가는 책임 있는 생명 공학자들이 있고, 그분들은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 과학자로서 자신들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진전시키는 일을 하고 계셔 왔기에 일반 교양인들인 우리는 이런 의식을 가지고 진정한 여론의 형성자들과 생명 지킴이 역할에 힘쓰면서 전문가들의 이런 윤리적 판단에 감사와 존경과 지지를 보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인간 복제의 문제가 제기될 때 우리는 인간 개체 복제에 강하게 반대하여 그것이 이 사회적으로 바르게 이해되고 시행되도록 해야 하지만, 또한 그저 인간 개체 복제에 대한 일반적 반대에 파묻혀서 수정되는 때부터, 즉 46의 염색체로 존재하게 되는 때부터(따라서 복제의 경우에는 핵치환이 되는 때부터) 인간적 생명이 시작한다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잊거나 팔아먹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때야말로 이런 문제에 대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보다 깊은 성경적이고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판단과 사유와 활동이 요구되는 시기라고 여겨진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인간 배아 복제 연구가 중지되어야 하며, 배아를 파괴하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에 훨씬 윤리적이고, 실제로 지금도 많은 이들을 치료하고 있고, 휠씬 빨리 인간의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효율적인 성체 줄기 세포 연구에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보다 많은 나라에서 성체 줄기 세포를 연구하는 데 많은 연구비를 들이고, 이런 연구를 하시는 분들을 여러 면에서 지원해야 한다. 더 우수하고 좋은 방법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의학 기술적으로로 더 뒤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중요시하고 그것에 모든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도록 하는 일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혹시 이 세상 사람들이야 그렇게 나아간다고 해도,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다른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나라 학자들 가운데서 이미 성체 줄기세포 연구에 많은 진전을 보이고 있는 생명 과학자들의 연구를 지지하고, 위하여 기도하며 지원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생각하고 싶은 분들에게 이승구, <인간 복제, 그 위험한 도전> (서울: 예영, 2003)과 박상은 엮음, <인간 배아 복제, 과학의 승리인가?> (서울: 한국 누가회 출판부, 2004)을 권하여 드린다.
 
 

1)
이하의 문제점들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이승구, "인간 복제, 그 위험한 도전" (서울: 예영, 2003)의 해당 부분을 참조하시오.
 
2)
이하의 논의들은 이승구, “인간 줄기 세포 연구의 현황과 이에 대한 기독교적 반응,” "통합 연구" (근간)의 정보를 활용한 것이므로 자세한 점에 대해서는 이 논문을 참조하라.
 
3)
http://seattletimes.nwsource.com/html/nationworld/2001788115_stemcells11.html.
 
4)
제대혈 권위자가 보는 인간배아줄기세포-강경선 박사 인터뷰 , available at:
http://club.cyworld.nate.com/club/main/club_main.asp?club_id=50289202#.
 
5)
David Hamilton and Antonio Regaldo, “Biotech Industry - Unfettered, but Possibly Unfulfilled,” Wall Street Journal, August 13, 2001, p. B1, cited in Bohlin(2001).
 
6)
황상익,  “인간 배아 복제의 문제점들  대안은 있다”,  available at:
http://club.cyworld.nate.com/club/main/club_main.asp?club_id=50289202#. 강조점을 필자가 덧 붙인 것임.
 
7)
http://www.religioustolerence.org/res-stem12.htm. 그 가운데 한 제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을 보라: "Adult stem cells may offer greater potential than originally believed."
 
8)
Jakki Jeffs, "An alternative exists to embryonic stem cell research," Toronto Star, 2001-JUL-6: "Adult stem cell research provides a legitimate, moral and ethical alternative area of research. Adult stem cell research has already been used successfully for therapeutic benefit in human beings..."
 
9)
"Stem Cell Research," Canadian Physicians for Life, at:
http://www.phisiciansforlife.ca: "The scientific literature overwhelmingly demonstrates that adult stem cells are already fulfilling the goals only hoped for with embryonic stem cells, making the destruction of human embryos unjustifiable."

12
ㆍ검색어  
이용약관       개인정보취급방침       오시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