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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윤리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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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카테고리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작성자 : 길원평 2015-08-21 15:54:10
배아는 존엄한 인간인가 잠재적 인간인가?(2005)

배아는 존엄한 인간인가 잠재적 인간인가?

길원평 교수(부산대)

  배아복제에 대한 윤리적 논쟁의 핵심은 배아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배아는 주위환경과 물질대사를 하고 성장하며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는 생명의 특징을 갖고, 인간의 온전한 DNA를 소유하고, 성인으로 성장가능하기에, 배아가 인간생명체임에 분명하다. 배아가 인간생명체라는 사실은 모두 인정하면서도, 배아에 대한 두 관점이 있다. 즉, 수정란 때부터 존엄한 인간이라는 관점과 잠재적 인간에서 존엄한 인간으로 바뀐다는 관점이 있다.

  배아복제와 배아실험을 하려는 자들은 배아를 실험 가능한 잠재적 인간으로 보길 원하며, 초기인간생명체와 성인의 차이점을 논증의 근거로 사용한다. 즉, 초기인간생명체가 갖지 못한 성인의 특성을 사용하거나, 성인이 갖지 못한 초기인간생명체의 특성을 사용한다. 초기인간생명체가 갖지 못하는 성인의 특성으로서, 직립보행, 감정, 느낌, 생각, 인간관계, 발달된 장기소유 등을 들 수 있다. 예로서 다음과 같은 논리를 살펴보자.
작성자 : 박충구 2015-08-19 15:44:38
황우석의 복제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윤리학적 비판(2005. 6. 9.)


황우석의 복제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윤리학적 비판


                                             박충구 (감신대, 윤리학 교수)


1. 들어가는 말

 내가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자 여기저기서 “박교수가 보수적인 신학자가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황교수의 연구결과에 대한 나의 비판이 아마도 과학적인 새로운 발견이 있을 때마다 반대해 오던 보수적 기독교의 견해와 흡사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기독교 사회 윤리학자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과학적 업적이 인류사회의 기본가치를 저해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사실판단과 가치판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기독교 윤리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에 대한 적합한 이해와 기독교 윤리학적 규범, 즉 해악금지를 넘어서 호혜적 행위를 중시하는 원칙의 적용의 결과이다.
 종교와 과학간의 대립과 갈등은 그 역사적으로 뿌리가 매우 깊다. 나는 지난 날 종교가 과학에 대하여 가졌던 불편한 관계들을 살펴보면서 두 가지 형태의 반대유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무식한 판단에 근거한 반대(ignorant objection)라면 다른 하나는 사실 적합한(factually informed judgment)이해에 근거한 판단이다. 무식한 반대란 사실판단을 하지 않고 가치판단을 내리는 경우를 말한다. 지난날 이런 무식한 반대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종교가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권력과 권위의 오용이 뒷받침 해주었기 때문이다. 종교가 진리를 향한 개방성을 폐쇄하고 일종의 정치적 힘과 권위를 행사하는 집단이 되어 종교의 비과학적인 가르침에 대하여 이견과 비판을 제시했던 과학자들을 무고히 억압한 것이다. 종교의 이러한 무식한 반대는 종교의 정치와 보수화와 맞물려 다양한 편견들을 지속시켜 왔다.
 그러나 1925년 소위 원숭이 재판사건1) 이후, 종교 지도자들의 사실판단 없는 가치판단이 벌리는 무고한 희생양 잡기는 더 이상 오늘의 세계를 설득할 수 있다는 점이 자명해 졌다. 따라서 오늘날 과학적 연구의 결과에 대한 지지나 반대는 단순한 교리적 혹은 교권적 차원에서 더 이상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런 까닭에 개신교 신학의 영역에서는 간학문적인 기독교 사회윤리학이라는 영역이 새롭게 설치되어 사실판단에 근거한 가치판단을 도모함으로써 종교 공동체의 사회적 진술이 정보를 확인한 비판이나 동의(informed criticism or consent)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판단은 사실적합성(Sachgemaessheit)위에서 이루어 져야한다.   
 독일 본(Bonn) 대학교 윤리학 교수였던 마틴 호네커(Martin Honecker) 교수는 이 시대의 특징을 일러 말하기를 “모든 것이 얽혀 함께 돌아가는 사회2)라고 특징지었다. 종교와 정치, 과학이나 문학, 모든 학문의 제 영역들이 독립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상호 연관되어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푸코(Mischel Faucoult)의 권력담론이나 사이드(Edward Said)의 문학 비평적인 오리엔탈리즘 담론과 후기식민담론에서 이미 자명하게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영역이나 과학의 영역은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위한 종합적인 이해지평에서의 부단한 대화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생명의료 윤리학의 영역은 필연적으로 과학과 종교에 대한 사실 적합한 상호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본 논문은 지난 2005년 5월 발표된 황우석 교수의 체세포전치복제배아줄기세포연구(nuclear transfer cloned embryonic stem cell research)에 대한 사실판단을 위한 윤리학적인 분석과 가치판단을 위한 근거를 밝히는 데 있다. 이를 위하여 종교와 과학간의 바람직한 관계지평을 찾아 이 논문이 응용하는 시각을 형성하고, 이어 현대 생명공학적 연구에서 황교수의 연구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살펴본 후, 그의 연구에 대한 다양한 찬반의 관점들을 분석함으로써,  이 연구가 간과하고 있는 생명윤리적인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논구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나는 황 박사의 연구가 “놀라운 생명공학적 개가“가 아니라 ”비정한 과학주의의 개가”임을 밝힐 것이다. 윤리 없는 과학주의의 오류를 피하기 위하여 최근 윤리적 판단을 중시하는 과학자들의 연구동향과 과제를 언급함으로써 황 박사의 연구방법이 현재, 유일한 대안이 아님을 밝히고자 한다.



2. 종교와 과학의 관계와 ELSI의 중요성

 돌이켜 보건대 과학과 종교 간의 대화는 지난 날 거의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종교 권력과 비이성적인 신앙의 이름으로 과학적 진실을 부정한 어리석은 종교의 역사는 사실상 근대세기에 들어서면서 종교에 대한 일반의 신뢰를 스스로 격하시켜 왔다. 종교의 무지막지한 권위주의는 무수한 과학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아왔다. 특히 교권적 종교지도자들은  16세기의 천문학적 인식지평의 확대를 주장했던  부르노(Giordano Bruno)를 화형에 처하기도 했고3)  17세기에는 미시생물학의 출발에 대하여 분노하였으며, 18세기에는 지질학과 고고학적 발견과 증거들을 부인하려 하였다. 19세기에는 다윈의 생물학과 그 여파에 대하여 성서문자주의에 근거한 반대를 제기해 왔으며, 이어 20세기에는 유전공학의 대두에 이어 21세기에서는 생명의 기원과 발생에 관한 연구의 가능성이라는 장(場)에서 종교와 과학은 또다시 조우하고 있다.
 수세기에 걸친 이러한 종교와 과학 간의 분쟁과 대화지평에 대하여 이안 바버(Ian Barbour)는 1989-91년에 행한 기포드(Gifford lectures)강연에서 신학이 과학을 바라보는 세 가지4)  시각으로 축약한 바 있다. 첫째, 신학이 과학을 보다 나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능력을 갖춘 해방자로 보려는 견해이다. 보다 나은 삶의 조건을 위한 선택의 기회를 불러오고, 의사소통을 향상해 줄 뿐 아니라 보다 나은 미래를 낙관적으로 예측하게 해주는 인간의 해방자로 보는 견해이다. 자연의 고통과 노동과 소외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주는 과학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이 견해의 약점은 과학이 인간을 해방시키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역작용으로 환경오염과 인간존재에 대한 위협을 가중하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를 불러올 뿐 아니라 점점 기술자들에게 의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을 간과한다.
 두 번째, 과학에 대한 또 다른 신학적 관점은 위와는 정 반대로 과학을 하나의 위협으로 간주하는 입장이다. 고학기술은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여 대중조작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삶의 인격성을 약화시키고, 비인격성을 불러오는 조작(manipulation)을 가능하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과학기술은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나 오히려 노동자들을 소외시키고 과학의 힘을 이용한 인간성 파괴와 착취가 일어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쟈크 엘룰(Jaque Ellul)도 기술과학은 일종의 자동성과 자기 증식적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어느 시점을 지나면 인간이 통제 조정할 수 없는 사회를 이루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 바5)  있다. 일단 한번 발을 딛으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과학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이다. 이 관점은 기술과학이 인간에게 조작적 권력을 부여하기 때문에 제국주의적 지배와 탐닉에 빠지게 할 뿐 아니라 인간심성의 종교적 근원까지 박탈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우려한다. 이러한 비관적 이해에 대하여 제기되는 비판은 인간의 자기 교정적 능력을 인정할 때 기술과학의 향방을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과학을 인간다움의 가치를 위한 봉사자로 삼을 수도 있다는 관점을 형성한다.
 신학적인 입장에서 과학을 바라보는 세 번째 관점은 기술과학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권력의 도구라는 이해이다. 이 견해는 정치권력이 과학을 통제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점과 기술과학의 방향을 재조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담고 있다. 여기서 주장되는 바는 인간의 해방과 생태학적 균형을 지향한 과학기술의 응용가능성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 관점은 기술과학의 비윤리성과 비종교적 속성을 극복하고 이를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면 구태여 적대적인 입장에 서지 않아도 된다는 견해를 보인다. 그러나 최초의 환경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에 참여했던 로져 신(Roger L. Shinn)은 기술과학에 미치는 정치 경제적 구조가 그리 쉽게 조정 가능하지 않음을 경고 하였다.6)
 이는 전대미문의 비극이었던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의 경험이 정치 경제적 권력관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인간의 도덕적 능력을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며, 오늘의 환경세계의 파괴 현실을 직면하면서도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는 인류사회의 속성을 지적하는 견해이다.
 이 세 가지 관점은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적, 비관적, 그리고 중립적 견해를 보여주고 있지만, 나름대로 논리적 정당성과 문제점을 동시에 안고 있다고 생각된다. 내가 전폭적으로 어느 하나의 견해를 지지할 수 없는 것은 세 가지 관점이 일정부분 타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버는 기포드 강연이후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과학이해의 세 가지 관점을 다시 수정하여 1998년  종교와 과학간의 네가지 상관관계 유형으로 발전시켰다.7)  그것은 과학주의적 유물론과 성서적 문자주의의 대립이 불러오는 갈등유형(conflict model), 방법론적 대립을 주장하며 언어와 담론의 상이성을 주장하는 독립유형(independent model), 방법론적 병행성과 자연 중심적 영성을 매개로한 대화유형(dialogue model), 그리고 자연신학이나 조직적 종합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통합적 유형(integration model)이다.
 구체적인 사례로서 갈등유형을 유발하는 관계는 한 편에는 근본주의적 신학이 대표적인 것이라면, 과학주의적 입장에서는 아마도 유전자 환원론 혹은 결정론을 주장한 리챠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입장8)이 될 것이다. 그리고 독립유형은 각기 연역적인 하나님 이해에서 출발하는 신정통주의 신학과 귀납적인 증명을 통하여 주장되는 진화론은 일정부분 독립적이며 상이한 견해를 보여주는 경우이다. 대화유형은 주로 과학자인 동시에 신학자로서 양자간의 공통분모를 찾으려는 입장이라 할 것인데 여기에는 현대의 많은 과학신학자들 - 폴킹혼(John Polkinghorne), 러쎌(R. J. Russel), 피콕(A. Peakocke), 호트(John Haught) 피터스9) 이들은 대화를 넘어서 통합적인 입장을 지향한다.
 이런 관점들을 종합한다면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대한 논의는 적어도 어느 한 편의 가치판단을 우선시하는 갈등유형이나, 영역분리론을 주장하는 독립유형의 입장을 벗어나 대화와 통합의 입장에서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생명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그 연구의 파급효과가 생명윤리의 안정성이나 생명존재들의 안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거나 파괴할 우려가 대단히 크므로 단순히 중립적인 것이라거나 실험실내의 단순한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문제영역이라 보아야 한다. 이제는 과거처럼 자연과학적인 새로운 지식의 발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생명질서에 대한 인간의 개입과 조작까지 가능해 졌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을 고려한다면 대화나 통합의 관점에서 사실 적합한 판단을 중시하며 진실에 대한 개방성과 과학적 발견과 연구가 기존의 도덕적 가치판단과 사회 및 정치 경제적 권력에 미치는 상관관계를 고려할 수 있는 합리적인 토론을 전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이런 정황에서 인류사회는 현대 생명공학이 불러올 새로운 사건들이 기존의 사회, 윤리, 법적인 가치판단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연구하는 새로운 분야를 열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는 단순한 종교와 과학의 대화나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서 인류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생명의 안정과 평화를 지키려는 과제와 직결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종교의 영역이니 간섭하지 말라“ 라든지 ”과학의 영역에 종교가 관여하지 말아 달라“는 가치중립적인 판단을 구하는 태도는 도저히 허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현실을 인식한 세계는 생명공학 연구에 버금가는 윤리, 사회, 법적 연구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급기야는 윤리, 사회, 법적 동의 없는 생명공학 연구를 위험한 과학주의의 성향에 대하여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학계만이 아니라 각국의 정부들은 생명 공학의 발전이 단순한 과학지상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생명공학의 발전의 가능성과 정당성에 대한 윤리적이며 법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문제(ELSI: Ethical, legal and social issues)들을 연구하여10) 생명공학을 조정 통제할 수 있는 예측과 예방적 윤리와 법적 장치들을 마련해야 할 필요를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3. 현대생명의료윤리와 생명공학
 과학자들 역시 연구실에서 행하는 자신들의 연구의 목적과 과정과 동기에 있어서 책임적이며 동시에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면 인문과학자들과 논의하며 실험실의 윤리와 행동원칙을 담은 연구윤리(Research ethic, 혹은 research guideline)의 설치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에 동의해 왔다. 이러한 논의는 과학자의 연구실이 윤리나 법적 가치판단의 영역 밖인 치외법권 지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과,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가 연구의 동기와 과정과 목적에 있어서 윤리적, 사회적, 법적 책임과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는 합의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현대 생명공학적 발전과 더불어 그 연구의 방향이 인간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각 나라들은 국가단위의 생명의료윤리 위원회를 구성하고 보다 심층적으로 생명공학의 발전과정과 현실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윤리적 지침과 법적 제도를 개선하기에 이르렀다.11) 
  
 생명윤리위원회의 설치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지난 1970년대부터 이어져 온 생명윤리학적 논쟁일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은 1970년대의 체외인공수정 논란, 1980년대의 인공유산 논란, 1990년대의 인공복제논란을 거쳐 2000년을 전후해서는 줄기세포연구 논란에서 현대 생명공학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허용을 요구하는 과학주의적 요구 앞에서 인류사회의 생명공학적 안정성과 윤리적 안정성을 지키기 위하여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규명함으로써 사회적, 윤리적, 법적인 통제와 조정을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특히 인간복제배아줄기세포 채취와 배양 가능성의 문을 연 1998년을 전후하여 배아줄기세포연구에 대한 윤리논쟁은 과학주의 혹은 제국주의적인 과학주의의 발호에 대한  생명권 옹호론자들의 반대와 선택권자들의 지지 양상으로 크게 나누어지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러한 논의는 사실상 이 연구가 미칠 영향을 예견하고 법적 조치를 취하지 못한 사회, 즉 사회적 합의나 법적 규제가 적절하게 주어져 있지 않는 상황에서 더욱 첨예하게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이나 노르웨이, 프랑스, 독일, 스페인 카나다, 미국내 7개 주에서는 배아줄기세포에 대한 법적 제한을 해 놓았으므로, 이러한 윤리적 논란을 불어올 체세포전치배아복제줄기세포연구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는 거의 없다. 이런 지역에서는 체세포핵전치복제배아줄기세포 연구의 전제가 되는 인간 생명 복제에 대해서 명백하게 불법화 해 두었기 때문이다.
12) 유엔도 이런 조치에 동의하여 지난 2005년 3월 8일 84: 34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인간배아복제줄기세포 연구에 대하여 금하자는 전지구적인 합의를 담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렇듯 어느 집단에서는 명료한 위법적인 행위가 우리 사회에서는 전국민의 지지와 환호를 받고 있다는 점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이런 까닭에 나는 황교수의 연구는 인간배아복제줄기세포연구에 대하여 진지한 도덕적, 법적, 윤리적인 비판적인 시각을 충분히 고려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다분히 정부정책자들의 자극과 민족주의적인 자긍심을 자극하는 여론, 그리고 황교수의 연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사실적합성이 떨어지는 판단들이 아우러져 만들어내는 기현상일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황교수의 연구에 대하여 전지구적인 반대의 여론이 있고, 특정한 나라에서는 위법적인 행위로 규정되고 있는 체세포전치복제배아줄기세포연구13) 가 과연 무엇인지 정확한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가질 수 있도록 공정한 평가와 정보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4. 체세포전치복제배아줄기세포 연구
  1953년 크릭과 왓슨(Jame D. Watson, Francis Crick)이 인간 염색체가 이중의 나선형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낸 이후 1970년대에는 과학자들이 디엔에이(DNA)의 분리와 합성 방법을 개발해 냄으로써 분자생물학의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명현상의 발생학적 연구는 인간 유전자 염기서열 분석을 완료하기에 이르렀고, 이미 약 33000개의 인간 유전자를 확인했으며, 장엄한 생명의 역사를 거치며 형성된 인간생명의 발생학적 안정성을 깨뜨릴 수 있 있는, 즉 자연적인 생명생성의 법칙외의 방법으로 인간생명을 조작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14) 
 이러한 연구의 초점은 근래 들어 근 이십여 년 간 생명공학자들이 연구해 온 동물 줄기세포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고, 마침내 1998년 죤 기어하트와 톰슨(John Gearhart,  (James Thomson)의 인간 줄기 세포 추출방법 발견 이후 그 대상을 인간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 동안 성체세포에서 얻을 수 있는 성체줄기세포연구(adult somatic stem cell research)에 대해서는 인류사회가 비판과 거부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지만, 배아를 필연적으로 파괴하는 인간배아줄기세포연구(human embryonic stem cell research)에 대해서는 기존의 인간생명이해에 근간을 둔 심각한 비판과 논쟁이 있었다. 이 비판은 배아의 도덕적 지위(moral status of embryo)를 부인하는 배아 파괴행위의 비윤리성을 결코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생명권 옹호론적 입장에서 제기되었다.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개신교 근본주의자들, 그리고 생명간의 평화와 평등을 주장하는 환경론자들로 구성된 생명권 옹호론자들은 배아의 생명권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생명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명확한 반대의 입장을 표해 왔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과학자들은 인공수정 후 잔여된 잉여배아가 필연적으로 파괴될 것이라면, 장기기증의 차원에서 비록 죄스럽지만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위한 인도적인 목적을 위하여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 있었고, 일부 과학자들은 수정 후 14일 전후하여 발생하는 원시신경중추계가 형성되기 이전은 감각이 없는 존재로서 세포덩이에 불과하니 파괴해도 된다는 입장이 있었다. 한 편은 잉여 배자의 도덕적 지위를 인정하되, 효용가치를 높이자는 도덕적 입장이라면, 다른 한 편은 잉여 배자에게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입장에서 단순한 생명공학적 실험을 위한 자원으로 보려는 과학주의자들의 입장이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황우석 교수의 입장은 후자의 입장에 가깝다.
 그리하여 기독교적 사회 윤리적 가치를 존중해 온 서구의 많은 나라들은 법으로 이러한 연구를 금하기도 하였고 정부의 감시아래 허가하거나, 아니면 정부의 지원금을 지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반생명적인 연구를 억제해 왔다.15) 
 UN에서도 이 문제가 토론되어 일단의 소극적인 조치를 취하다가 지난 2005년 3월 8일 유엔 본회의에서 체세포 핵전치 복제 방법 (somatic cell nuclear transfer cloning)을 이용한 치료용 복제(cloning for therepeutic research)를 금지하는 “인간복제에 대한 유엔 선언(Declaration on Human Cloning) 합의안이 84대 34로 통과된 것이다. 이 결의 직전 전 세계 1000여개의 생명공학회사들의 연합체(Biotechnology Industry)는 유엔이 인간체세포전치 복제를 금지하는 결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간곡한 청원16)을 냄으로써 유엔의 합의를 무산시키려 하였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이 표결에 북한과 우리나라는 반대하였다.
 우리나라는 지난 2004년 1월 29일 소위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인간복제 자체는 금하고 있지만, 11조 4항에서 체세포 핵이식을 조건부 허용하는 구정을 삼입하여 사실상 체세포 핵전치 복제 배아 실험을 허용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러한 결과는 국가생명윤리위원회 구성자체에서부터 예견된 것으로 윤리, 사회, 법적 자문기관이 아니라, 실제적인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는 사람들을 위원으로 받아들인 데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다.  한편 2004. 1월 29일 국회에서 이 법안이 통과될 시점 이전부터 황우석 교수의 체세포전치 복제 실험은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 법안이 통과된 지 2주도 채 되지 않아 체세포 전치 복제를 통한 배아줄기세포추출 성과라는 연구결과를 2004년 2월 12일 사이언스(Science)지에 발표함으로써 황교수는 국제 사회의 합의나 사회적 합의를 무시하는 과학주의적 입장을 드러내었다.



5. 줄기세포 연구방법의 다양성과 황교수의 선택

 줄기세포 연구에 현대 생명의료학자들이 깊은 관심을 표하고 있는 까닭은 줄기세포가 지니고 있는 세포의 분화 및 재생능력 때문이다. 선천선 면역결핍증이나 소아 당뇨, 사고로 인하여 손상을 입은 척추신경세포, 파킨슨씨 병을 유발시키는 효소의 결핍, 손상당한 피부, 손상된 장기세포 등의 치료와 같이 무수하게 많은 질병은 줄기세포를 통한 발생학적 치료를 통하여 치유 받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인하여 줄기세포 연구는 전 세계의 생명공학 회사들과 생명과학자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치유 불가능한 질병들(degenerative diseases)을 치유할 길을 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의료적 목적을 필두로, 국가의 정책사업화, 부가 가치가 높을 것이라는 생명공학산업의 상업적 관심, 그리고 과학자들의 야심 등이 더하여져 줄기세포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줄기세포 연구는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 첫째가 인간의 성체세포에서 추출한 성체줄기세포연구(somatic stem cell research)가 있다. 세포의 분화 활동이 활발한 신체의 부분에서 채취한 세포에서 줄기세포를 얻는 방법인데 이 방법의 문제는 성체줄기세포들이 자기 보존의 능력은 있지만 분화능력에서 전능성(pluripotency)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17)
 그렇지만 이 방법은 일부의 질병치료를 위하여 가장 실효성 있는 치료방법으로 응용되고 있다. 그것은 태반에서(umbilical cord) 얻은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저항력을 가진 혈구세포들을 재생하게 하는 치료방법이다. 탯줄 혈액이 혈구줄기세포의 풍부한 자원이 된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그 것을 응용하는 것이다.  치료 확률은 현재로서는 50% 정도의 효과를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1년 까지만 해도 성체줄기세포는 배양이 안 되고, 특정한 목적을 가진 세포로 만드는 방법이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현재 과학자들은 체세포에서 줄기세포를 판별해 내는 표적(marker)을 찾아내는 방법과 그 분화능력을 파악하여 이해하는 데 연구의 초점이 모으고 있다. 이런 까닭에 과학자들은 성체줄기세포 연구보다 비록 배아를 파괴하는 일이 있더라도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더 큰 기대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 대통령 생명윤리자문위원회의 백서에 의하면 성체줄기세포의 획기적인 연구방법이 제안된 바 있었고, 미국 시카고 생식유전학연구소의 한 연구진은 여성의 난자대신 기존 배아줄기세포주를 이용해 핵을 전치시키는 기술을 이용하여 황교수가 얻은 줄기세포를 추출해 냈다는  보도가 나왔다.18) 
 아직 이러한 연구결과가 학계의 검증을 거치지 않는 상태이지만, 이 방법의 장점은 생명의 기초단위인 배아의 파괴를 거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정당성을 획득한 연구가 될 것이다.
 둘째 방법은 인간배아줄기세포(human embryonic stem cell) 연구 방법이 있는 데, 이 방법은 인간생명 초기단계라 할 수 있는 수정란(embryo)을 파괴해서 얻어낸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권자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여기서 제기되고 있는  반대는 수정란에게 잠재적 인간(a potential human being) 혹은 온전한 인간( a full human being)이라는 도덕적 지위(moral status of an embryo)를 부여하는 관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시험관 아기 시술을 위한 체외수정에서 얻은 다수의 수정란 중에서 수정에 성공하고 남은 잉여 수정란을 장기기증의 차원에서 이용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윤리적 논쟁이다. 과학자들이 이 연구방법을 선호하는 이유는 바로 배아줄기세포가 가지고 있는 만능성(pluripotency)때문이다. 이 줄기세포는 수정된 후 4-5일 사이에 수정란이 백여 개의 세포군을 이루게 될 때, 수정란 내측에 모여 있는 줄기세포군을 추출하여 얻어지는 것인데, 그 줄기세포는 우리 몸의 약 200가지의 세포로 분화될 수 있는 만능성을 지니고 있다. 뿐 아니라 이 줄기세포는 줄기세포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기 증식이 가능하고, 목표세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즉 다른 세포를 형성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줄기세포로서의 성능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배아줄기세포는 무한한 증식이 가능하고, 그 생명력이 무한할 수 있다.
 이러한 배아줄기세포 연구 방법에 대한 반대의 입장은 주로 개신교 근본주의자들과 로만 카톨릭 교회의 생명권자들의 견해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인간배아줄기세포에 대하여 반대해온 대표적인 입장은 로만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대변해 온 리챠드 되르핑어(Richard Doerfinger), 그리고 생명권 옹호의 신학을 지지해 온 로날드 레건 정부와 현 죠지 부시의 생명윤리자문위원장인 레온 카스(Leon Kass)가 대표적이며, 이에 더하여 근본주의적인 보수적 신학자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한동안 미국 빌 클린톤 행정부는 14일 설의 범주 안에서 제한적 허용의 입장을 보였으나, 그 조건은 잉여배아를 이용하는 한도 안이라고 못 박았다.19) 
 이런 흐름 속에서 미국의 경우 2001년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정부의 연구비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법안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미국의 생명과학자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면 그 당시 이미 배아줄기세포 연구가들이 확보한 20개 정도의 줄기세포군을 증식 배양 연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생명의료공학적인 연구는 다양한 케이스의 실험과 실험의 미시성 때문에 다양한 능력을 갖춘 연구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정부의 지원이 없는, 사적인 후원에 힘입어 연구를 진행시키는 일을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반대와 제한 조건이 있는 경우는 미국만이 아니라 서구의 대부분의 나라들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아예 금지법안을 만들어 두어 논란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반면 유대교나 이슬람은 매우 관용적이고, 미국의 그리스도의 교회(The Church of Christ), 말일성도 그리스도의 교회, 루터란 교회 등은 소극적으로 치료목적의 연구에 동의하는 입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20)   
 다양한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배아줄기세포 연구자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기를 원했다. 배아줄기세포 연구방법에 과학자들이 만족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배아에서 얻은 줄기세포는 정작 그 사람이 아닌 다른 환자의 몸에 넣어질 경우 유전적 혹은 면역적 저항을 불러와 종양으로 발전하거나 부작용을 결과할 우려가 너무나 크다는 사실을 동물 실험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동일한 면역체계를 가진, 그리고 동일한 유전 형질을 가진 줄기세포를 얻을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체세포전치배아복제(embryo made by the method of the nuclear transfer cloning) 방법을 이용하여 줄기세포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었다.21)  

하지만 여러 나라에서는 법적이며 사회 윤리적인 제재 분위기로 인하여 이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없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는 아직 핵전치복제배아 줄기세포연구에 대한 분명한 법적 규제 장치가 설정되어 있지 않는 우리나라의 정황에서 상기의 과학자들의 첨예의 관심을 하나의 현실로 관철해 낸 것이다. 
 세 번째 줄기세포 추출의 방법은 환자의 체질을 그대로 복사해 낸 줄기세포를 얻어내는 방법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제일 커다란 근심이었던 면역체계의 거부반응을 극소화 시킬 줄기세포 치료방법의 길을 열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오고 있다.22) 

  사실상 황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는 과학적인 개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당시 세계의 생명과학자들은 가장 복잡한 고등척추동물인 인간을 완벽하게 복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지배적으로 가지고 이었기 때문에, 황교수의 2004년 연구보고는 일단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러나 황교수가 발표한 케이스가 하나의 경우였기 때문에 황교수의 연구결과에 대하여 전폭적인 승인을 보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2005년 5월 발표된 황교수의 연구결과는 2004년 2월 12일 Science 지에 발표된 내용에 비하면 매우 놀라울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여기에는 매우 설득력 있는 연구의 질적 향상이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6. 황우석 교수의 연구의 특이성
 우선 2004년에는 2월에 발표된 내용은 자원 여성 16명으로부터 242개의 난자를 채취하여 핵전치복제배아를 발생시켜 30개의 배아가 배반포기 단계에 이르렀으며, 이 가운데에서 20개의 세포군을 얻어 줄기세포를 분리해 낸 결과 단 1개의 줄기세포군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18명의 여성에게서 185개의 난자를 채취하여 핵을 제거한 후, 환자의 성체세포로부터 얻은 세포핵을 전치시켜 발생시킨 수정란을 만드는 방법을 통하여 11개의 줄기세포군을 얻었다고 발표하였다. 즉 성체세포의 핵을 가져온 환자와 동일한 유전형질을 갖춘 배아를 탄생시키고, 여기서 줄기세포를 얻었으므로 줄기세포이식치료를 할 경우 면역거부 반응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연구결과는 몇 가지 점에서 획기적인 과학적 개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첫째, 그동안 과학자들이 의심하고 의혹하던 인간복제의 가능성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물론 줄기세포를 얻는 데에서 그치고 말아 그 배아의 생명의 안정성이 얼마나 보장되는지는 알 수 없으므로 인간 복제의 초기단계에 그친 연구를 일러 인간 복제가 확인된 것처럼 보아서는 안 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과학자들이 거의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던 인간복제의 첫 관문을 열어 놓은 것은 확실하다.
 둘째, 배아복제를 통한 줄기세포 추출과 배양의 성공률에 획기적인 향상이 이루어 졌다. 2004년 2월에 발표된 내용에 비하여 황교수의 체세포전치복제배아 줄기세포 추출방법은 일년 사이에 1: 242에서, 11: 185, 즉 줄기세포 추출 성공률이 0.4%에서 6%의 확률로 높아졌다는 것이다. 더구나 체세포 핵을 공여한 환자들이 2살에서 50대에 이르는 데, 황교수가 추출한 줄기세포와 체세포 핵을 제공한 환자의 유전적 일치가 11개중에 9개로서 81%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다른 말로 말해 현재 황교수가 가지고 있는 핵전치배아복제의 기술을 이용한다면 거의 81%의 성공률을 가지고 환자와 동일한 유전적 형질을 가진 배아복제와 줄기세포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를 치료에 응용할 방법만 개발된다면 불치병의 치료가 구체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줄기세포를 연구해온 전 세계의 과학자들과 생명공학회사들에게는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황교수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일러 네 개의 문을 동시에 연 사건으로 비유하였다.23) 

 그러나 줄기세포가 환자의 몸을 치료할 수 있는 자원이 될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은 더욱 커졌지만,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은 너무나 많다. 연구보고서들에 의하면 줄기세포의 증식, 분화, 이식 후 생존능력, 그리고 면역반응을 극복하는 것이 현재 줄기세포의 연구에 아직도 남아있는 과제24) 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과학자들은 지난 이미 지난 20년 여년 동안 불치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하여 줄기세포를 연구해 왔다. 그동안 과학자들은 동물 실험을 거치며 분화된 세포가(성체줄기세포이든지 배아줄기세포이든지) 손상된 동물의 세포나 조직을 교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25) 
 그러나 동물 실험에서는 인간에 준하는 생명경외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인간에게 그러한 실험이 적용된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기까지 치러야 할 인간 생명 손상과 비참한 부작용에 대한 수용의지 역시 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황교수는 이러한 과정적 손상과 치러야 할 고통에 대해서는 침묵하였다.
 
7. 세계 및 국내 언론, 교계의 반응
 이미 생명공학에 대한 입장표명은 고등 포류 동물인 돌리가 복제되고, 이어 소와 돼지 등이 복제되기 시작했을 때 각 종교와 국가단위의 공동체들은 깊은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경험론적 과학문화에 관대한 영국은 1990년 11월 1일 공포된 “인간 수정과 배아에 관한 법”에서 누구든지 허락받지 않고 인간 배아와 관련하여 인간 배아를 만들거나 보존하거나 이용하는 것을 금지하였다.26)  이어 프랑스. 스위스, 덴마크도 그러한 입장을 택했으며, 유럽연합은 1997년 3월 12일 인간복제에 대한 전 세계적인 금지를 제안하고 유럽연합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유럽의 경우 1990년대 초부터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부정하는 여하간의 실험, 의료행위에 대하여 경고를 발한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유럽에서의 체세포전치복제배아 연구 자체가 사회적 및 법적 제한아래 진행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현재 체세포전치복제배아를 만드는 행위 자체를 위법적인 연구로 지정하고 있는 독일이나 카나다, 오스트랄리아, 프랑스, 노르웨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황교수의 연구업적은 개가가 아니라 위법적인  행위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황교수의 연구에 대하여 대서특필을 해온 한국 언론들은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전 세계적인 동향에 대한 종합적인 보고를 생략하고, 그의 연구결과를 일종의 민족주의적인 영웅적 성취로 보도하였고, 정부는 그를 “국보급 과학자“로 세계의 경쟁국들을 제치고 고지에 태극기를 꽃은 과학자로 예우하였다. 대한항공은 그에게 국가원수에게도 베풀지 않았던 특혜를 제공하여 황교수는 10년 동안 마음껏 대한 항공의 1등석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어느 나라에서는 현행법을 위반하는 행위가 되는 일을 행한 사람에게 우리는 최고의 대우를 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이러한 여론의 윤리적 검증 없는 호도의 태도에 대하여 한 신문기자는 ”과학주의의 덧에 걸린 언론“ 27) 이라고 규정하였다.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 결여된 환호, 그것은 도덕적 판단이 결여된 과학적 업적주의에 대한 숭배행위와 같다. 그런 평가는 윤리적인 것도 아니며, 국익을 위하여 정당한 것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민족적이며 국가적인 긍지를 높이는 과학자를 가진 뿌듯한 가슴에 찬물을 끼 얻는 반대자에 대해서 아마 사람들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보수적인 반대”를 하는 것이라 치부하는 경향까지 보인다. 교황청의 생명위원회 위원장 스그레시아(Elio Sgreccia)는 황교수의 연구를 “인권에 대한 침해"(violation of human rights)”28)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우리 나라 가톨릭 주교단은 성명을 내어 황교수에게 맹목적인 업적주의에 빠지지 말고 이성을 되찾을 것을 권고하였다.29)  유교의 입장을 대변한 최근덕 성균관장은 2005년 6월 5일 “생명을 희생시켜 인위적으로 장기를 만들기 때문에 자연의 도리에 위배된다”는 점을 들어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개신교 진영에서는 생명의료윤리협회에서 반대성명을 내었고, 일부 교단적인 차원에서 반대 견해들이 표현되고 있지만 보다 명료하고 뚜렷한 신학·윤리적 입장은 아직 표명되지 않았다고 본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개신교회 교단적 지도력 안에서 생명공학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에 혼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황교수의 연구에 대한 종교계의 반대여론은 단순한 종교의 보수주의적인 비판이거나 과거의 경우처럼 종교지도자들의 그릇된 권위를 지키려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그의 연구에 대하여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는 그의 연구가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위한 연구“이기보다는 ”생명의 존엄성을 부인하고 파괴”하는 결과를 동반하는 연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종교적 신념들과 윤리적 가치판단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비판적인 시각을 넘어서 여러 부류의 찬성의 소리들이 있을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찬성의 근거는 인류가 견지해온 인권과 인간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동반하지 않는 매우 실용적인 사유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황교수의 연구결과에 환호하는 첫째부류의 사람들은 황교수 같은 세계적인 생명공학자가 우리나라 사람이니 자랑스럽다는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싶어 하는 이들이다. 황교수의 국회 강연장에서 황교수와 사진을 찍고 싶어하던 많은 국회위원들은 아마도 국민들의 이런 심리를 생각하여 황교수와 나란히 찍은 사진만 보여도 홍보효과가 클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대한항공도 황교수에게 10년 동안 1등석을 탈 수 있는 권리를 선물했으니, 황교수를 대한항공의 이미지에 맞는 인물로 본 것 같다. 전 국민이 불황에 빠진 경제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황교수가 몰고 올지도 모르는 생명공학 부가가치를 장밋빛 물감을 들여 선전하는 정부나 경박한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여론에 편승하여 황필호 교수는 2005년 6월 2일 MBC토론에서 생명공학이 가져올 막대한 국가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황교수의 연구를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윤리보다는 실익을 택하자는 주장이다. 이들은 종교적이며 윤리적인 가치보다는 국가적, 경제적, 민족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입장에서 황교수를 비판하는 이들을 향하여 황교수를 공연히 괴롭히는 보수주의자라고 힐난하기도 한다.
 황교수의 연구를 지지하는 둘째부류는 첫째부류의 사람들이 흥분하는 틈을 타서 실익을 노리는 과학자들이다. 그들은 대중이 종교적이거나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싫어한다. 황우석 교수에게 “난자를 구한 과정”에 대하여 질문 했을 때 그는 매우 불편한 모습을 보였다 한다. 이들은 국민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하여 밤잠을 안자고 연구하는 “수순한” 과학자임을 내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리하여 재생 불가능한 불치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연구를 함으로 인류 의술의 역사를 바꾸려는 히포크라테스의 후예들임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들의 진면목은 여성의 몸에서 인위적인 방법으로 난자를 추출하고, 사람의 생명을 핵전치 복제하는 생명의 조작자들이다. 이들은 연구자원인 줄기세포를 추출해 내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생명을 인위적으로 복제, 발생시키고, 죽이며, 이용한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서 약속한 생명존엄과 경외의 윤리는 묻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생명을 가진 수정란인데도 수정란이 아니라고 하고, 심지어는 14일 이내의 수정란은 세포덩어리이지 생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이 뽑아낸 줄기세포의 생명력은 보호하고 지키려고 애쓰면서, 그 줄기세포의 모체의 생명권을 부정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셋째 부류는 도덕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문제가 된다 할지라도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황교수의 연구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이들이다. 고귀한 의료적 목적을 위하여 조금은 죄스러울지라도 마치 죽을 사람에게 자신의 장기를 떼어주는 것과 같이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일은 목적이 선하니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은 생명의 존재론적 가치를 부정하고, 생명을 수단화할 수 있다는 실용주의적인 가치판단이나 친인척이 겪고 있는 불치의 병에 가족주의적으로 연대하는 이들이다. 즉 내 가족을 위하여 다른 생명을 해하는 방법을 동원해도 상관이 없다는 태도이다. 그런데 이들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자원을 얻기 위하여 황교수의 실험실에서 인간의 초기생명인 수정란이 부모의 사랑의 행위나 동의 없이 만들어 지고, 누구의 동의도 받지 않는 채 말없이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황 박사의 실험실에서 수정란은 그저 줄기세포를 따내기 위한 숙주일 뿐이다. 황교수의 연구실에서는 아무도 그 수정란에 대하여 생명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생명발생의 형태를 갖춘 수정란이 수정되기도 전에 죽여야 할 수정란으로 연구자들에 의하여 이미 저주를 받은 것이다.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는 일이다. 



8. 황교수의 핵전치줄기세포연구의 비윤리성
 나는 황교수의 인간체세포전치복제배아줄기새포 연구는 그야말로 인간의 생명에 대한 경외의 근거를 조작하고, 파괴하며, 이용하는 무신적 과학주의의 개가라고 평가한다. 그의 실험실에서는 종교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종교 이후 시대를 향한 이정표가 세워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황교수의 연구업적에 대하여 무비판적 지지를 보내는 언론과 정부에 의하여 우리는 인간이 조작하는 실험실에서 “한 인간”이 인간의 생물학적인 발생과정에 개입하여, 인간생명을 생명공학적 연구와 치료를 위한 하나의 자료로 이용될 수 있는 그런 존재로 간주하는 시각을 용인하는 비윤리적인 행위를 강요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판단에 의하면 황교수의 연구는 다양한 비윤리적인 행위를 동반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나는 황교수의 연구가 결여하고 있는 윤리적인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도덕성과 윤리적 판단을 결여하고 있는 평가의 문제를 지적한다.
 첫째, 황교수의 연구는 줄기세포연구방법 중 가장 비윤리적이며 법적인 논란이 있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리하여 황 박사의 연구방법은 유엔의 2005년 3월 8일 본회의 “인간복제금지”결의의 정신을 존중하지 않았다. 전 세계의 84개국이 찬성하고 34개국이 반대한 유엔의 결의안은 전지구적 합의를 의미한다. 황교수의 연구는 이런 국제적인 합의를 무시한 것이다.  더구나 황교수의 연구방법은 특정한 나라에서는 “위법행위”이다. 즉 법률로서 금지되어 있어서 어느 나라에서는 심지어 형을 언도받을 수 있는 인간 생명 조작행위이다. 연구용으로 인간체세포복제배아를 산출 행위는 미국의 경우 7개 주가 법으로 금지해 놓고 있으며, 오스트렐리아, 독일, 프랑스, 카나다, 이탤리, 노르웨이, 유럽연합도 이를 금지하고 있다. 
 둘째, 황교수의 연구방법은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연구자들의 합의의 정신이 담긴 “연구윤리“를 어겼다. 여성들로부터 공여 받은 난자의 채취방법은 자신의 자녀를 얻기 위하여 체외수정을 시도하는 경우에만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는 줄기세포를 얻기 위하여 여성의 난자를 비자연적으로 채취하여 줄기세포를 얻기 위한 ”숙주“로 삼은 것이다. 그는 여성의 몸을 난자 채취의 밭으로 이용했으며, 채취된 난자는 핵전치 복제를 위하여 핵이 적출되어 자연 상태의 난자가 아닌 ”속빈 난자”로 만들었다. 반자연주의적 조작 행위이다. 더구나 황교수의 연구방법은 체세포핵전치복제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비자연적”인 생명을 산출한 복제행위이다. 인간 생명에 대한 인위적 조작을 감행한 연구이다. 그의 연구는 생명을 “부여하는“의료행위가 아니라 ”줄기세포를 얻기 위한 자원“으로 생명을 산출시킨 행위이므로, 장엄한 인간생명의 생성원리를 인위적으로 교란한 행위이며 그 의도에 있어서 ”해악금지의 원칙“을 어긴 것이다.  
 셋째, 황교수의 연구방법은 복제배아 줄기세포 연구로서 자연의 수정란과 동일한 배아의 생명권을 부정한 연구이다. 소위 과학자들이 인간생명의 초기단계를 실험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원시선이 형성되는 14일 전을 단지 세포덩어리로 격하시켜 물화(物化)하는 논리에 대한 종교계와 윤리학자들의 비판적 견해를 무시한 것이다. 더구나 황교수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위한 연구“라는 목적을 가지고 ”인간 생명의 초기단계를 조작, 생성, 파괴, 이용“하는 행위의 비윤리성을 부정하였다. 그리하여 인류의 장엄한 역사 속에서 자연의 생명생성의 속에서 생명의 안정성을 누려온 인류의 생성·생존방식을 특정한 실험 목적을 위하여 수단으로 삼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윤리없는 과학주의에 빠진 것이다.
 넷째, 황교수의 연구방법은 약육강식의 잔인하고 비정한 법칙을 받아들인 생물학적 진화론의 수용이다. 즉 이미 태어난, 그러나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강한 자들의 치료를 위하여 약한 생명을 창조하고 파괴하는 비정한 법칙을 만들고 있다. 이런 원칙을 받아들이면 향후 강한 자들에 의한 인간 조작과 우생학적 연구를 허용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개연성이 높다. 생명간의 평등 평화를 깬 연구이다. 더구나 황교수의 연구는 인류사회가 불가침의 영역으로 간주해온 생명발생과 조작의 판도라 상자를 열은 연구이다. 이 상자에서 부수할 수 있는 위험은 향후 한 인간이나 연구 집단이 책임을 질 수 있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그의 연구방법을 확장하면 인간이 아닌 생명체를 장기 적출용으로 생산해 낼 수도 있으며, 이 방법을 오용할 경우 괴물(chimera)의 생성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이 경우 부수적으로 종간의 면역체계가 무너져 신종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의 출현을 통하여 생명계의 대란을 불러올 수도 있다. 생명의  안정성을 깨는 무책임한 연구이다.
 다섯째, 황교수의 연구는 종교공동체의 생명경외의 가르침과 생명의 근원에 대한 초월자의 주권을 거부한 비종교적인 행위이다. 그는 그의 연구실에서 초월적이며 존재론적 생명가치가 부정되어 실험실의 연구자는 인간이 생명생성과 파괴의 전권을 행사하는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 황교수의 연구는 생명윤리 없는 생명 공학의 전형이다. 인간다움을 동반한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것“, 그리고 ”해서는 안 될 것”을 구별하지 못한 것이다. 즉 윤리적인 행위와 비윤리적인 행위를 과학만능주의에 빠져 구별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여섯째, 생명의료윤리학적인 지식과 기술은 환자라는 “약자의 생명권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있다. 그런데 황교수의 연구는 가장 미약한 “갓 수정된 인간 초기의 생명인 배아”를 지키려 노력하는 snowflakes운동(파괴될 배아 살리기 운동)의 정신에 비추어 본다면, 가장 약한 생명을 산출 파괴함으로 생명권을 무참하게 부정하고 유린한 것이다. 더구나  인간생명의 생성의 원리는 감수 분열한 남성과 여성의 성세포의 결합을 통하여 신비한 독자성을 가진 유일한 생명으로 권리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황교수의 핵전치복제 방법은 체세포핵을 제공한 모체의 유전형질을 그대로 갖춘 모사적 생명으로서 그 생명의 독자성을 상실하고 있다. 생명의 고유성의 부정과 파괴이다.
 일곱번째, 황교수의 연구에서 생성된 배아는 무성 생식적 수정란으로서 인간복제의 초기단계를 의미한다. 만일 무성생식이므로 수정란이 아니라 한다면 만의 하나 앞으로 태어날 복제인간에게는 인간의 권리가 부여되지 않을 것이다. 생명권과 인권의 부정이다. 더구나 황교수의 연구는 인간생명을 배아단계까지 복제하여 생명의 발생에 목적이 있지 않고, 즉 인간복제가 아니라 줄기세포를 얻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죽일 생명을 발생시키는 행위는 반인륜적인 행위이다. 목적 그 자체여야 하는 생명을 수단화한 것이다. 생명의 존재론적 가치의 부정이다.
 여덟 번째, 황교수의 연구는 생명조작의 경사면에 무책임하게 발을 들여놓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 결과 인간생명 초기단계의 조작, 생성, 파괴, 이용의 경사면에서 돌이킬 수 없는 하락의 길로 나가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는 황우석 교수의 핵전치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별할 윤리적 기준을 상실한 연구라고 생각한다.  황교수의 연구방법을 수용할 경우 ”되 돌이킬 수 없고 더욱 악화 일로“의 경사면에서 미끄러지는 결과만 초래할 것이 예측된다. 그러므로 나는 황 박사의 연구를 ”위대한 생명공학의 개가“라고 보지 않고 인류의 지혜와 종교적 가르침에 근거한 윤리적 기준을 잃은 매우 ”비정한 과학주의의 개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돕겠다는 숭고한 목적을 수행한다는 명분아래 위와 같은 비윤리적인 행위를 부수하는 과학주의적 맹신은 우리 사회에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는 풍조를 불러오고, 종교적 가르침과 윤리적 판단에 혼란을 불러와 강한 자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며, 약육강식의 법칙을 가르치는 일로서 생명경시의 경사면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역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9. 비정한 과학주의가 약속하는 것
 마지막으로 나는 매우 조심스럽게 황교수의 과학자로서의 객관적 판단에 의심을 가지고 있다. 황교수는 척수신경세포 손상으로 전신 마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그대의 척추를 고쳐줄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이 약속이 황교수의 비윤리적인 실험을 정당화 해줄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현실에 있어서 이 약속을 이행받기 위하여 그 환자가 기다려야 할 시간은 아마도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환자가 치러야 할 비용은 천문학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에 대하여 그는 침묵하였고, 오히려 내년이면 또 하나의 막이 올려질 것임을 예고했다. 흥미를 유발시키는 생명과학 흥행가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 치료방법이 개발된다면 우선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은 위험한 실험용 샘플 케이스가 되든지 아니면 천문학적인 돈을 지불할 능력을 가진 이들 뿐이다. 맹장 수술하듯이 그렇게 누구나 받을 수 있는 보편적인 치료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황교수는 정부로부터 지난해 87억원의 연구지원금을 지원받았고, 올해에는 265억원 지원을 약속받았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전대미문의 지원을 받으며 그가 행한 것은 과학적 “개가“만이 아니라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한 ”과학주의“의 개가이다. 인간의 생명을 조작, 산출, 파괴하는 행위에 대하여 국민이 환호하며 손뼉을 쳐주기 시작한다면, 이제 그가 다음에 보여줄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언젠가는 나의 아내에게, 혹은 당신의 딸에게 연구용 “난자”를 제공해 달라고 편지를 보내올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날 생명공학은 기독교 신앙인에게 많은 도전을 불러오고 있다. 과학과 종교간의 갈등의 역사는 참으로 오래 된 것이다. 추상적 가치 속에 개입된 종교의 미신적 요소가 진리의 대변자가 되어 온갖 권위를 다 부리고 있을 때 종교와 물리적 증명을 내세우는 과학의 관계는 종교 편에서 볼 때 정직을 앞세운 진리담론이 아니라, 정치적 싸움의 현장이었다.  18세기 초만 해도 면역 왁찐이 개발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의학자들이 예방주사약을 만들어 내겠다고 했을 때 기독교인들은 이를 반대하였다. 병에 걸려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쳐온 교회의 권위를 훼손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어리석은 주장을 하는 기독교인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중세기를 지나면서 교회의 십자가 첨탑이 번개에 맞아 무너져 내리는 일이 번번이 일어났을 때,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를 인간이 범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경고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대기권의 음극 양극의 충돌에서 비롯된 전기 작용이라는 사실을 해명하고 피뢰침을 세울 것을 권고하였으나 완고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는 인간의 약은 수라고 오히려 격노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대형교회들일수록 높은 십자가 탑 위에 피뢰침을 달아 놓고 있으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과학적 발견은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근거 없는 가르침과 미신적 신앙을 수없이 뒤흔들었다.  그 때마다 판정패를 당한 쪽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였다. 소리 없이 반대를 하던 소리들을 감추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정당한 윤리적 근거나 지식의 결핍에서 나온 종교의 어리석은 반대에 속한다. 과학적 지식세계에서 세기마다 일어났던 과학에 대한 종교재판은 종교의 어리석은 위선과 권위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황교수에 대한 비난과 비판도 일종의 종교가 가진 보수적 성향에서 나온 상습적인 ”비판”으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해이다. 왜냐하면 황교수의 실험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자리에 들어선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리도 많은 이들이 우려하고 근심하던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경계선상을 넘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이나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인간복제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해 왔고, 지난 2005년 3월 8일 유엔도 본회의에서 그런 연구는 허용하지 말자고 합의한 사실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이런 인류 사회의 도덕적 합의를 무시하고, 국가와 사회의 동의 없이 생명 과학적 실험을 하는 일 자체를 잘못된 것이라고 보는 연구윤리의 원칙은 적어도 황교수의 연구실에서는 지켜지지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그의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에 대한 비판은 보수와 진보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지키라는 보편적인 정신에서 나온 비판이다. 그는 생명의 조작자가 되었고, 임의로 발생 파괴할 면허를 받은 사람이 된 것이다. 수정란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보다도 더 무서운 인간인 것이다. 그의 연구실은 생명을 창조하시고 축복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남겨두지 않는 무신적인 상황임을 의미한다. 나는 종교인으로서 황교수의 생명 조작, 생성, 파괴 및 이용 행위는 그 동기와 결과에 있어서 매우 반인륜적인 행위라는 비판을 면키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연구진을 독려하며 무수한 밤을 지새운 그의 연구가 왜 윤리적이며 종교적인 인류의 지혜와 가르침을 무시한 연구가 되었는지 참으로 아쉬워 할 뿐이다.
 나는 황 박사가 과학기술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업적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학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04년 체세포전치배아복제 줄기세포 연구 결과에 대한 윤리적 비판에 직면하여 잠시 머뭇거렸다는 점을 밝힌 바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생명윤리 및 안정에 관한 법은 마치 그의 연구를 위한 공간을 비워주듯이 그의  연구가 진행될 여지를 남겨주었다. 그는 윤리적 비판이 있다는 점을 의식하였는지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생명을 파괴한 연구를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단지 유전적 물질을 갖지 않는 난자”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30) 
 그러나 나는 그의 주장은 승인될 수 없는 과학주의적 관점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난자와 정자가 만나 46개의 염색체를 가진 수정란이 되는 원리만이 생명 생성의 과정이고, 인위적으로 구성한 46개의 염색체를 가진 수정란과 동일한 기능을 하는 생산된 수정란은 도덕적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앞으로 만의 하나 복제인간이 태어날 경우 황교수의 논리대로 한다면 그가 조작한 수정란의 도덕적 지위를 부정하듯 복제인간의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성을 박탈하게 될 것이다. 가톨릭 주교회의의 반대 입장은 이 점을 명료하게 지적하고 있다.



10. 과학주의를 넘어서 인간다움을 지키는 생명공학  
 지난 2005년 5월 12일, 미국의 대통령 생명윤리자문위원회 의장인 레온 카스(Leon Kass) 박사는 기자회견을 열고 향후 줄기세포연구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그는 전능성을 가진 줄기세포를 얻는 방법이 황교수가 사용한 방법만이 아니라 다른 방법에도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카스는 전능 줄기세포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 다른 연구 방법은 (1) 이미 죽은 배아로부터 줄기세포를 얻는 방법. 이 방법은 배아를 죽인 후 줄기세포를 채취하는 방법과 그 의도에서 윤리적인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2) 살아있는 배아에 해를 끼치지 않고 생체부검(biopsy)하는 방법으로 줄기세포를 얻는 방법인데, 이 방법은 이미 배아의 유전자 검사를 위하여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3) 세 번째 방법은 인공적으로 조작된 유사배아로부터 줄기세포를 얻는 방법이 있으며, (4) 성체세포를 분화이전으로 비분화시키는 생명공학적 프로그램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성체줄기세포를 초유의 전능성을 지닌 세포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고 소개하였다,  여기서 세 번째와 네 번째 방법은 모체와 동일한 유전형질을 갖춘 면역 거부반응이 극소화된 줄기세포를 얻는 길을 열수 있다고 보고 있다.
 황교수가 그 무수한 난자들을 이용하여 수정란을 인위적으로 발생시킨 목적은 다름 아니라 환자의 유전형질을 그대로 갖춘 전능줄기세포(pluripotent stem cell)를 얻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인간의 초기생명을  의도적으로 유발시켰고, 이를 파괴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시카고의 한 연구소에서는 황교수처럼 인간의 수정란을 인위적으로 생성, 파괴하지 않고서도 황교수가 얻은 그런 줄기세포를 얻었다는 발표가 있었다.31) 

 황교수의 연구결과와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면서 생명을 조작, 생성, 파괴하지 않는다면 그 연구방법이야 말로 비정한 과학주의를 넘어선 인간다움을 위한 생명공학이 아닐 수 없다. 
 현재 비정한 과학주의를 향하여 문을 열지 않는 인류의 도덕적 법적 장치들은 불치의 환자들을 향한 연대와 공동책임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치료하기 위하여 생명을 파괴하는 이율배반을 받아들이는 비정한 과학주의에 도덕적 승인을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레온 카스가 제안하는 연구가 기대 이상의 성공을 불러온다면, 생명을 조작, 생성, 파괴하며 이룩한 연구는 비정한 과학주의의 산물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할 것이다. 과학자의 연구는 실험실에서 이루어진 피땀 어린 노고를 통하여 이루어진 소중한 업적일 것이다. 그러나 인류사회가 지켜온 존재론적인 생명 가치를 부정하는 연구절차와 업적은 인간이 인간다움에 대하여 질문하는 존재로 남아 있는 한 승인과 예찬보다는 부정과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어느 시대이든지 인간을 지켜온 것은 권력도 아니고 과학의 힘도 아니었다.  인간을 지켜온 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이 인간다움의 정체성을 해명해온 종교와 도덕과 윤리적 사유의 힘이다. 이런 힘을 잊은 권력과 과학은 오히려 인간의 삶을 해하고 인간의 본성을 왜곡시켜 왔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생명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생명을 조작, 생성, 파괴하는 행위는 인간다움을 지키는 과학이 아니라, 윤리 없는 정신에 이끌리는 과학주의나 도덕성 없는 업적주의의 산물일 뿐이다.            



11. 나오는 말
 과학의 업적에 대한 종교의 비판은 사실판단에 근거하지 않는 무지의 비판(ignorant criticism)이 있고, 사실에 근거한 가치판단(informed value judgment)이 있다. 생명의 신비를 과학적으로 해체할 수 있다고 하여, 과연 해체된 생명을 다시 조합하여 신비한 존재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과 죽음의 벽 조차도 제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영역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생명되게 하는 과제는 필립 헤프너(Phillip Hefpner)가 주장한대로 하나님과 더불어 창조적 행위에 동참하는 피조된 공동 창조자32)(created co-creator)의 역할 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에 죽음을 부여하는 행위는 반창조적이며 반생명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행위에 참여하는 행위일 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황교수의 핵전치복제배아줄기세포연구는 반생명적인 절차와 과정을 거친 연구이므로 신학적으로나 생명 윤리학적으로 정당성을 획득하기 어려운 연구이다. 만의 하나 승인 받을 수 있다면 이중 효과의 윤리적 원칙을 적용한 실용적이며 결과론적인 승인, 즉 결과를 통하여 수단의 비윤리성을 상쇄시킬 수 있는 길 밖에 없다. 그러나 만일 생명 손상의 과정과 절차 없이 그가 얻어낸 피 묻은 줄기세포가 아닌 피 묻지 않는 줄기세포를 얻는 방법이 개발된다면 그의 연구업적은 더욱 윤리적 정당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황교수는 줄기세포를 얻는 대신 생명 경외와 존엄의 윤리를 망각한 과학자라고 평가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만의 하나, 황교수가 개발한 연구 방법이 불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열기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이 확인된다하여도, 그가 개발한 방법을 사용하며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받을 의료혜택의 의료비용이 천문학적인 것이 될 것을 아울러 우려한다. 방법이 개발되어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은 부유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또다시 잔인하고 비정한 의료정의의 부재를 인식하게 될 것을 예견한다. 오늘날 가난한 환자들이 받는 의료 혜택의 빈곤함은 일상적인 질병치료 이외의 모든 비용은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과학자들이 국민이 낸 세금을 가지고 연구하고 국민적 성원과 지지를 받아 이루어낸 업적이 어느 날 깊은 질병과 가난한 국민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현실인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을 우려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공학자들의 연구실에서 생명의 사건이 아니라, 죽임의 사건이 허용된다면 그것은 나치와 일본 관동군의 실험실에서 실험자와 피실험자 간에 있었던 군국주의적인 비정한 비인간적 인종적 차별주의와 다름없이 상업주의와 업적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적 열광적 후원을 믿고 배아의 생명권을 부정하는 행위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양자 모두 나의 눈에는 비정한 과학주의자들의 실험실일 뿐이다. 단지, 저들의 행위는 살아있는 인간을 실험 자료로 사용했다면, 이들은 살아있는 배아를 실험 자료로 사용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들도 저들도 살아있는 존재의 생명권을 부정한 것은 동일하다. 기독교 윤리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목적을 위하여 수단의 도덕적 정당성을 구려하지 않은 채 생명을 조작, 파괴하는 비정한 과학주의는 긍정될 수 없으나 인간다움을 위하여 봉사하는 생명공학은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서 신학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과학자들이 종교와 도덕적 가치를 부정하는 과학주의에 빠진 연구자들이 아니라, 종교가 지켜온 인간을 지키고 돌보는 연구자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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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근본주의적 과학이해에 대한 논쟁과 그 결과에 대하여 참조: 박충구, 기독교 신앙 공동체 윤리학(서울: 대한기독교 서회, 2005) 80이하.
2)Martin Honecker, Perspectiven christlicher Gesellschaftsdeutung(Guetersloh: Guetersloher Verlaghaus, 1981) 11.
3)John Hedley Brooke, Science and Religion(Cambridge: Cambridge UP, 1991) 28.
4)Ian Barbour, Ethics in An Age of Technology(San Francisco: Harper Collins Press, 1993) 4-25.
5)Jaque Ellul, Technological Scoeity(New York: Vintage Books, 1984) 79f. 엘룰은 이 책에서 인류 문명의 종말이 오기까지 기술과학의 자동성 자기 증식성은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6)Loger L. Shinn, Forced Option: Social Decisions for the 21st Century(Cleveland: Philgrim Press, 1991).
7)Christopher Southgate, ed., God, Humanity and the Cosmos(Edinburgh:T&T Clark, 1999) 7.
8)Richard Dawkins, The Selfish Gene (London: Paladin Granada Publishing, 1978).
9)피터스(Ted Perters)는 종교와 과학의 상관관계를 좀 더 미세하게 여덟 가지 유형으로 분석하고 있다:  과학주의, 과학적 제국주의, 교회론적 권위주의, 과학적 창조이론, 두 연어 이론, 가설적 공명이론, 윤리적 인 공동영역론, 뉴에이지영성 (scientism, scientific imperialism, ecclesiastical authoritarianism, scientific creationism, the two-language theory, hypothetical consonance, ethical overlap, new age spirituality). Ted Peters, "Theology and Natural Science" The Mordern Theologians, ed. D. Ford (Oxford: Blackwell, 1997) 649-68.
10) ELSI 연구과제는 인간유전자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와 더불어 시작되었는 데 그 당시 ELSI의 과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되었다: 인간의 DNA서열이 완성되고 인간의 유전자의 다양성에 대한 연구를 둘러싸고 일어날 문제들을 연구하는 일, 우전공학적 기술과 정보가 건강관리와 공공 보건활동에 연계될 때 일어날 문제들을 연구하는 일, 유전학과 유전환경이 비인상적인 정황에 융합될 때 일어날 문제들을 연구, 새로운 유전적 지식이 어떻게 철학적, 신학적 그리고 윤리적 시각들과 관련될 수 있는 가에 대한 연구, 어떻게 인종적인·종족적인, 그리고 사회경제적인 요인들이 유전공학적 정보의 이용, 이해 그리고 해석에, 그리고 유전공학적 서비스와 정책의 개발에 영향을 미칠것인지를 연구하는 것. “New Goals for the U. S. Human Genome Project: 1998-2003," Science 282(1998) 682-689 참조; 박충구, 생명복제-생명윤리(서울: 가치창조사, 2001) 89. 돌리의 복제이후 생명윤리학적 연구의 전형을 보여준 범례적 연구보고서는 미국 대통령 국가생명윤리자문위원회(National Bioethic Advisory Commission)에서 낸 보고서 <인간복제> 1, 2권 [Cloning Human Beings Vol I, II (Maryland: Rockyville, 1997)]이 될 것이다. 이 보고서는 인간복제 가능성을 예측하고, 이에 대한 과학적 사실판단의 근거를 밝히고, 종교, 윤리, 법적인 가치 판단의 근거를 밝힘으로써 새로운 사건에 대한 대응적 조치를 구상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생명윤리학적 법적 장치는 이 연구보고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
11)우리나라의 경우 대통령 직속 자문기관인 <국가생명윤리위원회>가 설치되어 있고, 2004년 1월 29일 국회에서 생명윤리 및 안정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킴으로써 2005년 1월 1일부터 생명윤리법이 발효되었다. 미국의 경우도 대통령 직속 President Boiethics Advisory Committee가 구성되어 구체적인 생명공학적 발전의 방향과 목표를 분석해 왔다. 이 위원회의 위원장인 카스 (Leon Kass) 박사는 이 위원회의 목적은 두 가지로 요약하였다:  commitment to the twin goals of advancing biomedical science and, at the same time, upholding ethical norms. 참조, 2005년 5월 13일 발표된 미국 대통령생명윤리위원회의 백서 발표와 기자회견 녹취록 “Alternative sources of pluripotent stem cells: teleconference transcript" http://bioethics.org
12) 참조 미국 대통령 직속 자문기관 문서, “"Human Cloning and Human Dignity: An Ethical Inquiry" http://bioethicsprint.bioethics.gov.
13)나는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인간생명 초기단계인 배아(embryo)를 핵치환 방법(nuclear transfer)으로 체세포 핵을 공여한 사람을 복제(cloning)한 방법이라고 잠정적으로 규정하고, 이 개념은 그동안 다양한 나라들이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치료적 복제(therapeutic cloning)이나 혹은 생명의료적 연구를 위한 복제(cloning for biomedical research)와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한다. 이를 우리말로 번안한다면 “체세포전치복제배아 줄기세포 연구“가 될 것이며, 이 개념은 잉여 배아를 사용하여 줄기새포를 얻는 방법(left over human embryonic stem cell research)과 성격상 매우 다른 것임을 주지해야 한다.
14)John F. Kilner, Genetic Ethics(Cambridge: WM. B. Eermans Publishing Co., 1997) 25.
15) 대표적인 나라는 오스트랄리아, 카나다, 프랑스, 독일, 이탤리와 노르웨이는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법으로 금하고 있으며, 영국의 경우 정부의 허가와 모니터링을 받아야 하고, 미국의 경우 국가의 지원금을 받을 수 없도록 조처되었다. http://bioethicsprint.bioethics.gov/topics/cloning_frg.html, ]
16) http://www.bio.org 참조.
17)NIH, ES-6.
18) 중앙일보, 2005. 5. 26일 보도자료, 이 방법은 미국 대통령 생명윤리자문위원회가 권고하고 있는 네가지 연구 방향중 하나이다. 참조: 미국 대통령생명윤리자문위원회 백서: http://bioethicsprint.bioethics.goq
19)Kleiner, K. "Clinton U-Turn on Embryo Research," New Scienctist. 144 (Decmber, 24): 6; www.ejb.org.
20) New York Times, "Religion Today" by The Associate Press (June 2, 2005) 참조.
21)이 방법은 1996(7) 영국의 에딘버러 대학의 로슬린 연구소에서 윌멋(wilmut) 박사가 양을 복제해 낸 방식과 유사한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윌멋 박사는 277개의 체세포 수정시도에서 29개의 수정란을 만들었으며, 이를 13마리의 양에게 착상시켜 발생시킨 결과 다른 경우는 도중에 유산되거나 혹은 태어나서도 심한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죽었다. 그는 결국 한 마리의 복제양 돌리(Dolly)를 생산해 냈다. Nature (1997. 4): 박충구, 생명복제-생명윤리(가치창조사, 2001) 73.
22)원래 황교수의 체세포전치복제배아 줄기세포 추출에 대한 첫 보고는 2004년 2월 12일 발표되었었다. 하지만 그 당시 그의 연구에 대한 윤리적 비판에 직면하여 잠시 머뭇거리다가 생명의료 법안에 허점이 있음을 알고, 이 것을 일종의 허용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23)황교수는 질병 치료를 향해 지나야 할 네 개의 문을 동시에 열었다고 주장했는 데, 그 네 개의 문이란 2004년의 연구 결과에 비하여 체세포전치복제배아줄기세포 추출의 적용 범위가 남여노소 모두 가능하다는 점, 줄기세포 추출 및 배양 성공률의 향상, 동물이 아닌 인간세포를 바탕세포로 활용하여 안정성을 높인 점, 유전자 세포손상을 입은 환자의 체세포 복제 및 이식 가능성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24)NIH, ES-10.
25)NIH, ES-10.
26)박충구, 생명복제-생명윤리, 127
27)강양구, “과학기술의 덧에 걸린 언론” 녹색평론 제 80호 (2005년 1-2월).
28)New York Times(2005년 5월 31일) 보도.
29) 2005. 6. 4 주교단 성명
30) YTN, (2005. 6. 1) 보도자료.
31) 중앙일보 (2005. 5. 26) 보도자료.
32) Philip Hefner, The Human Factor(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1993). 헤프너는 이 책에서 전통적인 기독교 인간론의 죄인된을 넘서서 새로운 생명공학적 인간론을 논하며 인간을 피조된 공동창조자의 지위로 인정하였다.


작성자 : 협회 성명서 2015-06-19 13:33:43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의 “체세포복제배아 연구” 허용 발표에 대하여(2007. 3. 28.)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성명서>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의
“체세포복제배아 연구” 허용 발표에 대하여


 이번에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는 “체세포복제배아 연구”를 다시 허용한다는 정책 방침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고귀한 가치를 보호해야할 책무를 지닌 정부가 스스로 그 책무를 내버리고 오히려 인간 생명을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으로서, 참으로 잘못된 정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은 경제적인 이유 등 어떠한 명목으로도 결코 침해하거나 훼손할 수 없는 존엄성과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인간 배아도 그 자체로 고유한 인간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는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힙니다.


1. “체세포복제배아 연구”는 인간 생명인 배아의 조작과 파괴를 초래하여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고귀한 가치를 침해하는 행위로서 결코 용납될 수 없으므로 정부는 그 허용 결정을 즉각 철회해야 합니다.
체세포복제배아 연구는 그 과정을 보면, 배아줄기세포를 얻기 위해 체세포복제배아를 인위적으로 생성한 후 실험 조작하여 죽게 만드는 실험입니다. 체세포복제배아도 정자와 난자의 결합에 의한 수정배아와 동등한 생명 가치를 지닌 인간 생명입니다. 체세포복제배아 연구는 인간 생명인 배아의 조작과 파괴를 초래하여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고귀한 가치를 침해하는 행위가 명백하므로 반드시 금지되어야한다는 점을 우리 협회는 거듭 지적합니다.


2. 정부는 생명윤리에 반할 뿐 아니라 실효성도 없는 “체세포복제배아 연구”에 국가 예산을 낭비하지 말고 이미 상당한 효능이 입증되고 있는 성체줄기세포 연구 등 생명윤리적 대안을 적극 강구해야 합니다.
체세포복제배아 연구는 생명윤리적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배아복제로 얻으려는 배아줄기세포가 암 발생과 불안정한 유전자 발현 문제 등이 있어 현재까지 인간에 대하여는 임상실험을 실제로 수행하거나 성공한 적도 없으며 현재 동물실험 단계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생명윤리적 대안인 성체줄기세포 연구는 국내외적으로 인간에 대한 여러 가지 임상 결과 이미 상당한 효능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3. 인공수태시술 후 남은 잔여 난자를 사용할 수 있도록 “체세포복제배아 연구”를 제도적으로 허용하게 되면, 인공수태시술을 빙자하여 다수의 난자를 채취하는 문제가 우려될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생명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는 인공수태시술을 남용할 우려 또한 있음을 지적합니다.
체외수정을 통한 인공수태시술(“시험관아기”시술)은, 함께 아파해야할 불임부부의 애절한 고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자궁에 착상된 배아들 중 선별적으로 낙태하는 문제, 자궁에 착상되지 아니한 남은 배아와 수정되지 아니한 남은 난자를 폐기하거나 실험용으로 제공하게 되는 등 생명을 침해하는 배아실험을 조장할 수 있는 문제, 과배란 유도 등 시술 과정에서 여성의 신체 손상 내지 위험 문제, 인위적인 생명 조작 및 우생학적 문제 등 여러 가지 심각한 생명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 가지 생명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는 인공수태시술을 저출산 문제의 해결 명목으로 지원할 것이 아니라, 불임부부를 위한 입양 등 생명윤리적 대안을 강구하고, 저출산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모자보건법 개정, 낙태 예방 등 실효적인 정책을 전개해야할 것입니다.


4. “체세포복제배아 연구” 허용 결정을 발표한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 대해 조직과 구성, 운영 등을 그 명칭에 걸맞게 실질적으로 생명윤리적 입장에서 심의를 감당할 수 있도록 전면 개편 ․ 쇄신할 것을 촉구합니다.
체세포복제배아 연구에 대한 허용 결정의 과정을 보면,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의 재적 위원 20명 중 당연직인 정부측 위원들과 과학계, 의과학계, 산업계 위원들만으로 13명이 서면 표결에 참여하여 12명이 찬성했고, 윤리적 입장을 주장하던 민간위원 등 7명은 반대 의견 등으로 인해 표결 자체에 불참했다는 것입니다. 
현재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는 장관들 7명, 과학계, 의과학계, 산업계 인사들 7명, 그 외 인사들 6명(7명 중 1명 사퇴)으로 구성되어 있고, 과반수 결의로 심의하게 되어 있는데, 국가경쟁력이 우선인 정부의 장관들 7명과 생명공학적 사고가 우선인 과학계, 의과학계, 산업계 인사들 7명이 위원회 구성의 3분의 2가 되어있는 상태에서, 과반수 결의로 생명윤리 입장을 보장하겠다는 것은 처음부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 아닐 수 없으므로, 법률을 개정하여 정부당국자는 생명윤리정책을 집행하되 심의위원으로서의 참여는 배제하도록 하고 위원회를 모두 생명윤리 전문가인 민간위원들로 새롭게 조직 ․ 구성해야 할 것입니다.
위원회의 운영에 있어서도, 위원 각자가 생명윤리 기준과 양심에 입각하여 독립성을 실질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도록 제도화할 뿐 아니라 한 생명의 가치는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이므로 생명을 침해하는 요소가 있는 연구나 실험에 대한 사안의 심의에 있어서는 전원일치제를 채택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하여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가 그 명칭에 걸맞게 국가생명윤리정책과 제반 법률위임사항에 대해 실질적으로 생명윤리적 입장에서 심의를 감당할 수 있기를 촉구합니다.


2007. 3. 28.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상임공동대표 강재성
상임실행위원장 조덕제

작성자 : 박상은 2015-06-12 14:35:47
인간배아복제, 과학의 승리인가?(2005. 10. 17.)

 


인간배아복제, 과학의 승리인가?






         박상은 (샘안양병원장, 보건복지부 생명윤리위원)

제2회 목회자를 위한 생명윤리세미나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생명윤리"

발표일: 2005. 10. 17.



들어가며

지난 5월 20일, 서울대 황우석교수는 미국 피츠버그대 제럴드 섀튼 교수와 함께 치료용 배아줄기세포 배양을 성공했다고 밝혔다. 2004년 2월 인간배아복제를 통한 배아줄기세포 배양 이후 한 단계 더 진전한 실험이 성공을 거둔 셈이다. 지난 번 실험과 다른 점은 이번 실험에는 난치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체세포에서 핵을 채취해 이를 인간 난자에 주입해 인간배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의 유전자와 같은 인간배아를 만들어 여기에서 줄기세포를 배양한 까닭에 면역거부반응은 최소화될 것으로 기대된다는 점이다.

최근의 인간배아복제를 통한 줄기세포연구 실험소식은 새로운 생명윤리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생명공학자들은 국가경쟁력을 내세워 우리나라가 BT산업에서 앞서나가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인간배아실험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척추손상환자나 난치병 환자들은 줄기세포를 통한 치료를 꿈꾸며 이러한 실험이 계속되기를 원하고 있다. 반면에 종교계와 여성계, 그리고 시민단체에서는 인간배아를 파괴하는 줄기세포연구는 궁극적으로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하며, 난자를 이용하여 여성을 수단화하는 행위이기에 이를 반대하고 있다. 과연 누구의 주장이 옳으며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인가?


1. 인간배아복제란?

인간복제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대로 핵을 제공하는 원본 인간과 같은 유전자를 가진 새로운 인간개체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하는데, '인간배아복제'는 그와 다른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모든 인간복제는 엄밀히 말하면 인간배아복제인데, 복제된 개체의 생존을 배아상태로 한정하여 사용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이는 인간을 낙태한다기보다 태아를 낙태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덜 끔직한 것처럼 인간복제보다 배아복제라는 표현이 인간의 죄의식을 조금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도로 사용되리라 짐작된다.  인간복제는 크게 둘로 나눠 생식용 개체복제와 치료용 배아복제로 나누는데, 인간배아복제는 주로 질병 치료를 위한 줄기세포의 추출에 있으므로 치료용 배아복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든지 이를 생식용으로 바꾸어 개체를 복제해낼 수 있으므로 이 둘을 구별하여 관리하기가 용이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2. 인간 생명의 시작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인간배아가 과연 인간생명인가? 아니면 단순한 세포덩어리인가?"이다. 체세포 핵이식 배아복제는 이미 돌리 양 복제에 사용되었던 방법으로 이렇게 복제된 인간배아를 여성의 자궁에 심기만 하면 바로 인간복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배아는 영양분과 산소만 계속 주어지면 얼마든지 인간개체가 되는 것이다. 배아나 태아가 여느 세포덩어리와 다른 점은 바로 그 자체로 독자적 인간생명으로서의 모든 유전정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 자체가 존중받아야 할 인간생명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생명을 다른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파헤치고 폐기시킨다면 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며 생명경시풍조를 야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인간배아복제를 허용할 것인지 논하기 앞서 반드시 먼저 다루어야 할 주제는 바로 생명의 시작에 관한 논쟁일 것이다.  생명의 시작에 관해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는데, 수정순간을 시작으로 보느냐, 착상, 심박동개시, 뇌파 작동 시점, 자체 생존가능 시점, 분만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의학적으로 생명의 시작은 어느 순간일까? 정자가 여성의 질에 들어가면 20분 내에 나팔관에 도착하게 되고 여기서 난자를 만나 결합하게 되는데, 하나의 정자가 난자에 들어가면 수정란이 되면서 순식간에 막이 형성되어 다른 정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기전을 작동한다. 이 수정란에는 정자의 23개의 염색체와 난자의 23개의 염색체가 합쳐져 이미 46개의 인간의 염색체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하나의 세포에 불과하지만 독특하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이며 또한 완전한 개체이다. 이 수정란에 영양분과 산소만 계속 공급되면 성장 발육하여 성인으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8번 세포 분열할 무렵 자궁에 착상하게 되고, 41회 세포분열 할 때쯤이면 바깥 세상을 구경하게 되며, 45회 세포분열하면 어느새 어른이 되는 것이다. 즉 수정란 이후의 과정은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므로 어느 한순간을 선을 그어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는 특별한 시점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수정 시점을 생명의 시작으로 보는 관점이 가장 의학적이라 생각된다.  생명의 시작이 수정 시점부터라는 의학적 논거를 받아들일 때, 인간의 가치는 과학자들이 인위적으로 구분해 놓은 시기에 의해 변화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수정란과 배아가 가치에서 차이가 날 수 없으며, 배아와 태아가 생명의 존엄성에서 구별될 수 없으며, 신생아와 영아가 인간의 가치적 관점에서 차이를 둘 수 없는 것이다.


3. 현미경적 폭력

미국 클린턴 정부가 14일 이전의 전배아(배아를 자신의 목적에 따라 구분하였음)에 대한 실험을 사실상 인정하였는데, 이는 수정 후 14일이 세포덩어리에서 조직화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13일과 14일은 구별될 수 없으며, 14일과 15일 역시 이전과 이후를 생명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변화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즉 14일을 생명의 기점으로 잡는 행위는 논리적이지 못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으며, 인간의 생명이 정부의 결정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하찮은 존재로 전락하게 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또한 배아복제 과정을 통해 수많은 인간배아들이 손상받으며 상당부분의 배아들은 폐기처분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작은 인간들이 현미경 하에서 갖은 폭력을 당하며 무참히 살해되는 셈이다. 생명윤리학자들이 21세기를 현미경적 폭력의 시대라고 예고한 바와 같이 항거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배아는 거대한 폭력 앞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4. 인간배아복제의 영향

물론 복제된 인간배아를 이용하여 암과 같은 인간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술을 개발해낼 수 있으며 수요에 미치지 못하는 장기공급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식분야에 획기적인 해결책을 가져올 수 있으며, 나아가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지닌 여분의 인간을 냉동보관함으로 언제든지 이를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도덕적 지위를 지닌 존재로 다른 무엇의 수단으로 이용될 수 없다. 인간은 그 자체로 목적적 존재이기에 아무리 그 혜택이 크다 할지라도 수단적 존재로 여겨져서는 안될 것이다. 당장의 눈 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바람에 인간의 존엄성, 생명의 고귀함이 짓밟힌다면 이는 오히려 인류역사의 퇴보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배아복제는 인간개체의 정체성에 상당한 혼란을 야기시키며,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의 위기를 불러올 것이 분명하다. 아울러 그동안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 부부간의 유성생식을 통해 자녀를 출산해 오던 전통이 무너져 내리고, 남성과 여성이 필요치 않는 무성생식이 가능함으로써 인간사회의 버팀목이었던 가정마저도 여지없이 파괴될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이러한 인간배아복제를 단지 과학적 행위로 판단해서는 곤란하며, 사회학적, 인류학적, 철학적 및 종교적 차원에서 다루어야 하며 이를 위한 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복제실험은 소영웅주의 내지 실용주의적 이기주의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5. 인간배아복제의 대안

물론 난치병과 희귀병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줄기세포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줄기세포가 인간배아복제가 아니면 전혀 구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많은 과학자들이 인간배아복제의 대안으로 성체줄기세포와 태반과 탯줄에서의 추출을 시도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이미 성체줄기세포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상당부분 성공을 거두고 있다.  과학은 계속 발전시키되 인간생명은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확신한다.  처음에는 좀 더디 걸리는 것 같더라도 윤리적인 방법이야말로 과학의 발전을 더 견고하게 하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치료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어떠한 방법도 자행될 수 있다는 공리주의는 다음 단계의 인간욕구로 이어질 것이다. 줄기세포로 해결되지 않는 인간의 장기를 얻기 위해 인간배아를 더 키워 수개월 된 태아상태로 발육시킨 후 장기를 얻어내는 방법이라든가, 인간개체복제를 시행한 후 필요한 장기를 분리한 후 복제된 인간개체를 폐기시키는 행위 등이 그것이다. 인간생명은 연속적인 과정이기에 어느 시점에서 장기나 세포를 추출했느냐는 사소한 차이일 뿐이며, 결국 인간생명인 배아의 복제는 인간복제의 한 형태일 따름이다. 목적이 좋으면 어떤 수단도 허용될 수 있다는 논리라면 클로네이드사가 성공시켰다고 주장한 불임여성의 복제인간 탄생도 비난할 근거가 없어지는 셈이며, 모든 생명공학의 실험은 다 허용해야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6. 인간배아복제의 기독교적 접근

기업의 경쟁력이 윤리경영에 있듯이 진정한 국가경쟁력은 윤리적인 과학과 산업에 있다고 본다. 지금 당장 눈앞의 이익에 몰입하면 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이번 실험으로 외국의 생명공학계가 찬사를 보내왔지만, 또 한편으로 세계의 생명윤리계와 종교계에서는 한국의 비윤리적 실험강행에 대해 우려와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마치 생명윤리학자나 종교계는 과학의 발전을 늘 가로막는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과학발전의 원동력이 되었고, 인도와 중국의 고대문명에서 현대과학이 꽃핀 것이 아니라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서구에서 과학이 발전되었음이 이를 입증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과학의 발전을 통해 난치병이 치료되고 불임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단지 이를 위해 다른 인간생명이 파괴되고 짓밟히지 않아야 한다고 믿기에 생명윤리의 테두리 안에서 생명과학이 발전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불임여성의 안타까움을 해결해야겠지만, 인간복제를 한다거나 필요이상의 많은 잉여인간배아를 만들어 냉동 보관하거나 폐기 처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난치병 환자를 치료하더라도 인간배아를 복제하거나 인간생명을 파헤치는 생체실험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배아연구에 집착하는 대신에 더 과학을 발전시켜 성체줄기세포를 활용하거나 인간배아를 헤치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줄기세포연구를 개발해야 할 것이다.

 

7. 여성의 인권유린

이번 실험은 과배란에 따른 여성신체의 부작용이 우려되고 여성의 실험도구화와 인권유린의 소지가 있으며, 이러한 인간배아복제는 보다 건강한 인간 난자를 요구하게 될 것이기에 이미 성행하고 있는 비윤리적인 난자매매를 가속화할 수 있다. 아울러 복제한 인간배아를 특허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생명이 상품화될 뿐 아니라 생명공학자나 기업에 인간생명이 독점될 수 있기에 특허제도는 신중히 재고되어야 한다.

금번 실험은 과학기술부가 지원함으로써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내려는 생명윤리기본법 제정을 왜 그토록 정부가 지연해 왔는지 그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확인하게 하였으며, 경제적 이익에만 혈연이 된 생명공학을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자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또한 이러한 첨예한 인간배아실험을 허용한 정부나 기관의 생명윤리위원회의 검토도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필히 밝혀져야 할 것이다. 또한 생명윤리기본법에 의해 구성될 대통령 직속의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 생명윤리에 대해 올바른 관점을 가진 위원이 많이 참여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난치병 환자를 섬기는 의사의 한 사람으로서 하루 빨리 생명의 소중함을 지켜내면서 아울러 줄기세포를 얼마든지 추출해낼 수 있는 윈윈(Win-Win)의 과학의 업그레이드를 기대해 본다.


나가며

인간 생명과 관련된 생명윤리는 한 번 잘못 판단했을 때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단회적인 생명을 다루고 있기에 그 어떤 실험보다도 신중하여야 하며 분명한 사회적 합의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대부분의 시민단체, 종교계, 여성계, 환경단체들이 이러한 인간배아복제를 반대하고 있음이 이를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철저하게 공리주의적으로 따져본다 하더라도 치매환자나 일부 환자의 치료효과를 위해 치루어야 할 대가는 한 번에 폐기처분 되어지는 수백 명의 인간배아의 고귀한 생명 뿐 아니라, 이로 인해 야기될 인간생명 경시풍조로 인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포함해야 하겠기에 결코 공리적이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금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과연 인간 생명은 무엇인가? 인간 배아는 과연 우리가 지키고 보호해야할 인간 생명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을 위해 파헤쳐도 되는 세포덩어리인가? 한 해에 150만 명의 태아가 낙태로 죽어가는 세계 제일의 낙태천국에서 이루어지는 생명파괴의 이 처참한 현장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과학의 이름이라면, 하고 있다고 다 옳은 일이며, 할 수 있다고 다 해도 되는 것인가? 자기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생명을 과연 누가 지켜줄 것인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우리 모두는 생명지기로서 스스로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 생명을 지키는 사명을 감당해 내며, 아울러 인간배아 줄기세포를 대체할 수 있는 성체줄기세포 연구를 지원함으로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는 범주 안에서의 생명과학의 발전을 꾀해야 할 것이다.

인간배아복제는 신이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신비로운 성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행위로 엄청난 불행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성감별을 통한 선택적 분만과 인공유산을 자행하므로 야기되는 숱한 문제들을 경험함으로 인간이 생명을 조절하려고 할 때 치러야 할 가정과 사회의 파괴를 알고 있다. 벌써부터 행해지고 있는 태아실험이나 유전자조작, 원숭이와 인간의 교배실험 등은 인간배아복제로 야기될 수 있는 상황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과학이라는 이름 하에서라면 무슨 일도 용납되는 것일까? 윤리를 상실한 과학은 마치 브레이크 없이 비탈길을 질주해 달려 내려가는 덤프트럭과도 같다. 우리는 곧 닥쳐올 낭떠러지의 비참한 말로를 모른 채 덤프트럭 위에서 환호를 지르는 아이들처럼 인간복제를 가능케 한 과학의 승리를 내심 자랑스러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작성자 : 이승구 2015-06-12 11:34:08
그리스도인은 인간 복제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2003. 4. 19.)

 


그리스도인은 인간 복제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승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이승구, 「인간 복제, 그 위험한 도전」, 예영 커뮤니케이션, 2003, 117-124면에서 전게

발표일 : 2003. 04. 19.



1. 인간 복제란 무엇인가?

요즈음 라엘리안들과 그들이 세운 생명 공학 회사인 클로네이드사에 의해서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인간 복제’는 엄밀히 말해서 ‘인간 개체 복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인간복제(human cloning)라는 말은 인간 개체 복제만이 아니라, 인간 배아복제를 포함하여 인간에 대한 모든 복제 작업을 지칭하는 것이다. 체세포의 핵을 핵이 제거된 난자에 주입하여 전기적 작용을 일으켜 핵 치환된 난자, 즉 복제된 세포(zygote)가 세포 분열을 하게 하여 복제된 배아를 얻는 것이 배아 복제이고, 이렇게 얻게 된 배아를 자궁 내에 착상시켜 자궁 내에서 자라게 하여 아이로 태어나게 하고 키우는 것을 개체 복제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실 배아 복제는 개체 복제의 전단계가 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2. 대부분의 생명 공학자들도 반대하는 인간 개체 복제

그런데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인간 개체 복제를 공식적으로 시도하려는 사람들은 우주인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주장하며 “인간 복제는 인류 영생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는 사이비 종교 단체인 라엘리안과 이탈리아의 세베리노 안티노리 박사 같은 사람들뿐이다. 우리가 요즈음 잘 들어서 아는 바와 같이 라엘리안들은 벌써 여러 명의 복제 아기가 탄생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고, 안티노리 박사는 작년에 어떤 여인이 복제된 배아의 착상을 받아 복제 아기를 자궁 내에서 키우고 있어서 2002년 11월경에 인류 최초의 복제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2003년이 되기까지 새로운 소식이 아직 없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 안티노리 박사가 수행한 그 개체 복제는 실패한 것 같다. 또한 AFP통신에 따르면 안티노리 박사는 2002년 12월 중순에 세르비아 주간지 《닌》(Nin)과의 회견에서 2003년 1월에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복제 아기가 출생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우리는 유전학 분야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생각하며, 세르비아는 복제 인간 출생지로 역사에 남게 될 3개국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이를 확인하는 보고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지금으로서는 라엘리안만이 개체 복제의 성공을 주장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생명공학자들은 공식적으로는 인간 개체 복제에 대해서는 반대하거나 별 관심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생명 복제 기술을 가진 우리나라에서도 배아 복제를 희망하거나 시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간개체 복제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서울대학교 수의과의 황우석 교수, 마리아생명공학연구소의 박세필 박사, 차병원 세포유전자치료연구소의 정형민 소장 같은 이들이 그 대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당분간 인간 개체 복제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과학자들 사이의 연합을 기대할 수 있다. 물론 반대에 대한 궁극적 이유와 동기는 다를지라도 그리스도인과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인간 개체 복제에 대한 반대에서는 같은 입장의 논의와 노력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2002년에 입법화하기 원했으나 사장된 생명 윤리법을 빠른 시일 내에 입법화하여 이 땅에서 인간 개체 복제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적인 장치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공유하는 반대 근거는 인간의 존엄성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 간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다르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은 존엄하기에 인간 개채를 복제하는 일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을 보충하는 하위 논거들로서는 이와 연관된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1) 인간 복제의 전 과정에 걸쳐 나타나는 기술적 문제

현재의 기술로서는 무수한 배아와 복제아가 실험 도중에 죽거나 사산하게 될 위험성이 있으며, 비록 복제된 존재가 태어난다고 해도 복제된 동물들처럼 거대 체중이나 기형아, 조로의 위험 등에 처할 수 있고, 복제 아기를 낳는 여성은 융모막암에 걸릴 위험이 높다는 생물학적 ․ 기술적 문제, 또한 그 도중에 나타나게 될 무수한 기형적 인간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도 이런 의학 기술적 문제에 속한다.

2) 복제되어 태어난 이의 지위에 대한 법률적인 문제

복제된 이는 온전한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는가? 그의 부모는 누구로 여겨져야 하는가? 복제된 개체 인간과 원본 인간과의 정확한 관계는 무엇인가? ­자녀인가, 시차를 두고 태어난 쌍둥이인가? ­복제된 인간은 어떤 법률상의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 복제된 개체도 상속을 받을 수 있는가, 그럴 경우 그는 어떤 지위에서 상속을 받는 것인가? 등 현존하는 법률 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복잡한 법률적인 문제들.

3) 개체 복제된 이와 그 원형 인간의 관계와 심리적 문제

복제된 인간이 겪을 심리적 정체성의 문제, 원형 인간이 가지게 될 정체성의 위기와 관련된 심리적 문제들.

4) 복제된 이의 성장 과정에서 집중될 미디어의 관심으로 말미암은 성장에 미치는 사회 심리적 문제들

5) 인간 생명의 문제가 상업화되는 문제

복제아를 얻기 위해 핵이나 난자, 자궁을 공여하는 이들이나 이런 기술을 제공하는 이들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그 일에 관여하게 될 위험성과 이런 일이 상업적으로 오용될 문제들.

이 외에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무수한 문제를 생각하면서 현존하는 대부분의 과학자들과 그리스도인은 인간은 존엄하기에 개체 복제를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과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의견을 같이 할 수 있다.





3. 인간 개체 복제에 반대하는 기독교적 논거의 기준

그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인간 개체 복제를 반대하는 근거는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된 존엄한 인간에 대해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자연스러운 방법 외의 다른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 개채 복제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인 고귀한 인간을 어떻게 그 끔찍한 기술적 문제에 노출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온전한 인간,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그런 취급을 받도록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복제되는 개체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이다. 복제되는 개체는 생물학적으로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므로 하나님 앞에서 그 개체의 권리와 인격성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런 시도를 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인간 중심으로 사고하기 시작하면 상당히 많은 이들이 개체 복제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존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는 인간 개체 복제를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옳은 것이지만, 성경 전체와 기독교 사상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고귀하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자연스러운 방법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사람을 존재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인간 개체 복제에 반대해야 한다. 그래야만 후에 몇몇 사람들의 무모한 시도에 의해서 복제된 인간이 생기게 되었을 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에 근거해서 그들에 대한 모든 보호 장치와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에 기형적인 복제 인간이 양산되어서 그들을 다 죽여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게 될 때, 진정 그들을 위해 서 있을 수 있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한 후에 개체 복제된 이들의 인권 문제가 제기될 때에 진정 그들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뜻을 같이하는 과학자들과 함께 인간 복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런 공동의 노력은 귀한 것이다.


4.과학자들과 이 세상이 요구하는 인간 배아 복제

그러나 바로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과학자들과 그리스도인 과학자들 사이에 심각한 견해차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비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은 개체 복제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발하면서도 배아줄기세포를 추출해서 난치병 치료 등에 쓰기 위한 목적의 배아 복제는 인간 복제를 위해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정부 관계자들의 기본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서, 김성호(金成豪) 전(前) 보건복지부 장관은 2003년 1월 8일 국회보건복지위원회의 “생명 윤리 및 인간 복제에 관한 현안 보고”에서 인간 복제 금지법을 우선 제정하는 것으로는 인간 복제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다고 하면서, “난치병 치료를 위한 배아 복제 및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허용하되 이것이 인간 복제로 이어지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가 무엇인지 찾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 전(前) 장관은 또한 “체세포핵 이식은 난치병 치료를 위한 배아 복제의 한 방법이자 인간 복제의 전단계이기 때문에 선별해 허용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이달 안에 공청회를 갖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와 협의를 거친 2월에는 관련법을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이런 생각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아닌 배아, 특히 의학계에서 일반화되고 있는 일종의 신화라고 할 수 있는 수정 후 14일되기 전까지의 배아는 아직 온전한 인간 생명으로 보지 않으려고 하는 관점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까지의 인간 배아를 가지고 실험을 할 수 있음은 물론 그런 배아를 복제해서 배아줄기세포를 얻어 인간의 복제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5. 인간 배아 복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들은 그리스도인답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과학자들이 강하게 주장하는 인간 배아 복제에 대해서 인간의 생명이 과연 무엇이며 언제부터 시작되는지를 명확히 이해하는 기독교적인 사유를 이 문제에 적용하는 일을 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줄기세포연구에 반대하는 반지성주의자인가?

강하게 말 하건대, 그렇지 않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예로부터 결코 반지성주의나 반과학주의적 태도를 표명하지 않았다. 우리는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권리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난치병을 포함한 현존하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성체줄기세포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예를 들어서, 서울대학교의 강경선 교수와 같은­ 다른 과학자들과 함께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인간 복제의 문제가 제기될 때 우리는 인간 개체 복제에 강하게 반대하여 그것이 이 사회적으로 바르게 이해되고 시행되도록 해야 하지만, 또한 그저 개체 복제에 대한 일반적 반대에 파묻혀서 수정되는 때부터, 즉 46의 염색체로 존재하게 되는 때부터 ­따라서 복제의 경우에는 핵 치환이 되는 때부터­ 인간으로서의 생명이 시작한다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잊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때야말로 이런 문제에 대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보다 성경적이고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판단과 활동이 요구되는 시기인 것이다.

작성자 : 이상원 2015-06-12 11:29:13
경고의 표지판 - 배아실험의 성경적 문제점 - (2005. 4. 25.)

 

경고의 표지판

- 배아실험의 성경적 문제점 -



이상원(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이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세미나]난치병 치료와 줄기세포 연구

(2005. 4. 25. 사랑의교회 생명윤리선교회 주최) 주제발표

발표일 : 2005. 04. 25.

 


저는 등산을 매우 좋아합니다. 산을 자주 가다 보니까 산길을 걷는 도중에 위험한 순간을 만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약 열흘 전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지역 근교에 있는 관악산을 오를 기회가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산을 오를 때는 평소에 제가 수십 번 오르던 익숙한 길로 올랐습니다. 그러나 하산할 때는 그날따라 호기심이 발동해서 한번도 가보지 않은 다른 길로 내려가 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길은 어느 등산객이 매우 험하다고 해서 권하지 않던 길이었습니다. 몇 개의 바위산을 넘어 내려가는 길이었고, 서너 개의 바위산을 넘어선 곳에 등산객들이 눈에 띄어서 그 길로 가도 되겠다 싶어서 바위산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바위산을 한 개를 넘고 다른 하나의 바위산을 넘어가려고 했을 때 저는 그만 더 이상 가서는 안 될 곳에 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려고 하던 길 밑에는 수백 미터 낭떠러지였고 길이 없었습니다. 건너편 바위산에 있는 등산객들을 자세히 보니 모두 자일을 전문산악인들이었습니다. 시간은 4시가 넘어서 저물어가고 힘은 달리기 시작하고 멋모르고 타고 내려온 돌아가는 길도 예상보다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겁이 덜컥 났습니다. 잘못하면 조난당하겠구나, 발을 잘못 디디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을 침착하게 가지려고 애를 쓰면서 간신히 다시 바위산을 되짚어 안전한 갈림길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표지판이 하나 서 있었습니다. “이 길은 정해진 등산로가 아니니 들어가지 마시요.” 그리고는 표지판 맞은편에 비록 멀리 돌아가는 길이긴 하지만 안전한 등산로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 표지를 주목하지 않고 길을 들어섰던 것입니다. 비록 멀리 돌아가는 길로 접어든다 할지라도 정해진 등산로를 따라서 안전하게 하산했어야 했습니다. 빠른 길로 가려고 시도하다가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배아와 관련된 실험에 몰두하고 있는 생명공학자들의 행동은 정해진 등산로가 아니니 가서는 안 된다는 경고판을 무시하고 빠른 실험결과를 얻기 위하여 수백 미터의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는 길로 무지막지하게 들어선 어리석은 등산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호기심,”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는 명제들은 분명히 과학자들의 창의적인 연구를 자극해 왔던 것은 사실이고 이와 같은 창의적인 연구의 혜택을 인류가 많이 누려 왔던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명제들에는 혜택과 더불어 위험의 여지가 언제나 내포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며, 특히 이 위험이 인간의 생명에 결정적인 위협을 가져오거나 인류사회의 운명을 비참한 결말로 끌고 가리라는 사실이 도덕적 상상력을 통하여 책임 있게 예측할 수 있을 경우에는 이 명제는 견제되어야 하며, 멀리 돌아가는 안전한 길이 있다면 그 길로 우회해야만 합니다. 안전하게 우회하는 길이 있는데도 생명을 담보해야만 하는 길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기 이를 데 없는 행동입니다.


배아실험을 감행하는 생명공학자들의 행위는 과학적 논리나 철학적 논리만으로도 약점을 안고 있지만 기독교인들과 교회의 입장에서 이 행위에 대하여 예리하고 철저한 비판을 지속성 있게 제시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 행위가 하나님이 세우신 경고판을 무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경고판을 무시하고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생길에 하나님이 세우신 경고의 표시판을 율법, 명령, 규례, 법도 등이라는 다양한 용어로써 표현하고 있는데, 이 경고판을 무시하고 그 길로 들어서는 자의 운명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명기28장15절에서 19절의 말씀을 한번 읽어 봅시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경고의 표시판을 무시하고 걸어가는 자는 저주의 멧세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신명기28잘 한 장에서만도 저주의 내용이 68절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배아실험은 무엇이며, 배아실험은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경고의 표시판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촉발하는 행동인가? 먼저 배아실험의 논리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이 실험이 지니는 성경적인 문제점을 세 가지 관점에서 제시하고자 합니다.


배아란 수정란이 만들어진 순간부터 뇌기능이 감지되기 시작하는 시점인 수태후 약 3개월까지의 자궁속의 아기의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최근에는 생명윤리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이 시기의 인간생명체를 배아라고 부르는 호칭 자체도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원래 배아라는 명칭 자체가 아기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 생명체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명칭인데, 자궁속의 생명체도 인간이라면 왜 아기라는 좋은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식물이나 다른 동물의 경우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학명인 배아라는 용어를 사용하느냐라는 것이 이분들의 지적이고, 이런 지적은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사실상 배아도 아기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배아실험이란 수정란이 16개의 세포로 분열될 때까지의 배아를 대상으로 실험을 실시하는 것을 뜻합니다. 배아실험은 두 가지 형태로 진행되는데 하나는 배아치료이고 다른 하나는 배아복제입니다. 배아치료는 수정란이나 배아에게서 세포를 추출한 뒤에 세포 안에 있는 유전자를 검사해 보고, 이 유전자로부터 장차 질병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거나 이상이 있는 유전자가 발견되면 이 유전자를 제한효소라는 물질을 이용하여 잘라내고 이 유전자가 있던 자리에 이상이 없는 건강한 유전자를 끼워 넣어서 아예 질병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아단계에서부터 차단시켜 버리려는 시도를 뜻합니다. 유전자조작기술이 이때 이용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배아에게서 나이가 40살쯤 되었을 때 발현되기로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음이 발견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배아가 자라기 전에 가능하면 수정란단계에 있을 때 아예 유전자조작기술을 통하여 유전자를 교체해 버리면 질병의 뿌리를 아예 뽑아 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방식으로 병들고 문제가 있는 유전자를 발생초기에 아예 교체해 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이와 같은 배아치료 개념은 현실화된 것은 아니고 현 단계에서는 대부분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것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론상으로 가능한 것을 현실화시키고자 시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배아치료는 기술적인 면만 보더라도 많은 위험부담이 뒤따르는 치료술임이 인식되고 있습니다. 우선 병든 유전자를 빼내고 새로운 유전자를 주입시키는 과정에서 배아에 치명적인 손상이 찾아 올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을 대상으로 하여 300번 가량 실시한 실험에서 성공적으로 유전자교체가 이루어진 경우는 5번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295번은 배아가 파괴되었든지 아니면 배아가 기형으로 나타난 경우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전자의 교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교환된 유전자를 가진 DNA가 장기적으로 어떤 부작용을 일으킬는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도 중요한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습니다. 배아단계에서 유전자치료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질병은 근원적으로 해결되겠지만, 유전자치료에 부작용이 생기게 되면 이 부작용은 평생 지속되게 되며, 대물림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배아치료가 기술적으로 가능해진다면 배아치료는 십중팔구 우생학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습니다. 유전정보가 모두 알려지게 되고, 또한 유전자교체가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마치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예뻐지기 위하여 코도 뜯어 고치고 턱도 뜯어 고치고 가슴도 뜯어 고치기 위하여 외과수술기법을 이용하는 것처럼, 전인적인 성형의 목적을 위하여 유전자조작술을 이용하려 들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입니다. 얼굴형을 예쁘게 결정해 주는 유전자, 머리가 좋아지게 만드는 유전자, 키가 크게 만드는 유전자 등과 같은 우성유전자들로써 기존의 열성유전자들을 대체하여 맞춤형 아기를 생산해 내려는 시도가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인위적인 기술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생명이 창조되는 과정에 깊이 개입됩니다.

또 하나의 배아실험은 배아복제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배아복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하나는 생식세포배아복제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체세포배아복제방식입니다. 생식세포배아복제는 시험관에서 인공수정방식을 통하여 만든 수정란을 복제에 이용하는 방식이고, 체세포배아복제는 체세포를 떼어내어 체세포의 핵과 핵을 제거한 탈핵난자를 전기충격으로 결합시켜서 만든 수정란을 이용하는 방식입니다. 수정란이 약 8세포기까지 배양되었을 때 배아를 할구분할합니다. 할구분할된 하나하나의 세포들을 다시 탈핵난자와 결합시켜 또 다른 수정란을 만듭니다. 이렇게 해서 생성된 수정란을 다시 배양액에 집어넣어 자라게 하다가 일정한 크기로 자라났을 때 자궁에 착상시키고 자궁에 착상된 배아가 성공적으로 자라나 출산하게 되면 복제동물 또는 복제아기가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배아복제를 시도하는 이유는 복제아기를 얻는데 있다기보다는 난치병치료나 대체장기생성의 원료가 되는 줄기세포를 얻고자 함에 있습니다. 줄기세포는 다른 세포와는 다른 독특한 특성을 가진 세포로 알려져 있다. 첫째로, 줄기세포는 어떤 장기로도 분화될 수 있는 만능성을 가진 세포입니다. 둘째로, 줄기세포는 극히 신선한 세포입니다. 따라서 이 세포를 가지고 병든 인간의 장기를 대체할 수 있는 장기들을 생산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으며, 난치병치료의 열쇠가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생명공학자들이 사활을 걸고 배아복제를 통하여 줄기세포를 얻어내려고 하고 있고 줄기세포연구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의학이 획기적으로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난치성 질환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희귀한 질환이었던 암이 이제는 우리 국민의 1/4이상이 암으로 고통 받고 있을 만큼 보편화되었습니다. 고혈압, 당뇨병, 비만, 치매와 같은 질환들도 증가하고 있으며, 기타 난치성 희귀질환도 결코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질환들을 치료하는 방법을 발견하기 위하여 생명공학자들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정당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난치의 질환의 치료가 아무리 급박한 과제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넘어가지 말라는 경계의 표지를 무시하고 인간의 생명이 처참하게 짓밟히는 낭떠러지로 인류사회를 몰아넣으면서 난치병치료를 시도해서는 안 됩니다. 난치병 치료 보다 중요한 가치는 인간의 생명의 가치입니다. 난치병치료를 위하여 인간의 생명이 희생되는 길이라면 그 길이 아무리 지름길이라도 안전한 먼 우회로를 채택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줄기세포가 정 필요하다면 줄기세포추출이 몇 십 배 힘들다 하더라도 윤리적인 문제가 없는 성체줄기세포추출방식을 이용한다든지, 전통적인 의학연구에 집중적인 예산을 투입하여 질병치료법을 꾸준히 연구하는 등의 우회로를 택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사회의 존망이 문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생명공학의 연구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경계의 표지판의 내용은 무엇인가? 필자는 세 가지를 그 내용으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배아실험은 독립된 주체로서 존중받아야 할 인간의 생명을 죽이는 희생을 통해서라야만 진행될 수 있는 실험이므로 중단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관건은 배아는 과연 인간인가 하는 것입니다. 배아가 인간이라면 배아실험은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범하는 행위가 됩니다. 배아를 인간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생명의 시작점이 어디냐 하는 문제와 같은 문제입니다. 언제부터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는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 시점 이전과 이후가 어느 정도로 불연속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시점 이전은 독립된 인간생명체로 볼 수가 없는 반면에 이 시점 이후는 독립된 인간생명체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명확하다면 이 시점은 생명이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생명은 언제 시작되는가?

종주의라는 학설에서는 정상적인 성인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점이 인간으로 볼 수 있는 시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기억한다든지, 도덕적 인식능력이라든지, 미래를 기획하는 능력, 호기심과 같은 특징들이 나타나는 시점이 곧 인간으로 볼 수 있는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특징들이 나타나는 시점을 정확하게 관찰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각 사람마다 이런 특징들이 나타나는 시점이 각각 다르다는 점은 이 주장의 모호성을 보여줍니다. 만일 이 주장을 채택하게 되면 유아들이나 치매에 걸린 노인들, 혼수상태에 있는 환자들은 당연히 인간의 범주로부터 제외되는 심각한 문제가 노정됩니다.


뇌파설은 임신한지 2-3개월 무렵이 되어서 뇌파가 감지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뇌파설에서는 뇌파의 감지는 뇌가 활동을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그러면 뇌파가 감지되는 시점이 과연 뇌가 활동을 시작하는 시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뇌파가 감지되는 시점은 이미 미약하게나마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오던 뇌의 활동이 한층 강화되었을 때 감지되는 것일 뿐입니다. 미약하게 활동하던 뇌가 좀더 강하게 활동하기 시작한다고 해서 그 전과 후가 결정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뇌파설도 인간생명의 시작점으로 타당성을 부여받기가 어렵습니다.


생명공학연구가 진행되면서 사실상 종주의나 뇌파설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종주의나 뇌파설보다 인간생명의 시작점을 훨씬 더 앞당긴 원시선설이라는 새로운 입장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원시선이란 자궁 속에서 자라는 아기의 등뼈가 굳어져서 검은 선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척추선은 수정이 이루어진 후 약14일경이 되면 나타나는 것으로 관찰되었습니다. 수정 후 14일경이 되어야 비로소 인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원시선설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원시선의 출현이 과연 그 이전과 이후를 결정적으로 다르게 보아야 할 만큼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등뼈는 14일경 이전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다가 14일경이 되었을 때 비로소 처음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수정이 이루어진 순간에 이미 등뼈에 관련된 유전자가 형성되어 있고, 이 유전자의 신호에 의하여 점진적으로 자라나다가 14일경이 되면 이전에 비하여 조금 더 단단해지는 것뿐입니다. 원시선을 가지고는 그 이전과 이후를 본질적으로 다르게 봐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시선은 점점 작아지다가 잉태후 3-4주경이 되면 아예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원시선은 자궁속의 아기가 연속적으로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서 척삭(notochord)이나, 신경관(neural tube)이나, 신경모(neural crest) 등이 형성되면서 보다 복잡한 구조를 갖추어가기 시작한다는 “한시적인 표지”(a temporary signpost)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생물학적으로 볼 때 하나의 상식처럼 되어 있는 것인데, 생명공학자들이 이 이론에 매달리는 이유는 14일 이전의 자궁속의 아기를 실험과 조작대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절실한 욕구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생명의 시작점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는 시점은 인간의 영혼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2장7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 본문에 따르면 인간의 창조가 두 단계로 진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흙으로 사람의 신체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흙으로 만들어진 신체만으로는 아직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두 번째 단계로 생기를 흙으로 된 신체에 불어 넣으셨습니다. 생기는 영을 말합니다.


그러면 생기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말이 어디에 있느냐? 스가랴서12장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이 본문에 있는 사람은 창세기 2장에서 말하는 사람처럼 인간의 신체를 가리키고, 심령은 창세기2장의 생기를 가리킵니다. 생기 곧 심령이 어떻게 생겼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셨다, 곧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혼을 창조하신 후에 흙으로 만들어져 있는 아담에게 넣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령이라는 말은 살아있는 인격체라는 뜻입니다. 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살아있는 한 사람의 인격적 주체로서의 생명이 시작된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명은 창조된 영혼이 신체 안에 들어올 때 시작됩니다. 물론 창세기2장에서 하나님이 영혼을 신체에 넣어 주실 때 영혼을 창조하셔서 한참 보관하고 계시다가 넣어 주신다고 보기는 어렵고 영혼을 창조하시면서 동시에 넣어 주시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에 들어맞습니다. 생기는 바람이라는 뜻도 있는데, 바람은 불어오는 그 순간에 만들어집니다. 바람을 어디에 가두어 놓았다가 내보내는 일은 없습니다. 불어오는 순간에 만들어지는 바람처럼 인간의 영혼도 한 순간에 창조되었고, 창조와 동시에 신체 안에 불어넣어졌습니다. 스가랴서12장1절 말씀은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영혼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된 영혼이 신체 안에 들어올 때 살아있는 인격적 생명체가 된다는 것이 창세기2장7절과 스가랴서12장1절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정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혼이 어느 시점에 신체 안에 들어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2장7절 말씀이 이 질문에 대하여 줄 수 있는 답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의 신체가 창조된 방식과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 창조된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직접 신체를 만드셨고, 아담에게 영혼이 들어갈 때는 아담은 이미 다 자란 성인의 신체였음이 분명합니다. 이 점은 하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인류는 신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아담과 하와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우선, 아담과 하와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지 않으십니다. 이들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생식과정을 통하여 신체가 형성됩니다. 다음으로는 아담과 하와 이후의 모든 인간들의 신체는 점진적인 생물학적 발생과정을 거치면서 수십 년의 기간동안에 형성됩니다. 영혼은 한 순간에 창조되는데, 신체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형성된다면 영혼이 신체에 들어오는 시점이 어느 시점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아담과 하와 이후의 인류에게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에 등장하는 인간들도 아담과 하와처럼 단번에 완전한 성인신체로 태어난다면 문제는 간단하지만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 이후의 인간들의 신체 안에 언제 영혼이 들어왔는가에 대하여 직접적인 답변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근거해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도 얻어낼 수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직접적인 답변을 주지 않고 있지만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의 입장을 정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몇 군데의 성경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시편51편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또 시편139편1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이 두 본문들을 보면 아기가 자궁에서 성장하는 과정이 다 나옵니다. 이 본문을 보면 자궁속의 아기의 상태를 잉태, 조직, 출생으로 말하고 있는데, 자궁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었던 당시에 잉태라는 말을 썼을 때는 정자가 자궁 속으로 들어가 난자를 만나 자궁에 착상하는 과정 전체를 두리뭉실하게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직은 착상된 아기에게서 세포가 분화되어 각종 장기가 형성되는 발생의 과정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출생은 다 자란 태아가 출산하는 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편이 말하는 잉태, 조직, 출생은 뱃속에 있는 아기의 전 과정을 가리킵니다. 이 기간동안 다윗은 자신의 상태를 가리켜서 “나”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나”라는 표현은 살아있는 인격적 주체에게만 적용되는 표현입니다. 살아있는 인격적 주체라 함은 곧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특히 우리가 유의해야 할 부분은 잉태되는 시점에 이미 뱃속의 생명체는 이미 “나”가 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현대의학적으로 말한다면 잉태의 시점 이전에 곧, 수정란이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살아있는 인격적 주체가 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정말 현대의학이나 인간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정말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영혼을 신체에 불어 넣으시기 위해서는 영혼을 먼저 창조하셔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한순간에 집어넣으신다 하더라도 순서는 영혼창조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집어넣는 순서가 따라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혼이 존재하기 시작하면 신체가 부여되든 되지 않든 이미 살아있는 인격적 주체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육체적인 죽음을 죽으면 영혼은 신체와 분리되어 천국에 가지 않습니까? 이때 신체가 없어도 영혼이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인격적 주체가 아닙니까? 따라서 이제 어떤 결론이 나옵니까? “잉태되기 직전에 이미 영혼이 창조되어서 “나”라는 인격적 주체로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잉태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착상의 순간까지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잉태의 과정의 전 기간동안 뱃속의 생명체가 영혼을 가진 인격적 주체인 “나”가 되려면 적어도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에는 영혼이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시편에 나타난 이와 같은 생각을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본문은 누가복음에 있는 두 곳의 본문들입니다. 세례요한의 출생과정을 보도하고 있는 누가복음1장41,4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누가복음은 당대의 의사였던 누가가 기록한 복음인데, 누가 의사는 뱃속에 있는 태아를 가리켜서 “아이”라고 호칭합니다. 아이라는 말도 역시 살아있는 인격적 주체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아기 예수님의 출생기록을 보도하고 있는 누가복음1장46절과 47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마리아는 태중에 있는 아기 예수님을 “주님”으로, “내 구주 하나님”으로 호칭하였습니다. 만일 뱃속에 있는 태아가 살아있는 인격적 주체가 아니라 마리아의 신체에 속한 세포나 장기 가운데 하나라면 마리아가 자기의 세포나 장기를 향하여 주님이라고 부르고 구주 하나님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마리아는 정신병자가 되고 맙니다. 로마 카톨릭교에서 성모로까지 높임을 받고 있는 마리아가 정신병자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이상의 성경본문들에 대한 해석에 근거하여 생각해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혼은 수정란이 형성되는 바로 그 시점에 인간의 신체 안에 들어온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시작을 수정란 시점부터 보아야 한다는 사실은 성경적으로만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나 유전학적으로도 수정란의 시점을 살아있는 인간의 생명의 시작점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는 사실이 충분히 뒷받침됩니다. 유전학적으로 수정란 시점을 생명의 시작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는 너무나도 자명한 것인데, 생명공학자들이 너무나도 자명한 이 원리를 애써서 외면하려 드는 것은 이 원리를 받아들일 경우에 자신들의 연구가 크게 제한받고 또한 자신들에게 돌아올 경제적 이득도 엄청나게 통제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수정란 형성시점은 중요한 두 가지 중요한 특징에 있어서 그 이전과 이후를 생물학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로 볼 만한 충분한 근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지적할 점은 살아있는 생명체의 특징은 세포가 분열을 하고 단백질을 생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정란이 형성되기 이전의 정자와 난자는 아무리 좋은 배양환경을 마련해 주어도 영양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따라서 당연히 자기복제를 하지 못하고 단백질을 생산해내지도 못합니다.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수명만큼 존재하다가 죽어 버립니다. 그러나 일단 수정이 되고 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수정이 된 후에는 영양분만 지속적으로 공급이 되면 그 영양분을 빨아들여서 스스로 복제도 하고 단백질도 합성해 냅니다. 생물학적으로 생명체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갖추게 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수정란 이전과 이후는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유전학적인 변화입니다. 정자나 난자가 형성되는 시점부터 시작해서 수정란이 만들어지는 시점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격변이 이루어집니다. 이 격변은 몇 단계를 거치면서 일어납니다. 인간의 세포는 체세포와 생식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포들은 끊임없이 세포분열을 합니다. 체세포는 46개의 염색체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고 모세포와 똑같은 모양으로 분열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생식세포는 보다 복잡한 분열과정을 거칩니다. 생식세포는 2번에 걸쳐서 분열이 이루어집니다. 염색체가 92개로 증가하여 두개의 세포로 분열되기 전에 모계에서 온 23개의 염색체와 부계에서 온 23개의 염색체 일부가 서로 유전자를 교환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유전자가 교환되면 비로소 한 개의 세포가 46개의 염색체를 가진 두개의 세포로 분열됩니다. 이것이 일차분열인데, 일차분열이 이루어졌을 때 이미 분열된 세포는 모세포와는 유전자구성이 달라져 있습니다. 분열된 세포가 2차로 분열합니다. 이때 분열은 감수분열의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감수분열이라는 것은 46개의 염색체가 23개의 염색체로 그 숫자가 반으로 줄어드는 것을 뜻합니다. 원래 염색체는 모계로부터 온 염색체 하나와 부계로부터 온 염색체 하나가 짝을 이룬 형태로 23쌍 곧 46개의 염색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감수분열시에 짝 하나가 떨어져 나가 버리고 외짝이 됩니다. 그래서 외짝의 23개의 염색체구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짝이 나누어질 때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자, 이제 우리가 여기서 한번 나누어지면 앞으로는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 작별파티를 한번 하자. 작별파티를 할 때 우리 모두 자유롭게 짝을 한번 바꾸어 교제해 보자. 그리고 나서 우리 영원히 작별을 고하자.” 그리고는 모계에서 온 23개의 염색체와 부계에서 온 23개의 염색체 사이에서 자리교환이 이루어집니다. 이때 새롭게 교환될 수 있는 자리교환의 가짓수는 2의 23승 = 840만 가지입니다. 840만 가지의 새로운 염색체 배열방식 가운데 하나가 선택됩니다. 엄청난 변화입니다. 그렇게 해서 염색체 배열이 새롭게 이루어지면 23개의 외짝 염색체를 지닌 반쪽자리 세포로 분열합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의 세포가 4개로 분열되면서 분열이 끝납니다. 이렇게 해서 23개의 염색체를 가진 반쪽짜리 세포가 남자의 경우에는 정자가 되고, 여자의 경우에는 그 가운데 하나가 난자가 됩니다. 그런데 변화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자와 난자가 수정이 되면 정자의 23개 염색체와 난자의 23개의 염색체가 통합되어서 다시 2개씩 짝을 이룬 23쌍 46개의 염색체구조가 복원됩니다. 그런데 이때 정자의 23개의 염색체와 난자의 23개의 염색체가 만나서 다시 짝을 맺기 전에 다시 한번 새롭게 짝을 찾고 자리를 배열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때도 역시 2의 23승 = 840만 가지의 새로운 배열방식 가운데 하나가 선택됩니다. 이렇게 해서 세 번에 걸친 유전자구조변화를 겪게 됩니다. 따라서 수정란은 1차분열 직전의 유전자교환에 곱하기 정자와 난자로 감수분열할 때의 840만 가지 곱하기 정자와 난자가 수정란으로 통합될 때의 840만 가지의 새로운 구성상의 변화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합니다. 이 수치는 천문학적인 수치입니다. 이런 천문학적인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가 우연히 선택될 가능성은 제로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설명하지 않으면 어떤 다른 방식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천문학적인 새로운 배열의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인류가 태어나도 모두 다 지문이 다르고 개성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독립된 인격체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소용돌이를 겪고 나서 만들어진 수정란은 생식세포와는 유전자구성이 다른 세포로 거듭납니다. 수정란은 부모의 염색체의 요소들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연속성이 있지만 그 구성과 배열에 있어서는 뚜렷하게 불연속성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정란시에 한번 형성된 염색체배열구조는 외부의 자극이 없는 한 죽는 날까지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됩니다. 외부의 자극이 있어도 극히 작은 한 부분이 병들어 왜곡되거나 고장이 생기는 것 정도의 변화밖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염색체 구성상으로 볼 때 한 인간의 일생에서 획기적인 불연속적 격변은 수정란형성 시점 밖에는 없고 나머지 모든 시간은 연속성을 유지합니다. 따라서 생물학적으로나 유전학적으로 수정란의 형성은 유일하게 그 이전과 이후를 질적으로 다르게 볼 수 있는 유일한 시점입니다.


수정란 형성 이후에 전개되는 한 인간의 일생에서 겪는 가장 큰 변화는 사춘기 때 신체의 성징이 변화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것처럼 사춘기의 변화를 겪고 난 후에 우리 스스로가 ”사춘기 이전에는 인간이 아니었다가 사춘기 이후에는 인간이 되었음을 느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춘기의 변화를 겪기 전이나 후나 우리의 인식 속에 “나”라는 인격적 주체가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인식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사춘기의 변화를 겪기 전의 나는 곧 사춘기의 변화를 겪은 이후의 나와 동일한 나로 우리는 인식합니다. 사춘기의 변화가 이 정도라면 그 밖에는 어떤 계기도 그 이전과 이후를 다른 나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이상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경적인 관점에서나 유전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수정란형성시점 이외에 어떤 다른 시점을 인간생명의 시작점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합니다. 따라서 배아의 파괴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배아실험은 명백히 살인행위가 됩니다.

 

두 번째로, 배아실험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동이며, 하나님의 창조에 결함이 있어서 인간이 그 결함을 보완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판단보다는 인간의 판단이 더 우월하다는 영적인 교만의 표현이기 때문에 중단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배아실험은 세포내의 DNA를 조작하는 것이며, 이는 곳 인간의 생물학적 신체를 조작하는 것인데, 과연 인간의 신체도 하나님의 형상인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1:27).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은 서로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두 개의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성은 두 차원으로 나누어서 이해하는 것이 정설입니다. 하나는 좁은 의미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 의로움, 거룩함을 뜻한다. 골로새서3장10절에서는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는 말씀이 있고, 에베소서4장24절을 보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두 본문을 종합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었다는 말은 곧 잃어 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것을 의미하는데, 이 하나님의 형상은 곧 지식, 진리, 의, 거룩 등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좁은 의미의 형상은 인간이 타락했을 때 상실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인데, 이 형상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상실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이 영원히 존재하는 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은 몸과 연합되어 있고 몸에 신축성 있게 적응하지만 그 존재가 몸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몸이 해체되어 버린 뒤에도 영은 존재합니다. 영은 이성, 양심, 의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을 가집니다. 영은 육체를 통하여 자기를 표현합니다. 육체는 영이 자기를 표현하기에 적합할 만큼 하나님의 형상의 광채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육체도 하나님의 형상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좌소는 인간의 영혼 속 곧, 정신과 마음, 혹은 영혼과 영혼의 능력들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를 포함하여 인간 속의 어느 곳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따라서 창세기9장6절은 사람의 몸을 죽이는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로 해석되었습니다. 창세기1장16절과 27절 그리고 창세기9장6절의 말씀을 주의 깊게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는 곧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무엇인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포함하는 전인을 말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영혼과 육체를 포함하는 전인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신체는 당연히 하나님의 형상이며, 인간의 신체를 부당한 방법으로 훼손시키는 행위는 곧 하나님의 형상을 모독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왜곡되고 병든 DNA가 아닌 정상적인 DNA를 유전자조작을 통하여 교체함으로써 더 나은 인간과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창조솜씨 보다는 인간의 솜씨가 우월하다는 영적인 교만의 소치입니다.


셋째로, 배아실험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정의의 원리에 배치되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합니다. 정의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정의의 원리는 이사야서40장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이 본문은 그대로 누가복음3장5절에 인용됩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산과 골짜기의 비유에서 산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부유한 자, 권력을 가진 자, 재능이 있는 자, 건강한 자를 통칭합니다. 골짜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골짜기는 가난한 자, 권력이 없는 자, 재능이 있는 자, 병든 자를 통칭합니다. 사회적 약자가 이 안에 포괄되어 있는데, 배아는 사회적 약자들 가운데 가장 밑바닥에 속해 있습니다. 배아에게는 자기 스스로 자기 생명을 지킬 힘이 전혀 없으며, 자기의 자율적 의사를 표현할 능력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산에게 자기 흙을 좀 내어 놓으라고 산의 희생을 요청하시며, 산이 희생하여 내어 놓은 흙을 가지고 골짜기를 메워서 골짜기를 높임으로써 산과 골짜기가 큰 갈등이 없이 지내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와 같은 정신은 나무의 대조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겔17:24).

이와 같은 정의의 원리를 실현에 옮기기 위하여 하나님이 채택하시는 전략은 사회적 약자에게 편애적인 관심과 배려를 베푸시고 또한 그런 배려를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건강하고 능력이 있는 자녀와 병들고 장애를 안고 있고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약한 자녀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부모는 두 자녀를 다 사랑합니다. 그러나 한 자녀는 산과 같은 높은 위치에서 잘 살고, 다른 한 자녀는 골짜기와 같은 질곡에서 비참한 삶을 사는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때 부모가 취하는 전략이 무엇입니까? 건강하고 능력이 있는 자녀에게 상당한 정도의 관심이 소홀히 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병들고 장애를 안고 있는 자녀에게 집중적으로 사랑을 쏟아 붓습니다. 그래야 어느 정도라도 균형이 잡힌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99마리의 건강한 양이 우리에 있고 한 마리가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어떤 정책을 취하십니까? 99마리를 그대로 놓아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들판을 뒤지고 다니십니다. 현대사회는 어떻게 합니까? 한 마리를 찾느라고 99마리를 방치하는 비효율적인 행위를 공리주의에 젖어 있는 현대사회는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한 마리를 무시해 버리고 99마리를 데리고 앞으로 갑니다. 생명공학이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되는 엄청난 공리적 혜택 앞에서 배아의 생명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향하신 길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라는 점을! 모세의 율법 안에는 이스라엘의 신정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실정법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실정법들은 전체적인 방향이 철저하게 이스라엘 사회 안에 있는 고아, 과부, 나그네, 이방인들, 전쟁포로들, 가난한 자들에 가해질 수 있는 억압을 최소화시키고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이와 같은 입법의 방향은 99마리의 양을 우리에 놓아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입법에 잘 반영된 것이요, 법철학의 터전이 바르게 놓인 것입니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 법조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배아복제를 전면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한국의 생명윤리안전법에 대한 위헌소송을 제기했는데, 이 위헌소송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소송으로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의미 있는 조치로 기록에 남게 될 것이며, 미래의 기독법조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의 한 사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선례가 될 것입니다. 이 소송은 99마리의 양을 우리에 두시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고 생명윤리와 법의 영역에서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표현입니다. 이 소송 안에는 자기 의사를 표명할 수 있는 자율적 의사표명권조차도 행사할 수 없는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연약한 인간을 향한 깊은 애정의 마음이 담겨 있으며, 이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곧 이 땅을 정의로운 사회로 변혁시키기 위한 최전선에서의 투쟁이라는 소명의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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