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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카테고리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작성자 : 협회 2017-11-22 12:32:02
[협회 제12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대상] "1%로 자라나게 하시는 주님"(2017. 10.)

 

 

1%로 자라나게 하시는 주님



조영애

(주부, 지구촌교회)

2017. 10.



저는 불교가정에서 태어나서 결혼전까지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제가 기독교 집안으로 시집을 오면서 나에게 교회 나가는거 강요하지 말아 달라고 남편을 통해 시댁에 요청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조용히 기도하시는 인자하신 시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내스스로 교회를 찿아 나가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 잘섬기는 것이 당신께 효도하는것이라는 시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저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첫째로 예쁜딸을 낳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둘째아이 모세를 가졌을때는 제가 묻지도 않았는데 의사분께서 아들이라고 일러 주셔서 그 아들이라는 말이 왜그리 기쁘던지 제입가에는 미소가 떠날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기쁨도 잠시 우리부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임신 4개월말경 초음파 검진을 통해 아이의 머리쪽인지 산모의 자궁쪽 인지에 무언가가 있는거 같으니 큰병원에 가서 정밀검진을 받아보라는 의사분의 말에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습니다. 기도하시는 시어머니께 말씀을 드리고 목사님께 심방을 요청하여 기도를 받고 수원에 있는 성빈센트병원에가서 정밀검진을 받은결과 아이의 머리뒤쪽 부분에 뼈가 형성이 되지않은 부분으로 안에들어 있어야할 뇌가 밖으로 다쏟아져 나와서 아이가 살수없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게되었습니다. 저희 가족 모두는 하나님의 선한뜻을 알기위해 목사님을 모시고 눈물로 기도하며 예배를 드렸고 오진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한주간 기도한후에 다시 재검진을 받기로 했습니다. 이때 저는 처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가서 재검진을 받았지만 검진결과는 마찬가지였고 의사분께서는 낙태를 권유 하셨습니다.
저희 가족은 보이지 않는 생명이었지만 그생명이 가여워서 눈물로 기도하며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라 믿으며 더욱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카톨릭병원이라 낙태를 반대하지만 산부인과 의사분들 전체회의에서 이러한 경우에는 아이가 도저히 살수없고 산모도 위험할수 있으니 낙태를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최종적으로 통보를 해왔습니다. 이때는 저희도 어쩔수 없어서 낙태수술 날짜를 잡고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환자복을 갈아입고 수술을 대기하고 있을때 목사님께서 심방을 오셨고 사무엘상1장12~18절 말씀 한나의기도라는 제목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수술 시간이 되어 수술침대가 저를 수술실로 데리고 가려고 병실로 들어오는 순간 그동안에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아이의 미세한 태동을 느꼈고 하나님께서 저의 마음에 인위적으로 이아이를 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수술을 포기하도록 이끄시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10개월을 채워 1992년8월4일 재왕절개로 아이는 세상에 왔습니다.
아이를 안고 신생아실로 향하던 간호사분이 보호자분 빨리오세요 라고해서 아이아빠가 신생아실로 달려 갔는데 그곳으로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답니다.참으로 머리만한 뇌가 뇌막에 쌓인채로 밖으로 흘러나와 있었습니다. 모세라는 이름은 목사님께서 아이를 놓고 기도하시는데 성경에 모세와 지금의 아이가 죽을뻔 횟수가 똑같다며 아이의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는데 그이름을 받겠느냐고 대예배중에 말씀을 하셔서 시어머님과 남편이 그이름을 받겠노라 하여서 박모세가 되었습니다.
출산후에 수술을해도 죽고 안해도 죽는다는 의사분의 기막히는 선언에 정말로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까 물으니? 의학적으로는 1%의 희망도 없습니다 라고 말을해서 그럼 이아이가 수술을 해서 산다고하면 그건 의학이 한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일 이겠네요? 라고 하니 맞다고 얘기를 해서 그럼 우리는 모든걸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 할태니 의사분께서는 최선을 다해서 수술해주세요 라고해서 태어난지 3일째돼는날 밖으로 나온뇌를 모두절단하는 수술을했습니다.
대뇌70% 소뇌90%이상을 절단하여서 이제 아기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며 온몸에 장애가 너무 극심해서 얼마 살수없을 거라는 말을 했습니다.
수술후 아이는 온몸을 부르르떠는 전신경련과 함께 호흡곤란이 왔고 병원측에서는 예상했던 마지막 순간이 온것이라 했습니다. 이때 아이의 고통스런 모습을 지켜보며 괴로워하시던 시어머니께서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말씀을 듣자마자 남편과 평소에 자주다니시던 산으로 달려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산벼랑에 서서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벼랑을 구르시고 또구르시고 나무가지를 붙잡고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하나님께 기도할때에 계속해서 기도하라는 응답을 받으시고 교회로 달려가서 그날부터 한주간 작정 철야기도회에 들어 가셨고 그날밤 기도하시다 지쳐서 쓰려져 있는 모습을 늦은시간 기도하러 나오셧던 목사님께서 보시고 전교인에게 휴가반납을 선포하시고 온교회가깨어 함께 하루 두번 특별기도회에 들어 같습니다. 몇일후 아이는 평온해졌으며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이때에 저희 시어머니께서는 우리 부부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당신의 거처를 아예 교회로 옮기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남의일은 3일이면 잊어버린다며 내가 이곳에서 왔다갔다해야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한번이라도 더 모세를 기억하고 기도해즐게 아니냐 하시며 25년이라는 세월을 교회에서 모세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올해 연세가 92세가 되셨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어린 기도와 변함없는 사랑으로 함께해준 남편이 있었기에 오늘 저희가 이자리에 설수있는거라고 말씀드릴수 있습니다.이모든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병원측에서 아이에게 해줄수있는것이 우유먹여주는일외에 해줄게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되어 기도하며 퇴원을 준비했는데 아이의 몸무게가 미달이라 퇴원이 안된다는것을 아이를 퇴원시킨후에 아이에게 일어나는 일은 어떠한것도 병원측에 책임을 묻지 않겠노라는 각서를 쓰고서 강제로 퇴원을 시켰고 퇴원후 바로 성전으로 달려가서 목사님께 기도를 받았습니다.
33일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아기를 좀씻기려고 쌓인보를 펼치는 순간 저는 숨이멎는줄 알았습니다. 세살난 딸아이는 아이의 몸을 가리키며 엄마 이게뭐야 라고 말했습니다.
아이의 모습은 정말 바참 했습니다.머리는 찌그러진 냄비같았고 몸은 뼈에 가죽만 비비틀어져 까베기 모양이되어 도저희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수 없을만큼 흉직하다 못해 너무나 가여운 모습이었으며 지금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는 그자체가 바로 기적이었습니다.
도저히 씻길수가 없었습니다,우유를 한모금 빠는순간 아이는 숨이 막혀 막혀버렸고 놀란 시어머니께서 아이를 않고 이리저리 흔들었는데 왼편으로 비스듬히 기울여진 자세에서 아이의 숨이 터져 나오는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보게하셨고 그때부터 아이도 힘들고 저도힘든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기 시작했는데 숨막히는 고통이 없었기에 감사하였습니다.
한번우유를 먹이는데 30~40분을 먹였는데 아이는 5미리에서 30미리 아주 적은 양을 먹으면서도 살이 붙기시작했습니다. 낮에 혼자있을때 잠든 아이를 보고 정말 못듣나싶어 아이의 이름을 큰소리로 불러보고 방문을 세개 열었다 닫았다 해보았지만 아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았고 어디가 안좋아서 우는건지 배가고파서 우는건지 눈만 뜨면 우는데 우는 아이의 입에서는 울음소리조차 나지않았습니다. 이렇듯 아무반응도 없는 아이를 보면서 그저 어떤 모습이라도 좋으니 살아서 내곁에 있어달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사랑을 다해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에게 합병증으로 뇌수종이 왔고 그로 인하여 뇌출혈을 일으켰습니다.
응급으로 뇌출혈 수술을 하고 중환자 실에 잇는 아이를 보러 같습니다. 홀로 아픔과 고통을 감당한 아이를 좀 않아주고 싶었는데 작은 아이의 몸은 어느한곳도 만져줄수없이 의료장비가 주렁주렁 달려있고 피투성이로 범벅이된 얼굴 머리에는 두군데 구멍을 뚫어 호스를 꽂아 피를 뽑아내고 있는모습으로 고통스러워 산소호흡기를 의존한채 신음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그고통을 대신해주지 못하고 기도밖에 할수없다는 것이 아이에게 너무미안했고 살아만 달라고 한것이 나의 욕심인것만 같아 아이에게 미안하여 중환자실이 떠나가라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때 옆에서 조용히 기도하시던 시어머니께서 하나님의 선한뜻이 분명히 있을거다 우리믿고 기도하자 하시어서 저는 시어머니를 따라 하나님의 선하신뜻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한달만에 기도의 응답으로 아이는 서울 병원으로 옮겨졌고 뇌수종의 일인자이신 박사님을 만나 아이는 머리에 관을 밖고 그관에 호스를 연결하여 목을 지나 위속으로 인공적으로 뇌수를 흐르도록 하는 수술을 하였습니다. 1년뒤에 그관이 막혀서 뚫는 제수술하였고 아이는 이렇게 4번에 뇌수술과 뒤틀어진 다리를 교정하기위해 2번의 수술을 더하여서 총6번의 수술을 하였습니다.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아이는 장하게도 잘견디어 주었습니다. 수술비로 인하여 저희는 많은 빛을 져야만 했습니다.또한 남편의 부도로 인해 정말 사방이 다막혀 버리는 너무나 힘든 현실에서 모든것을 다 포기하고픈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부부에게 기도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지켜줘야할 아픈아이를 보면서 다시금 새힘을 주시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저도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우유배달과 목욕탕 청소 음료수와 커피자판기 관리를 하며 힘들었지만 열심히 일했습니다.
한날 목욕탕 청소를 하면서 탕안에 물을 퍼내기위해 모터를 들고 가다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모터와 함께 넘어 졌는데 하필 모터가 저의 허벅지에 떨어졌고 저는 너무아파서 울었습니다.
그때의 저의모습이 너무 서럽고 비참해서 죽고싶었으며 하나님을 원망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짖말쟁이라고 나를 사랑하신다면서 어떻게 이렇게 나를 힘들고 비참하게 하시느냐고 원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있는것에 감사하라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개중에 아홉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에게 없는 한가지때문에 많이들 힘들어 하는것을 보았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는 잊는 그한가지에 감사하게 하셧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저는 정말 잊는그 한가지에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살아만 달라고 한아이가 살아있는데 다를것을 더 바란다면 그건 욕심이고 사치라 생각하며 무조건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나의 환경은 변한게 없었지만 세상이 달라보였습니다. 남들은 돈주고 목욕해야 하는데 나는 돈을 벌면서 매일 사우나를 할수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아픈아이를 데리고 일을 할수있다는것이 더욱더 감사하여 무조건 감사하며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도 들어주시고 감사의 조건들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혼자서 않았다 누웠다 만이라도 해주세요 기도했는데 어느날 않게 하셨습니다. 서게해주세요 기도했는데 서고 걷게까지고 하셨고 말을 할수 있게해주세요 기도했더니 다섯살때에 입을 열어 말하게 하시며 처음 쏟아낸 단어가 신앙을 고백이라도 하듯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이었습니다. 아픈아이를 데리고 제가 할수있는 일은 기도하며 예배드리는 일이었는데 그때의 하나님께서 듣지 못한다고 한 아이의 한쪽귀를 열어 주시고 암기할수있는 달란트도 허락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일곱살때에 선교원 재롱잔치에서 노래를 했는데 노래가 끝난후 많은 사람들이 뭔가 깊은 울림이 있다. 감동스럽다. 아이때문에 처음으로 교회에 오신 믿지않는 부모님께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듯 하다고 하셨다.많은 분들의 이런 반응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부부에게 아이가 할수있는게 노래라는 것을 알게하셨고 그때부터 집중적으로 아이에게 노래를 들려주며 시키기를 반복했는데 그때에 아이는 자기는 하나님을 찬양하는것이 자기의 삶이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이의 고백을 들으셨던지 하나님의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아이를 세상속에 알리셨습니다. 2013년1월29일 평창 동계스폐셜 올림픽에서 생방송으로 애국가를 부르게하고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셧고 많은 사람들은 감동을 받으며 희망을 노래하는 기적의청년이라고 힘찬 박수를 보내주어 주었습니다.
또한 먹고 살기 힘들어서 국내 여행 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우리를 두달여 일정으로 미국12개 주를 다니게 하셨고 힘들고 지친 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플러튼시장님께서는 연약한 몸으로 이먼곳까지 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노래해 주어서 고맙다며 명예시민 증서까지 받는 영광 또한 누리게 하셨습니다.
또다시 저희는 센프란시스코와 시애틀 캐나다벤쿠퍼로 보내시고 장애아를 키우시며 힘들고 지친 부모님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고 돌아오게 하셨고 세계장애인의날 기념식이 뉴욕 유엔본부에서 있었는데 그곳으로 보내시어 찬양으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셨고 모세는 많은 사람들의 기립 박수를 받고 승리하며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얼마전에는 kbs 노래가 좋아라는 프로에서 4연승 명예졸업을 하게하시고 불후의명곡에도 출연하며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게 하셨습니다.그리고 연약한 모세의 입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게 하시고 계십니다. 어쩜 이렇게 노래를 잘하냐고 하면 한결같이 모세는 말합니다.하나님이 하셨어요,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요. 의학적으로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며 온몸에 장애가 너무 극심해서 얼마 살수없을 거라던 의사분들의 말을모두 뒤집고 비록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이지만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셨고 잘린뇌도 다시 자라게하시고 무엇으로도 설명할길이 없다하여 하나님께서 하신일임을 증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미국에 세번씩이나 보내셨고 지금은 전국을 다니며 많은분들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하는 도구로 쓰임받는 부러운 여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아무것도 할수없을때에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환경이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지않나요?환경 보시지 마시고 어떤어려움이 있더라도 절대포기하지 마시고 있는것에 감사하면서 믿음으로 기도하시어 고난이 기쁨이되고 절망이 희망이되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로 축복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모세를 살리시고 걸작품으로 만드신 불가능을 가능캐하신 그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세요.
모세에게만 일어난 기적이 아니라는 사실또한 아시고 지금 이순간이 나에게도 일어난 기적이란걸 아셨으면 합니다.우리의 아무렇지 않은 이 평범한 일상이 지금도 누군가에겐 간절한 아주 간절한 기도가 되고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지금 이순간을 감사하면서 행복하시길 소망하면서 모든영광 하나님께 돌립니다. 할렐루야

작성자 : 협회 2017-11-22 12:25:56
[협회 제12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우수상] "생명윤리 활동수기 공모" (2017. 10.)

 




김복음

(주부, 은혜와 진리교회)

2017. 10.

 


저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지니신 다정하신 부모님의 1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바른 신앙생활을 교육받으며 자라왔습니다. 따뜻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예배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며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왔습니다. 비록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도 많았고, 가족들의 이런 저런 육체적 질병으로 인해 고난 받을 때도 많았지만, 정말 때를 따라 도우시고 입히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체험하며 더욱 굳센 믿음의 반석 같은 신앙을 키워갈 수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믿음의 배우자를 위해 기도했었고, 하나님의 예비하심 가운데 지금의 남편을 만나 2013년 4월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저희 가정에 태의 문을 곧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4년 2월에 첫 딸을 출산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만 직후 과다출혈로 저는 병원 앰블런스를 타고 분당의 큰 대학병원으로 바로 이송되었습니다. 아기를 품에 안을 기대에 가득 차 있었던 저는 출산의 기쁨을 만끽할 틈도 없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정신없이 이송되어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들에게 바로 인계 되어 자궁동맥 색전술을 시술받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의 과다출혈 정도는 매우 심하였고, 의료진들이 출혈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참을 찾다가 여러 번 고가의 영상장비 촬영을 통해 겨우 색전술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아기를 한번 품에 안아보지도 못한 채 혈관조영수술실에 누워있으면서,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기를 안아볼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는데.. 지금쯤이면 젖을 물려보고 출산의 기쁨을 누리고 있을텐데..’
하는 생각들이 가득하였습니다.

 이렇게 생명의 고비를 넘기고 저는 중환자실에서 3일간 입원 후 일반병동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당시 교수님께선 정말 위험한 상태였으며, 본 병원 같은 병원이 주변에 있어 응급처치를 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전 천국에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수혈 양을 여쭤보니 전혈 12팩, 성분혈 12팩 정도로 총 제 몸의 1.5배 분량의 피를 수혈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결혼 후 바로 임신이 되었고, 출산으로 크게 어려움을 겪는 주변인을 본적이 없었기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지만 하나님 은혜로 빠르게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당시 목 근처 카테터를 삽입했던 곳에 작은 혈전이 생겨, 1달간 아스피린을 복용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모유수유를 할 수 없게 되어 분유로만 아기를 키우게 되었지만, 아이는 세 돌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응급실 한번 찾지 않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첫 아이를 출산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었었기에, 둘째에 대한 고민이 없지 않았습니다. 친정어머니는 혹여나 딸이 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진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둘째는 생각하지 말고,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 하나로 잘 키워보는 게 어떠냐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고, 상급이며, 가정의 귀한 보물임을 첫째 딸을 키우면서 잘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섣불리 둘째를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과연 건강히 출산할 수 있을지, 내가 두 자녀를 잘 양육할 수 있을지 등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첫째가 두 돌이 지나면서 혼자 지내는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 같은 동생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이 점점 커졌고, 그러면서 둘째에 대한 기도를 어느 순간 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께서는 저희 가정에 두 번째 태의 문을 또 열어주셨습니다.

 임신의 기쁨을 누리기도 잠시, 전 극심한 입덧으로 도저히 첫째를 거둘 힘조차 없어 아이를 친정집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  끊임없이 노란 위액을 게워내며, 음식은 물론 사람 냄새에도 구토가 유발되어 1달간 8kg이 빠졌고, 전 침대에 누워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저의 하루 식량은 겨우 복용한 임산부용 영양제, 물 또는 몸이 받아주는 음료 반 컵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태아의 건강이 걱정되었으나 엄마의 입덧이 심해도 아기는 잘 자란다는 말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고, 하염없는 입덧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침대에 누운 채로 울다 잠들다 하며 지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성경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을 먼저 보게 되었는데 복음서를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특히 병든 자들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는지를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입덧도 예수님의 그 긍휼하심 가운데 잘 이겨내고 빨리 지나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이천년 전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큰 긍휼하심으로 사랑을 베푸시고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신 예수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오랜 세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치시고, 이미 죽은 어린 소녀에게 달리다굼 일어나라 말씀하신 예수님. 수많은 기적과 표적을 나타내시며 천국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게 된 입덧기간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달 반이 조금 지나 저의 입덧은 좋아졌고, 다시금 큰 딸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온 가족이 함께 하는 기쁨도 잠시, 입덧이 끝난 지 채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큰 어려움이 또다시 저희 가정에 닥쳤습니다.

 정기검진을 한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극심한 복통이 왔고 그날 오후 약간의 혈액이 비치었습니다. 하지만 정기검진 때 태반이 아래쪽에 있다는 전치태반 소견을 말씀하셔서 그것 때문일거라 생각하며 조심해야 겠구나 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 뒤 4일 후 몸에서 락스 냄새가 나는 듯한 물이 흐르는 증상에 깜짝 놀라 산부인과를 다시 찾게 되었고, 그것이 양수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검사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불분명한 결과가 나왔고 초음파상의 양수양도 매우 많은 상태여서 의사 선생님은 고개를 갸우뚱 하시며 하루 이틀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입원을 권하셨습니다.
때마침 토요일이였고, 첫째 분만 후 색전술을 받았던 대학병원을 방문하기엔 오히려 몸에 무리가 있을듯하여 주말을 지역 산부인과에서 지내며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입원한 날 저녁과 다음날에도 물컹물컹 액체가 계속 나왔지만 주말이라 담당 의사선생님이 안계셨고, 간호사님도 별다른 조치가 없었기에 괜찮을거라 생각하였으며, 그렇게 월요일이 되었습니다. 월요일 아침에 새는 액체가 양수인지 확인하는 검사를 하였으나 여전히 불분명한 결과가 나왔고 하루만 더 지켜보기로 한 후 퇴원하기로 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퇴원을 하려고 다시 한번 검진을 하고 초음파를 보는데...
의사선생님의 얼굴이 매우 심각해지시면서,
“이런, 양수가 하나도 없잖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토요일에 가득했던 양수가 주말사이에 다 빠져버렸던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제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양수가 하나도 없다니.. 양수가 하나도 없다니... 그럼 우리 아가는 어떻게 되는 거지..’
미세하게 흐르는 양수는 안정을 취하면 정상화 될 수 있다는 사례들을 보고 저도 그렇게 안정을 취하면 곧 집에 가게 될 줄 알았는데, 양수가 하나도 없다는 말씀은 정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습니다. 의사선생님은 제게 대학병원으로 가면 양수를 주입하는 등 뭔가 방법이 있을 거라며, 급히 대학병원으로 보내셨습니다.
앰뷸런스를 타고 30여 분만에 자궁동맥 색전술을 받았던 대학병원에 도착하였습니다. 앰뷸런스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제게 친정어머니는 울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며,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데 왜 우냐고, 왜 걱정하냐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대학병원에 도착하여 약간의 과정을 거친 후 바로 분만장으로 이동하였으나, 저를 담당하셨던 교수님은 학회로 인해 일주일 후에 뵐 수 있었고, 그동안 다른 교수님께서 저를 봐주셨습니다.
당시 저는 조기 양막파열로 양수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고, 임신 17주의 태아가 태어나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주수였습니다. 임시로 봐주신 교수님께선 태아의 예후가 매우 않좋다고 하셨고,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양막 파열의 원인이 아직 명확치는 않지만 양수감염일 가능성이 있고, 양막 파열 자체가 태아의 감염을 유발할 수 있기에 치료와 감염예방을 위해 즉시 항생제투여가 시작되었습니다. 양수가 하나도 없어 양수의 감염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고, 혹시 감염이 있었다면 어떤 균인지 확인할 수 없었기에 당시 임산부가 받을 수 있는 가장 강한 항생제를 처방받았던 것 같습니다. 3종류의 항생제 투여가 시작되었고, 구토와 설사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저는 뱃속 아기 생각뿐이었습니다. 치료의 방향을 잡기 위해 양수검사는 필수적이었고, 양수검사를 하기위해 수시로 초음파로 양수 상태를 확인하였으나 검사 시마다 양수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식사할 때와 화장실 갈 때를 빼곤 침대에 누워서만 지냈으나, 누워있는 중에도 태아의 소변으로 생성되는 양수는 생기는 족족 흘러나왔습니다.
 
 한 주 후 담당교수님이 돌아오셨고, 저의 상태를 보시고선 제게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으셨습니다. 전 잘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저와 같은 상태로 30주를 넘길 수 있을지를 여쭤보았습니다. 조산의 경우 30이라는 주수는 태아가 그나마 건강할 수 있는 상징적인 주수였습니다. 교수님은 언제 진통이 와서 아기를 분만하게 될지, 그게 30주 이후일지 이전일지도 전혀 알 수 없으며, 30주를 넘겼다고 해도 아기가 건강할지 장담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30주를 넘겨 분만하였을 때 좋지 않은 결과를 얻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양수가 없이 태아가 잘 성장할 수 있을지, 건강할 수 있을지.. 수많은 검색을 하였지만, 저와 같이 양수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선 긍정적인 사례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양수가 미세하게 세는 경우 항생제 치료로 다시 양막이 막히는 경우는 있었으나, 저처럼 양막 파열이 심해 양수가 하나도 없는 경우는 하루 이틀 내에 조기 진통이 오고, 늦어도 한 주 안에 조기진통이 와서 분만을 하는 경우가 대다수였습니다. 조기 분만의 경우, 심장이 뛰고 있는 살아있는 태아를 분만하게 되지만, 의학적으로는 적어도 24주는 지나야 태아가 살 가능성이 있었기에 저희 아이의 당시 주수로는 분만과 동시에 생명을 읽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양수검사를 실시하기 위해 계속 초음파를 보던 어느 날 물이 조금 고인 것처럼 양수가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습니다. 교수님은 그 현상을 통해 양수검사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시고, 다음날 한참을 초음파 실에 눕게 하신 후 다시금 고인 양수를 찾아 검사를 시도하셨고, 결국 양수채취에 성공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밤 극심한 진통이 왔고 그 후 덩어리 하혈을 하였습니다. 주치의선생님은 오늘 밤 또다시 진통이 오면 바로 분만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18주의 끝 무렵이었습니다. 전 아기를 잃게 될까봐 눈물을 흘렀고, 하나님께 제발 아기를 살려달라고 기도하며 그렇게 그날 밤이 지나갔습니다.
 
 양수검사 결과는 심한 감염은 아닌데 감염이 없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틀 후 새벽에 또다시 제겐 통증과 덩어리 하혈이 찾아왔고, 19주 2일이던 날 교수님께선 이제 결정을 하자며 저를 부르셨습니다. 여전히 2주간 양수는 생기는 족족 흘러나와 하나도 없는 상태였고, 하혈에 진통까지 있었기에 결단을 하려는 듯 하였습니다. 임신을 계속 유지한다면 30주를 넘길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몰랐으며, 조기 분만 시 태아의 건강을 보증할 수 없었고, 30주 이전 분만시엔 어떤 어려움을 겪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며, 다행히 30주를 넘긴다고 해도 양수가 없는 상태에서 건강하게 아이를 출산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골격에 이상이 있을 확률이 컸고, 폐기관의 성숙은 당연히 어렵거니와 다른 기관의 상태도 어떨지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에선 제게 포기를 조심히 권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전 결정을 할 수 없었고, 제 머릿속엔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생명 주께 있네 라는 찬양 가사만이 계속 맴돌 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초음파를 보시는데..
교수님께서 갈 길이 아직 너무 멀고, 성급히 기뻐하기엔 아직 한참 이르지만, 아주아주 작은 희망을 발견했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적은 양의 양수가 사라지지 않고 고여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엘리야가 비가 오기를 바라고 기도하던 중 사환을 통해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고, 가뭄이 해소될 거대한 비구름이 될 것을 확신했던 상황처럼, 제게도 저 고여 있고 사라지지 않은 적은 양의 양수가 큰 비를 내릴 거대한 비구름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 날 이후로 양수의 양은 조금씩 계속 늘어났고, 양수가 흐르던 증상도 사라졌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아이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시며, 그 딸을 살리신 것처럼 제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20주, 21주, 22주, 그렇게 계속 양수는 양이 늘고, 새어나오지는 않아 결국에는 가득 차게 되었고, 28주엔 드디어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치의 선생님도, 교수님도 기적 같은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양막 파열로 2주간 양수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다시 양막이 막히고 양수가 채워져서 태아가 건강히 성장한 사례는 거의 드문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퇴원 당시 태아는 주수보다도 우량하고 건강한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퇴원 후 친정에서 큰 딸과 함께 조심히 지내던 어느 날. 또다시 왈칵하고 양수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퇴원한지 3주가 지난 임신 31주 0일이 되던 날 아침이었습니다. 저는 또다시 앰뷸런스를 타고 급히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교수님은 그래도 아직 양수가 다 흐른 것은 아니니 항생제를 맞으며 지켜보자고 하셨습니다. 분만을 해도 31주이기 때문에 태아의 생명이 매우 위험한 단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임신을 유지하며 태아를 키우는 게 좋은 방법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밤 또다시 많은 하혈이 있었고, 주치의 선생님은 진통이 오면 오늘 밤 분만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자정을 지난 새벽, 분만장 침대에 누운 저는 잠이 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걱정과 두려움 보단 오히려 감사기도와 찬양이 제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심한 매를 맞고 옥에 갇혔을 때, 원망과 불평이 아닌 오히려 기도와 찬송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던 상황이 생각났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17주에 양수가 하나도 없이 실려 왔지만, 기적으로 양막이 다시 막히고 양수가 다시 가득 채워져서 태아가 건강히 잘 자라다가 31주인 지금이 된 것을 바라보며, 감사 기도와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지금 분만을 하게 되면 아기가 치료받느라 조금 더 고생을 하게 되겠지만,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이미 이 아이의 생명을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분만까지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항생제와 자궁수축 억제제를 투여 받으며 또다시 하루하루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혹시 다시 양막이 막히지 않을까 하며 교수님도 저도 기대를 하였지만 양수는 계속 흘러 나왔습니다. 그래도 태아가 놀기에는 괜찮은 양의 양수가 남아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3주가 지난 후 34주 3일째 되는 날.
저는 유도분만으로 2.23kg의 비교적 건강한 아기를 분만하였습니다.
조기 양막파수의 경우엔 34주를 만삭으로 보고 분만을 진행한다고 하셨습니다.
조금 더 임신을 유지해서 아기를 키운 후 분만할 수도 있지만 그럴 땐 얻을 수 있는 이점보다 잃을 수 있는 해가 훨씬 크다고 하셨습니다. 혹시라도 감염이 발생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받아들이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17주 200g일때 왔었는데, 그 당시에는 상상하기도 힘든 꿈의 주수에, 다시 채워진 양수로 건강히 잘 자라다가, 자연분만으로 태아와 엄마 모두 건강하게 출산하게 하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은 일입니다.

 이렇게 어렵게 임신을 유지하며 태어난 저희 둘째 아이는 출생 후 8일간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항생제 치료 및 호흡기, 황달, 영양제 등의 치료를 받으며 지내긴 하였지만, 자가 호흡도 가능하고 맘마도 잘 먹는 등 비교적 건강하고 우량하게 잘 성장하여 지금은 갓 교정 백일을 지나고 있습니다.

 교수님은 처음 병원에 왔을 때 엄마가 잘 참고 기다리고 견뎌줬다고, 그래서 다시 양막이 막히는 상황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만일 많은 이들이 그러했듯이 이른 시기에 낙담하여 희망이 없다 생각하고 유도분만을 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렇게 예쁘고 귀한 둘째 자녀를 다시는 보지 못했을텐데..
정말 생각하기도 싫을 것 같습니다.

 한 생명이 정말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렇게 귀하게 한 생명을 얻고 보니, 감사하며 사랑하며 살아가기도 부족한데..
세상에 미워하고 다툴 이유가 무엇인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양수가 다 새어나갔어도 조기 진통이 오지 않아 임신을 유지할 수 있었고,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믿었기에 섣불리 많은 사람들이 간 길을 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최선의 선택을 통한 적절한 치료를 해주신 교수님과 모든 의료진 분들께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산모와 태아의 건강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주신 부모님, 형제자매를 비롯한 일가 친지 분들, 목사님, 전도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등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응답을 주신 하나님.
기적을 통해 이 아이의 생명을 살려주신 하나님께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생각하며..
오늘도 감사함으로 살아가야 함을 다시금 기억하며..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며..!
이 글을 마칩니다.

작성자 : 협회 2017-11-22 12:23:20
[협회 제12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특별상] "생명으로의 동행자" (2017. 10.)

 

 

생명으로의 동행자



이학재

(전도사, 사랑하는 호스피스대표)

2017. 10.



  “ 생명 ”의 저자 오스 기니스는 서문에서
“ 이 시대는 너무 많은 것을 소유 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서 고민한다. 인생의 여정 속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뿌리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게 해주고  변하지 않는 소속감을 얻게 하는 것이다 . ” 라고 기술 하고 있다.

우리의 소속은 하나님께 있다.
참된 안식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생명의 소중함과 인생의 의미를 깨우쳐주고
우리가 가야할 안전한 집이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가르쳐주고 준비시키는 일이야 말로 생명사랑을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2003년 8월!  나는 과로로 쓰러진 적이 있었다. 
극심한 호흡곤란으로 죽음의 맛을 그때 보았다.
죽음의 신체적 고통을 멀쩡한 정신으로  생생하게 겪었다.
그때 나는 “ 하나님 ! 이 고통을 겪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덜 고통스럽겠습니다. 나를 데려 가세요 ” 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죽는다는 것보다 서서히 죽어가는 그 육체의 고통이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내 기도를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셨는지 자다가 일어나보니 나는 공중에 떠있고 내 몸은 평화롭게 자고 있었다. 그런데 잠자기 전까지 고통스럽던 내가  마치 날아가는 새의 속살 깃털이 따스한 봄바람을 타고 하늘을 올라가는 것 같이 상쾌, 통쾌, 유쾌, !! 이 세상 어떤 문자로도 표현 할 수 없는 가벼움, 기쁨과 평안함이,  희락이 넘치는 것이었다.    ‘얽매였던 육체의 장막 짐을 벗으니 이렇게도 자유스럽고 평안하고 시원하구나 그런데 내가 왜 저기 누워있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다시 누워 있는 상태의 몸의 속박 속에 있었다.  
그 일을 겪고 3개월 후 
대장암 말기로 전신에 전이되 한 달도 못산다는   언니를 호스피스 병원에 맡기게 되었다.
불확실한 미래 , 죽음의 고통이 어떻게 다가올지 불안과 두려움의 나날이 연속되어야 할 언니와 그리고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대다수의 환자 분들은 너무도 그 고통을 잘 견디고 있었다. 심리적인 불안 과 공포 , 육신적인 얽매임과 통증의 시달림은 극에 달해 있는 말기  환자들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이 이처럼 행복해 하고 기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히려 천국 같은 삶을 이미 그곳에서 즐기고 있었다.
그것은 인생이 여정임을 깨닫고  그들이 가야할 곳 참 안식처를 찾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의 진정한 소속, 그들의 뿌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실제로 소개 받고 만나보았기 때문이다.

참된 생명의 뿌리를 내리도록 도와주고 가야할 우리들의 영원한 안식처의 방향으로 인도하는 일이야 말로 가장 귀중한 생명사랑의 일이다.
암흑의 터널을 지나는 죽음의 문 앞에서 빛으로 황홀한 그 문을 열고 들어가도록 함께 동행 해주고 사랑과 정열을 쏟아 그들의 손을 붙잡아 주는 이 사역 !
마지막 인생의 나그네 순례 길을 마치고 고독의 길에 평안한 안도의 숨을 쉬게 손잡아주고 천국 입성의 순간까지 동행해 주고 지켜주는 호스피스 사역이야말로 생명사랑의 실천의 현장임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이 강렬한 인상이  동기가 되고 각성이 되어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의 시간들을  생명사랑의 마음으로 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호스피스 교육을 받게 되었고 호스피스  봉사를 하게 되었다.
교육을 받으면서 예수님의 필수 사역이신 병든자를 치유 하시고 함께 하신것에 대해 그동안 교회 사역 속에서 소홀히 되었었다는 자각도 하게 되었다.

(* 참고로 - 호스피스란 이하 호스피스 완화의료란
남은 여명이 6개월 이하 진단 소견이 있거나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와 그 가족을   전인적이고 총체적 돌봄을 제공함으로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평안하게 맞이하도록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으로 도우며, 사별가족의 고통과 슬픔을 경감시키기 위한 총체적인 돌봄을 하는 생명사랑 사역이다.

* -“임종과정”이란 회생의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아니하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를 말한다.
 
* “말기환자(末期患者)”란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질환에 대하여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회복의 가능성이 없고 점차 증상이 악화되어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절차와 기준에 따라 담당의사 또는 해당분야 1인으로부터 수개월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진단을 받은 환자를 말한다.
   가. 암
   나. 후천성면역결핍증
   다. 만성 폐쇄성 호흡기질환
   라. 만성 간경화
   마. 그 밖에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말기질환
 
 * “사전연명의료의향서”란 19세 이상인 사람이 자신의 연명의료중단 등 결정 및 호스피스에 관한 의사를 직접 문서로 작성한 것을 말한다.

* “다 학제적 접근”이란 의사·간호사·사회복지사·성직자·자원봉사자·영양사· 관련전문가 등이 호스피스 완화의료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말기환자와 그 가족에게 신체적 심리사회적 영적 돌봄을 제공하는 종합적인 접근을 말한다.)

 2004년 리더교육을 마치고 꾸준히 호스피스 봉사를 했다.
 교회 성도는 물론 주변에 어렵고 곤고한 극빈의 처한 환자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치료 불가 진단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일을 하다 보니 사람이 다 같은 사람인데 이 세상을 마지막 떠날 때까지도  생명의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2012년 우선 가정 방문 호스피스를 개설하고  구청의 희망나눔센타와 보건소를 연계해 어렵고 곤고한 사람들에게 환자에게 필요한 정보제공, 네비게이터 역할을 하고. 청소는 물론 도시락 배달 , 심리적인 돌봄 , 경제적인 지원, 무엇보다도 영적인 지지로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자신 스스로도 하찮게 여기는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자원봉사자 교육도 꾸준히 3년째 하고 있어서 호스피스봉사는 물론 봉사자 자신의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하는 일도 한다.

나는 본격적으로 한 영혼 한 영혼 여력이 되는 대로 최선을 다해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봉사를 시작했다.
환자분들은 처음에는 대부분 자신의 돌봄을 거부 하거나 스스로 자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 속수무책으로 그냥 하루하루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일을 하다보면 생명사랑의 실천이 절실하다.
 
국가 복지의 선처에 혜택을 받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행정적으로 제도의 한계에 부딪혀 어느 곳 하나 의지 할 곳 없는 인생의 마지막 여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의.식.주를 돌봐 주는 것만으로도  ‘내가 정말  사람대접 받아보았어’ 라는 마지막 고백을 하는 환자들에게서 생명자체의 존엄함 ,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의 존재 자체의 존귀함을 몸으로 체험 하게 된다 .

가족이 있으나 살아온 생의 상처들로 관계는 엉망이 되고 죄의 흔적들은 고스란히 죽음 앞에 드러나 마치 버림받은 생명처럼 쓰레기 더미 위에 있다가 치워져 버리는 인생들이 있다는 것이다.

 치료 불가의 판정을 받게 되면 환자분들이나 가족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엇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특히 가족이 없으신 홀로 계신 분들은 더더욱 그 정도가 심해서 대부분의 환자들이 공황장애나 불안장애 같은 극심한 정신 질환에 시달리게 된다. 경제적 여력이 없고 어디에 하소연해야 할지도 몰라  그 두려움은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최근의 한 예로 38세 된 젊은 여인이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처음  환자분을 방문하고자 전화를 걸었을 때 전화 소리도 듣기 싫어 ‘문자로 해주세요’ 라는 응답을 받았다. 심상치 않아 서둘러 방문했을 때 환자분은 아무의욕도 없고  암이라는 동굴 속에 갇혀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에 떠는  아주 작은 어린아이와 같았다. 말 그대로 그냥 죽어가고 있었다. 
먼저 먹을 것을 공급하고 기도로 힘을 주고 자연을 보여주며 정서적 지원을 꾸준히 하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복음으로 일깨워 주었다. 환자분은 서서히 힘을 얻고 방문 밖으로   나와 치료를 재개해서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소중히 여기고 영생에 대한 믿음으로 신앙 또한  지키려고 하는 노력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손을 잡아주고 기본적인 안내를 해주고 기관을 연계 해주고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자신의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되는 차원까지 생명윤리가 적용되어지는 현장이 된다.  

어느 환자 분은 통증으로 너무 너무 고통스러워 할 때 찬송을 불러 주면 그렇게 힘들어 하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가족들에게 마치 소풍을 가듯 ‘ 나 천국에 간다~~~!’ 하고 누워 잠자듯 주님의 품에 안기듯 천국입성 하시는 분도 있다.
그래서 믿지 않던 가족들이 모두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계기도 된다 .

이럴 때 나는 생명이 살고 죽는 것과 구원을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실감 하게 돼서 복음의 자유함을 더 얻게 되고 영혼 구원을 위해 더욱더 기도 하게 된다. 
 
때로는 홀로 계시다 순간 이 세상을 마감해 경찰과 소방관이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르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미 흙으로 돌아갈 육체도 소홀히 여기지 아니하고  마지막 그 시신이 가는 길을 지키는 것도 함께 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그 생명이 하나님께 다시 돌아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눈으로 보는 것은 육체의 죽음이 생명의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육체의 거둠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 주는 것 또한 생명존중의 한부분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우리가 돌보던 한분이 홀로 생을 마감했다.
가족이 없다고 했는데 추적해 보니 누나가 있어서 함께 화장하여 유골을 분골에 넣는 것까지 함께 해주었다.
그간 불쌍한 내 동생을 보살펴 주어서 너무 고맙다면서
한국의 기독교도 이런 데가 있느냐 하는 말을 하셨다.

아무 조건 없이 그저 생명의 소중함을 알기에 생의 마지막까지 무시 받아야 할 생명은 없다.
어느 누구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호스피스의 법제적인 조건이 아니더라도 
살았다고는 하나 실상은 그 영혼이 죽어 숨을 쉬지 못하는 고통의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는 인생들에게 죽을 준비를 시키고  확실히 인생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심어 주기를 노력 하고 기도 하고 있다.

인생의 여정을 천국의 이정표를 보고 잘 도착한 사람은 이 세상의 문을 닫는 그 순간은 얼마나 복되고 황홀한 것인지.......

성경은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시 116: 15) 라고 말하지 않는가! 
깃털 같은 가벼운 영혼이 꽃구름을 타고 나는 기분으로 
안식처에 들어가는 그 생명이야 말로 복된 생명 이라고 말하고 싶다.

주님 안에서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쉼 없이 실천하는 것이 생명사랑.
생명윤리이라고 말하고 싶다.


                      2017년 10월11일  사랑하는호스피스에서

작성자 : 협회 2017-11-22 12:19:19
[협회 제11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대상] "저출산 시대에 네 자녀를 갖는다는 것" (2016. 10.)

 

저출산 시대에
네 자녀를 갖는다는 것




이경진

(주부, 백마제일교회)

2016. 10.




우리 가족은 현재 다섯 명, 1월에 출산 예정인 뱃속 아기까지 총 여섯 명이다. 첫째 5세를 시작으로 4세, 3세가 있고, 막내가 출산 예정에 있다. 부른 배를 하고 아이들과 놀이터에라도 나가면 사람들은 모두 한마디씩 한다. 애국자다, 다복하다, 대단하다는 말들을 주로 건넨다. 감사하고 뿌듯하다. 하지만 때로는 걱정의 말들도 건넨다. 먹고살기 힘든 시대에 뭐 하러 애를 그렇게 많이 낳냐며, 특히 가까운 분들일수록 더 그렇다. 진심으로 염려해서 그러신 줄 안다. 하지만 그 걱정의 말이 조금은 버거울 때도 있다.
   주변의 결혼한 부부들 중 임신이 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가정을 흔치않게 볼 수 있다. 멀지 않은 케이스로 우리 친오빠 부부는 한 번 유산을 겪은 뒤, 3년 동안 임신이 되지 않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쩌면 그러한 이유로 나의 친정 부모님들은 넷째까지 임신한 내게 마음 놓고 축하를 못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새언니는 선천적으로 자궁이 약한데다가 처음에 어렵게 된 임신이 나팔관에 착상하게 되어 나팔관 하나를 잘라내는 수술을 했다. 그래서 더 난임이 된 상황에 병원에서는 인공수정(시험관수정)을 권유했다고 한다. 병원의 권유로 몇 군데 시험관수정을 위한 병원을 알아보던 오빠 부부는 그 과정이 힘들다는 것과 비용 면에서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고 아직은 자연임신을 위해 노력중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번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에서 주최한 생명윤리 활동수기 공모에 응시하면서 추천도서인 <생명공학시대의 생명주권 생명사랑>에서 시험관 수정에 대한 부분을 읽으며 처음으로 인공수정 중 시험관수정이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이것을 단지 불임 부부들을 위한 기술이라고 막연하게 긍정적으로 생각했었다.
   시험관 수정은 난자를 채취하기 위해 여성호르몬을 집중적으로 투여해 여성의 몸을 비정상적인 신체 상태로 만들어 난자를 과배란 시킨다. 이것은 여성의 몸에 많은 무리와 고통을 준다. 또한 실패율이 높은 시험관 수정을 성공시키기 위해 여러 개의 수정란을 만들고 자궁에 착상시키는데, 잘 착상된 것만 제외하고 나머지 작은 아기인 배아들은 낙태시킨다. 또한 그 과정에서 배아가 기형으로 판명 될 경우 착상 전에 아예 죽여 없애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 시험관수정을 결심하지 않은 오빠 부부에게도, 또 아이를 기다리다가 얼마 전 인공수정을 상담 받은 친구에게도 이 책을 권해야겠다. 물론 애타게 아이를 기다리는 그 부부들에게 절망적인 소식일지도 모르겠다. 믿음이 좋았던 한나도 아이를 갖지 못해 식음을 전폐하고 괴로워하였으며(삼상 1:7,10), 야곱의 아내 라헬은 자식을 낳지 못하면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고 부르짖기도 했다(창 30:1) (생명공학시대의 생명주권 생명사랑 99p. 참고). 그러나 생명의 주권이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선택의 기준을 하나님 말씀으로 삼는 것만이,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조차 힘든 혼미한 이 시대 가운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건강상의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개인의 선택으로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부부들도 참 많은 시대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자녀를 부담스러워하는 가정도 많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육아에 대한 부담이 커서인 경우도 많다.
   저출산 시대에 네 자녀라니 우리 가정은 시대를 거슬러 살아가는 것 같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유별나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엔 자녀가 한 명 일 때보다 그 수가 늘어날수록 덜 힘들게 느껴진다. 아마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것이 생명의 에너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마냥 쉽지만은 않았고, 지금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에 있다.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자녀 네 명을 처음부터 계획 했냐는 질문이다. 사실 우리 부부는 연애 때부터 결혼 후 많은 자녀를 갖자고 함께 얘기 했다. 생명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내가 셋째 아이와 넷째 아이를 임신하고 산부인과에 갔을 때, 공통되게 병원으로부터 들었던 말은 “낳으실 거죠?”였다. 물론 조심스럽게 물어보긴 했지만, 나는 굉장히 불쾌했다. 그리고 나는 셋째와 넷째 사이에 한 번 유산이 된 경험이 있다. 임신 초, 배가 아픈 것 같아 병원에 갔는데 아기의 심장이 뛰지 않았다. 나는 너무 슬펐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그런 내 모습에 의사가 내게 건넨 말은 “전혀 예상 못하셨나 보네요.”였다. 나에게는 내 주위를 맴돌며 뛰놀고 재잘거리는 우리 첫째나 둘째 애들처럼 뱃속 아이도 소중한 생명인데, 그들에게선 셋째나 넷째의 생명은 선택 가능한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져 안 그래도 슬픈 마음에 더 큰 슬픔이 더해졌다.
   두 자녀를 연년생으로 둔 가정이 있었다. 우리 가정과 결혼과 임신, 출산의 시기가 비슷하여 가까이 교제하며 지냈다. 그 자매도 아이를 네 명 낳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러나 아직 너무 어린 연년생인 두 아이들이 초등학생쯤 되면 셋째와 넷째를 낳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그 가정에 계획보다 일찍 셋째가 생겼다. 그 부부는 고민이 많았다. 아직 두 아이가 너무나 어린데다, 남편도 이직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부부의 양가 부모님들이 셋째를 굉장히 반대하셨다. 그 가정과 양가 부모님들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그 부부에게 낙태를 권할 정도로 완강하셨다. 아이를 임신한 엄마는 셋째 아이가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다며 울었다. 그리고 자신도 자신이 없다며 우리 가정을 찾아왔다. 남편과 나는 그 심정이 백번 이해됐다. 우리도 똑같은 과정을 그들보다 불과 몇 달 전에 겪었다. 우리 가정의 셋째의 임신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싸늘했다. 걱정이 앞서 차마 축하한다는 말을 못하겠다는 얘기도 들었다. 가까운 이들에게는 남편이 아직 신대원생이기에 경제적 능력도 없으면서 애만 자꾸 낳는다는 핀잔도 들었다. 나도 참 많이 울었다. 그러나 성경은 아이가 하나님의 상급이라고 말하고 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편 127:3). 우리는 그 부부에게 셋째아이의 임신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상기시켜줬다. 생명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함께 기억하자고 했다. 그 부부는 우리 가정 방문 후 가족 여행을 떠났고, 그 여행에서 쉽지 않겠지만 셋째를 낳아 키우겠다는 결심을 알려왔다.
   얼마 후, 우리 가정과 가까운 다른 엄마가 셋째아이를 임신했다고 알려왔다. 이 가정 역시 아직 어린 자녀 둘을 키우고 있었고, 셋째아이는 계획에 없던 아이인데 덜컥 임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 엄마는 기독교인이었고, 낙태가 생명윤리에 어긋나는 비기독교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연고 하나 없는 타지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으며, 양가 부모님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남편도 잦은 야근과 출장으로 그녀가 살림과 육아를 전적으로 도맡아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두 아이 양육만으로도 힘들고 버거워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그 가정을 찾아 먼 지방까지 여행하며 생명은 하나님께 있으며, 새 생명을 그 가정에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며 임신을 축복했다. 여러 날 고민을 하던 그녀는 결국 자신은 혼자서 셋을 감당 할 능력이 없다며 낙태를 결심했다. 그리고 많이 울었다. 우리도 그 가정의 결정에 너무 슬펐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니, 우리는 과연 이것을 그녀의 비윤리적 양심의 문제로만 비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들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밤늦게까지 붙잡아두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가정보다, 사람보다, 이윤과 성과를 중시하는 이 시대의 어그러진 기업윤리가 만들어 낸 자화상은 아닐까? 누가 이 엄마에게 낙태를 한 것은 살인이며 죄를 지은 것이라고 감히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돌을 던져야 한다면, 아이를 가져도 키울 걱정이 앞서 감히 낳을 수 없는 지경을 만들어 낸 이 사회에 돌을 던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이미 한 개인이 혼자서 감당하며 넘어서기에는 너무 크고 무서운 사회의 악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사회적 요소와 경제적인 요인, 그리고 육아에 대한 압박감이 아이들을 많이 낳으면 힘들다는 생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무거운 책임감이 저출산, 혹은 산아제한을 스스로 재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발적인 산아제한과 그로 인한 저출산이 나와 내 주변의 실질적인 문제가 되고 보니 나는 과연 이것이 기독교적인 세계관 안에서 생명윤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성경에서 계획임신은 건강한 아이를 건강하게 출산하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쓰인 것으로 보인다. 레위기에 보면 결혼식 전과 아기 출산 후에 생식기를 청결히 하는 것을 의무화 했으며, 월경이 끝나고 7일 뒤에 제사를 드렸는데,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목욕으로 몸을 정결하게 하였는데, 이 때는 배란기와 동일한 시기로 이것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임신을 위해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일이 되었다(레위기15:28~30).
   하지만 요즘 시대에 계획 임신은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부모의 진로의 걸림돌이 될 것인지와 경제적인 이유를 고려하여 자녀계획을 하고, 언제 몇 명을 낳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리고 계획 밖의 아이가 생기면 낙태라는 현대의학을 의존하여 자신들의 계획이 무산되지 않도록 지켜 나간다. 이러한 태도는 생명에 대한 존엄성보다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 생명의 존재 여부를 결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자발적인 산아제한을 하는 것은 생명윤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시대의 저출산 문제, 그것은 비단 “낳지 않겠다.”만이 아닌 낙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것은 아이들의 출산과 양육을 돈으로 환산하여 낳고 낳지 않고를 결정하는 물질만능주의 사회에 만연한 생명경시풍조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저출산 문제의 대책으로 제시하는 것들이 결국에는 경제적인 대안이라는 것이다. 돈 없어서 못 낳겠다면 돈 줄 테니 애 좀 더 낳으라는 식의 대책이 더 큰 문제를 낳는다. 그렇다고 일관성 있게 끝까지 책임 져 주는 것도 아니다. 정부의 경제적 요건에 의해 정책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기 십상이다. 이것은 부모들을 더욱 불안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큰 이유 중 하나이다.
   아이를 낳는다고 저절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으로 길러지기까지 주위의 많은 희생이 뒤따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이를 뒷받침 해 주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여성이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역할까지 전적인 책임이 있고, 남자는 사회경제활동을 통해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서 이는 가부장적인 생각으로 인식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굳어진 생각을 쉽게 바꾸기는 어렵다. 결국, 아무리 출산 지원금이 많고, 혜택이 늘어난다 해도 근본적인 문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힘들다는 인식과 실질적으로 육아를 힘들게 만드는 사회 환경, 그리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자리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출산률은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환경에서 주 양육자로 인식되는 엄마에게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다. 아이의 부모는 엄마와 아빠이다. 그리고 이들이 모여 가족을 이룬다. 그러므로 아빠도 아이의 양육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 할 수 있는 상황과 환경들을 사회가 열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주위의 많은 아빠들이 회사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일에 지쳐 집으로 돌아오면 쉬고 싶어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집 안 일과 아이 양육은 고스란히 엄마의 몫으로 돌아온다. 전업주부에게는 이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슬프게도 맞벌이 부부의 가정에서조차 엄마는 직장생활에, 아이 양육에, 집안일까지, 많은 부분 책임을 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우리 엄마는 직장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집 안 일에 우리들 교육 뒷바라지까지 도맡아 하셨다. 그에 비해 어린 내 눈에 비친 아빠의 역할은 직장생활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 같아서 덜 복잡해 보였다. 누구의 직장생활 스트레스의 강도가 더 크고 작다는 내가 논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내가 본 엄마는 늘 바지런히 움직이시며 무언가를 하셨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할 일 없이 누워 편히 쉬시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감사하게도 나의 경우, 남편은 아직 대학원생이고 많은 시간을 가정에 할애하여 아이들 양육과 가사 일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다. 나는 늘 사람들에게 우리 남편을 공동 주 양육자라고 소개한다. 사실 남편이라고 처음부터 잘 도왔던 것은 아니다.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자라 식사를 마치면 밥숟가락 놓고, 쉬며, 디저트를 기다리는 한가한(?) 사람이었다. 나도 결혼 전에는 엄마가 해 주시는 밥 먹고, 준비해주시는 과일 받아먹고, 내 할 일 찾아 내 방으로 쏙 들어 가버리는 얌체(?)였기 때문에 (그러나 난 내가 얌체 짓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던 철부지였다.) 처음 결혼해서 남편의 그런 태도가 나를 무척이나 힘들고 화나게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남편은 귀와 마음이 열린 사람이었고,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여러 번의 대화를 통해 차차 일을 분배하고 서로의 역할을 찾아가며 그것이 서로에게 얼마나 힘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가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아이를 키운다. 함께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내가 아이를 더 낳아도 괜찮겠구나하는 안도감을 준다. 출산과 양육에 대한 부담과 두려움이, 남편과 함께여서 오히려 즐거울 것이라는 기대로 바뀌었다. 그것이 우리가 다자녀를 출산할 수 있게 만들었던 제일 큰 힘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것이 우리 사회의 분위기며 문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가정으로 시작해 그 가정이 속한 공동체의 자세여야 한다고 믿는다. “한 아이를 제대로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다. 엄마가 외로운 양육자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우리의 현실에 일침을 가하는 속담이지 않을 수 없다.
   아이를 낳고 키워보지 않는다면, 생명이 주는 에너지와 기쁨을 알지 못할 것이다. 내가 아이들을 많이 낳을수록 오히려 수월하게 느껴지고 행복을 크게 느낄 수 있는 이 모순되어 보이는 상황의 이유가 바로 이 에너지와 기쁨에서 비롯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아무리 애써도 얻을 수 없다. 오직 생명의 주권자인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힘이요 기쁨이다. <아이를 낳아도 행복한 프랑스 육아-안니카 외레스 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프랑스인들은 갓 태어난 아이일지라도 매우 진지하게 대한다. 아이들도 권리와 의무가 있는 온전한 인격체라고 생각한다. (P.220)

   우리 아이들, 그 생명은 인간이 돈으로 환산하기에는 역부족인 정말 소중한 것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한다. 그 생명을 존중하고 지켜가는 일에 대한 해결 방법을 눈에 보이고 단기적인 대안으로 대처할 수는 없다. 그 해결의 시작점은 생명존중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사실 이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입상해서 남편의 학비에 보태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그러나 글을 쓰려고 관련 책을 읽고 자료들을 뒤지고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사이트를 들어가 보면서 이 사회가 너무 자연스럽게 요구하고 얘기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기독교생명윤리에 어긋나는 것들이었는지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알지 못했다면 나 또한 사회의 잘못된 분위기에 휩쓸려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 조차 모르고 지냈을 법한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이제는 이 수기 공모에 응시하고 글을 쓰게 된 기회가 그 상금보다 더 값어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기회를 계기로, 혹시 잘못된 가치관으로, 또는 잘못된 사회 분위기에 떠밀려 생명의 존재 여부를 결정하려는 기로에 서 있는 가정이 있다면, 알지 못하여 죄를 짓는 일이 더는 발생하지 않도록, 혹은 혼자라는 생각에 두려움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돕는 일에 우리 가정이 더욱 힘쓰고 싶다. 저출산 시대에 아이 네 명을 키우며 행복한 가정이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자고 용기를 주고 싶다. 함께 가자고 손 내밀고 싶다. 생명윤리라는 단어가 나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해 왔는데, 알고 보니 늘 삶 가운데 접하고 부딪히는 문제였다. 앞으로도 이 기회를 통해 알고 깨달은 것들을 삶 속에서 잘 풀어내며 살아가길 소망한다.

작성자 : 협회 2017-11-22 12:15:54
[협회 제11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우수상]"주께 하듯 하라"(2016. 10.)

 


주께 하듯 하라




윤민경

(지역재단 연구원, 안양 열린교회)

2016. 10.


 


2008년 10월의 어느 가을날, 당시 출석하던 교회(오륜교회)의 '다니엘세이레 기도회'에서 나는 에베소서 5장의 말씀을 가지고 '주께 하듯 하라'라는 제목으로 설교해 주신 한 장로님의 말씀을 통해 내 삶의 모습이 나의 머리와 계획으로만 나아갈 뿐, 실제 삶으로는 그런 삶을 살아내지 못했음과 내가 사는 방식이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음에 대해 깊은 탄식과 함께 일말의 분노를 마주한다. 당시, 회사를 다니다가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소명에 이끌려 뒤늦게 대학원 석사를 하기 위해 학교를 다니던 시기였으며 내 힘으로는 안 되는 새로운 분야에서 열등감을 느끼며 혼자 외롭게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결정이 하나님의 뜻이며 인도하심임을 확인하며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어 걸어왔건만, 온통 혼란스러운 것들 뿐이었고, 도대체 이 길의 끝엔 무엇이 있을지도 전혀 알 수 없는 혼돈의 시기였다. 그래서일까. 분명한 것은 그 때 나를 붙들었던 그 말씀이 생명이 되고 역동하여 나를 붙들었고, 이후의 삶에도 커다란 지표로 남았다는 것이다.
결국, 그 모든 고민들도 시간이 흘러 5년이나 지났다.
그 사이에 나는 죽을 만큼 힘들었던 석사과정도 모두 끝냈고, 그 전의 삶과는 뭔가 다른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한 아이를 품은 엄마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꿈꾸었던 출산계획이 네 명인 까닭에 나는 임신과 함께 대학원 졸업 후에 새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나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아이를 품은 엄마의 시각에서 본 자연은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고 소중했다. 따뜻한 가을 햇살 속에서 "힘들지? 내가 여기에 있단다. 까꿍"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었고, 말씀 속에서 책 속에서 버스에서 흘려 듣는 라디오 속에서도 어디서나 나와 그리고 태어날 나의 아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가운데 나는 그렇게 행복한 엄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행복함에 빠져 일상을 보내며 5년 전의 그 날카로웠던 교훈에 대해선 잠시 잊고 살짝 무뎌져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그 후, 2013년 가을의 어느 날. 결혼 후 새로 출석하고 있던 교회(병점 신나는 교회)에 말씀 강사로 한 장로님이 초대되셨고, 그 분의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 나는 온 몸의 전율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사실 난 그 장로님은 잘 기억을 하지 못했으나, 그 말씀만큼은 내 골수를 쪼갰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내 삶의 지표가 된 말씀이었기 때문에 내 몸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맞다. 그 분은 5년 전 내게 '주께 하듯 하라'라는 말씀을 선포해주신 바로 그 분이셨다. 그리고 나는 다시 말씀에 사로잡혀 내가 살아가며 하는 모든 결정, 모든 일들 가운데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 하는 것이라고 여기며 살아가야 함을 생각하며 다시 무디어진 말씀의 창을 날카롭게 갈아낼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두 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 말씀의 예비해주심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그렇게 다시 만난 길잡이와 같은 말씀에 사로잡혀 나는 새로운 한 주를 기쁘게 시작했다.
당시의 나는 출산 20주쯤의 산모였고, 태아가 내 자궁에 안전하게 자리잡았다는 안정기에 진입을 하고 있었다. 나 뿐만 아니라 이 시기 즈음의 출산의 과정을 겪는 동안 모든 임산부에게는 '기형아 검사'라는 과제가 주어진다. 20주쯤 아기가 안정을 찾아갈 무렵이면 채혈과 초음파를 통한 투명대 검사라는 것을 통해 아기의 기형여부를 확률적으로 판단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바로 전 주에 그 검사를 마쳤던 나는 "설마 무슨 일 있겠어?"라는 마음으로 사실은 그 결과를 별로 손꼽아 기다리지 않을 만큼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새롭게 시작한 한 주의 화요일 오후..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폰의 화면에는 '동탄OO병원 산부인과'라고 찍혀있었다. 내가 다니던 병원의 산부인과 번호였다.
"여보세요".
"아, 윤민경 산모님 맞으시죠? 저 OO병원 산부인과 담당의 문OO과장입니다. 지난 주 검사하신 기형아검사 결과를 알려드리려고 전화를 드렸어요"
 내가 다니는 산부인과의 의사선생님이셨다. 기형아검사의 결과에 대해 당연히 정상이다라는 판정을 기대했던 나는 그 첫 문장에서 '뭔가 이상한가?'라는 직감을 받았다.
"네, 결과가 어떤가요?"
"아, 그게 사실, 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연락을 드렸어요..........."
선생님께선 기형아검사의 방법과 어떻게 그 결과에서 기형아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지를 꽤나 자세히 나에게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말을 이어가셨다.
"산모의 아이가 목 뒷부분의 두께가 좀 두껍게 나타나네요. 다운증후군의 확률이 좀 있다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나는 차분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물었다.
"그렇다면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어떤 것이 있나요?"
수화기 너머의 의사선생님은 조심스럽게 일단 우선은 이 기형아 검사가 확정이 아니고 확률적인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고위험군에 속함) 추가적인 검사를 진행해서 정확히 다운증후군을 가졌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만약 다운증후군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다운증후군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죠?"
"다운증후군이라면 의사의 권고 아래 낙태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의사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혹시 낙태 말고 그 아이를 태 중에서 치료할 방법은 없나요? 그리고 그 결과가 다운증후군임에도 출산할 의지가 있다면 그 검사는 안 받아도 되는 건가요?"
흠칫 나의 거침없는 연속된 질문에 의사선생님의 당혹스러운 주저하심이 수화기 너머로 느껴졌다.
"아.... 네.. 그렇죠. 치료법은 딱히 없습니다. 산모님의 의사가 그러하시면 추가검사 안 받고 출산하셔도 되지요"
"그 결과를 알았을 때 낙태 외엔 치료법이 없다는 말씀이군요. 그럼 추가검사를 하는 이유는 뭐지요? 이 아이가 다운증후군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와 없다의 차이 뿐인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의사로써 고위험군에 속함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혹시 산모님, 종교가 있으신가요?"
순간, 왜 종교를 물을까 싶었다.
"아, 네. 저는 기독교에요. 아이의 상태와 상관없이 낳아서 키울 의사가 있어서요. 그럼 저는 추가 검사를 안 받아도 될 것 같아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대화를 마무리하는 나와 달리 오히려 저 쪽 편의 의사선생님께서 대화의 종료를 쉽게 받아들이시지 못하는 듯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 때 그가 느꼈던 내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는 강한 확신의 반응이 오히려 의사로써 그에게 낯선 경험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의사 선생님과 통화를 하던 중엔 어디서 그런 결단력이 나왔는지 싶을 만큼이나 통화를 끊고 나니 그제서야 손이 떨리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리고 서둘러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이 놀랄만한 충격적인 소식을 남편에게 전했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한 마디 던졌다.
"여보, 혹시 이 아이가 다운증후군이나 여타의 장애를 가진 채 태어난다고 하면 여보는 이 아이를 지울거야?"
 남편 역시 많이 놀라고 염려하고 있음이 느껴졌지만, 차분히 대답해주었다.
"아니, 우리 아이이고 소중한 생명인데 장애가 있다고 해서 그 아이를 어떻게 지우니."
"그래? 그럼 우린 이 아이를 낳아서 키우자. 검사도 안 받을 거야 괜찮지?, 알았지?"
그렇게 심각한 내용을 전혀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남편과의 통화도 마쳤다.
그리고 난 그 때서야 내가 지금 한 2번의 통화가 얼마나 큰 의미의 통화였는지 느끼며 깊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말씀을 떠올렸다. "주께 하듯 하라"
그 말씀이 나를 붙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이 말씀이 내게 미리 예비되지 않았다면 나는 과연 방금과 같은 반응을 동일하게 보일 수 있었을까. 시간이 지난 흐른 지금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분명, 울며 불며 매우 흔들린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출산하기까지 계속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결국, 우리 부부는 그 이후에 추가검사를 하지도 않았고, 양가 부모님께도 딱히 알려드리지 않은 채 출산예정일을 향해 달려갔다. 마음이 크게 요동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그 분의 선한 계획 안에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2014년 2월 26일 오전 10시 23분, 우리의 첫 아이를 출산했다.
우리가 보인 믿음의 결과물은, 고위험군이란 위험의 확률을 뚫고 매우 건강한 사내아이였다. 그리고 그 아이는 현재 32개월로 아주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으며, 나는 그 사이에 5개월 된 둘째 딸아이를 하나 더 출산했다.
놀라운 것은 첫 아이가 태어나고 2년 즈음이 지났을 때였다. 남편으로부터 새로 알게 된 사실이 그가 저 사건 이후에 진짜로 우리에게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 한국이 아닌, 그 아이가 살아가기에 좀 더 편한 외국의 나라로 이민을 갈 마음으로 어떤 곳이 장애아를 가진 가정이 살기에 좋은 지 많이 알아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0주의 아기. 그 땐 아직 태어나지도 않아 우리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그 아이의 심장소리는 이미 우리의 귀를 울렸고, 그 생명이 더 이상 우리 부부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비록 우리의 씨앗으로 잉태되었으나 우리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생명이라는 것. 그것만이 우리를 지탱해준 힘이었다. 바로 주께 하듯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 아이가 주님의 방문인 것처럼 그렇게 여기며 귀하게 여겼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하나도 상하게 하지 않으시고 세상밖으로 이끌어주셨다.
그 사건이 있던 날 밤. 나는 다운증후군이 의심된다는 의사의 통화와 나와 남편의 반응을 다시 생각하며 그 사실을 페이스북에 기록으로 남기고 연결된 지인들에게 기도를 요청했었다. 오히려 지금 가끔 그 기록을 찾아보면 너무 아찔하다. 그 당시의 내 믿음이 어떻게 그렇게 컸을까 싶기도 하고, 내가 "주께 하듯 하라"라는 저 말씀의 예비하심으로 오히려 구원을 받았구나 싶다.
지금도 우리 첫째 아이의 심장소리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 리듬에 맞춰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주.께.하.듯.하.라"
그리고 우리의 첫 아이인 재혁이에게 태 안에서 주어진 평생의 말씀이기도 하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
몇 번을 돌이켜 생각해봐도 감사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생명의 고귀함과 그것을 지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었다.


작성자 : 협회 2017-11-22 12:12:02
[협회 제11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특별상] "아버지의 안락사에 직면하여" (2016. 10.)

 


아버지의 안락사에 직면하여



ooo

(목사)

2016. 10.



어느 날 병원에서 전화 한 통화를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냐고 물어보면서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셨다고 하여 달려가보니 감자떡을 드시다 기도가 막히셔서 의식 불명의 상태에 놓이셨습니다.
어머니와 저희 가족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독실한 안수 집사님으로서 늘 담임 목사님을 모시고 차를 타고 다니시면서 제가 신학을 공부하자 자진해서 교회에 출석하시고 매일 극동 방송을 들으시고 성경책을 열심히 읽으시고 필사도 하시면서 신앙 서적을 탐독하시던 분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뵈었을 때 무더운 여름철 참외를 사 가지고 가서 드렸는데 검은 봉지에 든 참외를 가지고 나오셔서 놓고 가셨다고 하시길래 드리려고 가지고 왔다고 하며 뵈었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경상도가 고향으로서 법대를 졸업하시고 사법 고시의 꿈을 이루지 못하시고 공무원으로 정년 퇴직하셨고 속정이 깊으시나 잘 표현하지 못하시는 분이셨습니다. 7살 연상의 아내와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을 한 후에 손자를 낳고 일하시던 부동산에 가면 좋아하시며 용돈을 주시던 아버지셨습니다.
아들이 목회하는 것을 좋아하시며 유명하신 목사님들의 설교도 열심히 청취하시고 설교에 대해 조언도 아끼지 않으셨었습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사고에 저희 가족은 매일 중환자실에 계신 아버지를 뵈며 다시 의식이 돌아오시기 만을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셨고 경제적으로도 저희 가정은 아버지의 병원비를 감당하느라 매우 힘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전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셨고 의식도 없으셨고 그저 병원에 누워 계셔서 생명을 연장하실 뿐이셨습니다.
목사 안수를 앞두고 영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저에게 아버지의 사고는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왜 이러한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고와 그 후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안락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생명 윤리에서 다루는 것과 같이 성경적으로 답은 자명하지만 한국의 현실 속에서 안락사에 대한 유혹을 받는 가족들에게 전혀 경제적인 지원이 나라에서 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안락사에 대한 금지를 주장하는 견해는 막상 그 일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쉬운 말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락사와 관계된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긍휼의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버지께서는 1년 넘게 의식 불명의 상태로 계시다 상태가 악화되시고 욕창도 나셔서 임종을 앞두고 집으로 옮겨 집에서 편안히 죽음을 맞게 되셨습니다.
당시만 해도 안락사에 대해 지금처럼 활발하게 논의가 되지도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저희는 병원 측의 도움을 받아 안락사를 결행하지는 않았지만 안락사와 관계된 문제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깊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안락사를 사회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제도와 국가적으로 보조와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교회도 단순히 성경적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만을 할 것이 아니라 안락사에 직면하는 성도들을 구체적으로 돕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에 따라 일년이 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생명을 사람의 힘으로 제한하지는 않았지만 일년이 넘는 그 시간들이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했던 저희 가정과 특별히 어머니께는 너무나도 힘든 시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영국 유학 전에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불러 가셨지만 더 시간이 길어졌다면 저희들도 안락사의 유혹을 쉽게 물리쳤으리라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고귀하게 죽을 권리보다 생명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더 큰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안락사는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살인이 되는 것 또한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면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사고를 당해 힘든 가족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경제적인 짐까지 고스란히 떠 안기며 단순하게 안락사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당사자들에게 전혀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안락사에 관한 문제는 그러한 상황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돕는 차원에서 공론화되며 사회적 제도 장치의 보완으로 생명을 보전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에서 협력이 이뤄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 달에 200만원이 넘는 경제적인 비용을 감당하며 병원에 계속 입원해 있는 것은 일반적인 서민들에게는 매우 큰 경제적인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 귀하듯이 그 생명을 보전하는 일에 있어서 존귀할 수 있도록 교회와 국가가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병원에서 저희는 그냥 그 상태로 두었으면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겠지만 병원 측의 권고로 실낱 같은 희망을 가지고 아버지가 의식이 돌아 오시기를 바라며 목에 호스를 연결하는 시술을 받았습니다.
만약 저희가 시술을 받지 않았다면 아버지께서는 곧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시술로 인하여 생명을 연장하셨지만 사실 그 후 아버지께서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셔서 저희는 그 시술을 후회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리저리 전전하다 부산에 계신 아버지를 서울 집으로 모셔 오면서 앰뷸런스를 타고 오면서 겪어야 했던 상처와 아픔으로 사실 지금도 응급차의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 그때의 아픔과 상처가 다시 떠오릅니다.
지금도 좋은 일이 있으면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좋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건강하셨던 아버지의 사고와 죽음으로 저희 가족에게는 큰 고통의 사건이었지만 그로 인해 저는 안락사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수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안락사에 관한 문제를 단순한 논리로 접근하지 말고 아픔을 겪고 있는 당사자와 가족들의 편에서 이해하며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실제적인 제도적 장치와 사회 공론화가 이루어져 저희 가족과 같은 아픔을 다른 이들이 겪지 않고 존엄하게 마지막을 지킬 수 있도록 이 사회가 돕고 섬겼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사고와 죽으심으로 인해 저는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존엄하게 죽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태어남이 하나님의 선물이듯이 죽음 또한 영광으로 가는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안락사가 아닌 가족의 축복 속에서 환자가 생을 마칠 수 있도록 이 사회가 돌아보고 헤아리는 일이 안락사 금지와 함께 이뤄지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작성자 : 안종빈 2016-12-13 16:02:55
[협회 제10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대상] "신혼부부의 생명윤리(2015. 10.)

 

신혼부부의 생명윤리



안종빈

(전도사, 다애교회)

2015. 10.



  지금으로부터 3년 전 가을, 나는 “신학생”의 신분으로 청명한 가을하늘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 때에 이승구 교수님께서 학교의 모든 신학생에게 “생명주권 생명사랑”이라는 책을 선물해주셨다. 그 때에 아마 선물하신 교수님도 예상하셨겠지만, 그 책을 읽거나 심지어 관심을 가진 학생은 열 명 중에  두세 명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무상으로 나눠준 책들 대부분에 나도 동일한 반응을 보였지만, 그 책에는 사뭇 다른 반응이 나에게 일어났다. 실제로 그 책은 학교에서 무상으로 받은 책 중에 내가 완독한 첫 번째 책이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생명유전공학을 학부 전공으로 하면서 생명윤리에 대한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받자마자 읽은 그 책은 내가 어렴풋이 문제의식을 느끼던 분야에 대해 명확한 지식과 기준을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던 영역에 있어서도 성경을 기준으로 이 시대를 진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책의 내용은 사역과 학업으로 바쁜 신학생인 나에게 지적인 정보에 머물게 되었다. 유초등부 교육전도사로서 아이들에게 생명의 존귀함을 강조하는 내용을 설교시간에 강조한 적이 있지만, 나에게 “생명윤리”는 조금은 멀고 이상적인 이야기였다. 그 이후로 교내게시판에 생명윤리 수기를 모집하는 공고를 여러 번 보았지만, 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로 보였다. 이는 그 때에 내가 생명윤리를 호스피스, 줄기세포 연구, 혹은 안락사와 같은 특정한 직업군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생명윤리는 호스피스의 현장에 있거나 배아줄기세포 연구실에 입사하지 않는 한 필요가 없는 윤리라고 여겼다. 그 이후로 교수님께서 선물하신 “생명주권 생명사랑”은 3년 동안 책장구석에 꽂혀서 한 번도 펴보지 않은 책이 되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올해 봄에 이 책을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위에 언급한 것처럼 특수직에 종사하게 되거나 특별한 경험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생명윤리에 대한 나의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나는 생명윤리가 특정한 직업을 갖고 있거나 특별한 순간을 맞이한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항상 필요한 기본 윤리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경험하게 된 아주 일반적인 것이 생명윤리에 대한 나의 인식을 바꾸어놓았다. 그 경험은 바로 결혼과 임신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홀로 있음을 좋지 않게 보시고, 함께 살아갈 것을 명하셨다. 그리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을 함께 살아갈 것을 서약하고, 자녀를 낳고 확장하며 세대를 이어가게 하셨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 이것은 아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하지만, 34살에 신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노총각에게 결혼은 송구영신예배에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기적 같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서, 36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아름다운 자매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평범하지만 고귀한 꿈을 나도 이룬 것이다. 가장이 되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맡기셨고, 나는 그 생명을 올바르게 대해야 함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생명의 주권자를 경외하고 생명의 가치를 존귀히 여기며 살아가기에,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생명공학시대”라고 하는 이 시대는 만만치 않은 전장(戰場)임을 깨닫게 되었다.
임신 : 누가 주권자인가?
 신혼부부인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온 생명윤리에 관한 고민은 임신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신학교 3학년생으로 2014년 9월에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부부로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아갔다. 결혼을 하고 나서, 주변 사람들이 “2세는 언제 가질 거에요?” 라고 물을 때 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면 감사하게 얼른 낳아야죠.”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속마음으로는 신혼으로 5개월 정도를 보내고, 임신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듬해 봄, 막상 결혼 후 6개월 동안 임신 소식이 없자, 조금씩 초조하고 걱정이 되었다.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궁금해 하시는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병원에 가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여러 생각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은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심각한 상황은 아니어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보다는 산부인과의 전문적 소견을 궁금하였다. 아내의 배란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해서 결국 산부인과를 찾아가 보았으나, 산부인과 의사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장기간 불임도 아닌데 유별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고통을 비교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가진 불안도 짧은 시간 안에 꽤 나를 초조하게 하였다. 
 그 때에, 담임목사님께서 출타하셔서 나는 “기도”에 관한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무엘상을 읽는 중에 한 구절이 반복되어 강조됨을 관찰하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그(한나)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사무엘서의 저자는 한나가 임신하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거나, 하나님의 손길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하나가 임신하지 못하도록 주권적으로 일하신 것이다. 그리고, 한나의 기도 후에 ‘..여호와께서 그(한나)를 기억’하셔서 임신하게 하신다. 이 부분을 읽고 곱씹어 보며, 한나가 임신하는 것 뿐 아니라 임신하지 못한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임을 고백하게 되었다. 이전에 내가 막연히 걱정가운데 기도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기도가 내 마음속에서 흘러나왔다. “하나님,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았던 것처럼, 우리 가정에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아직 허락지 않으심을 믿습니다. 아이를 하루라도 속히 갖고 싶지만, 그 보다도 더 우리 가정의 세밀한 부분까지 감찰하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정이 가질 아이의 생명과 모든 삶도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바라며 성실히 살아가며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씀으로 우리 가정에 좋은 소식이 없는 것은 그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마음이 변하였다.
 신기하게도, 그로부터 한 달 후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생명을 선물로 주셨다. 우리는 그 아이에게 “새봄”이라는 태명을 지어주었다. 우리에게 매년 찾아오는 4계절 중에 하나인 봄이지만 아이를 통해 또 새로운 봄(New spring)이 찾아옴을 기념하고, 이 아이를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봄(New vision)을 소망하며 지었다.
 그런데 주변에 전도사 가정 중에 불임가정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우리 신학교 동기 중에 결혼한 열 가정 중에 두 세가정이 결혼 후 2년 정도 지났음에도 임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더 놀라게 된 사실은 몇 가정이 시험관 아기 시술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 아내와 가까운 전도사 부부도 4년간 부부생활을 하였지만 임신 소식이 없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다. 여자 전도사 분에게 아내가 사역을 좀 줄이고 학업 스케쥴을 조정하며 좀 쉬라는 조언을 하였지만, 그 전도사 분도 다른 변화를 두기 보다는 시험관 아기 시술을 받기로 결정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가정이 가진 고민과 아픔을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시험관 아기를 통해 임신을 시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복잡한 심정이었다. 차마 그 부부에게 시험관 아기 시술이 갖는 윤리적인 문제를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시험관 아기 시술을 결정하기 이전에 바른 정보를 전해주지 못한 것이 아쉽고 미안할 나름이었다. 난임의 시대를 사는 젊은 그리스도인 부부가 어떻게 난임에 반응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 아니 사역자 부부에게도 시험관 아기의 생명윤리적인 고민이 없는데, 대세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소견에 따라 행동하는 세상은 더하지 않겠는가?  난임의 부부에게 시험관 아기 시술이 유일한 희망이 되기 전에, 누군가는 그 희망이 하나님께 악이 될 수 있음을 말해야 한다.

 초음파 : 누구를 위한 기술인가?
 새봄이를 임신하며, 우리가 실제적으로 접한 생명윤리 현안은 초음파 검사였다. 집에서 가까운 산부인과 병원을 찾아가서 임신사실을 확인한 후에, 산부인과 의사는 임신초기가 중요하다며 병원에 자주 와서 초음파 검사를 받을 것을 권면하였다. 초음파 검사를 통해 임신 6주차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9주차에는 심장박동을 들으며 감격의 순간을 누릴 수 있었다. 나는 초음파 기술이 임산부와 아이에게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악한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초음파 검사를 자주 받으라고 권하는 의사의 권면에 뭔가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미 출산 경험이 있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평균적으로 15번 정도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비롯한 여러 검사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양가의 어머님들은 두 분 모두 산부인과는 별일이 없는 한 가지 말고 특히 초음파는 많이 하지 말라고 강조하셨다. 검색을 해보니 해외에서 평균적으로 3회 정도의 초음파 검사를 받는 것에 비해 한국은 평균적으로 10회가 훌쩍 넘으며 세계에서 임산부에게 가장 초음파검사를 많이 하는 국가임을 알았다. 전도사 부부에게 매번 4만원 정도하는 초음파 검사료도 부담이 되었지만, 두어 번 검사를 해보니 우리가 이 검사를 왜 하고 있는지, 계속 의사 의 지침에 따라 초음파 검사를 하는 게 맞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가 특별히 의사를 표현하지 않는 한 아마 우리 부부도 여러 종류의 초음파 검사를 할 것은 분명해보였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입체초음파 검사를 미리 예약하라고 산부인과 의사가 권하는 것이었다. 왜 입체 초음파 검사를 하는지 알아보았더니 다른 것들 보다 태아의 얼굴 사진을 찍는 것이 가장 주된 목적이었다. 그 때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내가 초음파 검사에 불편해 했던 것은 생명을 다룸에 있어서 부모의 궁금증과 걱정을 담보로 필수적이지 않은 검사를 필수적으로 하게끔 유도하기 때문이었다. 비용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어서서 환자는 자주 검사를 받고, 낮은 의료수가 문제로 병원은 수익을 내기 위해 초음파 검사를 받도록 유도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산부인과에서 권하는 모든 초음파 검사가 아이를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대개의 초음파 검사는 태아를 걱정하는 부모를 위한 서비스와 같은 것이었다.
 초음파는 말 그대로 파장을 보내서 그 돌아오는 신호를 가지고 시각적 정보를 얻는 것이다. 안전하다고 산모를 안심시키지만, GMO(유전자변형식품)과 같이 초음파의 미지의 영향을 전면 부정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초음파에 자주 노출되면 생체조직에 물리적인 영향을 미치거나 체온 상승을 유발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리고, FDA(미국식품의약국)에서도 위와 같은 이유로 진단 목적 외의 초음파 촬영을 금하라고 경고한 바 있다.
 고민 끝에 우리 부부는 초음파 검사는 최소한으로 하고, 입체초음파 검사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특별히 이상 증상이 없는 데 초음파 검사를 하는 것이 아이의 생명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우리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함을 부정할 수 없었고, 특히 입체 초음파는 아이의 얼굴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은 욕심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모든 초음파 검사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 부부에게 초음파 검사는 하나님이 주신 임신의 때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게 하는 은밀한 유혹이라고 생각했다.

 기형아 검사 : 생명의 가치는 동일한가?
 하나님께서 주신 뱃속의 생명을 두고 가장 고민했던 것은 기형아 검사를 해야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였다. 임신 9주 넘었을 때에 산부인과에서 기형아 검사를 무엇으로 할지 결정해서 신청하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담당의사에게 기형아 검사는 꼭 받아야 하는 것인지를 물으니, 정색을 하시며 꼭 받아야 하는 것이니 권하는 것 아니겠냐고 하면서 의사의 지시를 잘 따라주면 좋겠다고 하였다. 이미 불편한 기색을 보이고 바쁜 의사에게 계속 물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질문없이 진료실을 나오면서 마음이 불편하였다. 담당 직원에게 기형아 검사에 대해 설명을 들으니 NIFTY 테스트, 양수 검사, 트리플 테스트, 쿼드 테스트등 한 번 들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검사들이었다. 처음에는 아내와 함께 어떤 검사를 받을까 고민하였는데, 후에는 기형아 검사를 왜 받아야하는가라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며 가정을 해보았다. 혹시 우리 아이가 기형아라고 판정이 되면 어떻게 될까? 기형아로 판정이 되면 우리가 태아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 아이에게 치료는 가능한가? 치료가 가능하다고 태아에게 치료하는 것은 옳은 행동일까? 기형아 검사에 대해 알아보니, 우선 기형아로 태어날 확률은 0.4% 정도로 지극히 낮으며, 기형아 검사로 예측하거나 확진할 수 있는 기형도 다운증후근, 애드워드 증후근, 신경관결손 이 세 가지 뿐임을 알았다. 학부 때에 이러한 염색체 이상은 되돌릴 수 없는 유전질환임을 배운 기억이 났다. 아내와 함께 “우리 새봄이가 다운증후근이라고 판정이 되면..” 이라는 상상을 하니 마음이 심히 아프고 무거웠지만, 우리가 낙태를 하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왜냐하면, 아이의 신체에 문제가 있거나, 기형아라고 칭함을 받은 아이라 하더라도, 새봄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임에는 변함이 없고, 그 생명에는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나도 눈에 보이는 외형이나 평가로 생명의 가치를 두고 있었음을 그 순간 알게 되었다. 물론 우리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서 건강히 자라는 것을 바라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선물하신 건강하지 않은 아이를 거절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굳이 기형아 검사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산부인과에서는 기형아검사를 안하겠다는 우리의 결정을 이상하게 보았지만, 우리는 약간의 불안감을 하나님 앞에서 아뢰고 끝까지 기도하여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제목으로 삼았다.

생명윤리를 적용하는 매일의 삶
 예전에 생명윤리에 관한 글을 읽으며, 생명윤리를 삶의 시작에 관하여, 삶의 끝에 관하여, 그리고 삶의 과정에 관한 생명윤리로 구분했던 것에 동의한 적이 있었다. 시작, 중간, 그리고 끝에 이르기까지 생명윤리는 인생의 모든 때에 적실한 기본 윤리이다. 삶과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우리네 매일의 삶에서 기억해야 하고 기준으로 삼아야 할 윤리이다. 나는 그것을 부부가 되어서야, 그리고 이 세상의 흐름과 갈등을 겪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새봄이는 임신 7개월을 맞이하여 튼튼하게 자라나고 있다. 이 아이가 태어나는 분만의 과정, 산후 조리의 문제, 그리고 육아에 이르기까지 매일매일 결정해야 할 윤리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일상의 결정이 세상을 바꾸는 생명운동이 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점 어두워져가고 맛을 잃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자그마한 빛이 되어 밝히 비추고, 조그만 소금결정이 되어 짠 맛을 선사하는 것은 “위대한 위인”이 하는 일이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다.  
 한 생명을 대할 때에 생명의 주권자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부터 행하는 것,바른 가르침을 이웃에게 전하고 나누는 것, 마지막으로 생명의 주권자를 멸시하는 사회구조적인 악에도 바르게 행동하는 것들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난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하는 “생명운동”이 될 것이다. 이 생명운동에 우리 가정이 앞으로도 함께할 것이 참 감사하고 감격스럽다.  

 

작성자 : 방유나 2016-12-13 16:00:38
[협회 제10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우수상]"반짝 반짝 빛나는 우리 아이들"(2015. 10.)

 

 반짝 반짝 빛나는 우리 아이들



방유나

(사회복지사, 동심교회)

2015. 10.

 


저는 보육원에서 일하고 있는 사회복지사입니다.
베이비 박스를 통해서 맡겨진 신생아부터 고등학교 에 다니는 아이들이 부모님의 양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엄마로 지내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아이들로 인해서 웃고 울다보면 하루라는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저는 보육원 아이들 중에서 11명의 아이들을 보살피는 엄마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012년5월 따뜻한 날씨에 태어난 말썽꾸러기 막내아들부터 사춘기를 호되게 지내고 있는 고2 맏딸까지 돌보다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게 시끌벅적 하게 지나갑니다.
 저희 집의 일상을 간략하게 말씀 드리면 6시경 아침식사를 하고나면 두 개뿐인 화장실은 항상 북적이고 막내만 빼고는 모두 한참 꾸미기 좋아하는 딸래미 들이어서 거울앞도 전쟁터 같은 풍경이 되곤 합니다.  
 8시쯤이면 하나 둘씩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로 등교를 하고 아직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 막내와 오전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됩니다.
  집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면 막내와 보육원 마당을 산책하곤 하는데 요즘 보육원 화단에 가득 피어있는 강아지풀을 뽑아서 막내에게 주며 “강아지 꼬리를 닮아서 이름이 강아지풀이야” 하고 설명해줍니다.
 그러면 요즘 엄마의 말을 따라 하기에 한창인 막내는 저를 따라서 “강아지 꼬리~ 강아지 꼬리” 하면서 강아지풀을 흔들어대며 마당을 뛰어다닙니다.
 미숙아로 태어나서 병원신세도 많이 진 막내는 지금도 자기 나이보다 많이 어려보여서 늘 마음이 안타깝지만 많은 분들의 염려와 사랑을 받고 많이 건강해졌습니다.   요즘 한참 말이 늘어서 교회 유아부에서 배운 노래를 잘도 따라 불러서 집안 분위기를 늘 즐겁게 해주고 있습니다.
 강아지풀을 한참 흔들며 뛰어다니던 막내가 보육원 입구 구석에 얌전하게 핀 나팔꽃 한 송이를 발견하고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엄마, 꽃이 피었어요” 하며 꽃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합니다. “ 예쁜 나팔꽃이 피었구나~ 정말 예쁘지? 이 꽃은 나팔모양을 닮아서 이름이 나팔꽃이야 ”  저는 꽃 넝쿨을 살짝 잡아당겨서 막내가 가까이 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신기한 듯 꽃을 보며 맑게 웃는 막내를 보니 마음이 참 뭉클하고 행복해 집니다. “우리 막내는 이 꽃보다 백배, 천배, 만배 더 예뻐”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말지 못하는 우리막내는 “ 백배, 천배...” 하면서 제 말을 또다시 따라합니다.
 세상에 나올 때는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모두에게 사랑받고 지내고 있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막내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족들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릅니다.
 우리 집 아들 딸 들은 친 부모에게 버림받았거나 이혼, 방임, 학대, 가난 등으로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입양의 기회가 있는 아이들도 있지만 예쁜 딸을 원하는 분들의 입양이 가끔 이루어지는 정도입니다.
 막내처럼 태어난지 며칠만에 베이비박스에 놓여진 채로 발견되어 보육원으로 오게 되는 아이들도 있지만 가족들과 살면서 마음의 상처를 있는 대로 다 받다가 오게 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상처투성이인 아이들이다보니 분노 조절이 안되어서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경우도 있고 작은 일로도 통곡을 하며 아픈 상처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가냘픈 아이들이 커다란 상처를 드러내고 고통스러워 할 때 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생명을 잘 보살피지 못한 어른들의 무책임함을 생각하게 되고 미안한 마음에 숙연해 지게 됩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아이들은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보육원에서도 어른들에게 오랜 시간 경계심을 풀지 못하고 지내곤 합니다.
 “주님, 이 아이들의 상처를 주님께서 아시오니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이 아이들을 치료해주세요.”
이렇게 간절한 기도를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이 보육원으로 오게 되면 낯 선 환경과 낯 선 사람들에 적응하느라 작은 일에도 쉽게 분노하는 경우도 있고 입소 전 가정에서 힘들었던 일을 기억하며 예민하게 반응을 하고 마음을 열지 않고 지내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비슷한 상처를 가진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신의 상처만 들여다보던 아이들이 조금씩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상처가 회복되어 가게 됩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계신 경우는 부모님이 한 분밖에 없는 아이들을 안타깝게 생각해주고, 부모님이 한 분 뿐인 경우는 부모님이 아무도 안계 신 아이들을 안쓰럽게 생각하며 서로를 보듬어 주며 생활합니다.
 가족들에게 거칠게 화를 내거나 제 마음을 아프게 하던 아이들이 조금씩 안정감을 찾고 얼굴에 미소를 되찾게 되는 것을 보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잘 생활 하다가도 사춘기가 되면 힘든 고비를 넘게 되는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친구들의 관계가 중요한 시기여서 그런지 평범한 가정의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현재 상황을 비관하고  스스로가 얼마나 귀한 생명인지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비행을 저지르고 학업을 등안시하며 소중한 시간을 아깝게 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스스로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이해시키고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이 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 제가 가진 지식이나 말로는 너무나 부족하기만 합니다. 오직 주님의 사랑만이 아이들의 마음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힘겨워하는 아이의 마음을 위로합니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하시며 사랑하신 귀한 생명이 우리 모두라는 것을 마음을 다 해서 전하면 방황하던 아이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가 아이의 마음 깊이 들어감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집 맏 딸은 전에 다른 보육원에서 비행을 저지르고 보호처분을 받고 있던 중에 올해 5월부터 우리 집의 맏딸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눈도 마주치지 않고 거친 말을 일삼아서 아이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였습니다. 계속되는 비행에 함께 경찰서에 다녀오던 날 제 마음은 너무나 아픈데 아이는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조사를 받는 모습을 보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 주님, 이 딸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실줄 믿습니다. 바른 길로 이끌어 주세요”
경찰서를 나오는데 아이를 보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얼른 고개를 돌리며 닦고 비가 주적주적 내리는 길을 둘이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와서도 한동안 정적이 흐르다가 아이를 불러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잘 이겨내고 잘 견뎌주길 바란다고...
 아이가 당장 변하기 어렵다고 하여도 분명히 바른 길로 돌아올 거라고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두 달 여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 맏딸에게 조금씩 변화기 있었습니다.
 주변사람들을 돌아보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동생들을 조금씩 돕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은 심각한 얼굴로 “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 나쁜 행동을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은 주님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요즘은 맏언니로서 동생들과 잘 지내고 자주 빠지던 학교와 학원도 잘 다니고 있습니다.  내년에 고3이 되는데  졸업을 하면 스스로 자립을 해야 하기 때문에 취업준비를 열심히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처음에 우리 집 딸들에게 꿈이 무엇인지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었을 때 꿈이없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많아서 많이 놀라고 걱정했었는데 지금은 요리사가 되고 싶은 아이도 있고 만화가가 되고 싶은 아이도 있고 목사님이 되고 싶은 아이도 있습니다.
 제가 가장 소원하는 것은 아이들 한명 한명이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귀하고 반짝이는 존재인지 깨닫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캄캄한 하늘에 반짝반짝 빛나서 누군가에게 길을 알려주는 별처럼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며 살 수 있는 아들, 딸들이 되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작성자 : 김순의 2016-12-13 15:56:41
[협회 제9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대상] "기쁨이와 평안이"(2014. 10.)

 

기쁨이와 평안이



김순의

2014. 10.



사춘기를 요란하게 보낸 아들이 뒤늦게 검정고시를 통과해 대학에 들어갔다. 질풍노도가 좀 자려나 했더니 여전히 밤낮을 거꾸로 살았다. 한번은 급하게 들어오더니 미역국을 끓여달라고 했다. “생일도 아닌데 웬 미역국? 누가 애 낳았냐?”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정말로 애기를 낳았단다. 친구가 사귄 여자가 출산을 했다는 것이다. 벌써 “기쁨”이라고 이름도 지었단다.

2학기 등록을 포기하고 그 돈으로 원룸을 얻었으니 필요한 살림살이도 준비해 달란다. 양쪽 부모 알면 안 되는 일이니 비밀을 지켜야한다는 것이다. 사정을 듣고 보니 거절할 수도 없어 시장으로 향했다. 냉장고와 가스레인지는 중고로 샀다며 간단하게 하라지만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큰 냄비 작은 냄비, 밥그릇 국그릇, 칼 도마, 큰 대야 작은 대야, 주걱 국자, 양념 통, 실 바늘...... 목욕탕에서 쓸 물건까지 챙기느라 한나절을 돌아다녔다.

큰 냄비에 미역국을, 작은 냄비에는 어묵 볶음을 담았다. 우선 먹을 밑반찬과 산모 먹을 나물도 무쳤다. 다락 속에 모아 둔 살림도구까지 챙겨 실려 보내고 나니 그 때야 피곤이 몰려왔다. ‘살다 살다 별 일을 다 해 보겠네.’ 아픈 다리를 주무르면서도 꼼지락거릴 어린 것 생각에 마음은 흐뭇했다.

아들은 처음으로 본 신생아가 신기한 듯 틈만 나면 기쁨이를 보러 다녔다. “엄마! 오늘 기쁨이가 웃었어요. 진짜라니까요. 오늘은 기저귀 채우다 고추에서 오줌이 분수처럼 솟는 바람에 내 옷도 버렸어요. 어떻게 애기 방귀 소리가 그렇게 클 수가 있어요?” ‘어떤 녀석일까?’ 매일 얘기를 듣다보니 살며시 기쁨이가 보고 싶어졌다.

아들은 내 속내를 읽었는지 기쁨이 사진을 가져왔다. 아이 키우느라 방에만 있는 기쁨이 엄마 바람 쐐준다고 시외로 나갔단다. 그런데 정작 그 부모는 연인들처럼 손잡고 다니고 우리 집 녀석이 아기 띠를 매고 있지 않는가. 교우들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 그렇다는 것이다. “야! 장가도 안 간 놈이 아이 안고 다니다 혼인 길 막힐라” 우스갯소리로 넘겼다. 그 집안 형편을 알고 있던 터라 그 상황이 이해가 되면서도 언제쯤 알려야 할지 걱정이었다.

사실 기쁨이 할아버지는 안면이 있는 목사님이시다. 몇 년 사이 두 배로 성장해 좋은 소문이 난 교회다. 그런데 지난여름에 큰 아픔을 겪었다. 필리핀으로 청년부 수련회를 갔다가 큰아들을 잃었다. 물에 빠진 친구를 보고 뛰어 들었다가 익사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칭찬을 달고 자라 일찍이 교사로, 찬양대로 섬기던 아이였다. 더구나 이번 방학에는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아들에게, 네가 가서 섬겨야지 무슨 소리냐며 데려 갔었다니,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목사라서 성도들 앞에서 티도 못 내고 숨 죽여 슬픔을 삭였을 것이다. 사택에는 불 꺼진 시간이 많고 식구들은 급격히 말 수가 줄었다고 한다.

집안이 그 지경인데 사고를 친 것이다. 제 딴엔 목사 아버지 체면 세워준다고, 기숙사에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막일을 하며 생활비를 댔다. 기쁨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뒤집고 앉고 서고...... 우연한 기회에 기쁨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쌍꺼풀 찐 눈이며 웃는 표정까지 할아버지를 쏙 빼 닮지 않았는가.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쉬쉬했는데도 말이 새고 말았다. 그런데 기막힌 시점에 터졌다. 큰아들의 1주기가 다가오자 어떻게 넘겨야 할지주변 사람들이 더 걱정하던 참이었다. 밖에서 손자가 크고 있다는 말을 들은 사모님이 단숨에 달려가 아이를 데려왔다. 아이를 본 목사님 얼굴에 1년 만에 웃음이 번졌다.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은 생명이 떠난 자리를 생명으로 채워주셨다. 그동안 안타깝고 조심스러워 위로의 말도 제대로 건네지 못한 성도들이 더 기뻐했단다. 자칫했으면 목사님 아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비방거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반대로 칭찬거리가 된 것이다. 기쁨이 아빠는, 성도들이 잘했다며 번갈아 등을 두드려주는 바람에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다녀야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그 일도 아름답게 마무리해 주신 것이다. 기쁨이는 뒷짐 지고 걷는 할아버지 흉내를 내며 졸졸 따라 다닌단다. 녀석의 재롱에 집안에 웃음소리가 그칠 날이 없다니, 고 녀석 이름 값 한번 제대로 한다. 기쁨이 엄마 아빠는 결혼식을 마친 뒤 학생으로, 며느리로 제 자리를 찾았다. 기쁨이네 일은 그렇게 전화위복,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겨울이 되었다. 늘 지갑을 털어가던 아들 녀석이 공사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며 나다녔다. “추운데 뭔 일이래? 배낭여행이라도 갈 참이냐?” 물었더니 “돈 쓸 데가 있어서요.” 했다. “그러니까 어디에 쓸 거냐고?” 하자 “아따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물으세요?” 하기에 그냥 넘어갔다. 하루는 저녁밥을 차려주며 무심코 말을 걸었다. “너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냐?” “그게 무슨 말인데요?” “대학생이라는 놈이 그것도 몰라? 말 그대로 남의 산에 있는 돌로 내 돌을 다듬는다는 뜻이야. 더 쉽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일에서 교훈을 얻는다는 뜻이지” “그러니까 갑자기 왜 그 말을 하는 거냐고요?” “갑자기가 아니라 너는 기쁨이네 보면서 배운 게 없냐? 세상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거든. 학교 마치고 직장에 다니면서 준비를 한 다음에 결혼을 해야지 덜컥 아이부터 가지니까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리잖아. 친구를 보면서 잘 배웠을 테니 그 일은 걱정 안 해도 되겠지?” 했더니 순간, 도둑질 하다 들킨 사람처럼 흠칫했다. 표정이 아리송했지만 그 뜻을 알아들었으면 됐다 싶었다.

며칠 뒤, 녀석이 상담할 일이 있다며 음료수를 건넸다. 사연인즉슨, 또 다른 친구가 사고를 쳐서 임신을 시켰단다. 그 어머니는 바른생활 아줌마로 도저히 그런 일을 용납 못할 분이라서 임신중절 수술을 하려고 일을 다닌다는 것이다. “너희 친구들은 왜 다들 그 모양이라니? 힘들게 대학에 들어가서 그게 할 짓이냐?” 한마디 쏘아붙였다. 그랬더니 만약 입장 바꿔 엄마 일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게 질문이라고 하냐? 당연히 애를 낳아야지. 어찌됐건 생명은 하나님 소관이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 다음 길게 부연 설명을 했다. “준비하고 계획해서 낳았으면 좋았겠지만 어쨌거나 생명이 잉태된 것은 축복이야. 책임질 일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어떻게 지들 맘대로 생명을 죽일 생각을 해? 간덩이가 부었지, 어떻게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할 수 있냐고? 너도 다른 사람들 같으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거다. 지금은 장려금까지 주면서 출산을 권하지만, 국가적으로 산아제한을 하던 때라 셋째는 의료보험 혜택도 안 주는데도 너를 낳았지 않냐? 우리 때에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서 잘 키우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표어가 곳곳에서 볼 수 있었어야. 우리 고향 면사무소 앞에는, 생긴 대로 낳다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는 플랜카드도 붙어 있었다니까. 배불러서 다니다 미개인 취급을 받으면서도 내게 태인 생명 어떻게 해 볼 생각은 꿈에도 안 해 봤다야. 낙태가 유행처럼 번져서 몇 집 건너 병원에 다니는 것이 일이었는데 나는 그런 일로 병원에 가 본 적 없어야. 산부인과 병원은 낙태 수술로 먹고 산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니까. 친구 누구야? 내가 그 집 부모 만나서 얘기 해 볼 테니까 성급한 행동 하지 말라고 해라.” 그러자 녀석이 “대쪽 어머니께서 웬 일이세요? 남의 일이라고 상당히 너그럽네요? 알았어요. 친구에게 그렇게 말 할게요” 하며 나갔다.

평생 말씀을 듣다보니 가랑비에 옷 젖듯 예수님의 사상에 물들었나보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신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신 것은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다는 뜻 아니겠는가.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안식일도, 사람들의 비난도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그러다 결국 우리 위해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는가. 생명이 최우선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어떤 것과도 타협할 수 없을 만큼 단호하게 굳어버렸다.

그랬는데 보름 후 쯤 일이 터졌다. 지난 번 상담했던 주인공이 친구가 아니고 바로 지 놈이라는 것이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혀도 유분수지 어이없고 황당했다. 돌이켜 보니 수상쩍은 일도 많았는데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여자 친구가 임신했다는 걸 알고 수술비 마련하려고 일을 하러 다녔단다. 내 반응을 보려고 친구 핑계 대고 넌지시 떠 봤는데 아이를 낳아야한다는 말에 생각을 바꿨다는 것이다. 그동안 질서에 대해 귀에 못이 박이도록 일렀으니 이해 못 할 줄 알았던가 보다. 병원에 가려고 모은 돈으로 임신복도 사고 몸보신도 시켰다는 말을 들으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문득 타산지석에 대해 길게 설명했던 일이 생각나서 물었다. “야! 타산지석에 대해서 말 할 때 찔리지도 않던? 어떻게 그렇게 시치미 떼고 능청스럽게 듣고 있었냐?” “아따, 엄마가 느닷없이 그런 말을 하니까 뜨끔했죠. 무슨 눈치를 챈 줄 알고 놀랬다니까요.” “에라 이 나쁜 놈아! 그 일이 그렇게 좋아 보여서 따라 했냐?”며 등짝을 세게 후려쳤다. 자칫 학생이 애 낳아서 어쩔 거냐고 함부로 말했더라면 어쩔 뻔 했는가. 뭐든 반듯해야 직성이 풀리는 내가 어떻게 그렇게 시원하게 답을 했을까? 자격증도 없으면서 상담 한번 끝내주게 잘 했다.

먼저 며느리 될 아가씨를 불렀다. “예쁘게 잘 컸네. 그런데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어떡해! 내 아들이지만 별로 맘에 안 들거든.” 아들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첫 인사를 했다. 우선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칭찬을 해 줬다. 한 송이 꽃이 피는데도 소쩍새와 천둥이 울고 긴 날 무서리가 내리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잉태되기까지 무한한 섭리가 있었음을 얘기했다. 햇빛과 공기, 믿음이나 사랑처럼 가장 귀한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데 자식도 그 중 하나라고, 이 세상에는 아이 못 가진 부부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고, 아이 하나 낳는 것이 평생소원인 사람도 많다고, 이번 일이 네 인생에서 가장 탁월한 결정이 될 거라고 긴 설교를 했다.

그러고 나니 그 쪽 부모가 걱정되었다. 딸이 아이 가진 것을 알면 얼마나 놀랄까? 더구나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분들이라 더 힘들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주님을 영접한 것은 이 때를 위함이 아니겠는가. 그 분들은 내가 품어야 할 또 하나의 생명으로 여겨졌다. 며칠 뒤 그 부모와 만났는데 염려했던 대로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잘 한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애를 낳기로 했다니까 우리가 받아주자고 사정했다. 예쁘게 키운 딸 넉넉하게 품어 주겠다며, 그 쪽에서 하자는 대로 따르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배 불러오기 전에 결혼식을 하기로 하고 급하게 날을 잡았다. 평소 혼전순결을 강조하던 목사님께서도 사정을 알고 흔쾌히 주례를 서 주셨다. 주례사에는 사돈과 그 친척들을 향한 복음의 메시지도 들어 있었다. 철부지 부부를 몇 번씩 불러 부부가 지켜야 할 도리와, 좋은 부모 되기를 가르쳐 주셨다.

그렇게 며느리는 오월의 신부가 되어 우리 집으로 왔다. 학생 신랑을 만났으니 우선 함께 살기로 하고 신혼 방을 꾸몄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괜히 서러운 시집살이, 몸도 무거운데 얼마나 힘들까 싶어 부지런히 밥을 해 먹였다. 그렇게 달을 채워 건강한 손자를 봤다. 태명이 평안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우리 집에 평화를 가져왔다. 장가가면 철난다더니 밖으로 돌던 아들이 부쩍 아빠다워졌다. 퇴직해서 무료하던 남편도 아이 씻기고 먹이고 베이비시터가 다 되었다. 아들이 직장을 갖게 되어 분가했는데 평안이는 친가 외가를 넘나들며 평화의 메신저 노릇을 톡톡히 해 내고 있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세뇌를 시켰더니 이제는 자연스럽게 “할머니는 누구?” 하면 “생명의 은인”이요 한다. 그 뜻이 궁금했던지 “할머니! 그런데 생명의 은인이 뭐 야?” 하기에 아주 많이 고마운 사람이라고 해놓고 한바탕 웃었다.
기쁨이는 여덟 살로 학생이 되었고 평안이는 유치원에 다닌다. 나이는 한 살 차이인데 둘 사이엔 서열이 분명하다. 기쁨이는 평안이를 숫제 애기 취급이고 평안이는 깎듯이 형아라고 부른다. 며칠 전 바닷가에 바람 쐬러 나갔다가 아들 친구들을 만났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틈에서 기쁨이와 평안이도 뛰어다니고 있었다. 두 녀석 모두 속도위반 딱지를 달고 나와서인지 달리기도 잘 한다. ‘건강하게 자라서 평안과 기쁨의 씨앗을 온 누리에 뿌리거라.’ 축복의 손을 모았다. 녀석들이 만들어 갈 미래가 가을 하늘처럼 높고 푸르러 보였다.

 

작성자 : 최정화 2016-12-13 15:51:39
[협회 제9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우수상] "없음(생명 윤리에 관한 수기) "(2014. 10.)

 


없음(생명 윤리에 관한 수기)


최정화

2014. 10.



저는 남편과 9살, 7살 두 딸을  둔 아내이자 엄마입니다.
저희 가정은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하지만, 첫째는 배로, 둘째는 가슴으로 낳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단하다는 말과 함께 잠깐의 침묵이 흐르면서 저희를 특별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 다음엔 조심스레 어떻게  입양을 하게 됐냐며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입양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교회를 다니고 있어서인지 입양이 낯설지 않았으며 결혼 두달만에 임신을 했을 때,
기쁘고 설렘보다  부모가 되어 한 생명을  양육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더 커서
온전한 기쁨과 감사를 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실행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유산이 되었습니다. 잠깐동안 이였지만 임신과 유산은 저에게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사랑을  주지 못하고 보낸 것에 대한 안타까움,미안함, 무언가 꽉 찬 느낌이였는데 그 생명이 이젠 없다는 허탈감,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겨야 하나? 분노감등 갖가지 감정이 수시로 올라와서 힘든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며칠동안, 아픔의 속내를 주님과 나누면서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생명의 시작이란 막연히 태동이 느껴지고 어느 정도 형태가 이뤄진때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7주만에 유산이 되어 심장 소리 한번 듣지 못했지만, 생명의 시작이란 태아크기의 크고 작음이나 심장박동 유무,태동과는 상관없이 수정된 순간부터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임신하면 누구나가 건강하게 임신 출산 양육의 과정을 거칠거라고 생각했던것도 그렇지 않는 경우가 의외로 많음을 알게 되었고. 생명에 대해서, 생명의 주관자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게 되었고. 그때 하나님께 기도 드린 내용이 있습니다.
제가 미처 하나님 주신 생명이 얼마나 귀하고. 그 한 생명이 잉태되고 임신이 지속되고 출산 양육까지 하나님과 부모의 사랑과 정성 희생이 있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앞으로 저는  이 땅의 생명 살리는 일에 적은 힘이라도 보태겠습니다.
 회복기를 보낸 후 임신을 소망했을 때  2년이 다 되가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 시간동안  소망과 기대 낙담과 슬픔 하나님을 향한 투정도 부려보고 길을 가다마주치는  임산부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볼때도 있었습니다.
2년반 만에 새 생명이 허락되었으나 임신초기에 무지함으로  약을 복용한게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들께 여쭈었을 때, 장애유무에 대한  의견들이 다르셨기 때문에 혼란스러웠지만 어렵게 주신 생명인만큼 저희가 판단할 게 아니라는게 남편과 같은 뜻이였습니다. 교회와 함께 기도하며 중간에 다들 확인해보는 기형아 검사도 하지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열달을 보내고 감사하게도 건강한 아이를 낳았습니다.
큰 아이가 14개월 무렵, 아이가 자라는게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둘째도 낳고 싶었습니다. 첫 아이가 어렵게 임신되었던만큼 하나님께 보너스 받은것만 같아서 둘째도 꼭 배로 낳아야지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남편과 입양에 대해서 얘기 나눌 때, 남편은 아직 때가 아닌 것 같다고 했습니다.
몇 달 후에 다시 의견을 물었을 때, 남편은 사실 큰 아이를 더 사랑해서 혹시라도 둘째에게 상처를 줄까봐 자신이 없다는 것이였습니다.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입양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1년이 지난후, 수양회를 다녀온 남편이 수양회 주제인 소명에 대해 침묵기도를 할 때,  저의 땅끝 소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여쭤봤는데 갑자기 입양이라는 두 글자가 스쳐 지나간 듯 했다고 합니다. 이게 뭔가 싶어서 다시 기도했을 때도 같은 상황이라서 남편은 우리 가정의 소명이 입양이구나 순종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저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 다음엔 입양선배인 목사님께 알리고, 큰 아이에게도 동생이 생기는 것에 대해 물었을 때 ,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결정하니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친척들에게도 입양의사를 밝혔는데 의외로 큰 반대 없이 저희 의견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입양기관 면담도 편안하게 마치고, 선배 입양 가족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첫째와 둘째를 편애해서 둘째에게 상처 줄까? 그 부분이 염려스럽다 할 때, 그 분들이 너무도 쉽게  그렇지 않을거라고 키우다 보면  첫째나 둘째나 똑같이 여겨질거라는 말을 듣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입양 절차가 순조로히 진행될 무렵. 큰 아이를 태교했듯이 어딘가에서 잉태되어 자라고 있을 둘째와 그 아이를 품고 있을 엄마를 위해서 기도로 태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틈틈이 생각나는 대로 축복기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아이와 저희 가족이 만났을 때 서먹하지 않도록...
또 생모와 아이의 헤어짐의 아픔이 아주 조금이라도 덜 하기를 바라며..
 드디어 기다리던 입양기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이가 태어났는데 생모가 활동성 비염간염이라 아이에게도 영향이 있을 수 있으니, 남편과  안면있는  의사선생님들과 자문을 구해 보고 입양여부를 결정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대부분 생모가 활동성 비형간염이라도 신생아가 면역글로불린 주사를 바로 맞으면 95%가 괜찮긴 하지만. 혹시나 이렇게 건강상 문제가 우려되면 국내입양이 어려울수도 있다는 말도 하셨습니다.
이건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였습니다.
우리를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원래부터 예정하셨을 아이를 만나게 해 주실 거란 믿음에 면담때 아이에 대한 희망사항을 큰 아이와 같은 동성인 딸을 원하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말씀 드리지않고 , 손꼽아 기다려왔는데 말이지요.
  여하튼 태어난 이 아이를 위해 먼저 축복기도를 하는게 순서인거 같아 기도를 하고 남편에게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습니다. 생기지도 않은 일을 먼저 염려하여 이 아이를 해외입양 대상자로 보내고 싶지 않다는데 남편과 뜻이 같았기에 입양의사를 알리고, 첫 만남을 갖던 날. 저희는 알았습니다.
너무도 시끄럽고 더운 여름날이였는데도 곤하게 잠든 이 아이를 보며 진짜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보내신 둘째라는걸 남편과 저 그리고 첫째 아이는 알았습니다.
당장이라도 집으로 함께 가고 싶었지만 입양절차가 남아있어서 2주정도 기다린 후
둘째 딸은 그렇게 저희 가정의 품에 선물로 안겨졌습니다.
교회 가족과 친척들의 많은 축하를 받으며, 순둥이 둘째 딸은 잘 먹고, 잘 자고, 애교도 많은 아이로 잘 자라갔습니다. 행복이란 이런 것이지.. 교만했었나 봅니다.
면역글로불린과 비형간염 스케쥴대로 예방접종 잘 하면 95%의 아이들이 아무 문제 없다는데 저희 둘째는 안타깝게도 5%에 해당하고. 염증을 나타내는 혈액검사 수치도 높고, 소아과 선생님들도 선천성비형간염 환아들의 비관적인 예후를 자세히 알려주셔서 두려움에 마음이 눌리고 웃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도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시간동안 교회 가족들의 절실한 중보기도로 저희 가정은 안정을 찾아갔고 몇 달후 재검사에서 염증 수치가 많이 내려가서 따로 치료할건 없고 정기적인 혈액검사만 받으면 된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을 졸이게 했던 저희 둘째는 무럭무럭 그 이후로는 별탈없이 건강하게 지금껏 잘 자라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마음에 둘째와의 만남을 포기하지 않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마음같아서는 둘째에게 영원히 입양사실을 숨기고 싶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공개입양을 택했습니다. 어릴때는 아이가 별 내색을 안했지만 일곱 살이 되니 저희 둘째는 낳아주신 분들에 대해 궁금한것도 많고. 왜 함께 살 수 없는지 자주 물어옵니다. 때론 너무 보고 싶다고 울기도 합니다. 그럼 저희는 하던 일을 멈추고 둘째와 함께 너를 낳아주신 그분들이 넘 감사하고 소중하단다. 너처럼 엄마 아빠도 그분들이 정말 보고싶단다.
 이렇게 예쁘고 똑똑한 딸을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네가  자라서 어른이 되었을 때, 네가 원하면 낳아주신 분을 만날 수 있다고..이야기해주면 딸아이는 그때 엄마 아빠가 함께 가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저는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게. 엄마도 그 날이 너무 기다려진다.
이렇게  마무리 됩니다. 처음엔 소심한 듯 하지만 당차고 그림도 잘 그리고 남을 배려하고 도움 주는 걸 좋아하는 아이, 체력도 좋고, 말을 조리있게 잘 하는 야무진 아이 우리 둘째입니다. 얼마 전엔 어떻게 알게 됐는지 유치원 친구가 입양했으니깐 너희엄마는 너희 언니 엄마지 네 엄마가 아니야. 했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했으나 딸 아이가 그렇지 않다고 자기는 여전히 엄마 딸이라고 당당히 이야기 해 주었답니다.그리고 나서, 넌 입양이 뭔지 아냐고 물어보고 모른다고 하니깐 침착하게 설명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 딸 아이가 대견하고. 이렇게 담대하게 자라게 하시는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앞으로 딸 아이가 접하게 될 사람들의 편견과 자신의 정체성 혼란으로 야기되는 어려움들이 크겠지만. 딸과 저희 가정이 의지할 분..하나님을 믿으며 이 아이가 세상 속으로 나가서 상처받고 나뒹굴 때 언제나 돌아와서 쉼을 얻고,새 힘을 얻고 기쁨도 함께 나눌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인 가족으로 있어주는 것 그것이 저희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저를 너무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나태하고 방만할 때마다  둘째로 인해 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시기 때문에. 둘째는 저를 하나님께 붙들린 자로 살아가게 하는 그야말로 선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실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저희에게는 선물이지만 저희 둘째는 아무것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낳아주신 분들과 함께 살 수 없었는지부터...
제 바램은 저희 둘째와 같이 낳아준 부모, 길러 준 부모 따로인 아이들이 적었으면하는 것입니다.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을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이들이 너무 많이 겪고 있습니다. 바램과 달리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미비합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잠깐이라도 낙태반대캠페인에 데리고 가거나, 하나님 주신 성은 결혼한 부부에게 아름다운 선물인만큼 그때까지 소중하게 잘 간직하는 거라고 얘기해주기도 하고, 성을 쾌락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도 좋다거나, 원치 않는 임신을 하였을때는 낙태를 한다거나, 잘못에 대한 처벌을 경감 받기 위한 방편으로 임신된 아이를 이용하라는 대중매체의 그릇된 메시지를 엄마로서 하나라도 차단시켜 주려 노력하는 것이 다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아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 일방적으로 전해지는 매스컴의 홍수속에서 아이들 스스로 성에 대한 분별력을 키울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자주 듭니다.  그래서 또래 아이를 둔 어머니들과 이같은  의견을 나누고 서로의 생각을 지지해주며 작은 정보라도 나누고 있습니다.
때로 공중파에서도 아주 유익한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몇 달전, 태아라는 다큐와 ccm 가수의 토기장이라는 곡을 아이들과 보고 들으면서 인간의 수정부터 임신 주수별로 이뤄지는 발달단계와 부모와 태아 사이에 교감을 나누는 장면, 출산장면등을 다룬 영상을 보며 어쩌면 이렇게 시기별로 정교하게    신체기관들이 생겨나고 잘 성장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만드셨을까 감탄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잠잘 때 딸아이는 토기장이라는 곡을 들으며 곤히 잠들기전 행복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곡을 듣다보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이렇게 정성스레 지으셨는데..하루에도 몇 번씩 많은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했구나 싶어 반성도 하고, 마음에 걸리는 언행을 줄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저의 이 작은 노력이 있다고 세상이 금방 무너진 성의 문제가 회복되리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언젠가 매스컴에서 전동차와 역 사이에 사람이 끼었을 때,  꿈쩍도 안할것같던 전동차가 누군가 한 사람이 밀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 묵찍한 것을 움직여서 사람을 구조해서 대서특필 된 적이 있습니다.그뿐아니라,  위험에 빠진 위기 동물 한마리만 구조되도 사람들은 제 일처럼 기뻐합니다.이처럼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이 한 사람 한사람 모여 들불처럼 번지다보면 세상을 변화 시킬 큰 불로 모일 날이 올거라 생각하며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감사합니다

작성자 : 김민영 2016-12-13 15:46:24
[협회 제9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특별상] "내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 "(2014. 10.)

 

내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 

그 사랑이면 충분합니다.



김민영

(대학원생, 강남교회)

2014. 10.

 


날씨가 선선해지며 이 계절이 깊어지니 몸이 기억하듯 그 해 가을이 생각난다.
내게 가난한 마음이 필요한 시기, 그리하여 다시금 은혜로 채워져야 할 시기임을 느끼며 오랜만에 시간을 거슬러 3년 전 가을 어느 날을 떠올려본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양가 어머니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직장맘'의 삶을 살아가던 나는 이전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여러 삶에 대한 고민을 할 여유조차 없이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마음 한 구석에는 뭔가 더 가치 있는 일이 없을까,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일은 무엇일까 하는 고민으로 가끔 멈칫 하기도 했지만 이내 현실을 핑계로 덮어두면서 말이다.
그렇게 뚜렷한 목표도 없이 바쁘고 분주했던 어느 날, 병원의 아는 교수님이 부르셨다.

“김선생.. 암..인것 같아.. 바로 수술하자..”

서른 두 살의 나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병이 그렇게 나에게 찾아왔고 그때부터 의료비 영수증에 ‘중증환자' 코드가 써 있는 암환자가 되었다.
기분 좋게 선선한 가을 바람이 한순간 매서운 겨울바람처럼 느껴졌던 그 날의 느낌이 여전히 기억난다.
이후 정신없이 수술 전 검사를 하며 우리 가족은 1분 1초의 시계소리가 다 느껴질 만큼의 시간을 보냈다.
수술실로 이동하는 침대에 누워 어느 드라마 같이 복도 천장의 지나가는 형광등을 보며 나는 점점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나보다 더 긴장하고 있는 듯한 가족들의 얼굴을 차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을 때 손을 볼에 대고 뿌잉뿌잉하며 웃기로 했던 친정엄마는 펑펑 울고 있었고,
 “Yo! 나는 구원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하며 남편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떨리는 랩으로 부르고 있었으며,
18개월 딸아이는 ”엄마~마~마~“ 울며 부르며 언제 병실에서 집어왔는지 이동 침대 위로 내 작은 성경책을 던져주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

이가 맞닿을 만큼 떨며 속으로 주기도문만 주문처럼 반복하던 내게 딸이 던져준 성경책, 그 안의 생명의 말씀은 마취되기 전에 내 눈앞에 펼쳐졌고 떨던 이도 두근대던 심장도 곧 잠잠해지며 평안해졌다.
그리고 나에게 일어나는 이 일로 인해 나는 이제 하나님을 듣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소망이 생겼으며 이는 그 후의 모든 과정을 이기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동안은 노력하고 애쓰고 효율성을 중시하며 살았었는데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 표적치료를 하며 꼼짝없이 무기력하게 흘려보낼 수밖에 없던 그 시간들을 통하여
깊이 잠잘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를,
어린 딸을 안아줄 힘이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을,
직접 가족을 위해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행복을,
그리고 여자에게는 옷이 아니라 머리카락이 날개였음을....^^
정말 이같은 소소한 것들에 대한 특별함을 마음깊이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시간들을 지나오며 내 삶이 정말 10년, 20년 아니 한 두 시간 앞도 내 것이 아님을 철저히 깨달을 수 있었다. 단 몇 십초 숨을 쉬지 않아도 당장 인체의 모든 기능이 멈추는 인간은 그야말로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알게 된 것이다. 이전에 분주하게 살며 이따금씩 올라오던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질문들에 대한 생각이 이후 더 깊어지게 되었다. 이는 곧 생명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고 내가 전공한 생물학책을 한 손에, 또 이제 나의 전부와 같은 성경책을 다른 한 손에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되었다.

생명윤리..
10년 전 대학원 시절.  첨단 과학기술 중 ‘인간‘ 본연의 문제와 가장 깊이 관련 있는 의생명과학 기술의 발전과 이에 따라오는 여러 윤리적 문제들을 신앙인의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나 관심 있었는데 그때 하던 고민들이 다시금 내 앞에 하나하나 펼쳐지게 되었다. 
환자로 1년여를 보내며 아기의 힘찬 울음소리와 장례식장의 슬픈 울음소리가 공존하는 병원과 가까이 있으면서 생명과 관련된 전반의 문제는 내게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항암약물치료 보다는 수월하면서도 치료에 도움을 준다고 하는 표적치료제 주사를 맞으며 이 주사가 개발되어서 다행이다, 이것도 누군가의 임상시험이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며 새삼 의학기술의 혜택을 누림에 고마워지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의과학 기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약간의 희생도 허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무심코 하기도 했으며 또 이내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아야 하는지 다시 나의 생각들을 점검해야 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 즈음 교회에서는 장기기증 행사를 진행하였고 남편, 딸과 함께 장기기증을 서약하며 과학의 발전보다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생명 나눔에 대하여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내 신분증에 '장기기증', '각막기증' 스티커를 붙이는데 그게 의외로 참 신선하고 행복했다. 나의 주인이 ‘나‘인 것처럼 -심지어 예수님을 구주로 입으로 고백하면서도- 그렇게 내 힘껏 살아온 나에게 장기기증은 나의 주인이 예수님임을 몸으로 고백하는 사건이었다. 개인의 종말의 날인 이 세상 삶을 떠날 날에 대해 또 하나의 준비를 마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후련하고 감사한 마음이었다고나 할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공평한 것 중 하나는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을 영원할 것처럼 살지만 이 땅은 영원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일 것이다. 그리고 생명윤리의 많은 이슈들 중 대리모, 낙태, 이종이식 등의 문제들은 십자가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생명나눔‘으로 조금은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각 사람의 가치관과 학문에 따라 '생명'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생명의 창조자이시고 피조물의 모든 문제 특히 스스로는 도저히 절대로 어쩌지 못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빼고는 '생명'에 대한 많은 고민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문제이며 그저 인간의 학문 도구로만 사용될 것이다.
 ‘가을 어느 날’ 이후 몇 년의 시간을 통하여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생명'에 대한 여러 문제들을 다시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었다. 암이라는 브레이크 없이 핸들을 잡고 계속 나의 삶을 달렸다면 도저히 알 수도 깨달을 수도 없을 많은 하늘의 보물들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직 이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을 바탕으로 앞으로 이 생명에 대한 세상의 학문들도 하나씩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생명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하루하루 주님께 다가가는 남은 삶이 천국을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짧은 이 땅의 삶에서 이와 같은 일이야말로 ‘천사도 흠모하는“ 일이지 않을까.

그렇다. 어느 교수님의 고백처럼 나에게도 "암은 축복"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려움의 시간들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처절한 관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 값을 치루어 구해내신 것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자라는 데까지 우리를 키워 가시는 그런 진짜 ‘아버지’인 것이다. 그것이 자녀가 진정으로 행복한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창조자, 구원자이신 그 분의 얼굴을 맞대어 볼 때 까지 겪을 앞으로의 많은 일들 앞에서도 다시금 툴툴 털고 일어나 하나님의 크고 넓고 높은 지혜를 믿으며 이 땅에서 허락하신 시간을 자녀로서 누릴 것이다.
나를 영원히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으신 전능자 주 하나님,
그 사랑이면 충분하므로..
감사합니다. 주님...^^

작성자 : 소금영 2016-12-12 14:20:07
[협회 제8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우수상] "장기이식 "(2013. 10.)

 

장기이식


소금영

(교사, 한우리교회)

2013. 10.




남편이 교감 선생님이 된지 올해로 2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남편은 매일 몸이 붓고 가렵다면서 저녁마다 다리를 만져보았고 등에는 연고를 발랐다. 그러나 우리는 피곤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 2013년이 되면서 남편은 다리가 더 붓는다고 했고, 부은 곳을 누르면 쑥쑥 들어간다면서 내 다리도 눌러보고, “당신은 아니네.”라고 부러워했다. 4월 어느 날 남편은 몸에 뭔가 이상을 느꼈는지 병원에 예약을 했고, 5월 초에 병원을 다녀왔다.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왔는데 남편이 말하길, “오늘 저녁까지 입원하래요.”라는 것이었다. 너무 놀란 나는 남편, 아들과 함께 대충 짐을 꾸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가는데 병원에서 근무하는 동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당장 입원하지 말고, 준비를 차분히 해서 내일 입원하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들은 남편을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가 입원 수속을 했다. 일주일 정도 입원해서 정밀 검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며칠 뒤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만성신부전증으로 신장이 기능을 10%도 하지 못하니, 빨리 투석을 하거나 신장이식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별다른 증상이 없었는데 신장이 이렇게나 많이 망가졌다니...” 남편과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즉시 남편에게 담담하게 “여보! 걱정 마. 내가 내년에 학교를 그만두고 당신 신장이식수술을 받게 해 줄 테니 그 때까지만 참고 투석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그 검진 결과를 들은 후 처음에는 남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왔다. 길을 걸을 때도 눈물이 났고, 말을 할 때도 눈물이 나왔다. 며칠을 그러다가 “아니지.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정신을 차려야지.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해.”라고 생각하고 울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 일주일 동안 남편이 어떤 투석을 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을 때, 대전에 사시는 시어머니께서는 우리의 말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무슨 일이 있는지 꼬치꼬치 물어 보셨다. 아직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는데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남편이 아직은 알리지 말자고 했고 나와 남편, 동서 그리고 시동생들은 시어머니께 남편의 신장에 조금 이상이 있어서 검진을 받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 드렸다. 시어머님은 검진 결과가 좋게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머니! 이미 결과가 나쁘게 나왔는데 어떻게 해요?” 마음속으로만 생각할 뿐 시어머니가 받을 충격을 생각하니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기도하는 일 밖에는. 제일 먼저 친정 막내 동생인 목사님에게 연락을 하였다. 매형의 신장이 많이 나빠졌으니 기도해 달라고 했다. 그날 저녁 하남에 사는 동생 부부는 병원으로 와서 매형을 만났고 함께 기도해 주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막내 동생 교회와, 여동생이 다니는 교회, 친한 선생님이 다니는 교회, 나를 아는 작은 교회, 남편 학교의 신우회, 그리고 내가 다니는 교회의 중보 팀에서는 남편의 신장 문제를 기도 제목으로 기도해주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신장 투석과 신장이식 수술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니 잘 알아보고 빨리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남편은 어떤 것을 해야 학교도 계속 다니면서 생활할 수 있는지 며칠 간 고민을 했다. 혈액 투석을 하면 이틀에 한 번 꼴로 병원에 가서 하루 4시간씩 큰 주사바늘을 꽂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면 사람이 기진맥진해 지고 직장 생활에도 많은 지장을 받게 되고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 갈 수도 있고, 저녁에 혈액 투석하는 병원도 있다고 했다. 그에 반해서 복막 투석은 환자 본인이 직장에서나 집에서 할 수 있고 시간도 한 번 할 때 30분 정도로 조금 걸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점은 복막 투석을 할 때 감염에 걸릴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때 같은 병실에 젊은 환자분이 입원해 있었는데 그 분은 복막 투석을 하면서 직장 생활을 하던 중 감염에 걸려서 병원에 와서 입원하여 투석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 분은 복막 투석이 좋고 자신은 현재 복막 투석을 하면서 5년 정도 예상하며 장기 사후 기증자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여러 가지 정보를 알아본 후 남편은 마침내 복막 투석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학교를 휴직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요즘은 복막 투석 기계도 좋아져서 어렵지도 않다고 했다. 나는 무조건 남편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 젊은 환우는 남편이 첫날 입원했을 때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면서 자신은 신장의 기능이 5%도 하지 못한다고 진단받았는데 남편은 10% 정도 기능을 한다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했다. 며칠 후에 남편은 신장 담당 의사 선생님을 통해 신장이식수술에 대한 장단점을 듣게 되었다. 신장이식 수술을 할 경우 수술이 성공하면 6개월 정도까지 매우 조심하면 되고 1년 정도까지 조심하면 정상인처럼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단점은 평생 면역 억제제라는 약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마치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 것처럼, “여보! 신장이식 수술이 휠씬 좋대! 그리고 빨리 정상 생활을 할 수 있대!”라고 기뻐하며 집으로 전화를 했다. 나는 걱정하며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남편의 두 동생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투석이 아니라 신장이식수술이 더 좋다고 해서 남편이 신장이식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주저하며 소식을 전한 나에게 막내 시동생은 걱정하지 말라며 형에게 자기의 신장을 기증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또 아빠의 건강을 염려하며 매일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대전에 있는 딸에게도 전화를 했다. “서경아, 아빠가 신장이식 수술을 하면 살 수 있대. 네가 혈액형이 B형으로 같으니 해 줄 수 있니?” 딸은 “물론이야 엄마! 내가 아빠 딸이잖아.”라고 울면서 말했다. 막내 시동생이 O형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내 생각에는 내가 혈액형이 AB형이라서 나보다는 O형인 남편의 남동생과 B형인 딸이 기증하는 것이 남편이 덜 힘들 것 같았다. 일단 두 사람이 먼저 건강검진을 받아보기로 했다. 그러는 중에 병원에 근무하는 분당 동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남편이 B형이고 형제이니 먼저 1순위 후보로 건강검진을 받아 볼께요.”라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은 나는 그저 동서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학교 때문에 계속 남편의 병실을 지킬 수 없었던 나는 병원으로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가족의 사랑을 확인하며 남편은 미안해하면서도 무척 행복해 했다. 이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었다. 복막투석을 하던 그 젊은 환우는 남편에게 “선생님은 정말 행복한 분이십니다. 기증자가 이렇게 많으니!”라고 축하해 주었다. 그 분은 혈액형이 B형이고 아내의 혈액형은 AB형인데 아내가 신장을 기증해 주겠다고 했는데 본인이 부담이 되어서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한편, 아들은 혈액형이 나와 같은 AB형인데다 건강이 좀 좋지 않은 상태라 후보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아들은 아빠에게 도움을 줄 수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모든 것이 잘 되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며칠이 지난 후 동서에게서 연락이 왔다. 큰 시동생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당뇨가 조금 있고 고지혈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큰 시동생은 형에게 매우 미안해하면서, “형 조금만 참고 있어. 내가 운동을 해서 살을 빼고 신장이식수술 할 수 있도록 해줄게.”라고 말했다. 그날 이후 큰 시동생은 매일 한 시간씩 달리기를 했고 한 달 만에 4kg을 뺐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큰 시동생은 그 동안 전혀 운동을 하지 않다가 달리기까지 하면서 무리하는 바람에 관절에 염증이 생겨 약을 먹게 되었고 운동을 그만 두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큰 시동생은 남편이 입원해 있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퇴근할 때마다 병원에 들러 형을 보고 갔다. 병원에 근무하는 동서도 시간 날 때마다 남편에게 가서 살펴 주었다. 큰 시동생이 신장을 기증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 마음이 얼마나 고와운지 몰랐다. 한편, 큰 작은 아버지가 신장을 기증할 수 없게 된 것을 알게 된 딸은 자신이 언제 검진을 받아야 하는지 빨리 건강검진을 받고 싶다고 했고, 나는 막내 작은 아버지가 먼저 검진을 받을 때까지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다시 동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막내 시동생이 올해 4월에 건강검진을 한 자료를 읽어보니 당뇨수치가 기준치보다 조금 높게 나와서 기증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후보는 딸과 나로 좁혀졌다. 이 사실을 들은 친정 막내 남동생은 자신의 혈액형도 B형이니 만일의 경우 매형에게 신장을 기증해 주겠다고 했다. 남편은 매우 고마워했다. 나는 딸이 20대이고 건강하니 딸이 기증하는 것이 남편에게 더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대학에 재학 중이고 내년에 졸업하여 직장도 잡아야 하는 등 딸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복잡하고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고민하고 있을 때에 동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즘은 혈액형이 달라도 신장이식수술이 가능하니 형님이 먼저 검진을 받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물론 나는 내가 혈액형만 같으면 당장 해주고 싶었다. 그동안 지켜보던 나는 그날부터 남편에게 내 신장을 기증할 수 있게 되기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때 마침 학교 개교기념일이 6월 5일에서 6월 7일로 변경되어 수업이 없게 되었다. 6월 7일 병원에 가서 하루 종일 정밀 검사를 받았다. 소변검사, 혈액검사, CT, MRI, 마지막에 신장 검사까지 받았다. 신장 검사를 받는데 의사가 말하길 정맥주사를 왼쪽 팔에 20분간 맞는데 그것을 통해 내 신장이 이식할 수 있는 건강한 신장인지 여부를 알게 된다고 했다. 만일 결과가 좋지 않으면 20분을 더 추가하여 40분 동안 주사를 맞아야 하고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오면 신장을 기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며 눈을 감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 20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른다. 20분이 지나자 의사 선생님은 신장이 건강하니 가도 된다고 했다. 정맥 주사를 빼고 났는데 주사 맞은 자국은 시퍼런 멍이 들었고 왼팔은 힘이 없었으며 주사 자국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그것을 보면서 혈액 투석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이 얼마나 잘 한 일인지, 만약 남편이 혈액 투석을 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되었다. 건강검진 결과는 다 정상으로 나왔고 일주일 안으로 24시간 대변만 제출하면 최종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몇 년 전에 검진했을 때는 검진결과가 골다공증에 가깝다고도 했고 빈혈도 있었던 적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일주일 뒤 대변을 받아서 병원에 제출하고 다시 분석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신장이 하나만 있어도 살 수 있다고 하니 2개인 제 신장 하나를 남편에게 줄 수 있도록 저를 사용해 주세요.” 마침내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검진 결과 다 정상이고 남편과 내가 유전자도 한 개가 맞는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뛸 듯이 기뻤다. 이제 딸이 검진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남편과 내가 혈연관계도 아닌데도 유전자가 1개나 맞다니! 모든 형편과 상황이 내가 신장을 기증할 수 있는 쪽으로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날 이후 나는 내 신장이 남편에게 잘 이식되기를 바라며 집에서 남편과 똑같이 저염식으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남편의 형제분들이 신장을 기증할 수 있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내가 기증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들 놀라면서 안타까워 하셨고 새벽예배마다 모든 예배 때마다 한마음으로 기도해 주셨다. 그 다음 주 나는 학교에 조퇴를 하고 병원에 남편과 함께 가서 혈액 교차 반응 검사를 하였다. 이 검사 결과만 좋게 나오면 신장이식수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병원에서의 검사 결과는 혈액형만 맞는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수술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상태라고 했다. 드디어 신장이식수술을 할 수 있는 모든 검사가 끝나고 이제 수술 날짜만 잡으면 되게 되었다.
  나는 시어머니께 모든 검사가 끝났고, 나의 건강 상태가 좋고 남편과의 혈액 교차 반응 결과도 좋아서 남편에게 신장을 기증할 수 있게 되었다고 전화를 드렸다. 시어머니께서는 며느리와 큰 아들이 동시에 수술을 할 수 밖에 없게 된 상황에 대해 매우 슬퍼하시며 내게 힘을 내라고 내가 강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처음 남편이 시아버지께 신장이식수술을 할 거라고 말씀드렸을 때 시아버지께서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아들아 걱정마라! 아버지가 신장을 떼어주마!”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이가 65세 이상인 분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시어머니께서는 “늙으면 아무 도움도 안 되는구나”라고 속상해 하셨다. 그리고 며칠 뒤에 수술비가 얼마인지를 알아보셨는지 처음으로 큰 아들인 남편에게 돈을 보내 주셨다. 우리는 부모님의 마음을 알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또한 두 시동생들도 수술비에 보태라며 돈을 보내왔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가족들의 도움은 남편과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마침내 수술 날짜는 7월 26일로 잡혔고, 남편은 나와 혈액형이 달라서 열흘 먼저 병원에 입원을 해야만 했다. 7월 24일 조퇴를 하고 입원하러 가는 데, 큰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나, 매형은 좀 어때?” 나는 “매형 신장이식수술을 26일에 하기로 했고, 지금 나는 병원에 입원하러 가는 중이고 신장이식기증자는 나야.”라고 대답했다. 투석하는 줄로만 알고 있던 큰 남동생은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 말도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병원에 도착하여 남편의 병실로 갔더니 남편은 목에 정맥주사를 꽂고 있었다. 이틀에 한 번씩 혈장교환을 하며 오직 수술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잘 견디고 있었다. 그날 2시쯤에 담임 목사님을 비롯하여 교회의 권사님들, 집사님들이 오셔서 함께 예배를 드려 주시고 수술이 잘 되기를 기도해 주셨고, 저녁에는 친정 막내 남동생 부부가 와서 기도해 주고 남편과 함께 앉아 있는 사진도 찍어 주었다.
  드디어 7월 26일 아침 9시! 나는 휠체어를 타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남편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자신 때문에 아내가 수술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다른 환우들도 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내 눈에서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두렵고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얼른 마음으로 찬양 한 곡을 불렀고, 나를 위해 그리고 그 곳에 있는 환우들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잠시 기도를 드렸더니 곧 마음이 평안해졌다. 수술실에 들어갔는데 간호사는 나에게 긴장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몇 마디 말을 했고 나는 나도 모르게 마취가 되어 잠이 들었고 깨어났을 때는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 한편 남편은 신장이식을 받은 환자라서 일반병실로 바로 오지 못하고 수술 후 즉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수술 다음 날 오전에 시부모님은 대전에서 막내 시동생과 함께 올라오셨다. 시어머니께서는 “고생 많이 했다. 네가 우리 아들을 살렸구나. 고맙다!” 하시면서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남편을 면회한 후 대전으로 내려가셨다. 오후에 큰 남동생이 와서 잘 회복할 수 있을 거라며 격려해 주고 갔다. 잠을 자다 눈을 뜨니 외삼촌께서 와 계셨다. 외삼촌께서는 “장한 일을 했구나. 고생했다.”라고 위로해 주고 가셨다. 나는 수술 후 일주일간 입원을 하였고 남편은 내가 퇴원하는 날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딸의 소식에 의하면 남편은 수술한 다음날부터 밥을 먹기 시작했고 밥도 아주 잘 먹고 얼굴도 좋아졌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수술하기를 정말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많은 학교 선생님들, 교회 집사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들이 멀리서 와서 위로와 격려를 해 주었다. 이 일들을 통해 나는 우리 주변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가족과 부모, 형제와 자매의 사랑을 더욱 알게 되었다. 병실을 지켜준 딸에게 고마웠고, 집안일을 맡아서 하고 차를 운전하여 우리를 태우고 다닌 아들에게도 정말 고마웠다. 
  남편은 두 달 간의 병가를 내고 집에서 어느 정도 회복을 한 후 아직은 마스크를 쓰지만 학교로 다시 출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 또한 다음 주부터 학교에 가서 수업을 할 수 있을 만큼 회복이 되었다. 우리는 집에서 회복기를 가지며 건강해 지기 위해 매일 아파트를 한 바퀴씩 걷는 운동을 했고, 계속 저염식으로 식사를 했다. 9월 24일 병원에 가서 검진한 결과 내 신장이 아주 정상이라는 말을 들었다. 의사 선생님은 내 신장이 하나인데 마치 두 개가 있는 것처럼 신장이 기능을 잘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꾸준히 저염식으로 식사를 하고 물을 많이 먹으라고 당부하셨다. 남편은 그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기뻐했다. 나는 남편의 신장이 나빠져 이식을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서 오늘날 5만 명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신장 기증자가 없어서, 신장 사후 기증자를 5년 정도 기다리면서 투석을 하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수기를 읽고 더욱 용기를 얻어 장기를 기증하여 생명을 살리는 일에 사랑으로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작성자 : 박수경 2016-12-12 14:17:57
[협회 제8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우수상] "완전함으로의 갈망, 생명의 지향점 "(2013. 10.)

 

완전함으로의 갈망, 생명의 지향점



박수경

(이대 생명윤리정책합동과정 석사과정, 서울남일교회)

2013. 10.



살아감, 삶의 질문에서 예수님을 만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일찍이 다수의 철학자들과 문필가들의 주제가 되었던 질문입니다. ‘생명윤리를 공부함‘ 이라는 것은 이러한 인간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들어가다 보면 결국 마주치게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의 존재에는 목적성이 있는가, 내가 왜 살아가야 하는가, 지금 내가 살아감이라고 하는 이 자리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공부를 하기 때문에 가지는 질문이라기보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상황들 속에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들입니다.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나는 그 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창조주 하나님, 전능자 하나님, 주권자 하나님,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본회에서 주관하는 수기를 작성하면서, 이제 곧 서른을 향해 달려가는 여성으로, 학문적으로도 이제 막 태동해가는 아기와 같은 내가 생명윤리분야에서 실천하고 활동한 내용을 적어보자니 여간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필경 글을 써서 살아가야 하는 나의 위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작업들을 하노라면, 이렇게 나의 일들을 담담히 써 내려가는 것도 주님 앞에서의 훈련이라고 여기면서 그렇게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생명윤리는 다루는 쟁점 자체는 현대적이나, 풀어가는 해법은 신학, 철학, 사회과학, 교육학, 과학이라는 여러 학문의 방법론을 활용하면서, 결국에는 학문의 기저에 자리잡은 근원을 다루어야 하는 포괄적인 주제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대학원에서의 학업활동을 이야기하기 전에 개인적이 이야기를 몇 가지 하려고 합니다. 나는 생명과학과를 학부 전공으로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질문이 많고 생각에 침잠하는 일이 빈번하던 나의 성격상, 생물학적 인간의 구성적이고 기능적인 ‘생명‘에만 몰두하기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실제로 동물을 해부해보고, 나의 몸통과 정신을 인체의 생물학에 적용해 보려 애쓰다보면, 생물이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신비한 생명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학부 때에 학점에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정치외교학, 심리학, 철학등의 수업을 넘나들며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나의 성향 탓에 결국에는 생명윤리라고 하는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질문들 앞에서 결국에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 설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꾸준히 일기를 써왔는데, 그 이유 탓만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의 마음판의 죄악들을 헤아리는 데에 무척 익숙한 편입니다. 그러다보니 개인적으로 나 자신의 심령의 전적인 타락에 대해 깊이 회의감을 느끼고, 결국에는 인간 존재의 전적인 타락에 대해 성경 말씀에 수긍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그리 크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씀을 통해 경험하고,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업과 진로를 찾고자 하니, 신학교를 가야하는 건 아닌지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하나님께 물어보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오래토록 고민한 이유는, 으레 믿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는 모든 활동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 활동이 예수님이 대신 활동하시는 것처럼 당당해 하는 것을 위선적으로 보았던 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많은 고민을 하면서 20대 중반을 지나왔습니다.


하루살이, 삶 속에서 죽음을 경험하다

이러한 고민들과는 달리, 나의 현실은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닥쳤습니다. 부도, 이사, 죽음, 상실, 질병, 어찌할 바 없이 연속적으로 직․간접적으로 나의 삶에 불어 닥쳤습니다. '생명'에 대한 의문을 가슴에 품은 채, 생활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취업을 선택했습니다. 병원의 연구소에서는 연구소 보도 자료와 높으신 분들의 환영사와 연설문을 대필하고, 남는 시간에는 주로 환자를 만났습니다. 어떠한 직업적인 연유가 아니라, 기도실에서 가난한 마음을 지닌 환자 대 환자로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소위 말기라고 불리는 소아, 성인 환자들의 고통과 삶에 대한 허심탄회한 심정을 공유하고 함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감히 욕도 참 많이 했습니다. 그 자리는 의학과 생명과학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스스로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깊은 어둠속에 있었고, 환자분들은 육체적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러 온 자리였습니다. 
공적으로는 의 과학 분야의 석학을 대하는 일이 잦았었습니다. 학문적으로 인정받는 석학들은 사적인 자리에서는 '과학'과 '생명', 그리고 '삶'에 대해서 회의와 한숨을 토로하곤 했습니다. 왜일까? '생명'이 무엇이기에. 이러한 물음이 문득 스쳐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3년 전만해도, 여전히 생명의 윤리란 저에게 먼 데 이야기였습니다. 그 당시는 가장 선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적합한 자리에 나를 인도해주실 섭리를 신뢰해 가면서, 그리고 신뢰하려고 노력해 가면서, 하루를 주님과 보내는 것에 목숨을 거는 하루살이로 겨우 겨우 살아갔습니다.
이런 삶 속에서도 공부가 참 하고 싶었습니다. 집이 가난해지면서, 더 하고 싶던 공부를 못하고 돈을 벌어야 했었는데, 직장에 다니면서 발견한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 책 읽고 생각하고 가끔 글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작업을 많이 하는 곳에 가면 내가 정말 힘들 때에도 먹고살 거리는 하지 않겠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부와 동일한 대학원은 조금 쉽게 들어갈 수 있겠거니 했습니다. 의미심장한 포부를 지니고 대학원에 들어온 분들께는 조금 죄송스러운 마음이지만, 내가 생명과학과를 나왔으나 글 쓰는 작업을 하는 연관된 곳을 가기 위해, 인터넷 지식 창에 ‘생명’이라는 키워드를 입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게 된 곳이 생명윤리를 다루는 곳이었습니다.


현실, 쉽지 않아도 말씀의 자리로

그러니, 생명윤리의 ‘윤리’도 모르는 자가 대학원에 와서 배우게 되었으니 주님의 인도해주심이 놀라울 뿐입니다. 막상 대학원에 와서 수업을 듣고, 개인적으로 도서관의 책 향기를 맡으며 철학서, 사회과학서들을 읽고 과제를 하다 보니 다시 찾게 된 것은 성경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의 나 한사람의 삶을 온전히 드려 사는 것도 참으로 쉽지 않은데,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말씀 앞에서 들여다 보려니 버거웠습니다. 무엇보다 생명윤리라고 거창하게 이름 짓는 인간의 활동에 감히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라는 복음의 내용을 녹일 수나 있는 것일까. 그렇게 나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져 갔습니다.
공부를 하면할수록, 생명윤리라는 주제가 정치적으로는 오만한 권력의 힘을 빌어 많은 곳에 결부되어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인간이 탐욕의 노예가 되어 돈의 흐름에 의해 좌지우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매우 심층적이고 복잡한 주제였습니다. 나이가 들면, 깊은 산속에서 혼자 양 떼를 키우면서 면면히 글을 쓰며 살고자 했던 환상이 있던 나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주제였습니다. 또한 ‘생명’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하는 인간의 행위 자체들을 주욱 역사를 통해 보노라면, 역겨움을 느끼기도 하고, 내 스스로 학문적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생명윤리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으로 휩싸인 적도 있습니다.
세상의 생명윤리 활동뿐 아니라, 교회의 생명윤리활동, 각계 각층의 상반된 주장을 바라보면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학문을 한다는 것에 얼마나 많은 몸부림이 필요한지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논문을 쓰고 주장하는 것이 어느 바리새인의 그것과 같은 회칠한 무덤과 같은 뻔뻔함으로 점철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 인간 삶의 생활적 측면에서의 규칙과 규율을 규정하는 생명윤리가 복음의 정수와 맞닿을 수 있는 지점이 있을까에의 고민, 이를 거부하거나 범법하는 자들이 갖게 될 수치와 주장하는 자로서의 자비는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의 고민들이 그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오로지 나라는 죄인 앞에 다가오신 예수님의 모습이 왜곡되면 어쩌나 고민들이 녹아져 생각과 글로써 흐름을 만들어야 하는 이 몸부림이 어쩌면 나의 생명윤리 활동의 전부인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C. S 루이스의 책의

“우리는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지만 각자 다른 소명을 받은 구별된 지체들입니다. 가정교육, 재능, 환경은 대개 한 사람의 소명을 판단하는 믿을 만한 지표입니다. 부모님이 우리를 옥스퍼드로 보내셨고, 나라가 우리를 그곳에 머물도록 허락한다면, 일단 이것을 증거로 삼아 현재 우리가 하나님께 최고로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삶은 학문하는 삶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입니다.”(영광의 무게, p.45)

라는 글귀를 기억합니다. 맞습니다. 현재로서는 제가 이 분야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이란, 지식을 활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일 것입니다. 늘 지식 그 자체와, 학문적 성공과, 세상이 주는 명성이 더 기쁨이 될 유혹이 도사리고 있지만 제가 있는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이란 이런 류의 고군분투가 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생명과학, 완전함으로의 갈망의 터닝 포인트

이러한 나의 고군분투를 아는지 모르는지, 세상은 무척이나 완전함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기준을 상대적으로 정하고, 부의 기준을 상대화하며, 스스로를 사랑하여 무엇인가를 취하기에 열심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갈망에서 개개인의 마음의 필요와 탐욕은 분별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그러나 제가 다루는 생명과학의 영역은 현재 실제 이러한 기술의 적용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자들에게는 물질적인 이유로, 정보의 부족으로, 접하기 어려운 첨단 기술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 첨단 생명과학기술이라고 하는 과학을 앞세워 인간의 완전해지고자 하는 탐욕을 채우려 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나의 생각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우리가 타락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학문이나, 문화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비록 우리의 주어진 본성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올바르지는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내게 물론 더욱 더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논문을 쓰기 위해 준비하면서, 가칭 ‘똑똑한 엄마들의 모임’이라는 소셜 커뮤니티에서는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성별을 감지할 수 있는 진단지를 미국으로부터 공동 구매하여, 착상 전에 유전적으로 진단하여 아기를 구별하여 낳을 수 있는 방법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치 않은 성별의 아이는 착상 전에 자연유산하는 방법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슬프게도, 이런 사례는 교회 내에서도 자주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옳음과 그름의 문제로 이분법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것이든 하나님 앞에서 물어보고 이러한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한 분별이 필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즉 나의 영역에서는 분별이 필요한 생명윤리의 쟁점들을 알려주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복음 전파의 삶의 중요성을 더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핵심입니다.
어떠한 생명윤리의 쟁점에 있어서 우리의 선택이 탐욕이라는 죄악으로부터 비롯된다 할지라도,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욱 바닥을 치기까지 이러한 선택을 허용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탐욕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우리의 중심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영원의 복인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셨다는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그 은혜 앞에 눈물을 흘리며 죄인 됨을 고백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생명윤리협회가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윤리의 관점을 사회에 제시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데 사용받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하여 생명과학을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끝까지 인내하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으로 만족해하며, 복음 전하는 좁은 길로의 완전함을 추구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좋아하여 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많아질 때에, 그 모임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임은 우리의 행위 양식을 금지하고 누군가를 배제하기 위한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좋아하고, 그 분과 가까워지는 삶을 사모하며, 결국에는 진정한 완전함으로의 갈망을 추구하는 살아감이 있는 모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견대로 옳음을 주장하는 것은 나중 일이기에, 그 안에서의 생명윤리의 쟁점은 쟁점사항으로서의 가치가 없고, 복음의 정수만이 우리의 푯대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나는 어느 날 뵐지 모르나, 예수님을 만날 소망을 가지고 내게 허락하신 공부의 영역에서 생명윤리의 여러 쟁점더미에서, 그 사안과 근원을 더 밝히 보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생각과 글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토론을 하고 발표를 하고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나의 역할을 거기까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쟁점들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보기 원하시는지를 깨닫게 될 때에는 이미 답을 가지고 있는 때일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모든 사람을 완전한 빛으로 인도하시는 그 때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작성자 : 김미숙 2016-12-12 14:13:44
[협회 제8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특별상] "호스피스-가장 아름다운 만남을 도우며" (2013. 10.)

 

호스피스-가장 아름다운 만남을 도우며

 

 


김미숙

(피아노 학원 원장, 사랑의 교회)

2013. 10.

 



 하나님께서 친히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사, 흙으로 빚은 육신이 생령 곧 생명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 나는 ‘생명’이라는 단어에 경외감이 들기 시작했다.‘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의 이 말씀은 나를 지으시고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도록 보호하시고 안위하셔서 생명있는 삶으로 인도하셨다는 벅찬 감동으로 다가와 나를 생명지킴 운동을 해나가는 기도자로 만들었다. 세상의 매스컴에서는 끔찍하고 잔인한 사건들의 보도가 연일 퍼져나가며, 최후 심판자이신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이 없는 듯한 그런 일들이 벌어짐을 떠들어댄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길어야 백년도 안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호흡을 거두시면 그 분 앞에 선다. 그러기에, 이 땅에서의 삶을 내 맘과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으시고 만드시며 호흡을 불어넣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드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숨을 쉬고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서,‘애야~ 집에 오너라! 이제 시간이 되었다. 네 일은 끝났다’라고 하시면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야한다. 내가 태어났던 시간과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듯, 나의 죽음의 때도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더 간절히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아드리기 위해서는 나의 미래의 죽음을 준비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늘 깨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있었는데, 작년 이 맘 때에, 어떤 사모님으로부터 호스피스 사역을 권유받았고, 3개월의 기도 끝에 응답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올해에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훈련을 시작하였다.
 호스피스는 죽음을 앞둔 환자가 남은 여생동안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평안하게 맞이하도록 환자와 그 가족을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으로 도우며, 사별가족의 고통과 슬픔을 경감시키기 위한 총체적인 돌봄을 하는 사역이다.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들은 죽음과 생의 마감에 동행자가 되는 것으로 어쩌면 봉사로서 기피의 대상이거나 어렵고 힘든 부분 중에 하나일 것이지만, 죽음 앞에 선 이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명자로 가장 아름다운 만남(死후,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다리가 되는 귀한 사역이다. 하나님은 치료하시고, 우리는 봉사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가장 아름다운 만남을 이루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이러한 봉사자들도 본인의 죽음 앞에서는 초연해지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어떤 형태의 죽음이든 인간의 유한성의 아쉬움과 슬픔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인간에게 절대고독을 가져다주어, 두려움에 휩싸이게도 한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을 더 연약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죽음은 생명을 가진 모든 피조물들의 숙명이다.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감당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는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때로는 친척들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심지어 결혼을 하여, 원가족에서 분리되어 독립하였을 때에도 자녀를 낳아 부모가 되기까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아이들을 기르기는 정말 힘들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삶의 종착역인 죽음의 순간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혼자 떠나야 하는 길이지만, 지금까지 서로 기대면서 함께 더불어 살아왔듯이 죽음의 순간에도 나를 지켜보아주고 동행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죽음을 앞두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는 동안 나는 그들이 몸과 마음으로 전하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 누구보다도 인생의 여정이 크게 바뀐 사람은 바로 나이다. 진정한 나를 찾고,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자 내면적으로 깊이 파 들어간 시간이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유한한 틀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 안에서 삶을 형성한다.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가면서 시간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그 속에서 인생을 배우게 된다. 대부분 지금 여기에서 정해진 시간을 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영원이라는 시간과 연결된 삶을 산다. 언젠가 맞이해야만 하는 내 인생의 마지막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내 인생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며, 내 삶의 짐들을 내려놓고 나그네와 같은 순례자의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하였다.
 내가 속한 호스피스 관련 단체는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에 위치한 수원기독호스피스회이다. 매주 화요일에 자원봉사자 훈련이 있으며, 봉사자들은 10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심화교육(가정기초간호와 노인간호과정) 22시간과 임상교육(실습봉사교육) 12주간 30시간을 봉사하고 호스피스 훈련과정을 수료하면 수원시 의료기관인 각 병원으로 파송되어 임종을 앞둔 환우들을 돌보게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갔을 때 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떤 식으로 믿음의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세 가지 죽음의 진실과 마주쳐야 한다. 첫 번째,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그렇게 될 운명이요. 변경할 수 없는 약속이다. 두 번째, 죽음은 이 세상의 삶에는 끝이겠지만 존재의 끝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은 죽음은 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기에 죽음에 임박한 환우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는 일은 가장 중요하다.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들의 구호가 있다. 바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을 위하여!’라는 구호이다. 인간과의 관계는 이제 끝이 났고, 하나님과의 만남만이 남은 말기암환자들에게 천국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믿음을 주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세족식을 하고 병상세례도 집례 되어진다.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서 구원을 받게 하는 그 순간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세 번째, 죽음은 사람의 인격의 됨됨이를 결정한다. 그 인생이 죽음 앞에서 진실이 다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코람데오). 이 세상이 내 삶의 전부가 아니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나그네요. 거류자요, 순례자인 것이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자신의 뜻대로 될 것처럼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 순간 죽음을 맞닥뜨리면 누구나 당황할 수밖에 없다. 못다 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 삶에 대한 미련이 너무 남아서 발버둥 치는 모습은 서글프다.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교육에서는 항상 교육 전에 선배봉사자들의 호스피스 소감문 발표가 이뤄진다. 최소 5년 이상을 호스피스로 봉사하신 분들이 그간의 경험과 간증들을 발표하고, 후배 호스피스 봉사자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귀한 시간이다. 어떤 사모님께서 후배 봉사자들에게 몇 가지 당부사항을 해주셨는데, 첫 번째가 말조심하라는 것이다. 10년 전 사모님께서 호스피스로 부르신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봉사하러갔다가 따님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아버지같으신 폐암말기암 환자이신 남자 분을 극진히 간호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이 되어 “따님이 참 효녀시네요. 이렇게 극진히 아버지를 모시고...”라고 한마디 했었는데, 실제 관계를  알고보니 환자와 간호자는 부부지간이었다. 남편은 수차례 항암으로 인해 탈모가 심했고, 쇠약해진 육신으로 인해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보이는 형색이었고, 따님 같은 부인은 그런 남편과는 상대적으로 젊게 보였던 것이다. 또한 섣부른 위로의 말이 말기암으로 고통받는 환우에게는 비수가 되어,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는 경고였다. 사모님은 위로의 언어로, 환우에게 ‘사람이 오는 순서는 있어도 가는 순서는 없다’면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신다’는 뉘앙스의 말을 건낸 것이, 말기암으로 고통받는 환우에게는 죽음을 앞둔 긴박감속에서 큰 상처가 되어... “그래요. 전 이제 죽어요. 가는 순서가 없어서, 이제 죽어요!”라는 항변으로 돌아왔고... 엎지러진 물과 같은 한 마디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어 환우에게 박혀버렸다.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다음 환우들을 위해 준비하는 호스비스 자원봉사자 교육생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안내했다. 살면서 말로써 생긴 오해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의 양상이지만, 삶의 마감의 자리에 있는 환우들에게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언어였다. 그래서, 무엇보다 환우들을 돌보면서 침묵을 강조했다. 무심코 말을 뱉어내지 말라는 것을 신신당부하셨다.
 환자들의 발을 만져주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듯이 발마사지를 해주시는 집사님이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순종함으로 그 자리에서 환우들의 발을 만지며 마사지를 하지만, 생명이 꺼져가는 그 발은 온기가 적고 뻣뻣하여 힘들기도 하다며 실제 봉사시에 상황 설명을 하셨고, 어느 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셨다. 그 날은, 환우들이 많이 대기하고 있어서 손이 바빴다고 하셨다. 한분 한분 정성껏 환우들 발마사지를 하셨지만, 사람의 체력이 유한한 것이라, 마지막 환자를 다 하지 못하시고 내일 와서 처음으로 발 마사지를 해주겠노라 했었는데, 다음날 와보니 그 날 저녁에 그 환우는 소천하셔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전하셨다. 그래서 그 날 집으로 돌아와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그분의 눈동자가 떠올라, 눈물로 후회하며, 시를 하나 지으셨는데... 그 제목이 이러하다. ‘나의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이었음을...’ 오늘 내게 주어진 새로운 하루는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며 살 필요가 있음을 나는 깨달았다. 2012년 타계한 폴란드의 여류시인 비스와봐 쉼보르스카는 삶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없이 죽는다.

 사랑이나 미움이나 지내놓고 보면 모두가 후회스럽고도 또 왜 그리워지는지! 삶의 마지막에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결론은 한결같다. 사랑하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금 바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내 손이 닿는 이웃과 친구에게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며 손잡아 따스한 체온을 나누는 사랑의 실천에 보다 힘쓰고 싶다. 나는 호스피스 사역을 하면서  모든 죽음이 외롭고 쓸쓸하고 절망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분명 슬픈 일이다. 하지만, 남아있는 이들에게 슬픔 이상으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떠난 분들도 보았다. 때로는 감동적이고, 때로는 아름답기까지 한 이별의 순간을 만들어 내는 힘은 무엇일까? 나는 그 힘이 바로 집착을 버리는 점에서 비롯된다고 믿고 있다. 슬픔과 고통을 만드는 것은 생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다. 나는 오늘도 환우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은 언제 어느 때나 죽음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으로써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또한, 많은 환우들이 말하는 주변의 가깝고 사소한 사랑이 곧 삶을 아름답게 사는 것임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어제와 동일한 반복된 하루는 없으며 늘 새 문을 열어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며‘가장 아름다운 만남’을 위해 다리놓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끝으로 성 어거스틴의 아름다운 글귀로 나의 글을 마치고자한다. 추상적인 사랑의 생김을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묘사한 글이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며... 생명을 주신 아버지께서 나를 사용하심에 감사드린다.
 사랑은 어떻게 생겼나?
 
       사랑은 타인을 도와주는 손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에게 달려가는 발
       고통과 필요를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탄식과 비통을 듣는 귀가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생김새다.
       -성 어거스틴-

작성자 : 최영광 2016-12-12 14:10:54
[협회 제8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특별상]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2013. 10.)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최영광

(전도사, 혜림교회)

2013. 10.



 2013년 현재,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성경이 기록될 당시 상상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문제와 마주하게 되었다. 특히 시험관 아기, 장기이식, 배아복제, 줄기세포 연구, 유전자 조작 등은 기독교 생명윤리의 관점에서 심각하게 고민해 현실적 대안을 제시해야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다. 또한, 성적인 타락으로 인해 낙태와 미혼모 문제역시 기독교 생명윤리의 관점에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험관 아지, 장기이식, 배아복제, 줄기세포 연구, 유전자 조작 등은 사회적으로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왔고 반대로 낙태와 미혼모 문제는 사회 안에서 충격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희망이라고 찾아왔다고 해서 아무런 조건 없이 이들을 받아들일 수 없고 충격적이라고 해서 무조건 거부할 수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러한 문제들을 성경을 기준으로 하여 이러한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마련해야 하며 현실적인 대안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찾아온 미혼모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미혼모를 위한 현실적인 대안을 함께 고민하여 같은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미혼모들에게 희망이 되고 또한 살아하는 힘을 제공하고 싶다. 앞으로의 글에서 미혼모를 “영희”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영희의 고민과 아픔을 나누려고 한다.

 2013년 9월 어느 날 늦은 시간에 많이 본 듯하지만 저장이 안 되어 있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교회사역을 하기 때문에 저장이 되어있지 않는 전화가 많이 걸려오기 때문에 나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러자 전화기에서 작은 목소리의 여성이 “여보세....?”고 말을 다 맺지 않고 전화를 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잘못 걸려온 전화라고 생각하고 하고 있던 일을 계속해서 진행하였다.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통의 문자가 왔다. 문자의 내용은 자신의 말이 들리냐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아까 전화 통화품질의 상태가 좋지 않아 그냥 끊어진 것이었다. 그 여자는 자신의 말이 들리냐는 내용과 함께 자신이 누군지를 밝혔다. 그녀는 바로 7년 전 시골 모교회에서 중등부 사역을 하며 다른 교회를 다니는 중학생이었지만 우리 교회에 그 아이의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함께 종종만나 신앙과 인생에 대해 함께 상담을 했던 영희(가명)라는 아이었다. 너무 오랜만의 반가운 연락이라 나는 궁금한 것들을 쏟아내었다. 잘지냈는지?,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는지?, 어디에서 지내는지?, 전공은 무엇인지? 한 번의 문자메시지에서 나는 이렇게 많은 것들을 물어보았다. 그리곤 영희는 많은 질문에 대해 차근차근 대답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내 많은 질문에 대한 영희의 대답을 간략히 정리하면 대학교는 안다니고 있고 지금은 시골에서 아이를 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문득 ‘시골에 아이 보는 일이 별로 없을 텐데 그런 일을 하고 있나? 또, 나이도 아직 어린데 아이를 보는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어려서부터 워낙 아기를 좋아해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계속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오고 가며 나는 나이가 어리니 공부를 다시 시작하라고 권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나의 권면에 영희의 대답은 그럴 수가 없다라는 대답이었다. 나는 그래도 계속해서 공부하기를 권면했다. 어쩌면 여기에서 멈추었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렇게 권면하는 중 갑자기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다른 일이 생겼나?’ 라고 생각하고 나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영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으로 다시 전화를 받았는데 영희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 영희는 말을 이어갔고 나는 듣고 있는 내 귀를 의심해야 할 만큼 엄청난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그 이야기는 바로 아까 문자 메시지로 대화하며 본다고 했던 아기가 다른 집 아기가 아닌 영희의 아기였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아이의 아빠는 전에 사역했던 교회의 열심 있는 집사님의 막내아들이라는 것이다.
 사건의 전말을 이랬다. 영희는 집사님의 아들보다 3살 많았다. 동네가 워낙 시골이다 보니 둘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누나와 동생으로 지내다가 서로 좋은 감정이 되어 사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귀던 중 성관계를 갖게 되었고 횟수가 잦아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실수로 임신을 하게 되었고 영희는 낙태를 할 수 없어 아기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남자아이의 집에서 영희를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남자아이의 집에서 “우리 아들은 절대 그럴 아들이 아니다!”라며 분명히 다른 남자의 아기를 데려왔을 것이라고 몰아세웠고 결국에는 친자확인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친자 확인 결과 당연히 남자아이의 아이라는 결과가 나왔지만 그럼에도 남자아이의 가정에서 영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남자아이의 집에서는 영희가 돈을 바라고 이런 일을 벌였다고 몰아붙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들 가운데 영희는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치게 되었고 인격적으로 심한 모멸감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영희의 집에서도 조부모님과 아버지의 영희를 향한 비난의 눈길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영희는 아기를 혼자 키우기로 결심하고 지금 혼자 양육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영희에게는 크게 세 가지의 고민이 남게 되었다.
 첫 번째 고민은 영희에게는 앞으로 그 아이를 양육해야한다는 과제가 남게 되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저귀 값, 분유 값을 포함한 모든 양육비, 그리고 교육의 문제 등 이었다. 한 아이의 어미로써 다른 아이들 보다 더 낫게 키우지는 못해도 다른 아이들만큼은 키우고 싶지 않은 어미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다른 아이들만큼 키운다는 것은 현재 아무런 직업이 없고 또한 앞으로도 어떤 일을 해야 할지가 막막한 영희에게는 불가능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두 번째 고민은 영희 주의에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이었다. 그 아이의 지금 가장 힘든 것은 현재 혼자라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현재 영희 눈에는 오로지 자신의 아들을 노리는 남자의 집안과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과 비난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인 것이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느꼈고 결국 이런 외로움으로 인해 영희는 점차 밖에 나가는 횟수가 줄었고 계속해서 움츠러드는 본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희에게는 죄책감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던 영희에게는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사실 영희의 과거가 그리 하나님 앞에 정직한 과거는 아니었다고 한다. 따라서 아이를 출산하기 전에도 간음의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과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서 성관계는 교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그런 찝찝함 속에서도 성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쾌감을 느끼며 다른 사람들을 만나왔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마치 애인과의 데이트나 놀이와도 같았던 성관계가 미혼모라는 결과로 돌아왔고 이미 후회해도 때는 늦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 영희는 하나님 앞에서 지난날의 자신의 모습을 후회하게 되었고 후회는 곧 심한 죄책감으로 영희에게 돌아왔다. 결국 영희는 이러한 후회와 죄책감으로 인해 본인을 자책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드라마에서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재확인 할 수 있었고 내 바로 옆에서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과거 교회의 선생님이자 인생의 선배, 현재 전도사로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가슴이 턱하고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총신대학교를 다니며 이상원 교수님께 기독교 생명윤리 수업을 들으면서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많은 것들을 배웠고 공감했던 나였다. 특히 배아가 형성되는 순간부터 하나의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 배아 역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하나의 인격이라는 사실을 수업을 통해 배웠다. 그 배아는 하나님께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장 사랑하시는 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 배아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야 된다는 것을 교수님께서는 강조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또한 현재는 총신대학원에 입학해 또 한 번 이상원 교수님께 기독교 윤리 수업을 듣고 있다. 이렇게 이상원 교수님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배우고 알게 되면서 나는 사고로 인해 생긴 아이라 할지라도 출산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잘 양육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머리로만 생각하던 것이 정작 현실이 찾아오니 아무 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책에서만 봤고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기만 했었던 사건이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람들에게서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들은 체 전화기를 내려놓아야만 했다. 전화를 끊고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 나는 영희의 마음이 공감이 되기 시작하였다. 영희가 힘들어했을 지난날과 또한 아팠을 지난날들이 내 마음에 공감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했던 기도는 그 영희의 마음을 공감하며 하염없이 슬퍼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었다. 또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했다.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계속해서 나는 기도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그 아이에게 전화하였다. 그 날 통화에서 나의 첫 마디는 “영희야 참 잘했어! 수고했어! 그동안 혼자서 많이 힘들었지?”였다. 전날 하나님께 계속해서 기도하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에 대해 여쭈었지만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주시는 마음은 위로하기를 바라시는 것 같았다. 어떤 좋은 조언보다도 영희에게는 위로가 필요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전화하자마자 영희를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다행히 영희는 내가 하는 위로를 통해 위로를 받기 시작하였다.
 위로를 하며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영희가 외로움과 죄책감으로 너무 힘들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계속해서 같이 기도하며 영희의 마음을 위로하며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지금 현재의 영희의 상태에서는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서 고민한 것조차 버거울 것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주를 계속해서 통화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영희는 많은 부분에서 조금씩 회복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거리는 멀었지만 서로 마음을 열어놓고 대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영희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집 안에만 있던 영희가 집 밖으로 나가기를 시도한 것이다. 처음에는 문 밖을 나서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문밖으로 나섰고 지금은 예전처럼 자연스럽고 당당한 발걸음은 아니지만 많은 시간 아이와 바깥공기를 마시며 산책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영희에게 있어진 변화는 예배의 모습이다. 나와 처음 통화했을 때에는 죄책감에 기도는커녕 예배에 가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영희였다. 하지만 함께 조금씩 기도하며 상담을 이어가 지금은 말씀을 사모하게 되고 예배를 통해 만나는 하나님을 기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 주일 예배가 기다려지고 예배를 사모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그 결과 영희에게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민망함과 죄책감이 조금씩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바뀌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영희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지난날에 대한 진지한 회개의 기도와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실 소망의 기도이다. 그리고 지금도 기도하고 있다. 말씀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도 말씀을 읽고 있다. 이렇게 영희는 매일 매일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주일을 기다린다. 영희에게 찾아와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말이다. 앞으로도 역시 이런 소망의 하나님을 영희는 기대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이렇게 위로하는 중에도 내 마음 한편은 무척 불편했고 매우 아팠다. 왜냐하면 위로하는 것 외에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위로로 인해 영희의 삶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의 현실에서 마주하는 어려움은 매 순간 영희를 힘들게 하고 있다. 특히 양육비에 대해서는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나의 삶에서 미혼모를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미혼모를 돕는 정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고 알아야 하는 이유도 사실 없었다. 그래서 급하게 나는 나라의 정책에 대해 조금 알아보았다.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미혼모를 위한 시설을 운영하며 미혼모들을 돕는 일들을 진행하고 있긴 했지만 이는 굉장히 미약하게 시행되어지고 있을 뿐 영희가 사는 시골에 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은 더욱 무거워지고 아팠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영희에게 닥친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돈이 아닌 신앙을 주신 것은 이런 문제를 대처할 때 돈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영희 역시 나를 통해 세상의 다른 것들을 바라보기 이전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영희와 함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늘어만 가는 미혼모들의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금 더 적극적인 대안과 기독교 단체에서도 미혼모를 위한 시설 및 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미혼모와 그의 아이가 이 세상에 더욱 잘 적응하고 비록 시작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시작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양육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생명윤리협회를 통해 영의와의 대화와 상담을 정리하며 조금 더 미혼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또한 나의 앞으로의 신앙생활과 사역 가운데 많은 도움이 되는 시간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정리하는 시간을 통해 영희와 나의 대화 속에서 모든 것을 이끄신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하심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고 미혼모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목회자로 부름 받은 내가 앞으로 사역을 통해 만나게 될 청소년과 미혼 청년들을 위해 더욱 기도하고 그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하나님의 제자로 양육해야 하겠다는 소명을 다시 한 번 확고히 하게 되었다. 영희와 같은 일이 또 내 주위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기도하고 사역할 것이다.

작성자 : 황경옥 2016-12-12 14:07:12
[협회 제8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특별상] "육체의 생명뿐 아니라 영혼의 생명도" (2013. 10.)


육체의 생명뿐 아니라 영혼의 생명도


황경옥

(전업주부, 사랑의 교회)

2013. 10.



  2011년 봄인가 사랑의 교회에서 남편과 함께 생명사랑 아카데미 강의를 들었다. 그해 10월에 수기 공모도 했다. 그리고 입상도 했다.
  그리고 만 2년이 지났다.
  생각보다 생명과 관계된 일은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이번에 근 1년에 걸친 시어머니의 심장 판막 수술과 피부 이식 수술 과정을 지켜보며 깨닫게 되었다.
  분당의 중고등학교에서 만 5년 째 집단 상담 강의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나는 그 봉사 활동 이외에는 내가 생명 사랑과 관련된 일에 관련될 일이 없을 줄로 생각했었다, 2년 전에는.
  1944년생이셔서 올해로 만 일흔이 되신 어머님께서 작년 가을부터 평소에 숨이 너무 차서 집에 오실 때 전철역에서 십 분 거리인 집까지 서너 번을 쉬면서 올라 오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버님 소천 이후 15년째 다니고 계시던 국립의료원에 입원을 하시게 되었다.
  작년 가을 추석에 가서 뵙고 퉁퉁 부어 오른 어머님의 얼굴을 뵙고 적쟎이 놀랐다. 부정맥이라고 하는데 발등까지 다 부어오르셨다. 
  알아보니, 심장 시술이나 판막 수술을 해야 했다. 아산 병원이 심장 수술을 잘 한다고 하여 아산 병원에 예약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집에 모시기는 상황이 안되어 국립 의료원에 한 달 여 계셨는데, 별다른 처치가 없었고 아파서 입원을 했어도 처치가 없으므로 어머님께서는 죽을 병인가보다고 혼자 생각하시게 되었다.
  심장 수술은 큰 수술이라 자식들 간에 고민이 되었다. 심장 판막 수술에 동의서를 쓰라는 병원 측의 요구에 장남인 남편은 잠을 못 이루며 결단을 내리지 못했고 둘째 아들인 시동생이 여기저기 알아본 후 희박한 가능성일지라도 어머니를 살려야겠다며 삼성 의료원이나 아산 병원에서 수술을 받겠노라고 했다.
  국립의료원에서 퇴원을 하고 택시를 타고 아산병원에 도착하여 예약해 두었던 심장 스텐트 시술을 받기 위해 이것저것 검사를 받는 도중, 어머님께서 감염 수치가 심하게 높은 것이 발견되었다.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아산 병원으로 옮기자마자 바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여 응급 상황이라며 일주일간 항생제 세례를 받았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환자를 그냥 놔두었느냐고 의사 선생님은 야단이신데 병원에서 내 입원해 계셨는데 감염이라니 우리는 당황스러웠고 또 난감했다. 7가지 항생제 중에서 하나라도 듣는 것이 있어야 할텐데 라며 의사 선생님은 걱정을 하였다. 마지막 항생제를 투여한 지 하루가 지나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던 어느 날 새벽, 어젯밤 고비를 넘기셨다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그로부터 한 달 여후 1월 말에 1차 수술로 심장 판막 수술을 받고 그로부터 일 주일 만에 염증이 생겨 구멍이 뚫린 왼쪽 가슴 피부 부위에 2차 수술인 피부 이식 수술을 받으시게 되었다.
  30여 년 전 남편이 초등학교 5학년이던 해, 어머님은 유방암 수술을 받으셨다. 그로부터 30년 후, 두 번째 수술방에 들어가시던 날, 종교가 없으시던 어머님은 겁에 질려 보이셨다. 나는 수술 전날 잠깐 십오 분 정도 어머님과 같이 있을 시간이 있어서 짧게 전도 폭발 훈련을 직접 해 드렸다. 칠십 평생 건강이 좋지 않으시고 경제적으로 무능력하셨던 아버님을 도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일하시고 달동네에서 삼남매를 대학을 졸업시키신 분이었다. 어쩌면 못 먹고 못 입고 그렇게 자식들만을 위해 평생 희생하신 어머님의 생명이 안타깝게 스러질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자식들이 함구를 하여 어머님은 당신이 하는 수술이 얼마나 위험하고 가능성이 희박한 수술인지도 알지 못하셨고 병이 다 나으면 교회 가마고 가볍게 구두로 약속을 하셨다.
  심장외과 의사들이 실패 확률이 놓아서 성공 사례 실적에 걸림돌이 된다며 안 해준다고 하는 수술을, 현금으로 2억이 있으며 죽게 되더라도 절대로 의료 소송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가까스로 하게 된 개복 수술이었다. 실은 현금 2억이란 얘기는 가당치도 않은 얘기였다. 어떻게는 어머니를 살리고 싶었던 사십 오세의 미혼인 시동생은 병원을 오가던 중 의사들이 상담 시간에 심장 판막 수술 비용만 6천만원 정도 든다는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 냈다. 그리고 집에 현금이 많은 환자라는 이야기가 의사들의 귀에 들어가게 한 것이었다.
  사실, 먹고 살기 빠듯하고 물려받은 재산이 별로 없는 장남인 우리와 시누이네에게 2억이란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의 액수면 액수이지, 보유하고 있는 돈의 액수는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집의 시가가 기껏해야 3억 3천 만원 정도이고 어머님이 소유하신 집의 시가가 5억 정도이니 집을 처분하면 모를까 현금 2억이란 돈은 시어머니 평생 만져보지도 못한 돈이었던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수술 비용만 6천만원이나 하는 수술을 2건이나 한다는 것은 상당한 고민과 선택을 요하는 결정이었던 셈이다.
  경제 관념이 좀 부족하고 미혼이라 어머니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시동생은 30퍼센트 미만인 수술이라도 희망이 있지 않느냐며 어떻게든 수술을 강행하려고 했고 장남인 남편과 막내인 시누이는 거기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돈과 생명, 안락사의 문제도 이와 비슷한 문제와 맥락이리라고 본다. 돈이 없는 사람은 첨단 의료 기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천문학적인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생명을 포기하야만 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비참한 현실이라는 것을 나는 마흔 넷이 되던 1월에야 실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며느리의 입장이라 발언권 자체가 없기도 했었지만 나는 경제력이 없었고, 중학생인 아들을 키우며 남편은 5년에 걸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5월까지 논문을 제출해야 했던 중이라 우리도 경제적으로 핍절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장남이지만 1억에 가까운 수술에 동의한다는 결정은 우리 가족으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머님을 살리겠다는데, 돈만 있으면 살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데 갈등하지 않을 자식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소천하신 아버님께 생전에 불효했다는 마음의 짐이 무거웠던 시동생은 어머님마저 이렇게 보내면 자기가 죽을 것 같다며 수술에 동의해 줄 것을 요청했었다.
  여하튼, 네 시간에서 여덟 시간 걸린다던 수술은 여덟 시간을 꽉 채우고도 시간이 좀 더 지나서야 전광판에 어머님의 이름이 떴다. 기다리는 네 시간 동안 온 가족이 초조해 하며 걱정을 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유일한 형제인 시동생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밤 열시 반이 넘어서야 만날 수 있었던 집도의는 수술 상황이 쉽지 않았음을 설명했다. 대동맥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튀어 올라서 삼십 여분 동안 하체로 피가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튀어오르는 피를 닦느라고 수술이 지연되었으며 하체로 피가 삼십 여분 동안 공급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나타날 지 지켜보아야 한다고만 말을 하고 입을 닫았다.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는 의식을 회복하셨고 그 중간중간에도 가끔씩 의식을 잃으셨다. 원인을 모르겠다고 하는 의사들의 말을 들으며 초조하고 불안했던 순간들도 여러 번 있었다.
  어쨌든, 일주일 후 또 여덟 시간이 걸리는 피부 이식 수술을 하시게 되었다. 결국은 염증이 생긴 갈비뼈를 세 대나 잘라내고 시간과 상황이 안 되어서 가슴이 열린 채로 수술방을 나오시게 되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인위적으로 약을 먹여 잠을 재우는 코마 상태로 근 일주일을 보내시게 되었다.
  당신도 고통스러우셨겠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는 자식들 입장으로서의 우리도 나름 힘들었다. 5개월 여 동안 매일 아침 10시 중환자실 면회 시간에 맞추어서 삼십 분을 면회하러 병원을 오갔다.
  영하 13도의 날씨에 분당에서 잠실나루까지 왕복 4시간 동안 병원을 오간다는 것은 내게 쉽지 않은 희생을 요구했다. 그러기를 목련 꽃꽂이가 앤스륨으로, 앤스륨에서 국화로 갈대로 바뀌는 동안 계절이 세 번 바뀌었다.
  남편은 논문도 접었다. 마흔 일곱의 나이인 남편은 박사과정 학생 중 최 연장자였고 내년이면 논문 지도 교수님이 퇴임하시기 때문에 5월까지의 제출기한을 넘긴 우리로서는 엄청난 희생이었던 셈이다.
  아이는 6월에 학교 교실에서 학교 폭력을 겪었다. 폭풍같던 세월들이 시간들이 다 지나갔다.
  어제 10월 2일, 어머님께 전도 폭발 훈련을 하러 소년부에서 같이 섬기시는 손은옥 선생님이 아산병원 동관 14층에 오셨다. 지난 9월에 교구 목사님이신 박삼열 목사님이 지난 1월 수술 전에 그렇게 오시고 싶어하셨던 심방을 비로소 오시게 되었다. 심방 이후 쇠약하신 어머님을 뵈신 목사님께서 몹시 안타까워 하시며 또 오시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10월 18일 이후 피부 이식한 부위가 다 아물면 퇴원해도 좋다고 의사의 허락이 떨어졌다.
  퇴원 전에 어떻게든 전폭을 받고 싶었던 나는 24명의 기도후원자에게 그리고 사랑의 교회 중보기도실에 한 달 전부터 문자를 날렸다.
  지난 주 금요일 어머니는 또 내게 소리를 지르셨다. 올해 들어서만 세 번째다.
의사가 먹기 말라고 지시가 내려진 음식 안 사온다고 6일실 병동에서 고함을 지르셨다. 45킬로그람의 체구에서 그런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시는 것인지......
결혼 초부터 뻑하면 소리지르시고 함부로 분노를 표출하면서 내게 스트레스 주시는 어머님이 미웠다.
  “어머님, 손님이 오실 건데요. 싫으시면 가게 할까요?”
  이십 여분이면 된다고 어머님께 말씀드리고 나는 병실을 나왔는데 손 선생님은 한 시간이 다 되어서야 병실을 나오셨다. 어머님이 나를 많이 의지하신다고, 큰 아들 내외가 잘 사는 것이 울타리라며 마음이 많아 여리시고 약하시다고 의외의 말씀을 전해 주셨다. 그리고 결신을 하셨다는 놀라운 뉴스를 전해 주셨다. 중보기도를 많이 해서인지 이미 어머님 마음이 물렁물렁 해지셔서 퇴원하면 제사도 안 지낼 거고 교회도 나갈 거라고 하셨다고 한다.
  지난 17년 11개월 여의 내 고단한 결혼 생활이 드디어 성적표를 받았다. 권위는 희생에서 나온다고 했다.
  희생이라는 것을 모르던 사람이었다, 스물 여섯의 나는.
  너무 가난한 집안이라 사람 자체는 괜찮고 좋지만은 가난이라는 굴레를 같이 쓰고 싶지 않아 헤어지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며칠 전 윤난영 사모님이 2007년에 쓰신 배우자의 선택이라는 칼럼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누구를 만났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진다. 그런데 배우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만남은 영혼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모태 신앙이던 나는 강남 8학군에서 자라 명문 여대를 나오고 남편과 결혼하기 전까지는 겸손이라는 것을 모르던 사람이었다. 좋은 조건의 혼처도 많았다. 마담 뚜의 전화도 받아보았다.
  내가 아무리 크리스천이라고 하더라도 가난은 싫었다. 그런데, 나와 헤어지지 않기 위해결혼하기 위해 제사를 안 지낼 것이며 교회를 다니겠노라고 183센티미터의 거구에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는 남자를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당시 스물 여섯 철없던 내 믿음의 수준으로는 공자의 후손이며 제사가 집안의 큰 복받는 길이라 믿던 가난과 무식과 열등감과 온갖 상처들로 뭉친 시댁 식구들 다섯 명을 감당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제사 음식을 안 만들려고 명절 전날에 일부러 늦게 왔다며 육두문자를 날리며 인격모독을 하는 시어머니를 대하며 죽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본인이 원해서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결혼과 동시에 사표를 쓰고 변리사 고시에 인생을 걸었는데 7번 고배를 마시며 그동안 돈이나 벌 껄 그랬다며 자책하는 남편을 보면서 죽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왕따 당하는 착하기만 한 초등 5학년 아들 아이를 보면서 죽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이 숱한 산적한 어려운 문제들 가운데서 살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나는 믿음을 가진 진실한 크리스천으로 거듭났다. 그러기까지 나를 위해 기도해 준 수많은 동역자들이 있었다.
  돈과 생명, 이 두 가지 주제는 평생 나를 따라다닐 것이다. 어디 나만 그러한가?  돈과 생명, 그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생명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권자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돈은 나처럼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가진 돈도 없는데 빚이라도 얻어서 밑빠진 독에 물 붓는 듯한 이 치료를 계속해야 하는가에 대해 무척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 생명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영혼이라는 것을...... 그 생명도 구원에 이르기까지 인도하시기 위해서 네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까지 근 1년 동안 생명의 불씨를 살려오셨다는 것을......
  17년 10개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그 기간 동안 구박도 많이 받고 욕도 많이 얻어 듣고 핍박도 많았지만, 크리스천 며느리로서 내가 해야 할 있는 사명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육체의 생명 뿐 아니라 영혼의 생명을 위해 전도폭발 훈련자를 초청하며 목사님을 초빙하고 평생 가난과 질병에 찌들어 억눌려 살아오신 그 가엾은 영혼을 긍휼히 여기며 기도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것 뿐이라는 것을......
  1년 동안 어머님 덕분에 병원을 제 집처럼 드나들면서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받는 영혼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다는 사실과 그들이 지옥으로 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땅에 허락하신 고통인 질병이라는 숨겨진 축복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들이 날마다 더욱 많아지게 하시기를,  그리고 내게 허락하신 그 한 영혼인 어머님을 품을 수 있는 은혜와 능력 주시기를 위해 오늘도 나는 기도하며 어머님을 뵈러 아산 병원에 간다.





 

 

작성자 : 이현지 2016-01-07 12:32:47
[협회 제7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대상] "생명살리기 캠페인을 통해 배운 생명의 소중함" (2012. 10.)


생명살리기 캠페인을 통해 배운 생명의 소중함

      


이현지

(고등학생, 수명산교회)

2012. 10.



 

아무리 그렇게 설명하셔도, 저는 왜 낙태가 잘못된 행위인지 납득할 수가 없어요.”

 

작년 2, 처음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나는 함께 입학한 1학년 학생들과 함께 23일동안 충북 음성에 위치한 꽃동네를 방문했다. 그 곳에서 우리는 23일동안 꽃동네의 프로그램을 따라 봉사활동을 하고 강의를 들었다. 꽃동네에서의 일은 생소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주 협조적이었다.

그러던 중, 꽃동네에서의 두 번째 날에 우리는 낙태에 관한 강의를 듣게 되었다. 꽃동네가 기독교적 사상에 바탕을 둔 단체인지라, 강의를 설명하시는 수녀님의 입장은 어떠한 경우에도 낙태는 정당행위가 될 수 없다.’였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이 말을 수도 없이 들어온 나에게는 수녀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으나,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꽃동네의 프로그램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던 아이들은 거의 비판에 가까운 어조로 수녀님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수녀님께서 아무리 열심히 당신의 논리를 설명하셔도, 그 논리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 때 처음으로 나는 다른 사람들의 낙태에 대한 생각이 나의 생각과 아주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교회 밖의 사람들과 한 번도 낙태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낙태라는 주제 자체가 가지는 어감이 그리 좋은 대화 소재가 아니기도 할 뿐더러, 어느 누가 여중생의 신분으로 낙태를 일상에서의 대화 소재로 삼겠는가. 다만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들어 온 얘기가 낙태는 그릇된 행위이다였으므로, 나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사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랬던 나에게 낙태는 정당행위가 될 수 있다는 또래 친구들의 논리는 나에게 혼란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다시 꽃동네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수녀님이 또래 친구들의 비난을 받고 있을 때, 나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봤을 때 내가 그 자리에서 자신있게 수녀님의 생각을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 때의 나는 나의 생각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공리인줄만 알았던 나의 생각에 반대 의견이 있다는 사실이 첫 번째 이유였고, 나의 생각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그 사건이 내가 낙태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부터가 나의 생각에 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도 설득하지 못 하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 년에 두 번씩 꾸준히 생명 살리기 캠페인(낙태를 반대운동)이라는 활동에 참가해 왔다. 그 전까지는 그저 별 특별한 생각 없이 참가해 왔었지만, 그 때부터는 캠페인에 참가할 때 그 곳에서 활용하는 팜플렛이나 포스터를 직접 읽어 보기도 하면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원래 당연히 했어야 하는 일이지만 말이다.

생명 살리기 캠페인이란 ProLife라는 단체에서 주관하는 낙태 반대 운동으로서, 우리 교회와 깊은 연관이 있는 단체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일 년에 두 번씩 자체적으로 캠페인을 주관하곤 한다. 캠페인은 목동 축제의 거리와 대학로 파랑새 극장에서 진행되는데, 캠페인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낙태 반대에 관한 팜플렛을 돌리고, 설문조사 작성과 서명(낙태에 관한 법 개정)을 부탁드린다. 그 밖의 일로는 태아와 낙태에 관련된 포스터를 붙이고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등의 일이 있다. 나는 주로 팜플렛을 나눠주는 일을 하는데, 그 일을 단 5분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낙태라는 주제를 얼마나 기피하는지 알 수 있다. 저 멀리서부터 외치는 구호를 듣고 이 운동이 낙태 반대 운동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팜플렛을 내미는 나를 혐오스럽게 쳐다보거나, 대놓고 이런 일을 왜 하냐며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그나마 혼자 다니는 사람들은 좀 나은 편인데, 특히 데이트중인 커플들이나 부모와 자식(자식이 성인인 경우)같은 사람들에게는 낙태가 민망한 주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야기도 듣지 않고 자리를 피한다.

하지만 가끔 우리와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하는 몇몇의 사람들이 있다. 아주 소수는 낙태 반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 또는 지지하는 사람들이지만, 사실 캠페인에 반대하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그들의 생각은 설문조사나 서명운동을 할 때 가장 많이 드러나는데, 대세는 피임을 하지 않아 생긴 아이는 낙태를 반대하는 것을 이해하지만, 특수한 상황의 경우는 이해해 주어야 한다.’이다. 하지만 캠페인이 내세우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낙태는 정당화될 수 없다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과 캠페인의 생각 간에 충돌이 발생한다. 대표적인 예로 어떤 사람이 성폭행을 당해서 임신을 했을 때에도 낙태는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까?”라고 질문했다고 가정하자. 태아에게 태아의 권리가 있는 것처럼, 임부에게도 똑같은 권리가 있기 때문에 이럴 경우 쉽게 무엇이라고 하기는 사실 어렵다. 물론, 교회에서 배운 대로 생명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설령 원치 않는 임신이었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마음대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기독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반발감을 살 수 있는 논리이다. 그리고 그 밖에 다른 이유들은 사실 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부수적인 증거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를 반박하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 그래서 나는 그런 질문들을 받을 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물론 나의 지식의 부족이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결국에는 낙태의 전면 반대는 세상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일들 중 하나인 것이라는 생각도 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 살리기 캠페인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캠페인을 통해 단 한번이라도 낙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캠페인을 하며 많은 사람들이 낙태와 태아의 생명에 관한 인식이 많이 부족함을 느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확고한 이유가 없이 대다수의 의견(낙태에 관한 전면 또는 부분적인 찬성)을 따르곤 한다. 한 예로 학교 친구들 중에는 우리나라가 낙태를 법으로 금지하는 국가라는 사실을 모르는 친구도 있었다. 우리의 캠페인을 통해 그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려준다면, 그들이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상투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활동으로 인해 비록 몇 명의 사람이라도 낙태에 관해 재고해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요즘 나는 학교에서 철학 선생님의 도움으로 낙태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주제는 <대한민국 모자보건법 제 14조에 나타나는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에 대한 고찰>이다. 이 법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부모나 태아가 유전적 질환이 있는 경우, 장애가 있는 경우, 강간을 당한 경우 등은 낙태가 허용되기 때문이다. 이 법이 제시하는 낙태의 허용한계가 과연 정당한가를 탐구해 보고자 계획한 논문이다. 생명 살리기 캠페인의 연장선상인 셈이다. 거창하게 논문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고등학생이 쓰는 소논문정도라 영향력이 있거나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나의 지식을 넓히고 생각을 정리하는 계기가 될 것이고, 후에 내가 커서 관련 분야의 일을 하게 될 경우 꼭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내일이 바로 일 년에 두 번 있는 생명 살리기 캠페인이 있는 날이다. 이번캠페인을 통해서도 더욱 많은 사람들이 낙태에 관심을 갖게 되어서, 몇 년이 지난 언젠가 우리와 함께 낙태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아질 날이 올 것을 믿는다.

작성자 : 문한나 2016-01-07 12:26:30
[협회 제7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우수상] "생명이라는 아주 소중한 부담감" (2012. 10.)

 

생명이라는 아주 소중한 부담감

      



문한나

(연구원, 안산샘골감리교회)

2012. 10.





23살.. 

 무언가 아직 생각이 정립되기 전에 갑자기 나에게 너무 버거운 소명이 찾아왔다.

 어디서 언제부터 준비되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소명이 찾아옴과 동시에 아주 빠르게 그 가운데에 들어와 있었다. 다시금 짧은 나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치밀하게 계획해 놓으신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어려서부터 생물학박사가 되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나, 생물학에 대해서만은 막연히 최고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는 생명과학, 유전공학과로 전공을 선택했고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하지만 이 대학시절부터 하나님은 조금씩 움직이셔서 나로 하나님의 제자된 삶에 대해서 강하게 이야기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4학년이 되고서야 나의 생물학의 대한 관심과 하나님의 제자됨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렇게 갑자기 떠오른 ‘생명윤리’라는 단어는 나에게 당장 알아보아야 하는 영역이 되었다. 그렇게 나와 ‘낙태반대운동연합’과 ‘성산생명윤리연구소’,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봉사활동으로 다음에는 파트타임간사, 그리고 정식간사까지 하나님이 나에게 계획해 놓으신 일에는 막힘이 없이 진행되었다. 

   

 처음 ‘낙태반대운동연합’ 사무실에 봉사활동을 하기위해 찾아갔던 발걸음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안산에서만 줄 곳 살아온 나에게 목동의 지리는 굉장히 낯설었다. 사무실 주변을 한 시간 넘도록 계속 헤매면서 하나님께 얼마나 기도하며 울먹였던지.. 겨우 찾아온 사무실 유리문을 열면서 심장이 뛰었다. 그렇게 겨우 찾아온 낙태반대운동연합은 나에게 새로운 지평을 알려주었다. 

 ‘낙태반대운동연합’의 생활은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활력이 되었으며, 캠페인과 강의, 자원봉사자를 관리하는 것은 정말 의미가 있는 일이었고 행복했다. 물론 여자간사로서 무거운 물건을 계속 들고 옮기고 설치하고 치우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으며, 쉽지 않은 갈등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주 작은 생명을 위하여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들을 곁에서 보는 것은 굉장한 감동이었고 거기에 잠시라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그 곳에서 생활하면서 확고하게 안 것이 있다. 이 생각은 단 한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주 작은 생명이라도 누군가는 계속 그 목소리를 대신 내주어야한다. 생명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또한 ‘성산생명윤리연구소’의 교육과 협동간사의 생활은 생명운동을 하는 다양한 분들의 강의를 직접 눈으로 보고 학술적 필요에 대해서도 계속된 움직임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고 생명윤리학 석사학위에 대한 도전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생명운동을 하는 동역자분들을 알게 되고 그 분들의 활동을 보면서 나도 그 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감사드렸다. 

   

 그렇게 3년이 지나 나에게는 또 다른 마음이 생겨났다. 생명윤리 전반에 대한 경험을 하고 싶었고 특히 삶의 마지막에 대해서 치밀하게 고민해보고자 하였다. 또한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있어보고 싶었고 그럴 때 나의 마음과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도 알고 싶었다. 

   

 그렇게 모든 간사생활을 정리하고 ‘샘물호스피스’로 무작정 발길을 옮겼었다.

   

 처음 ‘샘물호스피스’의 자원봉사자 교육을 하러 갔을 때 나는 또 연고 없는 어린학생이 되어있었다. 두 번째 찾아가는 발걸음은 처음보다 더 두려움이 깃들어있었던 것 같다. 1박 2일의 생활을 두 번이나 지내야 했기에 혼자 밥도 못 먹는 나는 밥은 누구랑 먹지? 잠은 어떻게 하지? 내가 진짜 할 수 있을까? 얼마나 망설이며 2일을 보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부모님이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아프신 분들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나에게 봉사교육시간 중 3번의 임종경험과 아프신 분들에게 식사와 말벗을 해드리는 경험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나를 이곳에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누구에게 수다를 떨 사람도 없던 나는 다시 한 번 하나님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죽음에 대한 현장 경험은 마무리가 되어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더 큰 경험을 나에게 계획해 놓으셨다. 쉬는 기간에 ‘연세대학교 의료법윤리학연구원’이라는 곳에서 연구원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게 된 것이다. 물론 내가 실질적으로 연구를 진행할 만한 수준이 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학술적인 영역에서 생명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되어 연락을 받자마자 이번에는 신촌으로 달려갔다.

 처음하게 된 일은 생명윤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7개월의 시간이 지난 다음 나는 ‘사전의료의향서’사업을 담당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막연하게 존엄사와 무의미한 연명치료중단에 대한 세미나와 수업을 들은 경험이 있기에 ‘사전의료의향서’라는 것이 어떤 문서인지, 왜 필요한지는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에 30통이 넘는 전화문의와 사람들을 대하면서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으며 의료현장과 삶의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연구원에서 바라보는 현장은 치밀하게 이득과 위험이라는 저울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무엇가가 희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 무섭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죽음을 바라보는 현시대의 관점 상 사전의료의향서가 퍼져가는 것이 나에게는 버거운 짐이 되었다. 필요한 사업이긴 했지만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하나님보다 빨리나가는 사업이 겁이나 나는 다시 한 번 나의 모든 것을 정리하는 삶을 택했다. 

   

 다시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 두렵긴 했지만 나를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생각으로 2달간의 시간을 묵묵히 공부하고 성산생명윤리연구소를 도우며 지냈다. 

   

 그때 나는 다시 국가생명윤리정책연구원에서 모니터링요원을 하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대리모와 대리부를 불법으로 지원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모니터하는 작업이었다. 이 사업을 하게 되면서 사회에 대한 적잖은 실망을 하게 되었다. 일주일에 대리부를 신청하는 사람들의 수는 200여개를 뛰어넘었다. 자신의 신상정보와 부모님의 신상정보까지 나열하여 자신의 유전정보가 좋음을 입증하려 하였다.

 정말 이렇게까지 사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자칫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으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감각하게 사람들이 움직여버릴 것 같았다. 나의 주변에 웃고 있던 누군가가 인터넷에서는 이런 글을 거리낌 없이 올리고 있지는 않을지 의심이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리모와 대리부를 처벌할 수 있는 근거는 없었다. 이 모니터 요원을 하면서 대리모가 불법은 아니기에 막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옳고 그름보다는 법인지 법이 아닌지가 중요하게 느껴졌다. 

 감사하게도 모니터링을 시작한지 9개월 만에 신청글은 20개도 채 안되도록 줄어들었다. 어찌된 일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위협이 사회에 얼마나 많이 퍼져있는지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유전상담사 제도에 대한 연구이다. 유전공학을 전공한 나는 생명공학에서 무엇보다도 올바른 생명가치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내가 참여할 수 있는 일이 적었고 당장 참여할 수도 없는 영역이었지만 다행히도 유전상담사 연구진행을 담당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크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대학전공을 살려서 생명에 대한 접근을 할 수 있었다. 

 무분별한 유전검사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유전상담사 제도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이 제도가 실행된다면 사회에 대한 부담감은 줄어들겠지만 유전상담사에 대한 자격과 인증에 대해서 어떠한 기준으로 검토 할 것인지 계속된 고민을 하게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소명을 보여주시고 지난 4년 동안 참 많은 일들이 나에게 있었다. 낙태와 안락사, 사전의료의향서, 유전공학, 대리모 등에 이르기까지 실전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 기회동안 느낀 것은 생명문제라는 것은 무엇인가 정확히 기준을 세우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이다. 책임감과 부담감이 계속 찾아왔고 무엇이 옳은지 전혀 알 수 없을 때도 많았다. 다만, 확고하였던 것은 생명은 소중하고 그것을 아는 사람의 움직임과 모르는 사람의 움직임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더 많은 경험을 하나님이 시키실 것이다. 솔직히 버겁다.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알기에 나를 이곳에 부르신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나와 같은 고민으로 이 현장에 남아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버겁긴 하지만 내가 떠나갔을 때 느껴지는 자책감이 더 두렵고 무감각하게 흘러가는 사회가 더 쓰라리게 되니 말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처음 보여주신 장면이 있다. 바로 모세가 이스라엘의 전투를 바라보며 두 팔 벌려 기도하는 장면이다. 두 팔을 들어 기도를 해야 전투가 승리로 기울었고 내리면 지는 장면을 바라보며 모세는 계속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그 옆에는 아론과 훌이 지키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이게 무슨 뜻인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왜 나에게 그 장면을 보여주셨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생명이라는 아주 소중한 부담감으로 계속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하나님이 마음이셨으리라...

   

 무작정 발을 옮길 수 있었던 4년 전보다 지금 나는 굉장히 어깨가 무거워 진 것을 느낀다. 팔을 내리는 것의 의미를 조금은 더 알게 되었고 팔을 드는 것의 어려움도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렇기에 돌이킬 수 없고 이것은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

   

단 하나의 삶

   

어느 날 당신은 알게 되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그리고 마침내 그 일을 시작했다

주위의 목소리들이 계속해서

잘못된 충고를 외쳐댔지만

집 식구들은 불안해하고

과거의 손길이 발목을 붙잡았지만

저마다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라고 소리쳤지만

당신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거센 바람이 불어와 당신의 결심을 흔들고

마음은 한없이 외로웠지만

시간이 이미 많이 늦고

황량한 밤, 실위에는

쓰러진 나뭇가지와 돌들로 가득했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어둔 구름들 사이로

별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세상 속으로 걸어가는 동안

언제나 당신을 일깨워 준 목소리

당신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이 무엇인지

당신이 살아야 할 단 하나의 삶이 무엇인지를

 

 메리 올리버의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중에서

 


 

작성자 : 김미숙 2016-01-07 12:18:38
[협회 제7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특별상]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우리의 삶" (2012. 10.)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우리의 삶

 

 


김미숙

(피아노학원장, 사랑의교회)

2012. 10.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로서,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으며, 여러 사람으로 이뤄진 조직에서 다른 사람들 즉 사회, 공동체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며 그로써 행복감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을 닮은 인격으로 지으시고 서로 사랑하며 아름다운 관계를 갖게 하셨지만, 마귀는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상처를 곱씹으며 서로의 관계를 이간하고 갈등과 반목하며 상처받고 아파하며 살아가게 한다. 반복되며 분주한 현대인들의 일상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우리 주변에 상한 마음으로 고통받고 있는 영혼들에게 손을 내밀어 상처의 쓴 뿌리가 되는 이기심과 나태함, 정서적인 굶주림, 불안, 분노, 열등감, 우울감의 치유를 받아야 할 필요성을 제고하며 지나온 나의 삶의 과정을 열어본다. 마음속 상처는 꺼내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고, 내 몸 구석구석 세포막까지 달라붙어있다. 타인에게 받은 상처는 치유되지 않으면 분노와 죄로 자랄 소지가 있고 그 화는 상처를 준 사람이 아닌 불특정 다수에게 나타나 요즘 사회 이슈가 되고 있는 ‘묻지마 범죄’나 다양한 범죄 양상으로 드러날 수 있기에 그것을 예방하고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개개인의 삶을 주관하고 계심을 나의 삶을 열어 시대를 구원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이 글을 쓴다. 오늘 나누고자 하는 나의 삶의 편린들도 고통받고 있는 영혼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나는 모 대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같이 일하던 동료 사감이 2001년 3월 어느 날 나를 불러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말을 건넸다. 이미 1년 동안 일을 함께 해 온 터였고, 2년째 일을 맞추는 사람이어서 그분의 성격과 일처리 방법 등을 숙지하고 있는 차라, 그분의 눈물이 상당히 의아했다. 도통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일처리를 깔끔히 하고 조직에 대해 충성하며, 상관에게 몰래 동료의 일들을 고자질(잘못된 것을 위에 얘기)하는 유형이었다. 가끔 시간이 지나면 잘 해결될 일들도, 미리 선수쳐서 동료간의 관계를 상당히 어색하고 억압적인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하였기 때문에 늘 나는 그 분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미워하면 안 되는데, 꼭 저렇게 해야만 하는가라는 그 심정이 일을 하면서 내 내면에 쌓여갔고, 그분의 행동을 체크해가며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앞에서 그분의 눈물이 이상했다. 나한테 왠 약함을 내보일까?라는 의심스런 눈초리를 안고 그분의 사정을 들어보니, 산부인과 검진을 해 보니, 자궁에 혹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아프기 때문에 올 한해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넸다. 본인이 아프면, 기숙사일도 잘 못할 수 있으니,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부탁을 한 것이다. 이미 한 아이의 출산을 한 경험이 있는 분이셔서, 처녀인 나를 붙들고 자궁에 물혹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놓기가 쉬웠는지는 몰랐지만, 나는 그때 적잖이 놀랬다. 몸속 아기가 살 수 있는 자궁에, 혹이 들어갔다고??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몸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을 했고, 그날 모임은 그것으로 얘기가 끝났다. 몇 달의 시간은 흘렀고, 여름방학즈음이 되자 나에게 부탁했던 그 여 사감의 배가 커졌다. 뱃속에 있는 물혹이 저렇게 커졌나 싶어서 얼마나 걱정이 되었던지, 함께 기숙사를 직장삼아 일하시는 식당 주방장님께 조심스레 말씀을 건넸다. “저 여 사감님, 자궁에 물혹이 있다고 그랬었는데, 시간이 지나서 저렇게 커졌나봐요. 어떻게 하죠? 수술하면 낫지 않을까요? 걱정스럽네요.”라고...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주방장님은 나를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바라보며 “저건, 임신이쥬(충청도 사투리를 쓰셨다)~ 저게 무슨 물혹이예요? 저렇게 혹이 몸속에서 크면 사람 죽지유~”라고 말하면서 웃으셨다. 마음이 철렁했다. 그때만해도, 주변에 임신한 여성의 몸을 본 적이 없기에 몰랐을 뿐더러, 분명 내게 자궁에 혹이 있어서 몸이 힘드니 1년간 많이 도와달라는 말을 했는데, 임신을 했을지는 생각도 못했다. 그도그럴 것이 워낙 몸이 날씬해서 배가 불러오는 것을 모르다가, 임신 막달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으니 그 사감의 말을 사실로 믿은 나도 참 한심하다는 자책까지 들었다. 그 해 9월에 뱃속에 10달동안 있었던 아기는 정상적으로 출산하였고, 그 사감님은 출산 이후로 2학기엔 학교에 출근하지 않고 재택근무형식으로 일을 했다. 그러나 규율을 잡아 운영하는 기숙사체제에 큰 혼란이 야기되었다. 기숙사는 그야말로, 집 떠나와 유학의 길에 오른 학생들에게 자취나 하숙과는 달리, 규율을 적용하여 엄격히 운영하는데, 2학기에 갑자기 사감 공석이 되어 자리를 비게 되자, 기숙사 규율이 엉망이 되었다. 외출, 외박에 대한 기준도 해이해졌고, 미리 말을 하고 허가를 받고 했던 허가제에서 외박을 하고 난 뒤에 신고제로 바뀌게 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재택근무로 집에 들어가서 일을 하면서 그 나머지 잡무들은 생각지도 않게 여러 사감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나를 속이고 기만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하고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같은 여자로서 임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충분히 도와줄 수 있었는데, 처음에 자궁에 물혹이라는 사유로 사람을 걱정케 만들더니만, 결국 임신하였다는 그 사실에 나는 왜그리 맘이 상하던지..!! 9월에 정상적으로 출산을 했다면, 이미 3월에는 임신 사실을 알았는데도 말이다. 나를 이용당했다는 그 생각이 들어 힘들었다. 나는 맘은 상했지만,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참고 인내하며 기숙사에서 남은 시간을 성실히 일했다. 


 내가 참고 견디고 있던 그 사이에 나의 도움을 요청하는 선교사님이 계셨다. 그분은 호주에 있는 원주민들(Aborigine)을 위해 원주민들 사이에 구전되어 오는 가락에 찬양가사를 붙여 악보화하는 작업에 내가 함께 하기를 원하셨고, 나 역시 사역을 놓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 일을 내게 허락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과 함께 4개월간 단기 선교 길에 올랐다. 처음으로 떠나는 긴 외국여행이었다. 가족과 내가 자라온 문화를 다 버리고, 마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갔던 아브라함처럼..! 그런데, 4개월의 시간 동안 나는 여러 가지로 혼란스럽고 마음이 아팠다. 우선 원주민 세계에서 자행되는 문란한 성문화, 그들은 자신이 맘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혼외정사도 서슴치 않으며 배다른 형제들(어머니가 여럿인 경우)도 낳아서 살아갔다. 정부에서 2주마다 나오는 생활비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데, 그들을 상대로 마약을 팔아서 마약을 먹고 눈이 풀려있는 원주민들은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신 하나님닮은 사람의 형상보다는 짐승의 모습에 흡사하였다. 먹고 마시고, 자고 배설하고 그들의 육신적인 필요만을 충족하며,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별반 다를 바 없는 그런 반복된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이 땅 가운데 허락하셔서 보내는 것이라고 믿으며 신앙 생활 했는데, 결국 남자와 여자가 자신의 생리적 욕구를 해소하고서도 얻을 수 있다는 그 사실은 내게 큰 상실감과 허무감을 가져다 주었다. 사람이 이렇게 태어나서, 저렇게 살다가 수명이 다해서 죽는다는 것이 너무나 비참하고 아팠다. 4개월의 단기선교사역을 마친 뒤, 한국에 돌아와서 나는 이전과는 달라졌다. 사회를 보는 시각도 긍정적인 시각보다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뀌었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바뀌었다. 이전에는 되도록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이웃을 위해 배려했는데, 단기선교 사역 후에는 이기적이고 본능적인 모습의 내 욕구를 다 보이며 부정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삶에 대해서 열정적이고 순수했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부정적이고 악한 모습의 내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겉모양으로 잘하려고 했던 그 무거웠던 스트레스, 이중적인 내 자아의 모습이 한꺼번에 봇물 터지듯이 발견되어지는데 나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수많은 사람을 향한 정죄가 쏟아졌고, 결국 그것은 나를 향해 찌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유한하고 소중한 삶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고 싶었던 그 순간에 삶의 방향을 돌려 지나왔던 한 해 한 해 되짚어보며 나의 삶을 반추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사건 이후, 매일 느끼던 혼란에 대해서 누구한데 믿고 털어놓을까 고민했다. 뭘봐도 심드렁한 마음이 그물에 걸린 고기마냥 무기력하게 갇혀지내게 만들었다. 어디서부터 이런 상한 감정과 상처가 기인되었는지를 살펴보던 가운데 아픔으로 눈물로 기도하며 금식하며 하나님과 독대의 시간을 가졌다.


 ‘하나님, 제가 이런 상황일 때에 보셨습니까? 제 이름은 아세요? 저를 정말 붙드셨습니까? 왜 홀로 놔두셨습니까? 내가 고통당할 때, 내가 외로울 때에, 내가 짐지고 갈 때에 왜 하나님 저를 혼자 두셨습니까?’라는 고통의 절규와 피맺힌 원한이 하나님을 향해 나갔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그때에도 계속 하나님 앞에 대화를 했다는 것이다. 결국, 피조물인 나는 창조주인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며 물었다는 것이다. 한참을 하나님 앞에 눈물로 항변하는데, 성령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으로 나를 만지시기 시작했다. 다윗이 지은 시편 말씀으로 내 영을 소생케하셨는데...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라는 시편 32편 3절말씀이 내 영적 상태를 그대로 말한 말씀이었다. 하나님 앞에 정직히 직고하여야 되겠구나. 원망하고 따지는 말투가 아닌, 정한 마음으로 아뢰어야겠다는 다짐이 섰다. 정하다라는 말은 정직하다, 바르다, 깨끗하다라는 뜻인데, 이런 마음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내면에 일고 있는 불신과, 원망과 눈물과 우울한 감정들을 하나님 앞에 낱낱이 토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난 뒤에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피아노학원에 강사로 아이들 레슨을 하러 나가게 되었다. 출근하면서 기도하였다. ‘하나님, 내 속에 정직한 영을 부으사 새롭게 빚으시고, 내 상한 마음 고쳐주소서. 지금과 같은 죄 된 마음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새 날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제가 억울한 것을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아신다면 그 증거를 보여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하루 하루를 나무 심는 마음으로 살았다. 감사의 제목을 달아가면서..! 지금까지 그리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임을 고백하고 높여드리면서..!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고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갈 때에, 놀랍고 기막힌 일이 있었다. 내가 지도하던 한 아이가, 너무나 나를 잘 따르고 수업에 잘 참여하였다. 눈빛도 밝고 맑은 아이였는데, 한가지 아쉬운 점은 학원을 다니면서 레슨비를 제대로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당시 원장으로 있던 것이 아니라, 원장님께 보고를 드려야하는 강사 선생으로 학원에 근무하였기에, 중간자적인 입장에서 참 애매했다. 아이에게 괜히 레슨비를 제 때 내라고 독려할 경우 아이가 받을 상처가 생각나서 머뭇거렸다. 그래서 원장님께 선처를 요구하려고 말을 꺼내려 할 때에, 원장님이 지난 1년여의 일을 말씀해주셨다. 그 원장님은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에게 재능기부도 하셨고, 상황의 여의치 않는 이들에게는 무료수준에 준한 레슨비를 받고 레슨도 하면서 피아노학원을 운영하셨었는데, 굳이 그 아이의 레슨비를 받으려고 하는 그 모습이 의아했다. 자세히 알고보니 집안 형편이 되시는데도 굳이 계속 밀려가면서 아이를 보내고, 백화점이든 값비싼 쇼핑을 할 때마다 그 어머님을 뵙는데, 약이 오른다는 말을 하셨다. 본인 쓸 것은 다 쓰면서 학원에 내야하는 공적인 비용은 지불하지 않는 프리라이더(free-rider)같은 사고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중간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싶은 마음에, 어머님께는 원장님의 말씀과 학원의 사정을 정중히 아뢰며 레슨비를 독려하였고, 아이에게는 상처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레슨에 임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내게 충성스러운 제자가 되었다. 눈빛으로 화답하여주고 마음으로 신뢰하며 잘 따라왔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 학원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다른 학원으로 이동하게 되었을 때에, 그 아이는 나의 연락처를 물으며 지금까지 저장된 휴대폰 개인사진을 갖고 싶다고 말을 했고, 그 당시 휴대폰 사진은 인화는 할 수 없고 대신 개인 홈피를 통해서 복사하여 소장할 수 있다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 즉시, 그 아이는 온라인 상의 홈피계정을 만들어 그곳에서 나와 소통하였다. 처음 정을 주었던 선생님이었는지, 그 아이는 늘 내 홈페이지에 들어와 자신의 일기를 남겼다. 하루 하루 일을 나누고, 지난 사제간의 정을 그리워하며 나를 따랐다. 하지만, 내가 그 정을 계속 이어가다가는 그 아이는 새 선생님과 적응하지 않고 수업을 따라가지 못할 듯 하여, 나는 잠시 외면하고 읽던 책 접어놓듯 그 아이와의 관계를 접어두었다. 시간을 두고 그 아이와 집안을 위해 중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5월 가정의 달이 되자, 내 심령가운데 그 아이의 상황이 생각나며, 나를 그토록 따르고 좋아했던 것이 떠올라 아이에게 안부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도 어린 시절 선생님의 말씀을 잘 따르고, 웃 어르신들의 말씀을 듣고 그리워했던 그러한 존경과 사랑의 마음이 떠올라, 나 또한 그 아이에게 그런 사랑을 받고 있음에 무시한 것은 아닌가 싶어 어린이날을 앞두고, 조심스레 아이의 홈페이지를 들러 안부를 전하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몇 년전 나에게 자궁에 혹이 생겼다고 말하고 임신하여 2학기 내내 육아휴직하며 내 마음을 불편케했던 그 여사감의 사진이 그 아이의 홈페이지에 있는 것이다. 순간 마음이 떨리고 내 상한 감정이 복받쳐 오르면서, 그 동안 내가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가 떠올랐고, 그에 대한 명확한 응답이 왔음을 알아차려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어찌 된 일인가? 원비가 밀려 힘들게 사는 그 아이와, 그 여사감은 도대체 무슨 관계이기에 이렇게 연결되어있단 말인가? 한순간 내 맘속에서 일렁이는 여러 생각들의 충돌과 혼란 속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반문과 함께 내 마음을 요동케 했다. 잠시 기도로 사실을 직고하면서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홈페이지를 열어서 그 아이에게 글을 남기고 있었는데, 글을 남기는 중 홈페이지에 남긴 글들을 통해 그 아이와 그 사감은 고모와 조카의 관계임을 알았다. 그 둘은 사는 곳도 너무 달랐고(한 사람은 충남 당진, 한 사람은 경기도 수원) 일부러 캐내지 않는 한 나의 삶과 그렇게 얽히고 섥혀 있을리 만무했다. 그동안 기도하며 애통하며 맘상했던 여러 감정들이 교차하고 복받쳐 오르며,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과 삶을 모두 다 감찰하고 계셨다는 사실에 부끄럽고 감사하고, 미안하고 또 감격하며 그 날 나는 여러 가지를 깨달았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이 공간에서 우연한 행위란 없다는 것!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지어져가고 있다는 것! 바람과 산들바람을 떼어놓을 수 없듯이 한 사람의 인생을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웃이기 때문이다. 바라건데, 우리가 서로에게 선한 이웃이기를 바란다.


 인터넷 중독이 모든 음란물과 나쁜 일들의 보급로가 되고 있으며, 게임중독에 빠진 청소년들은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1탄이 깨지면, 다시 시작해도 되는 식의 사고가 팽배해 져서 쉽게 충동조절을 못하고 자라게 된다. 10년 후, 20년 후 사회를 지탱해가는 보이지 않는 미래들이 망가져가고 있는 것이다. 예고도 이유도 없이 닥치는 ‘묻지마 범죄’가 증가하고, 각종 성범죄의 무차별 공격, 평생 고통을 씻을 수 없는 무기한 살인인 아동 성범죄의 증가에 따른 우리들의 판단력 자체가 흐려졌다. 판단력이란 어떤 상황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인간의 직관적인 능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판단력은 창조적인 능력이다. 때론, 인간의 판단력은 그가 속해 있는 사회, 즉 그 사회 구성원이 원하는 것과는 모순되는 행동을 하도록 그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나는 오랜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며, 인내심을 훈련받았다. 뭔가를 해치고 싶은 욕망(나를 속이고 기만했다)의 사슬이 끊겼고 억울하고 답답했던 부분이 풀렸으며, 주기도문이 외워지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망치질을 해대듯 거친 숨소리도 잔잔해졌다. 희생을 하고, 그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만 계속 생각하는 것은 내 잘못이다. 희생이 또한 우리의 삶의 일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희생은 후회할 것이 아니라, 열망을 가질 만한 것이다. 때로 소중한 것을 희생하면, 사실은 그걸 잃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넘겨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깨달음과 함께 가슴이 저려온다. 결국 나는 자기 자신과 평온해지면 모든게 평온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노를 품고 있는 것은 독이다. 그것은 안에서 당신을 잡아먹는다. 흔히 분노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공격하는 무기처럼 생각되지만 증오는 굽은 칼날과 같다. 미움은 칼잡이 없는 칼과 같아서, 그것을 잡고 있는 사람에게도 피를 흘리게 하고 생채기를 낸다. 그 칼을 오랫동안 잡고서 상대에게 휘두르면 상대에게 가기 전에 우리 자신이 먼저 다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피차 용서해야 한다. 우리 자아가 죽으면 영혼은 그 분노에서 해방된다. 이 일을 통해서 모든 삶이 서로 엮여 있다는 걸 영혼 깊이 느꼈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 기도한다는 진리를 알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전통이 붕괴되고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유일한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지는 대신에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보편적인 가치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삶의 목적 없음과 공허감, 즉 실존적 공허라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내면 그 사람은 최악의 상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 외면하지 말고 주변에 손내미는 영혼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우리 각자가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감찰하심을 느끼고 알고 있다면, 정말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는다면!!! 우리는 썩어져가는 이 땅가운데 하나의 밀알, 소금과 빛의 사명을 잊어서는 안된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는 글을 쓴 작가 미치앨봄의 말에 감동되는 구절이 있어서 남겨본다. 우리에게 낭비된 인생이란 없다. 우리가 낭비하는 시간이란 외롭다고 생각하며 보내는 시간 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타인이란 남이 아니라, 아직 미처 만나지 못한 가족일 뿐이다. 가족과 같은 사랑으로 이 땅에 만나는 영혼들에게 다가간다면 악을 악으로 갚는 복수의 고리는 없을 것이다. 먼저 선순환의 고리를 만드는 데에 일익을 담당해보자. 처음부터 청결하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악에게 유혹을 받고 시험을 받았지만, 악에게 지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지켜 그 악을 극복한 사람이 바로 청결한 사람이다!! 절대적 의미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완전한 실패를 영웅적인 승리로 바꾼다. - 죽용의 수용소 삶의 의미를 찾아서를 쓴 빅터 프랭클의 말이다. 이 말을 잊지 않으며, 썩어져가고 패역한 이 땅가운데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생명을 보호하고 이어가야할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가장 가까이에서 호흡하시며 우리의 삶을 인도하신다. 영원에서 영원까지..!!!

 

작성자 : 송관석 2016-01-07 12:14:56
[협회 제7회 생명윤리 활동 수기 수상작- 특별상] "생명윤리에 관한 활동수기" (2012. 10.)


생명윤리에 관한 활동수기

 

 

송관석

(신학대학원생, 온수교회)

2012. 10.

 

 

활동수기를 쓰기 전에, 먼저 나는 이승구 교수님을 만났던 때를 기억해보았다.

그 때는 지금으로부터 2년 전, 기독교 윤리라는 과목에서 시간이었다. 나는 그 시간을 통하여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데, 그것은 교수님의 고지식함 때문이었다.

설명하자면, 그 고지식함은 특별히 낙태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부분이었다.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주장하시기를 수정란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기 때문에, 낙태는 절대로 허용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거기까진 괜찮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만약, 강간을 당하여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경우에는 어떡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런 질문이 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원치 않는 임신에는 피임은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원치 않는 임신이란 분명, 성범죄로 면식범에 의한 강간이나, 근친상간을 말한다. 그런데 교수님이 정말 뜨악할 정도로 나에게는 충격적인 답변을 하셨다. 그 내용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생명은 생명이니, 낙태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니, 원해서 난 생명도 아니고, 누가 대신 키워줄 것도 아닌데, 또 어쩌면 그 아이는 평생을 상처받고, 입양될지도 모르며, 그 낳은 여자는 평생 미혼모라는 딱지를 붙이고 사는 그 상황에 아이를 낳으라니그것은 내 마음에서 절대로 동의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수업이 거의 종강할 무렵,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내가 성경적으로 사고하기를 싫어하고, 나의 좁고 편협한 이성에 기대어 어떤 윤리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 나는 굉장히 부끄러웠다. 왜냐하면 정말 하나님이 돌고 돌려서 이 귀한 말씀 맡은 자의 직분을 주셔서 지금 이 자리에 왔건만, 여전히 세상의 사고와 나의 경험에만 국한하여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의 이성의 윤리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은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최대한 성경이 뭐라고 하는 지, 정말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 한국사회에서 생명의 윤리를 어떻게 지키고 나가야 하는지 고민이 많다.

 

그렇다. 위의 글에서 언급했지만, 나는 현재 신학생이다. 신대원 3학년이라 이제 졸업을 하고, 내년에는 아마 전임 사역을 할 것 같다.

아마, 거의 모든 신학생이 그런 것처럼 나는 전도에도 쑥맥이고, 실제로 나의 삶에 복음의 제자들을 많이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 말인즉슨 이 땅에 생명윤리를 지키고 수호하며, 올바로 보존하기 위해, 애를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저 교회와 학교에서 그렇게 온실 안에서 내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했으며, 복음을 전한다는 핑계로 사회에 여러 현안과 윤리적 문제들에 대하여 눈을 감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실제로 나는 다른 사람보다도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부분에 관심도 많고, 분석력도 높은 편이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그것은 여전히 나의 밖에는 될 수 없으며, 말 만하는 앵무새 같이 지절거리는 것 밖에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졸업을 앞 둔 나의 앞으로의 사역에 심히 고민이 되는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생명윤리적 현안이나 문제와 관련하여 사역하는 사역자도 아닌 터라, 이 글을 쓸 자격이나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말 용기 내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앞으로 한 교회를 책임져갈 리더로써, 내가 먼저 올바른 생명윤리적 관점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부족하지만, 이 글을 쓴다.

 

먼저, 나는 나의 앞으로 사역 가운데, 위에서도 언급한 첫 번째, 낙태 문제를 충분히 성도님들께 가르칠 생각이다. 물론, 그 텍스트는 생명윤리협회에 속한 분들의 것이 될 것이다. 충분히 성경말씀을 먼저 연구할 것이고, 관련된 글을 연구하여, 강의나 세미나를 주기적으로 만들고, 그에 따른 피드백과 실천방안을 강구할 것이다.

실제로, 사실 나는 목회현장에 깊이 들어가지 않은 초년병 전도사이지만, 적어도 교회의 성도님들마저, 낙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을 정말 많이 보았다. 그것은 비단 많은 경우 그저 현재 키우고 있는 아이들도 많은데, 실수하여 아이가 생겨서 지우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리고 혼전성관계를 통해, 생긴 아이를 그냥 아무 죄책감 없이 지우는 청년들도 보았다. 나는 그것에 대한 이유가 성도님들 마음이 악해서가 아니라, 교육과 그에 대한 결단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제대로 그리고 누구도, 심도있게 교육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정란과 어린 태아를 생명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아주 자연스럽게 태아를 지워도, 그것이 살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비단 낙태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전반적 성에 대한 한국사회에 윤리적 의식에 문제일 것이다. 사실 이제야, 나주 성폭행사건으로 인해, 아동포르노를 소지한 자가 법적으로 처벌받는 세상이 됐다. 이 얼마나 기가 찬 세상인가? 대학가 근처에는 모텔이 즐비하고, 대학생들은 사랑이 아닌, 섹스에 광적으로 미쳐있다. 그러면, 교회는 과연 안전한가? 우리의 청년들은 아니, 중고등학생들 거기에 초등학생들까지, ()에 대한 문제는 이제는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 될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교회는 그리고 많은 목회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더 깨끗해져야 한다. 그래야 가르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나도 남자이고 연약한 자라, ()적 타락의 홍수 속에 살면서 믿음을 지키기는 어려운 것임을 잘 안다. 그래서 성경적인 생명관이 정립되고, 성에 대한 바른 지식과 사용을 알고, 거기에 나타가 그에 대한 실제적 책임으로 낙태와 싸워보겠다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수십 년 한국사회와 교회에 흘러들어와 있는 단순하게 아이를 지운다는 개념이 금방 사라질 것이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생명윤리협회 분들이 애쓰고, 기도하며, 공동체로서 이 문제를 껴안고 나아가는 것처럼, 적어도 내가 속한 교회에서 이 문제를 깊이 다루고, 교회들과 연합하며 해결해 나간다면 지금보다는 낙태에 대한 개선이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런 방식으로 나는 낙태를 거부하는 운동에 참여할 것이며, 그런 미래와 교회를 꿈꾸고 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이 깊은 은혜와 감동과 마음을 주시기를 원하며, 동역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붙여주시기를 원한다. 그리고 더 실제적으로도 생명윤리협회가 주최하는 모임에도 더 관심을 갖고 더 전문적인 식견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둘째로, 나는 내 목회에서 꼭 호스피스 사역을 하고 싶다. 물론 이 말은 샘물호스피스선교회의 원주희 목사님처럼 내 모든 사역을 호스피스 사역에만 집중시킨다는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서 어른들에게 비록 전문가는 아니지만, 정말 죽음을 준비시키는 사역을 하고 싶다. 거기에는 물론 상담의 사역과 돌봄의 사역이 필요할 것이고, 또 필요하다면 샘물호스피스선교회 기관 같은 곳을 연결해드릴 것이다.

그러나 이 죽음을 준비하는 사역에서, 인생의 마지막에 계신 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부활 생명이 아닐까 싶다. 정말 아프지 않았을 때는 심각하지 고민하지 않았고, 그리 감동되지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것을 마음에 깊이 새길 수 있게 애씀으로써, 유한한 생명이 아닌, 무한의 생명으로 가는 그 길을 돕는 것이다.

난 참 이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물론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역량이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안다. 하지만, 자녀에게로부터 버림받은 독거노인도 늘어가고, 여러 방임과 학대로 인한 노인들에게, 그리고 갑자기 찾아온 죽음을 어찌할 바를 몰라 감당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 호스피스 사역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그래서 사실, 졸업을 하고 나서, 시간을 내어 샘물호스피스단체 같은 곳에 가서, 실제로 교육도 받아보고, 그분들의 감정과 어려움들을 몸소 경험하려고 한다. 결코 이 사역을 나의 사역에 부수물로 놓지 않으려면, 내가 먼저 깊은 은혜와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나는 아주 조금이지만 발돋움할 것이고, 내 사역에 이것은 적지만 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셋째로, 나는 자살방지 사역을 하고 싶다. 현재 한국은 자살률이 가장 높다고 한다. 하루에 30씩 명 스스로 죽어나간다고 한다. 정말 누가 그들을 말릴 수 있겠는가? 누가 그들을 멈추게 하고, 돌아서게 하며, 자신을 사랑하며, 생명 안에서 힘 있게 살아가게 할 수 있겠는가? 교회 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한다. 어쩌면 비정규직이 난무하고, 불평등과 경쟁에서 도태되어 정말 막다른 골목에 선 이들에게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서 자살 방지에 관한 선교회를 만들어 생명의 중요성을 함께 나누고, 일차적으로는 내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자살 방지에 대한 교육과 상담을 통하여, 정말 어려운 이들을 돕고, 훈련된 선교회를 두어, 그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을 복음과 위로와 현실적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애를 써볼 것이다.

 

물론 그러한 사역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깨어지고 박살난 마음이 쉽게 회복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그 사역을 감당해보려고 계획한다. 주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는다.

 

넷째로 나는 범죄자들의 피해자를 대상으로 그들을 총체적으로 교회가 돕는 사역을 하려고 한다. 정말 모두가 깊이 인식하는 것이겠지만, 현재 한국사회는 병들지 않은 곳이 없다. ()에 대한 가치관은 땅에 떨어졌고, 어른을 진정으로 섬기고 돕는 예의도 없다. 생명에 대한 존엄성도 부족하여, 곳곳에 폭력이 들끓는다. 이런 사회적 현상에서 자연히 왕따나 성폭력을 당한 사람들, 범죄로 인해 가족을 잃은 분들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 피해자들을 누가 현재 돌보고 있느냐는 것이다. 가해자는 정말 인권! 인권! 하며, 때로는 너무나 가벼운 경미한 처벌을 하고, 피해자의 멍든 마음과 부서져 버린 삶은 누가 책임질 것이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위의 네 가지 사역 중에서, 내가 가장 심도 있게 하고 싶은 사역은 바로 이 네 번째 사역이다. 이것은 매우 실천이 필요하며, 겸손을 요구하며, 고도의 전문성과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을 요구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나는 성도님들을 격려하고도와, 그들이 이런 흉악한 일을 당한 사람을 진정으로 돕기를 원한다. 그 도움은 물론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물질, 마음, 위로가 포함된 총체적인 도움이다. 이 역시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기를, 우리를 도우시기를 원한다. 그분이 길을 만드시기를 그리고 이러한 사역이 활성화되기를 원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다섯째로, 기독교인으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사역을 하기 원한다. 물론 이것은 다분히 정치적으로 보일 수 있고, 성경적이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손을 사회로부터 온 흙으로부터 묻히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가? 나는 여기에서 주장하는 것이 교회에서 기독정당을 만들고, 단순히 정치가를 배출해내자는 것이 절대 아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사역은 정확히 말하자면, 정책에 그리스도인이 참여 하는 것이다. 흔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대선이나, 총선거가 이뤄질 때, “나는 찍을 사람이 없으니까, 선거를 하지 않겠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만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그 위정자들에게 믿지 않는 사람과 동일하게 삿대질을 하며, 온갖 비판을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이 없다면, 교회가 호스피스 사역을 하는데 교회를 제한하는 반기독교적인 법들이 제정된다면, 그리고 가해자 인권중심의 법들이 제정된다면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사회에 만연한 구조적인 악들은 과연 해소될 것인가?

 

아니다. 절대 그럴 수 없다. 다시 정확하게 말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정책)에 참여하는 것은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만약, 생명윤리에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함께 법을 제정하고, 어떤 정책을 구성하는데 참여한다면, 그것 또한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이겠는가?

 

나는 그러한 이유에서 먼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정치(정책)에 참여해야한다는 것을 교육하며, 그들이 공적으로, 또한 공동체로 그것에 자꾸 참여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 끊임없이 바른 의식을 갖기 위해서 애를 쓸 것이다. 그러할 때 나는 참으로 빛과 소금되는 교회로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 이처럼, 나는 앞으로 크게 낙태, 호스피스, 자살방지, 범죄 피해자 도움, 정책참여 5가지의 사역을 감당하려고 한다. 물론 나는 아까 말씀드렸지만, 이런 사역을 실제로 해 본적도 없고, 동참해 본적도 없다. 매우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셨고, 그 길로 인도하심을 느낀다. 나는 비록 작은 사역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생명윤리를 마음에 품고, 이 땅에 수많은 죄악을 마음에 품고, 성도와 함께 걸어가는 목회자가 되겠다. 우리 교회는 비록 작을 지라도, 참으로 많은 일들을 감당했으면 좋겠다.

 

끝으로 정말 이렇게 생각하고, 결단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셔서 감사드린다. 정말 이 결단이 구호로 그치지 않도록, 깊은 신앙의 사람이 먼저 되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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