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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윤리자료실
작성자 : 이상원     2015-06-11 15:21
자살과 기독교 (2007. 5. 22.)

 

자살과 기독교


이상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성산생명윤리연구소 부소장,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상임이사)

사랑의교회 생명윤리선교회 제6회 생명윤리 세미나

"자살문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주제발표 (사랑의교회 소망관 319호)

발표일 : 2007. 05. 22.

 


우리나라는 불명예스럽게도 이미 오래전에 OECD 국가들 가운데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이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최근에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연예인들이 잇달아 자살한 사건들이 보도되어 우려를 낳고 있다. 이 연예인들이 자살한 결정적인 이유가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데 따르는 박탈감과 경제적 어려움이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자살이 우리의 마음을 한층 더 무겁게 만들고 있는 이유는 이들이 모두 기독교인들이었으며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모습이 TV를 통하여 전 국민 앞에 방영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보도를 접하는 국민들의 뇌리 속에는 기독교가 성도들의 자살을 막을 수 없는 무력한 종교이며, 자살문제에 있어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인상이 강하게 부각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 같은 인상은 가뜩이나 개신교에 대한 불신 때문에 전도가 되지 않고 많은 개신교인들이 천주교로 대거 개종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전도에 상당한 부담과 장애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문제상황이 제기된다. 하나는 기독교에는 정말로 자살을 예방할 수 있는 가르침이 없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자살한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자살의 정의

자살은 자기 목숨을 자기 손으로 인위적으로 끊는 행위다. 사람의 목숨을 사람의 손으로 끊는 행위는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심겨저 있는 도덕률에 있어서나 성경에 기록된 계시된 율법에 있어서 보편적으로 모두 반도덕적인 행위로 인식되어 왔다. 성경에는 자살이라는 해위에 대하여 별도의 언명이나 평가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자살을 별도로 다루지 않는 이유는 자기의 목숨이든 타인의 목숨이든 사람의 목숨을 끊는 행위는 "살인하지 말라"는 제 6계명을 범하는 행위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살이 항상 보편적 도덕률을 범하는 반윤리적인 행위로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반윤리적 행위로서의 자살문제를 다루기 전에 윤리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자살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a. 윤리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자살은 행위자의 자유로운 결단에 위하여 행해지는 경우를 뜻하는 것으로서, 정신질환 등으로 인하여 자유로운 결단의 능력이 상실된 상태에서 행해지는 경우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예컨대 우울증이나 조울증 등과 같은 정신질환 때문에 자살을 결행하는 경우에 윤리적인 반성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b. 행위자의 자유로운 결단 안에서 행해지는 경우도 두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상황이 요청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선한 동기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손으로 자기 목숨을 끊는 경우가 있고, 다른 하나는 선한 동기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상황이 자기 목숨의 희생을 불가피하게 요구할 때 그 상황을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고 그 상황을 맞이하는 경우다. 전자의 경우는 윤리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지만 후자의 경우는 동기나 목적 여하에 따라서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정당화될 수도 있다.


b-1.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기로 결단하는 경우는 정당화될 수 있다. 주님께로 가고자 하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눅14:26). 빌립보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빌2:30). 그리스도인들은 주를 위하여 죽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롬14:8). 신앙을 부인하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그 길을 포기하고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순교자들의 행동은 정당화된다. 그러나 믿음을 지켜야 하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순교라는 영예를 얻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목숨을 내어 놓는 행동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성도들은 탄압과 핍박이 찾아 올 때 최선을 다하여 피할 길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할 수만 있으면 살아서 신앙을 지켜야 한다. 다시 말해서 순교란 불가피한 상황에서 맞이하는 것이지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데도 자발적으로 맞이하는 행동은 아니다.


b-2.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는 경우에 자살은 정당화될 수 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요15:13).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동역자인 바울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롬16:4). 예수님이 성도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행동은 기독교인들이 형제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리는 행동을 요청하는 모범으로 제시된다(요일3:16). 이 말씀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뚜렷한 동기를 가지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행동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로 일단 해석될 수 있다. 그러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 목숨을 버리는 모든 행동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자살은 생명을 버리는 행동이므로 자살을 결행하는 목적이 생명의 희생을 상쇄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인가를 공리적으로 계산해 보아야 하며, 불가피한 수단이었는가도 따져 봐야 한다.


b-2-1. 타인의 생명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방법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을 경우에는 자기 목숨을 버리는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다. 사병이 실수로 안전핀을 뽑은 상태로 떨어뜨린 수류탄 위에 자기 몸을 덮쳐서 폭사(爆死)하고 수많은 사병들의 생명을 살려낸 강재구 소령의 행동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어느 군목은 전쟁 포로들과 함께 배를 타고 이송되어 가던 중 파선을 맞이했다. 구명보트가 내려졌는데, 이 구명보트의 승선 허용인원이 승선해야 할 사람들 숫자에 비교하여 볼 때 한 사람이 모자랐다. 군목은 다른 전쟁포로들을 다 태우고 자신은 바다에 뛰어내려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이 군목의 행동도 윤리적으로 정당한 행동이다.


b-2-2. 전쟁이 벌어졌을 때 전투를 중단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죽음의 가능성이 충분하게 예산됨에도 불구하고 전우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또는 조국을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총탄이 난무하는 전선에 뛰어드는 행동은 비록 구해야 할 특정한 사람의 생명이 구체화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윤리적으로 정당한 행동이다. 삼손이 다곤신당을 무너뜨린 행동도 이 범주에서 정당한 행동으로 판단할 수 있다(삿16:23 이하). 더욱이 삼손의 행동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난 이후에 한 행동으로서(삿16:28), 히브리서 기자로부터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고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어 이방사람들의 진을 물리친 행동으로 평가받았다(히11:32~34)는 사실은 삼손의 행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준다.


b-2-3. 그러나 우리나라의 운동권에서 열사(烈士)로 추앙되고 있는 전태일의 분신자살이나 월남전쟁 당시에 월남정부의 부패에 항의하는 표시로 승려들이 분신자살한 행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정치적인 이념의 실현을 위하여 자살하는 행동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정치적 이념들이라고는 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대체로 정치적 이념들은 인간과 사회를 증진시키기 보다는 그것들이 지닌 유토피아적 성격 때문에 오히려 인간과 사회에 심각한 해독을 끼치는 경우들이 많았다.


b-2-4. 순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자살하는 행동은 순결이 소중한 가치이긴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잡을 만큼 무거운 가치는 아니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없다.


b-2-5. 경제적 능력이 없는 노인이나 많은 경제적 부담을 가족에게 안겨주고 가족들의 희생적인 간병이 필요한 환자는 가족들에 대한 부담을 덜기 위하여 자살을 결행하고자 하는 당사자가 공동체에 없어서는 안 될 일원임을 인식시켜주고 포용하는 태도가 우선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살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가족들이 담당하는 경제적 부담을 경감시키는 것은 천하보다 귀한 인간의 생명의 가치를 능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b-2-6. 폭력조직과 같은 비윤리적인 조직에서 조직의 보스나 조직 그 자체를 보호하고 조직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성경의 가르침을 "모두 다" 가르치는 길은 자살예방의 첩경

기독인에게서 나타나는 자살행위는 기독교의 교리와 윤리적 교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성경이 제시하는 교리와 윤리적 교훈 안에 자살을 예방하는 자원이 빈약하며, 기독교는 자살을 예방하기에 무력하다는 점을 말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성경 그 자체가 제시하는 교리 및 윤리적 교훈과 현재 한국교회가 가르치는 교리 및 윤리적 교훈을 구별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와 윤리적 교훈을 "모두 다" 통전적으로 가르치는 일에 실패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교리 및 윤리교육의 실패가 곧 성경이 가지고 있는 교리와 윤리적 교훈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많은 숫자의 기독교인들의 자살을 효율적으로 막아내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성경이 제시하는 가르침을 "모두" 그리고 통전적으로 가르치는 일에 실패한 데 기인한다고 진단할 수 있다. 성경대로만 바르게 가르쳐 왔다면 한편으로는 보다 효율적으로 자살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살 예방을 위하여 필요한 성경적 자원을 검토하기 전에 인간학적 자살관의 한계와 문제점을 검토해 보자.


철학적 자살관의 한계와 문제점

먼저 철학적인 자살관을 검토해 보자. 희랍신화에서는 자살이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 묘사된 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헤라클레스는 불로 자살함으로써 불멸의 신들이 사는 올림푸스에 도달할 수 있었다. 피라모스를 잃고 절망한 티스베가 나무딸기 앞에서 자살했을 때 평소에는 작고 하얗고 마른 열매를 맺던 나무딸기가 크고 붉은 열매를 맺었다는 기록이라든가, 두 연인의 자살에 감동한 신들이 두 사람을 두개의 큰 강으로 바꾸어 주었다든가, 일곱 명의 히아데스 자매들의 자살로 일곱 개의 별로 이루어진 히아데스 성단이 탄생했다든가, 자살한 괴물이 스핑크스가 된 예 등은 희랍신화의 시대에 자살이 예찬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희랍신화가 자살을 예찬한 것과는 달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살을 비판했다. 신들이 인간들을 보호하며 인간들은 신들이 소유한 목장에 속한 가축들이라고 본 플라톤은 자살은 신들의 분노를 촉발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신의 명령이 아닌 한 자살은 해서는 안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독배사건에서처럼 형벌의 일환으로 자결을 명령할 때는 자살이 허용되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살은 공동체인 도시국가에 대항하는 행동이라는 이유로 자살을 반대했다.

개인의 판단에 따라서 현인은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봄으로써 자살을 옹호했던 견유학파의 입장은 스토아학파와 에피큐로스학파에게 전승되었다. 모든 형이상학을 부인하고 인간 자신의 내부에 있는 모든 규범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한 스토아학파는 삶과 죽음의 문제도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문제 곧 '아디아포라'의 문제로 보았다. 스토아학파에게는 만일 삶이 정당하지 않다면 자살을 선택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없었다. 에피큐로스는 타인이나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자유와 즐거움을 향유하는 삶을 최고의 가치 있는 삶으로 보았다. 영혼은 육체와 함께 멸망하는 것이므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으며, 따라서 삶이 즐거움을 제공할 수 없다면 자살로써 삶을 끝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었다.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한 계몽주의 시대 이후 자살은 몽테스키외, 루소, 흄, 괴테, 쇼펜하우어, 니이체 등에 의하여 자결권의 차원에서 옹호되었다. 단 칸트는 두 가지 논증에 근거하여 자살을 반대했다. a.네가 원하는 것이 일반적인 자연법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일반적인 자연법은 생명을 증진시키는 것인데, 자살은 일반적인 자연법이 될 수 없지 않은가? b.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 이 원리에 따라서 생각해 본다면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자살한다는 것은 고통을 피한다는 목적을 위하여 인간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철학적 윤리학은 신의 존재를 명시적으로(플라톤) 또는 암시적으로(칸트) 고려의 대상에서 배제하지 않고, 보편적 도덕률을 강조하는 의무론적인 입장이나 공동체의 공동선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자살이 거부되고 있는 반면에 보편적인 규범이나 공동선 보다는 개인의 윤리적 판단이 아닌 자결권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자살이 폭넓게 허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철학적 토론의 마당에서 자살에 대한 어떤 합의점을 도출해내기란 어렵다.


뒤르껭과 프로이드의 자살관의 공헌의 문제점

현대 사회학과 정신분석학은 철학적 자살관 보다는 진일보한 자살에 대한 분석과 처방을 제시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자유로운 결단 안에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간의 결단은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요인들에 의하여 강하게 영향을 받기도 한다. 따라서 자살자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요인들을 분석하는 작업은 자살문제를 다룰 때 매우 중요하다. 자살을 하도록 추동하는 사회적인 요인들에 대한 분석을 전개한 사회학자로 에밀 뒤르껭(Emil Durkheim)이 있고, 심리적인 요인들에 대한 분석을 전개한 정신분석학자로는 시그문드 프로이드(SIgmund Freud)가 있다.

에밀 뒤르껭은 자살의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a. 이기적 자살. 이기적 자살은 사회와의 통합의식이 약화되어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될 때 결행하는 자살의 유형이다. 예컨대 한국과 일본에서 집단으로 따돌림을 당하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소외감을 견디지 못하여 자살하는 경유를 들 수 있다.


b. 이타적 자살. 이타적 자살은 사회에 대한 통합의식이 너무나 견고할 때 결행되는 자살이다. 예컨대 2차대전 당시에 패전에 몰린 일본군이 미국군함과 항공모함을 향하여 감행했던 가미가제 자살특공대라든가, 이슬람의 종교 및 국가 공동체에 대한 집착적인 헌신 때문에 자살테러를 자행하는 알카에다 요원들이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요원들, 짐 존즈가 이끌었던 인민사원 신도들의 집단자살 등이 이 범주에 해당한다.


C. 몰가치적 상황으로 인한 자살. 이 유형의 자살은 종교와의 관련이나 직업 및 결혼 규범이 약화되고 경제공황이나 실업률이 증가되는 상황에서 사회의 규범적 통합력이 약화되어 있을 때 나타나는 자살을 뜻한다.

뒤르껭이 지적한 요인들이 사람들을 자살로 내모는 사회적 이유들로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요인들이 극복할 수 없을 만큼 필연적이고 결정적인 요인들이라고는 볼 수 없다. 뒤르껭의 자살론은 뒤르껭 자신이 자살을 추동시키는 원인으로서 지적한 사회적 상황 안에서 오히려 삶에의 의지를 붙태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살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내지 못한다. 예컨대, 학교 생활에 무리 없이 적응하는 모범생들은 집단에 강하게 귀속되는 것을 싫어한다. 어느 정도의 고독과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훌륭한 학교성적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외와 고독을 오히려 창조적인 자기계발을 위한 계기로 활용하는 학생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집단에의 강한 귀속성도 항상 자살로 연결될 만큼 그렇게 강력하다고 볼 수는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나치게 강한 결속력을 요구하는 집단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규범의 약화가 자살의 원인이 된다는 분석은 의미 있는 분석이다. 그러나 뒤르껭의 분석내용 가운데 경제적 공황상태나 실업상태에 있게 되는 경우에 사람은 규범으로부터 느슨해진다는 내용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항상 찾아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다. 사람들은 이런 위기상황에 처할 때 오히려 규범적으로 느슨했던 생활 태도를 다 잡고 한층 더 도덕적인 태도로 위기를 극복해 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한편 프로이드는 인간의 삶은 두 개의 본능적 충동에 의하여 영위되는 바, 하나는 삶에의 충동이며, 다른 하나는 죽음에의 충동이라고 보았다. 이 중에서 죽음에의 충동이 삶에의 충동을 누르고 힘을 얻고, 이 충동이 내면을 향할 때 자기파괴가 나타난다고 한다. 자기파괴는 협착화된 엄격한 양심의 결과이며, 이때 무거운 자기죄의식이 수반되는 우울증이 나타나며 이 우울증이 자살의 필연적인 전제조건이라고 말한다. 물론 인간은 죽음에의 충동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도 죽음에의 충동에 사로잡혔었다. 로뎀나무 아래 앉았던 엘리야가 그랬고(왕상19:4), 욥이 그랬으며(욥3장, 특히 21절), 요나가 그랬다(욘4:3).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음에의 충동이 삶에의 충동과 동등한 것이냐 하는 점이다. 프로이드는 죽음에의 총동과 삶에의 충동이 동등한 위치에서 대결하는 것으로 보았으나, 이것은 프로이드의 인간학이 가지는 치명적인 실수다. 기독교적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곧 삶을 향한 본능적인 욕구는 주어졌지만(전3:11), 죽음을 향한 본능적인 욕구가 주었다고 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현실이 없었다. 죽음이라는 현실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외부로부터 들어온 낯선 침입자이며 따라서 죽음에의 충동도 외부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죽음에의 충동이 강력한 힘으로 사람을 지배할 수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충동이요, 본원적인 충동은 아니다. 죽음에의 충동은 반드시 그 충동을 유발한 외적인 원인이 있기 마련이며, 이 원인이 제거될 때 이 충동도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통례다. 정신의학은 "잠복해 있던 자살에의 충동 → 내외적인 환경이 가하는 충격에 의하여 깨어남 → 자살결행"으로 자살의 과정을 설명하지만, 경험적 관찰은 "자살충동과는 무관한 외부적인 충격 → 충격을 극복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서의 자살"이라는 도식이 정확한 도식임을 보여준다. 죽음의 충동이 본능적인 충동이 아니라 외부적인 요인에 의하여 잠정적으로, 그러나 강력하게 찾아드는 충동임을 강조함으로써 자살은 얼마든지 상담과 설득을 통하여 극복할 수 있는 일임을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자살예방을 위하여 가르쳐져야 할 성경의 교리적이며 윤리적인 가르침들

철학적인 성찰이나 정신과적 상담 그리고 사회구조의 법적이고 제도적인 장치의 개선등이 자살예방을 위하여 필요하며, 최선을 다하여 이런 노력들을 수행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노력들이 자살예방에 기여하는 공헌에는 중요한 한계가 있다. 자살에 대한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대결하는 상황에서 무게중심이 자살옹호론으로 기울어져 있는 철학적 사유의 전통은 자살을 예방하는 이념적 토대로 활용하기에는 너무 허약하다. 정신과적 상담을 통하여 자살을 유도한 내적인 심리적인 요인들을 완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지만, 자살에의 충동이 의지나 이성으로써 제어할 수 없는 생득적 충동이라고 파악하는 프로이드의 사상이 배경에 깔려 있는 한 정신과적 상담을 통한 심리적 조작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물을 손으로 막르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쓰는 애처로운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자살을 선택하게 만든 사회구조의 법적 개선을 통한 자살예방의 시도는 법적인 장치가 가장 잘 갖추어져 있는 서구의 선진국에서 자살률이 높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시도들은 물론 필요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예방책이 요구된다.

해변 모래톱 위에 정박해 있는 수천 척의 배들을 어떻게 해야 수월하게 바다에 띄울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한 가지 가능한 방법은 바퀴달린 손수레를 끌어와서 배 밑에 대고 배를 수레 위에 올려 바닷물로 끌고 가는 힘들고 고달픈 방법이 있다. 철학적 성찰, 정신과적 상담, 사회구조의 개선 등은 그 효과에 있어서 이 방법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쉽고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밀물이 들어올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밀물이 밀려 들어오면 수천 척의 배들이 수월하게 물위에 둥둥 떠서 쉽게 바다 한가운데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자살을 예방하고자 할 때도 이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강력하게 솟아오르는 자살에의 충동은 이보다 한층 더 강력한 힘을 동원하여 밀어 버려야 한다. 이 방법이 무엇인가? 바로 성경의 교리와 윤리적 교훈을 철저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면 자살을 예방하기 위하여 교회가 철저하게 가르쳐야할 성경의 가르침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교회는 성경의 어떤 가르침을 철저하게 성경대로 가르치는 일에 실패해 왔는가?


a. 성경은 그 크기와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 무한에 가까울 정도의 스케일을 가진 구원의 복음을 제시하고 있으나 교회는 이 복음이 지닌 이런 스케일을 충분히 가르치지 않았다.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말을 들어 보면 구원의 교리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며, 다 알고 있는 구원의 교리를 자꾸만 반복하여 가르치는 것은 구태의연한 태도이며, 이제는 구원의 교리는 전제하고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생각은 문제가 있다. 구원의 복음은 실존적인 윤리적 실천을 넉넉하게 가능하게 하는 동력을 제공한다. 이 동력을 실존적으로 날마다 새롭게 제공받지 못하면 윤리적인 실천은 곧 힘을 잃게 되고 메마른 율법주의로 빠진다. 동력이 빠진 채 반복되는 윤리적 실천의 강조로는 넉넉한 윤리적 실천을 도출해내지 못하며 더욱이 자살에의 충동을 제어하기 힘들다. 실천의 동력을 제공받기 위해서는 구원의 복음이 날마다 새롭게 설교의 중심으로 선포되어야 한다. 현금의 한국교회의 강단에서는 교회성장을 위한 어설픈 예전적 실천은 많이 설교되어도 구원의 복음 그 자체가 지닌 장강대하와도 같은 장엄한 스케일과 감동을 전하는 강단은 매우 희소하다.

마태복음 18장 21절에서 29절에 있는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의 비유는 이 논점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본문이다. 오늘날의 국세청장에 해당하는 빚진 종이 조건없이 탕감받은 빚의 크기는 일만 달란트인데 일 달란트를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3억에 상당하는 액수다. 그렇다면 일만 달란트는 어마어마하게 큰 액수의 돈(3억×10,000=3조)이다. 반면에 이 종이 용서해주지 않은 빚진 동관이 탕감받지 못한 빚의 크기는 백 데나리온, 곧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오백만원에 상당하는 액수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조건없이 면제받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에게 오천달러 빚진 사람의 빚은 어렵지 않게 탕감해 줄 수 있고 마땅히 탕감해 주어야 한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면제받는 것은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건을 뜻하고, 백 데나리온은 구원받은 기쁨과 감동의 힘에 의지하여 밀고 나갈 때 수월하게 이행할 수 있는 것이다. 복음이 주는 기쁨과감동의 힘이 자살의 충동을 넉넉하게 밀어붙여 쫓아낼 수 있는 동력이다.


b. 한국교회는 인간이 죽은 후에 사후세계가 존재하며, 현세 안에서 행한 모든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서 모두 철저하게 실사 받아야 한다는 역사적 기독교의 내세론을 충분히 가르치지 않았다.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내세적이교, 따라서 현실이 문제에 무관심해 왔다는 비판을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한 정설적인 진단인 것처럼 말해 왔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정말로 한국교회가 내세지향적인가? 필자는 생각이 다르다. 필자의 눈에 비친 한국교회는 지독할 정도로 철저하게 현세적이다. 이조 오백년간의 기간 동안 현세적 종교인 유교의 지배를 받아 유교적 세계관에 깊이 젖어 있는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은 대체로 현세적이다. 오늘날 부활과 내세에 관한 설교가 일 년 52주의 강단설교에서 몇 번이나 주제로 선정되어 설교되는가? 아마도 부활절 한번 정도 외에는 없을 것이다. 기독교의 최대의 소망을 담은 부활찬송도 부활절에 딱 한번 부른다. 왜 부활찬송을 부활절에만 불러야 하는가? 기독교의 최대의 소망인 부활찬송을 날마다 불러야 정상이 아닌가? 사후세계가 엄존하며, 사후세계에 들어갈 때 현세의 모든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실사 받고 평가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날마다 묵상하고 믿을 때 자살의 충동은 그 힘에 밀려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c. 한국교회는 지극히 현세적이면서도 현세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성경에 기록된 보편적 윤리훈을 철저하게 가르치는 일에는 실패했다. 한국교회가 현세적이며, 현세에서의 삶에 깊은 관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세에 대하여 가지는 관점에 문제가 있다. 현세에 대한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의 관심은 현세 안에서의 교회의 가시적인 성장과 현세 안에서의 기독교인들의 물질적 번영의 향유 등에 집중되어 있을 뿐, 현세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율례와 법도를 준행하고 이 준행에 수반되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한 마디로 사랑의 대강령, 황금률, 십계명, 그리고 기타 잠언 등에 풍부하게 계시되어 있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윤리훈들을 철저하게 가르치는 일에 실패했다. 자유주의 전통의 교회들은 사랑의 대강령 이외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윤리훈들을 상대화시키고 이 윤리훈들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규범들이라는 점을 강조하지 않았다. 이는 곧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탈규범화를 촉진시켰으며, 탈규범화는 일찍이 에밀 뒤르껭이 지적한 바와 같이 자살에의 충동에 쉽게 굴복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의 절대성과 보편성을 인정하지 않을 때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 명령을 수행해야 할 당위성을 찾기 어렵게 된다.


d. 한국교회는 성경이 강조하는 연대성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에서 31절에는 교회를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유기체로 묘사한다. 유기체 안에서 각 지체들은 어느 한 지체의 아픔이 곧 몸 전체의 아픔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몸 전체는 어떤 작은 하나의 지체라도 아프지 않도록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지속적으로 돌보아야 한다. 약한 지체일수록 몸 전체의 집중적인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99마리의 양들이 모두 문제가 없고 건강해도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었다면 99마리의 양이 가는 길을 멈추고 그 한 마리를 찾아내는 수고를 담당해야 하며 찾아내어 무리에 합류시킨 후에 길을 가야 한다. 자살에의 충동을 느낀다는 말은 정신적으로 외로우며 경제적으로 소외되어 있으며, 따라서 공동체 전체의 관심과 사랑을 간절하게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교회 공동체가 진정으로 공동체에 소속된 작은 지체를 소중하게 여기고 외롭고 고독할 때 대화의 상대가 되어 주고 경제적으로 곤궁할 때 힘이 되어 주는 연대성의 실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면 상당수의 자살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살한 신자의 구원의 문제

앞에서 말한 네 가지 항목이 자살을 악한 행동으로 전제하고 자살을 막는 일의 신학적 자원이 되는 것이었다면, 성경은 또한 이미 자살한 자와 자살한 자의 가족들이 정당하지 않은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을 차단시켜 주기도 한다. 서구의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자살이라는 행동을 기독교인의 구원의 문제와 관련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 하나의 상식으로 확립외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한국교회 안에는 자살한 기독교인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심지어 수십년간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겨오는 삶을 살았다 해도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는 중세적인 속설이 목사들과 평신도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 속설들을 뒷받침하는 논증들과 이 논증들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다.


a. 자살한 기독교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견해는 자살을 성령훼방죄로 해석하는데서 비롯된 생각이다. 자살이 성령을 훼방한 죄라는 견해는 중세시대에 형성된 견해이며, 루터, 푸치우스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과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는 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에 의하여 비성경적인 교리로 거부되었다. 성령훼방죄(마12:31, 막3:28,29)는 히브리서 10장 29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를 거부하고 받아 들이지 않는 불신앙적인 행동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며,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행동에 제한시켜 적용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죄를 죽는 순간까지 고집하다가 죽으면 그 후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 성령훼방죄의 핵심이다. 자살을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관련시키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b. 다른 죄를 범한 사람들은 죽기 전에 자기가 범한 죄를 회개할 시간이 있지만 자살한 사람은 자살이라는 죄에 대하여 회개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죽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 구원은 인간이 지은 죄를 남김없이 회개한 공로를 근거로 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뿐이다. 만일 특정한 죄를 회개했는가에 근거하여 구원이 결정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항공기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미사일을 맞아서 회개할 시간을 갖지도 못한 채 폭사한 신자는 구원받지 못하는가? 치매에 걸려서 자기가 한 행동을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자는 구원받지 못하는가? 많은 신자들은 과거에 지은 죄를 회개하고 싶어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회개하지 못하기도 하고, 심지어 많은 신자들이 회개할 시간을 충분히 주어도 회개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그렇다면 이 신자들은 예수를 믿었어도 다 지옥에 가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 신자의 삶이 값없이 오직 은혜로 중생함으로써 시작되었다면 , 마지막 날에 구원받는 것도 값없이 오직 은혜로 영화됨으로써 구원받을 뿐이다.


c. 구원받은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자살에의 충동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신자의 중생의 상태를 너무 이상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미 우리는 엘리야, 욥, 요나 등과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들로부터 죽고 싶어하는 충동에 사로잡혔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신자들도 자살에의 충동을 느낄 수 있으나, 믿음 안에서 넉넉히 극복할 뿐이다. 자살은 분명히 기독교인이 피해야 할 죄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믿음이 약하여 자살에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신자를 평가할 때 자살을 결행한 그 한 순간의 행동만을 가지고 그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다윗은 우리아를 죽음에 내모는 살인죄를 범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그 하나의 행동을 가지고 다윗을 규정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과 다윗의 삶 전체를 보시고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평가하실 때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하갈을 취한 한 사건만 근거하여 아브라함을 평가하지 않으셨다. 수십 년을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온 신자를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한 그 순간만 가지고 단죄해서는 안 된다.


d. 청소년들에게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교육적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진실이 아닌 가르침에 근거하여 교육적 효과를 거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한다.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청소년들을 설득하여 자살의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데 성적이나 가정불화나 실연 등으로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 더 깊은 배려와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 주면서 자살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죄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선한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자살예방효과를 거둘 수 있다. 선행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가르침은 중세 말기 로마 카톨릭의 복음왜곡과 교회부패의 진원지가 되었다. 그 가르침으로 평신도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해서 악을 행하는 것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 때문에 사람의 영혼의 운명을 결정짓는 복음이 심각하게 왜곡되었고, 공로주의에 사로잡힌 교회는 이를 이용하여 돈을 주고 구원을 사고파는 면죄부 파동까지 일어났다. 교육적 효과는 복음과 진리를 희생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도모되어야 한다.


e. 그러나 교회는 자살한 성도가 자살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루터는 자살자도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말을 평민들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사탄이 이 가르침을 이용하여 더욱 더 많은 살인을 자행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예배 석상에서는 자살은 기독교인이 피해야 할 죄라는 것과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는가에만 근거하여 결정된다는 점을 동시에 강조하는 선까지만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자살한 가족을 가진 성도들이 자살한 가족이 죽은 후에 간 길에 대하여 불안에 사로잡혀 있을 때 개인적인 상담을 통하여 신앙고백을 한 신자라면 사망을 포함한 그 무엇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으로 위로해 주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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