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건, 성경적 '고통과 기억의 연대' '슬픈 기억'을 '나쁜 기억'으로 변질되게 해서는 안 된다.
크리스천들의 삶과 사회는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구약성경의 소돔과 고모라가 의인 10명이 없어 멸망(창 18:32)했다. 예루살렘은 의인 1명이 없어서 멸망(렘 5:1)했다. 그런가 하면 애굽은 요셉 한 명으로 인해서 나라의 경제 위기가 극복되었다.
사울 선지자가 머문 '라마나욧'은 성령의 임재가 강하게 나타나는 곳이었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성령의 임재와 은사를 체험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한 사람의 가치를 중요시한다. 그리고 동시에 사회적 정의와 관점을 언급한다.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시 82:3-4)
예수는 선한 목자로서 '한 영혼'의 가치와 구원을 강조한다. 이를 양에 비유하며 설명한다. 길 잃은 양의 비유는 소수와 다수의 공동체적 사랑의 원리를 말한다. 공동체 내에서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다면 나머지 다수도 온전한 사랑을 하거나 누릴 수가 없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이라도 실족, 소외되거나 잃어버렸을 때, 그 상태를 그대로 방치하거나 외면한다면 이미 그 공동체는 사람에 대한 유대를 상실한 것이다. 영적으로 유기체적 생명력을 잃은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혼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마 18:12)
한 마리의 양을 찾는다는 것, 이것은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의 양과 모두를 향한 십자가의 구속사적 사랑을 의미한다. 한 영혼의 고통과 실종을 외면한다면 이미 그 공동체는 닫힌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영혼들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 이미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 선한 양심과 인간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악함, 완악함, 패역함, 타락한 심리 상태의 존속이 드러난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한 마리 잃어버린 영혼이 될 수 있다. 잠재적 상태이다. 이를 외면하거나 눈 감으려 한다면 동일한 연속성에서 마침내는 병든 공동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세월호 사태에서도 영혼을 보는 예수의 관심과 사랑은 동일하다. 이 땅에서 소외받고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나 표현은 성경 진리의 실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역사적 사건의 희생자를 위로하고, 아픔에 공감하며 기도하는 것은 성경 진리의 실천이다. 이는 사랑과 관심의 표현이다. 인간에 대한 우상과는 연결 할 수 없고 구별되는 일이다.

<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이하지만, 아직도 진실은 가려져만 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모든 신음하는 피조물의 회복과 구속사, 성경의 소망
어머니, 이 단어는 헌신과 사랑의 대명사이다. 자녀를 대하는 어머니의 선천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을 말한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옛말이 있다. 세월호 참사에서 어린 영혼들뿐만 아니라, 모든 영혼은 소중한 생명이다. 참으로 귀한 존재이다.
그러나 단원고 학생들과 교사들을 비롯해 고귀한 생명들의 희생자를 낸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아직도 가려져 있다. 가족들의 슬픔과 애통은 더해져만 간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이분들을 위로해야 할 교회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어떤 목사들은 자신의 견해를 성경의 권위보다 위에 두며 거침없이 말한다.
"세월호 가족들을 우상화하지 말라고."
트라우마나 마음의 아픈 상처에 슬픔을 더하는 발언들이 난무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생각, 감정, 의지를 포함한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잠 23:7)
요한복음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처형장까지 어머니 마리아가 따라갔다고 언급한다.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비통한 심정은 어땠을까?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것이다. 신앙적으로 지나친 마리아 우상은 경계해야 하나 한 어머니의 슬픔은 이 세상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다. 어떤 표현으로 그의 마음을 다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서 '라헬(Rachel)'은 사랑스러운 여인이지만, 슬픔을 상징하는 여인이다. 마태복음에서 기자는 예수가 갓 태어난 뒤 베들레헴과 인근 지역에서 벌어진 아기들 학살 사건에 주목한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의 헤롯대왕의 행위로 2세 이하의 아이들을 모조리 죽인 사건을 말한다. 그는 새로운 왕 예수의 탄생을 시기해 만행을 벌였다. 그러나 예수는 이 슬픔과 비극을 새로운 소망과 하나님나라로 전환하는 메시아로 이 땅에 왔다. 예수의 등장이 지상에서는 온전한 위로였다.
로마의 황제였던 가이사 아구스도는 "헤롯의 아들로 사는 것보다 헤롯의 돼지로 사는 것이 더 낫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오직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친인척까지도 무자비하게 숙청한 헤롯에게 돼지는 보호 대상이지만, 아들은 보호받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슬픔으로 통곡하는 어머니들의 심정을 예레미야 31장 15절에 있는 라헬의 슬픔과 연관 지어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베들레헴에는 야곱이 사랑했던 아내 라헬의 무덤이 있다. 라헬은 에브랏(베들레헴)으로 내려가던 길에서 아들 베냐민을 낳다가 숨진다. 그는 슬픔과 통곡의 여인이었다. 그래서 베들레헴 도상에 묻혔다.
고통 속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라헬은 이 자녀의 이름을 베노니(Benoni)라고 불렀다. 내 슬픔의 아들, 내 고통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때 야곱은 아들의 이름을 베냐민(Binyamin)으로 바꾸어 불렀다. '내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때부터 베들레헴은 라헬의 무덤이 있는 장소로, 이스라엘에서 슬픔과 애통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됐다.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때의 슬픔을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렘 31:15)으로 표현했다. 예수 출생 때 생긴 유아 살해의 비극이나 슬픔, 선민 이스라엘이 멸망해 이방 국가에 포로로 끌려가는 조국을 잃은 수치와 슬픔, 그 이전에는 애굽의 바로 왕이 나일강에서 아이들을 던져 죽일 때의 슬픔과 고통은 서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연결되어 있고, 의미가 같다는 것이다.
라헬(Rachel), 라마에서 통곡하고 있는 어머니
구약의 예레미야는 라헬의 무덤을 거론하며 역사를 회상한다. 한 세기 전(BC 721년)에 앗수르에게 포로로 잡혀간 북왕국 이스라엘의 패망과 희생자들을 생각한다.
"나 주가 말한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 (렘 31:15)
라헬은 위로받기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죽은 자식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극한 고통과 슬픈 마음을 완전하게 위로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라마는 예루살렘 북쪽 약 8km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이곳은 수도 예루살렘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스라엘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유배될 때, 이스라엘인들의 집합 장소로 알려져 있다. 시대와 역사의 절망과 비극을 상징하는 도시였다.
라헬은 야곱의 둘째 아내였다. 아이를 갖지 못한 애환이 있던 여인이었다. 나중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다. 사무엘상 10장 2절은 베냐민 땅에 있는 라마, 라헬이 바로 예루살렘에서 북쪽에 위치한 곳에 묻혀 있다고 한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위해 통곡하는 어머니 라헬의 고통을 연상하면서 슬픔에 잠긴다. 결국 라헬의 슬픔이란 강대국의 침략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영적으로 타락한 지도자들, 무능하고 부패한 폭압적 정치에 의해 희생된 이스라엘의 자녀들에 대한 어머니들의 슬픔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 라헬은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성경에서 통곡의 여인으로 나타난다. (라파엘로 작품 '야곱과 라헬')>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그는 네 명의 아내와 열두 아들을 두었다. 야곱은 라헬과 라헬의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특별히 사랑했다. 편애한 것이다. 야곱은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아비로 사실상 국부와 다름없다. 그의 아내인 라헬은 국모라 할 수 있다.
예레미야는 야곱과 라헬의 자손인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라헬의 두 아들로 의인화해서 하나님의 구속 사건을 언급한다. 분단된 상태에서의 남유다는 바벨론,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략으로 패망하게 되고 외국의 머나먼 땅의 포로로 끌려간 것이다. 민족의 어머니인 라헬이 바벨론을 끌려가는 자신의 자손들을 보면서 슬피 운다고 표현했다. 라헬이 라마에서 슬피 울었다는 것은 라헬의 무덤이 있는 곳을 상징적으로 지칭한다. 그래서 슬픔으로 통곡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려서 조국으로 돌려보낸다는 메시지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16)
라마에 묻힌 라헬, 이 여인은 라마에서 통곡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어머니를 대표하고, 비극의 상징이다. 라마는 라헬의 시대부터 슬픔과 통곡의 처소가 되었다. 귀한 자식들을 잃고 슬퍼하고 통곡하며, 위로받기도 거절하고 있는 라마의 라헬에게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예언을 전하신다.
슬픔에 잠긴 자들에게 이제 통곡과 눈물을 멈추라고 한다. 그리고 네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니, 네 자녀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한다. 성경 전체를 구속사적 관점으로 보면, 이것이 바로 실존의 한계인 인간의 구원과 회복을 말함이며 복음의 메시지인 것이다. 마태가 예수의 탄생과 라헬의 슬픔과 통곡, 그 이야기를 연결하는 대목은 예수가 치유, 회복, 은혜와 축복의 사역을 하기 위해서 온 이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슬픔의 상징인 베들레헴, 이곳에서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예수는 인간과 세상의 죄로 인한 부조리한 현실, 이러한 한계 상황의 역설적 진리로 이 땅에 왔다. 인간의 모든 고통을 해결하시기 위해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예언을 이루었다.
더 이상 슬픔이 아닌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천국 백성의 소망과 그의 나라의 도래, 영혼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새로운 언약으로 왔다. 영적인 이 약속들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모든 신음하는 피조물의 회복과 구속사, 이것이 성경이다.
교회와 국가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 안에 존재한다
국가나 사회는 일반 은총의 영역이고. 교회는 특별 은총의 영역이다. 또한 더 나아가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종교 등 각각의 영역 사이에 침해할 수 없는 영역의 독립성과 고유성을 주장하는 게 '영역주권론'이다. 고유 영역의 기능을 하도록, 국가와 사회의 치안과 질서가 바르게 유지되도록 조정과 통합을 담당하는 것이 국가돠 정치 영역이다.
일반 은총이 무너지면 교회의 특별 은총도 침해받는다. 정치에는 구원이 없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앙은 교회는 국가가 상호 공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의 정치관은 근본적으로 유·무형의 하나님나라와 관련된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골 1:18). 교회의 주(主)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영광을 돌린다. 교회가 이러한 영적 원리에 의해 다스림을 받지 않거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국가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역할과 관여하는 영역이 다르다. 국가는 세속적인 영역에 관여하며 교회는 신령한 영역에 관여한다. 국가는 국민들의 안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관여하는 반면 교회는 영혼 구원, 하나님나라 확장에 관여한다.
성경에는 교회공동체를 한 지체로 표현한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26-27)
우리를 주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 삼아 서로 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이끌어 간다. 우리 모두 서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채워 간다. 우리 몸에 어느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기뻐하고 함께 영광을 누린다.
크리스천들도 지체 의식을 늘 가지고 주님의 몸인 공동체를 지켜 가고 아름답게 협력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고 돌보는 사랑의 공동체로 주님의 몸 된 사명을 함께 이루어 가야 한다. 모든 지체는 상호 의존적이며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이다. 상호 책임을 져야 하는 기능적 의미도 있다. 한 지체가 아프면 온 몸이 아프다. 당연히 머리이신 예수도 함께 아파하신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 2:18)
우리의 몸에 전체적으로 무리가 가거나 혈관이 막히면 아프고 진통 증세가 나타난다. 생명이 위험하게 된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의 몸에서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곳은 바로 '아픈 지점'이다.
지금도 바다 밑에 놓여 있는 세월호 선체의 그 밑바닥에 우리의 마음과 시선이 머물 때, 예수의 십자가 사랑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물속에 잠겨 있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 그 지점에서 모든 아픔과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십자가 안에서 고통과 기억의 연대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공의와 사랑의 예수의 마음도 그 지점에 임하시고 거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영혼이 곧 교회이다.
성경은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한다. 이 두 계명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다. 서로 연합되어 있다. 온전한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람의 사랑을 통해서 완성되며 사람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검증되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도 관심을 기울이라고 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40)
성경은 가난한 자들, 소외받은 자들에게 대한 대안을 선포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권과 경제적 양극화에 대해서 교회와 국가의 리더들을 책망한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 하느뇨.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리로다." (사 3:15)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들은 그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또는 영적 자원이 없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인에게는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사회참여의 책임을 포기할 수 없다는 관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람직한 리더는 권력의 남용으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리더십을 행사해야 하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를 정당하게 실현해야 한다.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웃음과 망각의 책>(민음사)에서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라고 기록했다. 잊힌 기억과의 투쟁이 현재와 미래를 결정한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언제든 우리에게도,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현실이다. 라틴어에서 진실(veritas)의 반대말은 거짓(falsum)이 아닌 망각(oblivio)이라고 표현한다.
정직하고 진실함은 무관심과 망각을 넘어서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이다. 기억 윤리이다. 진실한 것은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기억하는 자는 소수이다. 그래서 증인과 다수의 결집된 역량이 요구된다. 국가권력이 직접 자행하거나 간접적인 이유로 인한 결과와 그 책임, 그에 대한 집단적 망각과 피해자에 대한 기억 억압의 세월을 되살려내는 것. 결국 인간이 권력에 맞서 대항하는 행동은 과거를 망각하지 않기 위한 의미와 정당한 투쟁임을 말한다.
< 많은 기독교인들이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월호 가족을 위로하고 함께하는 자리를 이어 나가고 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구원받은 성도는 단지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선언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실제로 하나님 앞에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교회의 생명력은 여기서 나타난다. 진정한 크리스천들의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부터 나온다. 교회 공동체는 한 지체,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고 연결되고 결합되어야 한다.
"참된 은혜는 약한 경우라도, 거짓 은혜가 가장 강력할 때보다 더 강한 법이다." (윌리엄 거널)
때로 개인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국가의 중요한 시점에서 중대한 선택과 판단을 강요당한다. 또 결과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약 400만 명의 유대인과 집시들을 죽게 한 나치 실무자였다. 법정에 선 아이히만은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너의 죄는 생각하지 않은 죄",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죄"라며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정치적이고 역사적 심판인 것이다. 당시 재판을 지켜본 뉴요커 기자이자 철학자였던 한나 아렌트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아이히만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교제는 예배와 분리할 수 없다. 지체들과 관계가 깨어진 상태로는 주님을 온전히 예배할 수 없다." (R.T.켄달)
기독교는 교회 공동체는 물론이고 이 땅의 모든 영혼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별히 사회적 약자나 고통과 절망 가운데 있는 영혼들에게 위로는 최우선의 역할이자 의무이다. 성경 곳곳에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나온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롬 12:15)
로마서 12장은 슬픔에 잠긴 사람들을 위로하며, 원수를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한다. 분노와 애통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원수를 친히 갚아 주신다는 위로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심판에는 이중적인 면이 있다. 하나는 현재 성도들의 행위에 대한 심판이나 징계이고, 하나는 종말론적인 마지막 날의 최후 심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 중에도 회개의 기회와 용서의 은총을 예비해 둔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심판으로 인한 현재의 고통을 하나님이나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경우도 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 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17-19)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환난을 당할 때 편지에 위로의 말을 전했다. 본문에서 '너희'는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를 맺고 있는 성도들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고난이나 환란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역할도 아울러서 감당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후 1:4-6)
세월호 사건은 이 시대의 국가와 사회, 교회에 많은 메시지를 던져 주었다. 국가 리더십의 한계, 국가와 행정기관의 안전과 통제 문제, 자본과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선체의 변형과 부실 관리, 이단이라 규정하는 세력들의 반사회적 사업 행위, 인명 구조의 태만과 부실, 위기 시스템 관리 소홀과 생명 경시, 다양한 문제점들이 중첩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다. 진실은 역사가 심판할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이 '슬픈 기억'을 '나쁜 기억'으로 변질시키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세월호 참사를 정치적, 진영 논리로 이용하거나 해석하는 것이다. 또한 세월호 유족들의 뜻과는 다르게 그 순수성을 훼손하는 집단도 주의해야 한다. 반대나 거부감을 일으키는 세력도 포용하고 진실을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주위에 피해나 불편도 최소화해야 한다. 다만 그 슬픔과 애도의 표현하는 방식이나 문화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하는 지혜와 절제도 필요하다고 본다.
문제는 교회 공동체의 대처이다. 최근에 교회 목사들의 여러 가지 비성경적 발언들을 지켜보며, 슬픔과 상실감에 있는 분들에게 조그마한 위로라도 드리고 싶어서 글을 쓰게 되었다. 이 아픔과 슬픈 사건을 통해서 성경 해석과 신학적 사유의 영역이 확대되길 바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 교회 사역에 있어, 또 다른 아픔을 겪게 될 영혼들에게 온전한 위로와 치유, 회복과 은혜의 도구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슬픔과 모든 사건을 극복하는 치유, 회복, 생명의 복음을 이 시대에 제시하는 대전환점이 되길 바란다.
개인적인 슬픔을 표현하자면 몇 해 전에 90세가 된 아버지가 황망하게 소천하셨다. 겨울철에 감기, 폐렴 증세로 아프신 지 5일 만에 갑자기 떠나셨다. 호흡 곤란으로 중환자실에 계셔서 따뜻한 대화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임종을 지켰다. 떠나보낸 슬픔과 허탈함이 너무나도 컸다. 준비 안 된 이별의 슬픔이었다.
하물며 세월호 사건의 유가족, 어린 자녀를 둔 부모나 가족들의 애통함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 부흥은 사람들의 도구화가 아니다. 그러나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타난다면,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될 것이다.
"100명 중의 1명은 성경을 읽고, 나머지 99명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읽는다." (D.L. 무디)
황준배 / 목사·<기도와 크리스천 리더십> 저, (http://cafe.naver.com/jun7729191.cafe)
황준배 <jun77291@naver.com>
[뉴스앤조이] 2016. 04. 14.(목)
<기사 원본 보기: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29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