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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윤리자료실
작성자 : 이상원     2015-06-12 11:25
반짝이는 모든 것이 다 금은 아니다 - 배아줄기세포추출과정에 대한 성경적/윤리적 반성 - (2005. 6. 7.)

 

반짝이는 모든 것이 다 금은 아니다

- 배아줄기세포추출과정에 대한 성경적/윤리적 반성 -



이상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교수)

2005. 6. 7. 대전 카이스트교회 심포지엄 발표

발표일 : 2005. 06. 07.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사람의 체세포와 사람의 난자를 융합하여 만든 배아로부터 11종류의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실험에 성공을 거둔 H씨의 실험성공소식이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H씨의 연구팀은 타임지의 표지모델로 선정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언론의 조명을 받고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세계적인 과학자들과 국가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는다고 해서 윤리적 정당성이 자동적으로 확보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윤리적인 관점에서 배아줄기세포추출을 바라볼 때 오래된 격언 하나가 이럴 때를 위해서 준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반짝인다고 해서 다 금은 아니다.”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이 아마도 기독교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번 해도 크게 욕을 먹지는 않으리라고 봅니다. “세상나라의 신문과 하나님 나라의 신문의 톱기사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신문들과 미디어에서는 배아줄기세포추출성공이 환영받는 톱뉴스로 보도되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도 신문과 미디어가 있다면 다음과 같은 뉴스가 환영받는 톱뉴스로 보도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한국의 생명윤리관련인사들이 잉여배아실험을 허용하고 있는 한국의 생명윤리안전법에 대하여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가? H씨는 배아줄기세포추출작업이 윤리적인 문제가 전혀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지만, 저의 판단으로는 H씨의 연구작업은 윤리적 반성을 외면하고 진행해온 과학적 연구의 대표적인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H씨가 진행한 배아줄기세포추출과정에 수반되는 윤리적인 문제점은 무엇인가?

배아줄기세포추출방식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윤리적인 문제점은 줄기세포추출과정에서 배아파괴를 피해갈 수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배아줄기세포추출방식에 대한 대다수의 생명공학자들과 기독교계의 평가가 갈리는 지점이 바로 이곳입니다. 다수의 생명공학자들은 수정 후 14일째 되는 시점에, 곧 원시선이 감지되는 시점부터 독립된 인간생명체로 보아야 한다는 이론을 펴고 있고, 기독교생명윤리에서는 수정순간부터 독립된 인간생명체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만일 수정순간부터 독립된 인간생명체로 본다면 배아파괴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배아줄기세포추출과정은 인간생명체를 죽이는 심각한 비윤리적 행위가 됩니다. 배아를 인간으로 보기 시작하면 배아줄기세포추출방식을 통하여 아무리 뛰어난 난치병치료를 위한 획기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정당화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을 죽이고 얻은 결과물을 가지고 질병치료에 임하는 엽기적인 행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수정 후 14일째 되는 시점을 인간생명체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수정순간부터 인간생명체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봐야 하는가? 어떤 시점이 인간생명체가 존재하기 시작하는 순간인가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 시점 이전과 이후가 철저하게 불연속적이라야 합니다. 불연속성이라는 특징에 있어서 원시선출현시점과 수정이 이루어지는 시점을 비교하면 수정이 이루어지는 시점이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탁월합니다. 원시선이란 자궁 속에서 자라는 아기의 등뼈가 검은 선의 모습으로 감지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원시선의 가시화는 그 이전과 이후를 서로 다른 실재로 파악해야 할 만큼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척추는 14일경 이전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다가 14일경이 되었을 때 비로소 처음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수정이 이루어진 순간부터 점진적으로 자라나다가 14일 무렵에 가시화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원시선은 자궁속의 아기가 연속적으로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서 척삭이나, 신경관이나, 신경모 등이 형성되면서 보다 복잡한 구조를 갖추어가기 시작한다는 “한시적인 표지”(a temporary signpost)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원시선을 근거로 하여 이전과 이후를 불연속적으로 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시선은 점점 작아지다가 수정 후 3-4주경이 되면 아예 없어져 버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생명공학자들이 원시선설을 고집하는 것은 14일 이전의 배아를 실험대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는 과학적인 태도도 아니고, 정직하지도 못한 태도라고 판단됩니다.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두 가지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생명체가 존재하기 시작하는 시점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첫째는 신체의 구성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신체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체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세포가 분열을 하고 단백질을 생성하는 것입니다. 수정란이 형성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정자나 난자는 아무리 좋은 배양환경을 만들어 주어도 세포분열도 못하고 단백질을 생성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수정이 이루어지면 배양환경만 조성되면 그 시점부터 세포분열과 단백질생성을 하면서 자라납니다. 수정이전과 이후의 유전학적 변화도 불연속성을 뒷받침합니다. 정자와 난자가 생성될 때부터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까지 모계에서 온 염색체들과 부계에서 온 염색체들 사이에서 유전자변환과 유전자 재조합을 거치면서 유전자구성이 달라집니다. 수정이 이루어지고 나면 수정란의 염색체의 구성이 정자나 난자의 염색체구성과는 다른 구성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일단 수정란이 형성되고 나면 그 이후에는 평생 동안 염색체 구성이 유지됩니다. 유전자구성으로 볼 때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 이외에는 어떤 시점도 불연속성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독립된 인간생명체의 존재는 신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체 안에 영혼이 실재할 때 비로소 인격을 가진 생명체가 됩니다. 그러면 영혼은 어느 시점에 들어오는가? 수정 후 14일인가? 아니면 수정순간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성경적인 근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선 창세기2장7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 본문에 따르면 인간의 창조가 두 단계로 진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흙으로 사람의 신체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흙으로 만들어진 신체만으로는 아직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두 번째 단계로 생기를 흙으로 된 신체에 불어 넣으셨습니다. 생기는 영을 말합니다. 스가랴12장1절에 있는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라는 말씀은 모든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영혼을 창조하신 후에 흙으로 만들어져 있는 아담에게 넣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령이라는 말은 살아있는 인격체라는 뜻입니다. 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살아있는 한 사람의 인격적 주체로서의 생명이 시작된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인간이 독립된 인격적 주체로서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은 영혼에 신체 안에 들어올 때부터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어느 시점에 신체 안에 들어오느냐? 창세기2장7절 말씀이 이 질문에 대하여 줄 수 있는 답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의 신체가 창조된 방식과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 창조된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직접 신체를 만드셨고, 아담에게 영혼이 들어갈 때는 아담은 이미 다 자란 성인의 신체였음이 분명합니다. 이 점은 하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인류는 신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아담과 하와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우선, 아담과 하와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의 모든 인류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부모와 협력하시면서 신체의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남녀간의 생식활동과 생물학적 발생과정을 통하여 수십년간에 걸쳐서 신체가 형성됩니다. 그러면 이 긴 형성과정 중에서 영혼은 언제 신체에 들어오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아담과 하와 이후의 인류에게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 이후의 인간들의 신체 안에 언제 영혼이 들어오는가에 대하여 직접적인 답변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근거해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도 얻어낼 수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직접적인 답변을 주지는 않지만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의 입장을 정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몇 군데의 성경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시편51편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또 시편139편1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이 두 본문들을 보면 아기가 자궁에서 성장하는 과정이 다 나옵니다. 이 본문들은 자궁속의 아기의 상태를 잉태, 조직, 출생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자궁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었던 당시에 잉태라는 말을 썼을 때는 정자가 자궁 속으로 들어가 난자를 만나 자궁에 착상하는 과정 전체를 두루뭉실하게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직은 착상된 아기에게서 세포가 분화되어 각종 장기가 형성되는 발생의 과정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출생은 다 자란 태아가 출산하는 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편이 말하는 잉태, 조직, 출생은 뱃속에 있는 아기의 전 과정을 가리킵니다. 이 기간동안 다윗은 자신의 상태를 가리켜서 “나”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나”라는 표현은 살아있는 인격적 주체에게만 적용되는 표현입니다. 살아있는 인격적 주체라 함은 곧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잉태 이후 출산에 이르기까지 자궁 속에 있는 생명체가 영혼을 가진 인격적 주체인 “나”가 되려면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에는 영혼이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시편에 나타난 이와 같은 생각을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본문은 누가복음에 있는 두 곳의 본문들입니다. 세례요한의 출생과정을 보도하고 있는 누가복음1장41,4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누가복음은 당대의 의사였던 누가가 기록한 복음인데, 누가 의사는 뱃속에 있는 태아를 가리켜서 “아이”라고 호칭합니다. 아이라는 말도 역시 살아있는 인격적 주체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아기 예수님의 출생기록을 보도하고 있는 누가복음1장46절과 47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마리아는 태중에 있는 아기 예수님을 “주님”으로, “내 구주 하나님”으로 호칭하였습니다. 만일 뱃속에 있는 태아가 살아있는 인격적 주체가 아니라 마리아의 신체에 속한 세포나 장기 가운데 하나라면 마리아가 자기의 세포나 장기를 향하여 주님이라고 부르고 구주 하나님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마리아는 정신병자가 되고 맙니다. 로마 가톨릭교에서 성모로까지 높임을 받고 있는 마리아가 정신병자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이상의 성경본문들에 대한 해석에 근거하여 생각해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혼은 수정란이 형성되는 바로 그 시점에 인간의 신체 안에 들어온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신체의 구성상으로 볼 때나 영혼이 신체에 들어오는 시점으로 볼 때나 수정순간이 인간생명체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배아줄기세포추출은 인간생명체를 죽이는 방법을 통하여 난치병치료를 시도하는 행위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행동과 난치병 치료를 향한 먼 여정의 발걸음 하나를 앞으로 내디딘다는 행동을 천칭에 올려놓고 무게를 달았을 때 후자는 결코 전자의 무게를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생명윤리의 판단입니다. 그것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비윤리적 행위의 전형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마10:26;막8:36)이 이 판단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줍니다. 한 사람의 목숨이 천하 곧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 보다 더 무거운 것이라면, 난치병치료를 향한 아직 확정되지 않은 가능성이라는 가치가 사람의 목숨의 가치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또한 배아줄기세포추출행위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는 마태복음7장12절 말씀에 나타난 기독교윤리의 대강령 가운데 하나인 황금률을 범하는 행동입니다. 예를 들어서 H씨도 배아의 단계를 거쳐서 인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H씨가 배아상태에 있을 때 어느 생명공학자가 “이 배아는 인간으로 볼 수 없으니까 할구분할하여 줄기세포나 추출하자”라고 한다면 H씨는 허용하겠느냐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배아상태에 있을 때는 그 배아는 파괴해서는 안되고 다른 사람이 배아상태에 있을 때는 파괴해도 된다는 발상은 황금률을 정면으로 어기는 비윤리적 행위입니다.


저는 배아줄기세포추출을 시도하는 생명공학자들에게서 마르크스주의의 망령을 발견합니다. 20세기 초반에 등장하기 시작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완전한 평등사회라는 유토피아적인 목표를 현실 속에서 실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 목표는 평화적이고 윤리적인 방법으로는 실현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목표실현을 포기하거나 수정하든지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데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목표를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는 일종의 정신병적인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엄청난 인명을 살해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은 물론 세계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을 처절한 비극 속에 몰아넣었습니다. 이와 같은 광적인 폭력행사 때문에 20세기 초부터 100년에 이르는 긴 기간동안 세계인류가 당한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일이 이제 생명공학자들에 의하여 21세기를 넘어서는 문턱에서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난치병의 완전한 정복이라는 불확실하고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미시적 차원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배아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배아줄기세포추출은 수많은 배아들의 무덤 위에서 피어나는 꽃입니다. 앞으로 계속되는 실험에서 얼마나 더 많은 배아들이 생명공학자들의 손에 희생당하게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시작된 지 100년이 지났을 때 마르크스주의가 인류에게 얼마나 심각한 고통을 안겨 주었는가를 비로소 알게 된 것처럼, 아마도 100년이 지나 22세기 문턱을 넘을 때가 되면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행했는지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배아줄기세포추출은 배아조작을 피해갈 수가 없는데, 배아의 파괴 내지는 손상이 뒤따르기 마련인 배아조작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동이며, 하나님의 창조에 결함이 있어서 인간이 그 결함을 보완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판단보다는 인간의 판단이 더 우월하다는 영적인 교만의 표현이기 때문에 중단되어야 합니다.

배아실험은 세포내의 DNA를 조작하는 것이며, 이는 곳 인간의 신체를 조작하는 것인데, 인간의 신체도 하나님의 형상인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1:27).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은 서로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두 개의 동의어입니다. 이 본문은 타락하기 전의 인간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잘 읽어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이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영혼과 신체를 포함하는 전인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신체를 포함한 전인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타락한 이후의 인간을 묘사하고 있는 창세기9장6절을 보면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도 역시 전인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 두 구절을 종합할 때 타락 이전이나 타락 이후나 인간의 신체는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신체를 부당한 방법으로 훼손시키는 행위는 곧 하나님의 형상을 모독하는 행위가 됩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타락의 영향이 DNA에까지도 미쳐서 DNA가 왜곡되고 병드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생명공학기술을 통하여 왜곡되고 병든 DNA를 치유하려는 시도는 치유의 부작용이 배아파괴로 연결되거나 심각한 부작용이 없다는 가정 하에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겠으나, 왜곡되고 병든 DNA가 아닌 정상적인 DNA를 유전자조작을 통하여 교체함으로써 더 나은 인간과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는 우생학적인 시도는 하나님의 창조솜씨 보다는 인간의 솜씨가 우월하다는 영적인 교만의 소치입니다.


다음으로 배아줄기세포추출에 수반되는 배아파괴는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정의의 원리에 배치되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합니다.

정의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정의의 원리는 이사야서40장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이 본문은 그대로 누가복음3장5절에 인용됩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산과 골짜기의 비유에서 산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부유한 자, 권력을 가진 자, 재능이 있는 자, 건강한 자를 통칭합니다. 골짜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골짜기는 가난한 자, 권력이 없는 자, 재능이 있는 자, 병든 자를 통칭합니다. 사회적 약자가 이 안에 포괄되어 있는데, 배아는 사회적 약자들 가운데 가장 밑바닥에 속해 있습니다. 배아에게는 자기 스스로 자기 생명을 지킬 힘이 전혀 없으며, 자기의 자율적 의사를 표현할 능력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산에게 자기 흙을 좀 내어 놓으라고 산의 희생을 요청하시며, 산이 희생하여 내어 놓은 흙을 가지고 골짜기를 메워서 골짜기를 높임으로써 산과 골짜기가 큰 갈등이 없이 지내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와 같은 정신은 나무의 대조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겔17:24).


이와 같은 정의의 원리를 실현에 옮기기 위하여 하나님이 채택하시는 전략은 사회적 약자에게 편애적인 관심과 배려를 베푸시고 또한 그런 배려를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건강하고 능력이 있는 자녀와 병들고 장애를 안고 있고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약한 자녀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부모는 두 자녀를 다 사랑합니다. 그러나 한 자녀는 산과 같은 높은 위치에서 잘 살고, 다른 한 자녀는 골짜기와 같은 질곡에서 비참한 삶을 사는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때 부모가 취하는 전략이 무엇입니까? 건강하고 능력이 있는 자녀에게 상당한 정도의 관심이 소홀히 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병들고 장애를 안고 있는 자녀에게 집중적으로 사랑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래야 어느 정도라도 균형이 잡힌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99마리의 건강한 양이 우리에 있고 한 마리가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어떤 정책을 취하십니까? 99마리를 그대로 놓아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들판을 뒤지고 다니십니다.

현대사회는 어떻게 합니까? 한 마리를 찾느라고 99마리를 방치하는 비효율적인 행위를 공리주의에 젖어 있는 현대사회는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한 마리를 무시해 버리고 99마리를 데리고 앞으로 갑니다. 생명공학이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되는 엄청난 공리적 혜택 앞에서 배아의 생명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향하신 길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라는 점을!


모세의 율법 안에는 이스라엘의 신정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실정법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실정법들은 전체적인 방향이 철저하게 이스라엘 사회 안에 있는 고아, 과부, 나그네, 이방인들, 전쟁포로들, 가난한 자들에 가해질 수 있는 억압을 최소화시키고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이와 같은 입법의 방향은 99마리의 양을 우리에 놓아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입법에 잘 반영된 것이요, 법철학의 터전이 바르게 놓인 것입니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 법조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배아복제를 전면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한국의 생명윤리안전법에 대한 위헌소송을 제기했는데, 이 위헌소송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소송으로서 기독교윤리의 역사상 매우 의미 있는 조치로 기록에 남게 될 것이며, 미래의 기독법조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의 한 사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선례가 될 것입니다. 이 소송은 99마리의 양을 우리에 두시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 마음을 생명윤리와 법의 영역에서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표현입니다. 이 소송 안에는 자기 의사를 표명할 수 있는 자율적 의사표명권 조차도 행사할 수 없는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연약한 인간을 향한 깊은 애정의 마음이 담겨 있으며, 이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곧 이 땅을 정의로운 사회로 변혁시키기 위한 최전선에서의 투쟁이라는 소명의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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