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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윤리자료실
작성자 : 이상원     2015-06-12 11:29
경고의 표지판 - 배아실험의 성경적 문제점 - (2005. 4. 25.)

 

경고의 표지판

- 배아실험의 성경적 문제점 -



이상원(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이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세미나]난치병 치료와 줄기세포 연구

(2005. 4. 25. 사랑의교회 생명윤리선교회 주최) 주제발표

발표일 : 2005. 04. 25.

 


저는 등산을 매우 좋아합니다. 산을 자주 가다 보니까 산길을 걷는 도중에 위험한 순간을 만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약 열흘 전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지역 근교에 있는 관악산을 오를 기회가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산을 오를 때는 평소에 제가 수십 번 오르던 익숙한 길로 올랐습니다. 그러나 하산할 때는 그날따라 호기심이 발동해서 한번도 가보지 않은 다른 길로 내려가 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길은 어느 등산객이 매우 험하다고 해서 권하지 않던 길이었습니다. 몇 개의 바위산을 넘어 내려가는 길이었고, 서너 개의 바위산을 넘어선 곳에 등산객들이 눈에 띄어서 그 길로 가도 되겠다 싶어서 바위산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바위산을 한 개를 넘고 다른 하나의 바위산을 넘어가려고 했을 때 저는 그만 더 이상 가서는 안 될 곳에 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려고 하던 길 밑에는 수백 미터 낭떠러지였고 길이 없었습니다. 건너편 바위산에 있는 등산객들을 자세히 보니 모두 자일을 전문산악인들이었습니다. 시간은 4시가 넘어서 저물어가고 힘은 달리기 시작하고 멋모르고 타고 내려온 돌아가는 길도 예상보다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겁이 덜컥 났습니다. 잘못하면 조난당하겠구나, 발을 잘못 디디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을 침착하게 가지려고 애를 쓰면서 간신히 다시 바위산을 되짚어 안전한 갈림길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표지판이 하나 서 있었습니다. “이 길은 정해진 등산로가 아니니 들어가지 마시요.” 그리고는 표지판 맞은편에 비록 멀리 돌아가는 길이긴 하지만 안전한 등산로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 표지를 주목하지 않고 길을 들어섰던 것입니다. 비록 멀리 돌아가는 길로 접어든다 할지라도 정해진 등산로를 따라서 안전하게 하산했어야 했습니다. 빠른 길로 가려고 시도하다가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배아와 관련된 실험에 몰두하고 있는 생명공학자들의 행동은 정해진 등산로가 아니니 가서는 안 된다는 경고판을 무시하고 빠른 실험결과를 얻기 위하여 수백 미터의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는 길로 무지막지하게 들어선 어리석은 등산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호기심,”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는 명제들은 분명히 과학자들의 창의적인 연구를 자극해 왔던 것은 사실이고 이와 같은 창의적인 연구의 혜택을 인류가 많이 누려 왔던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명제들에는 혜택과 더불어 위험의 여지가 언제나 내포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며, 특히 이 위험이 인간의 생명에 결정적인 위협을 가져오거나 인류사회의 운명을 비참한 결말로 끌고 가리라는 사실이 도덕적 상상력을 통하여 책임 있게 예측할 수 있을 경우에는 이 명제는 견제되어야 하며, 멀리 돌아가는 안전한 길이 있다면 그 길로 우회해야만 합니다. 안전하게 우회하는 길이 있는데도 생명을 담보해야만 하는 길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기 이를 데 없는 행동입니다.


배아실험을 감행하는 생명공학자들의 행위는 과학적 논리나 철학적 논리만으로도 약점을 안고 있지만 기독교인들과 교회의 입장에서 이 행위에 대하여 예리하고 철저한 비판을 지속성 있게 제시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 행위가 하나님이 세우신 경고판을 무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경고판을 무시하고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생길에 하나님이 세우신 경고의 표시판을 율법, 명령, 규례, 법도 등이라는 다양한 용어로써 표현하고 있는데, 이 경고판을 무시하고 그 길로 들어서는 자의 운명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명기28장15절에서 19절의 말씀을 한번 읽어 봅시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경고의 표시판을 무시하고 걸어가는 자는 저주의 멧세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신명기28잘 한 장에서만도 저주의 내용이 68절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배아실험은 무엇이며, 배아실험은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경고의 표시판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촉발하는 행동인가? 먼저 배아실험의 논리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이 실험이 지니는 성경적인 문제점을 세 가지 관점에서 제시하고자 합니다.


배아란 수정란이 만들어진 순간부터 뇌기능이 감지되기 시작하는 시점인 수태후 약 3개월까지의 자궁속의 아기의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최근에는 생명윤리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이 시기의 인간생명체를 배아라고 부르는 호칭 자체도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원래 배아라는 명칭 자체가 아기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 생명체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명칭인데, 자궁속의 생명체도 인간이라면 왜 아기라는 좋은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식물이나 다른 동물의 경우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학명인 배아라는 용어를 사용하느냐라는 것이 이분들의 지적이고, 이런 지적은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사실상 배아도 아기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배아실험이란 수정란이 16개의 세포로 분열될 때까지의 배아를 대상으로 실험을 실시하는 것을 뜻합니다. 배아실험은 두 가지 형태로 진행되는데 하나는 배아치료이고 다른 하나는 배아복제입니다. 배아치료는 수정란이나 배아에게서 세포를 추출한 뒤에 세포 안에 있는 유전자를 검사해 보고, 이 유전자로부터 장차 질병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거나 이상이 있는 유전자가 발견되면 이 유전자를 제한효소라는 물질을 이용하여 잘라내고 이 유전자가 있던 자리에 이상이 없는 건강한 유전자를 끼워 넣어서 아예 질병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아단계에서부터 차단시켜 버리려는 시도를 뜻합니다. 유전자조작기술이 이때 이용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배아에게서 나이가 40살쯤 되었을 때 발현되기로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음이 발견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배아가 자라기 전에 가능하면 수정란단계에 있을 때 아예 유전자조작기술을 통하여 유전자를 교체해 버리면 질병의 뿌리를 아예 뽑아 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방식으로 병들고 문제가 있는 유전자를 발생초기에 아예 교체해 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이와 같은 배아치료 개념은 현실화된 것은 아니고 현 단계에서는 대부분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것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론상으로 가능한 것을 현실화시키고자 시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배아치료는 기술적인 면만 보더라도 많은 위험부담이 뒤따르는 치료술임이 인식되고 있습니다. 우선 병든 유전자를 빼내고 새로운 유전자를 주입시키는 과정에서 배아에 치명적인 손상이 찾아 올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을 대상으로 하여 300번 가량 실시한 실험에서 성공적으로 유전자교체가 이루어진 경우는 5번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295번은 배아가 파괴되었든지 아니면 배아가 기형으로 나타난 경우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전자의 교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교환된 유전자를 가진 DNA가 장기적으로 어떤 부작용을 일으킬는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도 중요한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습니다. 배아단계에서 유전자치료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질병은 근원적으로 해결되겠지만, 유전자치료에 부작용이 생기게 되면 이 부작용은 평생 지속되게 되며, 대물림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배아치료가 기술적으로 가능해진다면 배아치료는 십중팔구 우생학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습니다. 유전정보가 모두 알려지게 되고, 또한 유전자교체가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마치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예뻐지기 위하여 코도 뜯어 고치고 턱도 뜯어 고치고 가슴도 뜯어 고치기 위하여 외과수술기법을 이용하는 것처럼, 전인적인 성형의 목적을 위하여 유전자조작술을 이용하려 들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입니다. 얼굴형을 예쁘게 결정해 주는 유전자, 머리가 좋아지게 만드는 유전자, 키가 크게 만드는 유전자 등과 같은 우성유전자들로써 기존의 열성유전자들을 대체하여 맞춤형 아기를 생산해 내려는 시도가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인위적인 기술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생명이 창조되는 과정에 깊이 개입됩니다.

또 하나의 배아실험은 배아복제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배아복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하나는 생식세포배아복제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체세포배아복제방식입니다. 생식세포배아복제는 시험관에서 인공수정방식을 통하여 만든 수정란을 복제에 이용하는 방식이고, 체세포배아복제는 체세포를 떼어내어 체세포의 핵과 핵을 제거한 탈핵난자를 전기충격으로 결합시켜서 만든 수정란을 이용하는 방식입니다. 수정란이 약 8세포기까지 배양되었을 때 배아를 할구분할합니다. 할구분할된 하나하나의 세포들을 다시 탈핵난자와 결합시켜 또 다른 수정란을 만듭니다. 이렇게 해서 생성된 수정란을 다시 배양액에 집어넣어 자라게 하다가 일정한 크기로 자라났을 때 자궁에 착상시키고 자궁에 착상된 배아가 성공적으로 자라나 출산하게 되면 복제동물 또는 복제아기가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배아복제를 시도하는 이유는 복제아기를 얻는데 있다기보다는 난치병치료나 대체장기생성의 원료가 되는 줄기세포를 얻고자 함에 있습니다. 줄기세포는 다른 세포와는 다른 독특한 특성을 가진 세포로 알려져 있다. 첫째로, 줄기세포는 어떤 장기로도 분화될 수 있는 만능성을 가진 세포입니다. 둘째로, 줄기세포는 극히 신선한 세포입니다. 따라서 이 세포를 가지고 병든 인간의 장기를 대체할 수 있는 장기들을 생산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으며, 난치병치료의 열쇠가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생명공학자들이 사활을 걸고 배아복제를 통하여 줄기세포를 얻어내려고 하고 있고 줄기세포연구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의학이 획기적으로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난치성 질환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희귀한 질환이었던 암이 이제는 우리 국민의 1/4이상이 암으로 고통 받고 있을 만큼 보편화되었습니다. 고혈압, 당뇨병, 비만, 치매와 같은 질환들도 증가하고 있으며, 기타 난치성 희귀질환도 결코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질환들을 치료하는 방법을 발견하기 위하여 생명공학자들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정당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난치의 질환의 치료가 아무리 급박한 과제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넘어가지 말라는 경계의 표지를 무시하고 인간의 생명이 처참하게 짓밟히는 낭떠러지로 인류사회를 몰아넣으면서 난치병치료를 시도해서는 안 됩니다. 난치병 치료 보다 중요한 가치는 인간의 생명의 가치입니다. 난치병치료를 위하여 인간의 생명이 희생되는 길이라면 그 길이 아무리 지름길이라도 안전한 먼 우회로를 채택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줄기세포가 정 필요하다면 줄기세포추출이 몇 십 배 힘들다 하더라도 윤리적인 문제가 없는 성체줄기세포추출방식을 이용한다든지, 전통적인 의학연구에 집중적인 예산을 투입하여 질병치료법을 꾸준히 연구하는 등의 우회로를 택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사회의 존망이 문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생명공학의 연구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경계의 표지판의 내용은 무엇인가? 필자는 세 가지를 그 내용으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배아실험은 독립된 주체로서 존중받아야 할 인간의 생명을 죽이는 희생을 통해서라야만 진행될 수 있는 실험이므로 중단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관건은 배아는 과연 인간인가 하는 것입니다. 배아가 인간이라면 배아실험은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범하는 행위가 됩니다. 배아를 인간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생명의 시작점이 어디냐 하는 문제와 같은 문제입니다. 언제부터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는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 시점 이전과 이후가 어느 정도로 불연속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시점 이전은 독립된 인간생명체로 볼 수가 없는 반면에 이 시점 이후는 독립된 인간생명체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명확하다면 이 시점은 생명이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생명은 언제 시작되는가?

종주의라는 학설에서는 정상적인 성인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점이 인간으로 볼 수 있는 시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기억한다든지, 도덕적 인식능력이라든지, 미래를 기획하는 능력, 호기심과 같은 특징들이 나타나는 시점이 곧 인간으로 볼 수 있는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특징들이 나타나는 시점을 정확하게 관찰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각 사람마다 이런 특징들이 나타나는 시점이 각각 다르다는 점은 이 주장의 모호성을 보여줍니다. 만일 이 주장을 채택하게 되면 유아들이나 치매에 걸린 노인들, 혼수상태에 있는 환자들은 당연히 인간의 범주로부터 제외되는 심각한 문제가 노정됩니다.


뇌파설은 임신한지 2-3개월 무렵이 되어서 뇌파가 감지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뇌파설에서는 뇌파의 감지는 뇌가 활동을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그러면 뇌파가 감지되는 시점이 과연 뇌가 활동을 시작하는 시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뇌파가 감지되는 시점은 이미 미약하게나마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오던 뇌의 활동이 한층 강화되었을 때 감지되는 것일 뿐입니다. 미약하게 활동하던 뇌가 좀더 강하게 활동하기 시작한다고 해서 그 전과 후가 결정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뇌파설도 인간생명의 시작점으로 타당성을 부여받기가 어렵습니다.


생명공학연구가 진행되면서 사실상 종주의나 뇌파설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종주의나 뇌파설보다 인간생명의 시작점을 훨씬 더 앞당긴 원시선설이라는 새로운 입장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원시선이란 자궁 속에서 자라는 아기의 등뼈가 굳어져서 검은 선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척추선은 수정이 이루어진 후 약14일경이 되면 나타나는 것으로 관찰되었습니다. 수정 후 14일경이 되어야 비로소 인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원시선설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원시선의 출현이 과연 그 이전과 이후를 결정적으로 다르게 보아야 할 만큼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등뼈는 14일경 이전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다가 14일경이 되었을 때 비로소 처음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수정이 이루어진 순간에 이미 등뼈에 관련된 유전자가 형성되어 있고, 이 유전자의 신호에 의하여 점진적으로 자라나다가 14일경이 되면 이전에 비하여 조금 더 단단해지는 것뿐입니다. 원시선을 가지고는 그 이전과 이후를 본질적으로 다르게 봐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시선은 점점 작아지다가 잉태후 3-4주경이 되면 아예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원시선은 자궁속의 아기가 연속적으로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서 척삭(notochord)이나, 신경관(neural tube)이나, 신경모(neural crest) 등이 형성되면서 보다 복잡한 구조를 갖추어가기 시작한다는 “한시적인 표지”(a temporary signpost)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생물학적으로 볼 때 하나의 상식처럼 되어 있는 것인데, 생명공학자들이 이 이론에 매달리는 이유는 14일 이전의 자궁속의 아기를 실험과 조작대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절실한 욕구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생명의 시작점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는 시점은 인간의 영혼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2장7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 본문에 따르면 인간의 창조가 두 단계로 진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흙으로 사람의 신체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흙으로 만들어진 신체만으로는 아직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두 번째 단계로 생기를 흙으로 된 신체에 불어 넣으셨습니다. 생기는 영을 말합니다.


그러면 생기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말이 어디에 있느냐? 스가랴서12장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이 본문에 있는 사람은 창세기 2장에서 말하는 사람처럼 인간의 신체를 가리키고, 심령은 창세기2장의 생기를 가리킵니다. 생기 곧 심령이 어떻게 생겼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셨다, 곧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혼을 창조하신 후에 흙으로 만들어져 있는 아담에게 넣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령이라는 말은 살아있는 인격체라는 뜻입니다. 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살아있는 한 사람의 인격적 주체로서의 생명이 시작된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명은 창조된 영혼이 신체 안에 들어올 때 시작됩니다. 물론 창세기2장에서 하나님이 영혼을 신체에 넣어 주실 때 영혼을 창조하셔서 한참 보관하고 계시다가 넣어 주신다고 보기는 어렵고 영혼을 창조하시면서 동시에 넣어 주시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에 들어맞습니다. 생기는 바람이라는 뜻도 있는데, 바람은 불어오는 그 순간에 만들어집니다. 바람을 어디에 가두어 놓았다가 내보내는 일은 없습니다. 불어오는 순간에 만들어지는 바람처럼 인간의 영혼도 한 순간에 창조되었고, 창조와 동시에 신체 안에 불어넣어졌습니다. 스가랴서12장1절 말씀은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영혼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된 영혼이 신체 안에 들어올 때 살아있는 인격적 생명체가 된다는 것이 창세기2장7절과 스가랴서12장1절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정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혼이 어느 시점에 신체 안에 들어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2장7절 말씀이 이 질문에 대하여 줄 수 있는 답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의 신체가 창조된 방식과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 창조된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직접 신체를 만드셨고, 아담에게 영혼이 들어갈 때는 아담은 이미 다 자란 성인의 신체였음이 분명합니다. 이 점은 하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인류는 신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아담과 하와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우선, 아담과 하와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지 않으십니다. 이들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생식과정을 통하여 신체가 형성됩니다. 다음으로는 아담과 하와 이후의 모든 인간들의 신체는 점진적인 생물학적 발생과정을 거치면서 수십 년의 기간동안에 형성됩니다. 영혼은 한 순간에 창조되는데, 신체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형성된다면 영혼이 신체에 들어오는 시점이 어느 시점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아담과 하와 이후의 인류에게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에 등장하는 인간들도 아담과 하와처럼 단번에 완전한 성인신체로 태어난다면 문제는 간단하지만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 이후의 인간들의 신체 안에 언제 영혼이 들어왔는가에 대하여 직접적인 답변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근거해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도 얻어낼 수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직접적인 답변을 주지 않고 있지만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의 입장을 정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몇 군데의 성경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시편51편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또 시편139편1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이 두 본문들을 보면 아기가 자궁에서 성장하는 과정이 다 나옵니다. 이 본문을 보면 자궁속의 아기의 상태를 잉태, 조직, 출생으로 말하고 있는데, 자궁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었던 당시에 잉태라는 말을 썼을 때는 정자가 자궁 속으로 들어가 난자를 만나 자궁에 착상하는 과정 전체를 두리뭉실하게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직은 착상된 아기에게서 세포가 분화되어 각종 장기가 형성되는 발생의 과정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출생은 다 자란 태아가 출산하는 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편이 말하는 잉태, 조직, 출생은 뱃속에 있는 아기의 전 과정을 가리킵니다. 이 기간동안 다윗은 자신의 상태를 가리켜서 “나”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나”라는 표현은 살아있는 인격적 주체에게만 적용되는 표현입니다. 살아있는 인격적 주체라 함은 곧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특히 우리가 유의해야 할 부분은 잉태되는 시점에 이미 뱃속의 생명체는 이미 “나”가 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현대의학적으로 말한다면 잉태의 시점 이전에 곧, 수정란이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살아있는 인격적 주체가 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정말 현대의학이나 인간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정말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영혼을 신체에 불어 넣으시기 위해서는 영혼을 먼저 창조하셔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한순간에 집어넣으신다 하더라도 순서는 영혼창조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집어넣는 순서가 따라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혼이 존재하기 시작하면 신체가 부여되든 되지 않든 이미 살아있는 인격적 주체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육체적인 죽음을 죽으면 영혼은 신체와 분리되어 천국에 가지 않습니까? 이때 신체가 없어도 영혼이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인격적 주체가 아닙니까? 따라서 이제 어떤 결론이 나옵니까? “잉태되기 직전에 이미 영혼이 창조되어서 “나”라는 인격적 주체로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잉태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착상의 순간까지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잉태의 과정의 전 기간동안 뱃속의 생명체가 영혼을 가진 인격적 주체인 “나”가 되려면 적어도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에는 영혼이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시편에 나타난 이와 같은 생각을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본문은 누가복음에 있는 두 곳의 본문들입니다. 세례요한의 출생과정을 보도하고 있는 누가복음1장41,4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누가복음은 당대의 의사였던 누가가 기록한 복음인데, 누가 의사는 뱃속에 있는 태아를 가리켜서 “아이”라고 호칭합니다. 아이라는 말도 역시 살아있는 인격적 주체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아기 예수님의 출생기록을 보도하고 있는 누가복음1장46절과 47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마리아는 태중에 있는 아기 예수님을 “주님”으로, “내 구주 하나님”으로 호칭하였습니다. 만일 뱃속에 있는 태아가 살아있는 인격적 주체가 아니라 마리아의 신체에 속한 세포나 장기 가운데 하나라면 마리아가 자기의 세포나 장기를 향하여 주님이라고 부르고 구주 하나님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마리아는 정신병자가 되고 맙니다. 로마 카톨릭교에서 성모로까지 높임을 받고 있는 마리아가 정신병자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이상의 성경본문들에 대한 해석에 근거하여 생각해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혼은 수정란이 형성되는 바로 그 시점에 인간의 신체 안에 들어온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시작을 수정란 시점부터 보아야 한다는 사실은 성경적으로만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나 유전학적으로도 수정란의 시점을 살아있는 인간의 생명의 시작점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는 사실이 충분히 뒷받침됩니다. 유전학적으로 수정란 시점을 생명의 시작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는 너무나도 자명한 것인데, 생명공학자들이 너무나도 자명한 이 원리를 애써서 외면하려 드는 것은 이 원리를 받아들일 경우에 자신들의 연구가 크게 제한받고 또한 자신들에게 돌아올 경제적 이득도 엄청나게 통제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수정란 형성시점은 중요한 두 가지 중요한 특징에 있어서 그 이전과 이후를 생물학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로 볼 만한 충분한 근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지적할 점은 살아있는 생명체의 특징은 세포가 분열을 하고 단백질을 생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정란이 형성되기 이전의 정자와 난자는 아무리 좋은 배양환경을 마련해 주어도 영양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따라서 당연히 자기복제를 하지 못하고 단백질을 생산해내지도 못합니다.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수명만큼 존재하다가 죽어 버립니다. 그러나 일단 수정이 되고 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수정이 된 후에는 영양분만 지속적으로 공급이 되면 그 영양분을 빨아들여서 스스로 복제도 하고 단백질도 합성해 냅니다. 생물학적으로 생명체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갖추게 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수정란 이전과 이후는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유전학적인 변화입니다. 정자나 난자가 형성되는 시점부터 시작해서 수정란이 만들어지는 시점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격변이 이루어집니다. 이 격변은 몇 단계를 거치면서 일어납니다. 인간의 세포는 체세포와 생식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포들은 끊임없이 세포분열을 합니다. 체세포는 46개의 염색체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고 모세포와 똑같은 모양으로 분열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생식세포는 보다 복잡한 분열과정을 거칩니다. 생식세포는 2번에 걸쳐서 분열이 이루어집니다. 염색체가 92개로 증가하여 두개의 세포로 분열되기 전에 모계에서 온 23개의 염색체와 부계에서 온 23개의 염색체 일부가 서로 유전자를 교환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유전자가 교환되면 비로소 한 개의 세포가 46개의 염색체를 가진 두개의 세포로 분열됩니다. 이것이 일차분열인데, 일차분열이 이루어졌을 때 이미 분열된 세포는 모세포와는 유전자구성이 달라져 있습니다. 분열된 세포가 2차로 분열합니다. 이때 분열은 감수분열의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감수분열이라는 것은 46개의 염색체가 23개의 염색체로 그 숫자가 반으로 줄어드는 것을 뜻합니다. 원래 염색체는 모계로부터 온 염색체 하나와 부계로부터 온 염색체 하나가 짝을 이룬 형태로 23쌍 곧 46개의 염색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감수분열시에 짝 하나가 떨어져 나가 버리고 외짝이 됩니다. 그래서 외짝의 23개의 염색체구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짝이 나누어질 때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자, 이제 우리가 여기서 한번 나누어지면 앞으로는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 작별파티를 한번 하자. 작별파티를 할 때 우리 모두 자유롭게 짝을 한번 바꾸어 교제해 보자. 그리고 나서 우리 영원히 작별을 고하자.” 그리고는 모계에서 온 23개의 염색체와 부계에서 온 23개의 염색체 사이에서 자리교환이 이루어집니다. 이때 새롭게 교환될 수 있는 자리교환의 가짓수는 2의 23승 = 840만 가지입니다. 840만 가지의 새로운 염색체 배열방식 가운데 하나가 선택됩니다. 엄청난 변화입니다. 그렇게 해서 염색체 배열이 새롭게 이루어지면 23개의 외짝 염색체를 지닌 반쪽자리 세포로 분열합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의 세포가 4개로 분열되면서 분열이 끝납니다. 이렇게 해서 23개의 염색체를 가진 반쪽짜리 세포가 남자의 경우에는 정자가 되고, 여자의 경우에는 그 가운데 하나가 난자가 됩니다. 그런데 변화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자와 난자가 수정이 되면 정자의 23개 염색체와 난자의 23개의 염색체가 통합되어서 다시 2개씩 짝을 이룬 23쌍 46개의 염색체구조가 복원됩니다. 그런데 이때 정자의 23개의 염색체와 난자의 23개의 염색체가 만나서 다시 짝을 맺기 전에 다시 한번 새롭게 짝을 찾고 자리를 배열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때도 역시 2의 23승 = 840만 가지의 새로운 배열방식 가운데 하나가 선택됩니다. 이렇게 해서 세 번에 걸친 유전자구조변화를 겪게 됩니다. 따라서 수정란은 1차분열 직전의 유전자교환에 곱하기 정자와 난자로 감수분열할 때의 840만 가지 곱하기 정자와 난자가 수정란으로 통합될 때의 840만 가지의 새로운 구성상의 변화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합니다. 이 수치는 천문학적인 수치입니다. 이런 천문학적인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가 우연히 선택될 가능성은 제로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설명하지 않으면 어떤 다른 방식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천문학적인 새로운 배열의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인류가 태어나도 모두 다 지문이 다르고 개성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독립된 인격체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소용돌이를 겪고 나서 만들어진 수정란은 생식세포와는 유전자구성이 다른 세포로 거듭납니다. 수정란은 부모의 염색체의 요소들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연속성이 있지만 그 구성과 배열에 있어서는 뚜렷하게 불연속성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정란시에 한번 형성된 염색체배열구조는 외부의 자극이 없는 한 죽는 날까지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됩니다. 외부의 자극이 있어도 극히 작은 한 부분이 병들어 왜곡되거나 고장이 생기는 것 정도의 변화밖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염색체 구성상으로 볼 때 한 인간의 일생에서 획기적인 불연속적 격변은 수정란형성 시점 밖에는 없고 나머지 모든 시간은 연속성을 유지합니다. 따라서 생물학적으로나 유전학적으로 수정란의 형성은 유일하게 그 이전과 이후를 질적으로 다르게 볼 수 있는 유일한 시점입니다.


수정란 형성 이후에 전개되는 한 인간의 일생에서 겪는 가장 큰 변화는 사춘기 때 신체의 성징이 변화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것처럼 사춘기의 변화를 겪고 난 후에 우리 스스로가 ”사춘기 이전에는 인간이 아니었다가 사춘기 이후에는 인간이 되었음을 느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춘기의 변화를 겪기 전이나 후나 우리의 인식 속에 “나”라는 인격적 주체가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인식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사춘기의 변화를 겪기 전의 나는 곧 사춘기의 변화를 겪은 이후의 나와 동일한 나로 우리는 인식합니다. 사춘기의 변화가 이 정도라면 그 밖에는 어떤 계기도 그 이전과 이후를 다른 나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이상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경적인 관점에서나 유전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수정란형성시점 이외에 어떤 다른 시점을 인간생명의 시작점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합니다. 따라서 배아의 파괴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배아실험은 명백히 살인행위가 됩니다.

 

두 번째로, 배아실험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동이며, 하나님의 창조에 결함이 있어서 인간이 그 결함을 보완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판단보다는 인간의 판단이 더 우월하다는 영적인 교만의 표현이기 때문에 중단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배아실험은 세포내의 DNA를 조작하는 것이며, 이는 곳 인간의 생물학적 신체를 조작하는 것인데, 과연 인간의 신체도 하나님의 형상인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1:27).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은 서로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두 개의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성은 두 차원으로 나누어서 이해하는 것이 정설입니다. 하나는 좁은 의미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 의로움, 거룩함을 뜻한다. 골로새서3장10절에서는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는 말씀이 있고, 에베소서4장24절을 보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두 본문을 종합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었다는 말은 곧 잃어 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것을 의미하는데, 이 하나님의 형상은 곧 지식, 진리, 의, 거룩 등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좁은 의미의 형상은 인간이 타락했을 때 상실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인데, 이 형상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상실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이 영원히 존재하는 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은 몸과 연합되어 있고 몸에 신축성 있게 적응하지만 그 존재가 몸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몸이 해체되어 버린 뒤에도 영은 존재합니다. 영은 이성, 양심, 의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을 가집니다. 영은 육체를 통하여 자기를 표현합니다. 육체는 영이 자기를 표현하기에 적합할 만큼 하나님의 형상의 광채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육체도 하나님의 형상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좌소는 인간의 영혼 속 곧, 정신과 마음, 혹은 영혼과 영혼의 능력들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를 포함하여 인간 속의 어느 곳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따라서 창세기9장6절은 사람의 몸을 죽이는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로 해석되었습니다. 창세기1장16절과 27절 그리고 창세기9장6절의 말씀을 주의 깊게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는 곧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무엇인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포함하는 전인을 말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영혼과 육체를 포함하는 전인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신체는 당연히 하나님의 형상이며, 인간의 신체를 부당한 방법으로 훼손시키는 행위는 곧 하나님의 형상을 모독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왜곡되고 병든 DNA가 아닌 정상적인 DNA를 유전자조작을 통하여 교체함으로써 더 나은 인간과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창조솜씨 보다는 인간의 솜씨가 우월하다는 영적인 교만의 소치입니다.


셋째로, 배아실험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정의의 원리에 배치되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합니다. 정의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정의의 원리는 이사야서40장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이 본문은 그대로 누가복음3장5절에 인용됩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산과 골짜기의 비유에서 산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부유한 자, 권력을 가진 자, 재능이 있는 자, 건강한 자를 통칭합니다. 골짜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골짜기는 가난한 자, 권력이 없는 자, 재능이 있는 자, 병든 자를 통칭합니다. 사회적 약자가 이 안에 포괄되어 있는데, 배아는 사회적 약자들 가운데 가장 밑바닥에 속해 있습니다. 배아에게는 자기 스스로 자기 생명을 지킬 힘이 전혀 없으며, 자기의 자율적 의사를 표현할 능력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산에게 자기 흙을 좀 내어 놓으라고 산의 희생을 요청하시며, 산이 희생하여 내어 놓은 흙을 가지고 골짜기를 메워서 골짜기를 높임으로써 산과 골짜기가 큰 갈등이 없이 지내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와 같은 정신은 나무의 대조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겔17:24).

이와 같은 정의의 원리를 실현에 옮기기 위하여 하나님이 채택하시는 전략은 사회적 약자에게 편애적인 관심과 배려를 베푸시고 또한 그런 배려를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건강하고 능력이 있는 자녀와 병들고 장애를 안고 있고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약한 자녀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부모는 두 자녀를 다 사랑합니다. 그러나 한 자녀는 산과 같은 높은 위치에서 잘 살고, 다른 한 자녀는 골짜기와 같은 질곡에서 비참한 삶을 사는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때 부모가 취하는 전략이 무엇입니까? 건강하고 능력이 있는 자녀에게 상당한 정도의 관심이 소홀히 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병들고 장애를 안고 있는 자녀에게 집중적으로 사랑을 쏟아 붓습니다. 그래야 어느 정도라도 균형이 잡힌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99마리의 건강한 양이 우리에 있고 한 마리가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어떤 정책을 취하십니까? 99마리를 그대로 놓아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들판을 뒤지고 다니십니다. 현대사회는 어떻게 합니까? 한 마리를 찾느라고 99마리를 방치하는 비효율적인 행위를 공리주의에 젖어 있는 현대사회는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한 마리를 무시해 버리고 99마리를 데리고 앞으로 갑니다. 생명공학이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되는 엄청난 공리적 혜택 앞에서 배아의 생명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향하신 길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라는 점을! 모세의 율법 안에는 이스라엘의 신정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실정법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실정법들은 전체적인 방향이 철저하게 이스라엘 사회 안에 있는 고아, 과부, 나그네, 이방인들, 전쟁포로들, 가난한 자들에 가해질 수 있는 억압을 최소화시키고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이와 같은 입법의 방향은 99마리의 양을 우리에 놓아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입법에 잘 반영된 것이요, 법철학의 터전이 바르게 놓인 것입니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 법조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배아복제를 전면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한국의 생명윤리안전법에 대한 위헌소송을 제기했는데, 이 위헌소송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소송으로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의미 있는 조치로 기록에 남게 될 것이며, 미래의 기독법조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의 한 사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선례가 될 것입니다. 이 소송은 99마리의 양을 우리에 두시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고 생명윤리와 법의 영역에서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표현입니다. 이 소송 안에는 자기 의사를 표명할 수 있는 자율적 의사표명권조차도 행사할 수 없는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연약한 인간을 향한 깊은 애정의 마음이 담겨 있으며, 이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곧 이 땅을 정의로운 사회로 변혁시키기 위한 최전선에서의 투쟁이라는 소명의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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