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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윤리자료실
작성자 : 이상원     2015-06-12 11:56
기독교생명윤리란 무엇인가? (2002. 9. 30.)

 

기독교생명윤리란 무엇인가?


이상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교수)

발표일 : 2002. 09. 30.

 

들어가는 말

윤리학은 인간의 행위의 옳고 그름 또는 정당성 여부에 대하여 반성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생명윤리란 무엇인가? 생명윤리는 생명을 다루는 인간의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반성하는 작업이다. 생명을 다루는 인간의 행위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병들어 있거나 신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인간을 치료하여 회복시키며, 치료가 불가능할 때는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노력하며, 환자들을 간호하며, 더 나아가서는 질병의 예방과 퇴치를 위하여 행해지는 사회적 차원에서의 노력, 예컨대, 위생관리/방역과 면역/환경규칙제정 등이 모두 생명윤리의 반성의 영역에 포함된다. 이 행위들은 대체로 의료인들에 의하여 수행된다. 여기서 두가지 중요한 질문이 제기되는데, 하나는 인간의 생명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생명윤리의 특성이 드러나게 된다.



1. 인간의 생명

생명윤리에서 말하는 인간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독교는 인간의 생명에 대하여 어떤 이해를 제공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창세기2장7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 구절을 분석해 보자.

a. 하나님은 먼저 흙으로 인간의 신체를 지으셨다. 그러나 흙으로 신체를 지으신 것만으로는 아직 인간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b. 하나님은 흙으로 된 신체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여기서 말하는 생기는 니쉬마트라는 히브리어인데, 이 말은 루아흐라는 히브리어와 동의어로서 “영”으로 보통 번역된다. 영은 몸을 통제하는 생명과 행동의 원리로 작용하는 영적 요소로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선악을 변별하고 도덕을 수련하는 등의 기능을 주도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은 재료가 흙으로 구성되었다는 의미에서 땅에서 기원한 육체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영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육체와 영의 기원이 다르기 때문에,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영도 따라서 죽는 것이 아니다(마10:28). 전도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죽으면 육체는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지만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12:7).

c. 신체에 영이 들어가자 비로소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생령이란 “네페쉬 하야”라는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데, “하야”는 “살아 있는”이라는 뜻이고 “네페쉬”는 “혼”이라는 뜻이다. 성경에서는 “영”과 “혼”이 교호적으로 사용된다. 혼은 인간 안에 있는 행위의 주체로서, 식욕이나 기억이나 상상등을 발생하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이것은 영과 구분된 실체로서의 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이 지닌 기능의 한 단면을 강조하는 것 뿐이다. “생령”이라는 어귀 곧 “살아 있는 혼”은 전인을 포괄하는 단어다. “생령” 곧 “살아있는 혼”은 신체까지도 포함하며 영까지도 포함하는 전인(全人)을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육체와 영은 그 기원과 내용이 다르다는 의미에서 독립된 두 실체이지만, 영이 일단 육체 안에 들어온 이후에는 생령의 형태로, 곧, 영혼과 육체가 나누어질 수 없을만큼 긴밀한 상호작용과 상관관계를 맺으면서 전인으로, 하나의 통일된 인격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육체의 건강은 어느 정도 영혼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며, 영혼의 건강은 육체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 육체가 병들면 어느 정도 영혼도 영향을 받아 병들게 되고, 영혼이 병들면 육체도 영향을 받아 병들게 된다. 영혼과 육체는 신비로운 연합 안에서 하나의 통일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신비로운 통일체로 존재하던 인간은 육체적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 흙속에 묻혀 버리지만 영혼은 다시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종말의 날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신령한 새 몸으로 다시 신비롭게 연합할 때까지.



그러면 이처럼 영혼과 육체가 신비로운 연합 안에 있는 통일된 인격체로서의 인간에 있어서 의료행위가 치료의 대상으로 다룰 수 있는 부분은 어느 부분인가?

a. 의료행위의 가장 중요한 대상은 전인과의 긴밀한 연관성 안에 있는 육체다.

b. 인간의 육체와 영이 만나는 지점에서 형성되는 인간의 정신적 기능들도 의료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른바 정신의학이 이 영역을 다룬다.

c.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능력으로 그 존재여부나 건강성 여부를 손대거나 판단할 수 없는 차원을 가진다. 의학은 영혼의 깊은 차원의 문제까지 다룰 수는 없다. 이 점을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속사람과 겉사람의 구분을 통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바울은 인간을 속사람(롬7:22)과 겉사람(고후4:16)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속사람은 실재하는 인간의 자아의 중심을 이루는 구성요소이면서도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깊은 차원이다. 프로이드가 말한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의 영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겉사람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고 어느 정도 통제도 할 수 있는 세계로서, 이성, 의식, 구체적인 행동과 삶의 영역을 말한다. 프로이드가 말한 의식의 세계가 여기에 상응한다. 의학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은 겉사람의 영역이다. 의학은 속사람의 영역은 다룰 수 없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것은 속사람의 영역에서다. 속사람을 다룰 수 있는 것은 복음 뿐이다.



2. 판단기준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인간의 행동의 옳고 그름 여부에 대하여 판단을 하려면 판단의 기준 곧 규범이 필요하다. 그러면 기독교생명윤리에서는 판단기준인 규범을 어디서 얻는가? 기독교생명윤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구원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 있어서도 유일무이하고 정확무오한 지침을 제공한다는 믿음 안에서 성경말씀을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채용한다. 기독교생명윤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세계관의 지평 안에서 모든 문제들을 판단하며,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윤리적 준칙들을 직접적인 판단기준으로 채용하여 문제들을 판단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상황이 등장했고, 과학과 의료기술 등의 획기적인 발달이 이루어짐에 따라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판단할 때 성경이 제시한 규범들을 새로운 언어로 해석하고 보완해 줄 수 있는 일반적인 규범들 곧 기독교세계관 밖에서 등장한 일반생명윤리적 입장들이 제시한 준칙들이 필요하게 된다. 이 준칙들은 이성적 사유나, 임상적 결과나, 사회적 합의나, 기타 의료인들의 경험 등으로부터 도출해낸 것들이다. 그런데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사유하고 판단하는 무의식적인 습성이 있음을 고려할 때 인간이 만들어낸 이 준칙들은 어느 정도 왜곡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준칙들 안에는 자기를 합리화(self-rationalizing)하는 특성이 나타난다. 따라서 기독교생명의료윤리에서는 이 준칙들을 무비판적으로 채용할 수만은 없다. 따라서 기독교생명윤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세계관의 지평과 일반적인 도덕법의 빛 안에서 기독교세계관 밖에서 등장한 일반생명윤리적 입장들이 제시한 준칙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3. 성경이 제시하는 세계관

성경이 제시하는 세계관은 어거스틴에게서 확립된 후 개신교 신학전통이 줄곧 견지해 온 “창조-타락-구속”의 틀로 나타난다. 이 세계관의 중심에는 인간에 대한 해석이 중심을 이룬다.


(1) 창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창조되었다(창세기1:27).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은 서로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두 개의 동의어다. 하나님의 형상성은 두 차원으로 나누어서 이해하는 것이 정설이다. 하나는 좁은 의미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 의로움, 거룩함을 뜻한다(골3:10;엡4:24). 좁은 의미의 형상은 인간이 타락했을 때 상실되었다. 다른 하나는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인데, 이 형상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상실되지 않았다. 이 형상은 인간이 영성을 지니고 있고, 이 점에 있어서 영이신 하나님이 투영되어 있다. 영의 특징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은 몸과 연합되어 있고 몸에 신축성있게 적응하지만 그 존재가 몸에 의존하지 않는다. 몸이 해체되어 버린 뒤에도 영은 존재한다. 영은 이성, 양심, 의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을 갖는다. 영은 육체를 통하여 자기를 표현한다. 육체는 영이 자기를 표현하기에 적합할만큼 하나님의 형상의 광채로 장식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육체도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좌소는 인간의 영혼 속 곧, 정신과 마음, 혹은 영혼과 영혼의 능력들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육체를 포함하여 인간 속의 어느 곳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다. 따라서 창세기9장6절은 사람의 몸을 죽이는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로 해석되었다. 이와같은 기준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배아복제, 낙태, 인공수정, 안락사 문제들을 판단할 때 유념해야 한다. 의료인들은 인간은 생물학적인 또는 의학적인 연구를 통하여 다 파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이와같은 연구로서는 손댈 수 없는 영적 생명을 가진 존재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는 인식을 가지고 인간을 대해야 한다. 인간을 단지 의료기술적 조작의 대상으로 보고자 하는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


(2) 타락.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범죄했고, 범죄한 결과로서 인간에게는 고통과 죽음이 찾아 왔다. 남자에게는 노동의 고통이 찾아 왔으며, 여자에게는 출산의 고통이 찾아 왔고, 인류사회 전체에는 갖가지 질병이 찾아 왔으며, 마침내는 고통의 절정인 육체적 죽음이 찾아 왔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고통, 질병, 죽음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한편으로 이것들은 극복되어야 할 것들이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범죄한 이후의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이 마련하신 은혜의 질서이기도 하다. 극복되어야 할 경우와 하나님의 은혜의 질서로 받아 들여야 할 경우를 구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정신과 육체를 병들게 할 만큼 노동의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절제해야 하지만, 얼굴에 땀흘리는 수고를 하면서 생계에 필요한 물질을 얻으면서 사는 것이 의학적으로 볼 때 오히려 건강에 유익하다. 아이를 낳을 때 제왕절개로 출산하는 것 보다는 특별한 질병이나 의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상황이 아닌 한 출산의 고통을 다 겪으면서 아이를 낳는 것이 여인에게 있어서나 태아에게 있어서나 건강에 훨씬 더 유익하다. 많은 질병들이 극복되어야 하고 질병에 뒤따르는 고통이 완화되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질병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조심하게 하고 자기 몸을 돌보게 하고 육체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고 더 성숙한 정신을 갖게 한다.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선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열매들 중에서 고통의 과정을 통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의료인들은 가능한 한 죽음으로 귀결되는 질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지만, 죽음은 결코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영역으로의 삶의 이동이며, 현세에서의 삶보다 월등히 더 나은 삶으로 들어가는 복된 관문이라는 사실을 죽어가는 자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3) 구속. 죄로 인하여 찾아온 고통과 죽음은 궁극적으로 부활과 영생의 전망 안에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며, 이 전망 안에서 우리는 현세 안에서의 고통과 죽음의 현실을 받아 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부활과 영생의 전망 안에서 고통과 죽음을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두신 질서 안에서 일반은총의 수단들을 통하여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 수단들을 허락하셨다. 고통을 보내신 하나님이 이제는 고통에 대항하여 싸우게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과 고난과 죽음을 완전히 겪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고통을 경감시키는 수단들을 거부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인간이 죽는 것을 보시고 통분히 여기셨으며(요한복음11:38),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꾸짖으셨다(누가복음4:39).



4. 성경이 제시하는 윤리적인 규범들


(1) 동기. 의료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의료행위의 동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의료행위는 병자들이나 신체적으로 결손된 자들을 치료하고 간호함으로써 이들의 생명을 보전하고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그렇다면 이들을 치료하고 간호하도록 동기부여를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기독교윤리학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곧 그 동기가 된다고 답변한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긍휼은 인간을 향한 긍휼의 원천이 된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는 마땅히 인간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 성부 하나님의 뜻이요, 바쁘고 피곤한 사역 일정 중에도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병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모두 치유해 주신 치유자 그리스도(Christus medicus)의 뜻이며,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 주고 계속적인 간호를 부탁했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가르쳐주는 뜻이며(누가복음10:25-37), 병든 자를 돌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돌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뜻이다(마태복음25:31-46).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가 계약관계로 형성되어 있는 오늘날의 의료계의 현실에서 의료행위는 환자의 권리와 의사의 의무라는 외적인 차원에서 인식되고 있는데, 내적인 긍휼이 결여된 상태에서 권리가 행사되고 의무가 이행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의료행위는 기독교의료인의 바른 의료행위가 될 수 없다. 기독교의료인의 의료행위는 반드시 인술(仁術)의 지평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


(2) 성경에서 도출된 규범들. 기독의료인들이 의료행위의 바른 동기를 갖추었다면 이제는 성경이 제시하는 규범들에 주목해야 한다. 사랑의 대계명(마태복음22:37-40), 황금률(마태복음7:12), 그리고 십계명(출애굽기20:1-17)은 기독교윤리 뿐만 아니라 기독교생명의료윤리의 반성작업에서도 보편적인 규범으로서 기능한다.

a. 사랑의 계명은 철학적 의료윤리문헌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 이유는 기독교적인 아가페로서의 사랑은 일반 철학적 윤리학에서는 여분의(supererogatory) 규범으로서 비상(非常)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철학적 윤리학에서는 여분의 비상한 것이 기독교윤리학에서는 평범한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기독교윤리학은 플레처의 상황윤리에서처럼 사랑 이외에는 어떤 타율적인 명령도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배격하고 사랑은 계명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사랑은 계명들을 필요로 한다(로마서13:8이하). 사랑은 누룩이요, 계명들은 반죽이며, 사랑은 콤파스요, 계명들은 도화지다. 사랑 그 자체가 이미 계명이다(요한복음15:10; 요한일서5:3; 요한2서6절).

b. 사랑의 대계명과 더불어 율법의 요약으로 선언되고 있는(마태복음7:12) 황금률은 인간을 이해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입장에 직접 서셨던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현된 규범으로서 타인의 입장에 서보는 훈련을 요구한다. 곧, 의료시술자는 고통을 받는 환자의 입장에 서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c. 십계명 가운데 특별히 의료윤리에 관련되는 계명은 6계명(살인하지 말지니라)이다. 생명을 주시고 거두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의료행위는 치료/고통의 완화/간호를 주업무로 하는 것으로서, 삶을 종결시키는 작업이 의료행위의 업무일 수는 없다.

(3) 문자주의의 위험과 성경규례들의 의학적 탁월성. 생명의료문제들에 대한 판단의 규범을 성경으로부터 도출하고자 할 때 앞에서 제시한 보편적인 윤리적 규범들 이외에 다른 본문들을 규범으로 채용하고자 할 때는 문맥과 정황을 무시한 문자주의적 인용을 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예컨대 여호와의 증인들은 레위기7:26,27에 있는 “피를 먹지 말라”는 규정과 사도행전15:20,29에 있는 “피를 멀리하라”는 명령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피를 먹는 행위나 수혈하는 행위는 모두 피를 섭취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한 행위라고 보고 수혈을 거부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이 명령과 현대의료계에서 시행되는 수혈행위의 각기 다른 정황을 무시한 결과다. 현대의료계에서 행하는 수혈행위는 죽음 앞에 직면한 생명을 구하기 위한 의학적 치료행위인 반면에 레위기나 사도행전은 식사관습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며, 피를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은 생명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수혈”행위는 성경기록당시에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했다. 성경은 의료행위의 기술적인 모범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므로, 성경의 어느 한 본문을 문자적으로 인용하여 의료기술시행을 위한 어떤 모범으로 삼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어떤 규례들이 비의학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어떤 규례들은 당시의 의료기술이나 의료문화의 수준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조차 없을만큼 탁월한 지혜를 담고 있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자.


a. 1840년 경 유럽의학계의 중심지였던 비엔나의 Algemeine krankenhaus에서 임산부 6명 가운데 1명이 죽어 나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원인을 조사하던 한 젊은 의사는 의사들이 손을 씻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는 의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당시 의사와 학생들은 죽은 임산부를 검시실로 들어가 검시한 후에 손을 씻지도 않고 또 고무장갑을 끼지도 않고 산과병동의 환자들에게 골반실험을 하기 위하여 들어갔다. 이 젊은 의사는 진료전에 손을 씻는 규칙을 제정하고 시행해 보았더니 규칙이 제정되고 난 이후 곧 임산부 치사율이 1/42로 감소되었고 다음달에는 1/84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 젊은 의사는 이 일 때문에 동료의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정신병원에 들어가 지내다가 죽었다. 그런데 민수기19:7,8 이하 전장을 읽어 보면 “제사장은 제물을 죽여서 불사른 후에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에 들어가라”는 명령이 나온다. 그것도 대야에 손을 씻고 흐르는 물에 손을 씻으며 빨래하여 말린 옷들을 갈아입고 대인관계에 임하도록 했다. 동물을 죽이는 과정에서 많은 균이 제사장의 손과 옷에 묻었다는 점, 그리고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에 씻어야 오물이나 균이 제대로 씻겨 내려간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이 조치는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위생상태를 유지하는데 매우 적절한 의료적 조치였음을 알 수 있다.

b. 19세기의 외과수술은 손씻는 일을 소홀히 했다. 수술대 위에 올라가면 의사들은 코트를 벗고 바로 도구를 꺼내어 수술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균이 우글거리는 학생들의 손으로 균이 없는 복부의 살을 찔러 보게 했다. 그 결과 포도상구균 때문에 외과수술의 치사율이 높았다. 1876년 손과 의료기구를 씻는 방법이 도입되면서 치사율이 극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손씻는 문제는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결되었다.

c.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인체의 배설물을 포장안된 길거리에 내다 버렸다. 이 배설물에 파리들이 들끓어 알을 깜으로 말미암아 콜레라, 이질, 장질부사와 같은 장성 질병을 퍼뜨렸고, 쥐들이 번성하여 흑사병이 돌았다. 그런데 신명기23:12-13을 읽어 보면 “너희 진 밖에 변소를 베풀고 그리로 나가되 너희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통할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이켜 그 배설물을 덮을찌니”라는 말씀이 있다. 변소를 진 밖에 베풀고 배설물을 땅 속에 묻음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위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유럽인들이 이 명령을 읽고 주의했다면 많은 질병의 발병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d. 졸도, 심장마비, 협심증, 괴저병, 신장병 등의 원인이 되는 동맥경화증은 콜레스테롤의 증가에 기인하는 것인데, 콜레스테롤은 동물성 지방질, 체중의 과다한 비대, 끽연(니코틴이 콜레스테롤을 형성한다), 육정적 감정과 긴장 등에서 형성된다. 증가된 콜레스테롤 종기가 혈관벽을 형성하여 동맥의 흐름을 방해하면 동맥경화증이 된다. 이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레위기3:17과 7:22-24에서 하나님이 “기름을 먹지 말라”고 명령을 주신 것은 의학적으로도 탁월한 조치였음을 알 수 있다.

e. 창세기17장10-12절에 보면 남자가 태어나면 8일만에 할례를 받으라는 명령이 나온다. 그런데 이 명령은 의학상식적으로 볼 때 아주 탁월한 명령임을 알 수 있다. 뉴욕밸브병원의 조사에 의하면 유대인여자들에게는 자궁경부암이 거의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보스톤의 862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1954년의 조사결과 비유태계 여성은 유태계 여성 보다 8.5배 자궁암 환자가 많았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유태인 남자들이 할례를 받은데 기인한다. 남성성기의 제거되지 않은 표피에는 암을 일으키는 스메그마, 바치루스균을 포함한 유독성 균이 활발히 번식한다. 이로 인하여 성교시에 균들이 자궁경부에 잔존하게 된다.

신생아에게 할례를 행할 때에 생후2-5일 사이에는 출혈에 민감하고, 이때의 출혈은 확대되기 쉬우며, 두뇌에 손상을 주고, 쇼크와 빈혈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피를 응고시키는 비타민 k가 이 기간 동안에는 정상치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응혈소가 생후3일경에는 정상인의 33%였다가 8일째가 되면 정상인의 110%로 높아진다. 그 후에 이 숫치는 다시 감소한다. 그러므로 난지 8일째가 할례를 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기간이 된다.

f. 문둥병은 중세시대 유럽 최대의 재난으로서, 6,7세기, 13-14세기에 무서운 위세를 떨쳤다. 흑사병은 14세기에 네사람 중 한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갈만큼 위력적이었다. 그런데 당시 의사들은 이 병의 전염을 예방하는데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교회가 “병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서 살찌니라”는 레위기13:46 말씀에 따라서 사회에서 격리시켜 이 병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레위기13장은 위생법의 최초의 전형이었다.

g. 이 밖에도 바른 성생활을 강력하게 권고하는 본문들(잠5:1-12; 고전10:8;6:18; 살전4:3-8)에 순종할 때 성병을 근원적으로 예방할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보복심이나 분개심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때 많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 독성탄저, 졸도, 심장마비 등이 복수로 가득차 있는 마음에서 초래될 수 있으며, 결장염은 다른 사람과 싸울 때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며, 근심이나 혐오감이 뇌속의 혈액량을 증가시켜 두통, 구토증을 초래한다.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힌 정서상의 불안이 갑상선의 분비를 촉진시켜 독성갑상선종을 일으키고 난소의 분비작용에 영향을 주어 월경중단, 월경기 통증, 두통등을 초래한다. 부신이 과다하게 분비되면 고혈압, 관절염, 신장병, 동맥경화를 유발한다. 환자의 96%가 분개심 때문에 병이 든 자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는 출애굽기15장26절의 말씀의 위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5. 일반 윤리학이 제시하는 규범들

이미 말한 것처럼 기독교생명윤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세계관과 규범들만을 가지고는 작업을 할 수 없다. 성경은 인간이 구원받는 길이 무엇이며,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떤 도덕적 원리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충분한 지식을 제공해 주지만,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와는 다른 시대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기술적인 지침까지도 일일이 제시하는 책은 아니다. 이런 지침들을 얻으려면 기독교세계관 밖에서 등장한 일반생명윤리적 입장들이 제시한 준칙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준칙들은 성경적 세계관과 성경이 제시하는 규범들의 빛 안에서 비판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여덟가지 일반생명윤리의 입장들이 제시하는 윤리적 준칙들을 소개하고, 이 준칙들이 어떤 점에서 기독교생명윤리연구에 기여할 수가 있으며, 또한 어떤 점에서 비판되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1) 공리주의. 공리주의에서는 사회의 구성원들의 최대다수에게 최대의 행복 또는 쾌락을 가져오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바른 행위로 간주된다. 이 입장은 예컨대 의료재원(財源)을 배당하는 의료정책에 있어서 많은 재원을 요구하지만 소수의 사람밖에는 혜택을 받을 수 없는 특수한 의료행위에 재원을 배당할 것인가, 아니면 다수의 많은 환자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평범한 의료행위에 재원을 배당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고가의 장비와 의술이 요구되는 질병이 치료가능해지면서 의료정의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오늘날 이 규범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규범의 무차별적인 적용은 다른 차원에서 의료정의에 해를 가할 수 있다. 곧 총량적 쾌락을 산출하는 행위가 가장 도덕적인 행위로 간주될 경우에, 불치의 질병을 가진 환자에 대한 치료와 간호, 노인에 대한 치료가 소홀히 될 수밖에 없으며, 오랜 세월 간호해도 결과가 신통하게 나타나지 않는 환자의 경우에 안락사가 더 적합한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 곧 공리주의의 원리가 의료정의를 깨뜨리는 방향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그 역으로도 사용될 수가 있으므로 이 원리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 여부를 판단할 수가 없다. 곧 어떤 경우에 이 원리를 적용해야 하고 또 어떤 경우에 적용을 해서는 안 되는가를 결정해줄 상위의 규범이 필요한 것이다.


(2) 의무론. 칸트와 계약사상가들에 의하여 대표되는 이 이론은 공리주의와 반대의 길을 걷는다. 의무론은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1. 윤리적으로 바른 행위는 결과나 내용을 고려하지 않고 다만 어떤 준칙에 따라서 행동하는 행위다. 물론 이 준칙은 일반적인 입법이 되었을 때도 보편적으로 타당한 준칙이어야 한다. “너의 행동을 지배하는 규칙이 일반적인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동하라.” 2.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간주된다. 3. 의무의 내용은 하나님이나 사회와 같은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고 오직 행위자의 이성에 의해서만 주어지며, 여기서 자기이익도 배제되지만 정서나 감정도 배제된다.

칸트의 입법의 원리는 의사로 하여금 의료행위는 도덕적 규범의 지도를 받아야 하며, 의사자신의 진료가 환자의 입장에 섰을 때도 타당한 진료인가를 묻도록 요청한다는 점에서 의료윤리의 규범적 원리로서 타당하다. 그런데 칸트의 계약론에서 인간관계가 법적 관계로 규정된다는 점은 비판적 수용이 필요하다.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가 법적 관계로 환원되면 정서와 감정이 자리잡을 여지가 없어지며, 따라서 의료행위의 비인간화를 극복하기 어렵다. 의료행위는 정치적인 또는 상업적인 계약행위로 환원될 수 없다. 환자는 절대적으로 약한 자로서 법적 관계 이상의 따뜻한 정서적 돌봄을 요청한다.


(3) 자연법 이론. 이 이론은 로마 카톨릭교회가 견지하고 있는 이론으로서, 인간의 삶의 구조 곧,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묘사로부터 책임적 행동을 위한 규준(prescription)을 도출한다. 하나님은 만물 안에 영원한 법(lex aeterna)을 두셨는 바, 이 법은 만물의 목적으로서 하나의 가능태(potentia)로 주어져 있다. 이 가능태로부터 현실태가 발전하게 되는데, 가능태를 현실화하는 행위는 선한 행위로 간주된다. 인간은 자연 또는 본성의 법(lex naturae)안에서 영원한 법에 참여하며, 이때 본성 가운데 있는 이성이 목적 곧 영원한 법을 인식한다. 여기서 인간의 이성은 인간 자신의 자의적인 판단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적에 주목하게 되므로 하나님이 주신 자연스러운 삶의 목적에 배치되는 행위 예컨대, 피임이라든가, 성전환수술, 의료기술의 자의적 남용 등이 견제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입장에 대해서 자연적인 것은 항상 옳은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예컨대 로마 카톨릭에서는 자연적인 주기법을 이용하는 것을 제외한 사실상의 모든 형태의 피임을 반대하는데, 이와같은 입장이 과연 정당한가는 의문이다. 자연적 주기법을 이용할 때, 자연적인 주기에 성행위를 피하는 것은 인위적인 행위가 아닌가? 자연적 주기법이 정확도가 매우 낮다는 점은 어떻게 고려되어야 하는가? 의도적으로 성행위를 피하는 것과 수정란형성이 이루어지기 전에 피임하는 것이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오늘날과 같은 인구과밀의 시대에 한 가족이 경제적 책임도 질 수 없는 상태에서 7-8명씩의 자녀를 키우는 것이 바람직한가? 등등의 문제들이 제기된다.


(4)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의무론과 입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의 자율적 이성에 의하여 도출된 규범이 정당성을 부여받으려면 인류보편의 입법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제한을 가함으로써 인류를 위한 윤리를 지향하고 있는데 반하여, 자유주의에서는 각 개인의 자율적 권리를 중요시한다. 여기서는 각 개인이 원하는 내용이 중시된다. 이 이론에서는 각 개인이 원하는 바를 획득할 권리는 천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낙태권이나 폐경 후의 인공수정을 통한 임신도 당당한 개인의 권리로 주장된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의료윤리의 차원에서 후견주의적인 의사의 의료행위에 대한 환자의 요구권(claim right)을 확립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적어도 두가지 중요한 약점을 드러낸다. 1. 개인의 요구권이 극단적으로 강조될 경우에 개인의 요구권보다 더 상위에 위치한 규범 곧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시키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태아의 생명이 임산부의 생명보다 중시되고, 배아의 생명보다 환자의 치료가 더 중요시될 수 있다. 2. 이 입장은 강자와 건강한 자를 위한 윤리적 입장으로 전락할 수 있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서는 자기의사를 명시적으로 표명할 수 있는 자들을 전제하고 모든 논의를 전개하기 마련인데, 이 과정에서 자기의사를 표명할 수가 없는 의료적 약자들의 입장이 일방적으로 소외될 수 있다.


(5) 공동체주의.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것인데, 덕은 사회적 관습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보면서, 공동체적 가치, 사회적 목적, 사회가 규정한 덕을 행하는 것이 바른 윤리적인 행위로 판단된다. 공동체주의적 의료윤리에서는 개인의 건강이라는 것도 사회생활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사회전체의 공리적 이익이 한 개인의 건강을 희생시켜도 좋을 만큼 중요한 것이며, 건강한 자들의 사회구성을 위하여 건강이 약한 자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6) 돌봄의 윤리(care ethics, zorg-ethiek). 돌봄의 윤리는 주로 여성의료윤리학자들에 의하여 형성된 이론으로서,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를 칸트적인 법적 계약관계로 보는 입장에 반발하면서, 환자와 의사 사이의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강조하는 입장을 말한다. 인간은 연약하고 가사적(可死的)이며, 타인에 의존하여 생존해야 하는 존재라는 점을 고려할 때 도덕이란 법과 규칙의 문제가 아니라 사려 깊은 돌봄과 타인에 대한 책임의 문제로 정의된다. 만스코트(H.A.M. Manschot)에 의하면 계산하지 않고 재지 않는 태도가 인간의 행복과 삶의 기쁨의 원천으로서, 자유로운 마음으로 간호가 주어질 때 간호는 더 포근하고 친밀해진다고 한다. 오늘날의 계약윤리는 베푸는 윤리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된다.

돌봄의 윤리는 정서적 측면이 윤리학에서 중요시해야 할 요인임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에 공헌이 있다. 윤리학은 철학적 의무론의 전통의 주장과는 달리 정서적 측면을 배제하지 않는다. 불의한 현실을 보고 감정적으로 분노하는 것은 윤리적 반성의 계기가 되며, 정서적인 긍휼의 마음은 모든 도덕행위자들의 마음바탕에 깔려 있어야 하는 중요한 요소다. 뿐만 아니라 돌봄의 윤리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틀 안에서 권리논쟁에 참여하기 어려운 사람들 곧, 장애자들, 기타 의료치료에 의존하는 자들을 변호하기에 적합한 윤리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서적 양상이 돌봄의 전부를 포괄할 수가 없다. 예컨대 의료재원의 배당의 문제에 있어서는 감정보다는 엄격한 정의의 원리가 우선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규칙과 원리가 뒷받침되지 않은 정서나 감정은 맹목으로 흐를 수가 있다.


(7) 결의론. 결의론은 한가지 사례에서 행해진 결정을 비슷한 다른 사례들에 적용하는 태도를 말한다. 여기서 전통적인 결의론과 현대의 결의론이 입장을 달리한다. 전자는 윤리적 원리를 특별한 사례에 적용하는 입장을 취하고, 후자는 사례로부터 윤리적 원리를 끌어내는 입장을 취한다. 모든 윤리학은 사례에 관계한다는 점에서 윤리학은 결의론을 의미 있게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러나 과연 사례로부터 윤리적 규범의 도출이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사례가 스스로 윤리적 판단을 산출해낸다는 것은 자연주의적 오류 곧, 존재-당위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사례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표준은 사례로부터 올 수 없고 외부로부터 사례를 향하여 주어질 뿐이다. 사례로부터 옳은 규범의 도출도 가능하지만 나쁜 규범의 도출도 가능하다.

예컨대, 안락사가 오늘날처럼 넓어진 이면에는 결의론의 단계적 발전이 중요한 기여를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임종시에 환자의 요구가 있을 때에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신체적 고통이 있는 경우에 안락사가 허용되더니, 다음에는 심리학적 고통의 경우에도 허용되었고, 다음에는 임종시가 아닌 경우에도 허용되었으며, 나중에는 본인의 의사를 묻지 않은 채 정신착란증세를 보이는 환자에게까지 확대적용되기에 이르렀다(미끄러운 경사면의 논증, the slippery slope argument).


(8) 네 원리의 윤리. 이 윤리학은 현대의 철학적 의료윤리학계에서 가장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뷰챔프(T.L. Beauchamp)와 칠드레스(J.F. Childress)에 의하여 주장되고 있는 이론으로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도덕적 원리들이라고 간주되는 자율성, 무해성, 인애, 정의를 규범으로 하여 윤리적 반성을 전개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규범들은 “반증이 없는 한 인정되는 규범들”(prima facie normen)로 이용된다. 여기서 뷰챔프와 칠드레스는 존 롤즈(John Rawls)가 말한 반성적 균형(reflective equilibrium)의 방법론을 채용한다. 반성적 균형이란 규범과 현실 사이의 역학관계를 표현하는 용어다. 먼저 충분히 “숙고된 판단”(considered judgment)을 통하여 어떤 이론(규범)을 구성한다. 그리고 특별한 반증이 제시되지 않는 한 이 규범이 우선적으로 고려되고 이 규범에 따를 의무가 주어진다. 그러나 현실로부터 이 이론을 유지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는 이 규범의 적용은 일단 유보되고 그 규범과 예외적인 현실을 포함하는 “숙고된 판단”과정이 다시 시작되어 새로운 규범의 형성을 도모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는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완전에 가까운 형태의 규범의 도출을 향해 나아간다.

뷰챔프/칠드레스가 말하는 네가지 원리들이 윤리학에서 각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규범들 가운데 이 네가지 원리들을 선정한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뷰챔프/칠드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 원리들이 직관을 통하여 일반적인 원리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왜 3개나 5개가 아닌 4개가 선정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두 사람은 답변하지 못한다. 또한 4개의 원리들 상호간에 충돌이 일어날 때 어떻게 우선순위를 정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답변을 제시하지 못한다.



나가는 말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행위의 옳고 그름 여부를 성경이 제시한 세계관과 규범들 그리고 일반생명윤리연구에서 제시된 준칙들을 판단기준으로 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반성하는 것이 기독교생명윤리의 과제다. 기독교생명윤리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원한 존재로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타락함으로 인하여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포함한 갖가지 고통 속에 있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빛 안에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전제한다. 질병과 질병으로 인한 고통의 극복은 의료행위의 임무이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질병과 고통 가운데는 의료행위로는 극복될 수 없는 것들도 있으며, 또한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이 설정하신 질서로서 인간을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들도 있다. 의료행위는 환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 아가페적인 사랑, 환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의료기술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목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의료행위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총량적이고 평균적인 복리의 증진을 고려해야 하지만, 이 목적을 위하여 불치의 질병을 가진 환자나 노인환자에 대한 치료가 희생되어서는 안된다. 의료행위는 법적 차원에서 공정성을 잃어서는 안되지만, 환자에 대한 정서적인 따뜻한 심성이 상실되어서는 안된다.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에서 의사는 항상 강자의 입장에 있고 환자는 자기의 생명을 의사의 손에 맡기는 약자의 입장에 있으므로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항상 법적 계약관계에 머무를 수가 없고, 후견적인 관계에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의사는 환자의 요구권을 존중해야 하지만, 환자의 요구권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규범을 깨뜨리는 요구를 해올 때는 요구권을 거부해야 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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