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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윤리자료실
작성자 : 이상원     2015-06-12 13:23
기독교는 생명공학의 발전을 가로막는가? (2002)

 

기독교는 생명공학의 발전을 가로막는가?




이상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교수)

[기독교사회윤리], 2002년, 제5집, 105-21

발표일 : 2002.

 

  

기독교인들이 21세기의 중심과학인 생명공학이 기독교신앙에 대하여 가해 오는 도전의 위험성과 심각성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생명공학에 대한 평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데에는 몇가지 이유들이 있다고 판단된다. 첫째는, 생명공학연구의 구체적인 내용들이 너무 전문적인 것들이어서 일반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거나 접촉하기가 용이하지 않고, 둘째로, 생명공학연구가 인류에게 가져다 줄 것으로 예상되는 혜택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으며, 셋째로, 생명공학연구에 대한 비판이 자칫하면 과학발전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역류하면서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는 격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가지 이유들 가운데 세 번째 이유가 아마도 비판을 주저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닌가 판단된다. 지금은 반기독교적이라고 해서 반대했는데, 일정한 시점이 지난 후에는 기독교적 관점에서도 받아들여질 만한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일전에 어떤 학자가 비꼰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새롭게 나타나는 과학연구결과에 대해서 처음에는 기독교적인 관점을 제시하면서 반대만 하다가 그 연구결과가 보편적으로 인정되어 혜택을 베풀어 줄 때가 되면 역시 기독교적인 관점을 내세우면서 그것을 합리화시키면서 혜택에 슬그머니 무임승차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 아닐까?


다시 말하자면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가 기독교신앙의 이름으로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정죄할 때 처했던 상황과 비슷한 상황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재판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천동설이 기독교적인 우주론이라는 전제하에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반기독교적인 우주론으로 비판했는데, 후일 이 비판이 오류임이 판명되지 않았는가? 이처럼 생명공학에 대하여 섣부르게 평가를 내렸다가 같은 오류에 빠지게 될 우려가 있는 것이 아닐까? 예컨대, 현 단계에서 인체관련 생명공학의 정당성 여부를 따질 때 결정적인 판단기준 가운데 하나로 제시되고 있는 인간학적 입장 곧, 수정란이 형성된 시점부터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인간론은 과학적 연구가 더 진전이 된다면 오류임이 판명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가 되면 수정란을 인간으로 보고 제시했던 모든 판단들이 일거에 무너져 버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우선 이 두가지 사례들에 대하여 좀더 분석을 진행해 보자. 갈릴레오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기독교신앙과 과학적 연구결과의 대결인 듯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나 실상은 중세신학에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기독교신학의 우주론으로 잘못 해석한 “하나의 해석”과 천동설과 나란히 존재하고 있었다가 코페르니쿠스에 의하여 새롭게 과학적으로 조명된 우주에 대한 “또 하나의 다른 해석”으로서의 지동설간의 대결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우주는 지구가 그 중심에 고정된 점으로서 존재하고 그 주위를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이 돌고 있고, 가장 멀리 떨어진 마지막 궤도에는 위치가 고정된 별들이 자리잡고 있는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성경은 천동설을 제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지동설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갈릴레오 사건은 현상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기독교신앙의 대립이 아닌, 관찰결과를 토대로 한 하나의 사변적 해석과 또 하나의 사변적 해석의 대결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수정란에 대한 견해는 갈릴레오 사건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천동설이라는 우주적 패러다임이 무너졌던 이유는 천체에 대한 관찰의 결과 가운데 인과론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부분을 사색을 통하여 설명하려고 했다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천동설이 과학적 사실로 제시되었으나 실상은 가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수정란을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판단은 일어나는 현상과 과정에 대한 사실적인 관찰결과를 보고 어떤 사색이나 인과의 설명없이 내린 판단이라는 점에서 갈릴레오 사건의 경우와는 성격이 다르다. 수정란을 인간으로 판단하게 된 과학적 사실들은 관찰의 결과에 엄밀하게 근거한 것으로서 시간과 장소가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사과의 성분이 어떤 것인가를 정밀한 관찰을 통하여 밝혀냈을 경우에 이 관찰의 결과가 시간과 장소가 달라진다고 해서 바뀔 수 없는 것과도 같다.


갈릴레오 사건과 수정란에 대한 과학적 발견의 사례들은 기독교와 과학의 관계를 설정하고자 할 때 다루어야 할 두가지 쟁점을 제시한다. 하나의 쟁점은 우주의 기원과 구조 전체에 대한 해명을 시도하는 것은 과학의 고유한 과제인가? 다른 하나의 쟁점은 관찰과 실험의 결과에 대한 사실적 제시는 기독교신앙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특히 과학의 한 분과로서의 생명공학의 특성을 고려할 때, 몇가지 새로운 쟁점들이 추가로 제시될 수 있다. 생명공학은 유전자의 구조와 작용과정, 생명체의 발생과정을 관찰하고 분석하여 그 결과를 제시하는 생명과학과 유전자의 구조와 작용과정, 생명체의 발생과정에 인공적 기술을 가지고 개입하여 자연상태에서 존재하는 유전자나 생명체와는 다른 유전자와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유전자조작기술을 의미하는 생명공학으로 분류될 수 있다. 생명과학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는 생명과학의 연구결과의 활용과 관련된 문제로서, 생명과학의 연구결과가 생명체의 기원을 해명하고 생명체 특히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제반 현상들과 작용들을 해명하는 근거로서 어느 정도까지 활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생명공학기술과 관련해서는 자연상태에 있는 생명체의 기본구조인 유전자구조를 조작을 통하여 변형시키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 정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기독교는 과학적 연구의 발전과 과학기술의 활용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보여 주고 있는가? 우선 우리는 기독교는 과학적 연구와 과학기술의 발전을 지원하고 있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신학적 근거로서 세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칼빈에게서 시작되어 향후 정통적 개혁주의 신학의 세계관과 신학의 골격을 형성해 온 일반은총론이 과학적 연구와 과학기술의 발전을 뒷받침해 준다. 칼빈은 인간의 지성에는 두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하늘의 일들에 관계하는 지성이고, 다른 하나는 지상의 일들에 관계하는 지성이다. 하늘의 일들에 관계하는 지성은 신지식과 이 지식에 부합하게 삶을 형성시키는 방법을 내용으로 한다. 지상의 일들에 관한 지성은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 참된 의, 미래의 복락과 관계하지 않고 현세의 삶 곧 정치, 경제, 예술, 인문학 등에 관계한다. 인간의 마음이 아무리 타락하고 왜곡되었어도 인간에게는 여전히 창조주로부터 부여된 경탄할만한 은사들이 있으며, 세계도처에서 나타나는 진리를 거부하거나 저주해서는 안된다. 이 은사들을 저주하는 것은 이 은사들을 주신 자를 저주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상당히 공평하게 시민적 질서와 규율을 배열하고 있는 고대의 입법가들, 정교한 탐구와 자연에 대한 묘사를 수행한 철학자들, 담화의 규칙들을 제정하고 이성에 부합하게 말하는 법을 가르친 자들, 의사나 수학자들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는, 성경은 인류를 구속하는 성령의 특별한 작용을 말함과 더불어 자연계와 인간세계 안에서 수행되는 인간의 지성적 재능들의 활용을 성령의 일반적 작용의 결과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린다”는 욥기33장4절의 고백,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신다”는 이사야42장5절의 말씀들은 생명의 창조, 유지, 발전에 성령이 참여하고 계심을 명확히 보여주며, 바른 삶에 대한 지혜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도 성령의 작용임을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신다”는 엘리후의 말을 통해 선언되고 있으며(욥32:8), 여호와의 신을 받아 예술적 재능을 갖춘 장인들이 성막을 만드는데 기여한 사실(출28:3; 31:3; 35:30-33)은 예술적 재능의 영역에 성령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70인 장로(민11:17,25,26), 여호수아(민27:18), 사울(삼상10:10), 다윗(삼상16:13,14), 사사들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임무수행을 하게 했다는 반복적인 진술(삿3:10; 6:34; 11:29; 13:25; 14:6,19; 15:14)등은 정치적 임무수행에도 성령이 참여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셋째는, 기독교의 신관은 과학연구의 발전과 과학기술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제1계명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고 명령함으로써 신을 경배하는 관습과 관련하여 극히 배타적인 태도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기독교인들은 이 명령에 순종하여 이 세상에 제시되어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숫자의 신들 가운데 오직 하나의 신만을 섬기도록 명령받는다. 종교혼합주의와 종교다원주의는 원천적으로 신숭배관습들로 간주되어 배척당한다. 그런데 이처럼 철저하게 배타적인 명령이 과학연구와 과학기술의 개발과 활용의 문호를 활짝 열어 놓았다. 어떻게 이처럼 배타적인 명령이 과학연구와 기술의 발달의 문호를 열어 놓을 수가 있을까?


살아 있는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기독교 신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하나님 한 분을 제외한 모든 신들은 실재하는 신들은 아니다. 이 모든 신들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구상해낸 신에 관한 상들의 투영이 형상화된 것들이다. 그런데 모든 형상화된 신들은 세계 안에 실재하는 어떤 강력한 힘들을 상징한다. 이 힘들은 인간의 인생행로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인간의 힘으로 통제가 불가능한 거대한 세력들이다. 항해하는 선원들 앞에 다가오는 거대한 태풍, 넓은 평지에서 맞이하는 번개, 인간의 생존을 좌우하는 태양, 달, 대지 등이 그 예들이다. 신들은 존재하지 않지만 신들이 상징하는 이 거대한 세력들은 실재한다. 한편 “신들을 섬긴다”는 말은 신들의 노예가 된다는 말이고, 이 말은 이 거대한 피조물의 세력들의 노예가 된다는 말이며, 이는 결국 인간이 피조물의 노예가 된다는 뜻이다.


이와같은 시각에서 볼 때 제1계명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 한 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될 것을 명령하는 자유의 대헌장이다. 인간은 하나님 한 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로부터 자유롭다. 피조세계는 인간의 경배를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정복”의 대상이며, “다스림”의 대상이며, “식물을 얻는 원천”이다(창1:28-30). 심지어 천사들까지도 결코 인간의 경배의 대상이 아닌데, 왜냐하면 천사들도 성도들을 섬기도록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심부름꾼(히1:14)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1계명은 하나님 한 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을 비신화화 또는 세속화시킴으로써 인간이 피조물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이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피조물이 신으로 승격되어서 대지가 여신으로 숭배될 때 대지를 탐구하고 대지 속에 들어 있는 원유, 광물, 지하수, 음식물들을 파내어 활용하는 행동은 여신의 배를 더듬고 배를 드릴로 파서 그 속에 있는 내장을 꺼내는 독신적인 행위로 간주될 것이며, 인간이 피뢰침을 만들어 감히 번개를 소멸하는 행동을 해서도 안될 것이다.


과학의 연구는 두 단계로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첫 번째 단계는 현상과 작용에 대한 정직하고 정확한 관찰결과를 제시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현상이나 작용이 일어나게 된 원인 곧 인과관계를 추적해 들어가는 것이다. 인과관계의 추적은 통상적으로 두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실험을 통하여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찰 결과나 실험결과를 사유 안에서 논리적으로 시공간적으로 확대하여 현재의 현상과 작용의 시간적인 먼 과거의 기원을 해명하고 우주 전체를 해명하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인 관찰 결과의 정직한 제시는 기독교신앙과 전혀 대립되지 않는다. 이 작업은 하나님의 일반은총 또는 성령의 일반적 사역의 정당한 표현으로 인정된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경의 서술방식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이 자연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묘사할 때는 언제나 일어나는 형상에 대한 정직한 관찰결과를 제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뜨는 데부터 해지는 데까지”(시113:3)라는 표현은 태양의 움직임이라는 우주의 현상에 대한 관찰 결과를 단순하고 정직하게 서술한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사건에 대해서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1:9)고 기록한 것도 동일한 서술법에 의하여 제시된 것이다. 현상에 대한 정직한 관찰이라는 점에서 성경은 자연적 사건과 초자연적 사건의 구분을 두지 않는다.


현상에 대한 정직한 관찰 결과는 물론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신 구속주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창조후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데는 도움이 되는데, 이 점은 생명과학의 관찰결과의 제시도 마찬가지다. 고배율의 현미경과 컴퓨터를 이용하여 들여다 본 신체의 극미의 세계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바늘끝 보다도 더 작은 공간 안에 있는 더 작은 핵 속에 30억개의 뉴클레오티드들이 동일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수소결합에 의하여 나선형으로 질서정연하게 들어 있으며, 이 안에 수만가지의 단백질을 생성할 수 있는 유전정보가 들어 있다. 작은 세포 하나 안에 수만가지의 단백질을 생성할 수 있는 유전정보가 들어 있다. 작은 세포 하나 안에 수만가지의 유전정보해석하는 연구소 기능과 단백질을 합성하는 공장 역할을 하는 리보좀, 에너지 발전기관인 미토콘드리아, 자원저장기구인 골지체, 청소담당기관인 리소좀, 교통망인 소포체들이 정교하고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유기적인 연관성 안에 배열되어 작동하고 있는데, 이 신비로운 극미의 세포의 세계는 어떤 무한한 인격적 존재가 그의 마음 속에 일정한 설계도를 가지고 제작하신 것이라는 설명 이외에는 어떤 방식으로도 설명될 수가 없다. 이 세계는 인간의 제한된 머릿속에서는 나올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머릿속으로 구상했다 하더라도 그 구상대로 만들 수가 없는 세계이며, 더욱이 이 세계가 우연한 진화에 의하여 저절로 형성되었다는 설명은 합리적인 설명이 될 수 없다. 시계를 보고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인격적인 존재인 인간이 설계도에 따라서 제작했다고 상정하듯이, 세포 안에서 전개된 세계를 보는 인간은 - 그가 건전한 상식의 소유자라면 - 무한한 인격적 존재의 무한한 지혜가 담긴 설계도에 따라서 세계가 창조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같은 관찰은 목적론적 신존재논증의 하나인 정서론의 타당성이 유전공학 연구를 통하여 증명되고 있음을 뜻한다.


세포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작용의 신비로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DNA에 있는 유전정보는 어떤 힘에 의하여 복제를 할 뿐만 아니라 그 정보를 mRNA에 전사시키고, mRNA는 tRNA에 다시 전사되어 해독되고 해독된 정보에 따라서 단백질이 만들어진다. 자기복제를 계속하던 수정란은 일정한 시점이 되면 그 시점에 적합한 유전정보들을 발현시켜서 똑같은 DNA와 구조를 가진 세포로부터 신체의 각각 특수한 기관들을 만들어내는 발생과정이 진행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유전자 안에 들어 있던 정보가 모두 발현되면서 하나의 완전한 생명체로 형성되어 간다. 왜 동일한 세포가 각각 다른 기관들로 발생하는지, 왜 어떤 시점에 어떤 유전자는 발현되고 어떤 유전자는 발현되지 않는지 등에 대해서 생물학은 그것은 아마도 화학물질을 통한 세포들 상호간의 의사소통에 의한 것일 것이며, 세포가 어떤 길을 따라야 하는가는 세포 밖에 존재하는 어떤 신호에 의한 것일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아 안에는 발생청부업자나 힘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세포밖에 있는 어떤 힘을 상정하지 않고는 세포의 발생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는 발생학의 연구결과는 생성 혹은 변동하는 모든 것은 원인이 있으며, 이 원인은 곧 하나님이라는 우주론적 신존재논증이 유전공학과 발생학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현재 나타나고 있는 현상에 대한 인과론적 설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우선 성경은 과학적 인과관계를 추적하는 책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 저자들은 누가 일을 하시며, 그가 이루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일을 어떻게 하시느냐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메커니즘 혹은 과학적 설명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인과론적 설명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인과론적 설명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다. 성경의 이같은 태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과론적 설명능력은 인간의 지성의 대표적인 사유활동이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문제는 이 선물의 정당한 용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철학이 아닌 과학에서 인과론적 설명이 그 정당성을 부여받으려면, 실험을 통해서 증명이 되어야만 한다. 실험을 통하여 증명될 수 없는 영역에까지 인과론적 설명을 사변적으로 확대시키는 것은 과학의 본래의 업무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생명과학의 영역에서 본다면, 유전자에 대한 현상적 관찰결과를 근거로 하여 최초의 인류가 아프리카 여성이었다고 주장한다든가, 최초의 생명체는 35억년전에 존재했던 RNA였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사변으로서, 실험을 통한 입증이 불가능한 이런 내용들이 과연 과학자들이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현존하는 유전자에 대한 비교분석을 토대로 하여 진화의 과정을 해명해내려는 시도는 진화라는 입증될 수 없는 가설에다가 자의적으로 과학적 연구결과를 끼워 맞추는 비과학적 태도다.


그런데 생명과학의 관찰결과의 남용은 유전자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종교와 도덕을 포함하는 모든 인간현상과 사회현상들을 포괄적으로 해명하려는 유물론적 환원주의에 이르러서 극단으로 나아간다. 예컨대, 유전자는 몸과 마음까지도 창조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불멸의 신적 존재인 반면, 인간의 신체는 유전자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생존기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신의 관념, 도덕관념 그리고 기타 생각들도 마치 유전자가 정자와 난자를 운반체로 하여 몸에서 몸으로 날아다니듯이 밈(Meme)이라는 유사유전자를 통하여 뇌에서 뇌로 건너간다고 주장한 리챠드 도킨스(Richard Dawkins)나 인간의 종교와 윤리현상을 포함한 모든 정신현상은 유전물질이 자기자신을 보존해 가는 우회적인 방법 이외에 어떤 기능도 갖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의 주장이 유물론적 환원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다.


다음으로 생각할 문제는 자연상태의 피조물의 구조에 인위적인 변형을 가하는 과학기술에 대해서 기독교는 어떤 입장을 보여주는가?하는 것이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고 한 시편24편1절의 말씀처럼 이 세계의 모든 피조물의 절대적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고려할 때 피조물의 다스림과 정복을 명령하고 있는 창세기1장28절의 문화명령은 피조물의 관리를 위임한 청지기직분(stewardship)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위임하신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런데 청지기직의 수행은 하나님의 소유물을 수동적으로 주어진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피조물의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하는 피조물의 특성에 비추어 볼 때 불가능하다. 마태복음25장14절에서 30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으로부터 한 달란트 위임받은 종은 받은 한 달란트를 그대로 수건에 싸서 땅 속에 묻음으로써 원형 그대로 보관했다가 주인에게 돌려 주었는데, 주인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는다. 그러나 두 달란트와 다섯달란트를 위임받은 종들은 받은 달란트들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각각 네달란트와 열달란트로 변화시켰는데, 이 종들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축성(창4:17), 목축(창4:20), 기계제작(창4:22) 등의 기술들을 허용하신 것은 기술을 통한 피조물의 변형을 허용하셨음을 뜻한다.


그러나 인간이 청지기의 입장에서 피조물의 변형을 허용받았다는 사실은 피조물을 자의적으로 변형시켜서는 안되고 소유주가 원하는 질서와 한계를 존중하면서 그 틀 안에서 변형이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자연물의 변형은 하나님의 창조질서, 성경에 명료하게 계시된 도덕법, 그리고 인간의 마음 속에 심기워진 도덕법(롬2:14,15)의 규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생명공학기술을 통한 자연물의 변형과 조작은 어떤 범주 안에서 허용되고 또 금지되어야 하는가? 우선 원리적인 관점에서 안전하게 허용될 수 있는 유전자의 조작은 왜곡되고 병든 유전자를 건강한 유전자로 치환함으로써 병들고 왜곡된 창조세계의 회복을 도모하는 목적으로 행해지거나, 유전자증폭기술을 이용하여 인터페론과 같은 특정한 약제를 대량생산함으로써 인체질병치료를 도모하는 경우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목적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 진행되는 유전자조작은 모두 윤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그 정당성에 문제가 있다.


(1) 병든 유전자의 회복 또는 신체부위의 치료와 열성 유전자를 우성 유전자로 치환하는 우생학적 시도는 구별되어야 한다. 우생학적 시도는 인종의 다양성의 풀을 획일화시키고 고갈시킴으로써 하나님이 만드신 인류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파괴시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생학적 조작이 실현될 경우 인류사회는 힘, 지능, 미모에 있어서 우월한 인종의 계층과 열등한 자연적인 상태의 인종으로 차등화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인종차별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질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예측 가능한 가상적 사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자가 모두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성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사회이며, 온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신(행17:26) 인류 연대성의 뜻에도 어긋난다.


(2) 유전자조작은 인류의 생명의 증진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어서 인간의 생명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둔갑되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두가지 가치가 대립된다: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가치와 인간의 물질적 복리라는 가치. “천하를 주고도 인간의 목숨과 바꿀 수 없다”는 마태복음16장26절의 말씀에서 천하가 세상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물질적 복리의 총체라고 해석될 때, 이 말씀은 생명의 가치는 물질적 복리에 의하여 대체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이 말씀과 더불어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 그리고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깨뜨리는 죄가 된다는 창세기9장6절의 말씀은 인간의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물질적 복리를 도모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명확히 보여 준다. 수정란을 독립된 인간주체로 파악하는 인간론을 견지할 때 배아의 분할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배아의 복제는 전면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며, 높은 실패율로 인하여 생성된 배아를 폐기하는 과정을 피할 수 없는 체세포복제도 금지되어야만 한다.


(3) 현재 도달해 있는 기술발전수준을 고려할 때 높은 실패율이 예상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치료의 여파가 본인의 전 생애 나아가서는 후손에게까지 대물림될 수도 있는 생식세포치료는 안전성이 충분히 증명되기 전까지는 금지되어야 한다.


(4) 오늘날 세계인구의 폭발적인 증가, 농경지였던 토지가 산업지대로 바뀌고 전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급격한 사막화 등에 기인한 농경지의 급격한 축소, 농업의 고된 작업을 회피하고 힘이 덜 드는 3차 산업으로의 직종의 전환, 무차별한 동물들과 어패류의 남획으로 인한 천연육식자원의 감소와 오염 등으로 인하여 식량의 위기가 예상되는 현실 속에서 이와같은 위기를 유전자조작된 동식물의 대량생산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시도들은 유전자조작된 작물들과 동물들이 장기적으로 인체의 건강에 끼치는 영향이 아직 실험적으로 파악되지 못했고, 또한 생태계에 끼칠 부작용의 가능성도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전자조작된 동식물의 생산을 시도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시도로서 금지되어야 한다.


이런 판단을 하는 이유는 그간 인간이 창조의 질서를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만들어낸 물품이나 음식물들이 생산을 시작하던 당시에는 과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했거나 아니면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았다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심각한 부작용들이 50년 이상이 누적되어 온 결과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지경까지 오게 된 사례들을 우리가 실질적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들을 들어 보자. 과학자들은 20세기 중반까지 자연 상태에 있는 화학적 분자구조를 인위적으로 조작함으로써 어마어마한 종류의 인공적으로 합성된 신소재들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이 신소재들에 인류의 장밋빛 미래가 담보되어 있는 것으로 선전했으며, 이들의 선전을 전세계 인류는 그대로 믿어 왔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오늘날 PCB와 같은 인공합성화학물질로부터 꾸준히 환경호르몬이 흘러 나왔다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었고, 환경호르몬은 인간을 포함한 동식물의 생식과정에 치명적인 혼란을 초래하고, 암을 비롯한 질병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빗물을 타고 바다로 흘러든 친지방성 환경호르몬은 “식물성 플랑크톤 -> 동물성 플랑크톤 -> 어류 -> 조류, 포유류, 인간”으로 이어지는 먹이사슬을 통하여 전달되고 축적되어 왔다. 환경호르몬의 오염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만큼 전세계적인 규모로 진행되었고, 마침내 지구상에서 가장 청정한 지역으로 알려진 북극에 사는 곰까지도 환경호르몬에 오염되기에 이르렀다. 미시간호에 사는 갈매기에서 수컷의 암컷화 현상이 나타나고, 생식기관련 이상과 암에 걸려 죽어가는 동물들이 속출하고 있으며, 코펜하겐과 동경에서는 남성의 정자수가 이미 정상치의 절반으로 줄어 들어 있으며,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우리나라 전 해안에서 서식하는 어패류의 생식기관련 혼란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수만가지가 넘는 인공합성화학물질들 가운데 유출물이 확인된 것은 수십종에 불과하고 나머지로부터는 어떤 유출물이 흘러 나오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오늘날 미국 인구의 1/3이 암질환을 앓고 있고, 1/4이 암으로 사망하는데, 그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인공으로 대량사육하는 쇠고기임이 밝혀지고 있다. 소를 자연상태에서 방목하지 않고 거대하고 불결하기 이를데 없는 집단농장에서 사육하며, 소를 빨리 키우고 부드럽고 입맛에 맞는 육질을 얻기 위하여 지방질이 함유된 사료를 인위적으로 먹이고, 운동을 못하도록 몸을 틀 수 조차 없는 나무상자 우리에 가두고, 철분섭취를 못하게 하며, 다량의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을 투여함으로써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린 고기를 시장에 공급해 왔다. 이 고기를 주식으로 섭취하는 인간들이 암을 비롯한 각종 성인병의 노예로 전락되어 왔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암환자와 각종 성인병환자들의 숫자가 급증하는 현상은 쇠고기와 기름에 튀긴 감자 등을 주식으로 하는 서구형 식단의 보편화와 더불어 30년 이상 화학비료를 섭취하고 자란 작물들을 국민들이 꾸준히 장기적으로 섭취해 온 결과 인체의 구성성분이 달라진 데도 원인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유기농재배방식을 통한 전통적인 작물재배와 천연방목을 통한 육류생산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가고 설득력을 얻고 있는 마당에 천연덕스럽게 창조질서를 조작하여 변형시킨 유전자조작 동식물의 생산에 몰두하고 있는 생명공학자들은 도대체 시대의 흐름과 인류의 미래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결론적으로 요약한다면, 생명과학이 유전자의 구조와 기능을 치밀하고 성실한 관찰, 비교분석 그리고 실험을 진행시킨 후에 그 결과를 정직하게 제시하는 한 기독교의 신학적 토대와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이와같은 결과는 오히려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변증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생명과학이 과학 본연의 과제에서 벗어나서 유전자연구결과를 토대로 인류의 생명의 기원을 해명하려고 한다든지, 가설에 불과한 진화의 과정을 밝히려고 한다든지, 유물론적 환원주의를 시도함으로써 과학주의로 나아간다면 생명과학은 기독교의 예리한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생명공학이 일정한 신학적 윤리적 한계 안에서 병든 유전자의 치료와 질병의 치료라는 목적에 헌신한다면, 기독교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공학이 우생학의 도구로 이용되거나,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질병치료를 시도하거나 인간복제를 시도하거나 현 단계에서 생식세포치료를 시도하거나 유전자조작을 통한 식용 동식물의 생산을 시도한다면 기독교의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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