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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윤리자료실
작성자 : 이상원     2015-06-12 13:28
생명윤리논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와 전략 (2001. 12. 1.)

 

생명윤리논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와 전략





이상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교수)

성산생명의료윤리연구소 설립 4주년 기념 심포지엄 "생명은 수정순간부터" 주제발표 자료

발표일 : 2001. 12. 01.

 

들어가는 말

최근의 생명윤리논쟁들을 검토해 보면 몇 가지 재미있는 특징들이 발견된다. (1) 논쟁의 한편은 인간의 생명보호에 절대적인 우선적 가치를 부여하는 반면, 다른 한편은 생명보호는 때에 따라서는 다른 가치들에 자리를 양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 논쟁은 평행선을 달리다가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난다. (3) 생명보호에 절대적 우선권을 부여하는 입장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세에서는 항상 밀린다.

관전자들의 일반적인 정서는 대체로 생명보호에 절대적 우선권을 두는 입장에 대하여 그리 달갑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다. “원리는 좋은데, 그 주장은 현실성이 없다. 대세는 기울었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입장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려고 하는가? 적절한 선에서 양보하는게 낫지 않은가?” 관전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명보호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자들을 도대체 말이 안통하고, 과학의 발전과 성과에 항상 부정적으로 제동을 걸려고 하고,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들로 치부하기 일수이며, 그 중에 상당수는 혐오의 감정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생명보호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입장에 있는 자들은 대체로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면 관전자들이 이런 반감을 갖게 된 것은 기독교인들이 그동안 보여온 윤리적인 타락에 대한 반발의 성격도 없지 않으나 그 뿌리는 이보다 더 깊은데 있다. 비기독교인 들의 반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배타적인 구원관과 절대 윤리적 입장 그 자체를 본능적으로 싫어하는데 기인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배타적 구원관과 절대적인 윤리적 입장은 자신들의 합리성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생명윤리운동가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 불리한 상황 속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사태가 진전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해갈 수 있으려면 운동을 해야 하는 근거가 무엇이며,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이며, 또한 전략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의 근거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은 어떤 근거에서 시작되는가? 우리가 이 운동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이 운동을 정당화시켜 주는 신학적이고 윤리학적인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방대한 신학적 철학적 내용을 가진 이 근거 중에서 본인이 오늘의 주제와 관련하여 기독교적 인간과과 윤리관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한다.


(1) 인간관의 문제.

기독교적 인간관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내용들 가운데 생명윤리문제들에 직접 관련되는 중요한 부분은 두가지다. 하나는, 생명의 시작점에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생명의 종결시점에 관련된 것이다.

성경은 생명의 시작점에 대하여 명시적인 가르침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태아와 관련된 성경의 언명들을 종합하여 현대 의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해 보면, 수정란 형성시점부터 이미 태아는 독립된 인격적 주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다윗은 시편51편5절에서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또 시편138편13절에서도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라고 말한다. 다윗은 태중에 있는 자기를 묘사할 때 “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누가복음1장41,44절에 보면 엘리사벳이 태안에서 태아가 뛰어 노는 것을 보고 “아이”가 뛰어논다고 표현하고 있고, 누가복음1장46,47절을 보면 태중에 있는 예수님을 보고 “구주”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성경에서는 “나”라든지, “아이”라든지, “구주”와 같은 표현들은 모두 독립된 인격적 주체를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곧 성경은 태아에 대하여 잉태된 시점부터 독립된 인격적 주체로 간주한다.

성경적인 전거 이외에도 유전공학은 수정순간을 독립된 인격적 주체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지원한다. 독립된 인격적 주체의 시작점은 그 이전과는 불연속성이 클수록 설득력을 얻는다. 원시선의 출현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요소의 출현이 아니고 이미 존재하던 요소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가시화되는 현상일 뿐이다. 뇌의 인식기능이 발현되는 시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자와 난자가 만들어져서 수정란이 형성되기까지 DNA의 염기배열구조는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를 겪는다. 성세포가 정자나 난자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자연적인 유전자조작이 일어나는데 이 조작이 23개의 염색체 DNA 안에서 모두 일어나므로 정자는 840만 가지의 조합 중에서 하나가 선택된다. 난자도 역시 840만 가지의 조합 가운데 하나가 선택된다. 정자는 적어도 수억마리 가운데 하나가 선택된다. 선택된 정자가 난자와 만나 결합될 때에도 정자의 23개 염색체와 난자의 23개 염색체 사이에서 새로운 조합이 형성되므로 또 다시 840만 가지의 조합 가운데 하나가 선택된다. 그러므로 부모로부터 수정란이 형성되기까지는 840만(정자)X수억(정자의 선택)X840만(난자)X840만(수정시)의 새로운 조합 가운데 하나가 선택되는 셈인데, 이 정도의 조합방식이 우연히 일어날 확률은 사실상 0이다. 이 조합방식을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용어는 “새 창조” 밖에는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단 수정란이 형성된 이후의 DNA는 특별한 외부적인 충격이 없는 한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 곧 수정란 형성시기 이외에 어떤 다른 변환도 수정란시의 변환과 절대적으로 비교될 수 없다. 따라서 수정란시점을 인간이라는 새로운 인격체의 시작점으로 잡는 것은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인간의 생명이 종결되는 시점에 관련하여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이 죽는다는 말은 육체적 생명이 종결된다는 것만을 의미할 뿐이며, 육체적 죽음여부와는 상관없이 영혼은 명료한 의식을 가진 상태로 존재하기를 중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점에 있어서 기독교적 인간관은 현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유물론적 인간관과 예리하게 대조된다. 유물론적 인간관이란 물질세계에 작용하는 인과적 원리를 가지고 인가의 정신 또는 영혼의 현상들을 설명해내려는 시도를 말한다. 유물론적 인간관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현상이란 뇌세포와 뇌신경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므로, 뇌세포나 뇌신경이 그 기능을 다해 버리면 소멸되어 버린다. 그것은 마치 전구에 전원이 들어오면 불이 켜졌다가 전원이 나가면 불도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인간의 신체가 죽으면 영혼도 소멸되어 버린다. 죽음의 시점을 뇌사로 앞당겨서 정하거나 안락사를 자유롭게 시행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와 같은 인간관에서 출발한다. 뇌사를 죽음의 시점으로 삼거나 안락사를 허용하는 자들은 삶의 질을 이야기하면서 정신적인 기능이 살아있는 전기적인 생명만이 살 가치가 있는 생명이요, 정신은 죽어 버리고 육체적 생명만 유지되는 생명은 동물적인 생명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유지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육체의 소멸이 정신적인 생명의 의식적 존재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며 정신적인 생명의 존재가 중단되는 일이 있을 수 없다면 전기적인 생명과 생물학적 생명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지며 따라서 뇌사, 안락사, 자살 등에 대한 판단은 180도 달라진다.

기독교적 인간관은 신체가 소멸되어도 영혼을 결코 소멸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혼은 의식을 잃지 않으며, 의식에 수반되는 고유한 기능들도 상실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없다. 누가복음16장19절에서 31절까지에 있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인간이 죽은 이후에도 지옥에 간 영혼이나 천국에 간 영혼이나 모두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요한계시록6장9절과 10절은 순교자들의 영이 하나님께 큰소리로 부르짖으면서 기도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순교자들의 영이 의식이 없다면 이런 행동이 불가능할 것이다. 욥기14장22절을 보면 육체적 죽음을 당한 영혼이 자기의 살이 땅에 묻혀 썩는 것을 아파하고 슬퍼하기까지 한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상과 같은 표현들은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영혼이 의식을 가지고 존재함을 뜻한다. 성경에서 사용된 죽음이라는 말은 어느 곳에서도 존재의 소멸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일이 없다. 성격에서는 다만 한가지 존재의 방식 또는 존재의 영역에서 다른 존재의 방식 또는 존재의 영역으로 이동했다는 의미에서 죽음이라는 말을 사용할 뿐이다. 한번 창조된 인간의 영혼은 존재가 잠시라도 중단되는 일이 없다. 물론 영혼이 육체와 함께 있을 때는 양자가 긴밀하게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적인 관계 안에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영혼은 육체가 소멸된 후에 육체가 없는 상태에서도 존재와 의식과 기능을 상실하지 않는다. 다만 뇌를 포함한 신체가 노쇠하거나 병이 들어 고장나면 신체를 통하여 영혼의 의식이나 기능을 표현하는 능력이 약화되거나 상실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치매환자나 정신병자나 혼수상태에 있는 환자나 뇌사상태에 있는 환자의 경우에 그의 의식이 상실되었거나 영혼의 존재에 손상이 가해진 것이 아니라 의식의 신체적 표현방식에 문제가 생긴 것일 뿐이다. 인간은 영혼의 존재에는 결코 손댈 수 없고 다만 신체를 죽일 수 있을 뿐이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은 신체를 죽이는 행동을 금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뜻으로 해석될 수 없다. 따라서 신체를 죽이는 모든 행위는 살인행위가 된다.


(2)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이 기독교윤리운동으로서의 특징을 상실하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제시한 규범의 틀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원칙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이 점에 있어서 기독교윤리는 자율성과 결과론으로 요약되는 현대인의 윤리사상과 대조된다.

현대인들은 행위의 규범을 자기 스스로 설정한다. 그것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 있어서처럼 이성일 수도 있고, 칸트에 있어서처럼 실천이성일 수도 있고, 궤변론자, 직각론자, 정서론자들처럼 주관적인 감정이나 정서일 수도 있고, 공동체주의자들에 있어서처럼 사회의 관습이나 전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인간 자신이 규범을 설정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현대인들은 행위의 결과가 어떻게 산출되는가를 보고 행위규범을 자율적으로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결과를 판단하는 기준은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쾌락과 행복을 안겨다 주느냐 하는 것이다. 배아복제가 질병의 치료에 획기적인 유익을 가져다 준다면 허용되어야 한다! 사후피임약이 겉으로 드러난 낙태횟수를 줄일 수 있고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계기만 된다면 허용되어야 한다! 낙태가 임산부의 권익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허용되어야 한다! 안락사가 본인이 원하고 환자의 가족의 경제적이고 정신적인 부담을 덜어주고 의료자원의 절약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면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윤리는 하나님이 제시한 규범에의 순종에 절대적인 우선권을 부여한다. 기독교윤리는 규범의 정당성 여부를 따질 때 그 규범에 따라서 행동해야 하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를 결정적인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만 타당한 행동일 수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면 함정에 빠진다. 궤변도 극히 합리적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 설명은 단기적인 결과를 설명할 수 있어도 장기적인 결과를 설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합리성은 자아의 이익과 관심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로 이용되기 마련이다. 기독교윤리는 행위의 결과도 고려에 넣지만 그것도 역시 결정적인 기준은 아니다. 행위의 극히 단기적인 결과는 예측이나 계산을 가능해도 장기적인 결과는 결코 예측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과거, 마음속에 숨어 있는 동기, 먼 미래에 끼칠 행위의 결과까지도 완전하게 아시는 상태에서 규범을 주셨기 때문에 이 규범은 절대적으로 신뢰할만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규범준수의 결과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워도 이런 신뢰에는 변함이 없다. 인간의 사고력의 한계 때문에 설명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하나님의 규범은 성경에 있는 규범들과 일반은총의 영역에 있는 규범들로 나누어진다. 성경에 있는 규범들 가운데 사랑의 대강령, 황금율, 십계명 기타 윤리훈들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규범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별히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하나님이 성경에 합법적으로 살인을 허용한 경우(예컨대 고의적 살인에 대하여 사형을 부과하고 있는 창세기9장6절과 같은 경우.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하나의 특수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사형제도폐지의 성경적 전거가 될 수 없다)가 아닌 한, 생명윤리문제들을 판단할 때 가장 중시되어야 할 규범이며, 어떤 합리적인 설명이나 결과에 대한 계산으로도 타협될 수 없는 규범이다. 이와 동시에 성경에 명시된 창조질서들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규범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생물들을 각 종류대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각 종간의 혼합교배나 유전자조작을 통한 종간교배, 식물과 동물간 교배, 인간과 다른 동물간 교배가 부당한 질서임을 선언한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여 창조하신 사실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성전환을 금지하며,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잉태의 수고를 거쳐서 자녀를 낳도록 한 질서는 인간복제방식을 통한 후손출산을 금지한다. 그러나 기독교윤리는 일반은총의 영역에 하나님이 두신 규범들 · 일반 철학적 윤리학에서 제시된 준칙들, 의학이 그 고유한 영역 안에서 제시한 의술시행상의 준칙들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제시한 규범들은 일반은총의 영역에 두신 규범들보다 언제나 우선권을 부여받으며, 양자가 충돌을 일으킬 때는 후자에게 양보를 요구한다.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의 목표

그러면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이 목표에 대해서는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1)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간의 생명이 최대한 보호받고 정당한 이유 없이 침해당하지 않는 사회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도덕적인 설득과 교육에서 출발해서 입법적 차원에서 결실을 볼 때 비로소 완결된다.


(2)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은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는 운동이다. 사회정의란 무엇인가? 존 롤즈는 사회적 최저선(social minimum)을 통하여 사회 안의 소외계층의 인간다운 삶을 우선적으로 보장한 후에 창의력과 경쟁을 허용하여 재화를 획득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을 정의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롤즈의 입장은 성경이 말하는 정의와 내용과도 맥이 통한다. 하나님은 힘이 없고 연약한 계층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지신다. 하나님이 아말렉 족속을 천하에서 도말시켜버리라고 명령하신(신25:17-19) 이유는 이스라엘이 행군하는 중 아말렉 족속이 이스라엘의 피곤함을 틈타서 뒤쳐진 약한 자들을 쳤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있는 나그네, 과부, 전쟁포로들을 선대하도록 명령하고 있는 모세의 율법이나 고아와 과부를 착취한 죄를 일관성 있게 지적하는 선지서의 말씀들, 99마리의 성한 양을 우리에게 그대로 두고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서 떠나는 하나님의 모습 등은 가장 약하고 비천한 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기독교인들과 교회에 주어진 과제임을 시사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의 소외계층의 가장 밑바닥에 배아들, 태아들, 장애신생아들, 말기질환자들이 자리하고 있는 바, 이들이 첨단의학과 생명공학 기술의 힘 앞에 일방적으로 희생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생명윤리운동은 곧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는 셈이다.


(3) 그런데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의 전망은 그다지 밝은 것이 아니다. 때로는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실수로 인한 이미지 실추 때문에, 그리고 더 크게는 기독교의 구원관과 윤리관 그 자체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 때문에,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과학자들의 무절제한 호기심충족, 집단이기주의 그리고 첨단의학관련산업체들의 무분별한 상업적 이익추구 등으로 인하여 현실 속에서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이 시민들을 도덕적으로 설득하고 입법의 단계에서 열매를 거두는 작업은 매우 힘겨울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 갈수록 더 악화되어 갈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사회운동은 이 땅위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땅위에 우리의 힘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주지 않고 있으며, 그런 기대를 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사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을 가진 자들로 구성되며, 이미 역사 안에 임하여 있다. 이 나라의 미래적인 완성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사회운동은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가? 우리는 두 가지를 이루고자 한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하여 이미 참여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증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빛과 영향력을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다른 하나는 세상의 악이 크게 발현하는 것을 어느 정도라도 통제하여 세상이 복마전과 같은 곳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을 제어하고 어느 정도라도 사람이 살 수 있고, 부분적으로라도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로 형성시켜 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목표를 위하여 그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의 기대대로 열매를 거두든지 못 거두든지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다.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의 전략

그러면 이런 쉽지 않은 현실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떤 전략을 가지고 기독교생명윤리운동에 임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세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지금까지 강조해 온 것처럼 성도들을 대상으로 기독교생명윤리운동을 정당화시켜 주는 이념적 근거로서의 기독교적 인간관과 윤리관, 그리고 나아가서는 기독교세계관을 교육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이유가 뚜렷하고 명확해야 운동이 힘을 얻는다. 어차피 생명윤리논쟁은 반대진영과의 힘겨루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국민의 1/4가량을 점유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모든 채널을 동원하여 철저하게 교육시켜서 저변을 확대시켜야 한다.


(2) 시급한 진단과 대응을 촉구하는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시급한 문제들에 대한 신속한 대응도 필요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토대를 견실하게 다져나가는 일도 필요하다. 운동과 동시에 미래에 이 운동을 담당해나갈 인재양성도 동시에 실시해야 하며, 교인들과 기독청년들의 교육을 위한 연구와 프로그램 마련에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 예컨대 히포크라테스 운동은 생명윤리라는 것 자체가 없었던 열악한 시대에 극소수의 개혁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숫자의 열세와 사회적인 소수집단이라는 불리한 조건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타협하지 않고, 그리고 일관성 있게 운동을 전개해 온 결과 2-3백년 후부터는 누적되어 온 힘이 마침내 드러나기 시작하여 향후 20세기 후반 제네바선언이 있기까지 명실상부한 서구의료의 도덕적 지주역할을 훌륭히 수행해낼 수 있었다. 네덜란드의 사회경제운동 가운데 하나인 사회보장제도운동도 마찬가지다. 네덜란드에서 사회보장제도운동이 시작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이때부터 수많은 세미나와 컨퍼런스와 회의를 거치면서 양차대전이라는 대재난을 겪는 가운데서도 운동은 계속되었고, 축적된 운동의 누적된 힘이 마침내 1960년대에 전국적인 사회보장제도의 완결을 가져오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 결과를 얻기 위하여 네덜란드의 기독교인들은 80년간을 싸웠다. 50년, 또는 100년을 내다보면서 내가 못하면 후손이 이어받아서 한다는 긴 안목을 가지고 오늘 벽돌 한장한장을 견실히 쌓아나가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기도와 땀과 연구가 오랜 시간동안 누적되어 토대가 견실해지면 자연스럽게 힘이 붙고 그때 비로소 열매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3) 기독교인들을 위한 교육과 더불어 비기독교세계를 향해서 우리의 입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하는 과제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발달된 과학에 뒤따르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태도와 더불어 발달된 과학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인류사회를 위하여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도 동시에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주의(scientism)와 과학(science)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들은 과학을 가지고 인간의 삶의 전 영역을 다 설명할 수 있다거나 과학연구를 통하여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환상을 말하는 과학주의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하겠지만, 과학연구 그 자체는 반드시 기독교적 세계관과 충돌되는 것이 아니며, 적절한 규범 안에서 선하게 활용되면 인류사회에 유익을 가져 올 수 있다는 인식 하에 과학적인 대안제시를 위한 노력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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