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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윤리자료실
작성자 : 이상원     2015-06-12 13:33
기독교와 생명윤리 (2001)

 

기독교와 생명윤리


이상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교수)

[신학지남], 2001년 가을호, 통권268호, 298-320에 게재된 글

발표일 : 2001.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구체적인 생명의료윤리문제들에 대한 반성작업을 전개하기 위하여 필요한 지평이 되는 기독교적인 인간관과 기독교적 규범이 무엇인가를 소개하고 이 세계관 및 규범들이 구체적인 생명의료윤리문제들과 어떤 관련성을 가지는가를 설정하고자 함에 있다. 이와같은 글의 목표를 염두에 두면서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순서에 따라서 진행된다. 1.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의료행위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생명의 범주는 어떻게 설정될 수 있는가? 2.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독교생명의료윤리란 무엇인가? 3. 기독교생명의료윤리적 반성작업의 지평이 되는 기독교적 인간관은 무엇인가? 4. 기독교생명의료윤리적 반성작업을 전개할 때 판단기준이 되는 규범은 무엇인가?



2. 기독교적 인간관의 관점에서는 의료의 영역에서 다루는 인간의 생명의 범주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

의료인들이 질병을 치료하고 질병치료가 불가능할 때는 고통의 경감을 위하여 노력하며, 환자를 간호하고, 질병의 예방과 퇴치를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고 보전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생명을 기독교적인 인간관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창세기2장7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 구절을 분석해 보자.


(1) 하나님은 먼저 흙으로 인간의 신체를 지으셨다. 그러나 흙으로 신체를 지으신 것만으로는 아직 인간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2) 하나님은 흙으로 된 신체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여기서 말하는 생기는 니쉬마트라는 히브리어인데, 이 말은 루아흐라는 히브리어와 동의어로서 “영”으로 보통 번역된다. 영은 몸을 통제하는 생명과 행동의 원리로서 작용하는 영적 요소로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선악을 변별하고 도덕을 수련하는 등의 기능을 주도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은 재료가 흙으로 구성되었다는 의미에서 땅에서 기원한 육체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영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육체와 영의 기원이 다르기 때문에,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영도 따라서 죽는 것이 아니다(마10:28).1) 전도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죽으면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지만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12:7).2)

(3) 신체에 영이 들어가자 비로소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생령이란 “네페쉬 하야”라는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데, “하야”는 “살아 있는”이라는 뜻이고 “네페쉬”는 “혼”이라는 뜻이다. 성경에서는 “영”과 “혼”이 교호적으로 사용된다. 혼은 인간 안에 있는 행위의 주체로서, 식욕이나 기억이나 상상등을 발생하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이것은 영과 구분된 실체로서의 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이 지닌 기능의 한 단면을 강조하는 것 뿐이다. “생령”이라는 어귀 곧 “살아 있는 혼”은 전인을 포괄하는 단어다. “생령” 곧 “살아있는 혼”은 신체까지도 포함하며 영까지도 포함하는 전인(全人)을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육체와 영은 그 기원과 내용이 다르다는 의미에서 독립된 두 실체이지만, 영이 일단 육체 안에 들어온 이후에는 생령의 형태로, 곧, 영혼과 육체가 나누어질 수 없을만큼 긴밀한 상호작용과 상관관계를 맺으면서 전인으로, 하나의 통일된 인격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육체의 건강은 어느 정도 영혼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며, 영혼의 건강은 육체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 육체가 병들면 어느 정도 영혼도 영향을 받아 병들게 되고, 영혼이 병들면 육체도 영향을 받아 병들게 된다. 영혼과 육체는 신비로운 연합 안에서 하나의 통일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신비로운 통일체로 존재하던 인간은 육체적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 흙속에 묻혀 버리지만 영혼은 다시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종말의 날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신령한 새 몸으로 다시 신비롭게 연합할 때까지.

그러면 이와같은 영혼과 육체가 신비로운 연합 안에 있는 통일된 인격체로서의 인간에 있어서 의료행위가 치료의 대상으로 다룰 수 있는 부분은 어느 부분인가? (1) 의료행위의 가장 중요한 대상은 전인과의 긴밀한 연관성 안에 있는 육체다. (2) 인간의 육체와 영이 만나는 지점에서 형성되는 인간의 정신기능들도 의료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른바 정신의학이 이 영역을 다룬다. (3)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능력으로 그 존재여부나 건강성 여부를 손댈 수 없는 차원을 가진다. 영혼의 깊은 차원의 문제에까지 의학이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점을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속사람과 겉사람의 구분을 통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바울은 인간을 속사람(롬7:22)과 겉사람(고후4:16)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속사람은 실재하는 인간의 자아의 중심을 이루는 구성요소이면서도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깊은 차원이다. 프로이드가 들여다 보려고 시도했던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의 영역이 여기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겉사람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고 어느 정도 통제도 할 수 있는 세계로서, 이성, 의식, 구체적인 행동과 삶의 영역을 말한다. 프로이드가 말한 의식의 세계가 여기에 상응할른지도 모른다. 의학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은 겉사람의 영역이다. 그러나 의학은 속사람의 영역은 다룰 수 없다. 그것은 의학이나 의술의 한계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것은 속사람의 영역에서다. 속사람을 다룰 수 있는 것은 복음 뿐이다.


3. 기독교생명의료윤리란 무엇인가?

그러면 의료행위와 기독교생명윤리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우선 윤리라는 말의 의미부터 생각해 보자. 윤리라는 말의 의미는 도덕이라는 단어의 의미규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어원상으로만 본다면 윤리와 도덕은 어떤 의미의 차이도 말할 수 없고 일상어법에서는 실제로 동의어 비슷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윤리(ethic)의 어원인 희랍어 ethos 의 라틴어 번역어가 도덕(morality)의 어원인 mos 이기 때문이다. 이 단어들은 “관습”이라는 의미를 갖는다.3) 곧 어떤 사회의 구성원들이 관습적으로 행동하는 어떤 원칙을 말한다. 그러나 윤리학계에서는 이 두 단어가 각기 다른 뜻으로 사용된다. 도덕이라는 말이 어떤 사회에서 관습화된 행동원칙들을 기술적(記述的)으로, 어떤 가치판단없이 서술한 것이라면, 윤리라는 말은 어떤 사회의 관습화된 행동이 과연 옳은가 그른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따지는 작업을 가리킨다. 따라서 윤리는 규범적(規範的) 작업이다. 예를 들어 보자. [허준]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궁중 간호사였던 내의녀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내의녀들은 간호사의 역할 이외에도 관기(官妓)와 여경(女警)의 역할까지도 담당했다. 이때 “내의녀들은 간호사 역할 뿐만 아니라 관기와 여경의 역할까지도 담당했다”고 말한다면 이조시대의 궁중의료도덕의 진술이 된다. 그러나 “내의녀들이 간호사 역할 이외에 관기와 여경의 역할까지도 맡았던 관습이 과연 바른 관습이었는가?”를 묻는다면 이조시대의 궁중의료윤리의 진술이 된다. 결국 윤리란 인간의 행동 또는 행동원리가 옳은가, 그른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이론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의료윤리란 의료행위 또는 행위의 원리들의 옳고 그름 여부를 이론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행위가 옳은가, 그른가의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판단기준이 필요하게 된다. 이 판단기준을 윤리학에서는 규범(norm)이라고 한다. 규범으로 번역된 라틴어 norma 는 원래 목수들이 쓰던 직각자를 뜻했다. 목수들은 제품을 만든 후에 직각자를 대보면서 제품이 제대로 만들어졌는가의 여부를 판단했다. 따라서 윤리학이란 어떤 규범에 근거하여 인간의 행동의 옳고 그름 여부를 따지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생명의료윤리란 무엇인가? 어떤 규범에 근거하여 어떤 의료행위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고 보전하는데 기여하는 행위인가, 아닌가를 따져 보는 이론적 작업이 곧 생명의료윤리다.

그러면 이 작업을 할 때 필요한 규범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이르러서 비로소 기독교생명의료윤리의 특징이 드러난다. 일반적인 의미의 생명의료윤리는 이성적 사유나, 임상적 결과나, 사회적 합의나, 기타 의료인들의 경험 등으로부터 규범을 이끌어낸다. 인간의 행위의 옳고 그름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인간으로부터 끌어내는 자율적(autonomous) 입장을 철저하게 견지한다. 여기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과연 인간의 행동을 인간의 생각을 가지고 판단할 때 정말로 객관적인 안목에서 판단이 가능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타락한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사유하고 판단하는 무의식적인 습성이 있음을 고려할 때 자율적 입장은 결국 자기를 합리화(self-rationalizing)하는 윤리의 입장을 벗어나는 것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면 기독교생명윤리의 입장은 무엇인가? 기독교생명윤리는 규범에 있어서 삼중적 입장을 취한다. (1) 기독교생명윤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인간관을 판단의 지평으로 삼는다. (2) 이 지평 안에서 성경이 제시하는 윤리적인 규범들을 1차적인 판단규범으로 채용한다. (3) 일반의료윤리의 영역에서 제시된 일반적인 판단규범들을 부차적인 판단규범으로 채용한다. 여기서 (1)은 (2)와 (3)에 대하여 우선권(priority)을 가지며, 특히 (2)는 (3)에 대하여 우선권을 가진다. 기독교생명의료윤리는 (1), (2), (3) 에 근거한 인간론과 규범론의 틀 안에서 의료행위의 옳고 그름 여부를 검토하는 작업을 전개한다.



4. 기독교생명의료윤리의 지평(地平)으로서의 인간관

인간의 사유, 판단, 행동의 배후에는 인간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기 마련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인간관의 틀로서 가장 잘 알려진 틀은 어거스틴에게서 확립된 후 개신교 신학전통이 줄곧 견지해 온 “창조-타락-구속”의 틀이다.4)

(1) 창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창조되었다(창세기1:27).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은 서로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두 개의 동의어다. 하나님의 형상성은 두 차원으로 나누어서 이해하는 것이 정설이다. 하나는 좁은 의미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 의로움, 거룩함을 뜻한다(골3:10;엡4:24).5) 좁은 의미의 형상은 인간이 타락했을 때 상실되었다. 다른 하나는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인데, 이 형상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상실되지 않았다. 이 형상은 인간이 영성을 지니고 있고, 이 점에 있어서 영이신 하나님이 투영되어 있다. 영의 특징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다.6)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은 몸과 연합되어 있고 몸에 신축성있게 적응하지만 그 존재가 몸에 의존하지 않는다. 몸이 해체되어 버린 뒤에도 영은 존재한다. 영은 이성, 양심, 의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을 갖는다. 영은 육체를 통하여 자기를 표현한다.7) 육체는 영이 자기를 표현하기에 적합할만큼 하나님의 형상의 광채로 장식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육체도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좌소는 인간의 영혼 속 곧, 정신과 마음, 혹은 영혼과 영혼의 능력들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육체를 포함하여 인간 속의 어느 곳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다.8) 따라서 창세기9장6절은 사람의 몸을 죽이는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로 해석되었다. 이와같은 기준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배아복제, 낙태, 인공수정, 안락사 문제들을 판단할 때 유념해야 한다. 의료인들은 인간은 생물학적인 또는 의학적인 연구를 통하여 다 파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이와같은 연구로서는 손댈 수 없는 영적 생명을 가진 존재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는 인식을 가지고 인간을 대해야 한다. 인간을 단지 의료기술적 조작의 대상으로 보고자 하는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

(2) 타락.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범죄했고, 범죄한 결과로서 인간에게는 고통과 죽음이 찾아 왔다. 남자에게는 노동의 고통이 찾아 왔으며, 여자에게는 출산의 고통이 찾아 왔고, 인류사회 전체에는 갖가지 질병이 찾아 왔으며, 마침내는 고통의 절정인 육체적 죽음9)이 찾아 왔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고통, 질병, 죽음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한편으로 이것들은 극복되어야 할 것들이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범죄한 이후의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이 마련하신 은혜의 질서이기도 하다. 극복되어야 할 경우와 하나님의 은혜의 질서로 받아 들여야 할 경우를 구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정신과 육체를 병들게 할 만큼 노동의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절제해야 하지만, 얼굴에 땀흘리는 수고를 하면서 생계에 필요한 물질을 얻으면서 사는 것이 의학적으로 볼 때 오히려 건강에 유익하다. 아이를 낳을 때 제왕절개로 출산하는 것 보다는 특별한 질병이나 의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상황이 아닌 한 출산의 고통을 다 겪으면서 아이를 낳는 것이 여인에게 있어서나 태아에게 있어서나 건강에 훨씬 더 유익하다. 많은 질병들이 극복되어야 하고 질병에 뒤따르는 고통이 완화되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질병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조심하게 하고 자기 몸을 돌보게 하고 육체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고 더 성숙한 정신을 갖게 한다.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선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열매들 중에서 고통의 과정을 통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의료인들은 가능한 한 죽음으로 귀결되는 질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지만, 죽음은 결코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영역으로의 삶의 이동이며, 현세에서의 삶보다 월등히 더 나은 삶으로 들어가는 복된 관문이라는 사실을 죽어가는 자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3) 구속. 죄로 인하여 찾아온 고통과 죽음은 궁극적으로 부활과 영생의 전망 안에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며, 이 전망 안에서 우리는 현세 안에서의 고통과 죽음의 현실을 받아 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부활과 영생의 전망 안에서 고통과 죽음을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두신 질서 안에서 일반은총의 수단들을 통하여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 수단들을 허락하셨다. 고통을 보내신 하나님이 이제는 고통에 대항하여 싸우게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과 고난과 죽음을 완전히 겪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고통을 경감시키는 수단들을 거부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인간이 죽는 것을 보시고 통분히 여기셨으며(요한복음11:38),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꾸짖으셨다(누가복음4:39).



5. 기독교생명윤리의 규범들 I: 성경으로부터

(1) 동기. 의료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의료행위의 동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의료행위는 병자들이나 신체적으로 결손된 자들을 치료하고 간호함으로써 이들의 생명을 보전하고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그렇다면 이들을 치료하고 간호하도록 동기부여를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기독교윤리학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곧 그 동기가 된다고 답변한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긍휼은 인간을 향한 긍휼의 원천이 된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는 마땅히 인간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 성부 하나님의 뜻이요, 바쁘고 피곤한 사역 일정 중에도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병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모두 치유해 주신 치유자 그리스도(Christus medicus)의 뜻이며,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 주고 계속적인 간호를 부탁했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가르쳐주는 뜻이며(누가복음10:25-37), 병든 자를 돌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돌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뜻이다(마태복음25:31-46).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가 계약관계로 형성되어 있는 오늘날의 의료계의 현실에서 의료행위는 환자의 권리와 의사의 의무라는 외적인 차원에서 인식되고 있는데, 내적인 긍휼이 결여된 상태에서 권리가 행사되고 의무가 이행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의료행위는 기독교의료인의 바른 의료행위가 될 수 없다. 기독교의료인의 의료행위는 반드시 인술(仁術)의 지평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

(2) 성경에서 도출된 규범들. 기독의료인들이 의료행위의 바른 동기를 갖추었다면 이제는 성경이 제시하는 규범들에 주목해야 한다. 사랑의 대계명(마태복음22:37-40), 황금률(마태복음7:12), 그리고 십계명(출애굽기20:1-17)은 기독교윤리 뿐만 아니라 기독교생명의료윤리의 반성작업에서도 보편적인 규범으로서 기능한다.

a. 사랑의 계명은 철학적 의료윤리문헌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 이유는 기독교적인 아가페로서의 사랑은 일반 철학적 윤리학에서는 여분의(supererogatory) 규범으로서 비상(非常)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철학적 윤리학에서는 여분의 비상한 것이 기독교윤리학에서는 평범한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기독교윤리학은 플레처의 상황윤리에서처럼 사랑 이외에는 어떤 타율적인 명령도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배격하고 사랑은 계명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사랑은 계명들을 필요로 한다(로마서13:8이하). 사랑은 누룩이요, 계명들은 반죽이며, 사랑은 콤파스요, 계명들은 도화지다. 사랑 그 자체가 이미 계명이다(요한복음15:10; 요한일서5:3; 요한2서6절).

b. 사랑의 대계명과 더불어 율법의 요약으로 선언되고 있는(마태복음7:12) 황금률은 인간을 이해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입장에 직접 서셨던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현된 규범으로서 타인의 입장에 서보는 훈련을 요구한다. 곧, 의료시술자는 고통을 받는 환자의 입장에 서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c. 십계명 가운데 특별히 의료윤리에 관련되는 계명은 6계명(살인하지 말지니라)이다. 생명을 주시고 거두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의료행위는 치료/고통의 완화/간호를 주업무로 하는 것으로서, 삶을 종결시키는 작업이 의료행위의 업무일 수는 없다.10)

(3) 문자주의의 위험과 성경규례들의 의학적 탁월성. 생명의료문제들에 대한 판단의 규범을 성경으로부터 도출하고자 할 때 앞에서 제시한 보편적인 윤리적 규범들 이외에 다른 본문들을 규범으로 채용하고자 할 때는 문맥과 정황을 무시한 문자주의적 인용을 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예컨대 여호와의 증인들은 레위기7:26,27에 있는 “피를 먹지 말라”는 규정과 사도행전15:20,29에 있는 “피를 멀리하라”는 명령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피를 먹는 행위나 수혈하는 행위는 모두 피를 섭취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한 행위라고 보고 수혈을 거부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이 명령과 현대의료계에서 시행되는 수혈행위의 각기 다른 정황을 무시한 결과다. 현대의료계에서 행하는 수혈행위는 죽음 앞에 직면한 생명을 구하기 위한 의학적 치료행위인 반면에 레위기나 사도행전은 식사관습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며, 피를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은 생명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수혈”행위는 성경기록당시에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했다. 성경은 의료행위의 기술적인 모범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므로, 성경의 어느 한 본문을 문자적으로 인용하여 의료기술시행을 위한 어떤 모범으로 삼는 것은 피해야 한다.11)

그러나 이 말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어떤 규례들이 비의학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어떤 규례들은 당시의 의료기술이나 의료문화의 수준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조차 없을만큼 탁월한 지혜를 담고 있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자.12)

a. 1840년 경 유럽의학계의 중심지였던 비엔나의 Algemeine krankenhaus에서 임산부 6명 가운데 1명이 죽어 나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원인을 조사하던 한 젊은 의사는 의사들이 손을 씻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는 의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당시 의사와 학생들은 죽은 임산부를 검시실로 들어가 검시한 후에 손을 씻지도 않고 또 고무장갑을 끼지도 않고 산과병동의 환자들에게 골반실험을 하기 위하여 들어갔다. 이 젊은 의사는 진료전에 손을 씻는 규칙을 제정하고 시행해 보았더니 규칙이 제정되고 난 이후 곧 임산부 치사율이 1/42로 감소되었고 다음달에는 1/84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 젊은 의사는 이 일 때문에 동료의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정신병원에 들어가 지내다가 죽었다. 그런데 민수기19:7,8 이하 전장을 읽어 보면 “제사장은 제물을 죽여서 불사른 후에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에 들어가라”는 명령이 나온다. 그것도 대야에 손을 씻고 흐르는 물에 손을 씻으며 빨래하여 말린 옷들을 갈아입고 대인관계에 임하도록 했다. 동물을 죽이는 과정에서 많은 균이 제사장의 손과 옷에 묻었다는 점, 그리고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에 씻어야 오물이나 균이 제대로 씻겨 내려간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이 조치는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위생상태를 유지하는데 매우 적절한 의료적 조치였음을 알 수 있다.

b. 19세기의 외과수술은 손씻는 일을 소홀히 했다. 수술대 위에 올라가면 의사들은 코트를 벗고 바로 도구를 꺼내어 수술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균이 우글거리는 학생들의 손으로 균이 없는 복부의 살을 찔러 보게 했다. 그 결과 포도상구균 때문에 외과수술의 치사율이 높았다. 1876년 손과 의료기구를 씻는 방법이 도입되면서 치사율이 극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손씻는 문제는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결되었다.

c.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인체의 배설물을 포장안된 길거리에 내다 버렸다. 이 배설물에 파리들이 들끓어 알을 깜으로 말미암아 콜레라, 이질, 장질부사와 같은 장성 질병을 퍼뜨렸고, 쥐들이 번성하여 흑사병이 돌았다. 그런데 신명기23:12-13을 읽어 보면 “너희 진 밖에 변소를 베풀고 그리로 나가되 너희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통할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이켜 그 배설물을 덮을찌니”라는 말씀이 있다. 변소를 진 밖에 베풀고 배설물을 땅 속에 묻음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위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유럽인들이 이 명령을 읽고 주의했다면 많은 질병의 발병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d. 졸도, 심장마비, 협심증, 괴저병, 신장병 등의 원인이 되는 동맥경화증은 콜레스테롤의 증가에 기인하는 것인데, 콜레스테롤은 동물성 지방질, 체중의 과다한 비대, 끽연(니코틴이 콜레스테롤을 형성한다), 육정적 감정과 긴장 등에서 형성된다. 증가된 콜레스테롤 종기가 혈관벽을 형성하여 동맥의 흐름을 방해하면 동맥경화증이 된다. 이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레위기3:17과 7:22-24에서 하나님이 “기름을 먹지 말라”고 명령을 주신 것은 의학적으로도 탁월한 조치였음을 알 수 있다.

e. 창세기17:10-12에 보면 남자가 태어나면 8일만에 할례를 받으라는 명령이 나온다. 그런데 이 명령은 의학상식적으로 볼 때 아주 탁월한 명령임을 알 수 있다. 뉴욕밸브병원의 조사에 의하면 유대인여자들에게는 자궁경부암이 거의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보스톤의 862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1954년의 조사결과 비유태계 여성은 유태계 여성 보다 8.5배 자궁암 환자가 많았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유태인 남자들이 할례를 받은데 기인한다. 남성성기의 제거되지 않은 표피에는 암을 일으키는 스메그마, 바치루스균을 포함한 유독성 균이 활발히 번식한다. 이로 인하여 성교시에 균들이 자궁경부에 잔존하게 된다.

신생아에게 할례를 행할 때에 생후2-5일 사이에는 출혈에 민감하고, 이때의 출혈은 확대되기 쉬우며, 두뇌에 손상을 주고, 쇼크와 빈혈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피를 응고시키는 비타민 k가 이 기간 동안에는 정상치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응혈소가 생후3일경에는 정상인의 33%였다가 8일째가 되면 정상인의 110%로 높아진다. 그 후에 이 숫치는 다시 감소한다. 그러므로 난지 8일째가 할례를 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기간이 된다.

f. 문둥병은 중세시대 유럽 최대의 재난으로서, 6,7세기, 13-14세기에 무서운 위세를 떨쳤다. 흑사병은 14세기에 네사람 중 한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갈만큼 위력적이었다. 그런데 당시 의사들은 이 병의 전염을 예방하는데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교회가 “병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서 살찌니라”는 레위기13:46 말씀에 따라서 사회에서 격리시켜 이 병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레위기13장은 위생법의 최초의 전형이었다.

g. 이 밖에도 바른 성생활을 강력하게 권고하는 본문들(잠5:1-12; 고전10:8;6:18; 살전4:3-8)에 순종할 때 성병을 근원적으로 예방할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보복심이나 분개심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때 많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 독성탄저, 졸도, 심장마비 등이 복수로 가득차 있는 마음에서 초래될 수 있으며, 결장염은 다른 사람과 싸울 때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며, 근심이나 혐오감이 뇌속의 혈액량을 증가시켜 두통, 구토증을 초래한다.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힌 정서상의 불안이 갑상선의 분비를 촉진시켜 독성갑상선종을 일으키고 난소의 분비작용에 영향을 주어 월경중단, 월경기 통증, 두통등을 초래한다. 부신이 과다하게 분비되면 고혈압, 관절염, 신장병, 동맥경화를 유발한다. 환자의 96%가 분개심 때문에 병이 든 자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는 출애굽기15:26의 말씀의 위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6. 일반 윤리학의 규범들II: 철학적 윤리학으로부터

생명의료윤리의 제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작업을 할 때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동기와 성경이 제시하는 규범들이 보편적이고 우선적인 판단기준의 역할을 하지만,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상황이 등장했고, 과학과 의료기술 등의 획기적인 발달이 이루어짐에 따라서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판단할 때 성경이 제시한 규범들을 새로운 언어로 해석하고 보완해 줄 수 있는 일반적인 규범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규범들은 생명의료윤리문제들을 판단할 때 기여하는 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의 한계와 결함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규범들은 성경이 제시하는 규범들을 해석하고 보완하는 방편으로만 사용되어야 하며, 성경에서 제시된 인간관, 동기, 규범들의 빛 안에서 비판적으로 수용되어야 하며, 후자와 갈등을 일으킬 때는 그 사용이 유보되어야 한다. 생명의료윤리의 영역에서 응용될 수 있는 규범들을 제시하는 일반윤리학의 입장들로는 여덟가지 관점을 말할 수 있다.13)

(1) 공리주의. 공리주의에서는 사회의 구성원들의 최대다수에게 최대의 행복 또는 쾌락을 가져오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바른 행위로 간주된다(결과주의). 이 입장은 예컨대 의료재원(財源)을 배당하는 의료정책에 있어서 많은 재원을 요구하지만 소수의 사람밖에는 혜택을 받을 수 없는 특수한 의료행위에 재원을 배당할 것인가, 아니면 다수의 많은 환자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평범한 의료행위에 재원을 배당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고가의 장비와 의술이 요구되는 질병이 치료가능해지면서 의료정의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오늘날 이 규범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규범의 무차별적인 적용은 다른 차원에서 의료정의에 해를 가할 수 있다. 곧 총량적 결과를 산출하는 행위가 가장 도덕적인 행위로 간주될 경우에, 불치의 질병을 가진 환자에 대한 치료와 간호, 노인에 대한 치료가 소홀히 될 수밖에 없으며, 오랜 세월 간호해도 결과가 신통하게 나타나지 않는 환자의 경우에 안락사가 더 적합한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 곧 공리주의의 원리가 의료정의를 깨뜨리는 방향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그 역으로도 사용될 수가 있으므로 이 원리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 여부를 판단할 수가 없다. 곧 어떤 경우에 이 원리를 적용해야 하고 또 어떤 경우에 적용을 해서는 안 되는가를 결정해줄 상위의 규범이 필요한 것이다.

(2) 의무론. 칸트와 계약사상가들에 의하여 대표되는 이 이론은 공리주의와 반대의 길을 걷는다. 의무론은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1. 윤리적으로 바른 행위는 결과나 내용을 고려하지 않고 다만 어떤 준칙에 따라서 행동하는 행위다. 물론 이 준칙은 일반적인 입법이 되었을 때도 보편적으로 타당한 준칙이어야 한다. “너의 행동을 지배하는 규칙이 일반적인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동하라.” 2.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간주된다. 3. 의무의 내용은 하나님이나 사회와 같은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고 오직 행위자의 이성에 의해서만 주어지며, 여기서 자기이익도 배제되지만 정서나 감정도 배제된다.

기독교윤리는 하나님이 제시하신 규범에 엄격히 순응하는 윤리라는 점에서 강한 의무론적 특징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나의 행동이 일반적인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는 공리는 황금률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기독교윤리학은 두 가지 점에서 의무론과 입장을 달리한다. 1. 의무론에서 인간관계는 법적 관계로 규정된다. 의무에 따라서 어떤 준칙을 준수하는 인간들의 공화국이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여분의 요소로 밀려나고 정서와 감정은 윤리적인 것이 자리잡을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의무론의 틀만을 가지고는 계약관계에 근거한 의료행위의 비인간화를 극복하기 어렵다. 2. 의무론은 인간의 이성이 보편적 가치의 인식주체라는 신념을 가지고 이성으로부터 규범을 끌어내지만, 기독교윤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죄에 손상된 이성은 자기이익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이용될 뿐만 아니라 또한 주관성을 탈피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를 판단하는 보편적인 규범이 인간의 이성에서 도출된다는 자율성의 원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3) 자연법 이론. 이 이론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대표되는 이론으로서, 인간의 삶의 구조 곧,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묘사로부터 책임적 행동을 위한 규준(prescription)을 도출한다. 하나님은 만물 안에 영원한 법(lex aeterna)을 두셨는 바, 이 법은 만물의 목적으로서 하나의 가능태(potentia)로 주어져 있다. 이 가능태로부터 현실태가 발전하게 되는데, 가능태를 현실화하는 행위는 선한 행위로 간주된다. 인간은 자연 또는 본성의 법(lex naturae)안에서 영원한 법에 참여하며, 이때 본성 가운데 있는 이성이 목적 곧 영원한 법을 인식한다. 여기서 인간의 이성은 인간 자신의 자의적인 판단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적에 주목하게 되므로 하나님이 주신 자연스러운 삶의 목적에 배치되는 행위 예컨대, 피임이라든가, 성전환수술, 의료기술의 자의적 남용 등이 견제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지적될 수 있다. 1. 인간의 본성은 다양한 충동과 성향을 가지는데, 그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이성만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곧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이성만을 특별히 선별해낸다는 것은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어떤 신념 내지는 가치체계가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예컨대 자연법 이론의 배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관과 우주론이 깔려 있는 것이다. 2. 이성을 포함한 인간의 본성이 과연 윤리적 규범을 도출해낼 수 있을 만큼 깨끗하고 온전한가? 과연 본성은 그 본성에 따라서 행동하기만 하면 보편적으로 타당한 윤리적 실천을 할 수 있을 만큼 조화롭고 완전한가?

(4)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의무론과 입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의 자율적 이성에 의하여 도출된 규범이 정당성을 부여받으려면 인류보편의 입법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제한을 가함으로써 인류를 위한 윤리를 지향하고 있는데 반하여, 자유주의에서는 각 개인의 자율적 권리를 중요시한다. 여기서는 각 개인이 원하는 내용이 중시된다. 이 이론에서는 각 개인이 원하는 바를 획득할 권리는 천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낙태권이나 폐경 후의 인공수정을 통한 임신도 당당한 개인의 권리로 주장된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의료윤리의 차원에서 후견주의적인 의사의 의료행위에 대한 환자의 요구권(claim right)을 확립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기독교윤리학의 입장에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세 가지 점에서 비평된다. 1. 자기의 권리를 도덕적 행위의 출발점으로 삼는 태도는 기독교윤리학의 출발점이 되기 어렵다. 기독교윤리학에서는 자기가 출발점이 되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관심이 출발점이 되며, 권리보다는 의무가 선행한다. 2. 모든 사회의 구성원이 각각 자기의 권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사회에서 타인은 경쟁자로 인식되는 반면 기독교윤리학에서는 타인은 경쟁자이기에 앞서서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면서 조화로운 유기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존재다. 3. 개인의 권리는 천부적이거나 생득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사회/정부에 의하여 부여되는 것이다.

(5) 공동체주의.14)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것인데, 덕은 사회적 관습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보면서, 공동체적 가치, 사회적 목적, 사회가 규정한 덕을 행하는 것이 바른 윤리적인 행위로 판단된다. 공동체주의적 의료윤리를 전개하는 캘라한(Callahan)은 개인의 건강이라는 것도 사회생활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15) 공동체주의는 전통/역사/관습/사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는 공헌이 있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들은 비평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1. 공동체주의에서 덕의 지평으로 말하고 있는 공동체의 개념이 무엇인지 애매모호하다. 매킨타이어와 같은 공동체주의자의 경우에 공동체는 통일된 가치관이 지배하는 희랍의 도시국가 정도의 규모를 염두에 둔 개념인데, 오늘날 매킨타이어가 상정하는 그와 같은 공동체가 과연 존재하는가가 문제다. 적어도 국가단위로 커진 오늘날의 사회 안에는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공동체들이 다원적으로 존재하는 형태를 띠고 있으므로 덕의 개념도 다원성과 주관성을 벗어날 수 없다. 2. 관습과 전통이 자연스럽게 보편적인 규범을 도출해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만큼 아름답고 선한가가 문제다.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들은 결코 선하지 못하며, 이들이 형성한 관습과 전통은 많은 경우에 외부에 대하여 폐쇄적이고 독단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동시에 공동체내의 관습과 전통은 이미 존재의 구조로 변해있을 경우가 많은데, 이 존재의 구조가 당위의 구조로 바뀌는 작업은 공동체의 자정능력을 통해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외부로부터 규범적 충격이 가해져야 이 존재의 구조는 바뀐다. 한마디로 공동체가 어떻게 선한 공동체가 될 수 있으며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공동체자체로부터 답변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6) 돌봄의 윤리(care ethics, zorg-ethiek). 돌봄의 윤리는 주로 여성의료윤리학자들에 의하여 형성된 이론으로서,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를 칸트적인 법적 계약관계로 보는 입장에 반발하면서, 환자와 의사 사이의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강조하는 입장을 말한다.16) 인간은 연약하고 가사적(可死的)이며, 타인에 의존하여 생존해야 하는 존재라는 점을 고려할 때 도덕이란 법과 규칙의 문제가 아니라 사려 깊은 돌봄과 타인에 대한 책임의 문제로 정의된다. 만스코트(H.A.M. Manschot)에 의하면 계산하지 않고 재지 않는 태도가 인간의 행복과 삶의 기쁨의 원천으로서, 자유로운 마음으로 간호가 주어질 때 간호는 더 포근하고 친밀해진다고 한다. 이때 공동체와 문화가 형성된다. 오늘날의 계약윤리는 베푸는 윤리로 전환되어야 한다.

돌봄의 윤리는 정서적 측면이 윤리학에서 중요시해야 할 요인임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에 공헌이 있다. 윤리학은 철학적 의무론의 전통의 주장과는 달리 정서적 측면을 배제하지 않는다. 불의한 현실을 보고 감정적으로 분노하는 것은 윤리적 반성의 계기가 되며, 정서적인 긍휼의 마음은 모든 도덕행위자들의 마음바탕에 깔려 있어야 하는 중요한 요소다. 뿐만 아니라 돌봄의 윤리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틀 안에서 권리논쟁에 참여하기 어려운 사람들 곧, 장애자들, 기타 의료치료에 의존하는 자들을 변호하기에 적합한 윤리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서적 양상이 돌봄의 전부를 포괄할 수가 없다. 예컨대 의료재원의 배당의 문제에 있어서는 감정보다는 엄격한 정의의 원리가 우선해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규칙과 원리가 뒷받침되지 않은 정서나 감정은 맹목으로 흐를 수가 있다.

(7) 결의론. 결의론은 한가지 사례에서 행해진 결정을 비슷한 다른 사례들에 적용하는 태도를 말한다. 여기서 전통적인 결의론과 현대의 결의론이 입장을 달리한다. 전자는 윤리적 원리를 특별한 사례에 적용하는 입장을 취하고, 후자는 사례로부터 윤리적 원리를 끌어내는 입장을 취한다. 모든 윤리학은 사례에 관계한다는 점에서 윤리학은 결의론을 의미 있게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러나 과연 사례로부터 윤리적 규범의 도출이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사례가 스스로 윤리적 판단을 산출해낸다는 것은 자연주의적 오류 곧, 존재-당위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사례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표준은 사례로부터 올 수 없고 외부로부터 사례를 향하여 주어질 뿐이다. 사례로부터 옳은 규범의 도출도 가능하지만 나쁜 규범의 도출도 가능하다. 예컨대, 안락사가 오늘날처럼 넓어진 이면에는 결의론의 단계적 발전이 중요한 기여를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임종시에 환자의 요구가 있을 때에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신체적 고통이 있는 경우에 안락사가 허용되더니, 다음에는 심리학적 고통의 경우에도 허용되었고, 다음에는 임종시가 아닌 경우에도 허용되었으며, 나중에는 본인의 의사를 묻지 않은 채 정신착란증세를 보이는 환자에게까지 확대적용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미끄러운 경사면의 논증, the slippery slope argument).

(8) 네 원리의 윤리. 이 윤리학은 현대의 철학적 의료윤리학계에서 가장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뷰챔프(T.L. Beauchamp)와 칠드레스(J.F. Childress)에 의하여 주장되고 있는 이론으로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도덕적 원리들이라고 간주되는 자율성, 무해성, 인애, 정의를 규범으로 하여 윤리적 반성을 전개한다.17) 그런데 여기서 이런 규범들은 “반증이 없는 한 인정되는 규범들”(prima facie normen)로 이용된다. 여기서 뷰챔프와 칠드레스는 존 롤즈(John Rawls)가 말한 반성적 균형(reflective equilibrium)의 방법론을 채용한다.18) 반성적 균형이란 규범과 현실 사이의 역학관계를 표현하는 용어다. 먼저 충분히 “숙고된 판단”(considered judgment)을 통하여 어떤 이론(규범)을 구성한다. 그리고 특별한 반증이 제시되지 않는 한 이 규범이 우선적으로 고려되고 이 규범에 따를 의무가 주어진다. 그러나 현실로부터 이 이론을 유지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는 이 규범의 적용은 일단 유보되고 그 규범과 예외적인 현실을 포함하는 “숙고된 판단”과정이 다시 시작되어 새로운 규범의 형성을 도모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는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완전에 가까운 형태의 규범의 도출을 향해 나아간다.

뷰챔프/칠드레스가 말하는 네가지 원리들이 윤리학에서 각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규범들 가운데 이 네가지 원리들을 선정한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뷰챔프/칠드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 원리들이 직관을 통하여 일반적인 원리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왜 3개나 5개가 아닌 4개가 선정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두 사람은 답변하지 못한다. 또한 4개의 원리들 상호간에 충돌이 일어날 때 어떻게 우선순위를 정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답변을 제시하지 못한다.



7. 나가는 말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정리해 보자. 의료행위란 육체와 영혼이 긴밀한 상관성 안에서 유기적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전인적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대상으로 하며,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보전하는 행동을 뜻한다. 의료행위는 인간의 전인적 생명의 보호와 보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복음을 통하여 작용하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한 영혼의 깊은 차원, 곧 속사람의 차원의 생명까지도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료행위의 옳고 그름 여부를 기독교적인 인간관과 규범의 지평 안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반성하는 것이 기독교생명윤리의 과제다. 기독교생명윤리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원한 존재로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타락함으로 인하여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포함한 고통 속에 있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빛 안에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전제한다. 질병과 질병으로 인한 고통의 극복은 의료행위의 임무이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질병과 고통 가운데는 의료행위로서 극복될 수 없는 것들도 있으며, 또한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이 설정하신 질서로서 인간을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들도 있다. 의료행위는 환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 아가페적인 사랑, 환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의료기술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목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의료행위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총량적이고 평균적인 복리의 증진을 고려해야 하지만, 이 목적을 위하여 불치의 질병을 가진 환자나 노인환자에 대한 치료가 희생되어서는 안된다. 의료행위는 법적 차원에서 공정성을 잃어서는 안되지만, 환자에 대한 정서적인 따뜻한 심성이 상실되어서는 안된다.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에서 의사는 항상 강자의 입장에 있고 환자는 자기의 생명을 의사의 손에 맡기는 약자의 입장에 있으므로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항상 법적 계약관계에 머무를 수가 없고, 후견적인 관계에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의사는 환자의 요구권을 존중해야 하지만, 환자의 요구권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규범을 깨뜨리는 요구를 해올 때는 요구권을 거부해야 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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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형룡, “내세론” (성루: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95), 54-55;149-62; 박아론, “기독교종말론: 영생과 내세”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8), 30-33; 123-38.

2) 육체의 죽음이 영혼의 존재여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인간관을 견지할 때 놔사의 시점을 인간의 죽음의 시점으로 판정할 것인가, 아니면 심장사의 시점을 인간의 죽음의 시점으로 판정할 것인가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을 확립할 수 있다. 뇌사를 인간의 죽음의 시점으로 생각하는 견해의 배후에는 인간의 영혼이 뇌의 작용의 산물이며, 따라서 뇌의 작용이 중지되면 인간의 영혼도 사라진다고 보는 유물론적 인간관이 자리잡고 있다. 곧 전기스위치를 넣어서 전류가 흐르면 빛이 존재하다가 전기스위치를 꺼서 전류의 흐름을 차단시키면 빛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리듯이, 뇌의 기능이 정지되면 영혼 그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신체의 어떤 기능에도 그 존재여부를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의 죽음은 영혼의 죽음을 의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혼은 - 신자의 영혼이든 불신자의 영혼이든 - 결코 죽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육체의 죽음을 결정할 때 육체의 전체적인 작동기능이 정지되는 심장사 이외에 어떤 라른 기관의 기능정지도 인간의 최종적인 죽음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자궁의 기능이 정지되었다고 해서 죽은 자로 판단할 수 없듯이 뇌의 기능이 정지되었다고 해서 죽은 자로 판단할 수 없다.

3) J. 다우마, “개혁주의 윤리학” 신원하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9.

4) 이 틀의 기본골격은 J. Douma, Medische ethi다 (Kampen: Kok, 1997), 44-52 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5) John Calvin, Institutues of the Christian Religion (Grand Rapids: Eerdmans, 1989), I.15.4.

6) 박형룡, “인죄론”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8), 97-99.

7) 박형룡, “인죄론”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8), 98.

8) Calvin, ibid, I.15.3.

9) 신학에서는 죄로 말미암아 찾아온 죽음으로서 세가지 죽음을 말한다(박형룡, “내세론”, 51; 박아론, “기독교종말론: 영생과 내세”, 29.) (1) 인간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영적인 죽음. (2) 신체가 해체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적 죽음. (3) 끝까지 주님을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영혼과 육체가 모두 지옥의 형벌에 들어가는 영원한 죽음. 그런데 유의할 것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결코 존재의 소멸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번 창조된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육체적으로 죽을 때 영혼도 같이 소멸되어 없어진다는 생각은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생각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언제나 하나의 존재의 방식 또는 영역으로부터 또 하나의 존재의 방식 또는 영역으로의 이동을 의미할 뿐이다.

10) Douma, ibid., 52-55.

11) Ibid., 38-39

12) 이 내용은 S.I. 맥밀런, “현대의학과 성경”, 문창수 역 (서울: 백합출판사, 1974)의 내용을 발췌정리한 것이다.

13) 여덟가지 유형들에 관한 내용은 Douma, ibid., 60-91에 크게 의존해 있다.

14) 공동체주의의 윤리적 입장에 대하여 알아 보려면, Alasdaire MacIntyre, “덕의 상실”, 이진우 역 (서울: 문예출판사)를 보라.

15) D. Callahan, What Kind of Life?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90), 105ff.

16) Carrol Gilligan, In a Different Voic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28): H.A.M.Manschot, Levenskunst of lijfsbehoud (Utrecht: Universiteit voor Humanistiek, 1992).

17) Tom L. Beauchamp and James F. Childress, Principles of Biomedical Ethics: Fourth Edi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120-394.

18) John Rawls, A Theory of Justic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3), 20f, 48-51,120, 432.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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