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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윤리자료실
작성자 : 박충구     2015-06-11 13:56
생명공학 시대와 기독교 생명윤리(2006. 10. 31.)


생명공학 시대와 기독교 생명윤리


박충구(감신대 기독교윤리학 교수)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주최 "생명공학과 생명윤리" 세미나 주제발표

(2006. 10. 31. 강변교회)

발표일 : 2006. 10. 31.

   

 

I. 생명공학과 생명윤리

20세기 이후 분자생물학의 발전은 현대 생명공학의 발전을 불러와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고유한 존재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어왔던 전통적인 생명질서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왔다. 인간 생명의 수태과정부터 인간 생명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개입을 초래한 것이다. 인공수정 기술은 사랑 없는 생명의 잉태를 가능하게 했고, 대리모 논쟁을 불러왔으며, 인공유산 논쟁은 잉태된 생명을 중절시킬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찬반 논쟁을 불러왔다. 1990년 출발한 Genom Project는 인간 생명의 신비로 여겨졌던 인간 유전자 염기서열 분석을 통하여 인간 유전자가 32, 000여개에 이른다는 사실을 밝혔다. 인간 유전자 정보를 분석한 과학자들은 유전자 정보를 분석하기에 이르고 유전학적인 우생적 연구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개체 인간의 유전자 정보의 유출과 사용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미래와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의 요인이 되고 있다. 현대 생명공학자들이 법적 도덕적 제약에 의하여 멈칫거리고 있지만 많은 이들은 인간생명에 대한 신비, 판도라의 상자는 열려졌다고 생각한다.

인간 생명에 대한 인간의 개입과 조작은 오늘날 인간생명의 초기단계인 배아복제에 집약되어 있다.1) 우생학적으로 열성인자를 가진 선천성 불치병 환자나 후천적으로 발생한 사고로 인하여 재생 불가능한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앞세워 인간 생명을 조작 발생시키고, 생명의 모태인 자궁을 단순한 생명공학적인 인큐베이터와 같은 자원으로 여성의 몸의 일부를 생명공학 연구를 위한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생명공학 실험실은 기존의 윤리와 도덕으로 통제 불가능한 과학자의 영역이 되었다는 사실이 지난 해 황우석 교수의 인간배아복제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검증적 과정에서 밝혀졌다. 연구윤리의 부재도 문제지만, 생명공학자들에 대한 정부관료, 제약회사, 그리고 민족주의적인 언론과 실질적 혜택을 기대하는 난치병 환자들의 기대가 실질적 업적을 과장, 확대, 부풀리거나, 사실을 왜곡하고 허위 날조된 데이터를 공공의 세계에 발표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런 과정에서 심각하게 결여된 문제들은 생명공학자들의 도덕적 판단능력에 대한 과신, 즉 technocrats의 영역에 대한 일반의 무지와 맞물린 과학기술자들의 조작적 행위가 그들의 전문 영역에서 일어나고 이를 검증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그들의 연구실은 생명윤리의 부재, 사회윤리의 부재, 학자로서 학문적 정직성의 부재, 첨단 과학적 업적에 대한 검증적 시스템의 결여, 그리고 그들을 전적으로 믿고 지원했던 기술 관료들의 정치적 판단들 속에 결여되어 있었던 생명윤리의 결핍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이러한 비양심적인 업적주의적 과학자들과 국민적 합의와 환호를 선도한 일부 정치가들, 그리고 전문영역에 대한 검증적 능력이 결여된 언론의 합작품은 사기성이 농후한 한 과학자를 필두로 한 집단의 오류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서 드러난 생명윤리의 정도가 얼마나 초라한 단계에 봉착되어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이런 과정에서 불교도인 한 과학자를 지원하기 위하여 불교계는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인 지지를 보내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NCCK는 매우 타협적인 입장에서 비판적 지지의 입장을 내비쳤다. 기독교 생명윤리의 관점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생명윤리학적인 합의 없이 이루어지는 생명공학의 위험을 지적한 이들은 단순히 반민족적인 단순 보수 종교인으로 매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황우석 교수 연구팀들이 데이터를 조작하고, 사실을 왜곡했으며, 검증적 연구 결과를 제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언론과 정부가 황우석 지지의 입장에서 물러서기 시작했고, 한국 사회는 생명공학 특수를 기대하던 환상에서 깨어났다. 이런 지난 과정은 생명공학 시대의 서막에서 일어난 단순한 해프닝으로 자리를 잡을 것이지만, 어쩌면 인간들이 가진 욕망과 환상, 그리고 그 욕망충족과 환상의 현실화를 향한 요구들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러한 탈생명윤리학적인 생명공학 실험은 그 결정적인 신뢰도가 확인될 때까지 은밀히 반복, 확대될 것이라고 예측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정황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보전과 기독교적인 생명경외의 윤리의 기준을 되새기고, 현대 생명공학이 지향하고 있는 지표들에 대한 기독교 생명윤리학적인 정보 분석과 비판 그리고 감시적의 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를 위하여 현대 생명공학의 동향에 대한 정확한 정보 수집 및 분석과 예측이 요구되고, 현대 생명공학의 동향에 대한 세계 기독교 신앙 공동체들의 공동 실천을 위한 기본적 합의도출이 요구되며, 나아가 생명공학에 대한 국가기관의 입법 및 정책 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기독교 신앙인의 신앙적 양심의 자유와 실천을 담은 기독교 생명윤리와 어긋나는 생명공학적 동향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결연한 비판과 이의를 제기하는 동시에 기독교 생명윤리를 더욱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생명공학에 대해서는 진지한 지지와 후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

 

II. 생명윤리학적 대혼란

현대 생명공학 연구자들은 그들의 연구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부정적인 내용들은 축소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1970년대부터 일어난 인공유산 논쟁은 인공유산 시술 행위의 윤리적 정당성과 부당성에 대한 찬반의 결렬한 논쟁을 불러왔다. 이런 논쟁은 우리나라에도 파급되어 왔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의 산아제안 정책과 맞물려 인공유산이 오히려 조장 촉진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기독교계의 반응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고, 단지 개인적인 단순한 견해들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독일 같은 나라는 법적으로 인공유산이 자유롭지 못하고 특별한 의료적 사유 없이 인공유산 시술을 받을 수 없도록 제한되어 있다. 이런 법적인 합의는 형식적 합의가 아니라 실질적 합의로서 의사나 사회 그리고 법제도 장치를 통하여 실천되고 있다. 이런 합의에 이르기 위해 독일 교회는 1988년 기독교 생명윤리에 대한 원칙을 담은 백서(Das Leben Achten, 1988), 그리고 이어 신학적 생명윤리를 해명하는 백서(Gott ist ein Freund des Lebens: Herausforderungen und Aufgaben beim Schutz des Lebens, 1991)를 발간 배부했고, 이어 1993년 인공유산에 관한 연구 백서(Schuwangerschaftsabbruch)를 작성 독일 교회 신앙 공동체 구성원의 이해와 판단을 위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생명윤리에 관한 백서(Leben im Angebot, Das Angebot des Leben, 1994)2)를 연이어 냄으로써 독일 교회 내 기독교 생명윤리학적 교육과 합의를 도출하여 사회구성원들을 선도했다.

이러한 백서들이 연이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생명의 잉태와 죽임, 즉 인공수정, 대리모 및 인공 유산시술에 대한 사회윤리학적인 논쟁이 일어나 자녀를 가질 자유주의적 권리와 산모의 선택권을 주장하는 찬성입장과 생명창조의 부자연스러움을 불신앙으로 보고 태아의 생명권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교회가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만이 아니라 생명공학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 생명 현상의 조절 및 통제 가능성이 논의되기 시작하여 유전자 검사 그리고 유전병 검사 및 예측에 관한 찬반논의가 일어나 한편에서는 불치의 유전정보를 검사하여 예방의학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장점을 주장하는가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의료적 개입 및 미래와 자유를 박탈한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입장이 일어났다.

이와 더불어 “생명의 연장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논란이 이어져 장기이식 시술의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대체가능한 장기교체를 통한 생명연장을 승인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생명의 통전성을 부정하고 인간 장기의 부품화 및 장기 생산의 비윤리성을 지적하며 반대하는 입장이 대립되었다. 특히 생명의 종식 및 죽음과 관련된 조력자살, 안락사문제에 대해서는 인간의 죽음 선택권과 인도적 조력 정당화하는 입장3)이 있는가하면 조력 자살이라 할 수 있는 안락사는 생명권 부정과 비인도적 조력으로서 생명경외와 돌봄의 윤리에 위배된다는 논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 인간 유전자 분석능력을 확보함과 더불어 생명과학자들은 생명복제 및 줄기세포 연구를 진행시켜 또 다시 불임부부 자녀 산출권과 불치병 환자의 치료 희망을 불러온 데 반하여 윤리학계로부터는 생명질서 교란을 초래할 행위로서 생명복제는 자연적 생명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대 계산의 혼란, 예측 못할 변종의 출현, 우생학적 잡종의 출현, 세포 치료의 불안정 등을 이유로 비판이 제기되는 일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현대 생명공학자들은 또 다시 새로운 생명의 지평에 인위적 노력을 가하고 있다. 현대 생명공학은 특히 세 가지 방향을 주목하고 있는 데 그 첫 번째 방향은 유전 공학적으로 변형된 우생학적 동식물을 연구하는 방향이다. 여기서는 우생학적으로 변형된 식량자원을 증산하는 일과 더불어 유전공학적으로 변형된 인간장기 생산가능성까지 예특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런 생명공학이 불러올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유전자 변형 식품과 동물이 인간 및 종의 생명 안정성을 파괴할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있을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런 실험이 만의 하나라도 잘못될 경우 생명현상에 치명적인 효소의 생산 및 자연증가가 일어날 경우 생명계에 미칠 위해와 혼란은 묵시적인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대 생명공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는 두 번째 방향은 생태계의 오염을 희석시킬 수 있는 생물의 개발이나, 화석연료의 고갈과 원자력 에너지에 의존되어 있는 현대문명의 전환을 불러올 대체에너지의 개발인데 예를 든다면 석유화학물질을 생산해내는 식물의 개발과 같은 연구(bio-fuel, white bio-tech)이다.

하지만 현대 생명기술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연구 분야가 바로 red-bio-tech라 불리는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는 IT가 BT와 결합하면서 엄청난 정보를 분석할 능력을 가지게 된 2000년을 시점으로 경쟁이 촉발되었다. 2002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2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영국 최대의 생명공학 연구소인 Sanger Institute를 방문하여 돌아보았을 때, 그 연구소는 년 1억 파운드를 사용하며 인간 및 동식물의 유전자를 분석하고 그 자료를 정보화하고 있었고, 그 분석된 정보에 따라 무수한 생명공학자들이 유전자의 발현관계를 식별해 내는 개별 실험을 하고 있었다.4) 생명의 발현 과정에 대한 분석과 유전자의 기능에 대한 분석이 완료될 경우 인간의 질병의 원인과 과정이 밝혀지고 노화방지와 수명연장을 위한 의학적 조치가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과연 생명의 신비가 모두 벗겨질지, 이보다 더 깊고 미세한 생명의 깊이가 또다시 드러나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생명의 신비가 벗겨져 인간생명의 형성-성장-노화-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생명과학자들의 손안에 쥐어진다면, 인간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될 것이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III. 기독교 윤리학적 관점의 다양성

생명공학과 현대의료 기술의 병행 발전관계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건들을 불러왔고, 기존의 기독교 윤리학적 판단 범주만으로는 명시적인 이해를 제기하기 어려워졌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현대 생명공학자들의 사고와 경험은 매우 탈기독교적인 가치, 즉 기독교 윤리학적인 생명이해에서 급속히 이탈하는 양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세 가지 방향으로 갈리게 되었다. 급진적인 입장은 현대 생명과학이 생산해 내는 새로운 생명조작방법을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로 보려는 시각이다.5)

이 입장은 인간의 선택권을 확대하여 불임자녀의 자녀 산출권의 한 방법으로서 생명복제 행위를 승인하지만 다만 그 기술적 불안정성 때문에 반대한다. 생명복제 기술의 취양성이 극복되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또한 이 입장은 인간은 자신의 행복이나 살아있음만이 아니라 불행과 죽음까지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개인의 삶과 죽음의 선택권을 긍정하려한다.6) 자율적이고 자기 책임적인 인간을 전제한 판단이지만 생명복제나 인공유산, 안락사 문제의 긍정적인 측면들을 강조하면서 그 비윤리성을 비판하는 입장을 거절한다. 여기서는 전통적인 기독교 윤리학적 생명이해의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인간의 생명 공학적 행위를 피조된 공동 창조자(created cocreator)의 역할로 이해하려 한다.

이 입장이 가지고 있는 갈등은 현대 생명 공학적 행위를 하나의 사실로 인정할 경우 이를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즉 누군가가 하나의 생명을 복제해 냈다면 교회는 그 복제된 생명에 대해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정하고 선언하며 지키고 돌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생명복제를 환영하는 바는 아니지만, 만의 하나라도 이런 일이 일어날 경우 기독교 공동체는 이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생명 공학적 실험의 결과 산출된 생명을 교회는 배타하거나 외면할 수 없다는 목회적 배려의 여지를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둘째 입장은 현대 생명공학의 소산들에 대하여 생명공학자들의 비신앙적 인위성을 근거로 그 결과를 거부하고 비판하는 입장이 있다. 가톨릭 교회는 자연법론적 전통에 따라 생명윤리에 있어서는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 온 바, 인공유산, 인공수정, 생명복제 및 생명조작행위를 불신앙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이를 거부 비판한다.7) 오직 자연스러운 질서를 따라서 태어난 생명만이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앞서 급진적 입장이 과학적 모든 행위를 감싸 안는다면 이는 마치 살인행위도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행위로서 긍정되어야 한다는 입장과 다를 것이 없다고 비판한다.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입장이 개신교 근본주의적인 신학적 입장이다. 현대 생명공학이 분자생물학적인 변이를 과학적으로 불러올 수 있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일종의 미시적인 생명의 진화 양상을 승인하는 것이라 간주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통전성을 해하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하나님의 일회적 창조를 통하여 온 생명이 완성된 것이므로 이의 변형이나 하나님의 창조를 미완의 창조로 여기는 논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낡은 지구론을 주장하는 진화론과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는 창조과학회의 입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가톨릭교회의 자연법론적 생명이해와 더불어 일회적 창조로 완성된 생명의 보전을 위한 노력은 긍정할 수 있지만, 우생학적 진보와 생명의 변형, 그리고 생명의 종식과 중절은 하나님의 생명 주권에 대한 거절이며 배반이라고 간주하여 종교적인 중죄에 해당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거부한다. 가톨릭교회와 유사하게 달리 개신교 주류의 교회들은 자연의 질서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통전성 보전과 생명존엄의 가치를 생명윤리의 근간으로 삼고, 생명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리책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생명질서를 교란하는 생명공학자들의 생명주권 침해를 비판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존재론적 생명가치를 부정하는 생명복제 및 조작적 행위를 비판 거부해 왔다.

보다 에큐메니칼한 세계의 여러 교회들은 생명의료 영역에서 제기되는 “가능한 행위“와 ”해서는 안 되는 행위“ 그리고 ”해도 되는 행위“를 구별하여 하였고, 이를 기독교 생명윤리학적인 유산을 재검토하면서 새로운 정황에서 바람직한 합의를 도출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위의 독일 교회의 노력과 유사하게 미국 루터교회는 인공유산에 관하여 1970년에 백서를 냈고, 1978면에 다시 이 문제를 더욱 심도 있게 규명하려 했으며, 1991년에 낸 백서에서는 인공유산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종합하는 견해를 제시하여 총회의 인준을 받았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에큐메니칼 교회들은 사레와 정황을 구별하고, 원칙과 상황이 부딪히는 현실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입장을 수용하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원칙적 생명권옹호와 이중효과의 이론을 통한 효용적이며 실용적인 가치를 수용하고, 과학적 데이터를 수용하여 종래 가지고 있었던 생명현상에 대한 이해를 수정하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 수용과 긴장이라는 두 축이 형성되는 데, 예를 든다면 동성애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수용하여 목회적 배려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한편 기독교적인 고결한 삶의 원칙에서는 배제하는 입장이다.8)

기독교 안에서 형성되는 생명공학의 발전과 의료적 적용에 대한 이견들은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내부적 결속을 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교회 내 분란의 요인이 되고 있으므로 다양한 견해의 수용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뿐 아니라 생명과학자들이나 의료인들이 기독교인들이 아닌 경우도 많으므로 전문적인 간학문적 연구를 통하여 보다 보편적인 윤리적 지평을 확보하지 않으면 교회의 판단에 대한 공신력을 상실하여 일반의 신뢰를 잃거나 심한경우 비전문적인 영역에 대한 경솔한 언급으로 인하여 기독교 일반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점에서 각국의 교회들은 생명윤리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연구위원회를 상설해 두고 사회윤리 현안들에 대한 연구 과제를 수행한 후 교회 내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다만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권위아래 교도권(teaching authority)을 행사하기 때문에 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합리적 승인과 일치된 동의를 요구하는 형식을 가지지만, 개신교는 평등주의적 신학적 사고, 그리고 자연법론적 도덕 신학적 토대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신앙 이성의 한계 안에서 상황분석과 이에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여 교회 내 토론과 합의를 도출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즉 교회는 상황분석을 통해 현실이해의 자료를 제시하고 전통적인 생명윤리학적 관점에서 가능한 판단 형식을 제안하고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승인과 합의를 도출하려는 노력에 그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사회 윤리학의 제 분야에서 교파와 교단마다 다양한 견해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하지만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의 자유, 그리고 사회의 공공성이라는 범주는 매우 중요한 판단의 범주로서 인간의 권리와 사회성에 대한 기본 합의를 공유하고 있다고 본다.

 

IV. 인간생명조작 시대의 윤리적 문제

 

1. 인간에 의한 인간생명 조작의 비윤리성 문제

인간에 의한 인간조작은 인간간의 평등권이해를 위협하고 조작인과 피조작인 간에 자유의 침해와 박탈이라는 문제를 낳는다. 하나님에 의하여 평등하게 피조되었다는 기독교 인간학의 기초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문제며, 서구 인권사상의 자유와 평등과 유대에 대한 가치체계를 위협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의 시발점은 993년 미국의 죠지 워싱턴 대학의 스틸만과 홀(Stillman and Hall) 교수 연구팀에 의하여 인간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수정된 17개의 수정란을 분할하여 48개의 수정란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는 데에서 출발하였다. 생명의 물리적 분열을 통한 개체의 발생을 조작한 것이다. 이어 1997년 영국의 에딘버러 대학의 로슬린연구소에서 이안 윌멋(Ian Wimut) 박사는 체세포 복제의 방법으로 발생시킨 복제양 돌리의 탄생을 발표하였으나 이 경우 동물실험이었으므로 자유와 평등권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으나 동물의 생명권 문제는 심각하게 도전받은 사건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어 1998년 산부인과 의사인 죤 기어하트, 제임스 톰슨은 사람의 줄기세포를 추출하여 배양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고, 이후 세계는 인간 생명의 기초단위인 배아를 파괴해야만 얻을 수 있는 줄기세포 연구가 지극히 비윤리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 논쟁에 빠졌다. 여기서 배아가 생명인가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생명의 기초단위인 배아의 도덕적 지위를 박탈하려는 과학자들과 윤리학자들간의 논쟁이 일어났다. 이어서 일어난 논쟁은 인공유산과 인공수정 시술을 해온 의료계의 관행의 관점에서 본다면 배아의 도덕적 지위를 재론하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논쟁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반면 배아를 단순한 세포군으로 여기고 실험과 분석과 분해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과학자들의 연구방향에 인간 존엄성과 생명권의 논의가 쐐기를 박는 일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배아줄기세포 연구가들과 체세포줄기세포 연구가들의 차이는 기능적인 연구과제의 특성을 논외로 한다면 생명윤리학적 입장의 차이라 볼 수 있다. 생명존엄과 경외의 윤리 안에서 연구를 할 것인지 아니면 생명존의와 경외의 윤리 밖에서 연구를 수행할 것인지를 결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서구의 각 나라들은 생명윤리법안을 통하여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생명윤리법은 교묘하게 이러한 생명윤리의 핵심적 논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작적으로 법안이 만들어 졌다고 나는 판단한다.9)

 

2. 비윤리적 생명공학을 지원하는 권력 및 여론의 문제

2004년 2월 한국의 황우석 교수는 체세포인간복제배아를 생성하여 줄기세포를 얻는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하였다. 2005년 5월 그는 184개의 난자를 공여 받아 난자핵을 제거한 후 환자들의 체세포 핵을 주입하고 미세한 전기자극을 가함으로써 세포분열이 시작된 배아를 만들었고, 이를 배반포기 단계에 파괴하여 11개의 줄기세포를 얻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는 2살부터 56살에 이르는 환자들의 체세포에서 얻은 핵을 사용하여 그와 동일한 유전인자를 갖춘 줄기세포를 얻었으므로 줄기세포 이식 치료방법에서 가장 커다란 난제였던 면역거부반응을 극복할 수 있는 과학적 개가를 이루었다고 발표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언론들은 생명윤리학적 판단을 유보한 채 연일 황 교수의 연구업적을 대대적인 생명공학의 개가라고 보도하였고, 정부의 책임자나 황 교수 스스로 황 교수의 실험결과가 마치 막대한 생명공학 특수(特需)를 불러올 수 있는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부풀렸다. 얻어먹기만 하던 민족이 이제는 생명공학 기술을 나누어 주는 생명공학의 종주국이나 되는 것같이 보도하였다. 황 교수의 연구실은 국가 기밀 급의 보안조치가 취해졌고, 그는 중요인사로 신변보호를 받는가하면, 대한항공은 10년간 대한항공 일등석을 이용할 수 있는 특전을 황 교수에게 베풀었다. 그러나 황 교수는 2005년 6월 7일 관훈클럽 토론에서 자신의 연구가 난치병 치료를 향한 인류의 여정에서 정확히 어느 지점에 도달했으며, 앞으로 남은 과제가 무엇인지 공개하기를 꺼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상 치료용 복제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종교계 및 생명윤리학계의 비판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미 유럽 등지의 국가에서는 1991년경부터 생명공학시대의 위기를 감지하고 “생명과 배아 보호법“을 발효시켜왔다. 독일의 경우 인공수정을 한다할지라도 잉여 배아의 생산을 법으로 금지하였고,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필요할 경우에는 자국에서 생산하지 못하도록 조치했으며 정 필요한 경우 외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하도록 조처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인간 배아를 치료용 줄기세포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산하고 파괴하는 행위는 독일의 경우 불법적인 행위이다. 미국은 국민이 낸 세금을 가지고 가장 약한 생명의 생명권을 유린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하여 2001년 정부로부터 연구비 수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모두 차단한 바 있었다. 부시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인 레온 카스는 근본주의자가 아니라 유태인이며, 그는 의학자로서 역사 깊은 생명윤리 전문연구 기관인 Hastings Center의 창설자이기도 하고, 시카고 대학과 죠지 워싱턴 대학의 교수이다. 사실상 한국 언론은 배아의 생명권을 인정하고 이를 보호하려는 윤리학자들은 그들의 입장이 진보이거나 보수이거나를 막론하고 거의 동일한 입장을 보여 왔다는 사실에 무지했거나 고의적으로 은폐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여론의 보도태도는 우리사회에 생명윤리학적인 논의 없이 비윤리적인 현실을 수용하게 하는 커다란 혼란을 불러온 책임이 있었다고 본다.

 

3. 연구자의 책임적 생명윤리의식의 결여

만일 실험실에서 과학자들이 생명조작을 통한 실익만을 생각한다면 부담스러운 생명윤리적 논리라든지, 미래사회에 대한 생태적 책임이나 세대 간에 넘겨줄 생명의 안정성을 지키려는 법적 책임의 문제는 매우 쉽게 폐기될 수 있다. 생명조작 행위가 생명의 안정성과 미래사회에 심원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윤리적 숙고가 결여된 단순한 판단과 근시안적인 실익논쟁은 종국에 가서 엄청난 재난과 비용을 치러야 할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세계의 각 나라들은 자율적으로 생명공학 연구의 윤리적 정당성을 갖추기 위하여 일정한 사회적 합의에 근거한 법적 제한 조치들을 마련함으로써 생명윤리가 결여된 생명공학의 무모한 실험주의를 제한해 왔다. 유럽 연합의 경우 배아를 고의적으로 발생시켜 이를 파괴하여 얻을 수 있는 배아복제줄기세포 연구는 지금까지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생명윤리학적 태도는 유럽에 그치지 않고 2005년 3월 8일 유엔 본회의에서도 치료용 복제를 금해야 한다는 결의안이 84대 34로 통과되었던 것이다.

생명의 안정성을 고려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자연적인 방법에서 벗어난 조작기술에 의한 인간생명 산출은 사실상 새로운 인간종의 출현 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이다. 생명공학자들은 그들의 실험이 단지 줄기세포를 얻어서 불치의 환자들을 치료할 목적을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인간복제배아 발생 기술은 인간 복제의 물길을 터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비록 개체 생명을 발생시키는 복제인간의 생성에 대해서는 온 세계가 반대하는 여론에 그들이 찬성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기술의 부분적 적용은 생명공학자의 실험실에서 "벌써"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중의 논리가 내재되어 있다. 개체복제는 반대이지만, 단계적 혹은 부분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연구는 같은 방향을 가진 것이며 그 연장선상에서 인간의 몸과 정신을 조작 지배할 수 있다는 생명공학의 위험을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수행하는 연구 결과가 불러올 위험을 예견하고 비판하고 감시하는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연구자의 사고와 판단, 그리고 그의 연구실은 책임적인 생명윤리의 부재를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4. 연구자들에 의한 생명개념 왜곡

과학자들이 생명을 조작적으로 발생시켜 놓고 생명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들의 생명 개념에 들지 않는 생명을 조작 발생시키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논리를 결과한다. 예컨대 인공 자궁을 만들어서 장기이식용 인간을 발생시키는 행위는 사실상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방식의 확대과정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일 수 있다. 이미 짐승을 이용하여 뇌 없는 몸뚱이만 발생시킨 실험이 있었고, 쥐에다가 사람 귀를 발생시킨 실험도 있었다. 키메라 생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인공수정시술을 승인한 세계는 당시 생각하지 못했던 잉여배아 실험 논쟁으로 이어졌고, 잉여배아 논쟁은 이제 체세포핵치환 배아복제 실험 논쟁으로 이어졌으며, 그 다음에는 이미 생성이 허용되고 죽이기로 작정한 배아를 이용한 실험의 문을 열어주게 되었다. 이제 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못할 것이 없을 것이지만, 인간이 윤리적인 존재라면 법적 규정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무슨 일이든지 해도 된다는 주장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련의 생명공학자들이 주장하는 14일 이내의 배아는 생명이 아니라 세포덩이라는 주장, 수정을 거치지 않았으니 수정란이 아니라는 궤변이 일단 받아들여지면 그 궤변의 확대적용 영역은 매우 광범위해 진다. 이런 기능론에 따른 생명개념 설정 논리들을 허용하면 앞으로 인간에 대한 개념 설정 기준이 자꾸 바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유럽이나 미국의 생명과학자들은 매우 어리석은 사람들로 간주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배아를 생명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과학자들은 14일 설에 그치지 않고, 3개월 설, 혹은 출생 설을 주장할 수도 있으며, 황우석 교수의 주장대로 수정과정을 거치치 않은 생명은 인간이 아니니 짐승이나 물질처럼 사용하거나 응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비인간은 비생명이라는 단순 도식에 빠지는 오류이다. 이런 식으로 생명개념의 가파른 경사면에 발을 일단 디디면 어디까지 미끄러져 내릴는지 아무도 모른다. 당시 황 교수는 줄기세포만을 얻기 위한 생명조작이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사실상 황 교수가 생명의 나무의 열매를 딴 행위를 응용한 일련의 생명공학자들의 시도들이 인류사회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일련의 과학자들은 수정란을 생명으로 보는 생명권 옹호주의자들을 향하며 서구 기독교적 인간론에 매여 생명공학의 발목을 붙잡는 신화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들은 황 교수가 줄기세포를 얻기 위하여 정작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하여 깊이 관심하지 않는다. 인간복제배아를 생성시키면서 이미 그 배아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규정하고 있는 황 교수는 배아의 생명의 존엄함과 권리에 대한 질문 자체를 14일 설에 따라 미연에 봉쇄하려고 한다. 그는 그가 만든 배아를 생명의 우연성과 자율성, 생명의 독립성,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이란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대상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생명이긴 생명인데 권리도 존엄성도 없다. 인류사회가 지켜온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근대적 이해가 황 교수의 연구실에서 태어난 배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권을 지켜온 인권 개념은 우리 안에 있는 거대한 홍수를 막아 인간다움을 지켜온 댐과도 같은 것이다. 황 교수의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기독교 공동체는 “치료용이 아닌 실험용 줄기세포”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인간생명에 대한 신뢰와 인식의 구조를 바꾸라는 요구를 받고 있는 셈이다.

모든 인간 생명에는 상황과 관련 없이 생명권·인권옹호의 개념이 적용되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유럽연합과 국제연합의 배아 보호에 관한 선언문은 한결같이 1948년 합의한 유엔의 인권선언문을 배아 보호의 중요한 생명윤리학적 전거로 삼고 있다. 이 정신을 외면하고 있는 생명공학자들이 실험실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 구조를 바꾸려는 것은 다름 아닌 주·객의 비인간화, 즉 자신만이 아니라 실험 대상이 된 생명에 대한 생명경외의 영역을 벗어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인간”이 인간생명을 발생시키고, 그 존재이유와 목적을 규정하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도 정당화할 수 없는 비윤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공학자들이 실험용으로 생산하고, 관찰하며, 죽여 폐기해온 몰모트와 동질의 존재로 인간생명의 초기단계를 비하하고, 비인간화하며, 수단화하는 행위를 우리는 결코 긍정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하여 서구의 나라들은 치료용 체세포복제배아 산출을 몹시도 꺼려왔던 것이다.

 

5. 수정란의 도덕적 지위 논쟁

이러한 행위의 부도덕성을 감출 수 있는 유일한 주장이 바로 수정란의 도덕적 지위를 박탈하는 것이다. 이것이 14일 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가진 의도이다. 그들은 그들의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14일 설을 주장하고 면책특권을 얻으려 한다. 인간의 초기단계 생명을 비인간화하고, 비생명화함으로써 실험실의 자료로 삼기위해 인간 생명 초기단계를 몰모트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14일 설을 주장하는 목적이다. 이러한 주장은 생명의 통전성을 단계론으로 단절시키고, 생명의 연속성을 부정함으로써 생명의 존재론적 가치와 그리고 유전적 통전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목회현장에서 생명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아직 증명되지 않는 치료방법의 개발을 위하여 생명의 존재론적이며 신적인 존엄성을 부정하는 일은 매우 반기독교적인 것이다.

황 교수는 자신의 실험에서 난자의 외피만을 사용했고, 체세포 복제를 이용한 배아생성이므로 수정란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나는 이런 견해는 황 교수와 같은 전문적인 생명 과학자들이 주장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 방법을 이용하여 돌리라는 양이 엄연한 한 마리의 양으로 태어났고, 돌리는 폴리라는 딸을 낳았기 때문이다. 비록 자연의 방법에서 유리된 조작 과정으로 인하여 생명선에 손상을 받아 조로(早老)했지만 돌리를 양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월멋 박사의 경우 양의 체세포복제배아 생성에서는 277케이스 중에서 29개의 배아를 얻었으므로 배아 생산에 있어서 10%를 상회하는 성공률을 이루어 냈다. 그 배아를 착상시켜 얻은 돌리의 생명은 29개 배아 중 유일하게 생존했으므로 생존율 3%, 전체케이스에 비한다면 생존율 0.36%의 생명이었다. 황 교수의 경우 이런 실험을 인간에게 적용한 것이다. 나는 이런 방법으로 만의 하나 인간이 복제되어 태어난다하여도 그는 엄연한 인간이라고 본다. 다만 생명공학자들의 무책임한 조작과 예단에 의하여 운명적으로 제한된 복제 인간으로서 불행한 존재일 것이라고 예측할 뿐이다. 그는 의료진들로부터 제공받은 난자와 환자의 체세포를 이용하여 배아단계까지 인간을 체세포 복제를 해 낸 것이며, 그 복제된 배아는 파괴될 목적으로 예단되어 있다. 나는 이 점을 비인간적이며 비윤리적인 것이라고 명료하게 지적한다.

그러므로 황 교수가 윌멋 박사가 사용한 방법과 유사한 체세포 복제 방법을 사용하여 배아를 얻었으므로 이 단계에서 인간 배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윌멋 박사의 실험과 유사한 경우를 예측한다면 이 배아들을 착상시켜 복제인간으로 발생시킬 경우 기형과 유산 및 태어난 후 죽은 사례까지 추정한다면 과히 태아집단살해와 방불한 경우가 될 것이므로 황 교수 스스로 감히 배아를 복제인간으로 발생시키는 것이 너무나 야만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황 교수에 설득당해 황 교수가 만든 인간복제배아가 수정란이 아니니 생명이 아니라고 한다면, 만의 하나 이런 실험의 연장에서 복제인간이 탄생한다 해도 그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주장이 된다. 복제인간의 생명의 안정성은 매우 낮으므로, 복제인간 생성을 시도하는 행의는 반인륜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지만, 언젠가 복제인간이 출현한다면 우리는 그도 결국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힘입어야 할 인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비인륜적인 복제 행위의 출발선을 황 교수가 이미 통과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비자연적인 생명산출과 파괴라는 도덕적 비난과 책임을 면탈 받을 수 있는 논리는 복제배아의 파괴를 정당화하면서 동시에 복제인간 출생은 비인간적인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인간복제는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대중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복제인간으로 발생될 가능성이 있는 복제배아의 파괴를 당연시하고 정당화하는 논리를 형성하고, 동시에 복제배아의 생명의 존엄성은 대중의 의식 속에서 당연히 거부되고 증발되어 삭제되는 것이다. 하지만 복제배아의 생성자는 황 교수이며, 그 복제배아는 자연의 생명으로서 타고난 것이 아니라 황 교수의 목적에 이미 존재 이유가 제한되어 있고, 그 복제배아는 황 교수의 손에서 파괴되어 줄기세포의 숙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죽어야 할 생명인 것이다. 황 교수의 연구실에서 이 불행한 배아들은 생명을 얻어 발생된 지 5-6일 만에 필연적인 죽임을 당하도록 지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에 일부 교회가 동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나는 깊이 놀라고 있다.

 

6. 노화와 죽음을 거부하는 인본주의적 문화

황 교수가 도덕적 비난을 감내하면서 산출해 놓은 줄기세포를 이용한 연구는 단순히 불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만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생명공학자들이 꿈꾸는 미래 세계는 가장 보편적인 재생 불가능한 불치병이라 할 수 있는 노화와 죽음을 극복한 세계이다. 이미 과학자들은 줄기세포 연구에 있어서 줄기세포가 특정 세포로의 분화하는 과정을 역으로 되돌리는 실험들을 하고 있다. 세포의 생명선을 연장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아마도 인간의 수명은 최소한 백 오십년을 상회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오늘날의 불치의 병 치료라는 개념은 재생 불가능한 특정한 질병을 가리키는 개념이지만, 이후 장기교체와 노화방지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연구가 진척된다면, 이는 결국 생명 공학적으로 개선된 새로운 인간 종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다. 유전자 조작기술을 사용하여 미시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몸을, 그리고 신경과학적으로 인간의 정신을 개선하고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하여 그것이 놀라운 개가라 예찬하며 생각 없이 찬사를 보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할 수 있는 것이 모두 가능하며 정당하다고 주장한다면 인간은 윤리적 기준 없이 자신의 본성을 변개시킴으로써 자신의 유한성을 망각하게 만들고 자연과의 관계에 이상을 불러오게 되어 결국 자신의 본성과 하나님을 잊게 될 것이다.

건강하게 오래 살려는 인간의 욕구를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세포의 노화를 방지하는 신약이 개발된다면, 이 약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는 반면 자연의 생명간의 균형(equilibrium)을 깨는 결과를 초래하여 더 커다란 생명계의 대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고, 이런 우생학적 생명권을 누리기 위하여 당연히 국가간의 혹은 인종간의 보이지 않는 유전공학적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불균형으로 인하여 지구상에는 평균수명이 40대에 그치는 나라들이 있고, 평균수명 70년을 상회하는 나라들이 있다. 결국 생명공학적 연구가 가져다 줄 혜택은 우선적으로 돈이 많은 사람들이나, 강하고 부유한 나라의 국민과 인종들만 누릴 새로운 특권이 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지구상에 불필요한 인종이라고 생각되는 존재들은 샘플들만 남기고 누군가가 도태시키려 할지도 모른다. 이런 공상과도 같은 사고의 출발점은 황 교수의 실험실에서처럼 윤리를 무시하는 과학주의자들이 인간배아의 생명권을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세계의 과학자들은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치료효과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밝혀왔다. 그러나 배아를 파괴하면서 얻은 줄기세포는 치료용 그 자체가 아직 아니다. 줄기세포는 인간 몸을 구성하고 있는 약 220여 가지의 세포로 분화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떤 특정한 세포로 발생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만능세포의 기능과 발생학적인 과정에 미치는 미세한 과정을 세밀히 파악하고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동물을 이용하여 연구해온 그 결과들을 가지고 임상적 치료의 안정성을 얻기 위하여 만능세포의 분화를 정확히 유도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해야만 한다. 이제는 인간을 실험대위에 올려놓고 실험을 해야 한다. 이런 실험과 기술이 예측한대로 적절하게 이루어질지에 대해서 사실상 세계는 환상적인 기대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동안 실험을 통하여 밝혀진 사실들이 보여주는 지표는 결코 낙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입한 세포들이 의도했던 세포로 성장하기 보다는 다른 유형의 세포로 전이될 확률이 매우 높고, 더구나 오래 노출되었던 줄기세포는 암세포로 전이될 확률이 높다는 연구결과도 최근 발표되었다. 노화와 죽음을 넘어서려는 노력은 노화와 죽음을 통해 새로운 세대와의 생명교체의 법을 부정하는 인본주의적인 망상이다. 여기에는 생명평형에 대한 책임은커녕 기존 세대의 이기성과 생명질서를 부정하고 오로지 생명공학의 특혜를 받은 이들의 낙원을 기대하는 인본주의적 환상이 지배한다.

 
 
7. 생명의 자리 자궁의 도구화

여성의 몸에 배란 촉진제를 놓고서 난자를 채취하는 일은 여성의 몸에 무리를 주어 심한 경우 자칫 잘못하면 임신 불능에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절차이다. 이런 까닭에 서구사회의 연구윤리의 한 항목에는 난자를 제공하는 이는 난자를 제공하는 행위로 인하여 어떠한 이해관계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더구나 이렇게 생성된 수정란이 파기될 것과, 그 수정란을 파기한 후에 채취한 줄기세포는 계속 배양되고 증식되어 연구용으로, 혹은 상업용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도 인지시켜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원칙들은 사실상 무수한 난자를 생명생산 이외의 목적으로 채취하는 행위를 제재하기 위한 조건들이다. 그러나 황 교수의 연구실에서 채취되는 난자들의 사용목적이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수정란이 아니라는 이유로 만일 여성의 난자에 짐승의 핵을 주입한다든지 짐승의 난자에 인간의 체세포 핵을 주입하는 행위는 참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왜곡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장엄한 세월동안 지켜져 온 자연의 질서를 인위적으로 왜곡하는 행위로서 단지 인간의 호기심과 우연적 결과를 얻으려는 실험정신에 촉발되는 것이니 어찌 생명의 존엄함을 지키려는 것이라 할 것인가.


세계의 과학자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공동연구를 하자는 제안이 있다고 한다.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줄기세포은행을 창설하겠다는 프로젝트도 나왔다. 줄기세포 은행이란 인간 초기 생명을 마음껏 조작할 수 있는 나라, 그런 행위가 법적으로 보호받을 뿐 아니라 막대한 정부의 연구비 지원까지 받을 수 있는 나라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법으로 금지된 치료용 복제배아 생산국이 된 우리나라가 정말 좋은 나라라고 보아야 할까. “메이드 인 코리아 줄기세포“가 황우석이라는 표를 달고 세계 시장을 석권한다면 그것이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영광이고 자랑스러운 일일까.


자국에서 윤리문제에 걸려 구할 수 없었던 줄기세포를 공급받은 다른 나라 과학자이 우리를 고마워할까. 아니면 생명윤리를 모르는 야만의 나라라고 우리를 비웃을 것인가. 세계줄기세포은행이 설치되면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줄기세포 숙주가 될 난자들을 제공하고, 황 교수의 연구실에서 생산된 배아들은 줄기세포 추출용으로 전락되어 대량으로 학살을 당하게 될 것이다. 여성의 자궁을 생명창조의 신비의 자리로 보지 않고, 줄기세포를 채취하는 숙주용 난자로 보는 나라, 초기 인간 생명인 배아를 존중하라고 가르치기는커녕 파괴하는 것이 오히려 이타적인 행위일 수 있다고 가르치는 세계는 국민들에게 생명의 존엄한 원리를 부정하고, 생명을 기능주의적으로 이해하게 하여 생명 경시 풍조를 불러오게 할 것이다.

 



V. 생명윤리 없는 생명공학/ 생명윤리와 함께 하는 생명공학


1. 생명윤리 없는 생명공학

생명윤리학적 숙고 없는 생명공학은 몇 가지 비전문적 이해관계 구조의 공모를 통하여 수행될 우려가 있다. 질병치료 방법이 개발될 경우 수혜자가 될 것을 기대하는 이들의 희망, 생명공학자들의 야심 찬 과학주의, 정부 관료들의 국수주의적 자긍심, 그리고 이면에서 작용하는 상업주의,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그리고 대중적 환호를 기대하는 종교 공동체 지도자들의 무책임한 동조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실질적인 현대 생명공학의 촉진자들은 제약회사들이다. 영국의 경우 제약회사들의 컨소시엄이 후원하는 영국 최대의 생명공학 기지인 생어연구소(Sanger Institute)에 투자하는 민간 자본이 연간 5000억원을 상회하고 있다. 1998년 톰슨과 기어하트의 줄기세포 채취 및 배양 연구 자금을 댄 것도 제론(Geron)이라는 제약회사였다. 전대미문의 치료 방법을 개발한다는 명분아래 업적을 이루어 내려는 과학자나 정부 관료들, 야심 찬 제약회사들의 의도들이 배수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오늘의 생명공학은 생명윤리라는 브레이크를 떼어버리고 가속 페달만 밟고 있다. 이렇게 겹쳐진 관심들은 커다란 압력과 연대구조를 형성하여 제국주의적 생명공학의 우위를 득하려는 국가적 전략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논쟁을 제기하는 것은 간혹 권력과 자본의 미움을 받거나 대중의 차가운 시선을 받을 우려가 많다. 희망찬 생명공학적 기대와 환상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로 매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과학주의에 한때 매료되었던 독일이나 일본을 비판했던 인류사회는 생명윤리 없는 생명공학을 그대로 수긍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록 대다수의 합의가 있다할지라도 그 합의를 통해서 제거될 수 없는 것도 있다. 생명권, 인권은 민주적 합의나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으로 제거할 수 없는 불가침의 생명 기본권이다. 우리가 인간다움의 기준을 가지고 전체주의를 비판해 온 역사를 기억하는 존재들이라면 전체의 합의라는 것이 언제나 정의롭고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난 역사에서 충분히 배운 셈이다. 그런데도 여론에 따라 밀리거나 밀고 나가게 된다면, 돈이 되고 건강만 얻으면 무슨 일이라도 해내는 용감한 민족으로 우리 스스로를 낙인찍히는 것을 허용하는 경우가 될 것이다. 우리가 설령 생명공학의 종주국이 된다 해도 우리는 생명윤리 없는 생명공학의 지지자들로 살아간 흔적을 남겨두게 되어 우리 후세대에게 생명간의 평형을 깬 후기인간(posthuman) 시대의 도래를 앞장서서 불러온 오류로 인하여 정신적이며 도덕적인, 참으로 매우 커다란 정신적 부담을 안겨주게 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2005년 황우석교수의 허위논문 조작사건은 날조되고 조작된 생명공학의 미래가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비극으로 종결지어졌다. 기본적인 일반의 신뢰를 조작한 황교수 연구팀의 몰락은 우리사회 전반에 나타난 검증적·반성적 숙고 없는 민족주의, 윤리적 정당성을 고려하지 못하는 실적주의, 전문 지식인의 무책임한 여론선동 행위, 세계 과학계를 기만한 일부 한국 과학자들의 허위의식, 종교집단의 합리적 판단 없는 파당적 편들기, 양심적 판단 없이 대중적 흐름에 편승한 기회주의적 종교인의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이 모든 오류는 생명윤리 없이도 생명공학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망상의 결과였다. 그러나 생명윤리의 안내 없이 수행되는 오늘날의 생명공학은 부도덕한 연구 집단의 자의성과 무책임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했다.

 

2. 교회의 생명윤리학적 설득력 확보가 관건

따라서 생명윤리 없는 생명공학의 폐기와 더불어 “생명윤리와 함께하는 생명공학”이라는 원칙으로 우리가 되돌아 가야한다. 여기서 인문사회학과 종교학 그리고 기독교 생명윤리학은 현대 생명공학이 나아갈 길을 조명해줄 수 있는 생명윤리학적 지표와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제는 생명공학자들에게는 판단의 기준이 될 것이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생명의 파수군의 역할이며, 일반들을 위해서는 생명공학적 현실을 인식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윤리적 판단을 숙고할 수 있는 정보와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다른 인문과학 집단과는 달리 종교, 특히 기독교 신앙은 2000년의 대사회적 관계형성을 위한 노력과 체험의 역사가 있으므로 그 어느 집단보다 이 과제를 바르게 수행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다만 이 과제는 기독교 사회 윤리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존하는 것이지 전적으로 교회내적 가치와 삶의 양식인 기도나 환상이나 은혜체험으로 대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어거스틴 이후 기독교 신앙 공동체들이 운용해온 신앙과 이성의 두 축을 바르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 교권을 둘러싼 기독교 지도자들의 영웅주의가 바른 과학적 지식과 신학적 원칙을 배제하고, 설익은 기독교의 대변인이 될 때 기독교의 지성적/과학적 공신력은 거듭 거듭 추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과 독일의 교회들과는 달리 대사회적인 문제들이 야기할 때 한국교회는 과학적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을 과학과 윤리의 언어로 의사소통하여 하나님의 창조와 사랑의 복음을 증거 하는 데 목적을 두기보다는 일회적인 대중선동적인 집회를 통해 정치적 행위를 하는 데 많은 힘을 쏟고 있다. 그 전문지식의 결여로 인해 상황파악도 못한 채 공공의 세계에 미성숙한 판단을 하나님과 교회이름으로 대변하는 일은 매우 무책임한 일이다. 이런 무책임은 몇몇의 영웅주의적인 교회지도자들이 집단의 힘을 과시하는 시위대의 선봉이 되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차원에 그치고 말뿐 사회과학적이거나 생명공학적 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판단의 결여로 인해 대중적 조롱과 비난을 등 뒤에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점에서 나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정치, 경제, 문화, 생명공학의 제 분야의 전문가인연 하는 태도들은 매우 부적절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독일교회 모델을 따라 전문 학자들의 객관적인 연구결과와 신학자들의 주체적인 판단을 참고하여 교회의 입장을 교육백서로 표명하여, 자신들도 배우고, 교회의 대사회적 입장 표명에 있어 대내외적인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사회 내 지식인과 과학자들과의 토론과 합의를 거쳐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노력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런 방법이 아닌 각개전투식의 분열된 입장들, 소영웅주의적인 비전문적 편견조장, 아무런 실천적 노력이 뒤따르지 않는 기관명의의 성명으로 그치는 문제제기, 대중을 앞세워 선동적 시위방식으로 정치세를 과시하는 행위는 그 성격자체가 몇몇 연사의 소영웅주의를 낳는 데 그치고 마는 전근대적인 의사표현 방식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생명윤리 사상의 실천성을 확보하고, 이를 의식화함으로써 인식공동체를 확대해 나가는 데에서 오늘의 합리적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교회의 과제이다.

 



3. 기독교 생명윤리학의 역할과 과제

생명 공학시대를 맞아 기독교 생명윤리학의 과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창조세계와 생명세계의 통전성을 보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파괴는 생태학적 위기를 불러오고, 생태학적 위기는 생명세계의 위기를 불러온다. 오늘의 무신론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생명공학자들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훼손하더니 급기야는 인간의 자기생명을 분석하고 실험대상으로 삼고 있다. 자식을 잡아먹고 죽이는 아비처럼 생명을 발생시키고 죽이고 파괴하니 정신적으로 가히 착란적이라 할만하다. 이런 세계에서 기독교 생명윤리학은 세 가지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첫째는 예방적인 과제로서 생명의 파수군의 역할이다. 현대 생명공학의 동향을 모니터링하여 생명의 통전성을 해하고 존엄성을 파괴하는 실험행위들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일이다. 둘째는 생명의 변호사 역할이다. 죽임을 당하게 된 생명, 업신여김을 당하는 생명, 파괴되는 생명, 버려지는 생명에 대하여 그 권리를 되찾아 주고 옹호하는 과제이다. 셋째는 생명의 전사의 역할이다. 이는 대량 살상과 생명계에 광범위한 위해를 끼칠 생명 공학적 악에 대하여 영적인 전사로서 싸우는 기독교 생명윤리학적 과제이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미국은 다양한 생명윤리학 연구소를 세우고10) 전문인력을 키워내며, 현대 생명공학의 향방을 예측하며 예방적 작업과 비판적 작업, 그리고 법적 및 제도적 장치를 통한 악의 제거에 힘을 쏟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 생명윤리학의 과제는 상황분석과 과학적 및 신학적인 전문 작업을 통하여 작성된 연구보고서들을 커리큘럼화하여 대학에서 가르쳐져야 하고, 더불어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의식형성을 위한 교육 자료로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 형성된 전통적인 생명윤리학의 관점을 확대하여 현대 이성적 작업의 결과들을 분석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일은 다양한 학문간의 교제적 작업을 필요로 한다. 더불어 간학문적인 연구결과를 신앙 공동체 안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교회는 점차 사회의 중론에서 소외되어 게토화 될 우려도 적지 않다. 보다 효율적으로 기독교 생명윤리학적 논의를 확대하려면 이런 학문적 작업과 연계된 목회적 과제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생명윤리 학자들과 목회자들 사이에 부단한 대화와 토론이 이어져 보편적인 생명가치 인식의 수위를 높이기위한 공동작업으로 이어져야 한다.



 

<주석>

1) 이 논문에서는 2004/5년 황우석 박사의 인간배아복제 줄기세포 연구 사건을 주요한 사레를 삼아 현대 생명윤리학의 논점들을 살펴보려 한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결과 발표는 세계를 두 번 경악시켰다. 한번은 생명공학의 우수국가의 지위를 불러오는 데에서 다른 한번은 도덕성을 결여한 생명 과학자의 조작으로 인하여 세계를 경악시켰다. 이 문제는 다양한 차원에서 한국 생명공학과 생명윤리의 수위를 점검할 수 있는 사례라 생각된다.

2) EKD Dokumentation, 1993.

3) 네델란드는 1952년 의사가 결핵 말기 환자였던 자기 형을 죽도록 조치한 Eindhoven 사건 이후 조력사를 시행한 의사들을 기소하지 않는 방향으로 노력해 왔다. 이어 1982년 조력 자살 가이드 라인을 마련했고, 1984년 네델란드 대법원은 1982년 일어난 최초의 안락사 사건을 심의한 후 의사에게 무죄를 선언하였다. 2000년 네델란드는 존엄사를 의미하는 안락사를 합법화하였다. Jocelyn Downie, "The Contested Lessons of Euthanasia in the Netherland" Heath Law Journal vol. 8 (2000) 119-139. 이 보다 앞서 미국 오레곤(Oregon) 주에서는 1994년 국민투표에서 51: 49로 존엄사를 입법화하였으나 1997년 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며 묻는 국민투표에서는 60: 40으로 존엄사를 합법화시켰다. 반면 오스트랄리아 북주(Northern Territory)는 1996년 존엄사를 합법화시켰다가 4건의 안락사가 시행된 이후 상원에서 이를 폐지했다.

4) Sanger Institute는 향후 10년 동안 일정한 역랑을 유전정보를 분석하는 일에 집중할 것을 밝히고 있다. 참조 http://www.sanger.ac.uk

5) Phillip Hefner, "생명문화적 진화와 창조된 공동 창조자,“ 종교와 과학(서울: 동연, 2002) 305이하.

6) Committee on Medical Ethics: Episcopal Diocese of Washington, D. C. Assisted Suicide and Euthanasia: Christian Moral Perspectives: Washington Report(Washington D. C: Morehouse Publishing, 1997).

7) Pope John Paul II, The Gospel of Life: The Encyclical Letter on Abortion, Euthanasia, and the Death Penalty in Today's World(New York: Random House, 1995).

8)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입장은 2004년 교리장정에 잘 드러나 있다. 연합감리교회 장정 THE BOOK OF DISCIPLINE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2004년) 에는 분명히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가) 동성연애를 행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2004년도 장정 304조 3항) (나) 그러므로 자신이 동성연애를 한다고 공언한 사람은 사역후보자로 허입될 수 없으며, 교역자로 안수 받을 수도 없으며, 연합감리교회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파송 받을 수 없다. (2004년도 장정 304조 3항 - 2000년도 장정과 동일함 ) (다)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결혼을 연합감리교회 사역자들이 집례해서는 안 된다. (2004년 장정 341조 6항 - 2000년도 장정과 동일함). 이와 동시에 연합감리교회는 “사회원칙”( "Social Principle", 1976)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인격적 및 목회적 책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전쟁, 인종, 노동, 평화, 오염, 자원 보호, 성차별, HIV 문제 등등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그 중에 인간의 성문제를 다루면서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목회적 지침도 제시했는데 요지는 그들의 인격도 존중해 주고 목회적 돌봄의 대상으로 여겨야 할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하거나 인권을 침해하는 강압적 행위를 행사하지 말 것과 그들을 사회에서 고립시키는 행위를 금하는 동시에 그들의 인권을 옹호해 줘야하고 우리 사회 일원으로 받아 돌보고 치유해 주어야 할 교회의 성스러운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9) 우리나라의 경우 뒤늦게 2000년대에 들어와서야 생명윤리법안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국가생명윤리위원회에는 특이하게 장관 위원이 7명이나 들어가도록 되어 있고, 심지어 실제적인 이해 당사자들인 과학자들이 삼분의 일이나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2004년 국회를 통과한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은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예견이라도 한 듯 치료용 체세포복제 배아의 생산을 허용하고 있고, 심지어 종간 교잡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10) 예를 들면 죠지워싱턴 대학에 소재하고 있는 Kennedy Institute of Ethics, 그리고 생명윤리학 전문 연구기관인 뉴욕의 Haestings Center를 비롯하여 수백 개의 윤리문제 연구소들이 전 세계에서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들을 진행시키면서 활발한 연구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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